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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잣말

  • 작성자 평평함
  • 작성일 2012-12-29
  • 조회수 329

1.

이상 평전이요. 여러분. 발단은 이상평전이었어요.
젊은 시절에 빠져든 이상은 결국 청소년기의 유치한 기억으로 남나요?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누구나 자신의 이상을 가질 권리가 있으니까요. 고은 시인의 이상은 청소년기의 부끄러운 기억이였고 나의 이상은 그렇지 않은 거죠. 내가 80살 노인이 되더라도 내 서가엔 이상 전집이 그대로 남아있을테니까요. 이상 평전을 읽고 내가 내린 결론은 그게 다였어요. 더 이상 덜어낼 것도 보탤 것도 없었는데, 속은 여전히 편치 않더군요. 왜 그랬을까요.
아마 누군가 친 각주때문이겠죠. 그 시절 군사 정권의 독재에 저항하던 사람들에겐 어용작가보다 순수문학만을 추구하던 부류가 눈엣가시였다는 각주. 얼마나 눈엣가시였으면 중상모략도 망설이지 않았나요?
2.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는 격변의 연속이었죠. 사실 어느 나라가 그렇지 않았나싶지만은. 일제에서 벗어나자마자 나라가 반으로 갈라졌네요. 북에서는 충실한 자리 굳히기와 피비린내 나는 숙청이 있었고 남에서는…북한과 크게 다르지 않네요. 한민족 아니랄까봐. 수많은 독재자들이 있었고 무고한 피바람이 불었네요. 이념과 사상이 충돌했고 많은 사람이 아팠네요.
그 아픔이 글에 스며든 게 별로 놀랄 일은 아니겠죠. 나는 그걸 리얼리즘이라고 배웠어요.
3.
여기서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고통에는 단위가 있나요? 고통은 나누면 반이 된다지만, 정확히 몇 킬로, 몇 그램. 잴 수 있나요? 민주화 과정에서 부모을 잃은 나의 고통과 병으로 죽어가는 동생을 지켜봐야하는 당신의 고통 중 무엇이 더 고통스럽나요? 두명을 잃었으니 내가 더 가슴 아픈가요. 아니면 무엇보다 동생을 사랑한 당신의 고통이 더 큰가요. 민주주의라는 명분이 있으므로 나의 고통이 더 숭고스러운가요. 동생을 위해서 무엇이라도 하리라 작정한 당신의 형제애가 있어 당신의 고통이 더 숭고스러운가요.
각주가 말하길, 재볼 것도 없이 나의 고통이 더 크다군요. 내 고통은 무엇보다 숭고하다고 단언하네요. 그 뿐인가요. 내겐 당신을 손가락질 할 자격도 있다고 일러주네요. 내가 미워하고 경멸해야 하는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아니던가요?
4.
그 부조리를 발견한 16살은 얼마나 큰 충격에 휩싸였을까요. 그래서 얼마나 멍청한 짓을 저질렀을까요. 16살의 멍청함이 얼마나 대담했냐면, 나는 리얼리즘의 죽음을 선포했어요. 우습지만 그랬어요.
이상 평전의 찝찝함이 아직 남아있고 리얼리즘이니 포스트 모더니즘이니 하는 것들이 머리 속에 구겨넣어지고 결정적으로 담임의 강요로 통일 백일장에 제출할 소설을 쓰는 16살이었으니까요. 여러분. 좆같은 담임. 좆같은 분단. 좆같은 백일장. 합해 좆같은 현실을 반영해봤자 좆같은 글과 부조리밖에 더 나오겠냐는 게 16살이 생각할 수 있는 그럴듯한 진리였으니까요. 이상 평전과 화려한 휴가와 문학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통일 백일장. 여러분, 저는 전쟁통에 모든 걸 잃어버리고서도 러브 앤 피스나 외치는 호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을 쓰면서 리얼리즘의 화형식을, 더 나아가 문학은 정치에서 한 걸음 떨어져 쓰여야 한다는 자세를 가지게 됐습니다.
5.
여기 불편하고도 노골적인 소식 하나가 있어요. 정권교체 선언문에 서명한 시인과 작가들을 선관위에서 고발했다는 소식이요. 불편하군요. 30%의 표밖에 개표되지 않은 상황에 당선 확실이라는 딱지를 붙였던 언론보다. 노골적이군요. 정부에 반대하는 것들은 종북빨갱이라는 당 대변인의 무식함보다.
어찌나 불편하고 노골적인지 가부좌튼 내 자세를 바꾸게 할 정도로요. 신선처럼 살라는 주제넘은 충고가 부끄러워질 정도로.
6.
대선 이후로 내게 남은 건 무기력뿐이고 화형식이 남기고 간 잿더미뿐이네요. 무기력하게 잿더미를 뒤져본다 해도 쓸만한게 나올 것 같지 않아요. 선언문은 독재 정권에 저항하던 문인들이 죽지 않았단 걸 보여줬죠. 그렇다면 부조리또한 죽지 않았나요? 정부가 아닌 애꿏은 이에게 겨눠진 총부리는 건재한가요?
기세등등하던 2012년은 이제 이틀밖에 남지 않았네요. 이틀 후면 나는 17살이 돼요. 지난 1년이 16살의 멍청함을 덜어줄 수 있을 1년이었으면 좋겠어요. 나는 18대 정부의 영향을 직격으로 받는 세대네요. 이것또한 부조리해요.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만약 있었더라도 내가 선택한 길은 이 쪽이 아니였으니. 부조리하네요. 그렇지만 내가 감수해야 할 부조리네요. 내팽겨친 민주주의가 여기서 유효하다는 게 분하지만, 내가 지고 가야할 민주주의니까요.
리얼리즘의 부조리또한 그러한가요? 글을 쓰기로 결심하고 펜을 집어든 나는 경멸하던지 경멸당하던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나요. 아니라고 믿어요. 변할 수 있는 부조리고 변해야 하는 부조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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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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