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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여성관 -과 을 중심으로-

  • 작성자 터부의 벽
  • 작성일 2013-02-08
  • 조회수 821

연암 박지원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여성관 -<광문자전>과 <열녀함양박씨전>을 중심으로-

 

 

조선 시대에는 수많은 소설가, 시인들 중에서도 연암 박지원은 색다른 여성관을 가지고 있다. 우선 박지원에 대해 짧게 소개를 하자면, 연암 박지원은 조선 후기 명문가에서 태어난 문인으로서 홍대용, 박제가 등과 함께 북학파의 선두 주자로 청나라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다. 또한 10편의 한문소설을 써 독특한 해학으로 고루한 양반, 무능한 위정자를 풍자하는 등 독창적인 사실적 문체를 구사하여 문체 혁신의 표본이 되었다.

박지원의 남다른 여성관이 나타난 작품에는 <광문자전>이 있다. 소설 <광문자전>에는 남녀평등 사상이 은밀하게 숨어있다. 소설 속 ‘광문’은 마흔 살이 되었는데 아직 결혼을 하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이 장가를 가지 않느냐고 물으면 "무릇 미색을 다 좋아하는데, 비단 남자만 그러한 것이 아니고 여자도 마찬가지다. 나는 못생겼기 때문에 어떤 여자의 마음도 끌 수가 없다."고 대답한다. 이런 ‘광문’의 대답은 당시 조선의 남성 위주의 여성관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혁명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연암 박지원의 이러한 여성관은 조선 봉건사회에서 여성운동의 시발점으로 보일 수도 있다. 또 다른 작품으로는 <열녀함양박씨전>이 있다.

 

내가 안의(安義)고을을 다스리기 시작한 그 이듬해인 계축년(1793) 몇 월 며칠이었다. 밤이 장차 샐 즈음에 내가 어렴풋이 잠 깨어들으니 청사 앞에서 몇 사람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날이 저물 무렵에, "함양 과부가 살아났느냐?" 고 옆에 있던 사람들에게 묻자, "벌써 죽었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나는 서글프게 탄식하면서 "아아 열렬하구나. 이 사람이여. " 하고는 여러 아전들을 불러다 물었다.

"함양에 열녀가 났는데, 그가 본래는 안의 사람이라고 했지. 그 여자의 나이가 올해 몇 살이며 함양 누구의 집으로 시집을 갔었느냐? 어릴 때부터의 행실이 어떠했는지 너희들 가운데 잘 아는 사람이 있느냐?"

여러 아전들이 한숨을 쉬면서 말하였다.

"박씨의 집안은 대대로 이 고을 아전이었는데 그 아비의 이름은 상일(相一)이었습니다. 그가 일찍이 죽은 뒤로는 이 외동딸만 남았는데 그 어미도 또한 일찍 죽었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할아비.할미의 손에서 자라났는데 효도를 다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이 열아홉이 되자 함양 임술증에게 시집와서 아내가 되었지요.  대대로 함양의 아전이었는데 평소에 몸이 여위고 약했습니다. 그래서 그와 한 번 초례(醮禮)를 치르고 돌아간 지 반 년이 채 모 되어 죽었습니다. 박씨는 그 남편의 초상을 치르면서 예법대로 다하고 시부모를 섬기는 데에도 며느리의 도리를 다하였습니다. 그래서 두 고을의 친척과 이웃들 가운데 그 어진 태도를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제 정말 그 행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 박지원 소설 <열녀함양박씨전> 중에서

이 소설은 박지원이 안의 현감으로 재직 때에 지은 소설이다. 소설이라고 하지만 당시 연암이 직접 보고 듣고 처리한 사건을 소설화 하였으니 실화라고 볼 수 있다. 아전이었던 남편의 삼년상이 끝나고 자결한 안의에 살던 여인이 어느 날 열녀로 추앙받는 것을 비판한 작품이다. 당시 조선의 여성들은 남편이 죽으면 재혼을 하지 않는 것이 풍속이었다. 늙은 과부가 수절하기 위해 벌이는 눈물겨운 모습을 통해서 여인들의 본능적의 삶들이 철저히 무시되는 것을 안타까워한 박지원이 쓴 이 소설은 여성들에게 강요 된 남성중심의 사회를 고발하고 있다. 자신이 다스리던 안의 고을에서 일어난 함양 박씨라는 열녀의 죽음을 슬프고 안타깝게 바라보던 연암의 생각이 담겨져 있다.

연암 박지원은 이처럼 여성관을 남다르게 가지고, 자신의 철학을 문학 속에 그대로 담아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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