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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와 죽은왕녀를 위한 파반느

  • 작성자 조셉 고든 레빗
  • 작성일 2013-06-30
  • 조회수 927

1.

잔망스럽다는 인상을 받게되는 과도한 유머들이나, 무게를 덜어낸 가벼운 문장들을 구사하지만 , 작금의 세태를 낱낱이 까발리어 비웃음짓는 날카로운 냉소의 시각이 소설전반에 베어들며 주제의식을 완곡히하는 박민규의 화법은, 문단에서도 많은 주목을 기울이게 되어 데뷔작에서부터 '문학동네 신인상', '한겨레 문학상'을 수상하는 성과를 거둠과 동시에 자신만의 확연한 색깔을 구축해놓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다소 질낮은 유머를 구사하는, 신랄하고 가벼운 색깔의 소설만을 발표하지않고 자신이 기존에 지니고 있던 특유의 문학적 특질에서 탈피해, 진한여운이 곳곳에 묻어나오는 감성문학으로서의 전환을 시도하게 되는데, '근처' '죽은왕녀를 위한 파반느'등 2000년대 후반에 발표한 소설들이 그렇다. 이러한 시도가 괄목할만한 성과를 일구어내지 못했다하더라도 이미 정착된 자신의 영역을 더욱이 확장시키려한 시도라는 점에서 박민규는 충분히 찬사받아 마땅하지만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장난끼 넘치던 본연의 시니컬한 시각과 빼어난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박민규의 최고작임이 자명하다.

2.

마블과 디시코믹스들의 히어로들을 소설의 소재로 활용, 영웅이 지닌 통념적인 이미지를 완전히 깨부수어 미국제국주의를 통렬히 비판했던 '지구영웅전설'이나 사회의 뒤안길에 놓여있는 이들을 '삼미슈퍼스타즈'라는 야구팀과 결부시켜 위로의 말을 건네주었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같은 그의 초기작과는 분명한 대척적에 서있는 본작은, '잘생긴 남자와 못생긴 여자의 사랑'이라는 소재의 착상에서부터 그가 기존에 지니고있던 가벼운 어투의 풍자적 면모를 표방할것이라 예상케하나, 인위적인 유머 말장난의 나열들을 배제하고 로맨스소설의 감성을 자아내는 한편, 오랜시간, 삶에대한 연륜이 묻어나오는 사유와 관찰들을 진중한 목소리로 전달한다. 이를테면

'빛을 발하는 인간은 언제나 아름다워. 빛이 강해질수록 유리의 곡선도 전구의 형태도 그 빛에 묻혀버리지 실은 대부분의 여자들, 그러니까 그저 그렇다는 느낌이거나, 좀 아닌데 싶은 여자들... 아니 여자든 남자든 그런 대부분의 인간들은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않은 전구와 같은거야 전기만 들어오면 누구라도 빛을 발하지, 그건 빛을 잃은 어떤 전구보다도 아름답고 눈부신거야. 그게 사랑이지. 인간은 누구나 하나의 극을 가진 전선과 같은거야 서로가 서로를 만나 서로의 영혼에 불을 밝히는거지 누구나 사랑을 원하면서도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까닭은 서로가 서로의 불꺼진 모습만을 보고있기 때문이야 그래서 무시하는거야. 불을 밝혔을때의 서로를, 또 서로를 밝히는 것이 서로서로임을 모르기 때문이지. 가수니, 배우니 하는 여자들이 아름다운건 실은 외모때문이 아니야.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해주기 때문이지. 너무많은 전기가 들어오고, 때문에 터무니없이 밝은 빛을 발하게 되는거야.'

과 같은 구절들, 등장인물인 요셉의 목소리를 빌려 조곤히 읊조리는 그의 사유들은, '삶을 바라볼줄 아는 거리유지의 감각'으로 압축되는 은희경의 소설들, 냉소적인 어투로 일상의 그림자에 가려진 이면을 꿰뚫어보는 그녀의 이성적이고 압도적인 통찰력과는 다른 지점에 놓여있는데, 감성을 자극하고 공감을 자아내며 묵직하고 뚜렷한 자취, 여운을 남긴다는 점이 그러하다. 저마다의 삶속에선 수량으로서 측정할수없는 어둠과 고통이 존재하므로 작가가 삶에대한 통찰을 끄집어낼때 누군가가 헤쳐온 여정을 단순한 몇 자 만으로 재단하려는 태도는 위험한 발상일 것이다. 그러나 박민규는 자신의 어둠을 고백하고 그것을 여성의 삶에까지 확장시키며 연민의 정서또한 발휘, 날카롭지않고 무뎌있는 감성으로서만 일관하는게 아니라 외모지상주의, 루키즘이 만연히 뿌리내린 사회의 폐부를 들춰내며 초창기의 자신의 색깔도한 바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 왜 며칠전에 매장에서 청바지 훔치다 잡힌 고등학생 있지? 남들도 다 입고 있어서... 너무 입고 싶었어요 하고 눈물 줄줄 흘리던. 그게 보편적인 인간이야 모두가 그 정도는 입고있다 생각하는거지 또 그걸 입어야만 행복하다 느끼는거야 관념이지, 그리고 상상력이야 그래도 죠다쉬 점장이 점잖은 양반이잖아 애를 앉혀놓고 그러더라고, 없었던 일로 해주겠다. 대신 네가 어른이 되었을때, 십년이고 이십년후에 반드시 오늘일을 되새겨봐라, 그럼 이바지가 얼마나 시시한건지 알 수 있을거다... 뭐, 조언이라면 조언인셈이지. 그런데 그 양반 요즘 남들 다하는 주식인데하며 정신 못차리고 있거든. 그게 보편적인 인간관계야 훔치지 않았을뿐, 결국 똑같은 관념에 갇혀있는거지. 십년이고 이십년후에 그아이도 분명 어른이 될거야. 그땐 왜 그랬을까, 나참. 하며 한참을 웃고 말겠지, 그리고 돌아서서 주택청약자로서 1순위가 아님을 무척이나 괴로워할거야. 전혀 달라진 인간이라 본인은 믿고 있지만, 실은 똑같은 관념을 가진 나이든 인간일 뿐이지. 그게 보편적인 인간의,

이른 바 성장이야.
뭐야 바보잖아 싶겠지만 그게 인간이야, 현실적으로 살고있다 다들 생각하겠지만 실은 똑같은 관념속에서 평생을 살 뿐이지. 현실은 절대 그렇지않아 라는말은, 나는 절대 그외의 것을 상상할수 없어 -라는 말과 같은 것이야.'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중에서-

3.

기실 본작의 플롯, 내러티브는 사랑을 소재로한 무수히 많은 로맨스소설의 그것과 으레 다를바가 없다. 이별과 만남의 과정을 연속적으로 비출뿐이고, 대단히 치밀한 전개구조로 또다른 서사와 연결점을 형성하는 것 또한 아니다. 그러나 작가가 겪어왔던 삶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무게있는 사유들과 새로운 문학적시도를 이뤄내며 다소 진부할 수 있는 서사를 상쇄시킨다. 문장사이를 끊어내어 문단을 나누는 일관된 소설의 형식을 파괴하고 어휘와 어휘 사이를 끊어내어 별다른 수사들의 나열없이 시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이나, 등장인물들의 대화에 색을 입히는 것, 작가판이란 명칭아래 여러가지의 결말을 이끌어내는 것 등, 비록 이러한 시도가 대단한 효과를 거두지 못할지라도, 모든 진취와 진보는 무수한 실험과 도전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이므로, 박민규의 새로운 문학적 시도는 시도했다는것 자체로서 명징한 의미를 새겨넣는 것이다.

4.

역사소설과 로맨스소설의 것들을 빼어나게 부합시킨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 작가 고유의 독특한 감성을 흩뿌리던 황정은의 '百의 그림자'와 함께 한국 감성문학의 걸작이될것임을 확신한다.

조셉 고든 레빗
조셉 고든 레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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