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김진명의 를 읽고

  • 작성자 터부의 벽
  • 작성일 2013-07-08
  • 조회수 599

 김진명의 <카지노>를 읽고

터부의 벽

 

저번에 신청한 책이 드디어 학교에 왔다. 시험기간 1주 전 물리시간에 얻은 자습시간에 주위가 시끄럽기도 하고 머리고 식힐 겸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러 갔다. 사서선생님께 물어볼 때에야 스티커를 붙이게 된 새 책. 물리실에 돌아오니 같은 반 친구가 “어, 나 이 책 읽었는데. 진짜 재미있어.”라고 말했다. 나는 추천 받은 책이라고 했다. “누구?” 친구의 물음.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그나마 적당한 단어를 내뱉었다. 친구가 끄덕였다.

 처음에 느낀 것은 형식이 신기하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무대가 있다면 그것이 하나씩 불이 켜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의 큰 무대로 조금씩 달려들었다. 부연설명이나 묘사가 거의 없어 빠르게 전개되지만 생각 외로 연상은 쉽다. 독자에게 상상의 자리를 남겨 준 것이 작품의 깔끔함 등에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새로웠던 것은 바로 ‘바카라’라는 도박의 일종인 게임에 대한 작가의 지식. 게임 방식도 모르는 나에게 바카라를 대해야 하는 자세를 먼저 알려주어 조금 혼란을 주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괜찮았다. 마지막 송병준과 한혁이 서로를 알게 되는 부분은 지나친 연결고리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은교의 동생 엘런으로 인해 시작하고 끝나게 되는 전반적인 내용은 마음에 들었다.

 사실 처음에는, 아니 중간부분까지 ‘참으면서’ 책을 읽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한혁이 서후에 의해 처음으로 ‘무시’라는 것을 인지하여 전의를 불태우는 부분에서 잠시 책을 놓았을 때 나는 다시 책을 읽기가 두렵기까지 했다. 그동안 내가 해내왔던 과오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에 이 책은 인생 그 자체가 도박일 수도 있다는 말이 있다. 잠시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던 그 패들에 집착했던 나….. 그것을 끊고 싶어도 끊지 못하던 나….. 서후의 말이 조금씩 내 심장을 갈아 엎었고 그 덕분에 나는 굉장히 아팠다.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따로 없다. 하지만 이렇게 인생을 냉철하게, 다시 성찰한 책은 거의 처음인 것 같다고 자신할 수 있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고 책 한 페이지만 다시 읽어도 가슴이 아파질 것 같다. 책을 읽으며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과, 계속 생각나던 ‘Pleymo -  Tank Club’ 이란 노래와 함께 이 독후감을 마쳐야겠다.

 

P 414 : “나도 늘 부끄러워요. 삶이란 게 원래 부끄러운 건가 봐요.”

P 436-437 : “카지노 게임이란 본래 지는 겁니다. 숱한 패배 속에 살아남는 지혜를 터득하고자 하는 인간의 몸부림이에요. 인간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도박이란 본능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인간의 숙제예요. 그러나 두 사람은 도박에 이기게끔만 설계되었어요. 많은 노름꾼들이 다 그렇지요. 이긴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주변을 모두 황폐화시키고, 본인 역시 삶을 그르치고 말지요. 지금 두 사람에게 패배를 가르쳐주지 않으면 두 사람은 기계적으로 돈을 위해 일하게 되고, 결국 돈에 치여 삶을 망치고 맙니다. 나는 두 사람을 살리고 싶었고, 그래서 이 게임을 시작했습니다. 중단할 수 없어요.”

 

터부의 벽
터부의 벽

추천 콘텐츠

과 비교해본 영화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 (<레옹>과 비교해본)       몇 주 전부터 (갑자기) 보고 싶었던 영화. 어제 밤에야 봤다. 언젠가 우연히 이 영화를 알게 되었는데 스토리 자체가 내겐 무척 흥미로웠다. '시한부 인생의 두 남자가 바다를 보러 떠나는 이야기'. <노킹 온 헤븐스 도어>는 영화 소개만 본다면 '시한부 인생, 갱단, 경찰, 강도' 등 굉장히 심각한 내용을 다룰 듯만 하다. 긴장되고, 슬플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올해 재개봉되었을 때 본 <레옹>의 애절함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둘 다 갱단, 총, 총성, 경찰, 죽음 등이 등장하는 데 말이다. 오히려 즐겁다. 마음을 편하게 두고 보아도, 문제될 것 없는 영화. 간간히 등장하는 유머와 노래에 미소 지어도 되는 영화. 두 영화의 차이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나는 이 차이를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찾았다. <레옹>의 경우엔 아직 살 날이 많은 여자아이와 살인청부업자가 '가족의 죽음을 복수'한다는 내용으로서 죽음과 삶을 이분법적으로 나눈 데에 비해, <노킹 온 헤븐스 도어>에 등장하는 시한부 인생의 남자들은 곧 닥쳐오는 죽음을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인생을 정리하면서도 살아있는 순간을 즐긴다. <레옹>에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마지막 순간에는 사랑과 희생, 그리고 복수가 얽힌 아이러니한 죽음마저 다가온다. 그러나 <노킹 온 헤븐스 도어>에는 여러 총격전이 등장해도 죽는 이가 아무도 없다. 바다를 찾아가는 과정에는 고난과 장애물이 닥치기도 하지만, 그들은 어렵지 않게 이를 넘긴다. 뜻하지 않은 우연도 비약도 일어난다. (저런 경찰이 있는 나라에 살면 좀 큰일이긴 하겠다. 물론 갱이 저렇게 귀엽다면 괜찮겠지만 말이다...라는 생각이 영화를 보며 들었다.) 죽음이 코앞에 닥친 시한부의 두 남자에게 '범죄'라니, '갱'이니 '법'이라니 하는 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삶을 정리하는 방법의 하나로 며칠간 저지른 범죄에 대해 나름대로 변상한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별 내용이 없다고도 할 수 있다. 단지 전체적인 스토리 그 한줄 밖엔. 그러나 우리는 그 순간 순간이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했을지 알 수 없다고 말하고 싶다. 영화에 별 내용이 없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과 함께 며칠을 지냈음에도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노킹 온 헤븐스 도어>에 별 내용이 없다 말하면서도, 또 보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마력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언제나 힘든 순간이 오면 어쩔 줄 몰라 하다가도, 해결한 후에야 '아무것도 아니었어'라고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우리. 이 영화는 '해결한 후'의 시각에 중점을 두어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언제나 거의 다름없는 일상을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지만, 그 일상이 얼마나 많은 의미와 감정을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별 거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것들을 잊고 사는 건 아닌지. 故박완서의 말대로

  • 터부의 벽
  • 2013-11-03
'안데르센의 절규'를 읽고 (110712)

'안데르센의 절규'를 읽고 (110712) 터부의 벽     어떠한 개인이 지극히 거부하고 싶어하지만 가끔씩은 마주쳐야만 하 는 상황이 있다. 나에게는 그것이 텔레비전, 특히 드라마이다. 그날 도 그런 상황이었다. 거기에서 늙은 남자 배우가 이런 대사를 날렸 었다. “분노의 긍정적인 표현은 예술이고, 부정적인 표현은 범죄이 지.” 다행히도, 안데르센에게 분노는 긍정적인 표현으로 배출이 되었다. 사실 나는 안데르센의 동화를 아주 유명한 것 빼고는 모른다. 그래 서 도서관 북트럭에서 이 책의 무시무시한 표지를 보았을 때 표지에 대한 역겨움을 참고 대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작품에 대한, 그리 고 그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또한 요즘 한창 고민에 빠져있는 나에게 이미 퇴화해버린 그이지만 어떤 조언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나는 글 을 쓰는 사람이지만 적지 않은 상처를 심장에 달고 살아간다(갔다) 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요즘 나의 상처가 나의 삶을 방해하고 있 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여러 사건들이 있어서 과연 내가 이 상처들 을 가지고 ‘글’이라는 것을 쓸 수 있는지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고 있 었다. 글쓴이는 안데르센의 분노와 절망을 정화시키기 위한 방법이 글이었 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분노의 긍정적인 표현’인 그의 글에서 절망 을 노래하는 것이 아닌 읽는이에게 ‘희망’이라는 빛을 보도록 하고 있다는 것 또한 말하고 있다. 그 순간 나는 글쓴이의 말에, 안데르센 에게서 나 또한 글을 쓸 수 있다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절규, 나의 상처 모두 좋은 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또한 자신의 소설의 ‘글쓴이의 말’에 이런 비슷한 말을 남긴 적이 있었다. ‘이 글의 배경은 우중충한 날이고 그 들의 관계도, 미래도 좋아지리라 보장할 수는 없다. 하지만 글을 쓰 면서 그들에게서 희미하게라도 빛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글을 쓴다.’ 그때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희미한 빛이 무 엇인지 추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한 그 ‘희미 한 빛’은, 최악의 순간에서도 자신의 심장에서 짜낼 수 있는 ‘희망’이 라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글을 계속해서 써나가고 있는 나 의 궁극적 목표도 그들의, 나의 ‘희망’을 보고 싶어서라는 것도.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글쓴이에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부분도 있었 다. 안데르센의 ‘성격’이나 ‘상처’에 대한 지나친 과대해석이 있었다 는 것이다. 우선 원작의 결론을 자신의 임의로 바꾸어 ‘원작은 이렇 게 끝나지만 사실 안데르센의 진심은 저것이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았나 싶다. 또한 글쓴이는 안데르센의 몇 명의 이성 (異性)에 대한 구애를 토대로 그가 이성에 대해 매우 관심이 많았다 했지만, 그 정도는 보통 사람이라면 가질 수 있는 이성에 대한 관심 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은 뒤 며칠 후 밤새 글을 쓰던 날이 있었다. 두세 시간 동안 소설을 쓰는 도중 평소에는 불안하기 그지없

  • 터부의 벽
  • 2013-08-08
'신화와 과학이 만나다2'를 읽고

<신화와 과학이 만나다 2>를 읽고  터부의 벽   인류는 어떤 방식이든지 상상을 실현시키는 그 어떤 것을 필요로 한다. 고대의 인류는 그들의 상상을 실현해 내기 위해 신화를 지어낸다. 하지만 그들이 신화를 불신하기 시작하기부터 그들은 과학을 신망하고 창조한다. 신화와 과학은 전혀 다른 부류 같아 보이지만, 상상을 실현시킨다는 면에서 신화와 과학은 일맥상통하는 모습이 없지 않아 있다. ‘신화와 과학이 만나다2’는 과학과 신화의 후자의 모습을 그려낸다. 처음 나는 이 책을 알게 되었을 때 신화 속의 숨겨진 과학의 원리에 대한 내용을 설명하는 글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글을 읽어 나가면서 이 글이 인류가 상상하였던 신화 속이 모습이 과학으로써 이루어지는 과정을 서술했을 뿐임을 알게 되어 약간 아쉬웠다. 하지만 성경과 신의 심리에 대하여 연구하는 지식인들의 모습에서 내가 기대했던 결과를 얻었으니 그렇게 안타깝지는 않았다. 19세기 말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주장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 대한 부분이 내가 원했던 책 내용의 단적인 예이다. 사내아이가 어머니와 유대를 맺으면서 아버지를 경쟁자로 여겨 제거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는 원인이 바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라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 현상인 뮈라 공주의 심리에 대한 콤플렉스도 분명히 누군가가 주장했을 텐데 그것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으면 좋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편집을 조금 더 공들여 하였으면 좋았을 텐데 라는 생각으로 약간 아쉬움을 느꼈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편인데, 주로 역사책을 통하여 성경에 대한 이야기를 알아왔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야말로 중세 유럽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존재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와 과학의 갈등을 읽으며 역사책에서 읽어왔던 것과는 다른 성경에 대한 지식을 알 수 있었다. 대체로 사람들은 토리노 성의의 진위 공방처럼 과학이 종교의 약점을 들춰내는 악역만 해내고 있는 줄로만 알고 있지만, 실제로 고고학은 다윗 왕에 관한 구약성서의 기록을 뒷받침하는 물증을 찾아냈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죽음에 관련된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데 큰 몫을 했다. 특히 성경에 묘사되어있는 근친상간에 대한 내용은 나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물론 성경에서는 근친상간을 금지한다. 성경뿐만 아니라 세계 대부분에서 근친상간을 터부시한다. 그 이유에 대해 프로이트와 웨스트마크는 서로 다른 주장을 내보이는데, 프로이트는 인간의 본성에는 근친상간에 대한 혐오가 있으므로 근친상간을 금지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웨스트마크는 성이 반대인 부모에게 끌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회적 제약에 의해 근친상간을 하지 않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다분히 공상적인 이론과는 달리 프랑스 인류학자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친족의 기본 구조’에서 사회 결연 이론을 제안하는데, 농경 집단 사회에서는 다른 가족과 결연을 맺으면 이득이 많기 때문에 결혼이라는 의식을 통해 다른 가족들에게 선물로 증여하기 위해 딸과 누이를 성교의

  • 터부의 벽
  • 2013-07-22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