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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가을에 - 늑대아이를 보고 썼던 편지..

  • 작성자 aomame
  • 작성일 2013-07-28
  • 조회수 375

김혜리가 쓴 늑대아이 평론을 읽고서, 아니 어쩌면 첫 문장을 읽었을 때부터 생각했을지도 몰라. 나 또한 써보고 싶다고. 엄마도 알겠지만 나는 이 영화를 추석연휴에 엄마와 함께 보았어. 만일 엄마가 보러가자고 하지 않았더라면 난 지금보다 많은 걸 잃었을지도 모르겠어. 반짝이는 바람아래 흔들리는 코스모스와 유키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첫 장면은 몇 년 만에 애니메이션을 극장에서 보는 내게 커다란 기쁨으로 다가왔어. 호시다 마모루가 불어넣은 이야기가 앞으로 어떻게 이어질지 설레 하는 내 앞으로 금세 늑대인간이 다가왔는데, 어딘지 외롭고 슬퍼 보이면서도 정작 따뜻하고 강할 것만 같은 모습인 그는 프레임안과 하나 곁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지. 그리고 난 늑대인간이 도시를 바라보며 노인만 사는 집도, 아이만 사는 집도 있다고 말한 뒤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사는 집들이라고 하는 부분에서 [라운드- 마커스 주삭] 이라는 책을 떠올렸어. 그 책의 초반 부에 이런 말이 나와. ‘우리는 야생의 개나 늑대들이고 우리 집은 도시 한복판에 있다. 우리는 작고, 우리의 작은 집은 작은 도시의 거리에 있다. 우리는 도시와 기찻길을 볼 수 있고 도시의 위험 속에는 아름다움이 도사리고 있다. 나로서는 도시에 대해 이렇게 밖에 말 할 수 없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거리에 올망졸망 들어선 작은 집들을 지날 때면 저마다의 집들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사연을 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는 집에 나있는 창문에 의문을 품어. 세상을 보기 위한 것인지, 세상에 보여주기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면서. 그리고 다시 말하지 이 책이 말하려는 것이 바로 세상을 그 창가로 가져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어쩌면 호시다 마모루도 그렇지 않을까 싶었어. 세상을 하나의 집으로, 하나의 삶으로 가져가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어.

장면들에 눈이 부셨기보다는 이야기에 눈이 부셨어. 남편의 예기치 못한 갑작스런 죽음에도 다시 일어서서 아이를 키워가는 하나와 그런 하나에게 매달리는 두 생명인 늑대아이들을 연이어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름답다고 생각했어. 저번에 엄마가 말했던 것 기억나?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영화 속 프레임 밖으로 마코토에게 밀쳐졌다가 다시 걸어 들어와서 마코토에게 치아키가 ‘미래에서 기다릴게’라고 말하는 장면이 영화의 프레임을 가장 잘 이용한 구도라고 하더라고 말해줬잖아. 유키와 아메의 성장을 초등학교 교실을 1학년의 아메 2학년의 유키, 2학년의 아메 3학년의 유키, 이렇게 카메라가 번갈아 가며 항상 움츠려 있는 아메와 언제나 발표하고 싶어 하는 유키를 보여줄 때 엄마가 했던 말이 생각이 났어. 호사다 마모루는 정말 영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한 구도를 잘 이용하는 것 같았지.

어린 아메는 사람들이 늑대를 싫어하는 것을 그림책에서 보고 혼자서 고민하고 아파하다가 어느 날 커다란 나무 아래 엄마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조심스럽게 물어. 사람들이 왜 늑대를 싫어하는지. 아메가 우니까 하나는 아메를 쓰다듬으며 말해줘. ‘모두가 늑대를 싫어해도 엄마만은 늑대 편이야.’ 라고. 아마 여기서 부터였을 거야,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가까스로 참기 시작한 것이. 그 뒤로 몇 번 더 그랬어. 또한 후반 부 하나가 아메에게 더 잘해줬어야 한다고 말할 때와 아메의 늑대 울음소리가 온 세계에 울려 퍼질 때도 그랬어. 울음을 왜 참았냐고 묻는 다면 잘 모르겠어. 그냥 억눌러보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울게 되면 다음 장면을 잘 못 본다는 게 싫어서였던 것 같기도 해. 그러다 보니 엔딩크레뎃이 올라가면서 [어머니의 노래]가 흘러나올 때 새어 나온 눈물을 주체 할 수가 없었어. 어른들은 부모가 되어 이 영화를 보겠지. 어린 아이들은 갖가지 상상을 펼치며 신나게 볼 거야. 열일곱인 나는 그냥 나 자신으로 보았어. 유키가 밥 달라고 조를 때, 온 집안을 어지럽힐 때, 너무나 행복했던 나의 유년기를 떠올렸어. 다친 아메가 하나의 무릎을 베고서 ‘괜찮아, 괜찮아 해줘’를 자꾸만 반복 할 때 그 기분을 느꼈던 나를 떠올렸어. [어머니의 노래] 후렴부에 이런 가사가 나와. ‘언젠가 너가 여행을 떠날 때는 반드시 웃으며 배웅해줄게 하지만 조금 외로우려나 부탁해 착실하게 살아주렴.’ 영화는 내가 망각하고 있었던 부분에서 절대 무너지지 않을 기반을 쌓아줬어. 부모라는 직업이 가장 힘든 직업인 것을 어째서 좀 더 일찍 깨닫지 못했는지 모르겠었어. 그래서 내게 수없이 풍부한 17년을 선물해준 엄마와 아빠에게 감탄했어. 그날 엄마가 왜 울었냐고 물어보기에 끝내 안 말해 주다가 일기장에 쓴 글을 보여주었지. 그날 나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어. [떠나도, 떠나도, 나의 길을 가더라도 꼭 아메처럼 나의 소리를 내어줄게 항상 잘 있다고, 항상 엄마를 기억할거야, 나의 길을 가더라도 언제나 그 시간들을 기억하며 살아 갈 거야.... 뜨거운 물이 흐른다. 눈물이 이렇게 뜨거웠던가? 영화는 나를 파고들어 내 심장에 별 빛 같은 가루를 뿌린다. 너무 반짝이지만 그 만큼 날카롭고 쓰라린.. 아파하는 심장은 기어 올라와 피를 토한다. 그 뜨거운 피를 소매로 훔친다.] 이것이 가장 생생한 나의 느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다시 한 번 적어 봤어.

 

그날 이후로 엄마는 나의 외침을 꼭 들려달라고 자주 말하지. 꼭 반드시 그럴게. [피아노의 숲]에서 폴란드에 있는 카이가 엄마에게 들리길 기원하면서 연주하는 쇼팽의 곡이, 일본의 있는 카이의 엄마에게 닿는 것처럼 말이야. 엄마도 카이의 엄마처럼, 아메의 엄마처럼 나의 부름에 반드시 꼭 뒤돌아서 미소지어줘. 사랑해.

 

2012년 10월 18일 목요일 - 낙엽에 의해 물어 뜯겨지는 길거리에서 입김이 내 몸 밖으로 쉬이 걸어 나가는 것이 보이는 가을의 어느 날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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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om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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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om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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