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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박사는 누구인가? / 이기호

  • 작성자 조셉 고든 레빗
  • 작성일 2013-08-04
  • 조회수 892

1.

재담에 가까운 화술과 기괴하고 비틀린 서사를 구사하는 이기호의 소설들은 초기작인 '최순덕 성령 충만기'에서부터 시작해 뚜렷하고 강렬한 개성으로 독자를 압도해왔다. 유머러스한 말장난의 나열과 지나치다 싶은 가벼움에서 시작해 끝내는 현실과의 접점을 형성하며 재치있는 풍자로 마무리짓는 그의 작품은, 겉으로는 진중한 분위기를 지닌듯 보이나, 아무런 주제의식도 갖추지못한 지리한 속성의 이야기와는 궤를 달리한다. 성석제, 박민규의 초기작, 천명관의 최근작이 지닌 문학적 특질과도 유사한 모양새를 가진 듯 보이지만, 그들에게서 종종 엿보았던 유머에 대한 집착과 강박이 그의 소설들에선 결여되어있고, 간혹 통속과 진부함에 빠지는 성석제와 천명관과는 달리 - '위풍당당', '나의 삼촌 브루스 리'- 독자의 뇌리를 관통하는 선명한 윤곽의 창의력은 - 이를테면 뒤통수에 난 생채기에 박정희 대통령의 영혼이 잠식되어진다는, '백미러 사나이'- 이야기에 굉장한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최순덕 성령 충만기',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사과는 잘해요'등, 그의 전작들이 유머와 풍자라는 일관된 색깔을 유지해왔던 반면, 본작에선 작가의 시선이 확장되고 연민의 정서까지 포괄하며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는데, 이것이 그가 줄곧 지니고 있던 고유의 색깔과 잘 어우러져 묵직한 감성또한 자아내기에 이른다.

2.

방방 날뛰는 젊은이의 그것처럼 재치와 가벼움,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정서가 짙게 베어있었던 전작과 달리, 전체적으로 착 가라앉은 분위기, 시종 진지하고 차분한 어투로 이야기를 전개시키며 몇몇 단편들에선 탄성마저 발해질 정도로 진중한 주제의식을 갖추었음은 물론, 감정의 발화점을 적확히 짚어내어 독자의 심금을 울린다. 책의 포문을 여는 첫 작품이 무난하고 평범한 수준, 쓸쓸함이 감도는 여운과 그의 변화를 목도할 수 있어 좋지만, 다소 빈약한 서사를 가지고 있다면, 두번째 작품인 '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에서는 개개인물들의 사연을 디테일하게 이끌어내며 이야기꾼으로서의 면모를 보이고, 결말부에 이르러선 금방 가시지 않는 여운을 선사한다. 현실의 문제를 단순히 책속의 몇몇 구절, 허위로만 가득찬 쓸데없는 지식만으로 해결하려는 이들에대해 서늘한 비소를 날리는 표제작 '김박사는 누구인가'와, 재기넘치는 입담, 매 페이지마다 끊임없이 웃음을 유발하는 상황을 설정하는 '내겐 너무 윤리적인 팬티 한장'은 기존의 그의 색깔과 풍자정신이 일소되지만은 않았음을 보여주며 시종 뜨겁고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내 자칫 지나치게 무거워질 수 있는 작품에 윤활유 역할을 제공한다. 물질이든 사람이든 눈앞에 보이는 모습만으로 판단하여 간과치말고 그 이면에 감추어진 본질을 봐야한다는 주제의식과 마지막에선 뜨거운 감정을 분출하며 명정한 잔상을 남기는 '탄원의 문장'은 단연 이 단편집에서 압도적인 작품에 꼽힐 것이고, 언급하지 않은 나머지 작품들또한 둔중히 울리는 연민을 이끌어내 독자의 감성을 건드린다.

3.

본작을 처음 막 읽기 시작할 무렵에 기대한 것은 전작들의 기발한 상상력이었다. 흙으로만든 볶음밥의 레시피를 알려주거나 소설에 성경의 목소리를 도입하는 등의 기괴한 창의력. 다소 오랜 공백을 거쳐 그가 풀어나간 이야기들은 변화된 그의 삶만큼이나 많이 달라졌고 이것이 작가로서의 퇴보를 도래해오긴 커녕, 훨씬 더 성숙해지고 이야기꾼으로서는 더욱이 만개하였다. 오랜시간 전업작가로 활동해왔지만 다소 불안정한 삶 때문인지 그는 아무런 직업도, 꿈도없는 백수건달을 자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이러한 이들을 계속 양상해내는 현실을 재치있게 지적했다. 그러나 현재, 광주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안정된 직업을 찾은 그는, 자신의 시야를 넓히고 문학적 담론을 확장, 여러문제를 고민하고 사색하며 자신의 이야기와 연결지었다. 박민규의 변화만큼이나 의미심장해보이고 작가로서 더욱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의 발판을 마련해준게 이 작품임이 자명하다. 그의 두번째 장편이 더더욱 기대된다

조셉 고든 레빗
조셉 고든 레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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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셉 고든 레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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