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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 손보미, 김성중, 황정은

  • 작성자 조셉 고든 레빗
  • 작성일 2013-08-11
  • 조회수 1,312

1. 폭우 / 손보미

평탄한 일상, 그 속에 존재하는 파국의 징조와 불균질함을 포착하려는 의도는 좋으나, 이것이 독자에게 잘 전달되지 못하고 시큰둥한 반응만을 자아낸다. 권위있는 문학상에서 반드시 한 두개쯤 존재하기 마련인 일상에 대한 이야기와 크게 다를 바 없고, 리얼리즘이라 칭하기엔 소설이 지닌 근본적인 이야기의 재미가 무척이나 떨어진다. 작가가 구사하는 산문또한 명쾌하다기 보다 지극히 평범하고 무난하며, 문장에서 묻어나오기 마련인 작가 고유의 감각 또한 결여되어 있다. 수려한 묘사, 작가의 센스를 짐작케 하는 비유가 거의 없어 소설이 자아내는 분위기 자체가 황량하고 건조한데, 본작과 동일한 분위기를 일으켜내나 매끈한 초단문의 나열들로 팽팽한 긴장을 구축하는 김이설의 문장과는 상반된, 김이설이 의도한 것이라면 본작의 작가는 그런 문학적 기교의 쓰임새를 몰라 막연히 형성된 것 처럼 보인다. 이 작품에서 문장은 그저 이야기를 전개시키기에 급급한 기계적이고 단조로운 역할만을 수행할뿐이다. 본인(나)의 문학적 소양이나 식견이 부족한 탓일수도 있겠지만, 이야기라고도 볼 수 없는 사건을 착상한 것이나, 어정쩡하게 귀결되는 결말은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고, 그것을 이런저런 현학적 수사들로 포장한 평단의 해설은 더더욱 물음표를 유발한다. 적어도 일상을 이야기로 풀어나갈때, 일상속에 스며든 미묘한 감정, 행동의 이유를 적확히 간파하여 특유의 냉소로 일관하는 은희경의 통찰력과 비슷한 성질의 것을 지니고, 그것을 이야기로 담아내야만 소설적 재미를 독자에 전달할 수 있으리라 사료된다.

 

 

2. 국경시장 / 김성중

첫 단편집인 '개그맨'에서도 확인했던 바지만, 그녀는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안정적인 이야기를 설계하는데 능수능란한 작가이다. 기억을 사고판다는 소재자체는 이미 여러 매체에서 재생산 되었던, 좀처럼 특별한 구석을 찾아볼 수 없는 밑바탕으로 여겨지나, 그것을 구심점삼아 또 다른 설정들과 매끄러이 결부시킨 채 서사의 영역을 넓히는 것은, 자신이 천부적인 이야기꾼임을 독자에게 다시금 상기시키는, 이야기를 조율하는데 있어 무척이나 탁월한 솜씨가 아닐 수 없다. 추리소설의 플롯을 따르다가 은은한 달빛이 어른거리는 몽환적 공간으로의 전환은 유연하며,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화폐로 바꾸어 자신의 욕망을 위해 아무렇게나 소모하는 주인공들, 그들이 마지막에 이르러 파국을 대면하는 모습또한 씁쓸한 여운을 자아낸다. 이렇듯 높은 밀도의 이야기가 장편소설에 비해 비교적 조악한 완성도를 지닐 수 밖에 없는 단편의 형태로 형성된 것은, 작가의 역량이 이미 어떤 테두리를 넘어섰음을 짐작케 한다. 뚜렷한 개성의 선명한 문장을 구사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야기의 몰입을 방해치 않는 탄탄한 문체와 작가의 통찰력을 가늠케하는 경구들은 작품의 완성도에 일조한다. 가령,

 

'가끔 사람들은 뭔가를 강렬히 원하지. 원하는게 뭔지도 모르면서 그냥 열렬히 뭔가를 기다리는거야. 난 그런사람들의 귀에 소리굽쇠를 한번 퉁, 울려준 죄 밖에 없어. 공명을 일으키고 동심원안에서 안정을 누리려 한 건 그 사람들 의지야. 종교는 그런 마음만 한번 건드려주면 저절로 생겨나는 거라네.'
게발선인장/ 김성중

 

'이제 상식의 보호서클이 깨지고 보이지 않는 틈새로 비이성의 광기가 숨어들었다. 존재의 수동적인 추격자였던 그림자가 거꾸로 존재를 넘어뜨리고 그위에 자신의 위엄을 드러낸 것이다.'
간/김성중

 

이야기를 비현실적 세계로 끌어들여 환상적인 색채에 주력했던 본작을 비롯해, 추리, 로맨스, 디스토피아 등 다양한 장르에 관심을 보이고 일정이상의 만듦새를 자랑했던 그녀의 단편들을 보건대, 독자로서 그녀의 첫 장편소설에 대한 기대치가 점점 오르는 것은 어쩔수가 없다.

 

 

3. 양산펴기 / 황정은

이것은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양산을 사고파는 과정을 서술해 놓았을 뿐이다. 좀처럼 유추 할 수 없고, 수렴되지 않는 주제와, 이야기의 맥락또한 분명치 않기에, 모호함이 만들어내는 파급의 효과만이 잔여하고 있다. 전작인 '百의 그림자'에서 보았던 서정성과 초현실적 분위기의 조화로움, 감각적인 문장, 슬픔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묵직한 연민의식을 자아냈던 이야기는 본작에선 대부분 상실되었고, 문장부호를 사용치않은 인물들의 대화만이 그녀의 희미한 형적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과잉과 청승을 부리지 않고 담담한 감정으로 일관하는 것이 그녀의 장점이었지만, 본작에선 이야기자체의 모호함과 맞물려 그것의 크기가 더더욱 확장되는 효과를 낳는다. 현실의 구렁속에 헤메이는 젊은이들을 그려내고자 하는 의도가 어렴풋이 묻어나오나, 본작은 오히려 이야기라기보다 작가의 사적이고 신변잡기적 경험을 녹여내려 한 것 처럼 보이는데, 이것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어지러운 모양새로 완성되었다. 문장또한 퇴보되었다는 느낌이 다분하다. 자신의 최고작을 뛰어넘는것은 어느 작가에게나 어려운 일이지만, 그녀에게는 지나친 부담으로 작용된 듯 하다.

조셉 고든 레빗
조셉 고든 레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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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셉 고든 레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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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책 알아갑니다

    • 2013-08-18 12:3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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