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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너 사이에서 - 김연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 작성자 韓雪
  • 작성일 2013-11-17
  • 조회수 1,762

  당신, 사랑을 믿나요?

 

 언젠가 당돌하게 소설의 첫 문장을 써본 적이 있다. 당신, 사랑을 믿나요. 거기서 끝이었다. 글은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원래 문장은 문장을 부르는 법이다. 문장이 제대로 들어서기만 하면 자연스레 그 다음의 문장이 들어선다. 나는 분명히 정확한 문장을 썼다. 주제를 함축하고 있는 문장이었고, 읽는 이의 관심을 끌만한 문장이었으며, 문법적 오류도 없었다. 그럼에도 글은 써지지 않았다.

 어디선가 읽어본 듯도 했다. 제대로 문장을 썼는데도 다음 문장이 따라오지 않는다면, 그건 자신이 쓴 문장을 스스로 믿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그 누구도,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설득시킬 수 없는 이야기를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당신, 사랑을 믿나요? 나는 이 문장을 믿지 못한 게 분명했다. 나는 사랑에 설득되지 않았다. 나는 사랑을 믿지 못했다.

 한 줄만 써놓고 버렸던 원고지를 내가 다시 꺼내는 데에는 꽤나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동안 내가 사랑에 설득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느 순간부턴가 나는 사랑을 믿었다. 당신, 사랑을 믿나요? 이 문장을 믿을 수 있었다. 소설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문장은 문장을 따라왔다. 물론 첫 문장은 다른 문장으로 바꿨다. 퇴고를 하면서 첫 문장이 너무 감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소설이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끝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소설을 써냈다는 것이다. 그 문장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문장으로 말이다. 사랑을 믿지 않았던 나는 사랑을 믿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건 순전히 김연수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이 아닐까 싶다. 나는 김연수 때문에 사랑에 설득되었고 사랑을 믿었던 것이다.

 세상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나’와 ‘너’로. 자아와 타자. 세상은 그 둘로 구성되어 있다. 나와 너는 이분법적이다. 나와 너 사이에는 거대한 심연이 있다. 나와 너는 선천적으로 다르다. 나는 결코 너가 될 수 없다.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렇다. 나는 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너의 조그마한 움직임이나 바뀐 말투 정도로 너의 생각을 간신히 추측할 뿐이다. 나에게 있어 너는 철저한 미지未知다. 그리고 그건 너도 그렇다. 너는 결코 나라는 존재가 될 수 없다. 나와 너는 영원히 갈라서 있다.

 사르트르는 말했다. 타자, 그것은 곧 지옥이라고. 너라는 존재는 나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는 내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너는 나를 끊임없이 간섭한다. 결국 너는 나를 꺾어버린다. 내 의지는 너 앞에서 비참하게 허물어질 뿐이다.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너란 존재는 나를 방해하는 존재일 뿐이며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일 뿐이다.

 타자를 극복하려 했던 건 사르트르뿐만이 아니다. 철학사에 이름을 남긴 대부분의 철학자들 역시 타자를 극복해야 할 그 무엇이라고 규정했다. 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이었다. 나라는 존재만이 유일하고 확실하며 절대적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유아唯我론으로 귀결된다. 나라는 존재만이 세상에서 가장 우선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너 역시 너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우선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너에게 있어 나는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나에게 있어서도 너는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나와 너는 상충한다. 끊임없는 충돌. 타자는 부수적인 존재에 불과하다는 유아론은 자기 자신만을 강요하는 폭력성을 함축한다. 지금까지 벌어졌던 모든 전쟁이나 학살은 유아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신만이 옳다는 유아론적인 세상에서 폭력과 광기의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평생 폭력과 광기의 역사에서 살아야할까. 언제나 서로를 억압하며 살아야할까. 아니다. 유아唯我적인 생각을 벗어나면 된다. 무아無我. 나를 버려야한다. 나라는 내부에 종속되는 것을 포기하고 너를 향해야 한다. 나와 너 사이의 심연을 뛰어넘으려고 노력해야한다. 공감. 나만이 유일하다는 생각을 버릴 때, 나를 너한테 강요하지 않을 때, 너를 공감해보려고 노력할 때, 그때서야 비로소 폭력과 광기의 역사는 끝난다.

 사랑은 공감의 끝에 있다. 사랑이란 너에게 한없이 가까워지는 것이다. 너와 나 사이의 심연을 건너는 것이다. 미지未知인 너를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애쓰는 것이다. 물론 나는 너가 될 수 없다. 그건 운명이다. 태초부터 나와 너는 갈라져 있었다. 나와 너는 아득히 멀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숙명적인 한계를 도약해 너에게 다가가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결국 사랑이란 나를 버리는 것이고 너를 향하는 것이다. 너와 나 사이의 심연을 가로지르는 것이다. 심연을 건너서는 것은 어렵다. 너와 나는 본질적으로 다르니까. 심연을 미처 다 건너지 못하고 심연 아래로 빠져버리는 것이 다반사다. 그럼에도 나는 심연을 넘어서려고 한다. 설령 너를 오해하게 되더라도, 멈추지 않고 너를 이해하려 한다. 끝없이 너를 추적하려 한다. 사랑하니까. 너를 사랑하니까. 그게 바로 사랑이니까.

 김연수의 소설은 추적 모티프로 가득하다. 「달로 간 코미디언」에서 ‘나’의 여자친구는 실종된 아버지 안복남의 삶을 추적하고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서 ‘나’는 강시우의 삶을 추적한다. 물론 나에서 너로 건너가는 과정은 쉽지 않다. 『밤은 노래한다』에서 ‘나’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오해한다. 너와 나 사이의 심연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것이다. 거기다가 주변 사람들은 ‘나’의 추적을 끊임없이 방해한다. 그러나 결국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 자살해야만 했던 이정희를 이해하고, 자신을 따라온 여옥을 이해한다. 이정희를 사랑했기 때문이고 여옥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사랑.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추적을 가능케 하는 것은 사랑인 것이다. 넘어설 수 없는 심연을 건너게 하는 것도 사랑인 것이다. 사랑은 수단이며 목적이다. 너에게 다가가려 하기에 너를 사랑하는 것이고, 너를 사랑하기에 너에게 다가가려 하는 것이다. 김연수의 소설은 추적의 소설이며 사랑의 소설이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은 그 연장선상에 있다.

 소설은 카밀라로부터 시작된다. 카밀라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곧바로 미국으로 입양된다. 불행한 삶을 살았던 건 아니다. 유이치라는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자신의 삶을 다룬 책으로 괜찮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렇지만 정체성이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누구인가. 내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그러던 와중에 출판사 에이전트에게서 연락이 온다. 자신의 친어머니를 찾는 과정을 논픽션으로 써볼 생각은 없냐고. 그녀는 에이전트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유이치와 함께 진남으로 떠난다.

 처음부터 그녀는 난관을 만난다. 그녀는 친모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입양 서류의 기록과 양모가 전해준 이야기, 그리고 친모와 함께 찍은 걸로 추측되는 사진 하나뿐이었다. 친모가 다녔다고 했던 진남여고에 가보기도 했지만, 교장 신혜숙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진남여고는 지금까지 미혼모가 없는 학교였다고. 열일곱살에 아이를 낳고 입양 보낸 여학생은 여기에 존재할 수 없다고. 당신의 어머니는 애초부터 없는 사람이라고.

 그런데도 카밀라는 포기하지 않는다. 시청을 찾아가보기도 하고 신문에 연락해보기도 한다. 마침내 카밀라는 어머니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된다. 어머니의 이름은 정지은이며 진남여고를 다녔고 카밀라를 입양 보낸 뒤 얼마 안 되어 자살했다. 신혜숙은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거짓을 말했던 것이다. 카밀라는 다시 진남여고를 찾아가 신혜숙에게 묻는다. 진실을 말해달라고. 신혜숙은 카밀라에게 진실을 말해준다. 지은의 오빠와 지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바로 카밀라라고.

 

 모든 것은 두 번 진행된다. 처음에는 서로 고립된 점의 우연으로, 그다음에는 그 우연들을 연결한 선의 이야기로. 우리는 점의 인생을 살고 난 뒤에 그걸 선의 인생으로 회상한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과거의 점들이 모두 드러나 있기 때문에 현재의 삶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앞으로 어떤 점들을 밟고 나가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인생은 지금보다 좋아질 수도 있고, 나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너 같은 경우는 다르다. 과거의 점들이 모두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네 인생은 몇 번이고 달라지리라. 인생의 행로가 달라진다는 말이 아니라 너라는 존재 자체가 달라진다는 뜻이다. […] 개인적 취향에 불과했던 그 일은 진남을 방문한 뒤부터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됐다. […] 그렇게 이전에 보이지 않던 점들이 발견될 때마다 그 점들을 잇는 새로운 선들이 그어졌고, 네 인생은 그때마다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선이 달라질 때마다 너라는 존재도 바뀌었다.

 

 들뢰즈는 말했다. 탈영토화되는 것은 재코드화된다고. 나를 벗어나 너에게로 향하는 순간, 나는 새롭게 정의된다. 나는 너에게 가까워지면서 끊임없이 변하게 된다. 나와 너는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너를 만나면서 나는 바뀐다. 너를 향해갈수록 나는 새로워진다. 나라는 영역에서 탈영토화되면서 새로운 나로 재코드화되는 것. 나를 버리면서 나를 되찾는 것. 그것이 바로 추적 끝에 오는 것이다.

 자신의 어머니 지은의 삶을 추적해나가는 카밀라의 삶 자체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과거에 그녀는 자신이 동양인이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이 카밀라(동백)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안다. 친어머니와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 뒤로 빨간 동백꽃이 그윽했기에 자신의 이름이 카밀라가 되었다는 것을. 그뿐만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까지 바닷가에서 살아온 이유가 단순히 바다를 좋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안다. 자신이 진남에서 태어났기에, 바닷가에서 태어났기에, 바다를 그리워하던 것이라는 걸.

 지은의 삶을 추적해가면서 카밀라는 자신의 원래 이름이 정희재였음을 알게 되었다. 카밀라는 더 이상 ‘카밀라’가 아니다. 그녀는 ‘희재’다. 그녀는 카밀라를 빠져나와 희재가 되었다. 나라는 영역에서 벗어나 새로운 나가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나는 부정적인 존재일 뿐이다. 희재는 근친상간의 결과일 뿐이다. 그녀는 심각한 절망감에 빠져 유이치의 프로포즈도 거부한 채 세상에서 도피하려고 한다. 그러던 그녀에게 다시 한 번의 기회가 온다. 지은의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이 등장한 것이다.

 거기서부터 소설의 초점은 희재에서 지은으로 바뀐다. 지은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누구를 만나 희재를 낳게 되었는지가 소설 전면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 이전에 등장했던 모든 인물의 전언은 붕괴되기 시작한다. 신혜숙의 말처럼, 희재는 지은과 친오빠 사이에서 태어난 게 아니었다. 지은과 동창이었던 사람들의 말처럼, 희재는 지은과 선생님 사이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었다. 희재는 아름다운 사랑의 결과였다.

 

희망은 날개 달린 것

영혼에 둥지를 틀고

말이 없는 노래를 부른다네,

끝없이 이어지는 그 노래를,

 

드센 바람 속에서 가장 감미로운 그 노래를.

매서운 폭풍에도 굴하지 않고

그 작은 새는 수많은 이들을

따뜻하게 지켜주리니.

 

가장 차가운 땅에서도,

그리고 가장 낯선 바다에서도 나는 들었네.

그러나 최악의 처지일 때도, 단 한 번도,

그 새는 내게 먹을 것을 달라고 하지 않았네.

 - 에밀리 디킨슨, 「희망은 날개 달린 것」

 

 진남조선 직원식당의 국통에서 쥐의 사체가 나온 일을 계기로 노동자들은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 때 임시 지도부를 조직했던 지은의 아버지는 타워 크레인에 올라가 시위를 벌이다가 죽고 만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말言을 잃어버린 지은. 그녀는 돌을 던지는 행위로 진남조선에 대한 분노를 표출한다.

 진남조선 사장의 아들이었던 이희재는 지은을 이해한다. 지은처럼 희재도 아버지를 증오했다. 지은이 던진 돌에 몇 번이나 맞았음에도, 지은과는 처음으로 대면했음에도, 그는 지은을 용서한다. 지은이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희재는 우연히 만난 지은을 데리고 자신이 살던 양관洋館으로 간다. 양관 뒤의 숲속에는 묘비가 있었다. 묘비에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가 새겨져 있었다. 희망은 날개 달린 것.

 희망. 지은이 타워 크레인에 올라간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 보냈던 모스 부호의 의미는 희망이었다. 아버지를 향한 지은의 희망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영원히 사라진 것 같았다. 지은이 말을 잃어버린 것도 희망이 흐릿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드센 바람 속에서도, 매서운 폭풍 속에서도, 희망은 빛을 잃지 않는다. 희망에는 날개라도 달려있는 것처럼.

 지은은 희재를 통해 희망을 다시 발견한다. 새로운 희망의 이름은 사랑이다. 지은이 잃어버린 말을 되찾은 것도, 「북해北海」라는 시를 썼던 것도, 「어느 저녁, 양관에서 - 20년 뒤의 희재에게」라는 시를 썼던 것도, 미래에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희재로 하고 싶다는 바람도 모두 희재를 사랑해서였다.

 지은이 가진 아이, 정희재. 지은에게 있어 정희재는 이희재를 향해 날아갈 수 있는 날개였다. 가장 차가운 땅에서도, 가장 낯선 바다에서도, 녹슬지 않는 펼쳐지는 날개. 지은과 희재 사이의 심연을 활공할 수 있는 날개. 지은은 정희재라는 희망을 통해 아희재라는 사랑을 이루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지은에게 낙태를 권했다. 선생님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아기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강제로 희재를 입양시켰고, 이희재를 향한 자신의 날개가 무참히 꺾인 것을 확인한 지은은 자살을 택하고 만다. 지은은 심연을 활공하지 못한 채 그 사이에 빠져버린 것이다.

 

 너와 지훈은 마치 하나의 몸인 것처럼 꼭 붙어서 움직인다. 바람은 그런 너희를 떼어놓겠다는 듯 기세등등하게 몰아친다. 그는 너희가 대문의 초인종을 누를 때까지 창가에 서서 기다린다. 잠시 뒤, 초인종 소리가 집 안을 울린다. 그는 초인종 소리가 한 번 더 울릴 때까지 기다린다. 24년을 기다렸기 때문에 조금 더 기다리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으니까. […] 이번에는 그가 현관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간다. 그는 우산을 펼치고 입구까지 뛰어간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라 금세 바짓단이 젖는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대문을 연다. 거기 문 밖에 네가 서 있다.

 “관람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가 말한다.

 “죄송합니다. 내일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네가 말한다.

  “부탁이 있습니다.”

 “누구신가요?”

 그가 묻는다.

 “아, 저는 카밀라 포트만이라고 합니다. 한국 이름은 정희재입니다.”

 네가 너를 소개한다.

 “희재라고요?”

 “예, 희재입니다. 왜 그러신가요?”

 “왜냐하면, 제 이름도 희재거든요.”

 그가 너를 바라본다. 너도 그를 바라본다. 벌써 오래전부터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는 듯이.

 

 지은은 끝내 심연을 넘지 못했다. 사랑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딸 정희재와 그녀의 사랑 이희재에 의해 그녀의 사랑은 복구된다. 정희재는 지은을 그리워했기에 수많은 간섭에 굴하지 않고 지은의 삶을 추적했고, 이희재는 지은을 사랑했기에 바람의 말 아카이브라는 전시관을 만들어 지은의 삶을 추억했다. 심연을 건너서 지은에 닿으려는 희재와 희재의 노력의 끝에는 둘의 만남이 있다. 희재의 사랑과 희재의 사랑이 한데 포개지는 것이다.

 희재의 사랑과 희재의 사랑은 겹쳐진다. 지은은 심연을 건너지 못해 사랑에 실패하고 말았지만, 희재는 심연을 건너 사랑에 성공한다. 지은에 한없이 가까워지면서 지은의 삶을 오롯이 복원해놓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삶도 새롭게 복원해낸다. 앞서 들뢰즈가 말했듯이. 한 명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되고, 다른 한 명은 위로받게 된다.

 결국,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은 사랑의 소설이다. 희재에 대한 지은의 사랑과 지은에 대한 희재의 사랑을 중심으로 수많은 사랑이 소설 곳곳으로 가지를 뻗쳐나간다. 사랑. 너와 나 사이의 심연을 넘어서는 것. 너에게 한없이 가까워지는 것. 그 과정에서 심연 깊숙이 빠져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너라는 존재를 오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심연을 넘어서려고 하는 것. 그럼에도 너를 이해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희재가 지은의 삶을 온전히 복원한 것처럼, 온전히 이해해낸 것처럼.

 당신, 사랑을 믿나요? 나는 첫 문장을 믿지 못했다. 사랑이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나는 나일 뿐이고, 당신은 당신일 뿐이다. 어떻게 내가 당신이 될 수 있고, 당신이 내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제는 믿는다. 심연을 훨훨 날아서 당신과 내가 맞닿을 수 있음을 믿는다. 물론 여러 시행착오가 따르겠지만, 심연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하겠지만.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이라는 김연수의 말을 믿는다. 파도처럼 끝없이 너에게 다가가려고 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 희재처럼, 희재처럼.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 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 김선우,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韓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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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 -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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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雪
  • 2014-12-23
과학에 관하여

과학이란 무엇인가 이제 갓 태어난 아기를 생각해보자. 열달동안 어둠 속에 살았던 아기의 눈에 분만실의 환한 조명이 들어왔을 수도 있고, 수술이 끝난 의사의 안도한 표정이 들어왔을 수도 있고, 비로소 어머니가 된 한 여자의 얼굴이 들어왔을 수도 있다. 아기의 눈에 어떤 것이 보였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아기가 ‘너’라는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어머니와 다를 바 없었던 시간이 끝나자마자 홀로 세상과 대면하기 시작하면서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기가 어떤 물건이든지 우선 입에 넣어보려는 행동은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아기에게 있어서 감각이 가장 발달된 기관은 입이다. 아기는 물건을 입에 넣어보면서 물건에 대해 파악해나가는 것이다.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곧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바뀐다. ‘너’라는 존재를 그토록 궁금하게 여기는 ‘나’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타자에 대한 의문이 자아에 대한 의문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결국 모든 인간은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두 질문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셈이다. ‘너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모든 학문의 근저에는 이 두 가지 질문이 있다. 다만 조금씩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조금은 말장난 같겠지만, 미학은 미학적인 방식을 통해 아름다움의 원리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가려는 학문이고, 경제학은 경제학적인 방식을 통해 경제 행위의 원리와 경제 주체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가려는 학문이다. 그렇다면 과학은 무엇인가. 과학 역시 과학적인 방식을 통해 자연 현상의 원리와 그 원리를 따르는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가려는 학문이다. 과학적으로 ‘너’와 ‘나’를 분석해 보려는 학문이다. 그렇다면 과학적인 방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도대체 과학적이란 것이 무엇이기에 우리는 과학을 절대적인 진리처럼 받아들이는 것인가. ‘과학적’이라는 단어를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몇몇 과학철학자의 생각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과학은 생각의 관성이다 ‘해는 동쪽에서 떠오른다’라는 지식을 우리는 어떻게 얻게 되었을까. 우선 우리는 매일 해가 동쪽에서 계속 떠오르는 것을 확인했었다. 지금까지 해가 동쪽에서 계속 떠올랐다는 것을 확인한 우리는 내일도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를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런데 100년도 채 안 되는 삶을 바탕으로 내일도 그럴 것이라고 섣불리 판단해도 될까? 물론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져오는 역사책을 근거로 들면서 해가 동쪽에서 떠오른 것이 적어도 몇천년이 되었기에 확신할 만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신할 만한 것과 확실한 것은 분명히 다르다. 지금까지 태양이 매일 동쪽에서 떠올랐다는 사실과 내일도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를 것이라는 사실에는 어떠한 연관 관계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랜 기간의 경험을 절대적인 지식으로 처리해버린다. 태양이 내일 서쪽에서 떠오를 수 있는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지금까지의 경험을 미루어 보았을 때 동쪽에서 떠오를 것이라고 단정 짓는 것이다. 모두

  • 韓雪
  • 2014-07-13
곡비처럼 - 김애란론

 상갓집에서는 곡소리가 끊겨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렇다고 사람이 하루 종일 울 수는 없는 일. 상가에서는 전문적으로 우는 여자를 불러 대신 울게 했다. 곡비哭婢. 남을 대신해서 울어주는 사람.   사시사철 엉겅퀴처럼 푸르죽죽하던 옥례 엄마는 곡哭을 팔고 다니던 곡비哭婢였다.   이 세상 가장 슬픈 사람들의 울음 천지가 진동하게 대신 울어주고 그네 울음에 꺼져 버린 땅 밑으로 떨어지는 무수한 별똥 주워 먹으며 까무라칠 듯 울어 대는 곡소리에 이승에는 눈 못 감고 떠도는 죽음 하나도 없었다. 저승으로 갈 사람 편히 떠나고 남은 이들만 잠시 서성거릴 뿐이었다.   가장 아프고 가장 요염하게 울음 우는 옥례 엄마 머리 위에 하늘은 구멍마다 별똥 매달아 놓았다.   그네 울음은 언제 그칠 것인가. 엉겅퀴 같은 옥례야, 우리 시인의 딸아 너도 어서 전문적으로 우는 법 깨쳐야 하리 이 세상 사람들의 울음 까무러치게 대신 우는 법 알아야 하리.  -「곡비哭婢」, 문정희    옥례 엄마는 곡비였다. “이 세상 가장 슬픈 사람들의 울음”을 “천지가 진동하게 대신 울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곡소리는 “이승에는 눈 못 감고 떠도는 죽음 하나도 없었”을 정도였다. 그녀가 없었다면 “저승으로 갈 사람 편히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옥례 엄마의 모습에다가 문정희는 조용히 시인의 모습을 포갠다. 시인이란 남을 대신해서 울어주는 사람이다. 곡비처럼, “이 세상 사람들의 울음”을 “전문적으로” “까무러치게 대신” 우는 사람인 것이다. 타자의 슬픔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가장 아프고 가장 요염하게” 우는 존재. 문정희는 시인과 곡비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네가 나의 슬픔이라 기쁘다, 나는.”  -『두근두근 내 인생』    문정희가 「곡비哭婢」라는 시를 통해서 곡비와 시인의 운명이 다르지 않음을 보였다면, 김애란은 이 문장을 통해 곡비와 자신의 운명이 다르지 않음을 드러낸다.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슬퍼할 수 있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라면서, 그녀는 오히려 그녀에게 주어진 곡비의 운명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모양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녀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것은 타자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녹여내는 곡비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의 작품 곳곳에 녹아들어있는 언어 습득 모티프는 그녀가 타자의 슬픔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녀는 그녀가 “아주 작았던 시절”에 “몸은 말[言]을 몰라서 어제도 내일도 갖고 있지 않았다”고 고백한다.(「달려라 아비」) 이 말은 그녀가 “오래전 사라진 말[言]들을 알”게 될 때 어제도 내일도 알게 된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사랑의 인사」) 즉, 그녀는 언어를 배우면서 어제와 내일이라는 시대의 슬픔에 공감하게 된 것이다.    바람이 불면, 내 속 낱말카드가 조그맣게 회오리친다. 해풍에 오래 마른 생선처럼, 제 몸의 부피를 줄여가며 바깥의 둘레를 넓힌 말들이다. […] 어릴 때 온종일 말을 줍고 다녔다. 엄마 이건 뭐야? 저건 뭐야? 종알대며 주위를 어지럽혔다. […

  • 韓雪
  • 2013-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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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雪

    오랜만에 글을 써서 그런지 부족함이 많이 느껴지는 글입니다. 평 받아보겠다고 이렇게나 부족한 글을 글틴에 올려도 되는지 상당히 망설였습니다.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어딘가 부족한지 모른다면 앞으로 발전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 우선 올려봅니다. 부족한 부분에 날카롭게 지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2013-11-17 21:18:51
    韓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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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케이k

      위에 올린 리뷰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본론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소설자체에 대한 서술을 좀 짧게 줄이면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이 글은 텍스트에 밀착한 시선이 느껴진 게 장점이었지만, 때때로 비평글에서는 텍스트와 거리두기가 중요한 관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런 것은 역시 케바케. 글 쓸 때마다 용기내서, 부담없이 올리고 이리저리 소통해보는 게 어떨까요.:)

      • 2013-11-18 23:35:34
      케이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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