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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 작성자 에메
  • 작성일 2013-12-14
  • 조회수 3,429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롤리타

 롤리타, 어딘가 귀에 익은 이름이다. 로리타, 혹은 로리.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단어이다. 미성숙한 소녀에 대해 정서적 동경이나 성적 집착을 가지는 현상인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용어는 바로 이 소설에서 기원하였다. 그렇다면 소설 속 롤리타는 누구일까?

롤리타의 본명은 돌로레스, 돌로레스 헤이즈이고 그녀의 종족은 님펫이다. 님펫이란, 험버트가 성적 흥분을 느끼는 아이들을 통칭한다. 하지만 사춘기가 오지 않은 어린 여자아이가 전부 님펫은 아니다. 님펫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을 구분하는 기준은 정확히 정해진 것이 아니라, 오직 험버트의 주관적 감각이다. 흥미로웠던 것은, 이 인물의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감각을 작가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독자들에게 정말 잘 와닿게 표현했다는 것이다.

「28p. 그런데 그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는 모두 님펫일까? 물론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나처럼 님펫을 잘 아는 사람, 나처럼 고독한 나그네, 나처럼 님펫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자들은 벌써 오래전에 미쳐버렸을 테니까. 미모가 기준이 되지도 않는다. 그리고 천박하다는 것이-적어도 특정 사회에서는 천박하다고 말할지라도-그들의 신비로운 특징을 반드시 훼손하지는 않는다. 야릇한 기품, 종잡을 수 없고 변화무쌍하며 영혼을 파괴할 만큼 사악한 매력이야말로 또래 가운데 님펫과 어중이떠중이들을 가르는 기준이다. 롤리타와 같은 부류는 남들이 들어갈 수 없는 매혹적인 시간의 섬에서 노닐지만 다른 아이들은 그때그때의 현상이 지배하는 공간적 세계에 훨씬 더 종속한 채 살아간다.……정상적인 남성에게 여학생이나 걸스카우트 단원들의 단체사진을 보여주고 제일 예쁜 아이를 찾아보라고 하면 당연히 님펫을 선택할 듯싶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온갖 표정-이를테면 조금은 고양이를 닮은 광대뼈의 윤곽선, 가냘프고 솜털이 보송보송한 팔다리, 그 밖에도 쓰라린 눈물과 부끄러움과 절망 때문에 차마 일일이 말할 수 없는 여러 지표-을 바탕으로 건전한 뭇 아이들 속에서 치명적인 작은 악마를 한 눈에 알아보려면 예술가인 동시에 광인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묘사와 설명이 적절히 어우러진 문단을 읽을 때, 우리는 작가가 험버트만의 개인적인 감각을 온전히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어떤 느낌인지는 잘 알 수 있고, 또 험버트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다. 이 책에서 험버트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롤리타는 당시 프랑스에서 발간된 후 출판정지까지 되었던 책인데, 그 이유는 ‘변태적’이라는 평가 때문이었다. 이 책의 전반적인 면에서 소아성애자인 험버트의 심리와 감각이 두드러진다. 개인적으로 나는 보편화 되지 않은 여러 형태의 사랑에 대해서 감정적으로 별 거부감이 없기 때문에 큰 어려움 없이 험버트에 공감하며 책을 읽어나갈 수 있었지만, 일부 비위가 약한 독자들은 변태적인 사랑에 대한 거부감과 직접적이고 거침없는 소아성애자의 심리묘사에 증오심을 느껴 책 한 권을 다 읽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독자가 험버트를 소아성애자이며 범죄자가 아니라, 하나의 인간 험버트로서 탐구해나갈 수 있게 하는 이러한 구절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험버트와 애너벨 헤이즈, 돌로레스 리

 

애너벨 리, 돌로레스 헤이즈는 험버트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두 여자이다. 물론 둘 다 어린 소녀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애너벨 리는 험버트가 소년 시절에 또래로서 사랑한 여자아이이다. 사실 험버트가 소아성애자가 된 것은 애너벨 리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험버트는 과거 자신의 첫사랑인 애너벨 리와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육체적, 정신적 사랑을 나눈다. 애너벨 리의 체취, 사랑을 나누던 밤의 냄새와 자신들을 조롱하던 어른들의 모습, 한 여름 밤의 기류 등 애너벨 리와의 시간은 어린 험버트에게 강렬한 감각으로 다가왔고, 험버트는 어른이 된 후에도 애너벨 리와의 추억을 하나도 빠짐없이 생생히 기억한다. 그리고 애너벨 리가 어린 나이에 죽어버리고 혼자 남은 험버트는 일종의 정신적 충격을 받는데, 그때부터 자신의 기억 속 애너벨 리의 잔상을 찾아 헤맨다고 할 수 있다. 험버트가 님펫에게서 성적 흥분을 느끼는 것도 아마 애너벨 리와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암시를 고백적 어조로 책의 중간 중간에서 독자들에게 던져준다.

돌로레스 헤이즈는 험버트의 기억 속 에너밸 리와 꼭 닮은 모습을 하고 있다. 수많은 님펫들 중에서 험버트가 돌로레스 헤이즈를 미친 듯이 사랑한 데는 아마 애너벨 리를 닮은 돌로레스의 외모가 큰 작용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숙을 하러 헤이즈 가에 와 돌로레스 헤이즈를 처음 본 험버트는 단번에 25년 전의 애너벨 리를 떠올린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험버트는 돌로레스를 돌로레스 그 자체로, 자신의 롤리타로서 사랑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너벨 리와 돌로레스 헤이즈는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융합된 존재로 험버트에게 다가왔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책의 중간 중간에, 험버트가 돌로레스를 보며 애너벨 리의 특징을 떠올리거나, 둘의 성을 바꿔 ‘애너벨 헤이즈, 돌로레스 리’라고 기술한 것은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이러한 점을 드러낸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서사

 

롤리타의 소설 시점은 내가 읽어본 책 중 가장 특이했다. 작가가 소설 속에서 이중으로 등장했다는 점이 그랬다. 험버트의 변호사인 존 레이 주니어 박사가 험버트의 유언에 따라 험버트의 일기(소설의 서사를 이끌어 나간다.)를 편집해 책으로 출판했다. 그것이 바로 ‘롤리타’이지만 존 레이 박사는 소설 속 가상의 인물이다. 즉, 작가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자신이 소설 속 가상의 인물인 ‘존 레이 주니어 박사’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존 레이’가 아닌 작가 그 자신으로 등장할 때도 있다. 험버트의 변호사는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을 취하다가도 간혹 가다 책 ‘롤리타’에 대해 입장을 밝힌 부분이 있다. 그런 구절을 읽으며 나는 소설 속 가상의 인물이 실제 책 ‘롤리타’에 대해 어떻게 이렇게 말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나중에 역자의 말에서 알게 된 바로는 그런 구절들은 작가가 의도한 것이라고 한다. ‘롤리타가 정신 병리학 분야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롤리타」는 우리 모두에게-부모든, 사회사업가든, 교육자든-경각심과 통찰력을 심어줌으로써 더 안전한 세상을 만들고 더 나은 세대를 길러내도록 매진하는 일에 매진하도록 이끌어줄 것이다.”’라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롤리타가 음란물이라는 비난에 대응하면서 그런 오해를 불식하기 위한 작가의 농담적 조치라고 한다.

내가 서사가 이 소설에서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이유는 이 소설이 사건에 의해 전개되는 소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사가 돋보이는 다른 소설들은 의미와 상징을 담은 거대한 사건, 그리고 그런 사건의 박진감 넘치는 전개로 소설이 진행되지만, ‘롤리타’는 규모가 작은 사건들이 세밀하게 배열되어있고, 그 장면들을 감각적으로 묘사한 소설이다.

어쨌거나 험버트는 첫째 아내와(소녀처럼 옷을 입었기 때문에 결혼한)이혼한 후, 하숙을 하기 위해 헤이즈 가로 가게 된다. 험버트는 처음에 허름한 집을 보고 하숙할 생각이 사라졌지만 마당에서 헤이즈 가의 딸 돌로레스를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되어 하숙을 결정한다. 하지만 돌로레스의 엄마인 샬롯 헤이즈는 험버트를 사랑하게 되고 결국 험버트에게 고백편지를 쓴다. 헤이즈 가에 남아서 하숙하기 위해서는 샬롯과 결혼해야 했기 때문에, 험버트는 마음에 없는 샬롯과 결혼생활을 하며 짜증이 날 때마다 자신의 일기장에 증오의 말을 쓴다. 샬롯은 험버트와 둘만의 시간을 갖길 원했기 때문에 돌로레스를 캠프에 보내버린다. 그러던 어느 날, 샬롯이 험버트의 숨겨진 일기장을 보게 되고 험버트가 자신이 아닌 자신의 딸을 사랑하는 것에 충격을 받아 발작적으로 울며 이별을 선고한다. 그리고 롤리타와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할 편지를 넣으러 길 건너 우체통으로 가던 중, 트럭에 부딪혀 죽게 된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샬롯의 죽음은 험버트에게는 다행인 일이다. 험버트는 즉시 캠프에 가 있는 돌로레스를 데리러 가 돌로레스가 충격 받을 것을 염려해, 엄마가 죽었다는 사실을 숨긴 채 여행을 하다가 후에 밝힌다. 돌로레스를 캠프에서 데려온 후로는 여행의 연속이다. 미국의 방방곳곳을 돌아다니며 여행을 하다가 마침내 한 마을에 정착해 롤리타를 학교에 보낸다. 그러던 중 롤리타가 지독한 감기몸살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런데 험버트가 치료를 다 받은 롤리타를 데리러 병원에 갔을 때, 롤리타는 사라졌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험버트에게서 도망친 것이다.

그 후 험버트는 괴로워하며 롤리타를 찾아 방방곳곳을 헤맨다. 하지만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험버트의 외로움은 극에 달하게 되고, 친구가 필요했기에 리타와 함께 살게 된다. 연인으로 사랑하는 관계는 아니었지만 리타는 친절하고 배려심 넘치는 여자였기에 험버트를 잘 보살펴 준다. 그러던 어느 날, 조금은 갑작스럽게 도망친 돌로레스에게서 편지가 온다. 돌로레스는 한 남자와 결혼했고, 임신을 앞두고 있으며 출산을 위해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험버트는 그 편지를 추적해 주소를 알아낸 후 돈을 들고 돌로레스의 집으로 간다. 돌로레스는 험버트에게서 도망친 후로 자신을 도와준 남자와 지내다가 그 남자의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도망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고 했다. 험버트는 돌로레스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주며 이제라도 자신과 함께 살 것을 부탁한다.

나는 이 부분이 인상 깊었는데, 돌로레스가 님펫의 모습에서 벗어났지만 험버트는 여전히 돌로레스를 사랑하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성적 관념을 넘어서 그 무엇보다도 돌로레스를 사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쨌거나 돌로레스는 험버트의 부탁을 거절하고 험버트는 슬퍼하며 그녀의 행복을 빌어준다. 험버트는 돌로레스에게 그녀를 도망가게 도와준 그 남자의 이름을 물어 수색에 나선다. 그는 변태적 취향을 가진 아이버 영감으로 호화로운 저택에 살고 있었다. 험버트는 자신을 살려주면 온 재산을 주겠다는 아이버 영감의 호소를 거절하고 그를 살해한다. 그 후 험버트는 음주운전을 하며 도로를 누비다가 붙잡히게 된다.

여기까지가 롤리타의 큰 줄거리이다. 이렇게 관념적이고 감각적인 소설을 서사적인 관점에서 요약하니 지루해 보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서사에 있어서 돋보이는 특징을 꼽자면 추리와 언어유희라고 생각한다. 돌로레스가 도망간 후, 독자는 돌로레스를 도와준 사람이 누굴까 추측하며 소설을 읽는다. 아이버 영감의 정체는 소설의 제일 후반부에서 나오지만, 소설의 초반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다. 1부 챕터 20에서 엑스트라 인물 ‘존’이 등장하기 전까지 진이 아이버 영감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 있었다. 딱 한 번, 두 줄 언급했기 때문에 소설을 꼼꼼히 읽지 않았다면 기억조차 못했을 인물이다. 험버트가 돌로레스를 찾아헤매는 과정에서 독자도 험버트와 함께 돌로레스를 앗아간 범인을 추리해나가야 하기 때문에 한 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 하고,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소설이 후반부에 갈수록 더 재미있어졌다.

소설의 전반적인 부분에서 언어유희가 굉장히 많이 쓰였다. 대부분 지명이나 인물에 관한 성적인 언어유희들인데, 그 중 몇 가지를 꼽자면

「p.71 무슈 엄베르 엄베르가 파리에서 가르친 한 남학생은 이 시인시인poet-poet을 ‘무슈 포포poe-poe'라고 불렀다.

-발음을 이용한 언어유희. 프랑스어로 포포(popo)는 엉덩이를 뜻한다.

p.274 (돌로레스가 다른 남자를 보고 웃고 있는 것을 보고)나의 난초 같은 남성미를 보면서도 그토록 환하게 웃은 적은 한 번도 없었거늘,

-orchideous: ‘고환’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파생된 ‘난초(orchid)’에 ‘흉측하다’는 뜻의 형용사 ‘hideous'를 더한 언어유희

p.310 (학교에서의 돌로레스의 특징에 대해 선생님이 험버트에게 설명할 때)남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농담을 즐기는데, 예를 들면 선생님의 예를 들면 선생님들의 성 첫 글자를 맞바꾸기도 함.

-이후 언급되는 혼(Horn)선생님과 콘(Cole)선생님의 성에서 첫 글자를 맞바꿔 합치면 항문성교를 뜻하는 비속어인 ‘cornhole'이 된다.」

들이 있다. 이러한 흥미로운 언어유희는 소소한 웃음을 주고 독자로 하여금 책에 더 빠져들 수 있게 해준다. 다만 아쉬웠던 점은, 아무리 역자가 각주를 친절히 달아놓았어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만약 내가 영어를 더 잘하고 예술에 대한 배경지식이 많다면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어서 나중에 공부를 좀 더 한 후에 다시 읽어보고 싶다.

 

 

에로티시즘

 

이 소설을 정의하는 가장 적절한 단어는 바로 ‘에로티시즘’이라고 생각한다. 남녀 간의 사랑이나 관능적 사랑의 이미지를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암시하는 경향. 앞서 말했듯, 험버트가 보고 느끼는 관념적인 것을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감각적인 동시에 객관성이 결여되지 않게 표현하였다. 성교를 하는 등의 성적인 장면들 때문에 이 소설을 에로티시즘으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적으로 사랑하는 장면들은 제대로 표현되지도 않는데, 그것은 육체적 사랑이 작품 안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들은 그저 험버트의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참을 수 없는 사랑의 욕구를 표면적으로 조금 드러낸 것일 뿐이다. 이 소설이 에로티시즘한 이유는 그가 소아성애자든 어떻든, 한 인간이 누군가를 미친듯이 사랑할때 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생각들과,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의 변화들을 이미지로 아름답게 표현했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쩌면 그가 가장 순수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순수하다는 것, 혹은 순수한 사랑을 이 사회의 통념 안에서 판단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물론 그의 가치관과 자신의 사랑을 완성시키기 위한 행동은 돌로레스 헤이즈에게 큰 상처를 주었으나, 한 인간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고 그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으며 그럼에도 혹시나 부족한 것이 있을까 늘 고민하고 자신의 사랑에 대해 반성하고, 자신의 삶 전체가 나침반처럼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나에게 가장 순수하게 사랑하는 인간으로 다가왔다. 사랑의 결과가 깨끗하고 아름답지는 않았으나, 나는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이토록 간절하고 광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지금껏 현실에서도 소설에서도 본 적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소설이 소아성애자의 성적 욕망으로 더럽혀진 추잡한 포르노가 아니라 한 인간의 내면과 광적인 사랑을 마치 의식의 흐름에 따라 노래하듯, 시적인 언어로 표현한 아름다운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소설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을 고르라고 하면 고민하지 않고 이 장면을 꼽을 것이다.

「p.493 그들이 내가 있는 높직한 비탈까지 달려 올라오기를 기다리면서 마지막으로 경이와 절망이 가득한 환상을 떠올렸다. 그녀가 실종된 직후인 어느 날, 나는 오래된 산길을 지나다가 별안간 지독한 메스꺼움이 밀려드는 바람에 차를 세웠다. 새로 생긴 고속도로와 나란히 달리기도 하고 불현 듯 가로지르기도 하는 이 허깨비 같은 산길에는 늦여름 오후의 따뜻한 햇볕이 골고루 내리쬐고 연푸른 하늘 아래 쑥부쟁이 군락이 꽃을 피웠다. 속이 훌렁 뒤집힐 정도로 구역질을 하고 나서 바위에 걸터앉아 잠시 쉬다가, 향기로운 공기를 마시면 좀 도움이 될 듯싶어 고속도로와 낭떠러지 사이의 나지막한 돌담 쪽으로 걸어갔다. 길가에 시들어버린 잡초 틈에서 작은 메뚜기 몇 마리가 후드득후드득 튀어나와 도망쳤다. 아주 가벼운 구름 하나가 좌우로 팔을 벌린 채 조금 더 묵직해 보이는 구름을 향해 다가갔다. 그쪽에 모인 구름들은 하늘에 글씨를 쓰듯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왠지 마음에 드는 절벽 쪽으로 접근할 때 발 아래 펼쳐진 골짜기 사이에 자리를 잡은 조그마한 광산촌에서 문득 아름다운 화음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붉은색이나 회색 지붕을 덮은 건물들, 그 사이로 이리저리 지나가며 기하학무늬를 그려내는 찻길들, 동글동글 부풀어 오른 초록색 나무들, 뱀처럼 구불구불한 시냇물, 광석처럼 화려하게 반짝거리는 시립 쓰레기장, 그리고 마을 너머에는 밝고 어두운 여러 빛깔로 조각조각 수놓은 퀄트 같은 들판, 그 사이로 종횡무진 뻗어나간 도로들, 더 멀리 저쪽에는 숲으로 뒤덮인 거대한 산맥 등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그러나 이렇게 온갖 색상이 말없이 환호하는 듯한-여러 색상과 명암이 사이좋게 어우러져 즐거워하는 듯한-풍경보다 더 화사한 것은, 눈에 보이는 경치보다 더 밝고 꿈결처럼 아름다운 것은, 귀에 들리는 화음이었다. 온갖 소리가 모여 만들어내는 이 화음은 안개처럼 가물가물 흔들거리면서도 한순간도 그치지 않고 이어지면서, 내가 더러워진 입가를 닦으며 우두커니 서 있는 화강암 절벽 언저리까지 모락모락 솟아올랐다. 나는 곧 이 모든 소리가 본질적으로 똑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자들은 일하러 나가고 여자들은 집을 지키는 이 마을에서, 구석구석 훤히 들여다보이는 이 마을의 골목골목에서, 지금 들려오는 소리는 오직 한 가지였다. 독자여! 내가 들은 그 소리는 바로 아이들이 노는 소리, 그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가냘프면서도 장엄한 소리, 아득히 멀지만 신기하리만큼 가볍게 들리는 소리, 진솔하면서도 신비롭고 거룩한 소리-여러 목소리가 안개처럼 뒤섞였지만 공기가 어찌나 맑은지 이따금 어떤 소리는 안개를 뚫고 나온 듯 또렷하게 들려왔다. 꺄르륵 터뜨리는 명랑한 웃음소리, 방망이로 공을 때리는 소리, 장난감 마차가 덜컹덜컹 굴러가는 소리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거리가 너무 멀었으므로 실선처럼 좁다란 골목에 높다란 산비탈에 서서 이 음악적인 진동에 귀를 기울이며 조용히 웅성거리는 듯한 배경음 속에서 산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외침 소리를 듣다가 문득 깨달았다. 무엇보다 절망적이고 가슴 아픈 것은 내 곁에 롤리타가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 아름다운 화음 속에 그녀의 목소리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소설을 읽으며 험버트가 자신이 롤리타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작가가 진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이 장면이 험버트가 느껴왔던 죄책감이 증폭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현실 세계와는 동떨어져 있는 듯한, 청각적인 것을 시각적으로, 시각적인 것을 오감을 벗어난 감각으로 표현한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소설의 초반에 험버트가 언급했던 ‘님펫의 세계’가 떠올랐다. 처음에 님펫의 세계에 속했을 발랄하고 귀여운 돌로레스가 자신 때문에 더렵혀졌고, 그래서 ‘이 아름다운 화음 속’에 그녀의 목소리가 없어서 대해 절망적이고 가슴 아파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분위기에 맞는 묘사도 마음에 들었다.

이 책에서는 작가 자신이 인정했듯 ‘롤리타’에서는 어떠한 도덕적 교훈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소설은 교훈을 주기 위해 쓰이는 것이 아니다. 더 광범위하게 보면 소설이 속한 예술은, 오직 예술을 위한 예술만이 있을 뿐이다. ‘롤리타’를 읽고, 책이 부도덕하다며, 책을 읽고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없다며, 혹은 극과 극으로 갈리는 비평가들의 반응에 대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를 비난한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면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서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술가는 아름다운 사물의 창조자이다.

도덕적이거나 부도덕한 책은 없다. 책은 잘 쓰여지거나, 못 쓰여질 뿐이다. 그게 다다.

어떤 예술가도 병적이지 않다. 예술가는 그 무엇이든 표현할 수 있다.

생각과 언어가 예술가에게 예술의 도구이다.

악덕과 미덕이 예술가에게 예술의 재료이다.

예술작품에 대한 견해의 다양성은, 그 작품이 새롭고 복잡하고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예술은 전적으로 무용하다.

또 이런 구절도 있는데,

비평가는 아름다운 사물에서 받은 인상을 다른 방식으로, 또는 새로운 재료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예술적 아름다움을 나의 방식으로 풀어 옮기고 싶었다. 그것이 기존의 견해와 차이가 있다면 비판하는 대신 새로운 관점으로 받아들여달라고 부탁하고 싶고, 내 비평에 있어서 미숙한 점을 느낀다면 그것은 비평가인 ‘나’의 실력 부족이니 작품을 과소평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에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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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메
  • 2014-01-19
타인이 바라보는 거울

타인이 바라보는 거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읽고 제 2의 제목 책을 다 읽고 난 후 제일 와닿았던 것은 이 책의 제목이었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로마에 있는 주인공의 옛 주소이기도 하거니와 이 작품 전체의 비유이다. 한 남자가 자신의 과거를 찾기 위해 끝없는 여정을 떠나지만, 결국 자신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이름과 애인의 이름, 애인에 대하여, 자신이 예전에 만났던 사람 몇 명 뿐이다. ‘어두운’이 뜻하는 바는 이렇게 명확한 것이 거의 없는 남자를 칭한다고 볼 수 있다. 또, 소설의 결말에 가서도 남자가 지금까지 여행했던, 그리고 앞으로 찾아다녀야 할 곳은 여전히 어둡기만 하다. 남자가 마지막에 가봐야겠다고 결심한 곳 역시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인 것을 보고 나는 아마 이 남자가 이곳에 가서도 특별한 단서를 얻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나는 책을 읽은 후 내 나름대로 제목을 다시 붙여보았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가 비유라면 ‘타인이 바라보는 거울’은 이 작품을 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제목이 아닐까 싶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는 완벽하게 타인인 상태에서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내가 ‘나’라는 인간에 대해 아는 것은 거울에 비친 내 얼굴밖에 없는 상황에서 나는 ‘나’에게 타인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작품 전체에서, 나는 타인인 상태에서 ‘나’의 모습을 본다. 47개로 조각난 거울 이 작품은 특이한 구성형식을 갖추고 있다. 47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요즘에는 비교적 소설에서 많이 사용되는 형식이지만 1970년대에는 하나의 신선한 도전이었을 것이다. 작품의 19번째 장이나, 29번째 장과 같이, 누군가의 이름과 국적, 출생, 거주지, 특징 등 간단한 개인정보만 명시된 장이 있다. 이것은 이 남자가 자신이라고 추정되는 사람을 찾기 위해 흥신소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에게 요청한 정보로, 앞서 남자가 흥신소에서 일했던 것과 잘 연계된다. 나는 이러한 구성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일기 및 메모 형식으로 보이기도 하고 중간 중간에 누군가의 프로필이 첨가된 것으로 보아 흥신소의 리포트를 작성한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은 이 형식이 남자의 기억의 조각들을 대변해주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조각조각 나뉘어서 감히 합칠 수 없는 조각난 기억들을 47개의 장으로 나열해 두고, 각 장마다 조금씩의 연계성은 있지만 결코 앞의 장에 대해 설명하는 법이 없다. 독자가 추리를 통해서 47개의 장을 끼워 맞춰야 한다. 우리는 이런 작업을 통해서 이 남자의 심란한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고, 또 이렇게 많은 정보들을 모았는데도 결국 한 인간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얼마 없다는 것에 대해 놀랄 것이다. 완벽하게 유지하는 객관성 <p.9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소설 속 유명한 첫문장들을 보면, 소설의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을 품고 있다. 설국의 첫문장도 그렇다. 아름다운 동시에 독자들을 휘어잡는 그런 문장

  • 에메
  • 2013-12-31
그림이 죗값을 대신 받을 수 있다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인물분석 도리언 그레이 처음엔 그저 조금 건방지지만 순수하고, 조그만 자극(헨리가 세상일에 대해 말하는 뒤틀린 경구나 역설적인 표현)에도 예민한 때 묻지 않은 소년 같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헨리와의 만남이 계속되면서 헨리의 말에 점점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해 깨닫고, 바질이 그려준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이 아름다움을 잃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갖는다. 하지만 그는 점점 타락해간다. 헨리에 의해 그의 유미주의적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면서부터다.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것을 배제한 헨리의 사상은 도리언 그레이가 젊음과 아름다움, 그리고 관능적인 삶만을 추구하게 한다. 시빌 베인의 죽음도 그에게 영향을 끼친다. 실망감을 참지 못하고 자신이 한때 사랑했던 사람에게 폭언을 퍼붓는 것으로 보아 냉정함이 부족하고 감정적이다. 그녀가 죽음으로써 그녀의 아름다움을 완성했다는 헨리의 말을 도리언은 그대로 받아들인다. 사실 도리언 그레이는 이때 자신이 열혈이 사랑했던 연인이 자신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유약한 인물이었다. 도리언은 그녀가 죽은 것에 분명 책임이 있지만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자신도 책임을 회피할 수 있고 시빌도 행복할 것이라고 믿게 하는 헨리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이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악과 선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 자신의 초상화가 자신 대신에 악덕에 대한 벌을 받고 있기 때문이고, 사람들이 외모만을 보고 자신을 판단하는 것에 대해 경멸과 재미(세상을 철저히 속였지만 그 세상이 자신을 찬양하는 것에 대한)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엔 그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의 곁에 있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를 피하는데, 이는 도리언 그레이의 곁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심하게 망가졌기 때문이다. 그는 주변사람들의 쾌락을 향한 미칠 듯한 열정을 자극시켰다. 헨리에게서 듣고 배운, 당시 사람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유미주의적 사상을, 도리언 그레이는 여러 역설적이고 뒤틀린 표현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주장한다. 주변 사람들은 그의 영향을 받고 오직 아름다움과 아름다움에서 오는 쾌락만을 쫒고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이중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점점 더 타락해가고 방탕한 생활의 종점까지 간다.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점점 싫증을 내며 이중적인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평판은 나빠졌지만 아직까지는 멋으로 도리언 그레이를 따라올 사람은 없을 만큼 멋스럽고 고급 생활을 한다. 깊은 밤에는 더럽고 지저분한 술집에 드나들면서 타락한 생활을 즐긴다. 그리고 이렇게 타락해가는 자신의 행동을 지적하는 바질을 살해함으로써 그는 극악의 범죄를 저지른다. 바질을 살해할 때에도 충동적인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그는 더 이상 초상화를 봐도 더럽혀져가는 자신의 양심에 비해 자신의 얼굴은 한없이 젊고 아름답다는, 대조적인 두 얼굴에서 느끼는 쾌감을 경험하지 못하게 된다. 유미주의적 관점에서는

  • 에메
  • 2013-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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