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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신화전설을 읽고 시인 김경주에 대한 고백

  • 작성자 aomame
  • 작성일 2013-12-19
  • 조회수 861

<중국신화전설>을 읽고 시인 김경주

에 대한 고백

 

‘신화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꿈이지 다른 사람들의 꿈이 아닙니다. 신화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인간의 어마어마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현몽하고 있는 원형적인 꿈입니다.’<신화의 힘 中>

 

조셉 캠벨은 <신화의 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 우리가 할 일은 온 길을 되돌아가 자연의 지혜와 조화되는 길을 찾는 것이라고. [시인과 촌장]은 이런 노래를 불렀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은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이라는.

그러나 우리가 두발을 디디고 있는 이 땅은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어내지 못한다. 그 뿐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조차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화가 있다. 서글픈 우리 시대에서 어떠한 삶의 도약을 꿈꾸기 위함이다. 우리는 소망이 있고 기원하는 미래가 있다. 그것이 인간(人間) 즉, 사람 사이에 신화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우리가 신화를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나는 시인을 많이 알지도 깊게 알지도 못하지만 시를 읽고 시집을 산다. 시인이 출간한 모든 시집(그래 봤자 세 권이긴 하다만)을 전부 가지고 있는 것은 유일하게 김경주 시집이다. 그의 시는 유난히 어렵다. 20번 정도를 시간을 두고 읽으면 아주 조금 알겠다. 머리보단 마음으로 안다. 머리로 알지 못하는 것을 두고 모르는 것이라 말한다면 할 말이 없다. 모른다,고 수긍해버릴 것 같다. 다만, 그래도 그의 시를 좋아한다고 말 할 것이다. 그것은 그가 풀어놓은 언어(言漁-그의 표현방식을 빌리자면)들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잡을 수 없는 물고기들이 물결을 가르는 게 보기 좋다.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기분 좋은 세계가 그의 시집이다. 이따금 그에게 질문을 한다. “도대체 구름의 쇄골이 무엇인가요?” 아직도 대답을 듣지 못한 나와 시인 사이에는 그렇게 간극이 있다. 그러나 나는 시인과 독자의 소통은 그러한 간극을 메워가는 것이 아니라 늘려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여김 없이 김경주의 시집을 읽는 것이다.

 

김경주 시인을 알게 된 건 신형철의 <몰락의 에티카>에서였다. 김경주를 모른 채로 평론을 읽었었다. 그의 시집들을 읽고 그 평론을 다시 한 번 읽었다. 신형철의 글도 어렵기에 난해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말했다. ‘누구도 김경주를 너무 많이 알 수는 없다. 누구도 김경주를 사랑할 만한 이유를 한두 개쯤 갖고 있겠지만, 누구도 김경주를 너무 많이 사랑할 수는 없다.’ 두 번째 읽으면서 이 문장에 끄덕일 수 있었기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를 좋아한다 말하는 것이다.

 

신형철이 평론한 시 중 [파이돈]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그리고 이 시를 평한 글 속에 ‘신화적 상상력’이라는 말이 있었다.

 

이름 없는 바닷속 동굴의 벽에 붙어 사는 미물(微物)들은

아무도 모르게 눈이 조금씩 퇴화해간다는데 그곳엔 정말 눈

없는 물고기*가 살고 있을지 모른다 대신 눈이나 날개 기관

따위는 다 소실돼버리고 팔다리만 조금씩 가늘게 길어진다는

데 가늘어진다는 말의 소요들. 이것은 5~6억 년 전부터 살아

남은 캄브리아기 생물들의 절대음감에 관한 얘기다 젖을 먹고

자란 새들이 날개를 펼쳐놓고 고공에서 알 수 없는 바닷속을

내려다보고 있다 새*들의 눈은 그런 해저의 동굴 안을 바라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고기와 새에는 주석이 달려있다. <장자>의 내용 중 일부이다.

북명(北冥)에 물고기가 있으니, 그 이름은 곤이라, 곤의 크기는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이것이 새로 변하게 되면, 그 이름은 부이라 하니, 붕의 등은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붕이 솟구쳐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도 같다. 폭풍이 일면, 이 새는 남명(南冥)으로 날아가버리니, 남명이란 바다이면서 하늘의 연못을 이른다.

 

신형철은 쓴다. ‘이 신화적 상상력이 앞의 고생물학적 상상력과 결합하면 어떻게 되나. 바다 속 고생물의 기원은 바다 속으로 쓸려 들어간 새들의 잔해에 있을지도 모른다(고생물학적 상상력), 그렇게 생겨는 심해의 물고기는 다시 거대한 새가 되어 날아오를지도 모른다(신화적 상상력).

 

어째서 제목이 파이돈인가,는 난 알 수 없다. 파이돈은 플라톤의 저서로 ‘영혼에 대하여’라는 부제를 지니고 있는데 그 대화가 설정 되어있는 시간이 소크라테스가 죽는 당일 아네테의 감옥 속에서의 새벽이라 한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지지했고 따라서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아테네의 민주주의 방식에 거부감을 느꼈다는 것을 안다. 플라톤의 이데아. 이데아가 현실적이 사물의 원형을 나타나는 말로 모든 인식의 근본이 되는 초월적인 실재를 나타내는 뜻이라는 것은 안다. 그러나 나는 제목이 파이돈인 이유, ‘파이돈’과 김경주의 시 마지막 행 속의 명사 기형(畸形)의 유기적 관계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신화를 읽은 후 우리는 시를 읽어야 할 것이라고.

시인이야 말로 우리가 형성해내고자 하는 현실 이상(현실 회피의 이상이 아니라 딛고 나아가는 이상)의 삶들을 신(神)의 언어로 구사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신화적 상상력을 우리의 삶과 가장 잘 접목 시킬 수 있는 자, 그들은 시인이다. 그리고 그 중에 김경주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모르는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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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om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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