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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 관하여

  • 작성자 韓雪
  • 작성일 2014-07-13
  • 조회수 764

과학이란 무엇인가

이제 갓 태어난 아기를 생각해보자. 열달동안 어둠 속에 살았던 아기의 눈에 분만실의 환한 조명이 들어왔을 수도 있고, 수술이 끝난 의사의 안도한 표정이 들어왔을 수도 있고, 비로소 어머니가 된 한 여자의 얼굴이 들어왔을 수도 있다. 아기의 눈에 어떤 것이 보였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아기가 ‘너’라는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어머니와 다를 바 없었던 시간이 끝나자마자 홀로 세상과 대면하기 시작하면서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기가 어떤 물건이든지 우선 입에 넣어보려는 행동은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아기에게 있어서 감각이 가장 발달된 기관은 입이다. 아기는 물건을 입에 넣어보면서 물건에 대해 파악해나가는 것이다.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곧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바뀐다. ‘너’라는 존재를 그토록 궁금하게 여기는 ‘나’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타자에 대한 의문이 자아에 대한 의문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결국 모든 인간은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두 질문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셈이다. ‘너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모든 학문의 근저에는 이 두 가지 질문이 있다. 다만 조금씩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조금은 말장난 같겠지만, 미학은 미학적인 방식을 통해 아름다움의 원리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가려는 학문이고, 경제학은 경제학적인 방식을 통해 경제 행위의 원리와 경제 주체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가려는 학문이다.

그렇다면 과학은 무엇인가. 과학 역시 과학적인 방식을 통해 자연 현상의 원리와 그 원리를 따르는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가려는 학문이다. 과학적으로 ‘너’와 ‘나’를 분석해 보려는 학문이다. 그렇다면 과학적인 방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도대체 과학적이란 것이 무엇이기에 우리는 과학을 절대적인 진리처럼 받아들이는 것인가. ‘과학적’이라는 단어를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몇몇 과학철학자의 생각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과학은 생각의 관성이다

‘해는 동쪽에서 떠오른다’라는 지식을 우리는 어떻게 얻게 되었을까. 우선 우리는 매일 해가 동쪽에서 계속 떠오르는 것을 확인했었다. 지금까지 해가 동쪽에서 계속 떠올랐다는 것을 확인한 우리는 내일도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를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런데 100년도 채 안 되는 삶을 바탕으로 내일도 그럴 것이라고 섣불리 판단해도 될까? 물론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져오는 역사책을 근거로 들면서 해가 동쪽에서 떠오른 것이 적어도 몇천년이 되었기에 확신할 만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신할 만한 것과 확실한 것은 분명히 다르다. 지금까지 태양이 매일 동쪽에서 떠올랐다는 사실과 내일도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를 것이라는 사실에는 어떠한 연관 관계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랜 기간의 경험을 절대적인 지식으로 처리해버린다. 태양이 내일 서쪽에서 떠오를 수 있는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지금까지의 경험을 미루어 보았을 때 동쪽에서 떠오를 것이라고 단정 짓는 것이다.

모두가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 ‘해는 동쪽에서 떠오른다’라는 지식은 필연적인 논리를 통해서 나온 것이 아니다. 우연적일 수도 있는 경험의 반복을 통해 나온 것이다.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인간의 모든 지식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지식은 ‘지금까지 그래왔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믿는 생각의 관성에 불과할 뿐이다.

모든 지식은 불확실하다는 흄의 주장은 심지어 수학에서도 적용된다. 수학은 끊임없는 증명을 통해서 논리적 완벽성을 추구하는 학문이다. 19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수학은 논리적 오류를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학문이었다. 그러나 1931년에 괴델이 불완전성 공리를 발표하며 수학의 완벽성은 허상에 불과했음이 밝혀지고 만다. 괴델의 불완전성 공리는 진리이지만 도저히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수학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였다. 증명할 길이 전혀 없음에도 우리가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직관적으로 진리라고 인정해버리는 명제가 수학에서조차 존재한다는 것이다.

과학의 근저에는 경험에 의존하는 귀납적 추론이 위치해 있다. 따라서 흄의 말대로라면, 다른 지식과 마찬가지로 과학 역시 그저 경험을 체계적으로 정리해놓은 것에 불과하며 언제나 불확실성을 함축하고 있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과학은 반증 가능성이다

칼 포퍼는 과학이 귀납적 추론 위에 쌓인 것에 불과하다는 흄의 주장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과학이 그럼에도 믿을만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과학은 반증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과학자가 자신의 일생을 바쳐 백조를 관찰했다고 생각해보자. 그는 오랜 기간의 경험을 토대로 ‘백조는 희다’라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그런데 ‘백조는 희다’라는 결론을 내린 다음 날, 그는 검은 백조를 발견하게 된다. ‘백조는 희다’라는 명제에 분명하게 위반되는 사례가 발견된 것이다. 그는 ‘백조는 희다’라는 명제를 단 하나의 검은 백조 때문에 폐기하고 ‘백조는 희거나 검다’라는 새로운 명제를 도출해낸다.

이처럼 귀납적 추론에 의해 얻어진 결론에 위반되는 사례를 제시하는 것을 포퍼는 반증이라고 부른다. 즉, 반증이란 명제가 틀렸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명제가 틀렸다고 말하는 반증이 어째서 과학의 조건이라는 것일까. 그 이유는 반증이 바로 연역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관찰한 백조를 바탕으로 ‘백조는 희다’라고 말한 것은 귀납적 추론이다. 흄이 주장했던 것처럼, 과학자가 아무리 많은 백조를 관찰한다고 해도 모든 백조를 관찰할 수 없기 때문에 ‘백조는 희다’라는 귀납적 추론은 불확실한 것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검은 백조가 관찰되면서 ‘백조는 희다’라는 명제는 제거되고 ‘백조는 희거나 검다’라는 새로운 명제가 제시되었다. 만일 노란 백조가 관찰되었다면, ‘백조는 희거나 검다’라는 명제는 제거되고 ‘백조는 희거나 검거나 노랗다’라는 명제가 제시될 것이다.

끊임없는 반증을 통과하면서 명제는 끊임없이 수정되고 오류는 점차 사라질 것이다. 명제가 귀납적 추론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오류가 완전히 제거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새로운 반증이 나타날 때까지는 명제를 진리처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해는 동쪽에서 떠오른다’는 명제 역시 해가 서쪽에서 떠오르는 반증 사례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진리로 받아들여도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포퍼는 과학의 기저에 연역적 과정이 있음을 보이면서 과학에 논리적 인과성을 부여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자연 현상에서 끌어낸 가설이 무수히 많은 반증 시도에도 버텨냈다면, 그 가설은 확실한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 상대성이론이나 양자 역학처럼 당시에는 논란을 불러일으킨 이론들이 지금은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수많은 반증 시도들을 무사히 통과했기 때문이다.

종교는 반증 가능성이 없다. 절대자의 이름을 대면 모두 해결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이나 형이상학 역시 반증 가능성이 없다. 다루는 주제가 정말로 존재하는지조차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종교나 정신분석학, 형이상학에는 연역적 추론이 배제되어 있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이들은 반증될 수 없기 때문에 불확실한 학문이다. 반대로 과학은 반증될 수 있기 때문에 확실한 학문이다. 칼 포퍼는 반증 가능성을 과학의 조건으로 제시하면서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를 명확하게 그은 것이다.

 

과학은 패러다임이다

명제를 제시한 뒤 그에 대한 반증 사례가 존재하는지 확인하는 것을 통해 포퍼는 과학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철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여기서 헤겔이 문득 떠오를지도 모른다. 포퍼가 반증 가능성을 과학의 원칙으로 제시했다면, 헤겔은 변증법을 역사의 원칙으로 제시했다.

변증법이란 서로 대립하는 것들끼리의 경합을 통해 새로운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을 말한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노예가 있는 사람만이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질구레한 일들을 모두 노예에게 맡기고 나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예가 있는 사람은 진정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다. 노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노예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예가 있어야 자유롭다’라는 명제와 ‘노예가 있으면 자유롭지 않다’라는 명제가 대립하게 되는 순간이다. 두 명제의 대립은 ‘노예를 없애 진실로 자유로워져야한다’라는 새로운 결론에 이르러서야 끝나게 된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존재했던 노예제도는 중세 유럽 사회로 넘어오면서 농노제로 바뀌어버린다.

변증법적 과정을 거치면서 노예는 농노로, 농노는 신민으로, 신민은 시민으로 점점 발전해갔다. 이처럼 헤겔은 역사가 변증법적으로 점차 발전해가며 가장 이상적인 형태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포퍼 역시 꾸준한 반증 시도를 통해 과학은 가장 완벽한 형태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헤겔이나 포퍼가 내린 결론의 공통점은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 점진적으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절대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전제로 깔려있다. 그런데 절대적 진리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하기는 할까.

토머스 쿤은 과학에 절대적 진리는 없다고 말한다. 과학은 단순한 사회적 인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저명한 천문학자였던 스키아파렐리는 1877년에 화성을 관측하다가 줄 같은 모양이 화성의 표면에 있음을 발견한다. 그는 이 모양에 카날리canali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카날리는 ‘운하’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였다.

사람들은 스키아파렐리의 말대로 화성에 운하가 있다고 굳게 믿었다. 천문학자들이 화성 운하 지도를 만들었을 정도였다. 재밌는 사실은, 애초에 화성에는 운하가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스키아파렐리가 사용한 망원경보다 더 높은 배율을 가진 망원경으로 화성을 관측한 사람들은 화성에서 운하를 발견할 수 없었는데, 이에 대해 천문학자들은 고배율 망원경에서는 왜곡이 더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화성의 운하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왜 사람들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운하가 존재한다고 믿었던 것일까. 사실, 화성에 운하가 존재한다는 스키아파렐리의 주장은 그 당시에 나름 성공적으로 화성의 모습에 대해 기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키아파렐리의 주장을 믿었고, 그의 주장은 절대적인 진리처럼 사람들의 인식에 스며들게 된다. 그러나 화성에 운하가 없다는 관측 자료가 속속 발표되면서 스키아파렐리의 주장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과학자들은 새로운 관측 자료를 설명하기 위해서 기존의 과학과 결별하고 완전히 새로운 방법으로 자연 현상을 기술해간다.

쿤은 이러한 과정을 통틀어 과학 혁명이라고 부른다. 기존의 과학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사례가 나타나게 되면, 과학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방향으로 도약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쿤은 패러다임이라는 단어를 제시한다. 패러다임은 시대의 주류적인 사회적 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위의 사례에서는 ‘화성에는 운하가 있다’는 패러다임은 ‘화성에는 운하가 없다’라는 패러다임으로 교체된 것이다.

패러다임이라는 단어가 중요한 것은, 과학은 패러다임에 불과하다는 쿤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순간 과학은 시대적 인식에 불과한 것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우주관이 뒤바뀐 것을 생각해보자. 천동설은 천년 넘게 굳건히 진리처럼 받아들여졌지만, 과학자들에 의해 한순간에 거짓으로 밝혀졌다. 그 결과 우리는 지동설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지만 천년 넘게 진리로 받아들여진 천동설이 순식간에 폐기되었다는 것을 상기해보면, 지동설 역시 언제든지 폐기될 수 있는 가능성은 분명히 있으며 지동설을 만고불변의 진리라고는 말할 수 없게 된다. 물론 지동설에는 과학적 근거가 있다고 누군가는 반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천동설 역시 당시에는 충분한 과학적 근거가 있었다.

절대적 진리가 정말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다만, 현재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 진리가 진정한 진리인지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지구는 평평하다’ 역시 한때는 자명한 진리였다. ‘지구는 둥글다’는 오늘날에 자명한 진리다. ‘지구는 평평하다’라는 패러다임처럼 ‘지구는 둥글다’라는 패러다임이 언젠가 다른 패러다임으로 교체될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게다가 패러다임의 변화에는 방향성이 없다. 창조론에서 진화론으로 인간관이 뒤바뀐 것을 생각해보자.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와 ‘박테리아에서 인간이 비롯되었다’ 사이에는 그 어떠한 연관성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도 창조론에서 진화론으로 과학이 진보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포퍼나 헤겔처럼 과학이 일정한 방향을 지닌 상태로 발전해간다고 말할 수 있을까.

쿤은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를 제안하면서 절대적 진리라는 것은 허상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과학은 포퍼의 말대로 어떤 절대적 원리를 향해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무질서적으로 혁명적으로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과학은 없다 다만 과학자만이 존재할 뿐

포퍼는 과학은 확실하며 연속적이라고 주장한 셈이고, 쿤은 과학은 불확실하며 불연속적이라고 주장한 셈이다. 포퍼에 따르면 과학은 반증을 통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학문이지만, 쿤에 따르면 과학은 패러다임의 변화만 일어날 뿐 진리에 도달할 수 없는 학문이다. 포퍼와 쿤 사이에 교점은 전혀 없는 걸까. 점진론과 단속평형론의 대립을 살펴보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다.

다윈은 비글호 탐사 이후 『종의 기원』이라는 역사적인 책을 남긴다. 『종의 기원』에서 다윈은 진화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 모든 생물은 단일한 기원에서 비롯되어 자연선택을 통해 점차 다양한 종으로 나누어졌음을 밝혔다. 또한 다윈은 진화의 과정이 점진적인 변화를 통해 차츰차츰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고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는 다윈의 생각에 반기를 든다. 그는 다윈이 종 사이의 단절이 확연히 드러나는 화석을 간과하고 말았다면서, 진화는 점진적으로 일어나기는커녕 급작스럽게 비약적으로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모든 생물은 긴 정체기와 짧은 변동기를 단속斷續적으로 거치며 진화해왔다는 것이다.

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는 다윈이 여전히 옳다고 말한다. 다윈의 점진론은 굴드의 단속평형론까지 끌어안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미시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생물이 혁명적으로 진화했다고 여겨질지 모르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생물이 점진적으로 진화했다고 보아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점진론과 단속평형론의 차이는 단순히 진화에 걸리는 시간을 짧게 잡을 것이냐 길게 잡을 것이냐에 있을 뿐, 결국은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이론이라는 것이다.

과학사를 가까이서 보면, 과학은 패러다임의 방향성 없는 변화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학사를 멀리서 보면, 패러다임의 변화에는 일정한 방향성을 지닌 것만 같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궁극적으로 과학적 진리를 향해 나아가 있다. 패러다임이 계속 변화하는 이유는 기존의 패러다임에 오류가 있기 때문이며 새로운 패러다임은 그 오류를 극복해내기 때문이다.

결국 포퍼와 쿤의 논쟁은 무의미한 것이다. 포퍼와 쿤의 차이는 기준을 어디에 설정해야하느냐에 차이일 뿐이다. 과학이 연속적이라는 포퍼의 주장은 과학사를 거시적으로 바라본 것이고, 과학이 불연속적이라는 쿤의 주장은 과학사를 미시적으로 바라본 것이다. 포퍼와 쿤의 주장은 절충될 여지가 충분하다. 과학은 사회적 약속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과학은 끊임없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통과하면서 사회적 약속을 새롭게 바꾸어가고 진리를 향해 꾸준히 나아간다.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미술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미술은 고대에 제의祭儀에 지나지 않았고, 중세에는 기술技術에 지나지 않았다. 미술이 예술의 영토에 정착하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미술은 사회적인 맥락에 따라 매순간 다르게 정의되었다. 미술은 한 시대가 만든 사회적 약속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미술의 영역을 끊임없이 확장시키며 미美의 세계를 추구했던 미술가들은 존재했다. 자신의 위치가 미술이라고 믿으며 꿋꿋이 나아간 미술가만큼은 존재했다.

과학 역시 마찬가지다. 과학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적이라는 단어는 한 시대가 만든 사회적 약속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과학 혁명을 끊임없이 일으키며 진리를 추구했던 과학자들은 존재한다. 자신의 위치가 과학이라고 믿으며 꿋꿋이 나아간 과학자만큼은 존재했다.

과학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누군가는 경험의 관성에 불과하다고 말했고, 누군가는 반증 가능성이라고 말했고, 누군가는 패러다임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과학은 없다. 다만 과학자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韓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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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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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雪
  • 2013-11-17
곡비처럼 - 김애란론

 상갓집에서는 곡소리가 끊겨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렇다고 사람이 하루 종일 울 수는 없는 일. 상가에서는 전문적으로 우는 여자를 불러 대신 울게 했다. 곡비哭婢. 남을 대신해서 울어주는 사람.   사시사철 엉겅퀴처럼 푸르죽죽하던 옥례 엄마는 곡哭을 팔고 다니던 곡비哭婢였다.   이 세상 가장 슬픈 사람들의 울음 천지가 진동하게 대신 울어주고 그네 울음에 꺼져 버린 땅 밑으로 떨어지는 무수한 별똥 주워 먹으며 까무라칠 듯 울어 대는 곡소리에 이승에는 눈 못 감고 떠도는 죽음 하나도 없었다. 저승으로 갈 사람 편히 떠나고 남은 이들만 잠시 서성거릴 뿐이었다.   가장 아프고 가장 요염하게 울음 우는 옥례 엄마 머리 위에 하늘은 구멍마다 별똥 매달아 놓았다.   그네 울음은 언제 그칠 것인가. 엉겅퀴 같은 옥례야, 우리 시인의 딸아 너도 어서 전문적으로 우는 법 깨쳐야 하리 이 세상 사람들의 울음 까무러치게 대신 우는 법 알아야 하리.  -「곡비哭婢」, 문정희    옥례 엄마는 곡비였다. “이 세상 가장 슬픈 사람들의 울음”을 “천지가 진동하게 대신 울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곡소리는 “이승에는 눈 못 감고 떠도는 죽음 하나도 없었”을 정도였다. 그녀가 없었다면 “저승으로 갈 사람 편히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옥례 엄마의 모습에다가 문정희는 조용히 시인의 모습을 포갠다. 시인이란 남을 대신해서 울어주는 사람이다. 곡비처럼, “이 세상 사람들의 울음”을 “전문적으로” “까무러치게 대신” 우는 사람인 것이다. 타자의 슬픔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가장 아프고 가장 요염하게” 우는 존재. 문정희는 시인과 곡비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네가 나의 슬픔이라 기쁘다, 나는.”  -『두근두근 내 인생』    문정희가 「곡비哭婢」라는 시를 통해서 곡비와 시인의 운명이 다르지 않음을 보였다면, 김애란은 이 문장을 통해 곡비와 자신의 운명이 다르지 않음을 드러낸다.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슬퍼할 수 있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라면서, 그녀는 오히려 그녀에게 주어진 곡비의 운명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모양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녀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것은 타자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녹여내는 곡비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의 작품 곳곳에 녹아들어있는 언어 습득 모티프는 그녀가 타자의 슬픔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녀는 그녀가 “아주 작았던 시절”에 “몸은 말[言]을 몰라서 어제도 내일도 갖고 있지 않았다”고 고백한다.(「달려라 아비」) 이 말은 그녀가 “오래전 사라진 말[言]들을 알”게 될 때 어제도 내일도 알게 된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사랑의 인사」) 즉, 그녀는 언어를 배우면서 어제와 내일이라는 시대의 슬픔에 공감하게 된 것이다.    바람이 불면, 내 속 낱말카드가 조그맣게 회오리친다. 해풍에 오래 마른 생선처럼, 제 몸의 부피를 줄여가며 바깥의 둘레를 넓힌 말들이다. […] 어릴 때 온종일 말을 줍고 다녔다. 엄마 이건 뭐야? 저건 뭐야? 종알대며 주위를 어지럽혔다. […

  • 韓雪
  • 2013-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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