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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첫째 주 장원 발표 및 리뷰

  • 작성자 케이k
  • 작성일 2014-12-13
  • 조회수 345

지난 주 장원 발표가 좀 늦어졌네요. 기다리셨을 두 분에게 양해를 구하며... 지난 12월 첫째주(11월30일~12월6일) 장원은 ‘서늘해’ 님의 글로 선정했습니다. 아래 리뷰 참조해주세요.

 

* 고운매, <더 로드(The Road, 2009) - 피터 싱어의 실천윤리학 관점에서>

코맥 매카시의 동명소설을 영화화 한 <The Road(2009)>와 공리주의 철학자이자 동물해방론자로 유명한 피터 싱어의 실천윤리학적 관점을 겹쳐 놓고 이야기한 글입니다.

‘비평’이라는 장르, 행위에 있어서, 이론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것이 철학이든 사회과학이든 정신분석학이든 보편적 의미의 인문학이든 이론, 사상이란 것은 그 텍스트를 보는 관점, 프레임, 방법론의 토대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 텍스트와 이론이 행복하게 만나는 경우는 무척 드물고, 또 행복하게 만나게끔 글을 쓰기 역시도 무척 어려운 것 같습니다. 분석틀, 방법론으로서의 이론만 있고 그것이 정작 텍스트를 잘 설명해내지 못한다든지, 또는 이론과 텍스트가 정교하게 어울리지 못한다든지.. 그렇게 실패하면 이론이란 현학취 이상이 아닌 것이 되고 마는 것이고요. 정말 어려운 작업이지요...

이 글은 두드러지게 피터 싱어의 ‘실천윤리학’의 관점과 영화 <The Road>를 나란히 놓고 이야기하려 합니다. 이 글에서 도입한 피터 싱어의 관점은, 글쓴이가 느낀 영화의 감동을 단지 감정적으로 전달하지 않도록 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글쓴이의 감동이 메타적으로 재조명되면서 ‘감상문’에 머무르지 않는 ‘비평문’을 시도했다는 의미이지요.

그런데 앞에서 제가 이야기한 그 어려움이 눈에 띄네요. 즉 이론과 텍스트가 행복하게 만나서, 정말 말하고자 하는 바가 독자에게 잘 전달되었는지는.. 아쉽지만 부정적입니다.

가령, 착함과 악함의 통상적인 개념이 피터 싱어에게 있어서 어떻게 전유되는 것인지, 그가 동물과 인간이라는 종적으로 다른 존재들 사이에서의 윤리에 대해서 말하면서 선악 개념을 이야기한다면, 그게 이 영화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예를 들어, 피터 싱어가 관심을 가진 ‘인간과 동물’이란 범주는 말 그대로 인간의 타자로서의 다른 種의 관계를 지시하죠. 그런데 이 영화에서 관심을 가진 범주는 ‘인간임을 포기한 이들만 남은 지옥 같은 세계’이고, 그 세계에서의 극단적 비참함을 그린 것인데, 이것이 피터 싱어가 말하는 바들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즉, 무엇보다 우선, 글쓴이가 이해한 피터 싱어의 실천윤리학의 관점과, 영화 <The Road>의 메시지 혹은 주제 등이 ‘각각 명료하게 정리될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런 연후에 이 두 개의 텍스트를 나란히 혹은 겹쳐서 보고 이야기해야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사고,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명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 스스로는 잘 정리된 듯 여겨지는데 독자들이 그걸 못 읽어주는 것은, 사실 나 스스로 정말 정리된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 번 다시 찬찬히 생각해봐주세요. 그리고 다음 글에서 이런 아쉬운 점이 보강되어 또 만날 수 있기 바랍니다!

 

* 서늘해, <SNS에 관한 단상들>

SNS와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말그대로의 ‘단상들’을 정리한 글입니다. 특히 페이스북을 대상으로 ‘정치, 사회’적 기능으로서의 SNS의 가능성과 한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SNS가 직접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으나 실제로 그 실현은 요원하다는 점을 몇몇 사례들을 바탕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SNS 상에서의 정념과 참여들은 넘쳐나지만 정작 그것이 현실을 바꾸지는 못한다는 점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고요.

사실, 이 글은 나름 전략적(?)인 글입니다. 글쓴이는 글의 도입부에서 “아주 깊게 생각한 건 아니고 그저 그때그때 떠오른 단상들을 정리한 것뿐이니 감안해서 봐주었으면 좋겠다.”라고 썼네요. 그리고 본격적인 이야기를 펼치고 있고요. 그런데 정작 읽어보면 각각의 소제목의 내용들이 꽤 심오한 통찰에 기대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들이 병렬적 소챕터로 잘 연결되고 있는지는 별개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사실 소챕터들은 이 글의 형식(하나, 둘, 셋)처럼 병렬적이지 않습니다. 다소 중복되는 내용도 있고요. 소제목 소재에 해당할 ‘뉴스페이지 / 직접민주주의 / 좋아요와 무력한 분노’들의 관계는 글의 유기성을 위해서는 재조정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튼 이 글이 전략적이라는 말은, 앞의 도입부 인용구처럼 이 글을 읽을 사람들에게 본인의 글의 기대치를 낮추게 하고, 다소 독서의 긴장감을 완화시켜 가독성 있게 한 측면 때문입니다. 글쎄요. 사실 글쓴이가 이런 걸 굳이 ‘전략적으로 의도’했으리라 여기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런 효과를 주는 글입니다. 그럼으로써 이 글 자체의 성격과 어조를 스스로 규정하기도 했고요.

제가 하고픈 말은, 이 글의 단상들을 좀더 자신감을 갖고 형식을 갖춰서 완성해 봐도 좋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글은 ‘온라인’의 정념들을 ‘오프라인’으로 끌어내야한다는 주장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SNS의 한계에 좌절하지 말고 그 가능성을 다시 현실, 오프라인에서 구현해보자는 주장들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머리말에서 연막을 친 듯한 문장) 때문에 이 마지막 대목들이 더 강렬하게 와 닿았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 결론적 주장에 도달하는 과정 자체가 역시 설득력이 있으므로, 그것을 췌사(머리말에서 연막을 친 듯한 문장) 없이 전달해도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이번 글은, 앞부분에서의 조심스러움이 장점으로 기능했으면서도 동시에 단점도 될 수 있었던만큼, 다음에는 바로 핵심으로 직핍하는 글로 만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건필하세요.

 

케이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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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케이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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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케이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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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케이k
  • 201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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