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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다임의 창조 (토머스 S. 쿤, '과학 혁명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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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18-02-28
  • 조회수 995

책의 역할은 무엇일까? 어떤 책은 정서를 고양하고, 읽는 이로 하여금 감동이나 슬픔과 같은 특정한 감정에 빠져들게 한다. 소설이나 시집이 그러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겠다. 다이어트나 화장법처럼 유용한 정보를 알려주기 위해 쓰인 책도 있다. 변화를 요구하는 책도 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 하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저렇게 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자기 계발서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어떤 책들은 대학 입시를 위해 읽힌다. 청소년을 위해 쉽게 풀어 쓴 고전이나 교양서적 같은 책들이 그 예이다. 이러한 책들보다 더 수준이 높다고 평가되는, 흔히 말하는 ‘교양서’나 ‘비평서’는 이전에 고안된 이론이나 사상에 대해 설명하고, 필자의 의견을 덧붙인다.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나, 수잔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 같은 책을 이 범주로 분류한다. 이러한 책들은 대부분, 그 세부적인 구현의 과정에서 약간씩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기성의 패러다임의 개입에서 자유롭지 않다. 문학은 서로 유사한 모티프에 근간을 두고 있으며, 비문학 도서에서 설명하는 이론이나 사상 또한 과거에 누군가가 이미 다루었던 것이다. 토마스 S. 쿤의 저작 <과학혁명의 구조>는 이러한 타 도서와는 뚜렷이 구분된다. 대부분의 책들은 패러다임을 답습하지만, <과학혁명의 구조>를 저술함으로써 쿤은 ‘패러다임을 창조했다’.

 

<과학혁명의 구조>의 50주년 기념판 서문을 쓴 인물이자 저명한 철학자인 이언 해킹은 이 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한다.

“위대한 책은 드물다. <과학혁명의 구조>는 위대한 책이다. 한참 동안 사람들은 이 책이 모든 책들 중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책 중 한 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이 책이 실제로 ‘우리가 지금 홀려 있는 과학의 이미지’를 바꾸었다는 점이다. 영원히.”

<과학 혁명의 구조>는 물리학도이자 철학 연구가였던 쿤이 막 불혹에 접어들었을 무렵인 1962년에 쓴 책이다. 그는 지난 5년여 동안 과학사를 중심으로 심리학, 언어학, 사회학 등의 학문을 통합한 과학혁명 모델을 구상해 왔는데, 그 사상을 집대성한 책이 바로 이 책인 것이다. <과학 혁명의 구조> 전체를 관통하는 주된 메시지는 분명하다. "과학에서의 혁명은 인간의 순수한 진리 추구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다. 과학의 발전은 단지 패러다임에 대한 답습의 결과일 뿐이다.”

 

앞서 말한 진술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쿤이 주장하는 과학 발전의 구조를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쿤은 과학 발전의 구조가 4단계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과학자, 혹은 그에 준하는 자는 자신의 분야에서 토대 격의 이론, 연구, 이슈의 집합체인 패러다임을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정상과학(normal science)의 단계에 진입한다. 이 단계에서 과학자는 풀리기 어려운 난제들-쿤은 이를 변칙(anomaly)라고 일컫는다― 에 직면하고, 그러한 변칙들은 제 2단계인 위기(crisis)를 낳는다.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복수의 패러다임이 등장하며 그 패러다임들이 대결하는 과정에서 제 3단계인 과학 혁명(science revolution)이 등장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기존의 패러다임에 대해 우위를 점하고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면 발전의 마지막 단계인 새로운 정상과학의 단계가 도래하고, 이는 또 다시 한 번 과학 발전의 단계가 시작되도록 한다. 이러한 과학혁명의 구조에는 ‘패러다임’이 깊게 관여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자신이 연구를 하게 된 동기가 현상에 대한 호기심이나 탐구욕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기실 그들은 기성 과학자들의 연구, 이론, 학설 등의 ‘패러다임’에 동화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학문적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이 책의 출간이 독자들의 사상뿐만 아니라 언어 습관에도 큰 변혁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쿤이 저서에서 그 단어를 핵심적으로 다루기 전까지만 해도, ‘패러다임’이라는 단어는 사어(死語)에 가까웠다. 간간히 대학 강의에서만 등장했을 뿐 일상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던 어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이 출간된 이래로 50여년이 경과한 지금, ‘패러다임’이라는 단어는 책이나 논문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음은 물론이고 일상생활에서도 ‘***의 패러다임’, ‘패러다임 전환’ 등 다양한 용법으로 쓰이고 있다. 이는 ‘정상과학’이나 ‘퍼즐 풀이’, ‘변칙현상’과 같은 용어들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앞서 필자는 “<과학혁명의 구조>를 저술함으로써 쿤은 ‘패러다임을 창조했다”고 진술하였는데, 이 문장은 사실 중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쿤은 과학사의 발전을 설명하는 학설을 제시함으로서 과학 이해의 ’패러다임‘을 창조했다. 그와 동시에 그는 패러다임이라는 단어에 새롭고 심층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그 단어를, 어떤 맥락에서는, 창조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이 책은 과학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바꾸어놓았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과학 혁명의 구조> 이전의 과학사학자들은 과학철학이 실증주의에 기초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쿤은 이 책을 통해 과학자들의 선택과 결정이 기존의 과학자 집합에서 생성된 패러다임에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이 책의 출간 당시에 가장 큰 논란을 일으킨 부분이기도 했다고 한다. 당대의 사상가들에게 쿤의 주장은 마치 진화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유전자이며, 인간은 유전자가 대를 이어 생존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도구일 뿐이라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론처럼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이처럼 실증주의를 탈피하고자 하는 사고를 훗날 사람들은 구조주의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 사례에서도 하나의 과학적 패러다임이 생성되고, 과학 혁명이 탄생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겠다.

 

다만 이 책에서 아쉬웠던 점은 내용의 불확실성이다. 혹자들은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불평하며, 이를 번역자의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가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원문의 문장구조나 형식이 난해하였다는 점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과학 교양서로서 이 책이 가지는 단점이기도 하다. 일반인뿐 아니라 과학 연구를 직업으로 삼은 사람들까지도 <과학 혁명의 구조>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다만 우리는 이 책이 대중교양서로 기획된 것이 아니라, 오토 노이라트의 <백과사전> 시리즈의 일부로 처음 쓰였다는 점을 참작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훗날 쿤이 이 저술을 다듬어 대중을 위한 과학 교양서를 펴내거나 해제를 출판했다면 대중이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좀 더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내용의 불확실성은 이처럼 참작가능한 부분이나, 용어 사용에서의 불확실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쉬운 마음이 든다. ‘패러다임’이라는 단어는 이 책에 한 페이지에도 몇 번씩 나올 정도이지만 그 명확한 정의는 제시되지 않고 있다. 그 표현의 문맥적 의미 또한 약간씩 다르다. 실제로 1966년 마거릿 매스티먼은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패러다임이라는 단어가 ‘21가지 용례’로 사용되었다고 역설했다. 이 점에 대하여서는 패러다임이라는 단어의 여러 뉘앙스에 대한 작가의 명확한 구분과 피드백이 이뤄졌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소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과학 혁명의 구조>는 이언 해킹이 말했듯 ‘위대한 책’이자, 그 자체로 하나의 ‘패러다임’이다. 과학의 역사와 발전이 타 학문의 발전과 유사한 경로를 취했다는 저자의 주장은 여러 시사점을 안겨준다. 인류 문명의 역사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이는 다윈의 진화론이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처럼 하나의 의미 있는 터닝 포인트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향후 과학자의 길을 걸을 학생들, 과학을 가르치고 있는 선생님들, 그리고 학문의 역사와 철학에 관심이 많은 모든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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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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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희

    곧님 안녕하세요? 올려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머리말-본문(책의 내용 요약 및 장점과 단점 서술)-맺음말’이라는 형식을 갖춘 깔끔한 서평이네요. 저는 개선해야 할 점이라기보다는 두 가지 생각해볼 점을 제안하려고 합니다. (1)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위험에 대하여 머리말에서 곧님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책들은 모두, 그 세부적인 구현의 과정에서 약간씩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기성의 패러다임의 개입에서 자유롭지 않다. 문학은 서로 유사한 모티프에 근간을 두고 있으며, 비문학 도서에서 설명하는 이론이나 사상 또한 과거에 누군가가 이미 다루었던 것이다.” 『과학 혁명의 구조』의 특별함을 강조하기 위한 서술이라는 것은 알지만, 이런 문장은 반박당할 위험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문학만 놓고 봐도, 문학사의 분기점을 형성하는(그러니까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은 언제나 존재해왔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1950년대 문학과 구분되는, 1960년대 이른바 “감수성의 혁명”을 일으키며 문단에 등장한 김승옥 작가의 경우를 예로 들 수 있겠네요. 따라서 본인이 다 감당할 수 없는 일반화의 전제는 하지 않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2) ‘내용의 불확실성’이라는 의미에 대하여 곧님은 이 책의 단점을 다음과 같이 씁니다. “이 책에서 아쉬웠던 점은 내용의 불확실성이다. 혹자들은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불평하며, 이를 번역자의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가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원문의 문장구조나 형식이 난해하였다는 점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과학 교양서로서 이 책이 가지는 단점이기도 하다.” 곧님이 ‘내용의 불확실성’이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지 궁금합니다. 내용 중 무엇이 확실하지 않다는 것일까요? 제가 보기에 이것은 ‘내용의 난해함’으로 바꾸어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곧님의 말대로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가 ‘원문의 문장구조나 형식이 난해하였다는 점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의 구체적 예를 들 필요가 있습니다.

    • 2018-03-04 21:14:59
    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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