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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에 관한 투명한 변명 : 파스칼 키냐르의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 작성자 자수연
  • 작성일 2019-05-28
  • 조회수 826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은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평생 한번은 맞닥뜨릴 딜레마에 대한 참신한 탐구이자, 파스칼 키냐르 자신의 고백록이다. 그 딜레마, 그 고백이란, 작가에게 언어는 필수적인 동시에 필연적으로 장애물이라는 것이다. 이 모순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키냐르는 다름 아닌 동화의 방식을 채택했다. 정의하려 하면 할수록, 설명하려 하면 할수록 모순은 더욱 깊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화는 작가를 대변하는(혹은 대치되는) 주인공이 작가의 말을 하는 장르가 아니라는 점에서, 표현의 우회로이다. 너무도 익숙한 나머지 진부하기까지 한 동화적 메타포와 리듬 속에 작가의 의도는 은밀하게 녹아 있고, 그것은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포착된다. 즉, 동화는 축소하거나 확장하는, 은폐하거나 변주하는 언어의 특질을 최대한 줄이는 방식이다.

 

본질과 언어에 관한 메타포들

침묵이 본질이라면 언어는 재현이다. 그래서 침묵과 언어 사이에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간극이 있고, 작가는 이러한 간극을 고통스럽게 헤매게 된다. 심연에서 웅크리고 있는 본질을 포착해서 언어로 일구는 일련의 과정이 얼마나 예술적인지, 그리고 얼마나 불완전한지에 대한 이야기는 작품 전체에 걸쳐 다양하게 변주된다.

작품의 도입부에서 작가는 지옥과 사과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인이 방금 따서 내민 사과 속에 들어 있지 않다면 대체 지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21p)라는 질문에서 우리는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의 신화를 연상할 수 있다. 페르세포네는 저승의 신인 하데스의 아내이지만 저승의 이미지를 공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곡물과 대지를 상징하는 여신이다. 그녀는 죽음과 절망의 땅에서부터 올라와 지상에 풍요와 즐거움을 선물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모순적이다. ‘지옥을 내포하는 사과’에 이러한 신화적 모티프가 들어있다고 해석할 때, 사과는 심연으로부터 싹트는 열매이다. 탐스럽게 매달려 있는 겉모습에 은폐되어 있지만, 그 본적은 지옥에 있다는 사실은 비탄에 빠진 콜브륀을 찾아온 영주가 “사과를 와작와작 씹어 먹”는 장면에서도 환기된다.(<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29p) 언어는 본질로부터 태어나지만 결코 본질이 아니라는 점에서 ‘사과’와 유사하고, 그 지점에서 은유가 가능해진다. 사설이지만 왜 하필 사과여야만 했냐고 묻는다면, 신화적 해석을 배재하고서라도 사과는 굉장히 묘한 과일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답하겠다. 붉음이 환기하는 치명성, 강렬함과 초록이 환기하는 미성숙한 신 맛이 양립하는 이 과실은 직관적이고 시각적인 방법으로 인간을 자극한다. 씨앗에서 붉게 익기까지, 그리고 검게 썩어 떨어질 때까지 사과를 관통하는 색채들은 도착적인 욕망부터 ‘익어가는 것’에 대한 동경까지 넓은 스펙트럼의 매력을 포섭한다. 그리하여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과가 매력적인 것의 상징으로 사용되어 온 것은 아닐지.

한편 주인공 죈느와 콜브륀의 직업도 해석의 여지를 내포한다. 하고 많은 직업 중에 왜 하필 재봉사와 자수가여야 했을까. 얼기설기 얽혀있는 씨실과 날실의 이미지가 언어가 직조되는 방식과 닮아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언어는 문장과 문장, 단어와 단어, 형태소와 형태소, 음절과 음절, 음소와 음소의 집합체이다. 글을 쓴다는 것도 사실 조사 하나를 고민하는 작업이다. 혹은 모음 하나를 고민하는 작업이다. 양성 모음과 음성 모음이 가지는 각기 다른 뉘앙스와, 단어와 단어가 이어지는 부위의 자그마한 이음새들이 어감을 관장한다. 섬세함에 대한 이 집착은, 죈느의 벨트에 새겨진 화려한 문양을 재현하기 위해 매 번 색실을 갈아 끼우고 밤을 새며 작업하는 콜브륀의 지극한 노력에서 반복된다. 그녀의 시도는-그럼에도 불구하고-실패하고 마는데, 이 지점에서 키냐르는 작가가 언어를 가지고 이룰 수 있는 것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재현은 재현이라는 점에서 결코 본질과 같을 수 없다. 그러니 죈느가 목표했던 ‘완전한 재현’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본질에 속한 자, 영주뿐이다.

조용한 밤의 시간, 비탄과 애통이 가득한 눈물의 시간에 본질은 문을 두드린다. 그 강렬한 인상은 인간을 과잉시키고, 인간은 그것을 토해내고자 하는데, 정작 종이에 그를 옮겨 담으려 하면 고통 속에 실패하게 된다. 이 헤맴의 과정에서 우리는 ‘작가’를 솎아낼 수 있다. 무수한 실패와 고통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가는 자가 바로 작가이고, 불완전하긴 하지만 어떻게든 마침표를 찍는 것이 문학이다. 이에 대한 메타포인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신화는 이후 이름을 찾기 위한 죈느의 여정에서 변주되어 재현된다.

에우리디케를 되찾기 위해 오르페우스가 지하세계까지 찾아갔듯, 콜브륀을 대신해 이름을 찾아 나선 죈느는 가늘거나 깊은, ‘틈’의 이미지가 부각된 장소를 파고든다. 꽉 맞아 온전해 보이는 언어의 좁은 틈을 통해서만 본질에 가닿을 수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키냐르의 의도를 짐작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죈느가 콜브륀을 눈앞에 두고 이름을 잊는 순간에는 지상을 목전에 두고 에우리디케를 영영 놓치는 오르페우스가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이 두 장면은 본질이 언어로 옮겨지는 그토록 아슬아슬한 과정을 기록한다. 그리고 ‘혀끝에서 맴돌 뿐 결코 언어가 되지 않는’ 몇 번의 경험 끝에 죈느가 이름을 무사히 전달하고, 콜브륀이 마침내 그 이름을 부르자 영주는 사라진다. ‘이름’은 본질이 세계에 편입되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옷차림, 행동, 맥락 등 피상적인 ‘형상’이 아니라, 이름으로 표상되는 ‘언어’로서 무언가를 기억할 때, 그것은 그 존재를 있는 그대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 세계의 질서에 포섭한 채로 기억한 것이다. 무한한 무형의 생각이 종이의 사각에 갇혀버릴 때, 일부는 도망가고 일부는 체 쳐지며 분류될 때 일어나는 비극처럼. 그 과정에서 본질은 위조된다. 영주이자, 심연이자, 지옥이자, 고향이자, 빛인 본질은 그렇게 죽는다.

파스칼 키냐르의 실어증

파스칼 키냐르는 ‘메두사에 관한 소론’을 통해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을 자신의 자전적 동화라고 밝힌 바 있다. 작가의 개인적 삶에 과도하게 몰입하여 그 프레임만으로 모든 작품을 읽어내려고 하는 것은 위험한 시도일 수 있지만, 작품을 이해하기에 앞서 작가를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작품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신이 아니라, 한 작가의 삶-잉태되기 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에서부터 솎아내어지고 우려내진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키냐르가 언어를 배설로, 과잉으로, 고통으로 여기게 된 것을 유아기 때 시작된 두 번의 실어증, 즉 병리적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허무한 시도가 아니다.

앞서 말했듯, 파스칼 키냐르는 어린 시절 두 번의 실어증을 겪는다. 두 번의 실어증 중 한 번은 투병 중이었던 어머니를 대신해 자신을 돌봐주던 독일인 유모가 집을 떠났을 때 발병했다. 유아기의 아이에게 어머니가 가지는 영향력은 굉장히 크다. 먹고, 자고, 놀고, 경험하는 일 전반에서 어머니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아이에게 관여한다. 심지어 어머니가 부재할 때도 어머니는 아이에게 영향을 미치는데, ‘어머니’를 끊임없이 상상하고 갈구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렇다. 반복적으로 ‘어머니’(여기서 어머니는 육체의 어머니가 아니라 모성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 전부를 일컫는다.)를 잃는 경험은 그에게 자신이 쌓아온 것 전반을 잃는 혼란스러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입 밖으로 꺼내 ‘무티(Mutti)’를 불러도 돌아오는 응답은 없고, ‘어머니’의 본질은 휘발된다. “획득한 것이기에 잃을 수 있‘다는, 언어의 본질적인 무상함을 깨우친 어린 아이가 차라리 언어를 잃고 침묵하기를 욕망하는 것은 당연한 방어기제의 발동이었을지도 모른다. 말을 잃어본 경험으로 인해 이후 그는 언어의 고향이 침묵이라는 착상에 도달하게 된 것은 아닐까.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을 본질과 언어의 도식으로 읽는 작업은, 글을 쓰고 읽는 사람으로서 끊임없이 마주하지만 차마 정의내릴 수 없었던 희한한 감각에 대한 힘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반복하건대, 작가는 ‘끝까지 가는 사람’이다. 혀끝까지 치달았는데 차마 뱉어내지 못하는 아슬아슬한 불쾌함은 쓰려는 자의 내면을 분화하고, 본질을 붙잡고자 하는 한 심연을 헤매는 일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쉽게 말해서, 글을 쓰는 일은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끝까지 가는 사람이기를 바란다고 말하며 맺고 싶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 결과가 꽃망울인지 여드름인지는 사실 무관한 것이 아닌가.*

 

*키냐르는 ‘글을 쓰는 것’을 설명하면서 bouton의 개념을 이야기한다. bouton은 버튼, 꽃망울, 여드름 등의 의미를 지니는 프랑스어 단어로, 벽 혹은 어떤 층을 뚫고 나오는 이미지를 띤다.

자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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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수연
  • 2019-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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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우은실

    이 글은 키냐르의 글에 대하여, '언어'라는 것이 지닌 상징성과 장애물적인 성격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또 '동화'라는 방식을 차용하여 일종의 '언어의 불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을 특징으로 보고 있습니다. '언어'를 직조하는 자가 어떻게 언어로부터 말하고자 하는 본질을 드러내고자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언어로 드러날 때 어째서 필연적으로 실패하고 마는지에 대한 철학적이고 깊이 있는 사유를 잘 짚어낸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읽으며 몇 가지 궁금한 점과, 제안하고 싶은 것에 대해 짧게 적어둡니다. -먼저 해당 텍스트가 '동화'의 방식을 빌리고 있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동화라는 형식을 설명함에 있어 "동화적 메타포와 리듬" 안에서 그것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포착된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화적 메타포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동화의 화소(이야기의 작은 단위)는 여러 창작물에 반복적으로 변주되어 사용될 만큼 기본적인 이야기의 단위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메타포"라는 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독자의 개별적인 배경지식으로 자리할 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자수연 님이 이 글에서 설명하고자 한 동화적 메타포에 대한 설명이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아요 또한 전달되는 것과 포착되는 것은 어떻게 다른지도 궁금합니다. 설명을 덧붙여주거나 조금 더 의미를 단번에 알 수 있도록 문장을 구성해 보는 것도 한 방법이 될 듯합니다. -'동화'의 형식에 관한 설명이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이 글에 근거할 때, 해당 텍스트는 동화보다는 '신화'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이 많아 보입니다. 때문에 키냐르의 글에서 동화가 구체적으로 어떤 양상으로 활용되고 있는지는 한 장면을 예를 들어 설명하면 좋을 것 같아요. -파스텔 키냐르의 실어증이라는 부분에 주목한 것이 타당하게 느껴졌습니다. 텍스트를 해석할 때 '작가'를 둘러싼 여러 맥락을 근거의 전부로 삼을 필요는 없으나, 그의 세계관이나 삶이 어떤 힌트가 되어주기도 하지요. 그런 점에서 '실어증'이라는 작가의 사건은 '언어의 본질과 표현 및 재현'과 관련하여 참조할 만한 사항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부분을 본론의 앞 부분에 배치하면 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고려해보시기를요. -언어에 대한 깊은 고민이 엿보이는 분석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사과' 부분의 설명이 좀더 보완되어야 할 듯해요. 가령 "사과가 심연으로부터 싹트는 열매"라는 명제에 대한 여러 근거가 필요해보입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은폐'와 관련된 부분 역시 그러한데요, 다른 충분한 근거를 들어 '사과-심연'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다면 충분히 해소될 수 있는 의문점으로 보입니다. '사과'가 가진 매혹성과 열매가 가진 초록 및 결실의 이미지 등은 실은 신화적 이미지에서 많이 구성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어요. 헤라 등 몇몇 여신을 둘러싼 '황금 사과'의 에피소드를 포함하여 사과는 영광과 영예의 상징물로 등장하곤 했으니까요. 글쓴이의 사과에 대한 개별적인 해석이 무척 빛난다고 생각합니다. -자수연 님이 자신의 고민을 텍스트에 충분히 투영시키고 그로부터 나름의 해석과 답을 얻어내려고 했다는 점에서 깊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또 문장에서 사용된 단어 및 문장을 구성하는 방식도 독특하다고 생각하며 이는 장점이 될 수도 있겠지요. 아름답고 수려한 문장은 언어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매혹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문장을 표현하는 방법 또한 여러 가지일 겁니다. 비유와 은유를 사용하는 방법이 있는 한편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여 글 전체의 논리를 부각시키고 짜임을 강조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저는 좋은 문장은 단순하면서도 정확하게 어떤 지점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장의 아름다움은 어쩌면 가장 단순한 것에서 발견될지도 모르겠어요. 이 점을 참고하여 자수연 님이 글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어떤 메시지가 조금 더 분명하게 전해질 수 있는 문장에 대해 생각해보시기를 권합니다.

    • 2019-06-05 23:52:41
    선우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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