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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그리는 인간의 사랑과 욕망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하여―한강론

  • 작성자 남거
  • 작성일 2019-12-31
  • 조회수 351

꿈을 그리는 인간의 사랑과 욕망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하여

―한강론

남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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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소설은 “내 몸이 보잘것없어 세상의 어떤 것도 나에게 엉겨 붙지 않는 듯한 느낌, 어떤 옷으로도 가릴 수 없는 한기”(『내 여자의 열매』, 한강, 문학과지성사, 2018, 28쪽)를 인물들에게 부여하는 척하면서 읽는 자들에게 쥐어준다. 또한 “약하고 연한 살성과 물질인 뼈로 이루어진 인간이 어떤 존재일 수 있는지”(『내 여자의 열매』 中 『빛을 향해 가는 식물의 춤』, 강지희, 문학과지성사, 2018, 377쪽)를 탐구하고, 고민하게 만든다. 깊으며 고통스러운 한강의 고심에 대해 어떤 말도 쉽게 시작할 수 없었다. 자신의 언어를 “누추하고 불가능한”(제 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中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소감, 한강) 존재라고 정의하는 한강. 감히, 염치 불구하고, 작가로서의 ‘한강’론을 시작해 본다.

 

  1. 판타지

한강의 작품에서 판타지적 요소는 시그니처 같은 존재다. 판타지적인 요소로 『작별』에서는 어느 순간 눈사람이 되어 버린 주인공이 등장하며,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에서는 죽은 사람이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상황이 주어진다. 『내 여자의 열매』에서 아내가 식물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한강은 작품에 판타지적인 인물 또는 상황을 자주 부여했다. 이로써 독자들을 사로잡음과 동시에 고차원의 욕망을 실현시키기도 했다. 한강은 독자들로 하여금 이런 황당한, 비윤리적인, 가끔 끔찍하게도 작용하는 상황을 현실에 있을 법한 상황으로 만드는 필력을 가진 작가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우리는 무섭다면 무서울 수 있는 한강의 독특한 구성의 작품 세계를,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자꾸만 찾게 되는 것이 아닐까.

 

  1-1. 꿈으로

한강의 초기 작품에서 이러한 판타지적인 요소는 주로 꿈에서 이루어졌다. 사실, 꿈은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꿈에서 일어나는 판타지는 판타지라고 할 수 없기도 하다. 오히려 너무 현실적인 꿈이 더 이상하지 않은가? 한강은 이상한 꿈을 제시하면서 ‘이상한 현실’을 쓰기 위한 시동을 걸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아기부처』에서 주인공은 아기부처를 만나는 꿈을 꾼다. 온화하고 사랑스러울 것 같은 아기부처는 주인공의 꿈에서 꺼림칙하고 끈질긴 존재로 등장한다. 땅에 묻어도 다시 끔찍한 얼굴이 나타나고, 흙으로 얼굴을 치대어도 어느새 멀끔한 얼굴로 주인공을 바라본다. 제목도 아기부처, 꿈에서도 아기부처다. 주인공의 모친은 병실에서 불화(佛畫)를 그리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면서 깨달음을 얻는 듯한 말과 행동을 보인다. 한강은 주인공의 모친을 부처로, 주인공을 아기부처로 삼고, 아기부처를 주인공의 꿈에 등장시켜 자신을 마주하게 하려고 했던 것일 지도 모른다.

아기부처 주인공은 한강의 다른 작품의 주인공들과는 달리 자신만의 탈출법을 고안하고, 고통의 증상과 원인을 완벽하게 파악하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어쩐지 꿈을 자꾸만 꾸고, 꿈속에서 아기부처를 마주한다. 실제로 작품에서 이혼 후의 계획까지 전부 구상해두었지만 작품은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고통 받는 남편,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술에 취한 채 집에 들어온 남편, 남편의 고통을 마주하는 주인공, 고통 받는 주인공, 자신의 고통을 낮추는 주인공, 꿈을 꾸는 주인공. 『아기부처』를 통해 한강이 꿈을 해결되지 않은 갈등과 욕망을 나타내는 공간으로 제시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채식주의자에서 영혜가 꿈을 꾸며 수차례 마주했던 ‘얼굴’과도 일맥상통한다.

 

  1-2. 현실에서

나아가서 한강은 과감하게 판타지적인 요소를 현실에 집어넣었다. 『내 여자의 열매』에서 아내가 작품의 현실에서 식물이 되었고, 『작별』에서는 ‘나’가 눈사람이 되었다. 주로 한강의 판타지적인 요소는 ‘변신’으로써 이루어진다. 욕망을 느끼고, 꿈에서 이를 마주하던 인물들이 비로소 욕망을 실현하게 된 것이다. 일단 재미있는 점은, 작품에서 변신한 인물들을 대하는 변하지 않은 인물들의 태도이다.

『내 여자의 열매』에서 아내는 식물이 된다. 가장 가까운 인물인 남편은 다른 여자를 만나거나 아내와의 이혼을 시도하는 둥 비윤리적이지만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을 취할 법도 한데, 그러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까지 본 아내의 모습 중 가장 아름답다’는 감상을 남기고, 그런 아내를 옆에서 부양하며 화분에 옮겨 심어주고 매일 약수를 떠다 다리(뿌리)에 뿌려주기까지 한다. 『작별』에서도 그렇다. 눈사람이 되어 버린 ‘나’의 애인은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내 곁을 지켜준다. ‘나’의 아들도 똑같다. 믿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눈사람이 말을 하고 움직이는 상황에서 믿지 않을 수도 없다. 부정하려 들지 않고 받아들인다. 오히려 언제 돌아오느냐며 담담하게, 그런 척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나에게 물어온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묻고 싶은 입장이겠지만 ‘언젠가 돌아올 것’이라고 답한다. 기약 없는 언젠가를 세 인물이 함께 기다린다. 한강은 이를 통해 독자들이 이 이상한 상황을 이상하지 않게 여기도록 했다.

1-1에서 제시된 꿈을 꾸는 인물들과, 현실에서 ‘변신’하는 인물들 사이에서 ‘바뀌길 원하는 자’와 ‘바뀐 자’의 차이를 볼 수 있다. 바뀌길 원하는 자들은 꿈을 통해 바꾸고 싶어 하는 모습을 마주한다. 반면 바뀐 자들은 적어도 보이는 부분에서만큼은 꿈을 꾸지 않는다. 변신의 욕망. 이것이 해결되고 나서도 ‘바뀐 자’들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변화의 결과를 기다리고, 결과는 제시되지 않는다. 이후 한강의 작품에서 바뀐 자들의 최후를 볼 수 있을지 없을지는 미지수이다. 그리고 그 최후가 죽음이 될는지, 초기화가 될는지도.

 

  2. 흔적 남기기

창조하는 행위, 예술적 행위. 이러한 행위는 한강이 ‘욕망의 가시화’를 위한 장치로써 적용시킨 것이 아닐까 싶다. 처음으로 그리는 행위가 자주 등장한다고 인지했을 때, 인간은 아무래도 시각적인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으므로 ‘그린다’는 동작이 많이 쓰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아니었다. 흔적이 남는 것이었다. 아기부처의 주인공은 삽화를 그릴 때 자신의 창조성이랄까 창의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강압적인 어머니와 단순히 행복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던 유년시절, 이혼 직전의 결혼 생활. 모든 것에서 벗어나 오로지 자신만의 고유한 흔적을 남겼다. 몽고반점의 형부 또한 비디오로 세상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고 했다. 한강은 왜 인물이 흔적을 남기도록 했을까.

한강이 원하던 것은 아닐까? 어디에든지 자신이 여기에 있다고, 살아있다고 알리고 싶어서 흔적을 남기려는 걸지도 모른다. 실제로 한강은 2남 1녀 중 막내이며, 위의 두 오빠는 일찍이 조산했다. 이렇게 한강은 태어날 적부터 죽음과 가까운 지점에 있었다. 산 사람은 어떻게든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기에 글을 써온 것이라면. 그리고 만들어낸 인물들에게 그림을 그리게 한 것이다.

특히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은 한강의 작품 중 자신이 가장 많이 녹아든 작품이 아닐까 싶다. 글을 쓰는 주인공에다가, 호텔방에서 문득 “죽은 사람이 찾아오면 차를 타 줘야지.”라는 한강의 상상에서 시작되기까지 했으니.

흔적을 씀으로써 회복하려는 것은 아닐지. 한강은 흔적을 남기고(또는 남겨지고)회복하는 전개의 작품을 다수 써냈다. 『노랑무니영원』의 첫 번째 단편인 『구멍』에서도, 복숭아뼈에 구멍처럼 생긴 상처를 두고 소설이 전개되었다. 이렇게 몸에 상처나 그림(『몽고반점』 참고)이 몸에 남은 인물들이, 그를 통해 겉이든 속이든 자가 치료를 하며 등장한다. 한강은 흔적을 남기면서까지 회복하고 싶은 부분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욕망이 가시화 된 결과물로써 쓴 걸까.

 

  3. 욕망

한강이 보여준 욕망을 크게 두 형태로 나눌 수 있었다. 한 가지는 방향(목적)이 있는 욕망, 다른 한 가지는 어떠한 공간이나 상태를 벗어난, 자유를 갈망하는 ‘탈출’의 욕망이다.

  3-1. 방향성을 가진 욕망

이러한 욕망을 띄는 인물은 대표적으로 『아기부처』의 상협과 『몽고반점』의 형부를 들 수 있다. 상협은 상승 욕구를 가진 인물이다. 직장에서의 수직적 상승은 물론이며 사랑에서도 상승을 바란다. 자신의 이상적인 사랑을 하고 싶어 하며, 이에 협조하지 않는 아내에게 차갑다, 매정하다고 말한다. 끝내 바람을 피기도 한다. 작품의 완결에 가까워질수록 상협과 주인공은 각자의 욕망을 충족한 듯하지만 결국 아기부처는 상협이 “여자는 모두 똑같다. 아니…… 사람은 모두 똑같다.”는 말을 남기고 잠에 빠져들며 무너지는 모습을 끝으로 더 이상의 이야기를 보여주지 않는다.

식물적 흔적을 가진 처제에게 욕망을 느끼는 몽고반점의 주인공 또한 상협과 비슷하다. 자신에게 없는 생명의 활기를, 손목을 그어 자살 시도를 한 처제에게서 발견했다. 그는 이후로 처제의 몸에 있는 몽고반점에 집착하며 자신의 예술적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한다. 이 예술적 욕망 속에는 활기와 젊음과 아름다움이 뒤섞여있다. 또한 살고자하는 갈증이 존재한다. 처제 역시 비슷한 욕망을 가지고 있으나, 처제는 스스로 채식을 시도하며 홀로, 적극적인 태도로 욕망을 채우고자 한다. 자신을 억압해오는 환경을 밀어내기도 하면서 말이다.

이러한 방향성을 띄는 욕망의 인물들은 모두 소극적이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남을 부추긴다. 상협에게는 아내, 형부에게는 처제 같은 존재들을. 전혀 다른 환경의 인물들이지만 비슷한 태도를 취하고 있음에서 한강이 비판하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3-2. 탈출의 욕망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은 주로 가부장적인 사회의 폭력에 갇힌 여자 주인공들이 가진 채 나타난다. 식물이 되어 버린 『내 여자의 열매』의 아내는 항상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한다. 고향을 떠나고 싶어 했고, 지긋지긋한 고향을 떠나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이야기의 현재 시점에서 살고 있는 집 또한 떠나고 싶어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떠날 수 없다는 무의식 때문인지. 아내는 집에서 식물이 되어 버린다. 집에 뿌리를 내리고 살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이는 아내의 독백(편지)에서 알 수 있다. 뿌리를 아래로 뻗고, 가지를 위로 뻗어서, 수평적이 아닌 수직적으로 어디론가 나아가려는 모습이다. 이 또한 방향성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의도가 전혀 달랐다. 오로지 탈출과 해방, 자유뿐이었다. 『채식주의자』의 영혜, 가부장적인 사회의 폭력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욕망을 갖고 식물이 되고 싶어 했다. 욕망을 실현하려, 또는 억압에 맞서려 채식을 강행한다. 두 번째 연작 단편인 『몽고반점』에서 몸에 꽃을 그리고, 형부와 반강제로 성관계를 하게 되며, 나체를 햇빛에 드러내며 식물의 광합성 작용을 흉내 낸다.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의 주인공 또한, 회사를 나와 버리고 원고를 펑크 내기까지 한다. 한강의 작품 중에서 드물게 주인공이 정말로 자리를 옮기며 탈출한 사례이지 않을까 싶다. 이 세 인물들 사이에서도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저항 중이라는 것이다. 3-1에서 언급했듯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저항하는, 적극적인 인물들이었다. 적극적이고 내밀하게 자신의 욕망을 상대하고 마주하는 아내나 처제 같은 인물을 소극적인 인물들과 함께 내세운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4. 닫으며

한강론이 아니라 한강 작품론이 되어 버린 것 같다. 모든 작품에 한강 작가가 녹아들었을 테다. 정답은 알 수 없지만. 한강이 무엇에 저항하고 있는지, 죽음으로부터 어디쯤에 있는지, 욕망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어떻게 사고하는지 얕고 넓게 살펴본 것 같았다. 앞으로 한강의 판타지 같은 현실, 현실 같은 판타지가 ‘누추하고 불가능한’ 언어로써, 어디까지, 얼마나 아래로 또는 위로 나아갈지 기대가 된다. 오만한 자세와 부족한 시선으로 쓴 한강론(論)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남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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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우은실

    남거 님 안녕하세요. 한강의 작품으로 쓴 비평 잘 읽어보았습니다. 작가론과 작품론을 요즘에는 아주 분명하게 구분하지는 않지만, 임의로 이런 방식으로 정리해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작가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작품을 읽어내는 것이 작가론이라면 작품에 방점을 찍고 주제나 형식에 대한 작품군을 논한다면 작품론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작가론이라고 해서 작가에 대한 배경지식으로 작품이 전부 설명되지는 않고, 마찬가지로 작품론이라고 해서 작가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이 글의 경우 작가론보다는 작품론으로 읽히는 것이 무방해 보입니다. -간결하지만 일정한 주제와 흐름으로 구획해놓은 개요가 인상적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짧게 써 놓은 글을 조금씩 호흡을 길게 하는 연습을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몇 가지 개념어를 사용할 때 그 의미나 이론적 활용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가령 윤리, 욕망에 대해 말할 때 무엇을 윤리라고 하며 무엇을 욕망이라고 하는지와 관련해서 글쓴이의 맥락을 짚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2. 흔적남기기에서, 소설에서 발견되는 인물들의 흔적 남기기를 작가의 그것과 동일한 것으로 추측하는 구절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추가 근거가 더 필요해 보입니다. 인물이 작가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작가의 욕망을 대변하는 것임은 사실이지만 그 욕망을 작가가 의식하거나 의도하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작가의 욕망이 인물에 '투영'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작품 내부적인 맥락이 아닌 작가로 환원시키는 것은 다소 일원론적인 논증이 될 수도 있으니 유의하면 좋을 것 같아요. -윤리, 욕망, 판타지와 같은 키워드들을 잘 골라냈다고 생각합니다. 관련하여 소설의 구체적인 구절을 삽입한다면 더욱 꼼꼼한 글이 될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활동을 기대해봅니다^^

    • 2020-01-05 19:13:02
    선우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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