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비틀린 사회와 끊임없는 연대 - 이혁진, 『누운 배』외,

  • 작성자 김캐슈넛
  • 작성일 2020-12-29
  • 조회수 631

많은 한국인에게 진도는 생각만 하더라도 가슴이 아픈 안타까운 사고인 세월호 침몰 사고와 같이 엮어져 기억되곤 한다. 2014년 봄은 사람들에게 가장 끔찍한 계절이었을 것이다. 천천히 기울어가는 여객선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수 없이 전화를 시도하려고도 했을 것이며, SNS에 다급하게 소식을 전하기도 했을 것이며, 그저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했을 사람들과 그저 조용히 지켜보는 사람들,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각자 노란 리본을 달고, 카카오톡의 화면이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문구로 노랗게 칠해질수록 우후죽순 비상대책본부를 만들어 집약되지 못한 지시들을 내리는 정부는 무능해 보였다.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지 못한 원인, 그리고 그사이에 의혹들. 돌고 도는 말 속에서 같이 떠다니는 책임은 유가족들의 눈물을 타고 흘렀다. 201X년 시대가 드디어 막을 내리고 새로운 202X년 시대가 도래한 지금, 지금 사회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진보(進步)하였는가? 아니면 수구(守舊)하였는가? 미래 시대로 나아가는 지금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이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지금을 짐작해야 할까?

이혁진의 제21회 한겨레문학상 당선소설 『누운 배』는 현대사회의 직장 내 사내정치, 비윤리적 관계의 관습화, 소수자들에 대한 묵언, 자신을 ‘피해자’로 인식하는 기득권에 대한 비판을 가상의 조선소 회사를 빌려 이야기한다. 소설은 텍스트를 넘어 우리에게 “회사생활은 가늘고 길게 해야 한다”라면서 “괜히 나서서 뭣 좀 해 보겠다고 들면 안 된다”고 ‘조언’한다.

사람들은 위계적인 구조에 대한 불평등함에 순응하고 자기 자신을 피지배층으로서 받아들인다. 소설 내 ‘팀장’이 이끄는 경영기획팀은 회장의 지시 하나로 원칙을 뭉개고 규칙을 악용하며 보험금을 최대치로 받기 위해 제대로 원인을 조사해보기도 전에 사고의 원인을 자연재해로 정해 놓고 결괏값을 벽돌처럼 끼워 맞춘다. 그는 보험사에 제공하는, 원래 만들어놓지 못한 자료를 아예 “새로 만들어서 준”다. 불법인 행위인 문서위조를 마치 누군가 시킨 것처럼 실시하고 지휘한다.

회사의 ‘일부분’으로써 자신의 법적 안위까지도 내던지면서 일을 하는 것이다. 보험회사 측 손해사정사가 각종 증빙 자료를 요구하지만, 원칙과 규정 없이 굴러가는 회사는 남아 있는 자료가 없거나, 간신히 있더라도 그 모양새가 조악하고 형편이 없었다. 필연적으로 문서와 문서 내 수치는 조작되고, 몇 년 동안 만들어지지도 않던 자료들이 며칠 사이에 순식간에 만들어진다. 구체적이게, 누가 봐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게 그럴듯한 허수들로 문서는 만들어지고 채워진다. 보험회사 실무진도 회사와의 다음 거래에 건조될 배에 대해 순조로운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조선소와 굳이 얼굴을 붉힐 이유가 없어 하는 수 없이 적당한 선에서 눈 감는다.

회장의 말 한마디에 인재로 인한 사고가 자연재해로 둔갑하고 만 것이다. 팀장은 이러한 회사를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보험 손해사정이 끝난 후 보상 성격의 인사발표에서는 전혀 포함되지 못한다. 임원들의 ‘공적 가로채기’ 인 것이다. 하지만 팀장은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한다. “팀장은 실상 징계나 다름없이 진급에서 누락됬고, 팀은 종지에 가로채기의 주범 중 한명인 양 이사 밑으로 들어갔지만, 아직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배가 누운 사내 비상사태에서 회사는 회생자금을 모으기 위해 직원들에게 ‘연봉협상’을 진행한다.

“(…) 1층 대회의실에서 연봉 계약을 실시한다는 내용이었다. 직급별로 시간이 나뉘어 있었다. 최하위 직급인 나는 맨 마지막 시간이었다. 동기인 부청, 혁준과 함께 회의실 앞에 도착하자 친한 대리 몇몇이 허탈한 얼굴로 회의실에서 나왔다. 이유를 묻자 맥 빠진 얼굴로 말했다. “들어가봐, 알게 될거야.”(…) 착석이 끝나자 인사팀 우 대리가 이름이 적힌 흰 서류 봉투를 나눠줬다. 봉투 안에는 연봉 계약서가 있었다. 연봉액, 계약조건, 당사자 이름을 이미 인쇄해 놓은 것이었고 비어 있는 곳은 서명란 뿐이었다. 곽 상무는 피곤하고 짜증스러운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맨 밑에 빈칸 보이지? 거기다 이름 쓰고 서명한 다음 봉투에 넣고 나가라. 서로 보여주지도 말고 얘기하지도 말고.” 한숨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연봉은 지난 해와 동일했다.“야, 이것들아, 배터져 죽겠다는 소리 내지 마라, 너희 위로 대리 이상은 모두 일괄 30퍼센트씩 연봉 유보했어, 알아? (…) 하여튼 요즘 것들은 다 저만 알아가지고. 나 말고 우리를 생각하란 말이야, 우리! 저 배가 일어서야 회사가 더 잘될 거고 회사가 잘돼야 니들 연봉도 오르고 복지도 늘고 할 거 아니냐? 쑥덕거리지 말고, 곱게 사인들하고 나가라, 알겠냐?” / 한 직원이 일어섰다. (…) “연봉협상은 당연한 직원 권리라고 생각합니다.” (…) “기도 안 차는 구만. 권리? 그게 권리란 말이지? 뭉치고 합쳐야 할 때 지 이익만 챙기려 드는걸? (…) 야, 다 필요 없다. 불만 있으면 나가! 야, 성진택이 너 지금 당장 나가라고! 너 같은 놈은 우리 회사에 필요 없다! 너네 위 대리들은 나 호구새끼라서 연봉 유보에 사인한 줄 알아? 그 위에 과장들, 차장들, 유보도 안 하고 아예 반납한 임원들은 병신들인 줄 알아? 야, 성진택! 너 당장 나가라고 임마!””

‘회사’는 개인들의 무조건적인 희생을 바탕으로 하는 운영방식을 요구한다. 저항은 배제한다. 자신들의 사회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곧 고사(枯死)가 된다는 것을 회사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회사’는 단순화되고, 독점적으로 변해간다. 개인들은 그 곳에서 ‘한 자리 차기’위해 ‘희생’한다.

권현지∙함선유(2017)는 외환위기 이후 고용 유연화의 압력이 강해지면서 한국의 사용자들이 연공성 임금제도를 노동자 측과의 충돌로 인한 거래비용을 줄이기 위한 주된 수단으로 이용해왔다고 설명한다. 조직 내 핵심 노동자들로부터의 협력과 최소한의 조직 안정성은 유지하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기업 내부의 노동시장을 분절해왔다는 것이다. 그 결과 기존에 제공하던 수준의 임금이나 제도적 지원은 극소수의 핵심 노동자들에게 집중이 되고, 기업에서의 자원과 지원이 집중되는 핵심적인 자리가 축소되어, 노동자들에 대한 불평등이 더 확대된다(권현지∙함선유. 2017. “연공성임금을 매개로 한 조직내 관계적 불평등: 내부자-외부자 격차에 대한 분석.” 『산업노동연구』 23(2): 1-45.).

이러한 불평등이 확산하고 구시대적 악 관습이 뿌리 깊게 내려있는 이 ‘회사’는 마치 우리 사회의 축소판을 보는 듯하다. 그러면 우리는 이즈음에서 하나의 의문점이 생긴다. 왜 우리 사회는 소수자를 등한시-멸시하고 누군가의 희생이 필수 불가결 적으로 있어야만 사회를 지탱하고 유지할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힌트는 이라영의 『타락한 저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에서는 ‘반지성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는 “알기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상태”이며, “자신이 혐오하거나 멸시하는 대상에 대해 ‘모르기’위해 애를 쓴”다고 말한다(「들어가며: 진지충의 탄생」,『타락한 저항 – 지배하는 ‘피해자’들, 우리 안의 반지성주의』, 이라영, 19면.)

대상에 대해 알기를 거부하면서 일방적, 권위적으로 명령을 지속적으로 지시하는 (업무)상황에서 약자는 저항을 포기한다. 대신, 자신의 상황을 스스로 미화시키고 재포장하여 사회의 필수적인 한 축을 차지하는 ‘문화’에 자신을 끼워 넣는다. 『누운 배』와 같은 계열의 연작소설『산 자들』에서는 “어디 계속 나돌아다니고 근태는 안 좋으면서 받을 것은 따박따박 요구하는 아가씨”로 그려지는 ‘혜미’란 인물이 등장한다. 그녀는 ‘붙임성 없는 아가씨’로 불리며 회사 사람들에게 불편한 눈초리를 받는다. 그리고 회사 업무에는 없는 ‘붙임성’을 기르라고 재촉받는다. 병원을 간다든지, 지하철 전동차가 고장나서 늦게 온다든지, 근처 지역의 지리를 몰라서 시위현장에 가지 못한다든지, 그녀는 ‘여러 핑계’로 각종 ‘업무’에 ‘불성실’하게 참여한다는 인상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업무의 맡은 일을 전부 수행한다. 더 일하지도 않고, 덜 일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직장과 먼 곳에서 거주하고 있어 전철을 타야하고, 전철의 노후화로 자주 멈춘다는 것이었고, 회사 사람들도 그 사실을 전부 알고 있었다. 그녀가 병원에 다녀야 한다는 것도 소견서와 진단서 제출로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지하였다. 하지만 ‘회사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계속 ‘그 아가씨’로 보이기만 한다는 것이다. “알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회사 사람들’은 자신들을 ‘피해자’로 규정하며, 전후 서사를 장악하고, 기존 ‘약자나 소수자’들의 움직임을 역차별이나 특권으로 받아들인다. 자기 연민으로 가득해 사회의 약자나 소수자들에 대한 배려를 오히려 ‘약자의 권력’으로 바라보며 억울함과 부러움을 느낀다. 오늘날의 ‘회사 사람들’은 시대의 ‘피해자’행세를 하는 것이다. 이 ‘지배하는 피해자’의 시각이 쉽게 ‘보편’의 위치를 차지해 여러 관점과 목소리를 깔아뭉갤 때, 보편과 객관, 중립의 위치에서 자신이 발화한다고 생각할 때 타인에 대한 지적, 윤리적 폭력은 쉽게 정당화된다고 이라영은 말한다.

이 글의 주제인 「비틀린 사회」 같이, 『누운 배』 속 회사는 우리 사회를 옮겨놓은 것만 같다. 이처럼 지금의 사회에서는 많은 사회문제가 발생하며 더욱더 ‘야생화(野生化)’ 되어가고 ‘날 것’ 이 되어가고 있다. 사회의 야만화(野蠻化)인 것이다. 이 물결은 TV에서도, SNS에서도, 그리고 우리 근처에서도 일어나고 있고, 우리는 수조 속 관상어처럼 모든 것의 전후를 알지 못한 채 물들어간다.

『산 자들』 中 , 「새들은 나는 게 재미있을까」에서는 교내 급식 비리를 밝힌 재학생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사학비리와 급식 비리를 사회에 알리기 위해 그들은 전단을 배포하고 실태를 알림으로써 진실을 알리고 참여를 호소한다. 이때를 맞추어 국회의원과 전교조가 합세하여 이에 대한 지지의견이나 시위를 하였다. 많은 사람이 시위와 기자회견을 하고 뉴스에도 올랐다. 학교는 사과문을 내고 개선을 약속하였다. 하지만 그때는 한순간이었다. 개선을 약속하겠다는 말은 허풍만이 가득 있는 거짓말이었고, 학교는 주동자를 윽박지르고 공개적으로 망신과 창피를 주었다. 몇 달이 지나고 형식상으로 이루어진 인사이동에서는 그저 자리만 살짝 바뀐것에 지나지 않는다. 급식의 품질은 바뀌지 않았고 비리는 계속 이어진다. 무릇 한번의 날갯짓으로 풀잎은 잠시나마 움직일 수 있겠지만, 뿌리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 밑의 거대한 것은 변하지 않는다.

“ (…) 정의의 승리냐고? / ……천만의 말씀. / 재단 이사장 명의의 사과문은 학교 홈페이지에 딱 사흘 걸려있었다. 학교는 그걸 학부모들에게 메시지로 보내지 않았다. 언론용이었다. 새로 바뀐 교장은 전날까지 세영중학교에서 교장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전날까지 세영고등학교 교장을 하던 사람이 중학교 교장이 되었다. 두 교장이 그냥 서로 자리만 바꾼 것이다. (…) 결과적으로 이사장은 아무 책임도 지지 않았고 어떤 손해도 입지 않았다. (…) 행정 실장이 된 옛 교무 교감이나, 유제 이탈 화법을 쓴 학생 교감을 보며 내가 왜 이마를 찌푸렸는지, 이제는 설명 할 수 있다. (…) 행정실장과 학생 교감은 날지 않는 새들 같았다. 마지막으로 날아 본 게 언제인지도 모를 비둘기들이었다. / 나는……."(「새들은 나는게 재미있을까」, 『산 자들』, 장강명, 370 – 378 page)

더는 정의롭지 못한 이들은 조삼모사처럼 겉모습만 바꾸어가며 자리를 한결같이 지킨다. “전단을 돌린 주동자를 찾”는 모습, 어머니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말하”는 ‘나’, 그리고 그 어머니에게 “몇 달만 꾹 참고 지내 주지 않을래?”하고 설득을 당하는 ‘나’는 더 이상 소설속 주인공이 아니다. 현실이다. 현실이 비틀려진 것이다. 이 사회는 비틀려졌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하루하루는 계속 찾아올 것이며, ‘나’는 눈초리를 받는 ‘관심인물’이 되어 졸업만을 앞두게 될 하나의 학생이 될 것이다. 그저 불의를 참지 못하는 별난 사람으로 평가절하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며 살아갈 것이다. 그것 마저도 몇 년 있으면 스러질 것이다. 사회는 ‘피지배층’을 한계까지 옥죄고, 잠깐의 자유를 주며 이용한다. 그때의 자유를 위해 지배인들의 마당에서 달리는 사람들을 위에서 지켜보면서 말이다. 인내를 거쳐 민중의 고무줄이 터질 응력이 모일 때까지 그들은 묵언하고 ‘어제를 이어갈’ 것이다. 그렇게 ‘사회’는 운영된다.

“분명한 것은 일을 일로 하지 않는 회사는, 야합과 담합으로, 협잡과 인습으로, 사람에게 일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일에 사람을 끼워 맞춰가며 시키는 회사는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치였다. 이치란 무엇일까. 거대한 배를 쓰러뜨리고 또다시 끌어올린 물리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모든 것을 관장하는 근본이다. (…) /차량 차단기 너머로 3년 동안 일한 사무동 건물이 보였다. 5층 높이에, 사명 현판이 있던 자리에는 자국만 있었다. 지난 겨울에 떨어진 뒤 다시 붙이지 않은 것이다. 회사가 어떻게 될까? 사람들은 어떻게 지낼까? 내가 잠깐 상념에 젖을 찾나, 김 팀장이 외쳤다. “빨리 온나.””(『누운 배』, 275면.)

여기에 회사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일을 일로 보지 않는 회사이다. 비상식적이고 비윤리적인 행위를 영위하며 사업을 이끌어나간다. 우리는 현실에서 이런 기업들을 통칭하여 말 그대로 ‘블랙기업’이라고 부른다. 블랙기업 이란 사전적 의미로 ‘직원에게 낮은 임금, 장시간 노동, 임금 미지급 등 불합리한 근무 조건에서의 노동을 강요하는 기업.’이라고 한다. 몰락하는 기업의 가장 전형적이고 대표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따르면, 전국 405개 기업의 올해 신입사원 채용실태를 조사한 결과 대졸 신입사원의 1년 내 퇴사율이 25.2%로 집계됐다. 4명 중 1명이 퇴사를 택하는 것으로 퇴사율은 2010년 15.7%, 2012년 23.6%로 계속해서 상승 추세다. 퇴사 사유는 조직 및 직무적응 실패(47.6%), 급여 및 복리후생 불만(24.2%), 근무지역 및 근무환경에 대한 불만(17.3%)이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사람을 일회용품처럼 쓰고 버리는 행태가 현 사회에서도 잘 나타난다는 것이었다(『쓰고 버리는 신입사원? 늘어나는 한국판 ‘블랙기업’』, 머니투데이, 신희은 기자,).

마지막으로 회사를 보는 주인공은 언뜻 보면 회사에 대해 연민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그는 큰 피해를 입은 채 도망쳐 나온 것이다. “잠시의 상념에 젖어들어가”기도 하지만, 팀장의 ‘온나’ 소리에 다시 정신을 차리고 움직인다(275면). 그곳은 계급이 나뉘어 있었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수명이 짧아진다. 쉽게 바꾸고 쉽게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그는 피지배층이었다. 피라미드의 밑에서 윗 사람들과 시스템을 지탱하기 위해 필요한 ‘자재’인 것이다. 자재에게는 복지가 필요하지 않는다. 누가 벽돌과 시멘트에게 존중을 하는가?

“…민중은 개돼지로 취급하면 된다. 상하간의 격차가 어느 정도 존재하는 사회가 어찌 보면 합리적인 사회 아니냐.”

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의 논란이 된 발언이다. 심각하게 타락한 엘리트주의 사고와 대한민국 헌법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이 발언에 사람들은 많은 충격과 분노를 느꼈다. 21세기에 벌어지고 있는 내용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과 같이 살아간다. 고위공직자의 위선과 표리부동으로 많은 국민들이 ‘개돼지’로 변해 살아왔다는 것을 그들 자신은 알고 있을까? 우리는 이런 반윤리적이고 부도덕한 사건에 대해 연대하고 반대의 움직임으로 대항해야 한다.

비록 『누운 배』에서는 배가 일어섬에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 회사와 인식에 환멸을 느껴 주인공이 회사를 벗어나 도망쳤지만, 현실의 우리들은 우리들만의 대규모 연대의식으로 권력층에 저항한다면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다행히도, 사람들은 2018-2019년에 일어난 사건들 – 케어 반려견 안락사 사건, 버닝썬 사건,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 – 등에 대해 각자의 방법으로 연대하고 지지의 의사를 보낸다. 스스로 의견을 표출하고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이다. 이미 촛불시위 – 혁명이라고 할 수도 있다 - 로 민중의 영향력을 깨달은 국민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행동에 앞서 있을 것이다. 지금 많이 대두되고 있는 환경문제, 지역 간 갈등문제, 젠더 -퀴어 등의 문제들과 이들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있는 사람들은 소수자들을 배척하는 기득권세력에 대항하여 자신과 그들의 목소리를 지켜낼 것이다. ‘

배’ 는 누웠지만 우리는 일어나 있다. 언제나 깨어있다. 필자는 이러한 불우한 현실 속에서도 꿋꿋이 행동하는 사람들의 가치와 중요성이 언제 어디서나 높다고 생각하며, 지금의 사회운동가들, 소신 있는 생활 속 사람들에게 격려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김캐슈넛
김캐슈넛

추천 콘텐츠

불편함 보존의 법칙(장류진 - 「도움의 손길」)

현대 사회는 엄격하고 차가운 경제원리로 집단을 감싸 쥔 채 정확한 시각으로 향한다. 합리적인 인간을 이상적 인간상으로 설정하고 이윤을 목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은 굳이 찾아보려고 하지 않아도 너무나 많은 것이 지금의 한국이다. 이 철저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 사랑, 관계는 더 이상 독립을 열망하지 않는다. 시스템 안에서의 공생이 이들의 변경된 목적지이다. 장류진의 소설은 소설을 통해 굳이 말하고자 하는 고리타분한 교훈이나 눈물 나는 감동은 없다. 대신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자기 인식, 신속하고 지속적인 실천,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존재한다. 소설 속에서 행동하고 움직이는 각 개인 -소시민- 은 가장 평범하고 특출난 것 없다. 그러나 현대인의 ‘선'을 명민하게 파악하고 관계 속의 희로애락을 조화롭게 이해하는 센스를 체득한 그들이야말로 새로운 소설의 메인이다.   「도움의 손길」에서는 처음으로 집을 마련한 딩크족 기혼 여성이 등장한다. 그는 ‘대출을 끼고 있긴 했’(130p)지만 자신 명의의 집을 자신의 기호에 맞추어 리모델링한다. ‘백화점 리빙바이어로 일함’(130p)으로써 높아진 수준의 인테리어는 여태껏 자신이 소유해 보지 못한 중압감으로 무겁게 다가온다. ‘그런 집에서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만 내 것 같지 않았’(130p)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자기 것을 ‘손님의 시선’(130p)으로 본다는 낯섬이 마치 갓 구매한 귀중품을 바라보는 우리의 행동과 겹쳐보인다. 누구나 새것 특유의 곧 사라질 깨끗함을 최대한 유지하고 싶은 마음은 있을 것이다. 그도 마찬가지로 ‘그 청결함을 계속 유지하고 싶’(131p)다고 생각했다. 가사도우미를 고려해보았지만, 자신도 피고용자의 처지에서 누군가를 ‘부린다’(131p)는 것이 내키지 않아 보류 했었다. 하지만 다른 회사 동료들의 선험을 목격하고, 회유와 설득에 끌려 도우미를 고용하기로 했다.   이 불안한 소유 감각과 이를 지키고자 하는 행동은 기대치에 맞지 않아 바꾼 세 명의 도우미를 넘어 온 네 번째 아주머니로 하여금 역설적으로 불안감을 더 증폭시킨다. 네 번째 도우미는 다른 도우미와 다르게 말을 하는 중 ‘대뜸 팔뚝을 때리기’(133p)도 하고, ‘은근한 반말과 아는 척’(134p)을 하며 부정적인 인상을 새겼지만, 그의 기대에 부응하듯 완벽한 청소 솜씨를 보여주었다. 그저 성격이 나와 다른 도우미로 생각하려는 찰나, “근데, 애는 왜 없어?”(136p)라는 질문으로 사(私)의 경계를 밟는다. 뒤끝이 찝찝한 그는 ‘청소만 잘하면 그만’(137p)이라고 일축한다. 그러나 도우미의 침범은 계속된다.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141p)기도 하며, ‘출근하는 시간이 늦’(147p)어지고, 자신의 오해로 생긴 일을 적반하장 하며 책임 전가를 하기도 하는 등, 도우미는 계속해서 고용-피고용자간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겨짚는 일을 계속 한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일당을 칼같이 챙기고, 시간이 없다고 불평하는 창틀 청소를 추금 1만 원에 화색이 돌며 무리 없이

  • 김캐슈넛
  • 2021-01-08
왜 당신만 불편해? - 한강, 『채식주의자』

나는 트위터를 자주한다. 다른 많은 소셜미디어를 하지 않고 왜 트위터를 먼저 시작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곳에서의 특색, 강하게 느껴지는 공동체성, 비주류의 사람들이 콜로니의 형태로 모여 있는 그곳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채식주의’라는 것을 밀접하게 느낀 곳도 이곳이었다. 스스로 채식식당을 공유하고, 레시피를 공유하고, 비윤리적으로 죽어가는 동물들을 안타까워하고 육식에 저항하려는 움직임, 그 행동이 매우 흥미롭게, 마치 길가의 잡초처럼 생존의지가 보였다. 이것이 내가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를 읽게 된 계기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영혜’는 어느 날 꿈 하나를 꾸게 된 이후 비건(채소, 과일, 해초 따위의 식물성 음식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 철저하고 완전한 채식주의자.)이 된다. 그 새벽에 가만히 나와서 냉장고를 서 있는 장면과 그 다음날 아무런 내색 없이 집 안의 고기를 전부 버리는 것 은 독자로 하여금 약간의 소름이 끼치게 한다. ‘고기를 수 없이 먹어왔던 집안에서 길러진 사람이, 식성이나 체질이 그런 것도 아닌 사람이 왜 이런 사람이 되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느낌으로 시작된 소설은 문체와 전개의 흡입력으로 페이지를 넘기게 하였다. 그녀의 꿈의 이야기는 마치 공포게임처럼 그로테스크 해 보였다. 요새는 심리적으로 공포를 주는 게임도 있지 않는가, 마치 그러한 느낌이었다. 18면과 19면의 그녀의 꿈을 보여주는 문단은 왜 그녀가 채식을 시작했는가. 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그 꿈은 계속 변화되고 확장되어간다. 고기를 먹는다― 라는 일차적인 것부터 점점 처음으로, 태고의 모습으로 변화되어가는 흐름을 보면서 질문은 변화되어갔다. “인간이 얼마나 변화될 수 있을까? 사회적 구속을 제거한 상태의 인간은 어떠한 모습인가?” - 그녀는 메말라갔다. 더욱 쇠약해져 갔다. 그녀의 꿈은 더 이상 꿈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녀를 지배하고 조종하는 또 하나의 의식으로 발전해 나갔다. 마치 나무뿌리처럼 그녀를 지배해 나갔다. 천천히 뿌리 내리지만 더 이상 제거할 수 없도록 변해간다.   나는 그녀의 폭력의 과거, 같은 과거 – 다른 기억 의 괴리, 어긋난 부정(父情)이 쌓이고 모여 터뜨려진 것이 이 이야기의 시작과 그 시초라고 생각한다. 자기 딸을 문 개를 잡아 음식을 만드는 기억은 아비로써는 딸을 위한 마음이라고 말 할 수 있지만, 그녀의 입장에서는 붉은 거품을 문 개가 속절없이 끌려 다니는 모습을 보며 고기, 육식과 존귀한 생명의 상대성이라는 비윤리적인 사회구조에 대해 혐오를 가지게 된 것이다. 곧 그 숨겨둔 의식은 요리를 하던 중 피를 맛봄으로써 쌓아둔 둑이 터지는 듯이 외부로 표출된다. 그 행동의 주된 표적은 가족과, 그녀의 남편이 된다. 그녀의 남편은 지극히 사회적이고, 아주 수직적 구조의 회사에서 근무를 하는 것을 통해 나는 ‘그’를 정형적 사회의 형상의 비유로 생각하였다. 그녀의 지향성에 걸림돌이 되는, 넘어서야 하는 장애물 이 되는 것이다. 남편의 말 중, “오늘 잘 해야 돼. 사장이 부부동반 모임에 과장급을 부른

  • 김캐슈넛
  • 2020-12-29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
  • 오은교

    김캐슈넛님, 안녕하세요.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지난 번과 같이 꼼꼼한 글을 써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김캐슈넛님께서는 1. 글을 매우 꼼꼼하게 독해한다는점 그와 동시에 2. 주제의식을 하나로 모아 글의 내적 완결성을 높인다는 점에서 분석적 글쓰기에 굉장한 강점을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감상만 나열되면 의견이 부족하고, 의견만 앞세우면 텍스트가 소모되기 마련인데 두 부분을 모두 잘해내고 계시다는 점에서 큰 칭찬을 드리고 싶습니다. 세월호 사건은 여러모로 안전 사고에 대한 이 사회의 구조적 무능이 드러났던 사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적해주셨다시피 그 책임 회피의 연쇄 과정에서 인재 참사가 단순 사고로 둔갑하는 정치적 기획이 일어났고. 여전히 저희는 그 프레임과 싸우는 중 같습니다. 세월호 사건 속에서 드러난 각종 조직들의 무능과 그 연쇄들 속에서 어떻게 피해자가 고립되게 되는지 국민들이 거의 실시간으로 체험했고 아마도 이 이혁진, 장강명 등의 작가가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대어 일종의 부조리한 회사 소설을 쓰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또 이 소설들로부터 시간이 조금 떨어진 곳에 있고, 김캐슈넛님도 이 소설들에서 드러난 완고한 구조주의와 무력한 패배라는 결말들에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으시는 것 같고, 저 또한 동의하는 바 입니다. 촘촘히 권력화된 시스템 안에서 개인의 행위자 주체성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늘 어렵고 조심스러운 문제이지만, 지적해주셨다시피 최근의 시민들은, 특히나 페미니즘 리부트 등을 주요 기점으로 하여 적극적으로 운집하고 연대하여 억압되었던 목소리를 내고 있죠. 시스템의 완벽한 외부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보다 말씀하셨다시피 그 안에서 주체성을 발견하면서 조금씩 무언가를 바꾸어내는 실천들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 요즘입니다. 냉소가 쉽지만,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 같아요. 텍스트를 선정하시는 방식, 과정, 분석 내용 모두 흥미로운데, 그럼 김캐슈넛님 다음 글도 고대하며 기다리겠습니다.

    • 2021-03-06 17:55:26
    오은교
    0 /1500
    •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