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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차와 상실의 감각에 대하여-소설 '바깥은 여름(김애란)'을 읽고

  • 작성자 솜나
  • 작성일 2022-10-22
  • 조회수 1,220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전에, 나는 책의 표지를 먼저 보았다. ‘바깥은 여름’ 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하늘색의 밝은 배경에 노란 문이 있는데, 한 여자가 그 문을 열고 어두컴컴한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나를 둘러싼 외부세계는 청명한 햇살로 빛나는데, 그 속에서 문득 오한을 느낄 때가 있다. 바깥은 여름인데 마치 끝없이 눈이 내리는 스노우 볼 안에 갇혀 있는 기분. 그럴 때는 도저히 내 앞에 놓인 얇디얇은 유리벽을 깨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렇듯 시간이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편드는 듯 시차가 존재하여 세상의 속도를 따라잡기 벅차올 때가 있는 것이다.

시차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을 하는 시간에 차이가 지게 하는 일’과 ‘하나의 물체를 두 방향으로 보았을 때의 차이’이다. 나는 이 ‘시차’로 대표되는 시간적 거리감과 ‘스노우볼’로 비유한 외부세계와 개인 내면 간의 단절감을 나타내는 공간적 거리감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라고 생각한다. 소설에는 시차 속에서 헤매는 여러 인물이 그려져 있다. <입동>에서는 자식을 잃은 부모와 처음에는 안타까움을 표하다 불행에 감염되기라도 할 듯 그들을 피하는 주변 사람들의 시차가, <건너편>에서는 어엿한 사회인이 된 도화와 노량진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이수 간의 시차가 나타난다. <노찬성과 에반>에서는 에반이 암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된 직후 찬성이 버스 창문 밖으로 ‘무자비한 초록’이 일렁거리는 8월의 풍경을 보면서 ‘몇 십분 만에 다른 세상에 온 것 같다’ 며 시차를 체감한다. 또한 <언어의 침묵>에서는 살아있는 언어 교본이 되어 전시되는 소수민족과 그것을 감상하러 오는 중앙 사람들 간의 시차가,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에서는 이미 엄마의 죽음에서 느꼈던, 죽은 이와 살아있는 이 간의 시차를 남편의 죽음을 통해 다시 깨닫는 명지가 그려진다.

 

그러나 <풍경의 쓸모>와 <가리는 손>에 나타난 시차는 좀 다르다. 여기서는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인물, 신뢰하고 있던 인물의 전혀 다른 면을 알게 되면서 나타나는 ‘시차’ 가 작품의 주된 정서를 이룬다. <풍경의 쓸모>는 다른 사람과 바람이 나 가족을 버리고 도망간 아버지를 둔, 대학 시간 강사로 일하는 정우의 이야기이다. 정우는 임용시험을 봐서 정교수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환갑잔치 겸 온 태국에서 이전에 음주운전 과실을 정우에게 떠넘겼던 곽 교수가 유난히 그를 반대했다는 것을 듣게 된다. 망연자실한 그에게 또 하나의 부고가 도착하는데, 그것은 암 투병을 하던 아버지 내연녀의 사망소식이다.

“그 손은 부정을 가려내는 손, 원칙을 세우는 손, 폴트 fault와 더블폴트 double fault를 외치는 손이었다. 동시에 몇 년 만에 만난 아들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손이기도 했다.”

정우의 아버지는 테니스 심판으로, ‘누군가의 잘못을 판정하고, 규칙을 알려주고, 벌칙을 부과하며’ 운동하는 사람 특유의 단정함과 엄격함으로 무장한 사람이다. 그러나 동시에 가족을 등져 아들을 볼 면목이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렇듯 이 문장은 사람을 하나의 관점으로만 보아 단정 지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정우가 아버지에 대해서 느끼는 시차를 잘 표현하는 문장이기에 주제를 관통하는 문장이다.

<풍경의 쓸모>에는 아버지에 대해 느끼는 시차, 곽 교수에 대해 느끼는 시차, 그리고 임용결과와 아버지의 금전 요구로 인해 정우의 마음이 여름 나라인 태국에 와서도 줄곧 겨울인 한국에 머물러 있는 것 총 세 가지 시차가 나타난다. 정우는 자신이 강사로 일하는 대학 곽 교수의 직관적이고 얽매이지 않는 성격을 동경한다. 그러나 곽 교수는 자신이 한 음주운전의 책임을 정우에게 떠넘기고 추문을 걱정한 나머지 그를 임용시험에서 떨어뜨리기까지 한다. 이렇게 때때로 우리는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서 전혀 다른 면을 발견하기도, 그것에 실망하기도 한다. 이러한 소재는 수록된 다른 단편으로 이어진다. 다른 단편인 <가리는 손>에 수록된 다음 문장을 보자.

 

”춥고 어두운 겨울밤. 아이와 나 사이에 노란 빛이 일렁거린다. 불빛 아래서 우린 왜 조금씩 달라 보일까.“

다문화 가정 아이인 재이의 엄마는 재이의 생일인 오늘, 아이가 자란 과정을 회상하며 생일상을 차린다. 그 중 하나의 장면에서 생각은 멈추게 되는데, 그건 바로 며칠 전 재이가 노인 폭행 사건의 목격자가 된 일이다. 10대 아이들이 한 노인을 때려죽이는 것을 목격한 재이는 왜인지 신고를 하지 않고, 신고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재이 엄마는 나름의 까닭이 있겠거니 생각하며 재이가 받았을 충격을 더 걱정한다. 한편 재이는 다문화 가정 아이라는 이유로 ‘저런 애들이 울분이 많을 것’ 이라며 사실은 재이가 사건의 주동자라는 이웃들의 근거 없는 소문에 시달린다. 곧이어 학원에 갔던 재이가 돌아오고, 재이 엄마는 생일파티 도중 조심스럽게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며 그 애들이 뭐라고 하며 노인을 때렸냐고 묻는다. 그때 재이는 생일 촛불 아래서 슬며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틀딱?“ 이라는 말을 내뱉는다. 그 순간 재이 엄마는 기시감에 사로잡히고, 어쩌면 사건 현장 CCTV에서 본 얼굴을 가리는 모습의 재이가 놀란 것이 아니라 사실 웃음을 가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단편 소설에서 재이 엄마가 보게 되는 재이의 다른 모습, 즉 재이의 시차는 ‘불빛’ 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나타난다. 과거 재이 엄마는 크리스마스 교회 합창 공연을 보러 가서 교회 안 빛 덩이가 만드는 고요하고 경건한 분위기에 경도된 채 재이의 노래를 듣는다. 그리고 ‘내 안의 어떤 것이 너를 그렇게 만드는 걸까, 그건 어디서 온 걸까?’ 라며 경외감을 느낀다. 그러나 현재로 돌아와서, 재이 엄마는 생일 초 아래에서 재이가 ‘웃음을 가렸다’는 것을 알게 되며 교회의 빛덩이 속에서와 반대로 재이의 어두운 이면을 보게 된다.

책에는 노인 폭행사건에 휘말리게 된 재이에 대해 생각할 때 재이 엄마의 목소리로 두 번이나 이런 문장이 나온다. ‘태곳적 사람들도 불을 피웠겠지. 춥거나, 허기지거나,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을 때.’ 신고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거짓말을 한 재이, 다문화 가정을 둘러싼 이웃의 수군거림은 모두 버겁기만 한 것들이기에 재이 엄마는 누군가에게 도움이라도 요청하고 싶은 심정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피운 불은 오히려 외면하고 싶었던 재이의 이면을 비추며 극적인 효과를 낳는다.

재이 엄마는 ‘가리는 손’의 의미를 깨달은 후 불빛 아래서 드러나는 진실한 모습을 외면하며 어둠 속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 재이 얼굴을 찾으려 하고, 그동안 자신이 재이에게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한다. 사랑하는 아들의 ‘시차’ 에 적응하지 못하는 재이 엄마처럼, 아끼고 신뢰하던 이의 다른 면이 불빛 아래서 드러나도록 하는 소설적 장치는 독자인 나에게도 큰 반전과 충격을 주며 여운을 남겼다.

작품을 다 읽고 나니 제목인 <가리는 손>은 재이와 재이 엄마의 상반된 생각, 즉 동상이몽의 의미를 내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재이 엄마는 재이가 희생된 노인의 장례식장에 가서 추모하기를 바라며 ‘밥 먹는 손 가리는 예’인 절하는 방법을 일러 준다. 그러나 실상 재이는 폭행 장면을 목격하며 ‘웃는 표정을 가리는 손’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강렬하고 빠른 속도로 휙. 그렇지만 각자 내부에 무언가가 타서 없어졌다는 건 알아. 스쳤지만 탄 거야. (중략) 그 검댕이 자기 내부에 자신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암호를 남긴, 상대가 한 말이 아닌, 하지 않은 말에 대해 의문과 경외를 동시에 갖는. “

이 문장은 재이 엄마가 재이 아빠랑 헤어진 까닭을 회상하면서 한 독백이다. 나는 이 말이 재이의 ‘가리는 손’으로 인해 ‘시차’를 맞닥뜨리고 혼란스러운 재이 엄마의 심리에도 대입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물론 엄마와 아들이라는 표면적인 관계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재이 엄마는 앞으로 재이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줄 수도 없을 것이며, 이 일에 대한 의문은 영원히 가슴 속에 ‘검댕’으로 남을 것이다. 순식간에 스치듯 일어난 일이지만, ‘상대가 한 말이 아닌, 하지 않은 말에 대한 의문과 경외를 동시에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이러한 경험을 자주 한다. 금방 잊고 평소의 관계로 돌아오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검댕’이 가슴 속에 쌓여 지워지지 않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관계의 파국을 부른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다. 인간이기에 ‘다른 면’이라 불리는 이중성을 가지는 것이고, 그런 타인을 이해하려고 머리에 쓰는 모자 같은 ‘품’이나 다름없는 이해를 집어 들며 상대를 포용한다.  나는우리의 그런 면모가 우리를 진정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당신이 무언가를 가뿐하게 요약하고 판정할 때마다 묘한 반발심을 느꼈다. 어느 땐 그게 타인을 가장 쉬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한 개인의 역사와 무게, 맥락과 분투를 생략하는 너무 예쁜 합리성처럼 보여서. “

이것은 같은 단편에 나오는 문장이다. 나는 이 문장을 처음 읽고 생생한 충격을 느꼈다. 타인을 가장 쉬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한 개인의 역사와 무게, 맥락과 분투를 생략하는 너무 예쁜 합리성.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예쁜 합리성’을 가지고 있다. 살면서 ”저 무리는 그래서 저래.“ ”저 사람은 원래 저래.“ 라는 말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예쁜 합리성은 사고하기 간편하고, 개별 현상을 하나로 묶어 굳이 힘들여 ‘품’이 드는 이해를 할 필요가 없게 만든다. 그러나 ‘예쁜 합리성’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을 일반화 하고, 지금까지 다루었던 주제인 ‘개인의 시차’, 즉 개인의 여러 측면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그 일례로 <가리는 손>을 읽으며 다문화 가정 아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하고 주동자라는 누명을 쓰게 된 재이는 무조건적으로 선한 인물이라고 나도 모르게 생각해 왔다.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에 드러난 반전은 마치 그런 나의 생각을 비웃는 듯 했다.

다시 <풍경의 쓸모>로 돌아가 보자. 정우는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의 휴대폰 배경화면에 있는 아버지와 내연녀의 등산 사진을 보며 이 두 사람이 '사진을 찍을 때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 무척 평범한 사람, 좋은 일은 금방 지나가고, 그런 날은 자주 오지 않으며, 온다 해도 지나치기 십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 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과 어머니의 인생을 나락으로 빠뜨린 둘이지만, 결국에 그 사람들도 평범한 사람이며, 어떤 이에게는 좋은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인 것이다. 또한 전화를 받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여자 때문에 떠난 젊은 아버지' 가 노안이 되었음을 알게 되며 아버지가 특별히 나쁜 악마가 아닌, 그저 평범한 사람임을 실감하는 장면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내가 소개하는 마지막 문장은 '상실'에 관하여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문장이다.

“그 이상하고 찌르르한 느낌, 언젠가 만나게 될, 당장은 뭐라 일러야 할지 모르는 상실의 이름을 미리 불러 세우는 소리였는지 모른다.”

김애란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가끔은 소설 속 이들이 여전히 갈 곳 모르는 얼굴로 어딘가를 돌아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고 한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각자 어딘가 잘못된 상황에 놓여있고 그 속에서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에 휩싸인다. <입동>의 주인공은 '중앙은 아니나 주변도 아닌 곳에 어렵게 도착한 기분' 이라며 힘들게 꾸린 가족과 집을 자랑스러워 하지만 아들 영우의 죽음 이후 '결국 그렇게 도착한 곳이 여기였나?' 라며 회의감을 느낀다. <노찬성과 에반>에서 찬성은 에반의 죽음 후 에반을 처음 만났던 날 느꼈던 '뜨뜻미지근하며 간질거리던 무언가', '다시 만질 수 없는, 당장은 뭐라 불러야 할 지 모르는 무언가'가 사라졌다는 것을 인지한다. <풍경의 쓸모>에서 정우는 지금까지 살아온 서울에서 떠나 지방 근무를 하게 된다. 그리고 중앙에서 벗어나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인 풍경과 하나가 된 자신에 대한 불안을 느낀다. 그 밖에도 이들은 한 시절을 함께 보낸 연인과의 이별, 남편의 죽음, 언어의 소멸을 통해 밀도 높은 상실을 경험한다. 나는 그런 점에서 작품을 통해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시차' 외에도 '상실의 감각' 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상실은 보편적인 경험이다. 상실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내면세계에서 벗어나 외부로 눈을 돌리고, 타인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서 명지는 죽은 남편이 종종 대화하던 인공지능 시리에게 삶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시리는 '삶은 기쁨과 슬픔 사이의 모든 것' 이라는 대답을 들려준다. 삶에는 기쁜 일만 있을 수는 없다. 누구나 불가항력적으로 삶의 힘든 국면을 맞게 되며, 그것이 상실의 형태로 다가올 때가 있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 있기에 삶에 대한 기대가 존재하는 것이다. 명지가 그날 남편이 물살 속에서 구하려고 했던 중학생 아이의 급박했을 눈동자를 떠올리며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것이 아닌 '삶'이 '삶'에게 뛰어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듯이 말이다.

나는 이전에 김애란 작가가 쓴 <비행운>이라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처음 읽었을 때는 중학생이었다. '비행운'은 새로운 삶을 동경하는 비행운(飛行雲), 하지만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연쇄적 불운인 비행운(非幸運)에 놓인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비행운(飛行雲)의 꿈을 꿀수록, 비행운(非幸運)의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나는 마치 무언가를 찾으려 안개 속 들판을 헤매었지만 결국 찾아낸 것은 또 다른 안개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손 댈 수 없는 무력감이 느껴졌다. 도대체 이런 우울한 책은 왜 쓰는 것이고, 독자들을 이렇게 무기력하게 만들어도 되나 하는 생각에 다시는 읽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2학년, <바깥은 여름>을 읽은 직후 <비행운>을 발견했을 때 나도 모르게 그 책에 손이 갔다. 그리고 그제서야 작가의 집필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작가는 이 두 작품을 통해 우리가 필연적으로 겪는 상실에 대한 위로를 건네고 고통을 끌어안는다. 곧 사라질 것, 그래서 소중한 것을 조명하고, 동화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기 보다는 삶의 거친 단면을 드러내며 인간으로서 언젠가 겪을 수밖에 없는 아픔을 포용한다. 처음에는 뼈를 드러낸 가장 깊숙한 내면 이야기를 읽는 것이 고통일 수도 있으나, 다시 읽어보면 공감하고, 한 번 더 읽으면 위로 받는 것이 이러한 소설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시차와 상실로 인해 풍경과 계절이 나만 빼고 자전하는 듯 시간은 끊임없이 뻗어 나갈 때, 그러나 어느 한 순간에 붙들린 채 멈춰서야만 할 때', 이 소설을 읽어 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조금만 더 용기를 냈으면 좋겠다. 말 그대로, 바깥은 여름이니까.

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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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은교

    솜나님 안녕하세요! 이 게시판에서는 처음 뵙는 것 같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시차'라는 단어의 의미에 주목하여 시간과 시각의 차이 모두를 일별하는 감각이 글 전체를 잘 관통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주로 애도, 상실 등의 키워드를 통해 읽어왔었는데, 솜나 님이 제시해주신 시차라는 키워드로 읽으니 조금 더 인물들 간의 미묘한 차이들이 잘 감지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나 길게 상술해주신 가리는 손에 대한 분석이 탁월합니다. 이 소설은 다문화 가정의 아이로서 그가 겪은 상처의 역사, 솜나님처럼 이들이 무해한 존재일 것이라는 독자들의 기대, 극우화되는 사회에서 다문화 이혼 가정의 아이를 키우는 여성의 심정 등이 다양하게 교차되는 이야기인데, 이 복잡한 결들을 솜나님께서 잘 파악하신 것 같습니다. 모든 비평 글쓰기의 시작은 꼼꼼한 독해에서 출발하는데, 그런 점에서 비평의 미덕을 잘 이해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문장을 인용하고, 그 의미를 설명해내고자 성찰적으로 독서를 잘 하신 것이 글에서 잘 드러난답니다. 앞으로도 이 게시판에서 솜나님을 자주 다시 만나고 싶네요. 수고하셨습니다. 또 만나요!

    • 2022-11-18 19:39:11
    오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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