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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그리고 둘 - 절반의 진실과 살아가기

  • 작성자 GLOBE
  • 작성일 2023-02-14
  • 조회수 922

관계 속 외로움을 느끼거나, 삶이 버거워질 때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바로 대만의 한 가족, 나아가 인생을 다룬 에드워드 양 감독의 유작인 <하나 그리고 둘>이다.

 어린 양양은 카메라로 사람들의 뒷모습을 담는다. 사람은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 없다며, 자신이 그들을 도와주겠다며 그들의 뒷모습을 담은 사진을 나누어주곤 한다. 양양이 담은 사람들의 뒷모습에는 주목하지 못한 인생의 이면이 숨어있다.

 할머니가 갑작스럽게 쓰러져 침대에서 깨어나고 있지 못하자, 의사는 가족들에게 할머니와 지속적으로 대화하라고 이야기한다. 가족이란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지만, 그 가까운 거리 때문에 오히려 꺼내지 못할 말들이 있다. 일상 속 권태와 업무에 시달리며 힘겨워하는 양양의 어머니 민민, 사업의 어려움을 겪던 중 전 애인을 만나 흔들리는 양양의 아버지 NJ, 처음 하게 된 연애와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관계에 놓인 NJ의 누나 팅팅까지 그들은 모두 할머니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의식이 없는 할머니는 그들이 숨겨둔 이야기를 묵묵히 듣거나 흘려버릴 뿐이다. 양양은 할머니가 듣지 못할 것이라며 이야기하지 않지만 말이다.

 영화는 어느 한 인물에 초점을 두지 않고 모두의 이야기를 평행하게 배치시킨다. 모든 인물은 각자의 인생에서 각자의 문제를 직면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문제는 우리가 절반의 진실만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 발생한다. 콘돔을 풍선이라 생각해 학교에 가져온 양양과, 학교에 콘돔을 가져온 양양을 혼내는 선생은 모두 자신이 보는 절반의 진실 속에 마찰을 겪는다. 30년 전 첫사랑에게 이별을 말했던 NJ도 이별의 이유인 절반의 진실에 대해서는 함구했었다. 온전한 진실은 언제나 온전히 이해 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시선은 사람의 앞모습을 보고 있을 뿐이다. 전할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이 온전한 진실이라면 가깝기 때문에 전달할 수 없었던 그 말들을 전했을지도 모르겠다.

 인물과 인물 사이, 절반의 진실과 또 다른 절반의 진실 사이는 롱 쇼트에 담긴다. 쇼트에 담긴 관계가 온전해 보인다고 간과할 우리를 경계라도 하는 듯, 그들의 표정은 읽을 수 없다. 관객 역시 절반의 진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영화의 느리고 긴 호흡 속에서 타인의 삶을 유영하다가 문득 자신의 삶 속임을 느낀다. 등장인물이 이야기하기도 했듯, 사람들은 영화를 보며 경험을 통해 3배의 삶을 살아나가고 있다.

 할머니의 죽음 이후 가족들은 다시 모이게 된다. 절반의 진실 속 스스로 투쟁하던 가족들은 온전한 진실을 찾지 못하지만, 그들이 내릴 수 있는 유의미한 결론들을 가지고 장례식에 참석한다. 그리고 양양은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할머니에게 쓴 편지를 낭독한다.

 할머니 죄송해요. 할머니와 이야기하는 게 싫었던 게 아니에요. 무슨 말을 할까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할머니가 이미 알고 계실 것 같았어요. 모두 할머니가 멀리 갔다고 말해요. 그런데 할머니는 어디로 가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지 않았어요. 제가 알 거라 생각하신 곳인가 봐요. 할머니 전 모르는 게 많아요. 제가 커서 뭘 하고 싶은 줄 아세요? 남이 모르는 일을 알려주고 못 보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그럼 날마다 재밌을 거예요. 할머니가 계신 곳도 알겠죠. 그럼 할머니께 가도 되나요? 할머니 보고 싶어요. 특히, 이름도 없는 제 사촌동생을 볼 때요. 할머니가 항상 이제 늙은것 같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요. 저도 이제 늙었다고 느낀다고 말하고 싶어요.

 에드워드 양 감독은 절반의 진실에 갇혀 사는 우리의 인생을 긍정한다. 어린 양양은 할머니의 나이 듦에 대해서 공감해 주고, NJ는 만약이라는 무의미한 가정에서 벗어나 현재를 바라보고, 팅팅은 친절을 베푼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식론적 한계에 가장 인간적으로 대답한다. 절반의 진실(一)일지라도, 또 다른 절반의 진실(一)과 함께라면 또 다른 하나(二)가 된다. 삶이라는 가장 큰 경험적 보편성에 양양의 마음이 닿지 않는 구석이 없다. 이 영화는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하나 그리고 둘이 되는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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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LOBE
  • 2020-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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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은교

    BLOBE 님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절반에 갇혀 사는 삶 속에서도 각자의 유의미한 결론이 있고, 그것이 하나 그리고 둘 모였을 때 가치가 있다는 전체의 논지가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양식과 잘 만나는 것 같습니다. 양양이 가진 카메라, 즉 진실을 탐구하는 빛을 쫓아가는 것으로 시작되는 영화의 인트로가 인물들 각각의 명과 암을 보여주려는 영화의 목적과 잘 상응하는 것 같습니다. 교차편집이 참 멋진 영화이기도 한데, 영화라는 매체가 편집의 예술이기도 하니 특정 장면이 교차 편집되는 것을 또 하나의 비평과 감상 포인트로 삼아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영화에서 그리는 인물들의 감정, 즉 내용뿐만 아니라 그 감정들이 표현되는 형식에도 주목하는 연습을 많이 해본다면 감상을 넘어선 비평적 글쓰기의 한 갈래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짧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GLOBE님의 다양한 글을 접할 수 있어 좋았어요. 글쓰기가 GLOBE님의 좋은 친구가 되어주기를 바랄게요.

    • 2023-03-23 21:54:00
    오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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