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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담아낼 수 있다면, 분명 마음의 모양이겠지 - 불교 사상을 중심으로 안미옥의 ‘온’ 읽기

  • 작성자 모모코
  • 작성일 2023-11-08
  • 조회수 565

작고 부드러운 마음들을 담기에는 어떤 그릇이 제격일까마음에도 질감이 있다고 해볼까그렇다면 너무나도 보드랍고 섬세한 입자들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타인은 물론나의 두 손으로도 쉽게 만질 수 없는잘 놓쳐버리고 흘러 내려가는마음들그러니까 일상적인 언어로는 좀처럼 표현할 수 없는그런 마음들조금은 추상적이고 조금은 아리송하게 다가오지만분명히 미세한 마음들은 우리 가슴에 있다나는 그런 마음을 담기 위해 시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오직 시만이 우리의 여린 마음을 담아낼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그러나 우리는쉽게 털어놓지 못할 마음을 시라는 그릇 속에 찬찬히 털어낼 수 있다함축과 비약이라는 찰흙으로 구워진 그릇그 위에 이미지와 리듬이라는 유약을 입힌 그릇그것이 바로 시이기 때문이다가끔은 추상적이고가끔은 또 아리송하게 다가오는시는 마음과 물성이 비슷해 보이기도 하다시는 비유와 묘사로써 비약이라는 질감을 빚어낸다이 질감 위에서 마음은마음대로 자신의 무른 면을 숨길 수 있다또한 자신의 빛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함축된 행간 사이에서 마음은가장 선연하게 반짝일 수 있다그것이 내가 시에 대해 느끼는 바이자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그릇도 여러 가지 모양이 존재한다이를테면 동화 여우와 두루미에 나온 것처럼나의 입에 가져다 대기에는 너무 좁고 당신의 입가까지 가닿기에는 너무 납작한 그릇도 있을 것이다시 또한 그러하다그리고 나는 그 그릇들을 나쁜 그릇이라 칭하진 않을 테다저마다 그릇을 빚어내는 장인시인들의 손길이 깃든 소중한 그릇이니다만 사람마다 더 와닿는 그릇이 있을 뿐이다그리고 대개 사람들에게 더욱 잘 맞는 그릇이 있을 것이라 믿기도 한다그 짙은 믿음은안미옥 시인의 시를 읽음으로써 도착한 것이다안미옥 시인의 시집 중 특히나 을 읽으며 말이다.

안미옥 시인의 은 그의 첫 번째 시집으로간결한 시집의 제목이 눈에 띈다마치 그릇 위에서어떤 모습은 드러내고 어떤 모습은 감추어 가며 당신들에게 다가가겠다는 느낌으로더불어 표지의 알록달록한 무늬들이 눈에 띄기도 한다서로 겹쳐가며 다양한 색을 만들어내는 것이 마치 사람들의 마음이 충돌하는 지점 같기도 하다시집 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이것이다바로 유독 마음이라는 단어의 사용이 잦다는 것시집에 수록된 시들 중 총 20여 의 시에서 마음이 한 번 이상은 쓰이고 있다자신 있게 마음을 내보인 시인의 시는 어떨까실체가 없으며 끝도 알 수 없는 마음은세계나 우주와 같이 시를 쓸 때 꺼려지기도 하는 단어이다아름답지만자칫하면 나의 시 또한 실체가 없어지며 끝도 없어지는흐릿한 시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안미옥 시인은 시집 표지의 선명한 색들처럼생생하면서도 간결한 마음의 풍경을 그려낸다실체가 없는 마음쉽게 흘러가 버릴지도 모르는 작은 마음들을안미옥 시인은 자신만의 그릇에 담아내어 마치 손에 잡힐 것처럼 만들어내는 일에 뛰어나다.

 

안미옥 시인의 시는구체적이지는 않다확실한 시적 서사를 제시하거나 친절하게 화자의 상황을 알려주지는 않는다대신적절히 생략된 문장과 연과 연 사이의 여백 속에서 독자들이 화자만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도록 한다나는 이 산뜻하고도 우리에게 잘 와닿는 불친절함이마치 불교의 유식 사상을 떠올리게끔 한다 느꼈다유식 사상은 대승 불교의 핵심 사상으로오직 의식뿐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현상 세계는 의식의 장난에 불과하고의식을 떠나 객관적 실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이다이 의식은 곧 마음이며유식 사상을 믿는 유가행파의 주요 관심은 객관적 세상의 존재 여부에 있지 않다바로 우리의 마음에 있다유식 사상가들은 현상 세계의 일보다 인간의 오감에 따른 의식과 그 내면의 자기중심적인 마음을 강조한다유식 사상을 경유하여 표제작 을 살펴볼까우선 안미옥 시인의 시는 고백의 형태를 빌려 전개된다독백보다는 조금 더 자신을 위한솔직하면서도 속삭이는 듯한 문장들은 어쩐지 절간에서 두 눈을 감고 향냄새와 함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떠올리게끔 한다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없는 것에 대해서만 말했다는 고백과그리고 이 없는 것이 무엇인지는시의 1연에서 알 수 있다날지 못하는 새의 이름녹슨 나사깨진 창문에 비치는 얼굴을 등장으로써새는 극히 일부 종을 제외하면 날 수 있고녹슨 나사와 깨진 창문에는 얼굴을 비추어 볼 수 없다이렇듯 혼란스러운 현상 세계는결국 의식의 장난에 불과한 것이다화자는 없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그러므로 세계는 없는 것들로만 가득한 어지러운 세계가 된 것일 테다화자는 계속해서 창밖을 보지 않기로 했다거나, ‘나는 하류로 가지 못했다고 말하며 무너지고 있는 집과 죽은 비둘기떼’, ‘뒤집힌 우산들에 대해 말한다그러나 시는 후반부에 가서 전복된다화자는 나는 이제 남아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며 수미상관을 맺는 고백을 한다이후 화자의 세계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소문들만 들려오며 없는 것들만 보이던 세계로부터화자는 끊어지지 않는 볕의 세계로 간다화자는 큰비를 맞을 준비를 하며아마도 자신을 괴롭게 하며 멈추게 있게 하던 원인인 소문에서 가장 먼 곳으로’ 가겠다 한다마침내 화자는 자신이 원하던 하류에 도달할 수 있게 된 것이다이렇듯 은 화자의 마음먹은 상태를 알리는 고백에 따라 시적 분위기와 세계가 확연하게 바뀐다우리의 삶도 아마 그러하지 않을까유식 사상 또한 그렇다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불교의 핵심 사상인 제법무아 사상처럼정해진 ’, 정해진 은 없다세계는 고정적이지 않다오직 마음에 의해 유동적으로 움직일 뿐이다.

 

이렇듯 안미옥 시인의 그릇은다소 불교적으로 읽힐 수 있다세계는 마음을 중심으로 작동할 뿐만 아니라 그 마음이 화자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니까다른 시를 살펴볼까.

 

 

톱니

 

어린 나는

무너지는 마음 안에 있었다

 

무너지는 것이 습관이 된 줄도 모르고

무너지고 무너지면서

더 크게 무너지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주저앉을 마음이 있다는 건

쌓아올린 마음도 있다는 것

 

새가 울면

또다른 새가 울었다

 

또렷하게 볼 수 있다면

상한 마음도 다시 꺼내볼 수 있을까

도마 위에 방치된 생선이나

상온에 오래 놔둔 두부처럼

상한 것은 따뜻하고

상한 것은 부드럽게 부서진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은

감당할 수 없는 일로 남아

마음을 놓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빛이 물속으로 들어간다

물을 찢으며 들어간다

어린 나는 그것을 보고 있다

 

손바닥이 열려

흐른다면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아침이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적 없었다

두꺼운 이불을 덮고

맞물리며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 했다

 

덜 자란 나무는 따뜻할 수 있다

한번 상하고 나면 다음은 쉬웠다

 

 

안미옥 시인의 시는 마음을 담아내기 탁월한 그릇인 이유는바로 이 시 톱니에 있다돌아가는 톱니를 보고 무너지는 마음이라고 표현한 것을 시작한다그 다음으로 부드럽게 이어지는, ‘도마 위에 방치된 생선이나상온에 오래 놔둔 두부처럼상한 것은 따뜻하고상한 것은 부드럽게 부서진다는 문장들톱니로부터 가깝지 않아 독특하면서도일상적인 사물의 물성을 빌려와 무너지는 마음을 나타낸다이렇게 잘 담긴 안미옥 시인의 그릇 속 마음에서우리는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

바로 앞서 언급한 불교의 제법무아 사상이다제법무아는 한 마디로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무아(無我)는 내가 없다는 의미이다여기서 라는 것은 나라는 개인뿐 아니라모든 인간을 넘어서 일체 모든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다그러므로 세상에는 고정된 된 것은 없다그렇다면 이 시의 첫 문장인 ‘ 어린 나는무너지는 마음 안에 있었다가 새롭게 다가온다어린 나는나라는 존재는 분명 살아 움직이는 확연한 존재이지만 항상성을 지니지 않고 언제나 변하는 존재이다. ‘무너지는 것이 습관이 된 줄도 모르고무너지고 무너지면서’ 어린 나는 변화하였다그리고 화자는 무너지는즉 변화하는 것에 대해, ‘더 크게 무너지는 것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다이후의 시는 묘사에서 변주가 있을 뿐 시적 서사와 말하고자 하는 내용에서는 큰 변주가 없는데이는 화자가 자라나며 어느새 깨달은 것을 나열하기 때문인 듯하다대표적인 구절, ‘주저앉을 마음이 있다는 건쌓아올린 마음도 있다는 것’. 우리는우리의 마음은 고정적인 실체를 가지지 않으므로 쉽게 주저’ 앉는다어느 날이면 나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 같기도 한 이유는마음이 덜컥하며 주저앉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정된 것이 없어 떠나버린 것들바뀌어 버린 것들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일은감당할 수 없는 일로 남기 때문에하지만 화자는 그런 절망을 맛보면서도 ‘ 아침이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적 없었다’. ‘맞물리며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무엇을바로 마음이자 그로부터 비롯된 세계가이 세상의 모든 일들사건들과 감정들은 계속해서 변화하며 마음을 만들어내니까부지런히 작동하는 마음이 있으니 아침은 분명 온다고 믿는 것이다.

 

한편 이 시집 에는 드물게 마음이 들어가지 않는 시들이 존재한다그러나 마음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을 뿐마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며마음을 그려내며 계속해서 노래한다아래의 시를 볼까.

 

 

선잠

 

나아졌다고 생각했다달라진 것이 있다고어색하고 웃긴 모자를 쓰고 있었다.

 

의자에겐 유독 닳는 다리가 있다나사가 다 빠져버리는 날이 올 것이다나쁘다고 말하면 정말로 나쁜 사람이 되어 있듯이날은 흐리고.

 

잠 속에 있었다놀이터에는 그네만 있다빈 화분들이 골목길에 나와 있다하나의 출구를 닫아야 했는데.

 

바람이 세게 불어도날아가지 못한 잎은 남는다나쁜 일을 말하면 더 나쁜 일이 될 것 같아말을 아끼는 사람이 될 때불 꺼진 전등이 머리 위에 있고.

 

감은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가 있다감은 눈을 떠도 깨어나지 못했다두 발이 뜨거운 물속으로 들어간다.

 

알 수 없는 이유로 화를 내고 소리를 질렀다감춘 것이 없는데옆얼굴을 무는 개잘린 그림자를 보게 되는 날이 많고.

 

착하고 성실하게 살고 있다고 믿었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깨어 있는 사람이 없었다햇빛이 이곳에 고여 있다.

 

 

안미옥 시인의 시는 대개 제목이 간결하면서도 조금 엉뚱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이는 앞서 말한 함축과 비유가 섞여 들어갔기 때문이다. a부터 b, c까지 말하지 않고 a에서부터 대략 h를 말하는 것그 행간 사이에 무엇이 들어갔는지 고민하는 과정에서독자들은 불교 석가모니의 깨달음을 따라 수행하듯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게 된다이번 시는 어떨까선잠선잠이란 깊이 들지 못하거나 흡족하게 이루지 못한 잠을 사전적 의미로 지니고 있다깊숙한 곳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겉도는 이미지숨 가쁜 리듬과 호흡그런 유약이 발라진 채 구워진 그릇이것이 선잠」 시편이다화자는 잠 속에서’, ‘감은 눈을 떠도 깨어나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이도 저도 아닌 채 겉도는 상황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이자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존재중생이다정말 잠에 취해 비몽사몽한 것인지아니면 말이 그렇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이 어린 중생은 잠에 취한 상황을 가져와 혼란스러운 세계를 이야기하고자 한다이 세계는 역시 유식 사상이 아래의 세계로, ‘나쁘다고 말하면 정말로 나쁜 사람이 되는 세계다. ‘나쁜 일을 말하면 더 나쁜 일이 될 것 같.

정해진 실체가 없어 계속해서 흐르는 세계그리고 마음이 마음을 지닌 화자는 감은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가 있다’ 느낀다그렇게 화자는 부정적인 마음을 지니고 부정적으로 세계를 바라본다그 과정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른다이때 감춘 것 없는 화자의 옆얼굴을 무는 개에 집중해보자내가 화를 냈을 때 옆얼굴을 무는 개이 개는 단순히 나의 화난 몸짓에 놀란 것일지도 모른다그러나 이를 넘어 불교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면불교에서 주장하는 연기설로써 읽어낼 수 있다면연기설은 모든 현상과 사물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상호 의존관계를 벗어날 수 없어생성과 소멸은 항상 관계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이 세계의 모든 마음들은유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내가 분노하면 저 개도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안미옥 시인의 시편에서 우리는마음이 세계를 만들어내며 그 세계는 유동적이라는 것만이 아니라 이렇게 만들어진 세계는 다른 이들의 것과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읽어낼 수 있다.

 

어떻게 해야 좋은 마음이 되는지 아는 사람은 없는 세계에서우리는 살아남을’ 마음을 먹고 실체가 없는 세계 속에서 머뭇거리고 머뭇거리는 일을 반복한다. (네가 태어나기 전에) ‘끔찍하구나이게 전부 마음의 일이라니’(시집)라고 세계를 바라보면서도 제대로 말하는 법을 배우고 싶’(파고)은 마음안미옥 시인은 부드럽게 흐르며정해지지 않고 물처럼 다가오는 오늘이 오는 시간을 신기해한다. (밤과 낮그리고 계속해서 시를 써나간다. ‘뭉개지면서 우리는 자라고 있다’(매일의 양파)면서쉽게 물러지고 뭉개질 수 있는 마음들을 시라는 그릇에 담아낸다그리고 그 그릇을 들어 기꺼이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린 모두 연결되어’ 있으므로. (밤과 낮



*참고 자료- 아래 자료를 참고 및 근거로 하여 작성함.

1. 씨마스 (박찬구 외),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교과서

2. 불교 신문, '연기법'이란 무엇인가

3. 한국민족문화백과대사전 '불교'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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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중에서 기록하는, 사랑 그리고 슬픔의 일지 – 진은영의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를 읽고 (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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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모코
  • 2023-12-31
네 사랑의 연대기가 궁금해 - 장수양의 ‘손을 잡으면 눈이 녹아’와 미츠키의 노래를 교차로 읽어내며

연말보다도 아름답게 다가오는 끝이 세상에 있을까. 연말이 이토록 사랑스럽고 반짝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한 해의 끝자락에서, 늘 내가 사랑했던 이들을 떠올려 본다. 그 사랑이 과거형이 되었건 현재 진행형이 되었건, 어쩌면 사랑하고 싶다는 미래형이 되었건. 나는 사람들을 하나, 둘 생각해 보며 내가 걸어왔던 길을 더듬어본다. 나는 줄곧 아주 좁고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왔다고 믿어왔으나 나와 함께했던 이들을 떠올려 보면, 그 길은 결코 험하거나 나만이 걷는 길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 절망이나 후회보다는 감사와 사랑을 채집하는 시기가 바로 연말일 테다. 나는 올해 열 통이 조금 넘는 편지를 썼고 스무 명이 있는 동아리에서 롤링 페이퍼를 하였고, 내게 문학만이 아니라 올곧은 생의 태도를 알려주신 선생님들께 엽서를 썼고. 사랑하는 Y에게 나의 사랑이 당신에게 어쩌면 짐이 될 걸 알아서 미안하다는 말 또한 했고. 그렇게 온갖 곳에 내가 받았던 마음을 다시 돌려주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저기 길을 걷고 있는, 내 앞의 아저씨도 올해 누군가를 열심히 사랑했을지 모른다. 방금 지나온 유치원 버스의 아이들은 또 누구에게서 사랑을 받았을까. 새삼스럽지만 우리는 각자가 꾸려내는 생의 주인공이자, 화자이며, 히어로와 히로인이다. 나는 그런 개인을 움직이는 힘이 분노나 질투보다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오래전부터 믿어왔던 사실이지만, 올해 내가 미워하는 아이가 1지망 대학을 떨어졌을 때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으나 가장 좋아하는 친구가 기적과 같이 정시 최초 합격에 성공하자 눈물이 났던 것을 보면. 확실히 사랑이 결국 이기는 것 아닌가 싶었고. 우리는 모두 각자 그런 사랑을 마음에 지닌 채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사랑, 사랑, 사랑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는 일 년의 마지막 페이지. 나는 이 시기에 유난히 장수양 시인의 시집과 싱어송라이터 미츠키의 노래를 반복해서 찾게 된다. 그들의 작품은 장수양 시인과 미츠키가 어떤 사랑을 해왔을지 궁금해질 정도로, 사랑스럽고 또 사랑에 대하여 자신의 목소리로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다. 나는 영화와 시를 사랑하지만, 이 두 가지의 예술은 동시에 읽어낼 수 없다. 서안나 시인의 시를 읽으며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의 프레임을 겹쳐 보거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괴물’을 보며 백은선 시인의 시편을 떠올렸던 것처럼 이미 내가 한 번 씹어 넘겨서 소화한 적 있는 작품을 겹쳐 보는 일만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문학과 노래는 다르다. 두 가지의 예술은 동시에 재생할 수 있는데, 나는 그 두 가지의 예술 작품이 한데 어우러져 녹아내리는 순간을 정말이지 사랑한다. 그 녹아내린 작품들은 나의 마음속, 한층 더 깊은 곳까지 스며든다. 어떠한 예술 작품을 더 오래도록 기억하고 마음에 품을 수 있다는 일이라니. 이토록 기쁠 수 없다. 사실 사랑 시를 쓰는 내가 늘 고민하는 지점이 ‘세상에는 사랑을 이야기하는 작품이 너무나도 많다’는 점일 정도로, 이미 멋진 사랑시와 사랑 노래는 넘쳐난다. 그 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 모모코
  • 2023-12-30
상처의 끝에서 방울져 떨어지는 비명 -영화 ‘키리에의 노래’를 보고

*노래와 함께 글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나는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의 OST 반복 재생 횟수와 함께 자라났다. 한 뼘을 늘릴 때마다 마주하는 새로운 풍경들, 그 풍경으로부터 다가오는 놀라움이나 슬픔 또는 어떤 분노들. 십 대 중반의 나는 사소한 것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 사소한 것들을 과하게 확장 시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한 피곤한 사고방식 속에서 거의 2주, 또는 3주에 한 번은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을 보았다. 나의 등굣길과 하굣길에는 영화의 OST가 한가득 묻어있는 건, 더 말할 것도 없다. 이후에도 이와이 슌지 감독의 여러 작품을 접했으나 역시 ‘릴리 슈슈의 모든 것’만큼 마음의 울림을 주는 영화는 없었다. 그건 예민하고 덜 여문 마음 위로 흐르는 음악보다도 아름다운 건, 적어도 내게는 없었기 때문이다.그렇게 믿으며 십 대의 마지막 페이지, 가을에 들어선 때였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신작이 개봉한다고. 그 작품의 제목은, 바로 ‘키리에의 노래’라고. 이후 조금씩 영화의 정보를 마주하며, 이건 나의 이십 대를 책임질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속 소년 소녀들보다 조금 성장한, 청년들의 이야기가 노래와 함께 전개될 때. 나는 과연 무슨 감상을 받을 수 있을까 궁금했다. 부산 국제 영화제에선 다른 영화를 보느라 ‘키리에의 노래’를 놓아주어야 했다. 그렇지만 일반 극장 상영만은 놓치고 싶지 않아, 수학여행 일정 도중 받아본 예매 시작 소식에 급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동일본 지진으로 인하여 약혼자인 ‘키리에’를 잃은 ‘나츠히코’, 그리고 키리에의 동생이자 행방불명된 언니의 이름으로 노래를 부르는 ‘루카’, 그리고 십 대의 자신을 버린 채 변장을 한 채 돌아다니는 루카의 친구 ‘잇코’. 지진 이후 뿔뿔히 흩어졌던 세 사람이 우연히 도쿄에서 다시 만나며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나는 이러한 줄거리가 이와이 슌지 감독답다고 생각하였는데, 앞서 즐겨본 ‘릴리 슈슈의 모든 것’부터 대개 그의 작품의 줄거리는 단순하기 때문이다. 별것 없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몇 줄 되지 않는 분량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내가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이유는, 아마 변주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대다수의 사랑이나 슬픔, 청춘의 방황, 유년의 막막함과 같은 소재들은 이미 너무나도 많은 작품에서 사용되었고, 독창적인 서사를 적어내려 해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이 감독은 하나의 주제를 물어 채고, 자신의 방법대로 –보통 아날로그적인 촬영법을 더하여 영상미를 살리는 방식으로- 끈질기게 주제를 변주한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서도 주인공이 겪는 폭력에 집중하면서, 그 위로 환하게 들어오는 조명과 느슨한 선율과 아름다운 목소리의 OST를 끼얹었다. ‘키리에의 노래’ 또한 이와 비슷하다. 언니와 고향을 잃고 그 충격으로 목소리까지 잃은 루카가 키리에의 이름으로 노래를 부를 때만 목소리가 나오는 것. 그리고 이를 응원하는 잇코와 나츠히코에도 각각의

  • 모모코
  • 2023-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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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09 21: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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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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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09 21:15:01
      김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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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많은 일을 겪으며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중이에요. 저는 멘토님의 코멘트를 늘 몇 번이고 읽는데요. 그중에서도 제가 생각한 단어를, 왜 그곳에 어떤 이유로 사용했는지 파고 들어가는 물음을 던지시는 코멘트가 인상 깊었어요. 좀 더 내가 생각한 것을 드러내야겠구나, 생각하게 되기도 했고요. 아직은 나만의 사유를 깊이 있게 파고드는 건 어려워서요. 오늘은 불교 사상을 빌려와 제가 하고 싶은 말에 구체성을 더해봤어요. 저는 원래 어떤 작품을 접하고 그때의 감정을 잊지 않기 위해 감상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멘토님의 마음이 담긴 피드백을 읽다 보니 욕심이 생겨 요즘엔 '잘' 쓰고 싶기도 해요. 제게 본업이자 본진인 시를 쓸 때... 잘 써야 한다는 압박감은 괴롭게만 다가왔는데, 취미의 일부인 비평감상글은 잘 쓰려 하는 시도까지 즐겁게 다가오더라구요. 제게 비평감상글의 매력을 알려주셔서 감사드려요. 늘 고마운 마음입니다.

    • 2023-11-09 00:04:20
    모모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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