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틴10대 감성쟁이
감상&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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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공지]'쓰면서 뒹글' 운영 규정(2024.01.02)작성일 2023-10-23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951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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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공지]'감상&비평'에는 형식을 갖춘 비평문만 올려야하나요?작성일 2023-07-25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1617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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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비평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고
독후감-코스모스를 읽고- 나의 성격은 참으로 이상하다. 신비의 베일에 둘러싸인 우주처럼 참으로 신비스럽다. 나는 무조건 경쟁을 피하지 않는다. 상대가 누구더라도, 난 피하지 않는다. 내가 3학년 때 ‘별똥별 아줌마가 들려주는 우주이야기’라는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우주에 호감을 느끼게 되어 이젠 경쟁 사이까지 되었다. 한마디로 나는 비밀을 벗기는 걸 좋아한다. 매일 아침에 일어날 때 ‘모든 비밀, 그게 무엇이든 알아내고 말겠어!’라고 다짐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책에 있는 단 한마디, 우주는 신비로운 베일에 싸여 있다. 라는 말 한마디가 나를 자극했고, 다시 경쟁심에 불이 붙어버린 나는 커서 우주를 연구하는 과학자, 천문학자로 꿈의 변천사가 일어났다. 물론 천문학자가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난 어려우므로 도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커서 제일 어려운 우주에 도전하는 일을 서슴지 않겠다. 우주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돈다. 우주의 비밀은 도망치고, 나는 쫓는 자이기 때문에 우주를 도는 것이다. 그리고 물처럼, 우주는 나에게 있어 매우 소중한 존재이다. 물의 특징을 생각해보자. 공기 중에도 소량이 들어 있다. 그래서 항상 내 주위에 있고, 많은 물질과 결합하는 많은 능력을 갖추고 있다. 또한, 환경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고 담는 그릇에 따라 모양이 변하지만, 본래의 성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물 분자의 특징은 서로 당기는 힘이 강하다. 그럼 이제 우주를 보자. 물과 우주를 동시에 바라본다면 이러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물은 공기 중에도 소량이 들어 있다. 그래서 항상 내 주위에 있고, 이 관점에서 우주를 바라본다면 우주는 항상 나의 마음속에 존재한다. 고로 항상 내 주위에 있다. 또한, 물은 많은 물질과 결합하는 많은 능력을 갖추고 있다. 잔잔한 호수의 물은 사람의 마음을 적시고, 파도는 보는 이로 하여금 후련함을 느끼게 하며 맑고 깨끗한 물의 빛깔은 자신을 한 번 더 돌아보게 한다. 그렇다면 우주는 어떨까? 우주의 은하는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우주의 검은 바탕을 빛내고 있는 별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검은 도화지에 반짝거리는 작은 종이를 뿌려놓은 것과 같이 화려하다는 표현을 쓰게 만든다. 우주는 팽창하기도 하고, 별의 폭발로 말미암아 블랙홀을 만들기도 한다. 이렇듯 우주도 많은 능력을 갖추고 있다. 물은 환경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고 담는 그릇에 따라 모양이 변하지만, 본래의 성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물 분자의 특징은 서로 당기는 힘이 강하다. 우주는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기도 하지만 늘 신비스러운 본래의 성질은 변하지 않는다. 또한, 당기는 힘이 강하여 우리 은하와 안드로메다은하는 한 시간에 50만 킬로미터씩 가까워지고 있다. 이렇게 비교해보면 물과 우주는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코스모스란 책을 말하자면 "우주와 인간을 담은 책"이라 할 수 있다. cosmo
작성일 2010-08-09 작성자 따뜻한 바람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0665상세보기 -
감상&비평 잘리는 머리카락과 인권
많은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오가는 복도에 수많은 머리카락이 잔뜩 떨어져 있다. 선생님은 손에 가위와 바리깡을 들고 있다. 줄지어 서 있는 학생들은 금방이라도 울 거 같은 표정 짓고, 마침내 짧아진 머리를 감싸고는 퉁퉁 부어버린 허벅지 때문에 교복이 허벅지에 스칠라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 교실에서는 뜨거워진 허벅지를 식히기 위해 책상다리에 허벅지를 대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학교 또 다른 풍경이라 하겠다. 두발규제가 일제 강점기의 잔재라는 건 더 떠들면 입이 아플 정도로 다 아는 사실이다.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행해졌던 단발령을 학생에게 강요하는가? 일제 강점기를 우리 역사의 크나큰 치욕으로 남기면서 말이다. 당시 조선에게 강제로 단발령을 내려 칼을 들고 조선인의 상투를 자르는 일본 순사의 모습과 억울하게도 잘려나간 머리카락을 눈 앞에 두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조선인의 모습은 마치 지금의 그것과 흡사하지 않은가? 대체 왜 어른들은 학생의 머리에 그토록 집착하는가? 어디 변명을 한번 들어보자. "학생들이 머리가 길면 학업에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들의 가장 흔한 변명이다. 매사에 논리적이고 냉철해야 하는 선생님들이 이런 발언을 하는 건 좀 우스운 일이라 하겠다. 머리가 긴 학생들이 공부를 못하고 머리가 짧은 학생들이 공부를 잘한다는 통계가 어디 있던가. 공부 잘하는 엘리트들이 많다는 '외고'는 상당수가 두발자유를 표방하고 있다. 또한, 학업에 집중할 수 없다고 하여 학생들의 머리를 자르는게 정당한가? 일부 선생님과 어른들의 생각은 인권보다 학업이 우선인가? 다른 무엇보다 우선시 되야 할 것이 인권이라 배웠다. 선생님들에게 말이다. "학생은 학생의 본분에 충실해야 합니다," 학생의 본분은 머리를 짧게 자르는 일인가? 학생의 본분은 공부인가? 라는 대답에 고개를 끄덕일수도 있다. 하지만, 공부와 머리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머리의 길이와 가방끈의 길이는 반비례 하지도, 비례하지도 않는다. 단지 머리의 길이는 머리의 길이일 뿐. "학생들의 머리가 길면 학교의 위상이.." 많은 보수적인 어른들은 길거리에 머리가 긴 학생들을 보고는 혀를 끌끌 찬다. 예컨대 "학생이 무슨 머리가 저렇게 길어가지고 무슨 학생이람..쯧쯧" 따위 말이다. 학교는 어른보다 학생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학교는 학생들이 올바른 인성교육을 위해 다니는 곳이지 어른들에게 훈훈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신체 일부분에 불과한 머리카락 조차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없다면 학생은 과연 국민이란 말인가? 헌법은 나라를 위해 존재하고, 나라는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 교칙은 학교를 위해 존재하고, 학교는 학생들을 위해 존재한다. 학생들이 최우선시 되어야 할 학교에서 왜 학생들이 당연하지만, 간절히 원하는 일에 그토록 기를 쓰며 반대하는가. "천부인권"이
작성일 2010-01-25 작성자 밥공기 좋아요 0 댓글수 217 조회수 9271상세보기 -
감상&비평 [우리나라 복지제도의 문제점과 해결책]
기본 철학 없이 그때 그때 땜질식 처방... 이대로 괜찮은가? ‘늙어서 재산을 2억쯤 갖고 있지 않으면 친척이나 가족들에게 버림받는다’ 진담 반 농담 반인 이야기지만, 그만큼 스스로가 노후 준비를 해 놓지 않으면 노후에 어려운 생활을 면치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대가족을 이루고 살았던 옛날에는 노인들의 안정된 삶이 보장되었었다. 그러나 산업화의 물결을 겪고 난 지금은 공동체의 미덕이 사라져가고, 부모를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약해짐에 따라 ‘버림받은 노인’에 대한 뉴스가 우리네 안방에서 심심찮게 들려오곤 한다. 노인 뿐 아니라 장애인, 빈곤층, 아동 등 사회에서 보호받아야 할 약자들이 아직까지도 설 자리가 마땅치 않다.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복지제도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러한 것의 많은 부분을 가정의 짐으로 남겨두고 있다. 최근 빈부의 격차가 더욱 심화되어 빈곤층은 기본적인 삶의 질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되었다.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의 사회 복지비 지출은 국내총생산(GDP)의 8.70%인 47조 9.952억 원이다. 이 수치는 OECD회원국 중 최하위 수준이다. 스웨덴(GDP의 31.47%), 덴마크(30.10%)등 유럽 선진국에 비해서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며, 미국, 일본 등에 비해서는 2분의 1정도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복지제도가 얼마나 허술하게 구축되어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는 왜 이러한 복지 수준에서 머무르고 있는지, 그 원인을 돌아보고 해결책을 모색해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로, 보여주기 위한 전시성 행정으로 근본적인 해결 방안을 내지 못하는 정책에 있다. 현재 장애인과 같은 스스로 자립하기 힘든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에게 당장의 궁핍함을 해결하도록 하고 있으나, 직업교육과 같이 스스로 자립하여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 운영이 미비하다. 그들을 도와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하루 한 끼 식사를 제공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고질적인 수급자를 해결할 수 있고 그들 또한 어려움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두 번째로, 사회 복지사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 복지 확대 추진에 영향을 미친다. 미래 사회로 접어들수록 사회복지에 대한 수요는 꾸준히 증가할 것이기 때문에 그에 상응할 사회복지 관련 직업을 가진 사람이 절실해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직업에만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모여든다. 사회복지사가 사회에 공헌하는 역할에 비해 그들에 대한 급여가 낮은 것도 사실이다. 현실이 이렇기 때문에 사회복지 관련 직업에 종사하려는 사람의 수가 적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복지사에 대한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 근로조건을 개선하고 점진적으로 급여를 올림으로써 자연스럽게 사회복지 인력을 얻을 수 있
작성일 2009-11-29 작성자 새송이버섯 좋아요 0 댓글수 3 조회수 7437상세보기 -
감상&비평 육식의 정당화 : 도덕적으로 정
‘도덕적으로 타당하다’첫째, 모든 인간이 모든 돼지보다 영리한 것은 아니다. 둘째, 당신이 나보다 영리하지 못하다고 해서-그리고 영구히 나와 동일한 지적 능력을 얻지 못할 것이라 해도-내가 당신을 냄비에 삶고 양념하고 볶는, 말하자면 오독오독 씹어 먹는 행위가 허용될 수는 없다. 아니 적어도 당신은 허용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텔레비전 아홉 시 뉴스가 잔혹한 살인사건을 내보낼 때면-단지 ‘도살’했을 뿐 먹진 않았는데도-언제나 혀를 차며 얼굴을 찌푸리던 당신이니까. 당신과 육식자들의 논리대로라면, 동종(同種) 살해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 이외에는 내가 당신을 식탁에 올리는 데 아무런 문제될 게 없어 보인다. 식인(食人)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사람이 육식에 분노하지 않는 건 굉장히 이상한 일이다. 채식의 문제에서, ‘같다’ 혹은 ‘같지 않다’는 사실을 밝히는 건 핵심이 아니다. ‘우월하다’ 혹은 ‘열등하다’를 밝히는 것도 무관하다. 당신은 동물이 때로 도덕적, 법률적으로 고려돼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하면서도 잔인한 입맛을 바꿀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다. 누가 개를 걷어차기만 해도 ‘도덕적으로’ 분노를 느끼는 선량한 당신은 왜 하필이면 개와 다를 바 없이 영리하고 쾌활한, 운이 조금만 좋았다면 우리들의 좋은 친구가 되었을 게 분명한 돼지를 잡아먹어야만 하는 걸까. 정말 거대한 무엇인가가 ‘돼지에게는 연민을 느끼지 않아도 돼’ 속삭이기라도 하나. 그 불일치는 얼마간 우울하다. 대부분이 육식을 하고, 육식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육식이 ‘도덕적으로’ 정당해지지 않음은 명백하다. 고작 ‘다른 사람들도 다 동물을 먹어왔다’는 한 마디로, 당신은 셀 수도 없는 동물들을 고통에 빠뜨리고 있다. 동물이란 인간이 먹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성서가 그것을 증명했다는, 동물은 ‘영혼’이 없다는 따위의 오만하고 어리석은 억지는 시간을 소모할 가치도 없다. 대체 독보적인 지구 약탈자, 온갖 생명의 살해자인 당신에게 무슨 ‘영혼’? 더러운 짐승들에는 감히 가져다 댈 수도 없는 그 고결한 ‘영혼’이란 건 머리카락처럼 애초에 당신 몸 어딘가에 붙어서 태어났다. 이 논의에는 ‘영혼’, 그리고 ‘도덕’ 같은 것들은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 ‘육식이 옳다’는 말은 ‘육식을 해도 된다’거나, ‘육식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채식으로 도덕적 우월성을 획득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적어도 육식이 ‘옳다’고 하는 데 효과적인 반박을 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논의는 거의 무가치하다. 적어도, 생명이 죽임을 당하고 있는 이 순간 그런 것들을 논하는 것은 도피다. ‘옳다’ 혹은 ‘옳지 않다’와 같은 가치평가적 단어는 당신의 주장과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다. 그러한 알기 어렵고 추상적인 것들 대신, 생명을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당신이 느낄 수 있는 것은 흔히 ‘진리’-당신이 분명하고 확고부동하게 여기는 듯한-가 아니라 ‘고통’이 아닌가? 더구나, 인간이 그렇게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면, 왜 ‘동물은 서로 잡아먹는다’는 사실을
작성일 2007-03-18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51 조회수 7177상세보기 -
감상&비평 '모던타임즈' 감상문
모던 타임즈는 찰리 채플린이 감독하고 주연하였으며한 떠돌이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영화는 근대 산업의 발전을 배경으로 하여 다루어지고 있다. 배경지식이나 당시 사회에 대한 평소의 고찰이 없었더라면 모던타임즈란 영화는 우스꽝스러운 코미디 영화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진지하게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 속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폐단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 주인공을 통해서 산업사회가 얼마나 많은 문제점을 낳았는지를 알 수 있다. 영화를 보는데 있어 가장 기본 배경지식으로 작용한 것은 산업화로 인하여 과거의 봉건사회가 붕괴 되었으며 자본주의가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고 사회, 경제적 구조가 질적으로 변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깊게 생각을 하다가 보면 모던타임즈란 영화는 자본주의의 폐단을 정말 잘 보여주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 모던타임즈는 불황과 경제공황에 멍든 미국의 자화상을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다. 특히 자동화된 기계 속에서 말살되어 가는 인간성과 산업 사회가 가져다주는 필연적인 인간 소외의 문제를 블랙 유머로 그려낸 최고의 풍자영화이다.
작성일 2007-09-27 작성자 ALONE 좋아요 0 댓글수 2 조회수 6328상세보기 -
감상&비평 초자아(superego)와 자아(ego), 원초아(id)에 따른 동서양권의 문학작품 분석과 가치관 비교월장원 선정
초자아(superego)와 자아(ego), 원초아(id)에 따른 동서양권의 문학작품 분석과 가치관 비교 Abstract 본 논문은 프로이트(Freud)의 정신분석학을 이용하여 동서양권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비교하고 차이점을 구명하는 데 그 목적을 둔다. 정신분석학에 대해서는 일찍이 다양한 선행 연구가 진행되었으므로 드물게 이루어진 문학작품의 분석과 정신분석학을 접목시켜 대체적으로 세계에서 통용되는 동양권의 공동체주의와 서양권의 개인주의의 차이와 원인을 분석했다. 이를 위해 서양문학에서는
(1886, Robert Louis Stevenson)을, 동양문학에서는 윤동주의 일생과 시 세계, <쉽게 씌어진 시>(1942, 윤동주), 그리고 <또 다른 고향>(1941, 윤동주)을 대상 작품으로 삼아 분석했다. I. 서론 1. 연구의 목적 및 필요성 오늘날 사람들은 규범에 맞춘 삶을 살아가기를 강요당한다. 원초아(id)는 제한하고, 자신이 가진 도덕적인 생각만 제한하여 보여내는 초자아(superego)적 사고를 권장한다. 실은 초자아가 사람으로서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종착역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자아(ego)에 의거하여 이성적 사고를 하는 것이 당연시 여겨지고 있다. 결국 초자아 또한 사회가 만들어낸 가치에 부합되어 만들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생활을 위해 요구받는 행위들은 대체로 지극히 제한적이고 개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성자聖者로 일컬어지는 이들을 보라. 대표적으로 예수와 부처를 들 수 있다. 그들을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키워드들은 한정되어 있다. 희생, 친절, 베풂, 선행, 헌신, 용서, 겸손. 전부 자신을 버리고 다른 이들을 먼저 생각하는 이타적, 아가페적 사고를 보이고 있으며, 그들은 완전한 초자아의 영역에서 머무르고 있는 성인聖人으로 추앙받는다. 많은 이들은 이 ‘성인’의 초자아적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자신 또한 그렇게 변화하고 행동하기 위해 노력한다. 노력하여 성공한 극히 소수의 사람들은 역시 성인으로 대우받아, 그렇게 대물림되는데, 이는 ‘사회가 만들어낸 성인’의 틀에 자기 자신을 맞추어 넣는 것이다. 개인보다 공동체를 중시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조선의 제 3대 왕인 태종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두 번 일으키고 끝내 왕위에 올라 자신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에게 옥새를 받을 때, 세 번이나 거절했다가 마지못해 받았다고 야사에 기록되어 있다. 실록에는 우리의 선조들 또한 선물이나 도움을 받아야 할 상황에서도 몇 번이고 거절하다가 마지못해 받는 척 하는 경우가 많다. 이 관례와 풍습은 그대로 세습되어 현대 사회로 전해져 내려왔다. 유교 풍속이 뿌리 깊게 잘하고 있는 동양권에서는 거절과 겸손과 겸양을 미덕으로 여긴다. 그러나 서양권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거절의 뜻을 내포한 말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들의 거절이 의미하는 것은 작성일 2016-06-17 작성자 윤별 좋아요 1 댓글수 3 조회수 5847상세보기 -
감상&비평 윤흥길작가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를 읽고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를 읽고 사람이 가난하게 살게 되더라도 꼭 지켜야 하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지하철에서 가끔씩 보게 되는, 동전 몇 푼이 들어 있는 조그마한 바구니를 앞에 두고 계시는 분들을 보게 되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하루 수입도 별로 안 될 것이고 관심 가져 주는 사람들도 얼마 없을 것인데 그저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분들... 갈수록 삭막해져가는 도시에서, 모르긴 몰라도 이말 저말 많이 들으셨을 것이다. 실제 주변에서 그런 분들을 지나쳐가며 “얼마나 게으르면 일도 안하고 저러고 있을까?”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본 적이 있으니까... 그럴수록 그분들에게 여쭈어보고 싶은 것이 하나 둘 생겨난다. 어째서 이렇게 되셨나요, 일을 구해보려고 하지 않으셨나요, 사람들의 시선이 어처구니없지는 않으신가요, 하루 수입은 얼마나 되나요... 내가 궁금한 것이 많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는 이유는 그 분들에게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켜드리고 싶기 때문이다. 지폐를 넣어드려도 정말로 못 보신 건지, 눈을 감아버리신 건지 아무 반응도 없는 분들께는 티끌만큼의 자존심이라도 남아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권씨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록 전과자이고, 여럿 딸린 식구들과 함께 온갖 눈치 다 보며 문간방 살이를 하고 있는 처지이지만 그의 구두는 그의 여느 옷들과 달리 언제나 반짝 반짝 빛이 난다. 공사장에서 막일을 할 때에도 그는 꾀죄죄하지만 사무원 복장에 역시 빛나는 구두를 신고 있으며, 그의 집 안에는 흔히 귀중품이 놓이는 자리에 구두 아홉 켤레가 늘어져 있기도 하다. 매일 구두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닦아대는 권 씨의 행동은 일반적인 시민의 대표인 오 선생이 봤을 때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자존심이 상할 때마다 바지춤에 구두를 문질러 닦아대던 권씨, 마지막에 초보 강도로 오 선생의 집에 침입한 그는 결국 아홉 켤레의 구두만 남긴 채 사라져버린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에는 그가 시시때때로 밝히는 학력이나 본관, 그리고 자꾸 의식하는 구두가 참으로 쓸 데 없다고 생각했다. 곧 네 명이 될, 딸린 가족 세 명을 부양하기 위해 권 씨에게 당장 급한 것은 먹고 사는 문제와 관련된 돈이다. 아무리 그가 좋은 대학을 나와도, 본관이 좋기로 유명하다고 해도, 구두가 광이 난다고 해도 당장 먹을 밥이 없고, 아이를 낳는 것이 위험하다면 식구들 모두가 죽을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 이런 상황에 처했는데도 돈을 빌리러 다니지도 않고,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며 직장을 그만둬 버리며 그 와중에도 술에 취해 오 선생에게 사건의 전말을 밝히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일 아내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정말 중요한 게 자존심은 아니라고 보고, 차라리 사람들한테 구걸이라도 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권 씨의 입장에서 이 소설을 이해하려 했을 때에는 그렇게 권 씨를 비판하던 나조차도 권 씨를 이해하게 될 수밖에
작성일 2009-08-22 작성자 프리러브 좋아요 1 댓글수 3 조회수 5696상세보기 -
감상&비평 나의 길을 걷기 위해서. <현실의 대한민국 학교를 바라보며>
나의 길을 걷기 위해서. <현실의 대한민국 학교를 바라보며> 0. 불쌍한 인생 난 올해로 만 17살, 대한민국 인문계 고등학교의 고3 수험생이 되었다. 겨울방학이지만, 그리고 보충수업을 거부하고 집에 틀어박혀 매일 하릴없이 영화를 보는 게 일이지만, 지금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는 아이들만큼이나 걱정과 고민이 많다. 주변에서는 등급, 점수, 대학, 선택과목, 독서실 등의 얘기로 그득하다. 내가 그런 화두를 전혀 즐기지 않음에도 이제 고3이 되었다는 죄목(?) 하나로 어쩔 수 없이 나누게 되는 이야기 소재들이다. 지나친 자기애는 이기주의로 전락하기 쉽고, 나 또한 별 것 아닌 것에 자기연민을 과하게 불어넣고 싶지는 않지만, 요즘 나는 내가 정말 불쌍하다고 느낀다. 내 친구들 또한 자신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한다. 끔찍하지 않은가? 자신들의 삶을 불쌍한 삶, 안타까운 삶으로 규정하고 내면화할 수밖에 없는 현실.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고 해도, 또 사는 것이 원래 고통의 연속이자 불행이라고 쳐도 이건 좀 슬프다. 행복을 추구해야 할 인간이, 더군다나 이제 열일곱 열여덟인 우리들이 벌써부터 우리의 인생을 불쌍하다고 여기는 현실이 안타깝다. 왜인지 생각해보니, ‘무언가가 우리의 삶을 갉아먹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답이 나왔다. 그래. 우리가 늘 당연시 하며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했던, 혹은 문제라는 것을 알지만 어쩔 수 없이 순응하고 타협했던 것들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것들로 인해 우리는 우리가 ‘인간’이기에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들을 무시당했다. 그 무시는 은폐된 채로. 그리하여 그 종자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더욱더 굳건하고 탄탄히 유지해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이 별 것 아닌 것이 절대 아닌데도 ‘별 것 아닌 문제’로 치부되고, 오히려 그게 너무나도 당연한 듯 여겨지는 이 사회를 보며 매일 울음을 삼키는 것도 이제는 신물 난다. 1. 교육제도 우리의 삶을 갉아먹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나라의 교육제도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대학 입학의, 대학 입학에 의한, 대학 입학을 위한’ 이 나라의 교육제도 말이다. 우리나라의 대학들은 서열화 되어있다. 말 그대로 ‘학벌사회’다. ‘스카이’, ‘인서울’, 심지어 ‘지잡대’라는 용어들만 봐도 대학으로 개개인의 직위를 나누고 차별을 두는 이 사회의 풍조를 엿볼 수 있다. 물론, 학생은 ‘공부를 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공부를 하다보면 저절로 대학을 가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을 보면 그렇지가 않다. 우리나라의 학생들은 ‘점수를 받아오는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
작성일 2012-01-11 작성자 희희희 좋아요 0 댓글수 74 조회수 5562상세보기 -
감상&비평 히든 피겨스-감상문
영화 <히든 피겨스> 감상문 히든 피겨스 라는 영화는 얼마전 3월 23일에 개봉해 많은 인기를 얻고 네이버에서 9.41이라는 평점를 받은 데오도르 멜피 감독의 영화이다. 이 영화는 여성 흑인의 차별에 대해 나타내고 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는 더욱더 흑인, 그리고 여자라는것이 도대체 왜 문제가 되어야하고 차별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 흑인 여성 캐서린 존슨은 흑인 여성들의 리더이고 수학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존슨은 흑인 여섯 최초로 NASA 엔지니어를 꿈꿨다. 하지만 막상 NASA에 들어간 그녀는 심한 차별을 당했다. 오로지 흑인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멀리있는 유색인 화장실을 이용해야 했으며 또 흑인 여자라는 이유로 중요한 회의에 참석할수 없었다. 그리고 사무실안에있는 커피포트까지 이용이 불가능했다.하지만 존슨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NASA엔지니어 중에서 처음으로 우주궤도 비행 프로젝트에 필요한 새로운 수학 공식을 찾아냈다. 그 때부터 존슨은 모두의 관심을 받으며 NASA엔지니어의 흑인 여성이라는 편견을 깨고 중요한 일을 맡으며 NASA엔지니어의 중심이 된다. 존슨이 NASA엔지니어의 최초 흑인여성이 된 후 메리 잭슨과 도로시는 존슨과 같이 일을 하게 된다. 존슨, 메리 잭슨, 그리고 도로시는 서로 되게 친한친구였다. 그들은 서로를 도우며 NASA에서 필요한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었다. 그렇게 일을 하고 있을때 NASA에서 우주선을 날린다는 소식을 받았다. NASA는 그전에도 수없이 시도했지만 다 실패했지만, 존슨, 메리 잭슨, 그리고 도로시가 들오고 난 후 처음시도 하는 것이었었다. 이 우주선을 성공적으로 날릴려면 새로운 수학 공식이 필요했다. 모든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밤늦게까지 생각을 해봐도 새로운 수학 공식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한 두명씩 지쳐갈때쯤 존슨이 그 수학공식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 후로 존슨은 그 수학공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처럼 밤늦게까지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수학공식을 발견한 존슨은 NASA회사 안에 있는 큰 보드 위에 자신이 발견한 수학공식을 적었다. 모든 사람들은 존슨이 쓴 새로운 수학공식을 눈여겨 보았고 또 놀라기 시작했다. 마침내 NASA는 존슨이 발견한 수학공식을 우주선 날리는데 적용하기 시작했고 그 후로 존슨은 더 중요한 일을 맡았다. 마침내 우주선을 발사 하는 날이 다가왔다. 오랜만의 시도하는 우주선 발사라서 NASA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고 다 긴장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NASA의 우주선은 발사 되었고 안정적으로 발사되어서 사람들은 모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안도했다. 하지만 그 다행이라고 생각한것도 잠시 우주선은 점점 궤도를 벗어나고 있었고 자칫하면 또 실패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 순간 아무의 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때, 존슨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을 내린 NASA는 존슨에게 가서 해결방법을 찾아달라고 했다. 그리고 역시 존슨은 아무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 중요한 순간에도
작성일 2017-03-29 작성자 ON플ㅍrOi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5192상세보기 -
감상&비평 "단기"에 대한 다소 불편한 진실
올해 서기 2009년은 단기로 환산하면 4342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나 이 '단기'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무엇을 근거로해서 단군조선을 기원전 2333년에 세워졌다고 판단하며 또 그것을 환산해 왜 현재가 단기 4341년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역사상에서 최초로 단기에 대해 연대환산을 언급한 사람은 고려의 '백문보'이다. 고려사 열전 25권 백문보 편을 살펴보면 且天數循環周而復始 七百年爲一小元積三千六百年爲一大周元 此皇帝王覇理亂興衰之期 吾東方自檀君至今已三千六百年乃爲周元之會 자연의 운수는 순환하며 한 바퀴 돌고 다시 시작되는 것입니다. 700년을 한 개의 소원(小元)이라 하고 3600년을 쌓아 한 개의 대주원(大周元)으로 되는바 이것이 황, 왕, 제, 패(皇王帝覇)의 치란 성쇠의 주기(週期)입니다. 우리 동방은 단군부터 지금까지 이미 3600년이 되니 이것은 한 개의 주원이 되는 시기입니다. (북한사회과학원 고전연구소 역) 라는 기사가 나와있다. 일단 간략하게 우리나라의 단기 사용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대한제국에서 연호와 함께 단기가 병용되기 시작하여, 해방 직후 대한민국이 건국되면서부터는 연호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단기가 공식적으로 사용되었으며, 5.16 군사정변 이후 폐지법령이 선포되어 현재에는 비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현대에 사용하는 단기는 고려시대 백문보가 말한 단기와는 그 연대가 다르다. 현재의 단기연대를 확정적으로 서술한 것은 서거정의 동국통감이다. 동국통감을 보면 是爲檀君 國號朝鮮 是唐堯戊辰歲也이가 단군이며 국호는 조선이라 하였는데, 바로 당요 무진년이었다. 라고 나와서, 단군이 요임금 즉위 후인 무진년에 조선을 세웠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사실, 동국통감에서 그 연대를 확정짓기 전에 이미 고려시대 일연도 삼국유사에서 단군의 즉위년에 대해 언급한 바가 있다. 삼국유사를 보면 壇君王儉以唐高即位五十年庚寅[唐堯即位元年戊辰 即五十年丁巳 非 庚寅也 疑其未實] 都平壤[今西京] 始稱朝鮮단군 왕검은 당고(唐高)가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요가 즉위한 원년元年은 무진戊辰년이다. 그러니 50년은 정사丁巳요, 경인庚寅은 아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평양성(지금의 서경) 도읍하여 비로소 조선이라고 불렀다. (직지프로젝트 역) 라고 해서 단군의 즉위를 요임금 즉위 50년 후라고 비정했다. 그러나 주석에서 보시다시피 일연은 이러한 사실에 의구심을 품고 있었는데, 사실 요임금 즉위 후 50년이면 일연의 주석대로 정사년이고 이것을 소급해 올라가면 그나마 가장 BC2333년과 가까운 연도가 BC2344년으로 계산되지 완벽히 BC2333년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단군 즉위년을 BC2333년으로 확정하게 된 것은 동국통감이 최초인 것이다. 동국통감은 어째서, 무엇을 근거로하여 BC2333년이라고 한 것일까? 그 이유는 서거정이 지은 '필원잡기'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嘗考 自唐堯元年甲辰 至洪武元年戊申 摠三千七百八十五年 自檀君元年戊辰 至我太祖元年壬申 亦三千七百八十五年 吾東方歷年
작성일 2009-10-03 작성자 泥花 좋아요 0 댓글수 55 조회수 5191상세보기 -
감상&비평 존재하고 싶었던 인간, 오바 요조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을 읽고)
대다수의 사람이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며, 완벽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한다. 사실이다. 무엇보다 인간은 이성뿐만이 아니라 감정, 충동, 욕망 등 비합리적 요소를 두루 갖춘 존재이며 이에 따라 인간의 행동은 항상 합리적이지만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거지에 있어서 이성의 지배를 실현하지 못하고 비이성적인 충동, 고뇌 따위에 휩쓸려 행동하는 사람을 보고 ‘나약하다’ 라고 말한다. 인간이기 때문에, 나약함은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르나, 오래전부터 나약함은 극복의 대상으로 여겨져 왔으며, 나약한 사람들은 의지박약이라는 등 부정적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모든 인간은 그 정도만 다를 뿐, 나약하며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다. 고백하지만 나도 이런저런 걱정과 고민을 하며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지에 대해 뼈저리게 느꼈었다. 아무튼, 이런 점에서 다자이 오사무가 자신을 ‘오바 요조’라는 인물에 투영시킨 자전적 소설 「인간 실격」에서의 요조는 나약함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이며,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나약함을 극도로 표출하면서, 독자에게 위안을 주기도 한다. 요조는 순수한 인간관계를 갈망하지만, 인간에 대한 불신 때문에 인간관계를 맺기 두려워하며, 또 인생의 뜻 없음을 느끼는 인물이다. 요조의 불신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시작한다. 그는 어렸을 적 친척들이 지인의 연설을 듣고, 연설에 대해 거센 비난을 하면서도 지인 앞에서는 알랑거리는, 위선적인 모습을 본 후,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불신을 가진다. 게다가 그는 어렸을적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원숭이에 빗대기도 하며, 낮은 자존감을 보여준다. 아무튼, 어렸을 때의 이런 경험은 그로 하여금 인간관계를 두려워하게 하며, 타인과 마주할 때 익살꾼이 되게 한 이유이다. 익살로 상호 간의 긴장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모습과 낮은 자존감은 그가 인생을 어렸을 때부터 아무런 뜻 없이 살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목적 없이 그는 인생을 살아가며, 고등학교 때에는 잠시나마 자신에게 안락함과 편안함을 주는 술과 여자에 빠지기도 하고, ‘동지’들의 편안한 분위기가 좋아서 당시 거센 비난을 받던 비밀 공산당 조직에 가입하여 중심인물로 활동하기도 한다. 사실 그는 두려움에 인간관계를 거부하면서도 그 누구보다 순수한 인간관계를 갈망했던 사람이다. 실제로 그는 어린이의 순수성에 감동하기도 하며, 다방에서 그를 편견 없이 바라보아 주던 순수한 소녀를 만나 결혼하여, 충성을 다짐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결혼 후에도, 술을 끊으려고 시작한 모르핀에 중독되는 등, 나약함을 극복하지 못한다. 결국, 그는 주위 사람들에 의해 정신병원에 갇히고 그는 충격을 받은 채, 자신을 ‘인간 실격’이라고 말한다. 소설이 1인칭 고백체로 쓰여있기 때문에 그를 따뜻하게 이해할 수 있는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그는 정신병자가 아니다. 비록 인간관계에 대한 편집증, 약물 중독 증세 등을 보이긴 하지만 그정도는 많은 사람들 역시 갖고 있는 것 아닌가. 오히려, 그는 의지가 부족한 나약한 인간의 전형이며, 약간의 윤리 의식이 부족해 일탈을
작성일 2013-11-16 작성자 구테본 좋아요 1 댓글수 0 조회수 4925상세보기 -
감상&비평 대를 잇는 아픔
대를 잇는 아픔 하근찬의『수난 이대』를 읽고 ‘수난 이대’는 전쟁으로 빚진 한 가족의 수난사를 담담하고 솔직하게 풀어썼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아픈 기억, 어쩔 줄 모르며 아들을 기다리는 행동, 서운하고 속상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내던지는 듯한 투박한 말투들은 우리의 마음을 더욱 더 저미게 만들었다. 직접 겪어보지 않았다는 핑계로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는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친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가 점점 잊혀져 가고 있는 가운데, 역사가 만들어낸 한 가족의 비극을 아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그것이 왜 중요한가? ‘수난 이대’가 말하고 있는 역사의 아픔은 단지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근찬은 소설 내적으로 이러한 아픔을 두 가지 상징물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이 소설의 오프닝과 엔딩에 일관성이 있다는 점을 발견했는가? 좋은 작품은 오프닝과 엔딩이 잘 짜여 있다. 작가가 그만큼 오프닝과 엔딩에 신경을 썼다는 것과 그 작은 부분들에 비교적 큰 의미를 부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세히 보면 이 소설의 오프닝과 엔딩에서 하근찬 작가가 애초에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처럼 보이는 공통어를 찾을 수 있다. 바로 ‘용머리재’다. ‘그래 그런지 몰라도 박만도는 여느 때 같으면 아무래도 한두 군데 앉아 쉬어야 넘어설 수 있는 용머리재를 단숨에 올라채고 말았다.’ (하근찬,『수난이대』) 이것이 오프닝에서 용머리재가 사용된 문장이다. 이는 주인공인 박만도가 용머리재를 단숨에 넘을 만한 사건이 일어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을 매듭짓는 문장이기도 한 엔딩 문장을 살펴보자. ‘눈앞에 우뚝 솟은 용머리재가 이 광경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근찬,『수난이대』) 엔딩 문장에서 우뚝 솟아 있는 용머리재가 두 부자(父子)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외나무다리를 건너고 있는데 자연물 용머리재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즉, 이 자연물, 용머리재는 우리 민족의 수난의 역사를 지켜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두 ‘용머리재’의 의미는 상반되면서도 함축적인 의미를 지녔는데 특히 엔딩 문장의 용머리재가 더욱 그러하다. 오프닝에서는 주인공 혼자 등장하지만, 엔딩에서는 아들도 함께 등장한다. 오프닝에서는 주인공인 박만도가 용머리재를 넘은 후지만, 엔딩에서는 용머리재를 아직 넘지 않았다. 오프닝에서 박만도가 용머리재를 넘고 혼자 등장한다는 것은 이미 하나의 시련과 고비를 넘긴 것으로 보인다. 엔딩에서 박만도는 막 외나무다리를 건넌 직후, 아들과 함께 용머리재를 올려다보는 입장이다. 이는 그들이 함께 수난을 극복했음을 알려주는 동시에 견뎌내야 할 또 다른 수난이 기다리고 있음을 암묵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두 번째, 이 소설에서 핵심 소재로 다뤄진 ‘외나무다리’를 살펴보자. 박만도가 발을 헛디뎌 물에 빠졌던 적이 있었던 외나무다리와, 아들과 함께 힘을 합쳐
작성일 2017-03-25 작성자 우재영 좋아요 0 댓글수 3 조회수 4823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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