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틴10대 감성쟁이
감상&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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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공지]'감상&비평'에는 형식을 갖춘 비평문만 올려야하나요?작성일 2023-07-25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694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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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비평 잘리는 머리카락과 인권
많은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오가는 복도에 수많은 머리카락이 잔뜩 떨어져 있다. 선생님은 손에 가위와 바리깡을 들고 있다. 줄지어 서 있는 학생들은 금방이라도 울 거 같은 표정 짓고, 마침내 짧아진 머리를 감싸고는 퉁퉁 부어버린 허벅지 때문에 교복이 허벅지에 스칠라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 교실에서는 뜨거워진 허벅지를 식히기 위해 책상다리에 허벅지를 대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학교 또 다른 풍경이라 하겠다. 두발규제가 일제 강점기의 잔재라는 건 더 떠들면 입이 아플 정도로 다 아는 사실이다.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행해졌던 단발령을 학생에게 강요하는가? 일제 강점기를 우리 역사의 크나큰 치욕으로 남기면서 말이다. 당시 조선에게 강제로 단발령을 내려 칼을 들고 조선인의 상투를 자르는 일본 순사의 모습과 억울하게도 잘려나간 머리카락을 눈 앞에 두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조선인의 모습은 마치 지금의 그것과 흡사하지 않은가? 대체 왜 어른들은 학생의 머리에 그토록 집착하는가? 어디 변명을 한번 들어보자. "학생들이 머리가 길면 학업에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들의 가장 흔한 변명이다. 매사에 논리적이고 냉철해야 하는 선생님들이 이런 발언을 하는 건 좀 우스운 일이라 하겠다. 머리가 긴 학생들이 공부를 못하고 머리가 짧은 학생들이 공부를 잘한다는 통계가 어디 있던가. 공부 잘하는 엘리트들이 많다는 '외고'는 상당수가 두발자유를 표방하고 있다. 또한, 학업에 집중할 수 없다고 하여 학생들의 머리를 자르는게 정당한가? 일부 선생님과 어른들의 생각은 인권보다 학업이 우선인가? 다른 무엇보다 우선시 되야 할 것이 인권이라 배웠다. 선생님들에게 말이다. "학생은 학생의 본분에 충실해야 합니다," 학생의 본분은 머리를 짧게 자르는 일인가? 학생의 본분은 공부인가? 라는 대답에 고개를 끄덕일수도 있다. 하지만, 공부와 머리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머리의 길이와 가방끈의 길이는 반비례 하지도, 비례하지도 않는다. 단지 머리의 길이는 머리의 길이일 뿐. "학생들의 머리가 길면 학교의 위상이.." 많은 보수적인 어른들은 길거리에 머리가 긴 학생들을 보고는 혀를 끌끌 찬다. 예컨대 "학생이 무슨 머리가 저렇게 길어가지고 무슨 학생이람..쯧쯧" 따위 말이다. 학교는 어른보다 학생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학교는 학생들이 올바른 인성교육을 위해 다니는 곳이지 어른들에게 훈훈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신체 일부분에 불과한 머리카락 조차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없다면 학생은 과연 국민이란 말인가? 헌법은 나라를 위해 존재하고, 나라는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 교칙은 학교를 위해 존재하고, 학교는 학생들을 위해 존재한다. 학생들이 최우선시 되어야 할 학교에서 왜 학생들이 당연하지만, 간절히 원하는 일에 그토록 기를 쓰며 반대하는가. "천부인권"이
작성일 2010-01-25 작성자 밥공기 좋아요 0 댓글수 217 조회수 32663상세보기 -
감상&비평 나의 길을 걷기 위해서. <현실의 대한민국 학교를 바라보며>
나의 길을 걷기 위해서. <현실의 대한민국 학교를 바라보며> 0. 불쌍한 인생 난 올해로 만 17살, 대한민국 인문계 고등학교의 고3 수험생이 되었다. 겨울방학이지만, 그리고 보충수업을 거부하고 집에 틀어박혀 매일 하릴없이 영화를 보는 게 일이지만, 지금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는 아이들만큼이나 걱정과 고민이 많다. 주변에서는 등급, 점수, 대학, 선택과목, 독서실 등의 얘기로 그득하다. 내가 그런 화두를 전혀 즐기지 않음에도 이제 고3이 되었다는 죄목(?) 하나로 어쩔 수 없이 나누게 되는 이야기 소재들이다. 지나친 자기애는 이기주의로 전락하기 쉽고, 나 또한 별 것 아닌 것에 자기연민을 과하게 불어넣고 싶지는 않지만, 요즘 나는 내가 정말 불쌍하다고 느낀다. 내 친구들 또한 자신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한다. 끔찍하지 않은가? 자신들의 삶을 불쌍한 삶, 안타까운 삶으로 규정하고 내면화할 수밖에 없는 현실.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고 해도, 또 사는 것이 원래 고통의 연속이자 불행이라고 쳐도 이건 좀 슬프다. 행복을 추구해야 할 인간이, 더군다나 이제 열일곱 열여덟인 우리들이 벌써부터 우리의 인생을 불쌍하다고 여기는 현실이 안타깝다. 왜인지 생각해보니, ‘무언가가 우리의 삶을 갉아먹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답이 나왔다. 그래. 우리가 늘 당연시 하며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했던, 혹은 문제라는 것을 알지만 어쩔 수 없이 순응하고 타협했던 것들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것들로 인해 우리는 우리가 ‘인간’이기에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들을 무시당했다. 그 무시는 은폐된 채로. 그리하여 그 종자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더욱더 굳건하고 탄탄히 유지해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이 별 것 아닌 것이 절대 아닌데도 ‘별 것 아닌 문제’로 치부되고, 오히려 그게 너무나도 당연한 듯 여겨지는 이 사회를 보며 매일 울음을 삼키는 것도 이제는 신물 난다. 1. 교육제도 우리의 삶을 갉아먹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나라의 교육제도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대학 입학의, 대학 입학에 의한, 대학 입학을 위한’ 이 나라의 교육제도 말이다. 우리나라의 대학들은 서열화 되어있다. 말 그대로 ‘학벌사회’다. ‘스카이’, ‘인서울’, 심지어 ‘지잡대’라는 용어들만 봐도 대학으로 개개인의 직위를 나누고 차별을 두는 이 사회의 풍조를 엿볼 수 있다. 물론, 학생은 ‘공부를 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공부를 하다보면 저절로 대학을 가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을 보면 그렇지가 않다. 우리나라의 학생들은 ‘점수를 받아오는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
작성일 2012-01-11 작성자 희희희 좋아요 0 댓글수 74 조회수 14717상세보기 -
감상&비평 육식의 정당화 : 도덕적으로 정
‘도덕적으로 타당하다’첫째, 모든 인간이 모든 돼지보다 영리한 것은 아니다. 둘째, 당신이 나보다 영리하지 못하다고 해서-그리고 영구히 나와 동일한 지적 능력을 얻지 못할 것이라 해도-내가 당신을 냄비에 삶고 양념하고 볶는, 말하자면 오독오독 씹어 먹는 행위가 허용될 수는 없다. 아니 적어도 당신은 허용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텔레비전 아홉 시 뉴스가 잔혹한 살인사건을 내보낼 때면-단지 ‘도살’했을 뿐 먹진 않았는데도-언제나 혀를 차며 얼굴을 찌푸리던 당신이니까. 당신과 육식자들의 논리대로라면, 동종(同種) 살해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 이외에는 내가 당신을 식탁에 올리는 데 아무런 문제될 게 없어 보인다. 식인(食人)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사람이 육식에 분노하지 않는 건 굉장히 이상한 일이다. 채식의 문제에서, ‘같다’ 혹은 ‘같지 않다’는 사실을 밝히는 건 핵심이 아니다. ‘우월하다’ 혹은 ‘열등하다’를 밝히는 것도 무관하다. 당신은 동물이 때로 도덕적, 법률적으로 고려돼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하면서도 잔인한 입맛을 바꿀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다. 누가 개를 걷어차기만 해도 ‘도덕적으로’ 분노를 느끼는 선량한 당신은 왜 하필이면 개와 다를 바 없이 영리하고 쾌활한, 운이 조금만 좋았다면 우리들의 좋은 친구가 되었을 게 분명한 돼지를 잡아먹어야만 하는 걸까. 정말 거대한 무엇인가가 ‘돼지에게는 연민을 느끼지 않아도 돼’ 속삭이기라도 하나. 그 불일치는 얼마간 우울하다. 대부분이 육식을 하고, 육식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육식이 ‘도덕적으로’ 정당해지지 않음은 명백하다. 고작 ‘다른 사람들도 다 동물을 먹어왔다’는 한 마디로, 당신은 셀 수도 없는 동물들을 고통에 빠뜨리고 있다. 동물이란 인간이 먹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성서가 그것을 증명했다는, 동물은 ‘영혼’이 없다는 따위의 오만하고 어리석은 억지는 시간을 소모할 가치도 없다. 대체 독보적인 지구 약탈자, 온갖 생명의 살해자인 당신에게 무슨 ‘영혼’? 더러운 짐승들에는 감히 가져다 댈 수도 없는 그 고결한 ‘영혼’이란 건 머리카락처럼 애초에 당신 몸 어딘가에 붙어서 태어났다. 이 논의에는 ‘영혼’, 그리고 ‘도덕’ 같은 것들은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 ‘육식이 옳다’는 말은 ‘육식을 해도 된다’거나, ‘육식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채식으로 도덕적 우월성을 획득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적어도 육식이 ‘옳다’고 하는 데 효과적인 반박을 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논의는 거의 무가치하다. 적어도, 생명이 죽임을 당하고 있는 이 순간 그런 것들을 논하는 것은 도피다. ‘옳다’ 혹은 ‘옳지 않다’와 같은 가치평가적 단어는 당신의 주장과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다. 그러한 알기 어렵고 추상적인 것들 대신, 생명을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당신이 느낄 수 있는 것은 흔히 ‘진리’-당신이 분명하고 확고부동하게 여기는 듯한-가 아니라 ‘고통’이 아닌가? 더구나, 인간이 그렇게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면, 왜 ‘동물은 서로 잡아먹는다’는 사실을
작성일 2007-03-18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51 조회수 13841상세보기 -
감상&비평 "단기"에 대한 다소 불편한 진실
올해 서기 2009년은 단기로 환산하면 4342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나 이 '단기'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무엇을 근거로해서 단군조선을 기원전 2333년에 세워졌다고 판단하며 또 그것을 환산해 왜 현재가 단기 4341년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역사상에서 최초로 단기에 대해 연대환산을 언급한 사람은 고려의 '백문보'이다. 고려사 열전 25권 백문보 편을 살펴보면 且天數循環周而復始 七百年爲一小元積三千六百年爲一大周元 此皇帝王覇理亂興衰之期 吾東方自檀君至今已三千六百年乃爲周元之會 자연의 운수는 순환하며 한 바퀴 돌고 다시 시작되는 것입니다. 700년을 한 개의 소원(小元)이라 하고 3600년을 쌓아 한 개의 대주원(大周元)으로 되는바 이것이 황, 왕, 제, 패(皇王帝覇)의 치란 성쇠의 주기(週期)입니다. 우리 동방은 단군부터 지금까지 이미 3600년이 되니 이것은 한 개의 주원이 되는 시기입니다. (북한사회과학원 고전연구소 역) 라는 기사가 나와있다. 일단 간략하게 우리나라의 단기 사용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대한제국에서 연호와 함께 단기가 병용되기 시작하여, 해방 직후 대한민국이 건국되면서부터는 연호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단기가 공식적으로 사용되었으며, 5.16 군사정변 이후 폐지법령이 선포되어 현재에는 비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현대에 사용하는 단기는 고려시대 백문보가 말한 단기와는 그 연대가 다르다. 현재의 단기연대를 확정적으로 서술한 것은 서거정의 동국통감이다. 동국통감을 보면 是爲檀君 國號朝鮮 是唐堯戊辰歲也이가 단군이며 국호는 조선이라 하였는데, 바로 당요 무진년이었다. 라고 나와서, 단군이 요임금 즉위 후인 무진년에 조선을 세웠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사실, 동국통감에서 그 연대를 확정짓기 전에 이미 고려시대 일연도 삼국유사에서 단군의 즉위년에 대해 언급한 바가 있다. 삼국유사를 보면 壇君王儉以唐高即位五十年庚寅[唐堯即位元年戊辰 即五十年丁巳 非 庚寅也 疑其未實] 都平壤[今西京] 始稱朝鮮단군 왕검은 당고(唐高)가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요가 즉위한 원년元年은 무진戊辰년이다. 그러니 50년은 정사丁巳요, 경인庚寅은 아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평양성(지금의 서경) 도읍하여 비로소 조선이라고 불렀다. (직지프로젝트 역) 라고 해서 단군의 즉위를 요임금 즉위 50년 후라고 비정했다. 그러나 주석에서 보시다시피 일연은 이러한 사실에 의구심을 품고 있었는데, 사실 요임금 즉위 후 50년이면 일연의 주석대로 정사년이고 이것을 소급해 올라가면 그나마 가장 BC2333년과 가까운 연도가 BC2344년으로 계산되지 완벽히 BC2333년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단군 즉위년을 BC2333년으로 확정하게 된 것은 동국통감이 최초인 것이다. 동국통감은 어째서, 무엇을 근거로하여 BC2333년이라고 한 것일까? 그 이유는 서거정이 지은 '필원잡기'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嘗考 自唐堯元年甲辰 至洪武元年戊申 摠三千七百八十五年 自檀君元年戊辰 至我太祖元年壬申 亦三千七百八十五年 吾東方歷年
작성일 2009-10-03 작성자 泥花 좋아요 0 댓글수 55 조회수 13248상세보기 -
감상&비평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고
독후감-코스모스를 읽고- 나의 성격은 참으로 이상하다. 신비의 베일에 둘러싸인 우주처럼 참으로 신비스럽다. 나는 무조건 경쟁을 피하지 않는다. 상대가 누구더라도, 난 피하지 않는다. 내가 3학년 때 ‘별똥별 아줌마가 들려주는 우주이야기’라는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우주에 호감을 느끼게 되어 이젠 경쟁 사이까지 되었다. 한마디로 나는 비밀을 벗기는 걸 좋아한다. 매일 아침에 일어날 때 ‘모든 비밀, 그게 무엇이든 알아내고 말겠어!’라고 다짐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책에 있는 단 한마디, 우주는 신비로운 베일에 싸여 있다. 라는 말 한마디가 나를 자극했고, 다시 경쟁심에 불이 붙어버린 나는 커서 우주를 연구하는 과학자, 천문학자로 꿈의 변천사가 일어났다. 물론 천문학자가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난 어려우므로 도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커서 제일 어려운 우주에 도전하는 일을 서슴지 않겠다. 우주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돈다. 우주의 비밀은 도망치고, 나는 쫓는 자이기 때문에 우주를 도는 것이다. 그리고 물처럼, 우주는 나에게 있어 매우 소중한 존재이다. 물의 특징을 생각해보자. 공기 중에도 소량이 들어 있다. 그래서 항상 내 주위에 있고, 많은 물질과 결합하는 많은 능력을 갖추고 있다. 또한, 환경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고 담는 그릇에 따라 모양이 변하지만, 본래의 성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물 분자의 특징은 서로 당기는 힘이 강하다. 그럼 이제 우주를 보자. 물과 우주를 동시에 바라본다면 이러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물은 공기 중에도 소량이 들어 있다. 그래서 항상 내 주위에 있고, 이 관점에서 우주를 바라본다면 우주는 항상 나의 마음속에 존재한다. 고로 항상 내 주위에 있다. 또한, 물은 많은 물질과 결합하는 많은 능력을 갖추고 있다. 잔잔한 호수의 물은 사람의 마음을 적시고, 파도는 보는 이로 하여금 후련함을 느끼게 하며 맑고 깨끗한 물의 빛깔은 자신을 한 번 더 돌아보게 한다. 그렇다면 우주는 어떨까? 우주의 은하는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우주의 검은 바탕을 빛내고 있는 별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검은 도화지에 반짝거리는 작은 종이를 뿌려놓은 것과 같이 화려하다는 표현을 쓰게 만든다. 우주는 팽창하기도 하고, 별의 폭발로 말미암아 블랙홀을 만들기도 한다. 이렇듯 우주도 많은 능력을 갖추고 있다. 물은 환경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고 담는 그릇에 따라 모양이 변하지만, 본래의 성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물 분자의 특징은 서로 당기는 힘이 강하다. 우주는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기도 하지만 늘 신비스러운 본래의 성질은 변하지 않는다. 또한, 당기는 힘이 강하여 우리 은하와 안드로메다은하는 한 시간에 50만 킬로미터씩 가까워지고 있다. 이렇게 비교해보면 물과 우주는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코스모스란 책을 말하자면 "우주와 인간을 담은 책"이라 할 수 있다. cosmo
작성일 2010-08-09 작성자 따뜻한 바람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11140상세보기 -
감상&비평 비판에 대한 비판.
글을 쓰는 커뮤니티는처음 와보았다.이야기글 게시판보다는 시 게시판을 더 유심히 관찰했다.이곳만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갑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글을 씀에 있어 시는 어떤 장르보다도 더 자유롭다고 생각했다.이것은 그야말로 언어의 미학이라고,주관적인 하나의 성립된 세계라고,믿었다.하지만 시 게시판에 달린 댓글들을 보며 혼란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다. 나는 시라면 흰 도화지를 벗어나 모든 곳에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사람들의 말은 달랐다.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흰 도화지를 여백 없이 가득 차게, 틀렸다왜 그렇게 이야기해야만 하는가?그들은 마치 자신이 평론가인 것처럼 글에 대해 일종의 ' 임을 잊지 말아주었으면 한다.이것은 평가가 아니다.문제는 '그들'이 자신이 느끼는 것을 평가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그들'은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일수도 있다.일반적인 독자가 실제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맞춤법정도이다.평론가들도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을 말할 뿐이다.그 누구도 어떠한 작품에 대해 확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글의 구성, 내용, 문체, 주제 등등. 이곳에서는 얼마든지 소통할 수 있고,우리는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물론, 우리가 쓰는 글들이 모두 완벽하지는 못하다.내가 얘기하고픈 것은 비판을 하지말자-라는 것이 아니다.올바른 태도로 비판을 하란 이야기이다.상대방의 우위에서 내려다보는 듯 하다 건방진 태도는 버리고, 지적해서 고쳐나가고 발전해야할 것이다. 느낌 대 느낌으로 대화하자. 사실 더 많은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틀린 주관'이라는 것은 없습니다.말 하는 태도가 잘못되었거나 아니면 작가와 주관이 다르거나.그런 경우를 많이 봐왔습니다.그렇다고 무리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완벽한 글쓰기를 위한 것처럼 보입니다.그런 사람들이, 같은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상처를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글을 쓰다보니 흥분이 되어 이런 식으로 쓰게되는군요.
작성일 2007-02-10 작성자 다시마 좋아요 0 댓글수 78 조회수 11031상세보기 -
감상&비평 [우리나라 복지제도의 문제점과 해결책]
기본 철학 없이 그때 그때 땜질식 처방... 이대로 괜찮은가? ‘늙어서 재산을 2억쯤 갖고 있지 않으면 친척이나 가족들에게 버림받는다’ 진담 반 농담 반인 이야기지만, 그만큼 스스로가 노후 준비를 해 놓지 않으면 노후에 어려운 생활을 면치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대가족을 이루고 살았던 옛날에는 노인들의 안정된 삶이 보장되었었다. 그러나 산업화의 물결을 겪고 난 지금은 공동체의 미덕이 사라져가고, 부모를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약해짐에 따라 ‘버림받은 노인’에 대한 뉴스가 우리네 안방에서 심심찮게 들려오곤 한다. 노인 뿐 아니라 장애인, 빈곤층, 아동 등 사회에서 보호받아야 할 약자들이 아직까지도 설 자리가 마땅치 않다.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복지제도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러한 것의 많은 부분을 가정의 짐으로 남겨두고 있다. 최근 빈부의 격차가 더욱 심화되어 빈곤층은 기본적인 삶의 질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되었다.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의 사회 복지비 지출은 국내총생산(GDP)의 8.70%인 47조 9.952억 원이다. 이 수치는 OECD회원국 중 최하위 수준이다. 스웨덴(GDP의 31.47%), 덴마크(30.10%)등 유럽 선진국에 비해서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며, 미국, 일본 등에 비해서는 2분의 1정도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복지제도가 얼마나 허술하게 구축되어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는 왜 이러한 복지 수준에서 머무르고 있는지, 그 원인을 돌아보고 해결책을 모색해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로, 보여주기 위한 전시성 행정으로 근본적인 해결 방안을 내지 못하는 정책에 있다. 현재 장애인과 같은 스스로 자립하기 힘든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에게 당장의 궁핍함을 해결하도록 하고 있으나, 직업교육과 같이 스스로 자립하여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 운영이 미비하다. 그들을 도와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하루 한 끼 식사를 제공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고질적인 수급자를 해결할 수 있고 그들 또한 어려움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두 번째로, 사회 복지사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 복지 확대 추진에 영향을 미친다. 미래 사회로 접어들수록 사회복지에 대한 수요는 꾸준히 증가할 것이기 때문에 그에 상응할 사회복지 관련 직업을 가진 사람이 절실해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직업에만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모여든다. 사회복지사가 사회에 공헌하는 역할에 비해 그들에 대한 급여가 낮은 것도 사실이다. 현실이 이렇기 때문에 사회복지 관련 직업에 종사하려는 사람의 수가 적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복지사에 대한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 근로조건을 개선하고 점진적으로 급여를 올림으로써 자연스럽게 사회복지 인력을 얻을 수 있
작성일 2009-11-29 작성자 새송이버섯 좋아요 0 댓글수 3 조회수 9515상세보기 -
감상&비평 솔직히 말할게요. 순수문학에 미래가 있나요?
일반 사람들은 '문학'이라는 말을 들으면 뭐랄까. 나이 지긋하신 원로 소설가님들께서 이것저것 고지식하고 일상 생활에서 쏟아내는 진지하고 무게감 있는 글을 떠올릴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글은 다가가기도 힘들고, 정말 딱 틀에 박힌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러한 순수문학이랍시고 출판되고 있는 소설들은 정말 몇몇 작가가 아니면 잘 팔리지도 못하는 추세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소설을 읽는 이유가 뭘까요? 자기 영혼에 살을 찌운다는 식의 대답이 있을 수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이유는 '읽는 즐거움'을 위해서일 겁니다. 물론 순수문학이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즐거움을 준다'라는 순 기능면에서만큼은 장르소설이 순수소설을 훨씬 앞서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출판산업이 굉장히 발전한 나라인 미국이나 일본을 보면 왠만큼 잘 팔리는 책은 거의 다가 추리,호러,판타지 등의 장르소설입니다. 글을 '잘' 쓴다. 그 잘쓴다의 정의가 무엇일까요? 저는 이것을 '독자들을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 속에 더욱 잘 가둘수 있다'라고 정의합니다. 더욱 진지한 주제를 다루고, 더욱 심오한 내용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답답하기 짝이없는 주제들은 논문에나 쓰세요. 소설의 본질은 즐거움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때 저는 매드클럽 작가분들 전부가 이병주나 이수광 같은 딱딱한 역사소설을 쓰시는작가분들보다 훨씬 나은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번역되어 우리나라에 출판되는 책들을 보세요. 거의가 다 장르소설입니다. 장르소설은 비록 문학의 정도[正道]라는 것에서 떨어질 지는 몰라도 충분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셈입니다. 순수문학은 미래가 없습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문학의 본질은 즐거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즐거움을 추구하지 못하게 하고, 괜히 진지한 주제를 다루어 독자들을 고민하게 하는 순수문학은 한국 출판업계의 독[毒]이라고 생각합니다. 장르소설을 육성하여 세계 경쟁력을 키워나가야 할 때입니다.
작성일 2010-01-31 작성자 Jeffery.K 좋아요 0 댓글수 42 조회수 8845상세보기 -
감상&비평 윤흥길작가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를 읽고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를 읽고 사람이 가난하게 살게 되더라도 꼭 지켜야 하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지하철에서 가끔씩 보게 되는, 동전 몇 푼이 들어 있는 조그마한 바구니를 앞에 두고 계시는 분들을 보게 되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하루 수입도 별로 안 될 것이고 관심 가져 주는 사람들도 얼마 없을 것인데 그저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분들... 갈수록 삭막해져가는 도시에서, 모르긴 몰라도 이말 저말 많이 들으셨을 것이다. 실제 주변에서 그런 분들을 지나쳐가며 “얼마나 게으르면 일도 안하고 저러고 있을까?”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본 적이 있으니까... 그럴수록 그분들에게 여쭈어보고 싶은 것이 하나 둘 생겨난다. 어째서 이렇게 되셨나요, 일을 구해보려고 하지 않으셨나요, 사람들의 시선이 어처구니없지는 않으신가요, 하루 수입은 얼마나 되나요... 내가 궁금한 것이 많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는 이유는 그 분들에게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켜드리고 싶기 때문이다. 지폐를 넣어드려도 정말로 못 보신 건지, 눈을 감아버리신 건지 아무 반응도 없는 분들께는 티끌만큼의 자존심이라도 남아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권씨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록 전과자이고, 여럿 딸린 식구들과 함께 온갖 눈치 다 보며 문간방 살이를 하고 있는 처지이지만 그의 구두는 그의 여느 옷들과 달리 언제나 반짝 반짝 빛이 난다. 공사장에서 막일을 할 때에도 그는 꾀죄죄하지만 사무원 복장에 역시 빛나는 구두를 신고 있으며, 그의 집 안에는 흔히 귀중품이 놓이는 자리에 구두 아홉 켤레가 늘어져 있기도 하다. 매일 구두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닦아대는 권 씨의 행동은 일반적인 시민의 대표인 오 선생이 봤을 때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자존심이 상할 때마다 바지춤에 구두를 문질러 닦아대던 권씨, 마지막에 초보 강도로 오 선생의 집에 침입한 그는 결국 아홉 켤레의 구두만 남긴 채 사라져버린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에는 그가 시시때때로 밝히는 학력이나 본관, 그리고 자꾸 의식하는 구두가 참으로 쓸 데 없다고 생각했다. 곧 네 명이 될, 딸린 가족 세 명을 부양하기 위해 권 씨에게 당장 급한 것은 먹고 사는 문제와 관련된 돈이다. 아무리 그가 좋은 대학을 나와도, 본관이 좋기로 유명하다고 해도, 구두가 광이 난다고 해도 당장 먹을 밥이 없고, 아이를 낳는 것이 위험하다면 식구들 모두가 죽을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 이런 상황에 처했는데도 돈을 빌리러 다니지도 않고,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며 직장을 그만둬 버리며 그 와중에도 술에 취해 오 선생에게 사건의 전말을 밝히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일 아내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정말 중요한 게 자존심은 아니라고 보고, 차라리 사람들한테 구걸이라도 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권 씨의 입장에서 이 소설을 이해하려 했을 때에는 그렇게 권 씨를 비판하던 나조차도 권 씨를 이해하게 될 수밖에
작성일 2009-08-22 작성자 프리러브 좋아요 1 댓글수 3 조회수 8842상세보기 -
감상&비평 왼손을 타고난 사람, 왼손잡이?
인류에게 왼손은 매우 중요하게 쓰여 왔다. 전쟁을 예로 들어보자, 전쟁에서 전사는 오른손엔 칼을 들지만, 왼손에는 방패를 든다. 상대를 죽이는 손은 오른손이지만 자기를 살리는 손은 왼손이다. 심장은 왼쪽에 있다. 하지만, 왼손은 주체일 때보다 비주체일 때가 더 많다. 위에서 예를 든 전쟁만 하더라도 전쟁의 이유가 상대를 죽이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전쟁에서 주체적인 역할을 하는 손은 왼손이 아닌 오른손이다. 뜨개질을 할 때도 실을 기웠다 떼었다 하는 손은 오른손이고 왼손은 거들 뿐이다. 기타 연주에서도 줄을 튕겨서 소리를 내는 손은 오른손이고 왼손은 그저 음을 짚어서 오른손을 돕는 역할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일까? 인류에게 왼손잡이는 그저 멸시되고 조롱당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말했듯이 역사 속에서는 왼손잡이 위인이 많이 탄생했다. 특히, 예술은 거의 왼손에서 탄생했다.2) 이러한 현상의 이유로 학자들은 왼손을 타고난 사람의 우뇌 발달을 든다. 왼손을 타고난 사람은 사회에 의해 오른손을 강요받게 된다. 그런데, 오히려 이것이 플러스가 되어 그들은 왼손과 오른손을 동시에 쓰는 양손잡이가 될 수 있고, 이는 대뇌의 좌반구와 우반구를 균형 있게 발달시킨다. 하지만, 이 말은 역설적이게도 지금 사회는 왼손을 타고난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사실을 자아낸다. 무슨 뜻이냐, 단지 저 말대로라면 오른손을 타고난 사람에게 왼손을 강요하면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왜? 지금 사회는 왼손잡이를 오른손잡이로 바꿀 수는 있지만, 오른손잡이를 왼손잡이로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조건부터가 왼손잡이에게 열악하다는 뜻이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키보드를 비롯해, 사람이 쓰는 대부분의 물건이 오른손용이기 때문이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의 심리학자 코런 박사는 인간은 본래 오른손잡이이며 왼손잡이는 대개의 경우 비정상적인 태아의 위치 등으로 인해 자궁 속의 태아에 손상을 주는 소위 '출생스트레스'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코런 박사는 출생전 뇌 손상이야말로 왼손잡이의 대부분이 심리적, 정서적 장애를 겪는 이유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 생각에 이 사람은 심리학자로서의 자질이 의심스럽다. <왼손잡이>는 지금부터라도 한시 바삐 버려야 할 용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우리나라 사람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한 것, 프랑스의 식민지 언어정책 등과 다르지 않다. 언어로 인한 세뇌는 그 어떤 사회적 통념이나 교육으로 행하는 세뇌보다도 훨씬 더 무서울 수 있다. <왼손잡이>라는 용어에 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자. 3) 네이버 국어사전 - 자유의지 [自由意志] 『왼손과 오른손』, 시공사
작성일 2007-10-20 작성자 르샤마지끄 좋아요 0 댓글수 27 조회수 8133상세보기 -
감상&비평 언어의 달인, 호모 로퀜스 를 읽고-인간 사회와 언어
모국어와 외국어 미국의 매래학자 앨빈 토플러에 의하면 세계는 제4의 물결이 흐르고 있고 제4의 물결은 세계화아고 했다. 국가와 언어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지구촌 모두가 하나가 되어가는 세계화의 흐름은 인류역사의 한 흐름일 것이고 그 흐름을 막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 책에서도 ['세계화 시대'가 될수록 우리말의 '순수'를 지킨다는 일은 너무나 힘겨워 보인다.] 라는 말이 있다. 분명 세계화의 흐름에서 언어의 순수성만을 지킨다는 것은 과거 조선후기 사회 근대화기술의 무조건적인 배척에 의해 국력의 약화 그리고 일제강점기라는 현실로 이어진 어리석은 사례와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세계화가 진행된다고 해서 언어의 순수성을 무시하고 무조건적인 외래어의 수입을 허용하란 말 역시 모순이다. 언어에는 민족의 혼이 담겨 있다. 일제강점기시대 때 조선어말살정책을 편 것도 이것 때문이다. 분명히 반세기의 우리 조상의 삶이 담긴 언어는 소중하고 지켜야하는 것이 틀림없다. 세계화 시대가 진행되어간다고 해서 민족의 정체성을 잃고 아무런 근본의식 없이 세계화에 몸을 담는 것은 어쩌면 세계화시대를 이끄는 강대국의 정신적 노예가 될 수 있는 위험한일이다. 즉 민족의 혼 즉 우리말을 잃고 세계화시대에 발을 들려놓으면 일본에 의한 강점기가 아니라 세계화에 의한 정신적 강점기가 찾아올 것이다. 고1 국어시간에 배우는 최재천의 '황소개구리와 우리말' 에서처럼 황소개구리가 참개구리를 잡아먹는 일은 없어야 한다. 세계화 시대에 외래어를 받아들이고 그에 발맞춰 살아가는 것은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데 필수 요소이다. 하지만 우리는 외래어와 우리말과의 조화를 이루어 새로운 언어를 받아들이면서도 우리말의 순수성을 머리 속에서 모두 지워서는 안된다. 민족의 순수성을 제대로 세우지 않고 혼합된 새 시대의 언어를 들여오는 일은 우리 개구리들을 돌보지 않은 채 황소개구리를 드려오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외래어와 혼합된 현대의 언어를 받아들이되 학교 교육과정에서 언어의 문법을 가르치는 단원에서 순수한 우리말을 상기시키는 일은 꼭 필요한 일이다. 언어, 인간사회의 표현 문학이란 언어를 재료로 인간의 삶을 문학적 형상화를 통해 가치를 드러내는 언어예술이다. 문학 언어와 일상 언어는 의사전달과 감정 표현의 수단, 현실과 사실을 재현함, 선전과 설득의 기능이 있다는 것에 공통점을 가지면 인간사회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잡아왔으며 세계화 시대가 흐르는 현재 미래에도 줄기차게 번영할 것이다. 우선 문학은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인간의 감정은 무한하며 그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 역시 인간의 본연적 욕망이다. 그래서 몇몇 문학작품들과 본인(김시헌) 창작을 예로 들어보고자 한다. (사랑) [가장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가장 쉼게 유혹할 수 있다는 것은 사라의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이다. 내가 클로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가치에 대한 모든 믿음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녀와 비교하면 나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녀
작성일 2009-12-20 작성자 김션 좋아요 0 댓글수 23 조회수 8092상세보기 -
감상&비평 초자아(superego)와 자아(ego), 원초아(id)에 따른 동서양권의 문학작품 분석과 가치관 비교월장원 선정
초자아(superego)와 자아(ego), 원초아(id)에 따른 동서양권의 문학작품 분석과 가치관 비교 Abstract 본 논문은 프로이트(Freud)의 정신분석학을 이용하여 동서양권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비교하고 차이점을 구명하는 데 그 목적을 둔다. 정신분석학에 대해서는 일찍이 다양한 선행 연구가 진행되었으므로 드물게 이루어진 문학작품의 분석과 정신분석학을 접목시켜 대체적으로 세계에서 통용되는 동양권의 공동체주의와 서양권의 개인주의의 차이와 원인을 분석했다. 이를 위해 서양문학에서는
(1886, Robert Louis Stevenson)을, 동양문학에서는 윤동주의 일생과 시 세계, <쉽게 씌어진 시>(1942, 윤동주), 그리고 <또 다른 고향>(1941, 윤동주)을 대상 작품으로 삼아 분석했다. I. 서론 1. 연구의 목적 및 필요성 오늘날 사람들은 규범에 맞춘 삶을 살아가기를 강요당한다. 원초아(id)는 제한하고, 자신이 가진 도덕적인 생각만 제한하여 보여내는 초자아(superego)적 사고를 권장한다. 실은 초자아가 사람으로서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종착역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자아(ego)에 의거하여 이성적 사고를 하는 것이 당연시 여겨지고 있다. 결국 초자아 또한 사회가 만들어낸 가치에 부합되어 만들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생활을 위해 요구받는 행위들은 대체로 지극히 제한적이고 개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성자聖者로 일컬어지는 이들을 보라. 대표적으로 예수와 부처를 들 수 있다. 그들을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키워드들은 한정되어 있다. 희생, 친절, 베풂, 선행, 헌신, 용서, 겸손. 전부 자신을 버리고 다른 이들을 먼저 생각하는 이타적, 아가페적 사고를 보이고 있으며, 그들은 완전한 초자아의 영역에서 머무르고 있는 성인聖人으로 추앙받는다. 많은 이들은 이 ‘성인’의 초자아적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자신 또한 그렇게 변화하고 행동하기 위해 노력한다. 노력하여 성공한 극히 소수의 사람들은 역시 성인으로 대우받아, 그렇게 대물림되는데, 이는 ‘사회가 만들어낸 성인’의 틀에 자기 자신을 맞추어 넣는 것이다. 개인보다 공동체를 중시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조선의 제 3대 왕인 태종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두 번 일으키고 끝내 왕위에 올라 자신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에게 옥새를 받을 때, 세 번이나 거절했다가 마지못해 받았다고 야사에 기록되어 있다. 실록에는 우리의 선조들 또한 선물이나 도움을 받아야 할 상황에서도 몇 번이고 거절하다가 마지못해 받는 척 하는 경우가 많다. 이 관례와 풍습은 그대로 세습되어 현대 사회로 전해져 내려왔다. 유교 풍속이 뿌리 깊게 잘하고 있는 동양권에서는 거절과 겸손과 겸양을 미덕으로 여긴다. 그러나 서양권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거절의 뜻을 내포한 말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들의 거절이 의미하는 것은 작성일 2016-06-17 작성자 윤별 좋아요 1 댓글수 3 조회수 8033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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