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틴10대 감성쟁이
감상&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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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공지]'감상&비평'에는 형식을 갖춘 비평문만 올려야하나요?작성일 2023-07-25 작성자 관리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2695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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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비평 기 드 모파상 《여자의 일생》
“인생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닙니다.” <여자의 일생>은 프랑스 작가 기 드 모파상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제 막 수도원을 나서 기대에 부푼 17살 잔느의 인생이 무너지는 과정을 적나라하고 현실적이게 묘사했다는 점에서 명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이제부터 나는 이 소설에 대한 비평과 감상을 써보겠다(이런 글은 처음이라 이렇게 시작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가장 아쉬웠던 점은 시점에 대한 부분이다. 그 시대 여성의 추락을 담은 작품임에도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진행되어 잔느의 심리에 몰입하기가 약간 어렵게 느껴졌다. 전지적 작가 시점의 장점은 주인공 외 다른 인물들의 시점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인데, 이 소설은 그 장점을 잘 살리지 못했다. 백작이 백작 부인과 쥘리앵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되고 그들을 죽이는 장면이 특히 그 아쉬움이 컸다. 백작이 그들을 죽이는 장면에만 집중해서 백작이 어째서 그런 마음을 먹었는지, 불륜 사실에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등의 묘사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가끔은 주인공 잔느의 생각도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다. 잔느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백작 부인과 남편 쥘리앵의 불륜을 알았을 때 큰 충격을 받는데, 쥘리앵과 낳은 아들인 폴을 키우면서 그 감정을 전부 잊었다는 묘사가 그 경우이다. 심지어 쥘리앵은 그녀가 친동생으로 느끼던 하녀 로잘리와 사생아를 만든 전적이 있으면서도,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의 친구와 바람이 났음에도 그와 낳은 아들인 폴을 키우면서 그 감정을 잊는다는 건 나로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사람과 낳은 자식인데 혐오하는 감정이 드는 쪽이 더 자연스럽지 않은가? 물론 아직 모성애에 대해 전혀 모르는 철없는 나이기에, 이런 평가는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어디까지나 딴지 거는 걸 좋아하는 어린아이일 뿐이니까. 다른 아쉬운 부분은 잔느를 제외한 모든 캐릭터가 평면적이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위에서 말한 듯 전지적 작가 시점의 장점은 여러 캐릭터의 시점으로 사건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캐릭터의 입체성을 살릴 수 있다는 점인데, 이 작품에서 잔느 외에 사연 있고 입체적인 캐릭터를 꼽으라면 그나마 로잘리 말고는 없을 것이다. 쥘리앵은 절대적인 악역, 로잘리는 절대적인 조력자, 잔느는 절대적인 주인공이라는 구도가 너무 뚜렷해 다소 이야기가 뻔해지는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특히나 폴은 충분히 입체적인 캐릭터가 될 수 있었다는 점이 더욱 아쉬웠다. 그는 어릴 적부터 엄마와 친척들한테 과도한 관심과 집착에 가까운 보호를 받으면서 살다가, 점점 삐뚤어지면서 창녀한테 빠져 결혼까지 하고 만다. 그 후로는 엄마한테 각종 거짓말이 섞인 편지를 보내면서 엄청난 돈을 뜯어내고 마지막에는 결국 창녀와 낳은 아기를 잔느에게 맡기면서 끝나는데, 여기서 폴이 거짓 편지를 쓰면서 죄책감을 느끼는 묘사나 창녀와 밤을 보내고 나서 생각에 빠지는 묘사가 있었다면 더 정서적으로 깊은 소설이 되었을 것 같다. 그러나 호평할 부분도 분명히 있다. 이 소설에 대한 감상을 쓰면서
작성일 2025-07-11 작성자 정한나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24상세보기 -
감상&비평 정신과 육체에 관하여, 반유물론적 관점으로
만약 가장 현대적인 시선을 가진 어떤 지식인, 그러니까 현대의 유물론적 지식에 자신의 최고의 열의를 다하느라 지혜와 도덕에게는 냉소 밖에 남겨놓지 않은 지극히 현대적인 지식인에게 ‘정신과 육체’에 대해 물으면 무어라 답할까요? 아마 그는 냉소적으로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정신은 실존하지도, 가치 있지도 않으며 전적으로 불가지한 것에 대한 맹목적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 혹 그가 최소한 정신이라는 단어를 인정한다면 이렇게 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정신은 호르몬이나 신경과 같은 육체적 작용의 조화로 만들어지는 실존하는 현상에 지나지 않으며 육체와 구분되거나 우월할 수 없다” 그리고 저는 이번 시간에 이 가장 현대적이라 할 수 있는 오만한 유물론(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여기서 오만함은 유물론 일반에 대한 호칭이 아닌 대중의 것이 되어 오만해진 유물론을 말한 것임을 알아주시길 바랍니다)에 반론하는 형식으로 정신과 육체에 대해 분석하고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유물론이 정신과 육체에 대해 어떻게 주장하는지 간단히 나마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미 앞에서 설명했다시피 유물론은 현대에 이르러 ‘정신의 패배’를 선언했다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정신을 단지 미신적인 영역으로 치부하고 육체의 객관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프로이트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 정신의 권위는 근현대에 이르러 세번의 타격을 받았다고 하는데, 우주론적 타격, 생물학적 타격, 심리학적 타격이 그것입니다. 먼저 우주론적 타격은 코페로니쿠스가 지구가 실은 우주의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서 이루어진 인간의 물리적 권위에 관한 타격이고, 생물학적 타격은 다윈이 인간이 단지 짐승으로부터 진화했다는 것을 밝힘으로서 인간과 정신의 특별성이 부정된 것을 뜻하며 세번째 타격은 프로이트가 정신이 실은 무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밝혀내며 정신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며 생긴 타격입니다. 이렇듯 근현대의 회의주의와 유물론은 과학을 발판으로 정신의 권위에 대한 부정을 당연시하고 있으며 육체를 우상으로 받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정신과 육체에 대한 유물론의 접근은 어떤 오류를 지니고 있을까요? 저는 그들의 이런 접근이 정신에 대한 그릇된 이해로부터 발생하는 모순이라고 주장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신에 대해서 오직 자신들의 방식으로, 즉 현상계 혹은 물질계라고 불릴 수 있는 세계의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그들은 신의 존재를 논하는 것은 유니콘의 존재를 논하는 것만큼이나 불가지하고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지만 결국 그 근거는 ‘신의 존재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의 질량을 잴 수 없기 때문이다' 정도의 타당성 이상을 지니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그들은 오만하게도 (과학적 의미에서) 실존하는 우주 이상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만 결국 그 우주에 대한 모든 이론과 그 기초가 모두 실존하지 않는 개념과 기호들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며 결국 정신에게도 그들의 실존의 잣대를 대는 것입니다. 그럼 우
작성일 2025-07-08 작성자 Ted 좋아요 0 댓글수 2 조회수 98상세보기 -
감상&비평 실체 없는 당신 얼굴 앞에서 - 알랭 기로디의 <미세리코르디아>
알랭 기로디의 2024년 영화 는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보다 정확히는 자동차의 운전자)의 시점으로 시작한다. 카메라는 꽤 오래간 우측에서 직행하는 자동차의 시점에 놓여있다가 돌연 좌측에서 직행하는 자동차의 시점으로 옮겨가는데, 이 장면을 보면서 일차적으로 찾아오는 것은 다름 아닌 당혹감이다. 오른쪽에서 직행하던 카메라가 왼쪽에서 직행할 때, 180도 상상선이 파괴되고 영화의 규칙은 무너지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당혹감에 사로잡혀 영화를 더듬거리고 있을 때 즈음, 도로를 질주하던 자동차는 산골 마을의 작은 제빵소 앞에서 멈춰 선다. 이야기는 그 제빵소에서 시작된다. 조금 다르게 말해보자면, 영화는 규칙이 무너진 바로 그 상태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그렇기에 의 첫 장면은 꽤나 도발적으로 다가온다. 사실 영화의 오프닝 씬에서 사용된 몽타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카메라가 옮겨갈 때 - 는, 여느 영화에서 인물과 인물이 서로를 마주 보고 대화할 때마다 소비되어 왔던 보편적인 역쇼트처럼 기능한다. 다만 이 영화 속 시퀀스를 두고 ‘보편적’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분명 석연찮은 지점들이 있는데, 무수히 많은 영화 속에서 사용된 역쇼트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마주하는 ‘대응의 풍경’을 담아내는 반면, 이 영화의 역쇼트 시퀀스에는 서로를 마주보는 인물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속 자동차가 도로를 달리고 있을 때 그곳에 놓여있는 건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쉼 없이 흘러가는 자연의 풍경이다. 그렇기에 고속도로 위에서 벌어지는 이 역쇼트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물질적인 존재(들), ‘얼굴과 얼굴의 대면’이 아니라, 도로 위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비물질적인 세계의 만남이자 대면’이다.그런 의미에서 는 실체없이 서로를 마주보는 것들에 대한 탐구라고 볼 수 있다. 영화는 동성애자 제레미가 고향마을에서 친구 빈센트를 우발적으로 살해, 유기하고 자신의 범행을 은폐시키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과정에서 빈센트의 어머니는 제레미가 자신의 아들을 죽였다고 의심하며, 늦은 새벽 경찰에게 제레미가 머물고 있는 2층 방문을 열쇠를 쥐어주고, 그의 방을 수색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뿐 아니라 제레미가 자고 있을 때면 예고 없이 그의 곁으로 다가가 “네가 빈센트를 죽였니?”라고 속삭이듯 물어보기까지 한다. 그러다가 제레미가 잠에서 깨어나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듯 태연하게 고개를 돌리고, 제레미가 경찰이 새벽에 자신의 방을 뒤졌다고 호소할 때는, "악몽을 꾸었구나"라고 맞받아 친다. 그녀는 자신이 제레미를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애쓴다.여기서 희한한 것은 제레미 역시 그녀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빈센트의 어머니는 제레미가 자신의 아들을 죽였다고 의심하고 있고, 제레미 역시 빈센트의 어머니를 의심하고 있다. 이 이중의심의 결속은 두 사람을 더욱 먼 곳으로 떨어트려 놓는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제레미는 막막한 어둠으로 뒤덮인 밤거리를 혼자 배회하고, 빈센트의 엄마는 영화에서 자취를 감춘다. 서로를 마주하게
작성일 2025-07-07 작성자 화자 좋아요 0 댓글수 0 조회수 91상세보기 -
감상&비평 정체성 해체의 휴머니즘
사람들이 바라던 말던 인류 앞에 서있는 질문은 명백합니다. 사람들에게 육체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무수한 고통을 안기는 애국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긴요하거나 고결한 것이 될 수 있는냐는 거지요.-톨스토이, 존 맨슨의 편지에 대한 답변 중-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감동이 있다. 그것들은 대체로 거의 완벽히 일치하거나 어느 종합적인 선을 향한다고 확신된다. 그것들은 인간을 허무에서 구원하며, 목적성과 인간다움을 부여한다. 그것을 맛본 인간은, 대체로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으나, 상황에 따라 죽을 수도, 죽일 수도 있으며, 살거나 살릴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 당장에도, 그 4가지 모두가 동시에, 그리고 온전한 확신에 힘입어 진행되고 있다. 감동이라는 단어가 좋은 문장에는 안 어울릴 것 같다. 초보적인 감상에나 어울릴 단어이니 말이다. 그러기에 여기서 정의하고 가는 편이 좋을 것이다. 감동은 수십억명의 인간이 2000년 전 어느 인간의 부활을 믿는 이유이자 또한 수십억명의 인간이 부모로서의 책임감을 옹호하며 이행하려는 이유이고 또한 이스라엘과 이란, 파키스탄과 인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 인간들이 인간들을 정당하게 죽이는 유일한 이유이다. 그것의 역사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어쩌면 그 역사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 그 역사가 인류와 상존했었다는 것의 증거일지도 모른다. 또한, 대체로 그것에 대한 분석 자체가 모욕으로 여겨졌다. 생각해보라, 어느 양놈이 와서 우리 민족의 민족주의가 열등감과 식민지배에 대한 피해의식, 경제개발에 대한 허영심과(생각해보자, 나나 당신이나 경제 개발에 동참하기라도 했나?), 그리고 정부의 프로파간다 때문이라 하면 다 화를 낼 것 아닌가? 이처럼 그 감동은 직관적이고 단순하거나,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논리적 분석은 자연히 모욕적이다. 그러한 분석은 그런 감동을 피선동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어느 명확한 맥락 안에서는 가능할 수도 있지만, 깊이 들여다 보면 결국 인간 비하로 끝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감동이 얼마나 강하다는 건가? 단순히 눈물 몇방울 나오는 영화를 가지고 우리가 전 재산을 팔아버리고 어딘가로 떠나거나 군대에 입대하진 않는다(100년 전만해도 실제로 그랬다는 것을 상기하자). 그러나 보편적인 맥락에서 이해가 어렵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당장에 여러 종류의 독립운동, 그리고 남과 북의 여러 사상가들, 그리고 민주화 운동까지 우리 사회의 컨텍스트에서 감동들은 자주, 그리고 각 사건사건마다 주목할만한 위력으로 기능해왔다. 현재도 그렇다. 8년전의 박근혜와 지금의 윤석열을 탄핵시킨 힘은 바로 무엇인가? 그것과 동시에 왜 같은 민족의 또다른 사람들은 그 ‘힘’을 피선동자들이라 규정하며 윤석열을 자유민주주의의 투사라고 옹호하는가? 그러한 힘이 생기는 것은 어느 합리적이고 건조한 진실이나 과학적 통찰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의 인지구조를 거치며 어떻게 기능하는 지에 있다. 인간은 이미 이것을 누구보다 더 잘안다. 일례로, 어느 바람직한 기독교 우파의 예시를 들어보자. 그는 분명 해방주의적 이데올로기들이 기
작성일 2025-07-03 작성자 기능사 좋아요 1 댓글수 2 조회수 340상세보기 -
감상&비평 청소년론
23년 한해에 중국인 이 3만 4천명이 순유입됐다. 십삼만명이 들어오고, 십만명이 나갔다. 단지 그뿐만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중국은 꽤나 큰 위협으로 인식되는 것은 분명하다. 당장에 정치권에서는 외교적인 결례는 차치하고 친중 여부를 가리는 것을 너머, 심지어 어느 인물이 화교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말이 오가고 있다. 당연히 머릿수로만 영향력에 대해서 따질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눈여겨볼만한 자료임은 분명하다. 논리적 미흡함에도 불구하고 영향력을 머릿수로 치환하여 본다면, 사람들의 중국인과 중국에 대한 주의는 분명 대단하다. 3만 3천의 순유입을 감안하면 말이다. 그러나 그의 10배 가까이 되는 인구를 우리는 매년 맞아들이고 있다. 중국인들과는 다르게 우리는 그들을 기꺼이 보호하며, 각종 의무로부터 면제시키고, 또 억압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스스로를 정의할 의지도 없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어느 누구도 그들을 정의내릴 최소한의 지식에조차 무관심하다. 그들은 청소년이다. 청소년에 대해서 말하고자하는 것은 무수히 많지만, 그러기 전에 청소년이라는 인식자체의 몇가지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청소년은 당연히 생물학적으로 필연적이며 인류사의 모든 부분에 대해서 상존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대체로 청소년들은 ‘아녀자’로, 역사학자들에게는 소유물이자 대상으로 서술되었다. 그렇다고 자주 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운 좋게 나라가 망하거나 하면서 노예로 팔려가는 신세로 적혀있는 게 전부다. 청소년은 오랜 시간동안 소어른으로 인식되어왔다. 애초에 시민권이 확립되기 전이므로 권리를 동등하게 누린다기 보단 그저 발달과정에 대한 무지라 하는게 옳을 것이다. 그러나 차차 여러 동정적인 인권주의자들과 휴머니스트, 그리고 교육철학자들을 통해 청소년들은 ‘발견’’되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차 정부는 청소년들을 그들의 존재에 대한 좋은 명분이자 훌륭한 수단으로 보았다. 정부는 자기 조직과 권력을 재생산하고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공교육을 만들어내어 복종적인 군인과 노동자들을 만들어 내고자 했고, 또 많은 경우에서 그렇게 되었다. 그러고 정부는 자기가 하고 있는 훌륭한 역할에 대해 역설하기 시작했다. 마치 그것이 절대로 대체되어선 안되는 것 마냥 말이다. 여성또한 비슷하게 정부에게 이용당했다. 그러나 여성에게 노동시장을 허용한것은 점차 가부장적 질서의 해체로 이어져 여성은 여러 권리를 요구하고, 또한 쟁취하게 되었다. 세계 대전 들을 생각해보자. 남성의 노동력이 부족해지지 않았다면 여성들이 부엌을 떠날 수가 있었을까?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일이 청소년에게 벌어지지는 않았다. 청소년은 희한하게도, 부조리에 대하여 저항할 의지와 능력을 갖출 때쯤이면 이미 비청소년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세상에 스스로를 청소년으로 정체화 한 세력은 단 하나도 없다.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고, 앞으로 생기기도 요원해보인다. 청소년은 여러가지 특징점을 지닌다. 첫째, 정의상 국민으로 등록된 사람은 청소년일지라도 국민으로 여겨지나, 희한
작성일 2025-06-29 작성자 기능사 좋아요 1 댓글수 1 조회수 297상세보기 -
감상&비평 노동자들의 아픔....
"지금은 이 터널처럼 인생이 끝도 없이 답답하겠지만, 터널은 다른 목적지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잖아. 지금 당장은 끝이 없어 보여도 반드시 끝이 있어" 내가 이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마음속에 와닿았으며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던 내가 뽑은 이 드라마의 명대사이다. 이번에 이라는 드라마에 관해서 이야기를 할 것인데 만약 다 보지 못했다면, 불 예정이라면 스포가 될수도 있어 읽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 내가 이라는 드라마에 관심이 생긴 것은 장르, 내용, 인물 이런 것들이 아닌 오직 '노무사' 라는 직업 때문이다. 변호사, 교사, 판사, 검사 등 사자로 끝나는 많은 직업에 대해서 알고 있었지만, 노무사라는 직업은 처음 들었고, 몰랐기에 더 궁금해졌다. 이 드라마는 노무진이라는 노무사가 노동현장에서 사망한 노동자들의 귀신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법을 어긴 노동현장에 가서 법의 심판을 받게 해주는 사이다 유발 드라마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여러 억울함을 가진 노동자들이 노무진에게 나타나게 되는데 갓 어른이 된 청년부터 수습생, 배달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 등이 있다. 이들은 기계에 몸이 끼게 되었지만, 회사에서 덮으면서 잊히게 된 사람과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쓰려져서 병원에 입원하기도 하고, 화재가 났지만 화재 경보기와 스프링클러 등 소방시설에 문제가 있고, 비상구까지 막아놓으며 나가지 못한 다양한 사연들이 있었다. 법의 심판을 피하려고 하다가 된통 당하는 회사의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쌤통이다 생각하며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통쾌하다는 생각이 항상 들지만, 한국의 사회에 대입을 해보면 많이 화가 나고 슬프다. 우리나라 사람들, 노동자들은 역사 속에서부터 노동자들의 인권을 지켜달라며 매번 소리를 지르며 바뀌기를 원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 정부 당시 전태일이라는 청년 노동자가 여공들이 안좋은 시설에서 일을 하며 폐암에 걸렸지만, 회사에서 배상은커녕 해고하겠다고 협박하는 모습을 보자 화가 나 회사들을 고발하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이에 분하여 평화시장에서 노동자들의 인권을 존중해 달라며 자신의 몸에 불을 질러 자살했다. 이뿐만 아니라 영화계에서도 보이는데 라는 영화가 나왔었다. 라는 영화는 소희라는 여학생이 상담사 실습을 가서 여러 부정행위를 당하다가 결국 못 참고 자살을 선택하는 영화이다. 이런 목소리들로 매년, 정부, 국회에서 노동자들을 위한 법을 새로 만들고, 개정하고 강화하지만, 여전히 매년 많은 사건사고들로 많은 노동자가 숨을 못 쉬는 안타까운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회사들은 오묘하게 법을 회피해 나가면서 처벌도 무거운 형벌이 아닌 벌금 같은 가벼운 형벌을 받는다. 이번 라는 드라마는 한국 안에서도 매주 상위랭크에 기재되어 있으며 전 세계 다른 국가에서도 인기가 많은 드라마라고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를 보는 만큼 노동자들의 힘듦과 어려움, 그리고 기업들의 야비한 행동들에 관심을 두며 노동자들의 대우가 더 좋아지도록 많은 노동자가 안전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많은
작성일 2025-06-27 작성자 역사 좋앙 좋아요 0 댓글수 2 조회수 198상세보기 -
감상&비평 백은별의 <시한부>를 읽고
원래 를 읽고 감상을 적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청소년 작가를 꿈꾸던 시절(다만 나의 작품들은 섹슈얼리티를 숨김없이 다루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내가 청소년 작가로 다루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베스트셀러였기에 추천을 받아 사서 쟁여 놓았을 뿐이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이 책을 읽으며 현대 문학, 아니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 정정하자면, 현대 문학의 어느 정의하기 어려운 일부에 대해서 내가 단순히 그것들을 읽는 것 자체에 대하여 역겹다고 느낀다는 확신이 생겼다. 또한 그와 비슷하게 내가 작가로서 벌어먹고 사는게 불가능하겠구나하는 생각을 실제로 하였다. 가 나의 안티테제라 할 정도로 내가 그를 적대시 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는 나에게 굉장한 영향을 주었다. 순전히 이 책의 영향을 받아 나는 장편을 기획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글틴에 올리진 못할 것 같으나 언젠가는 볼 수 있길 바란다. 는 굉장히 감동적인 스토리와 심리전개로 고평가를 받았고, 또한 앞서 말한 것처럼 베스트셀러로서 유명하며 대만등 해외로 번역까지(아시아인이 사는게 다 거기서 거기다) 되었다. 리얼리스트로서도 (뒤에서 다시 이야기할 테지만) 굉장한 실력을 갖추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구구하게 스토리를 다 설명할 만큼 작품을 존중해줄 생각은 조금도 없다. 요약하자면 친구가 죽고 슬퍼서 자살하려다 결국 안 한다는 얘기다. 필자는 어느정도 만드는 캐릭터와 스스로를 분리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아마 독자들도 그게 무슨 소리인지는 다들 알 것이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작가가 캐릭터에게 자신을 너무 녹여냈을 때 생기는 부작용이 크다는 것도 이해하기가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가끔씩 작가들은 자기연민에 빠지기도 하니까. 자기연민에 빠진 글은 에둘러 설명할 필요없이 작가가 글을 컨트롤 하지 못한다는 뜻이고, 또 작가가 미성숙하단 뜻이다. 자기연민에 잔뜩 빠진 글은 간혹 굉장히 서정적으로 문장을 쓸 때가 있는데, 다른 독자는 몰라도 필자는 그 부분에서 독서를 포기한다. 작법서에도 어설프게 미문을 쓰려하지 말라고 되어있다. 너무 자주 등장하는 시적인 문장들은 임팩트도 없을 뿐더러 감정의 과잉, 곧 작가가 글에 감정적으로 매몰되었다는 것의 증거가 된다. 우리가 자주 감명을 받는 미문들은 딱 그부분만 떼어내어 보여주는 경우가 잦기 때문에 아주 조금, 중요한 곳에서만 사용하며, 아예 읽어내려가다 지친 독자에게 잠시 메세지를 건내거나, 그냥 속독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도록 해야한다. 자기연민을 조절하기를 포기한 글은 그냥 토사물같은 글이다. 실험적이라고 한다면 물론 실험적이기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고평가되질 않아 잘 보이지 않을 뿐이지 세상에 널려있어서 정말 잘 쓰지 않는 이상 발전시킬 부분이 아니라 극복해야할 부분이라 할 것이다. 를 읽으면서 글틴에서 자주 봤던 글들이 생각났다. 정말이지, 거칠게 말하면 문체가 똑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냥 백은별 작가가 글을 구조화하고 길게 쓸 의지가 있었을 뿐이지 필자로서는 그 이외의 차이가 아예없다고 느꼈다. 심지어 자살
작성일 2025-06-24 작성자 기능사 좋아요 0 댓글수 3 조회수 315상세보기 -
감상&비평 근래의 사건들에 대하여
(멘토님은 끝부분 부터 보십쇼)최근들어 벌어진 일련의 사건(분리해서 이해될 것도 아니지만 2개의 비슷한 현상이 간격을 두고 일어났으므로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은 글티너들에게 굉장한 충격이었다. 당장 뒹글귕굴은 이 사안에 대해 다양한 접근이 제시되고 있고, 개중에는 다소 공격적인 것도, 또 그 반대의 성격을 띄는 것들도 있다. 문제는 이러한 문제가 정치적으로 실존하는 문제들과 비교될 수 있다는 점이다(그중 다수를 필자가 직접 제시한 바 있다). 필자는 이에 대해 여러 현존하는, 그리고 새로운 접근을 제시하고자 짧은 글을 남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 사건에 대해 파고들어보자. 2025년 6월 12일과 20일, 하루 최대 3-4개의 글이 올라오던 수필게시판에 10-20개 정도의 글이 올라왔다. 대체로 1000자 이하의 짦은 글이었으며 주제가 비슷했기 떄문에 조직적으로 올렸으리라 짐작이 되는 사건이었다. 실제로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계정중 일부가 소속 학교를 명시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추적한 결과 글틴을 교육과정중에서 활용했다는 것을 찾을 수 있었기 떄문이었다. 몇몇 글티너들은 분개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항의의사를 표했다. 글티너들이 이를 불쾌하게 여긴 수많은 이유중 하나는 (화자님의 논지를 인용하자면) 글틴을 학생들에게 강제했다는 것이었고, 이 외에도 멘토님에 대한 부담이나, 월장원에 대한 저평가등 중요한 이유들은 더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 사건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는 더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글틴에는 분명히 글틴의 홍보 차원에서 이 사건이 비단 부정적이기만 할 수는 없다고도 주장한다. 문학의 보급 차원에서 이는 어쩌면 문학이 더 대중화되고 있고, 또 이를 통해 더 대중화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멘토님에 대한 부담이나 문예위에서 멘토 인력을 확충하면 될 일이다. 역사적으로 가능했었음은 여러 군데에서 지적되었다. 이에 대해서 한가지 짧게 짚을 점은, 문학가로서 평범한 한 인간에게 문학에 참여하는 것을 권하기란 꽤나 난감한 문제라는 것이다. 문학은 잉여적 노동이고, 항상 그래왔으며, 또한 그런 부분에 대해서 소모적인 동시에 위선적이기까지 하다. 물론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한 진부한 공격이긴 하지만 필자는 예술의 본질이 아마추어리즘에 있다는 데에서 한치도 물러날 생각이 없다. 이에 대해선 후에 다루도록 하고, 문학을 권함에 있어 문학적 창작이 대중화 되는 것에 대하여서도 그것이 마냥 좋기만 한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좋은 문학은 문학가의 수가 아니라 문학가의 인간에 대한 통찰과 이해에 인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더이상 글틴이 ‘우리’의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찌하여 그런가? 생각해보자. 이번 건은 큰 충격에도 불구하고 그 실체를 찾아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후에, 다른 조직적인 움직임이 나타났음에도 그에 대해 분석할만한 다른 어떤 증거도 나오지 않는다면 그때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개인적 수준의 단순 도배가 여러 형태로 제지되고
작성일 2025-06-22 작성자 기능사 좋아요 0 댓글수 4 조회수 401상세보기 -
감상&비평 자살의 필요
도발적인 제목이다. 그러나 내용을 크게 왜곡시키지는 않는다고 믿는다. 그저 이러한 논의가 일방적 주장에 묻혀 버렸을 뿐이지 역사적으로 근거를 찾으려면 어렵지 않다. 멀리보면 과거 로마 때부터 늙어서 자살을 택하는 건 미덕으로 여겨졌고, 가까이보면 일본이나, 우리나라에서도 자살을 구분하거나 특정한 형태의 자살에 대해(그러니까 충심에 의한 자결이라거나)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있었다. 일본은 애초에 할복이 보편적이었던 건 두말 할 것도 없다. 그러나 기독교 사회에선 어째선지 굉장히 강하게 배쳑되었다. 희한한 점은 복음서의 어떤 곳을 찾아봐도 예수가 자살을 언급한 적이 없고 다만 갸롯 유다가 자살한 것만 기록되었을 뿐이다. 자살이 죄악시 된건 역사가 깊지만, 기독교의 일방적 해석에 가깝다. 그리하여 자살은 생명 경시와 거의 동일하게 취급되었다. 신의 선물을 어찌 인간이 거절하고 살인을 저지르겠는가? 지금 스스로를 그리스도가 말한 교회라고 천명하는 사람들의 주장의 모순을 하나 하나 지적할 수도 있겠으나, 그다지 생산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그런 교회들은 쇠약해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굳이 깊이 다루지 않겠다. 역사적으로 자살은 사회의 폭력에 의한 사회의 손실이라고 보았다. 30대 이하 세대의 제 1 사망원인이 자살이기 때문에 그런 점이 굳이 부각되는 듯 하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본다면, 십만명 중 일년에 수십명 죽는 것에 불과하다. 그냥 유족들이 힘들 뿐이지, 사회의 생산력에는 크게 영향을 주지 못한다. 사회의 생산력에 진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우울증이나, 그 주제는 사실 사람들의 관심도 없고 말하고자 하는 바도 아니기 때문에 건너뛰겠다. 오히려 젊은 세대의 자살보다는 노인 자살이 더욱 관련이 있을 것 같다. 노인의 우울증은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노인층은 그냥 건강보험과 국민연금의 수혜만 계속 받는 세대인 줄 아는 경우도 물론 있겠으나, 기억하자, 전태일이 살아있었다면 지금 80을 바라보는 나이였을 거라는 것이다. 박정희 때에 모든 착취와 고통을 감내해가며(그들이 그것 때문에 정신장애를 얻었을 수도 있다) 박정희의 이름 아래 가려진 그 세대가 이 나라를 지어낸 것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희생했음에도 돌아오는 것은 월급이 떼인다는 젊은이들의 불만 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어쩌면 그들 탓 아닌가? 그들은 이 사회를 더 낫게 만들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에게 과제를 남겨놓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이유로, 그들에게 그들이 자연사할 때까지 우리가 그들에 대해서 보장할 수 있는 바는 극히 제한되어 있다. 모두가 서민인 시대다. 모두가 스스로 약자이길 바라고, 모두가 더 약한 약자가 된 사람들을 질투하는 시대다. 우리가 뭔가를 공경하니 어쩌니 하기에는 당장에 우리의 시스템이 너무나 갑작스러운 이슈로 무너져버릴 것을 걱정해야한다(당장에 무역을 못하면 우리나라는 망한다. 불행히도 가장 큰 무역 파트너 둘이 싸우고 있음과 동시에, 둘 다 우리를 좋게보지 않고, 어느정도 굴종을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피해의식과 불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작성일 2025-06-16 작성자 기능사 좋아요 1 댓글수 2 조회수 358상세보기 -
감상&비평 인공지능의 발전: 격차와 ‘옳은 것’ 에 대한 단상
모든 사회 현상에는 양면성이 있다. 그리고 이런 보편성에서 인공지능이 예외는 아니다.인공지능이 발전함에 따라, 인공지능과 연결된 다른 산업들은 상호작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현실 상에서 가까운 위치에 놓여 있어야 했다. 인공지능의 데이터망은 가시적인 상품이 아닌 만큼 생산 공장과 자금 운용의 주체가 멀리 떨어져 있는 공간적 분업 현상이 나타나지는 않지만, 이는 반대로 기업군이 위치한 곳에서만 경제가 활성화되어 부의 격차가 심화되는 한 요인이 된다.인터넷은 설립 초기부터 그 기술력을 통해 정보에 대한 접근이 편리해지고, 사람 간의 소통이 원활해진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으나, 인터넷에 가입하는 것 자체는 ’생계에 쪼들리지 않는 사람이 여유자금으로 구매할 수 있는 휴대용 컴퓨터‘라는 자격요건을 필요로 했다. 이 때문에 발생한 사각지대는, 전혀 해소되지 않은 채로 영향을 미치는 범위만 더욱 넓어져 이제 국가, 심지어는 대륙 단위로 엄청난 경제력의 격차를 가져다주었다.기술의 발전은 국가 차원, 또는 지역 단위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닌, 세계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는 현상이다. 당장 작년부터 보아도 ‘X’라는 한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AI 불매운동, 그리고 예술 작품에 대해 원작자의 권리를 보장하도록 하기 위한 탄원서를 작성하였다. 4차 산업과 인간의 실직은 인공지능의 본격적인 발전 이전에도 충분히 대두되던 문제였는데, 이젠 비단 단순 노동 작업 뿐만이 아닌 안내원, 화가, 판사 등의 여러 ‘오로지 인간의 것’으로 생각되던 분야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윤리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인공지능의 발전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을 넘어 무엇이 옳고 그르냐 라는 화두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기회이다. 단순히 사람들의 생계 연명을 위해 기술의 발전을 저해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부당하다. 인간의 원초적인 학구열과 발전에 대한 욕망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생존에 대한 이유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현대의 사회가 그다지 평등하지 않다는 것도 하나의 쟁점이 될 것이다. 사회는 언제나 강자를 편의하는 쪽으로 발전해왔고, 사람들은 자신이 약자가 아닌 이상 눈을 감고 이를 묵인해왔다. 비겁하다고 하기에는 이 또한 인간의 생존 속성 중 하나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윤리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선과 도덕은 누구의 손을 들 것인지 궁금해지고, 도덕이라는 게 어떤 상황에서는 강자의 힘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기에 조심스러워진다.인공지능의 발전을 통해 이미 만연해 있는 차별과 불평등의 풍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현실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쪽으로 더욱 심화될 것이고, 이는 여태까지 발생했던 사회와는 달리 약자와 강자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할 것이다. 보다 다수에게 문제를 끼치기 시작한다는 이유만으로 법을 제정하고 기술을 억압한다면 인간의 합리화, 그리고 이기성에 대한 논지로도 파고들 수 있겠다.약자는 늘상 도태되어 왔고, 인공지능의 발전은 이를 조금 더 확실히, 그리고 가시적으로 보여준 한
작성일 2025-06-13 작성자 강완 좋아요 0 댓글수 2 조회수 236상세보기 -
감상&비평 변화와 역사의 비탈에서
요컨대 근대를 살아간다는 일은 급진적으로 변화하는 세계에 발맞춰 유동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과 같다. 당장만 보아도 불과 2년 전(2023년) 출시되어 큰 반항을 일으켰던 인공지능 서비스 Chat GPT가 어느새 우리의 일상 - 업무, 학업, 유흥 등 - 에 천착해있다는 사실은 시대적 감각을 가늠케 한다. 뿐만 아니라 정식적으로 보급된지 반세기도 지나지 않은 스마트폰 역시 우리가 일상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의식주, 의사소통, 유흥욕구 등)을 편리적으로 소비/사용 하도록 돕고, 보다 나아가 개인정보를 통해 그 사람의 실존적인 문제를 증명하며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필수품처럼 보편화되어 세계적인 문화가 되었다는 사실들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급진적으로 기술과 문화 발전의 변화를 포용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세상은 급변하고, 사람들은 정신없이 세계를 쫓는다. 발 빠르게 기술과 문화를 수용하는 이 시대의 유동성만큼, 내외부에서 끊임없이 사고하고 운동하는 인간의 유동성은 그 시대의 변화들을 가능케 했다. 그렇기에 (칼 마르크스의 말을 빌려보자면), 이 시대에 변화하지 않는 것, 급변하는 근대에서 운동하지 않는 상태로 존재하는 “모든 고체는 대기 중으로 사라진다”. 그곳에는 어느날 섬광처럼 번쩍 등장해서 사라지는 일시적이고 유한한 유행과 기술들만이 존재할 뿐이고, 모든 부동한 고체들은 유동적인 세계의 산성에 의해 융해된다.망각과 부활 - 경복궁 월대와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을 중심으로이런 세상에서 과거와 역사를 되살펴보는 일은 더욱 중요하고 조심스러운 일이 되고 말았는데, 그것은 곧 유동적인 세계에서 자신만의 역사를 지닌 채 특정 장소에서 미동 없이 머물고 있는 부동(不動)의 고체(또는 정물)들을 살펴보는 것에 다름 아니게 되었다. 그렇기에 오늘날 유동하는 세계 속에서 특정 장소에 고정되어 있는 ‘고체’들은 단지 과거의 잔재가 아니라, 잊고 있던 진실을 환기시키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근래에 재건된 경복궁의 월대는 그러한 사례의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일 것이다. 월대는 예로부터 왕이 걷는 도보라는 의미로 여겨져 왔다. 그것은 단지 오랜 기간을 버텨온 역사적 건축물 - 경복궁 월대가 처음으로 논의된 것은 14세기의 일이고, 조성된건 18세기 후반의 일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4세기를 거쳐서 완성되었다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 일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왕이 행차해왔던 길이라는 점에서 조선왕조의 상징과도 같은 건축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일제가 ‘철도'를 건설하겠다는 이유로 1924년 경복궁 월대를 파괴했을 때, 그곳에는 ‘전철’이라는 조선의 근대화의 상징이 떠오름과 동시에, 조선의 역사/권위적 상징과도 같은 왕의 길을 부숴버리므로서 조선의 역사를 부정하고 민족의식을 뿌리 뽑으려던 악의적인 의도가 암암리에 공존하고 있었다. 그것은 곧 국가의 지도자의 실권상실(순종의 죽음, 1926년)과, 민족문화역사의 폄훼와 왜곡(문화통치 1920년)으로 직결되어 조선의 국성을 뒤흔드는데 선험적으로 일조했다. 그러므로 일제 식민지배 치하에 파괴되어 버린 경복궁의
작성일 2025-05-07 작성자 화자 좋아요 1 댓글수 1 조회수 502상세보기 -
감상&비평 크로이체르 소나타와 상업 문학
‘우리가 섹스의 대상이기만 하면 좋겠지? 좋아. 대신 당신들을 노예로 만들겠어’ 크로이체르 소나타 중 톨스토이. 많이 들어본 이름 아닌가? 작품은 몰라도 이름은 알 것이고 대체로 작품을 기억하는 것도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전쟁과 평화니 안나카레니나니 하는 것부터 단편선이나 이반일리치의 죽음, 바보 이반 같은 작품들도 꽤나 유명하다. 그러나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어떤가? 톨스토이의 연대기에 짧게 나와있는 것이 전부일뿐이다. 그나마 찾을 수 있는 설명들은 금욕주의니 섹스에 대한 혐오니 하는 단어들 때문에 언뜻 보면 톨스토이는 노망 난 반동적인 노인네처럼 보인다. 그러나 분명히 밝혀두건대, 비록 그가 반동이라 할지라도, 그는 완전히, 정열적으로 순수하게 무모순적인 인간 해방을 위해 노력했던 이상주의자였다. 나는 그를 반동이라 표현하느니 가장 급진적인 진보주의자라 부를 것 같다.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그래서 어떤 소설인가? 그것은 그 내용 그 자체(내용 그 자체는 조금의 가치도 없다)보다 그것의 사상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 한 가지의 질문을 던지겠다. 사랑은 어떻게, 얼마나 인간을 구성하는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인간이 있는 반면에 그를 부정하는 이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수많은 사람들(역사에서나 지금이나)은 사랑으로부터 살아가야 할 이유와 젊음을 소모해야 할 당위를 얻는다는 것이다. 부수적으로 글 쓰는 많은 사람들에게 직업을 제공했다(로맨스 장르 하나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경쟁하는지 보라). 사랑은 꽤나 중요한 감정이다. 인간과 인간을 결합시키면서 동시에 감정적 만족을 주고 상당히 많은(대체로 우리가 역사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사람은 그런 영향에 거의 종속되다시피 했다) 제도적인 장치와 문화를 남겼다. 자유로운 개인 간의 연애가 확산된 지는 꽤나 오래됐다. 그러나 반동적인 구조가 남아있는 것은 현대의 우리나 톨스토이 시절의 러시아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헤테로섹슈얼에서 다루어볼 것은 3가지가 있다. 섹스, 로맨스, 그리고 관계와 결혼이다. 섹슈얼리티와 로맨스는 본질적으로 성질은 거의 완전히 같다. 모두 상대를 필요로 하며, 독립적인 욕구다. 섹슈얼리티는 선천적이지만 로맨스는 다소 그 구분이 모호한 것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것이 어떻든, 로맨스 또한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부분이 적지 않은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그 둘은 대체로 비슷한 성질을 띄며 서로 연관되어 나타나고 또한 수많은 매체에서 다양하게 표현되고 출판된다. 다만 섹슈얼리티는 어느 정도 접근에 제한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러나 로맨스는 맥락을 불문하고 섹슈얼리티보다 우월하며 도덕적으로 옳은 것처럼 취급된다. 대중에게 자주 노출되는 것도 있지만, 문학이 로맨스를 신성시하는 게 크다고 본다. 로맨스는 어째선지 다른 모든 감정과 욕구를 들을 초월하여 훌륭하고 권장할만한 것으로 포장되어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하면, 로맨스는 섹슈얼리티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사람이 평생 섹스만 하며 살 수 없듯이, 로맨스도 어느 순간에서는
작성일 2025-05-07 작성자 기능사 좋아요 0 댓글수 1 조회수 506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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