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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세상, 하얀 겨울

  • 작성자 화자
  • 작성일 2024-01-07
  • 조회수 394

세연에게 가고 있다. 겨울이었지만 눈은 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몰랐다. 눈이 내리지 않았기에 노동자들은 폭설로 인해 공사를 잠정중단하거나, 일당을 미지급받을 일도 없었다. 그런 일이 없었기에 하루에 붙들릴 일도 없다. 서울역 노숙자들은 눈 오는 날보다 따수운, 그러나 여전히 찬 겨울을 감사하며 보낼 수 있다. 늘 막히는 한강대로도, 눈으로 인해 교통체증을 빚을 일이 없었고, 택시나 버스가 운행을 중단하는 일도 없다. 눈을 녹이기 위해 도로에 뿌려질 염화칼슘이 세연에게 가기를 괴로워하는 나를 설득하듯, 발을 내딛을 때마다 발믿서 오독오독 비명을 지르며 부숴질 일도 없었고, 그게 신경은 좀 쓰이겠지만, 나를 멈춰세울 일이 없었다. 눈사람을 만들려고, 또는 어느 벽 담장에 메달린, 산성비가 굳게 되어버린 고드름을 핥으려 안달난 아이들만 아니었다면, 눈은 우리를 막는 병폐로 존재할 뿐이었다. 아이들은 눈이 얼마나 많은 어른들을 괴롭히는, 비효율적인 자연재해인지 알 턱이 없다. 그들은 교통체증으로 피해 볼 일이 없고, 노동을 할 일도 없으며, 노숙을 할 일은 더욱이 없었다. 누군가를 괴롭게 만나러 갈 일도 없다. 아이들은 그것을 모르기에, 여전히 추운 겨울을 피해 집으로 들어가, 만화영화를 보다가 힐끔, 창 밖을 확인하며 눈이 내리길 기다리고 있다. 여전히 찬 눈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아이들은 유리창 앞에 서서, 언젠가는 눈이 내릴 거라는 희망을 지닌다. 어른들은 출근하기 전 창 밖을 보며 눈이 내리지 않을 거라는 희망을 지닌다. 교통체증으로 직장에 늦을지는 않을지, 날씨가 추워서 하루가 고되지는 않을지 걱정 하며, 눈이 내리지 않았으면 하는 희망을 지닌다. 나는 눈이 내리지 않기를 바란다. 눈이 내리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을 사람은 나다. 나는 구질구질한 어른들의 세계에 살아서, 눈이 내리고 나버리면, 나를 가로막을 하얀 얼음, 그 모든 것들 때문에 도저히 세연에게 갈 수 없을거다. 세연은 눈이 내리길 바라고 있을테지. 그녀에게는 나를 만나는 것 보다 눈이 내리는 것이 더욱 중요할까. 알 수는 없지만, 나는 적어도 하나를 알고있다. 이 세상은, 겨우 동심 하나로 어른들의 세상을 덮어 버리기엔 너무나도 비효율적인 세상이다. 이 세상은, 그런 세상이다.  

***

세연에게로 가고있다. 세연을 만난 건, 눈 내리지 않는 육년 전 겨울이었다. 당시 초임 영화 평론가였던 나는, 삼류 독립영화 감독들을 취재하기 바빴고, 광화문에서 한 신인 감독이 저예산 영화를 찍고 있다고 해서, 잡지사는 촬영지 근처 살고 있던 내게 신인감독 인터뷰를 맞겼다. 영화촬영장은 굉장히 지저분했고 스태프도 대여섯명 밖에 되지 않았다. 반면 감독이라는 작자는 꽤 단아하고 청순한 여인이었는데, 어림잡아 이십대 중반, 나와 엇비슷한 또래 같아 보였다.

안녕하세요, 신인감독 이세연입니다.

그녀는,기운이 밝고 흔쾌해서 늘 깐깐하게 굴던 여타 중견감독보다 훨씬 좋았고, 질문에 답을 빙 돌려대서 말하는 어느 예술감독에 비해 시원시원한 답들과 기상천외한 담론들을 꺼내 들어서, 일몰로 사라져가는 삼류 평론가였던 내게 매우 인상깊었던 감독이었다. 특히 그녀와 했던 대화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왜 굳이 촬영시기를 가장 추운 겨울로 잡았는지’란 물음에 대한 대답이었다.

“제 영화는요, 청춘 영화예요. 하이틴 뭐 그런 잡다한 것들 말구요.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얻기위해, 또는 대학등록금들을 얻기 위해 막노동을 하고, 계속 도심을 돌아다니잖아요. 그런 사람들에게 가장 힘든 계절은, 모든게 불가능한 겨울이죠. 일도 할 수 없고, 거리를 거닐 수도 없으니깐. 저는 그런 겨울 속에서 무언가를 해내고 싶었어요. 보다시피 우리 스탭과 배우들 모두 사회 초년생들이에요. 이들이 서로 가장 추울 겨울날 무언가를 한다는 거. 그래서 그걸 이루어낸다는거. 그게 의미있는거라고 생각한거죠.”

“그렇다면, 끔찍한 겨울 속에서 뭘 한다고 관객들이 알아주나요?(웃음)”

“그런걸 카메라가 담는거죠. 저는 겨울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해요. 가끔씩은, 눈이 내리잖아요. 눈이 내리면, 모든 건 흰색으로 덮히고, 새로운 시작과 가능성을 불러 일으키죠. 흰색은 무슨 색으로든 변질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니깐요. 이 힘든 겨울을 살다보면, 눈이 내릴텐데, 저는 이따금 그런 날에 제가 아직도 이렇게 버티는 이유를 깨닫게 되요. 아직은 가능성이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되거든요. 그게 겨울의 힘이죠. 눈의 힘이고.”

나는 그녀와 한 시간 조금 넘지 않게 인터뷰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녹취록을 필사하고 정리해서, 원고를 잡지사에 보냈다. 일이 끝나고 나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쥐고 있었다. 눈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허공만 바라보고, 멍만 존재하는 가운데, 어딘가 모르게 씁쓸한 마음과 청춘의 허기가 몸을 장악한 나머지, 집을 나섰다. 몸이 자연스레 자주 들르던 대폿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간 그 곳에는, 술에 취해 반쯤은 꼬까닥 넘어가있는 세연감독이 있었다. 아무래도 촬영이 끝나자마자 금방 술을 한잔 한 모양이었다. 펄력거리는 그녀는 인터뷰 때와는 다르게 무척 가볍고, 발랄해보였다. 나는, 오전 인터뷰 때와는 무척 거리가 있어보이는 그녀에 흥미가 일었다. 그녀에게 다가가서, 왜 이러고 계세요 감독님. 그렇게 좋아하시는 겨울인데, 라고 말을 걸었다. 

우이씨이. 추운 걸 어떻게요오. 술을 먹으며언! 마음이 따뜻해지는데에. 평론가님. 평론가님도 초임이시죠오? 하기야, 저 같은 감독 취재하는 거보며언 평론가님도 인생 망한거네요오. 술이나 같이 드셔요. 

나는 웃으며 세연과 술을 마셨다. 술 잔을 부딫치고, 술을 목너머로 떠넘기는 것.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 뿐이 다였다. 비록 세연의 영화는 백명 남짓한 관객을 끝으로 스크린을 내렸고, 아무 관심조차 끌지 못했지만, 그 시간의 우리는 그 영화를 계기로 연인이 되었고, 나는 세연에게로 가고있다.  

***

일기예보에서는 점심 즈음 눈이 내린다고 했다. 세연은 나를 불러 함께 눈을 보자고 말했다. 그녀는 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고, 나는 6년 동안 제 집 지나들듯 해왔던 그녀의 집으로 들었다. 세연은 나를 베란다로 이끌었다. 그 곳에는 술 잔과 안주거리가 올려진 작은 식탁, 유리창을 향해 놓인 두개의 안락의자가 놓여있었다.  

웬 베란다에 식탁이랑 의자가 있어?

세연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여긴 발코니야. 베란다가 아니라. 앞에 유리창이 있잖아. 둘은 다르다고. 혼동하면 안돼. 

내가 여기 식탁을 놓은 이유는, 오늘이 눈 오는 날이니깐 그랬어. 우리 눈오는 거 보면서 점심먹자. 그러면 좋겠어.

세연은 어딘가 불편해하는 나를 자리에 앉히고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발코니와 베란다의 차이점을 생각하며, 문득 그것이 사랑과 같다고 느꼈다. 그 둘 사이에는, 단지 찬 겨울 바람을 막는 유리창 하나만 존재할 뿐인데, 사람들은 그 두가지를 혼동하며, 때로는 서로를 같은 것이라고, 또 때로는 서로가 다르다고 하지만, 정작 정확한 차이나 공통점은 모르는 것 처럼.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지만, 정작 어떻게해야할지 모르는 것도 이와 같지 않을까. 서로를 알고있다고 단정짓는 것 또한 그와 같지 않을까. 어쩌면 내가 희망하고 믿었던 것 역시 쉽게 단정지을 수 없지는 않을까. 한 참 생각에 빠져있을때 세연은 김치복음밥을 가지고 왔다. 

무슨 생각해? 

아무 생각. 나는 그렇게 얼버무리며, 김치 볶음밥을 먹었다. 점심식사를 끝마치고 세연과 나는 곧 내릴 눈을 위해 창 밖을 바라보았다. 한 참을 기다려도 눈은 내리지 않았다. 그 사이 잡담이 오갔다. 세연은 육년 동안 단편영화를 두세편 찍다가, 더이상 돈을 대줄 투자자가 없어지자, 최근 영화감독을 그만두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위안을 생각하는 척 물었다.

아르바이트는 할 만 해?

아직은 잘 모르겠어. 그래도 계속 해봐야지. 그나저나 너는 얼마전에 씨네21에서 연락왔다며? 어땠어?

아직은 잘 모르겠어. 상황 봐야지. 근데 너 얼마전…

모르겠어...

모르겠어...

….

우리는 계속 서로 요즘 일거리와 있었던 일에 대해 말을 나누었지만, 정작 서로가 한 말은 아직은 잘 모르겠어. 뿐이었다.  도저히 뭐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가 여전히 모르겠는 동안, 일기예보에서 내린다던 눈은 내리지 않았고, 작은 식탁 위에 놓여져있던 와인잔은 여러차례 비워졌다가 채워졌다. 겨울의 태양은 붉게 잦아들며, 도심 너머로  뉘엿뉘엿 저물었고, 우리는 찬 유리창 발코니 공기 속에서 아무것도 모르게 되어버렸다.  

눈을 뜬 것은, 초승달이 어둠 속 희미하게 매달려있는 늦은밤이었다.  세연은 내 어꺠에 기대어 쌔근거리며 잠에 빠져있었고,  내릴 줄로만 알았던 눈은 내리지 않은 모양새였다. 우리는 눈을 기다리다가 함께 잠들고 만 것이었다. 일기예보 하나 들어맞지를 않다니. 나는 공허한 마음으로, 말 없이 어두운 유리창을 바라보았다. 유리창에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뒤덮힌 힌 눈은 있지도 않고, 무엇을 해도 어두운 암흑. 검은 밤만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속에서, 어깨를 기댄 채 잠을 자고 있는 세연과 그대로 시간이 멈추어 버렸으면 하는 나, 그런 우리를 견딜 수 없는 내가 담겨있다.  순간 우리는 밤 속에 갖혀있다.  거기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눈이 내려도, 검게 변질되고, 빛이 있어도 덮여버린다.  오직 어둠의 공허만이 영겁의 상실 속으로 우리를 빨아들일 뿐이다. 우리는 그렇게 여전히 영원한 밤에 허우적거리고만 있구나. 이 공허와 상실의 상태에서, 우리 중 누구 하나라도 저 어둠 속에서 사라져야만 다시금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연은 내 어꺠에 기대어 썌근거리며 잠 속에 푹 빠져 있다.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너를 꺠우지 않으려 노력하고,  결국은  찬공기만 훤한 어둠 속 발코니를 벗어나고야 만다. 이제 너와 나는 다른 세상에 있다. 나는 너를 사랑하기에, 이런 선택을 한다. 그러니 부디 원망하지 않았으면.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을 흘리는지 어쨋는지 모를 세연의 뺨이 달빛에 빛췄다. 세연은 이제 어둠 속 홀로 남았다. 그녀는 앞으로 눈이 내리지 않을 겨울을 살아나가야할지도 모른다. 너는 발코니에서의 그 밤을 살아낼 것이고, 나는 베란다에서의 이 밤을 기억할거다. 나는 문득 세연, 너가 영영 꺠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완전히 너를 돌아섰을 때, 나는 무언가 희고 찬 것이 너가 보는 세상을 밝히는 것을 보았다. 유리창으로 희끗거리며 닿아오는 그것을 멀리하며 나는 너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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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잊혀짐2: 막은 내렸는데 / 황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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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자
  • 2023-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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