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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소나타

  • 작성자 화자
  • 작성일 2024-01-10
  • 조회수 461

디귿씨는 요몇칠 동안 인력 사무서를 전전하고 있었습니다. 본래 모 기업에서 사무부장을 지냈다는 디귿씨는, 회사 내부평가에서 “당신은 이 회사에 무얼해주실수 있나요?”라는 대표이사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까요? 내부평가 다음날, 디귿씨의 책상에는 각종서류들과 필기구, 타자기 등이 대용량 상자에 담긴 채, 한쪽 구석으로 치우쳐져 있었습니다. 지저분했던 자신의 자리에는 오랜 직장동료 임 차장이 앉아있었지요. 임차장은 대용량 상자를 아무렇지 않게 디귿씨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날 디귿씨는 해고통보를 받았습니다. 회사를 위하지 않은 사람은 필요없으니, 이제 그만 퇴직하시라는 대표이사의 통지서와 함께 말이지요. 

집에 돌아가는 길, ‘당신은 아무래도 회사를 위하지 않고 있군요.’라는 대표이사의 말이 자꾸만 눈에 걸렸습니다. 30년 동안 뼈빠지게 오로지 한 직장에 몸담아온 디귿씨는, 자신이 버텨원 세월들이 부정당한 것만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이 회사에 무얼 해주실 수있나요

아무리 그 질문을 상기시켜본다해도 디귿씨는 답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이 질문이 임 차장에게 돌아갔다면 임차장은 답 할 수 있었을까요? 이사 본인조차 이 질문에 답은 하지 못할 것 같은데. 나는 그냥 돈을 위해 회사를 다닌 것 뿐인데. 디귿씨는 잠시 상심했습니다. 이제 자녀들의 대학비와 식비, 자취비, 아내의 용돈,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월세와 세금은 어떡하나요. 그는 그 모든 것을 위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가족들에게는 해고통보를 차마 말할 수 없어서 비밀로 부치던 참이었지요. 해고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디귿씨는 사람들이 즐비한 인력 사무소에 들어섰습니다. 형광등이 나란히 마주 앉은 사람들 위로 길게 늘어져 있습니다. 디귿씨는 형광등의 끝자락에서 처음으로 놓여진 등에 다다를 때까지 오래간 기다렸지요. 그렇게 해가 저무는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상담원에게 닿을 수 있었습니다.

막노동이라도 할 참이니 아무거나 주시오. 디귿씨의 말에 상담원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이제 환갑을 바라보시는 분이니 막노동도 힘들 것 같다고. 애 쓰지 마시고 집에서 편히 쉬시라고. 디귿씨는 억울했습니다. 무릇 인간이라면 늙기 마련인데. 나이를 먹는다는게 디귿씨의 잘못은 아니잖아요. 이 녀석들은 꼭 디귿씨를 노인 취급입니다. 디귿씨는 이만 나가보라는 상담원에게 자신이 앉아있던 접이식 의자를 집어던졌습니다. 홧김은 아닙니다. 눈에는 타오르는건 분노가 아니라 억울한 울음이 일그러져 있었으니까. 사람들은 모두 디귿씨를 쳐다봅니다. 이 것을 시작으로 벌써 삼주 동안 인력 사무소만 드나들었습니다. 

***

이른새벽부터 디귿씨는 정장차림으로 버스에 몸을 욱여 넣었습니다. 아내는 아직도 자신이 사무부장을 지내는 줄로만 알아서, 입으나 마나인 정장을 답답하게 걸치고 있습니다 . 요 몇달간은 퇴직금으로 여차저차 월급을 메꾸었다지만, 이제 퇴직금도 밑바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버스 창문으로는 여러 직장인들이 스칩니다. 디귿씨는 ‘회사를 위해 무얼해주실 수 있나요’란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자신 스스로가 원망하기만합니다. 그 질문에만 대답했다면 번듯한 직장에서 걱정없이 삶을 연명해나가고 있었을테니깐요. 

저 스치는 직장 무리 속에서 있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회사에 있었을 때도 왜 다니는지 알지도 못했는데, 내가 다시 일자리를 얻는다고 해도 전과 같이 회사에 출근할 수 있을까. 회사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나를 받아줄리는 만무하지…

디귿씨는 복잡한 마음을 다잡고 버스에서 하차해서, 나이 환갑에 취직할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인력사무소로 힘들게 걸어갑니다.형형색색 단풍들은 거리를 장식한 가을입니다. 저는 인력사무소 앞 나뭇가지에 메달려있는 노오란 단풍입니다. 이제는 바람에 날아가길 고대하고 있지요. 세 주 동안 제 밑을 드나들던 디귿씨의 어깨는 저를 무척이나 괴롭게 하였습니다. 제가 보았던 사람들의 어깨는 모두 디귿씨 마냥 돌처럼 굳어있었습니다. 저는 문득 그런 디귿씨를 풀어주고 싶다는 강한 욕망에 사로잡혔습니다. 팔을 휘젖기라도 한다면 사람들의 어깨는 조금이나 가벼워질까요. 바람은 저를 떨어트리기위해 계속 쑤셔대고, 아무래도 전 디귿씨와 다르게, ‘당신은 무얼 해주실 수 있나요?’ 라는 질문에 답을 찾은 듯 합니다. 인력 사무소 언저리 가로수길의 죽어가는 은행잎이던 저는, 앙상한 가지에 간신히 매달려있다가 날리는 바람에 몸을 맡겼습니다.

어차피 떨어질 운명. 그런 운명을 조금나마 의미있게 소비해볼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

디귿씨는 충혈된 눈으로 거리를 걷다가 자신의 눈 앞으로 떨어지는 금빛 은행잎을 보았다. 그것은 매우 격렬히 양면을 뒤채이며, 옆으로 살살. 그러다가는 갑자기 뚝. 다시 바람을 타고 흔들흔들하며 그에게로 닿았습니다. 디귿씨는 문든 펄럭거리는 은행잎이 어린 시절 심금을 울리던 피아노 소나타의 선율과 같다고 생각했지요. 방과후 그가 다니던 수학학원 상가에는 피아노 학원이 있었는데, 학원서 수학 문제집을 풀고 있을 때 이따금 들려오는 피아노 소나타의 선율은 공부에 열중하며 기진맥진하던 그에게 잠시의 치유를 선물하고는 했습니다. 은행잎은 꼭, 그 적 수학학원 구석에 박혀 소나타의 선율을 들으며 옹졸히  휘적이던 자신의 손가락 모양같았습니다. 귓 속으로는 까마득한 그 시절 선율이 들려오려나요. 단풍이 인중 밑에 올라, 코를 간지럽 합니다. 은행잎 잎새에 묻어있던 산뜻한 가을아침의 빛깔이, 이상한 냄새와 함꼐 콧구멍 속으로 쏙 들어왔습니다.

정신을 차린 디귿씨는 금방 코 끝서 잎을 흥 털어내고는 얼굴을 쓸어내립니다. 색 잃은 무채 잎이 디귿씨의 구두로 풀이 죽은 채로 떨어집니다. 푸스슥. 선율로 내리던 잎이 몸짓을 그만두었습니다. 바람은 더이상 은행잎을 떠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단풍잎의 냄새는 여전히 디귿씨의 곁을 맴돌고 있는 듯 합니다. 이 냄새는 언제적 맡은 적 있는 것이군요. 소나타의 냄샙니다. 은행잎이 전해준 소나타의 냄새는 콧구멍에서 시작해 머리로, 목구멍으로, 폐로 가슴으로 이어집니다. 순간 디귿씨는 무어라도 좋으니 이 소나타를 계속 듣고싶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그러기위해서는 우선 인력 사무소로 향하고있는 발걸음부터 돌려야겠군요. 그렇게 디귿씨는, 몸을 돌려, 자신도 모를 어딘가로 사라지고야 맙니다. 자신을 아는 모두가 모를 곳으로, 끝내는 자신만 알고 있는 곳으로 숨어들게 될 것입니다. 어릴 적 짙은 향수만이, 이제는 피로에 찌든 이 가련한 사회인을 행복하게해주겠지요. 이제 그만 디귿씨와는 떨어져야겠습니다. 비록 디귿씨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는 저 또한 모르겠으나, 부디 그가 작은 환기를 통해 잃어버렸던 자신을 다시 만났으면하고 소원할 뿐입니다.  그렇게된다면, 확신할 수는 없겠지만, 디귿씨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을테니까요. 여러분들도 모두 이 슬픔사 견뎌서 영혼의 치유를 해보시길. 그럼 이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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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끝은 언제나 씁쓸하다. 그것이 무슨 이야기든지 간에 끝난다는 건 씁쓸하다. 왕자와 공주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있는 통속적이고 관념적인 여느 이야기 마저 그렇다. 처음 글이 아름다울 수 있다고 꺠달은건, 황순원 작가님 덕분이었다. 초등학생이었을 때를 보고 내 영혼이 젖어버림을 느꼈다. 이 후 씨의 작품을 열렬히 사모하게 되었다. '막은 내렸는데', '눈', '우산을 접으며' '땅울림'등등의 것들을 읽으며 나는 곧 소설이 사람의 영혼을 담아낼 수 있는 장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김멜라씨의 소설을 읽을 때도 그러했다. 와 , 와 을 읽을 떄, 그곳에서 내가 만난 것은 나의 어떠한 깊은 심장이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생긴 것은 김현 평론가의 글을 읽으면서이다. 와 을 읽으며, 나도 이런 평론가의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게 소설로 방향을 튼 것은 아마 권여선 작가의 책을 읽고나서 일 거다. 어떤 연상작용이었는지 몰라도 나의 비평은 소설을 통하여 이루어졌다.솔직히 하자면 태어나서 세계문학전집같은 걸 눈에 담아본 적 없다. 누군가 톨스토이와 카뮈와 카프카를 이야기 할 때, 나의 좁은 식견으로는, 그들의 무거운 글들을 잡아서 소화해낼 마음이 서지 않았고, 애초에 관심도 없었다. 폴 드 만과 데리다 정도가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외국 작가였다. 또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었다. 어디 가서 부끄럽게도, 하고 있는 일이 없습니다, 라는 말을 꺼내기 싫어서, 억지로 토해내듯, 글 써요, 하는 말을 내뱉을 때, 난 수치심을 느꼈다.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런 내가 부끄러웠다. 그러면 주변에서 대치동 강남에서 학원받으며 과학고 간 친구들은 콧방귀를 뀌고, 누군가는 한심하게 쳐다본다. 초등학교 떄 별볼일 없던 친구가 예고의 문예창작헉과에 들어간 것을 보면, 알 수 없는 열등감에 시달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너도 글 써? 나도 글 쓰는데...하고 말하면 듣는 말이, 좋아하는 작가 누구야? 카프카? 톨스토이? 글 보여주면 좋겠다...등의 것들이다. 난 사실 정지용과 황순원과 김멜라와 권여선을 사랑한다, 라고 말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어떤 연상작용이었는지 모른다. 그 곳에서 뽐내기 위해 아는 척 했다. 톨스토아보단 도스토예프스키지 않아? 사실 난 그 누구의 작품도 읽어본 적 없다. 이건 고해성사가 아니다. 지금 내가 이렇게 하고 있는 말의 의중을, 나는 알지 못한다. 당신들은 알까? 마지막으로 쓴 글은, 작년 11월에 글틴에 기고한 다. 그건 내 전부다. 나는 그 글을 쓰며 나에게 글이란 무엇인지 알았고, 이 후로는 글을 쓸 수 없었다. 내 모든 걸 쏟아부었다. 이 후 알게 된 사실은, 결국 글이란 세상이란 거다. 문장이란 것을 조립, 배치하며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 나간다.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재미다. 근데 그 세상에서 내가 보았던 것은 가장 외면하고 싶은 진실이었다. 결국 내 세상은 어떠한 욕망의 발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 조립된 세상의 이면에는, 그 어떤 계기나 동력도 존재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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