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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2010년 겨울

  • 작성자 분홍사슴
  • 작성일 2011-06-25
  • 조회수 758

 유난히 비가 잘박잘박 내리는 밤이었다. 가게에는 오늘따라 사람이 없었고, 거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울한 일이나 괴로운 일을 겪은 사람이 아니라면, 비오는 밤에는 누구도 나오고 싶어 하지 않는다. 빗소리는 오래된 와인처럼 점점 진해져갔고, 그만큼 우울의 농도역시 진해져갔다. 가게에는 우리 셋만 남아 각자 시간을 소비하고 있었고, 어느 순간
  “안녕하십니까. 거, 가게도 다 끝나 가는데 합석해도 괜찮겠습니까? 저기 앉아있는 형씨까지 셋이서 가게 문 닫을 때까지 마시자구요.”
  라는 그의 말과 함께
  “아아. 반갑습니다. 앉으세요. 저기요, 형씨도 여기 와서 앉아요. 혼자서만 마시지 말고 셋이서 같이 마십시다. 이모. 여기 소주 두병하구 낙지볶음 하나 주세요.”
  라며 셋이 합석하게 되었다.
  나는 아내와 한참 얘기가 오가던 이혼문제로 속이 불편했고, 그들은 이런 밤에나 어울리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이 무슨 괴로움을 떠안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아무튼 나는 ‘서울, 1964년 겨울’의 서적외판원 같은 심정으로 그들과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들이 ‘나’와 ‘안’이 되어주길 바랬다.
  “자. 통성명이나 합시다. 나는 김경운이라고 합니다. 서른일곱입니다.”
  “반갑습니다. 나는 정우진입니다. 서른셋 이구요.”
  “반갑습니다. 유광선입니다. 서른둘입니다.”
  처음 합석을 권유한 이부터 악수를 청했다. 둘 다 나보다 한참 어렸다. 이것 참, 정말 김승옥의 소설처럼 되는 것은 아닌지. 웃음이 조금 나왔다.
  “다들 어떻게 오늘 같은 밤 여기서 혼자 앉아있게 됐습니까?”
 
 
 
  1. 정우진
  그는 너를 죽였다. 그렇지만 나는 너를 동정하거나 연민할 생각이 없다. 기억하는가. 너와 그의 사이를. 너와 그의 사이에는 거리가 수십 개쯤은 끼었었다. 하지만 너와 그는 남남인 것은 아니었다. 너는, 그를, 죽일 만큼 괴롭혔다.
 
  “지난 22일, 충남 논산시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의 용의자가 체포되었습니다. 용의자 한 씨는 박 씨를 21일 저녁 11시경에 목 졸라 죽인 것으로 밝혀져……. 한 씨는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폭력적인 아버지……. 박 씨는 학창시절 학업에 충실하고 운동에 뛰어난 소질을 보인 학생이었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특히 박 씨는 모 기업의 중역임이 밝혀짐에 따라 이번 살인사건의 여파가 더욱 클 것으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자꾸 띄엄띄엄 들렸다. 채널을 돌려봐도 모두 너와 그의 이야기를 떠들고 있었다. 피곤하다. 눈두덩이 푹 꺼질 만큼 피곤하다. 아나운서가 실컷 떠든 것처럼 그는 21일 저녁에 너를 죽였다. 세상 모두는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세상 모두는 이 사실을 모른다. 너는 죽고 그는 죽였지만, 너는 죽음이 안타깝고 선량한 사람으로, 그는 죽일 놈의 개새끼로 기억될 것이다. 빌어먹을. 세상은, 참, 역겹다.
 
 
 
  그 새끼들과 처음 만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나는 싸움도 못했고, 아는 형도 없었지만 공부를 잘하는 초등학생이었고, 그 새끼들은 싸움을 잘했고, 싸움을 잘하는 6학년 형이 있었고, 그 형의 친구들이 있었고, 공부를 못했다. 순식간에 반 내 서열이 정해졌고, 그 새끼와 그 새끼를 따라다니는 새끼들은 ‘박민균파’를 만들었다. 나를 ‘파’ 안에 끼워줬고, 밑바닥을 벗어나지도, 나가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 새끼들은 그것을 우정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시작된 ‘파’와의 우정은 나를 무너뜨렸다. 예를 들어
 
  “야, 한승준. 씨발, 니까짓게 감히 나이키를 사? 아주 지랄을 해요. 꼭 좆같이 생긴 새끼들이 깝친다니까. 이 좆만한 새끼야. 누가 사줬냐? 니네 에미가? 고슴도치도 지 새끼는 이쁘다더니. 니네 에미는 어떻게 안 도망가고 잘도 집구석에 붙어있냐? 니 면상만 꼬라보면 애새끼고 뭐고 다 버리고 도망칠 것 같은데.”
  “그니까 말이다. 야, 민균아. 이 새끼 어떡할까? 존나 밟아도 말을 들어먹어야지. 히히. 신발 내놔.”
  “……. 여기.”
  “그래도 맞기는 싫은가보네. 재깍 알아서 바치는 거 보니까. 야, 니네 엄마한테는 알아서 변명해라, 이건 우리가 버려버릴 거니까. 못 주워가게 아예 하수구에 던져버려야지.”
 
  라거나
 
  “야, 한승준. 너 어제 코러스마트 앞에서 나 봤지? 근데 왜 인사 안 했냐, 이 개새끼야? 아, 내가 존나 엿 같다 이거지? 니 눈엔 내가 호구로 보이냐? 왜, 그렇게 인사 안하고 못 본척하면 내가 모를 줄 알았냐? 존나 재수없는 새끼야.”
  “진짜? 이 새끼가 너 쌩까고 지나갔다고? 이 새끼 존나 어이없네. 우리 우정이 그것밖에 안되냐?”
 
  라거나.
 
  씨발새끼들. 개새끼들. 천벌 받을 새끼들. 속으로 저 새끼들이 확 죽어버리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르겠다. 수십 번, 수천 번. 저 새끼들 제발 좀 죽여 달라고 교회에 꼬박꼬박 가서 하느님에게 기도도 드려봤고, 절에 가서 부처님에게도 빌어봤다. 벌써 3년째 기도중이지만, 저 새끼들은 죽기는커녕 3년 전보다 더 커졌고, 힘도 더 세졌다. 나는 기도하는 것 자체가 두려워지고 있었다. - 저 새끼들이 내가 죽여 달라고 기도하는 거 알면 어떻게 하지? 또한, 집 밖을 나서는 것도 두려워졌다. - 길거리에서 저 새끼들을 만나면 어떻게 하지? 주말이 되면 집 밖에 나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당연히, 친구도 없었다. 저 새끼들은 나를 이렇게 만들어버렸다.
  세상은 다 한통속이다. 도대체 나는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 저 새끼들은 나한테 냄새가 난다고, 거지새끼라고, 장애인새끼라고 수만 번 얘기했지만 그건 억지일 뿐이다. 저 새끼들은 그냥 내가 공부를 잘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이다. 저 새끼들만 나쁜 새끼인 것은 아니다. 세상은 다 한통속이다. 가족 빼고는 다 개새끼들이다. 내가 그렇게 맞을 때 말린 사람도 없었고, 담임은 저 새끼들을 못 당해내 아예 학교를 그만둬버렸다. 나는 그렇게 세상에서 버려졌다. 그리고
  저 새끼들이 우리 누나 앞에서 나를 때릴 때, 여자애들 앞에 세워놓고 발가벗길 때, 나는 결심했다. 저 새끼들을 다 죽여 버리겠다고. 또, 너희들도 다 죽여 버리겠다고.
 
 
 
  그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변호사, 검사, 판사, 배심원은 왜 있는 것인지가 궁금해졌지만 이내 이해가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범죄자를 좋아한다. 돈도, 빽도 없는 범죄자 수백 명이 죽어가는 동시에 돈도, 빽도 있는 범죄자 수만 명이 떵떵거려도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이다. 어쨌든, 세상은 돈이, 그리고 힘이 정의이다. 씁쓸함에 웃음이 나왔다.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면회를 가기로 했다.
 
  “……. 잘 지내냐?”
  “……. 그래. 잘 지낸다. 우리 딸이 벌써 다섯 살이다.”
  “어이구, 많이 컸네. 세상에서 딸이 제일 이쁘고 제일 소중하지? 딸 간수 잘해라. 웬 이상한 놈이 못 채가게.”
  “……. 그래.”
  “세상은 잘 돌아가고 있냐? 여기 이러고 있으니까 당최 세상살이를 모르겠다.”
  “뭐, 늘상 똑같지 뭐.”
  “그러냐. 회사는 좀 어떠냐?”
  “사정이 어렵나봐. 그래도 다 버티고 있다.”
  “야, 이제 죽는 건 난데 니가 왜 그러냐? 걱정하지 말어. 나 이제 행복하다. 그 새끼 죽이고 나니까, 참 행복해. 요즘 들어서야 세상이 조금 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웃기지 않냐? 나 같은 새끼들은 죽어가기 시작해서야 행복이란 걸 느끼고 말야.”
  “……. 그러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행복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행복. 그는 너를 죽이고 나서야 행복을 느꼈다. 이젠 깨닫겠는가? 네가 얼마나 역겨운 사람이었는가를. 네가 죽어야 행복해지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너는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게다가 인기도 많은 사회의 모범생이었지만, 인간으로서는 낙제생이었다. 개새끼. 세상은 이 간단한 것을 알지 못한다. 아나운서들도, 기자들도 모두 그를 죽일 놈의 개새끼로 만드는데 혈안이 되어있다. 우리나라에서 그나마 똑똑하다는 새끼들도 이정도 수준이다. 다들, 선과 악을 나누는 데에 미쳐있다. 할리우드와 영웅화의 폐해. 아무튼 너는 영웅이 되었고, 그는 영웅을 죽인 앞잡이가 되어버렸다.
 
 
 
    하느님과 부처님도 개새끼라는 것은 틀림없다. 하느님이 옳다고, 부처님을 따르라고 말하는 목사 놈들과 중놈들도 개새끼라는 것은 틀림없다. 나는 그 새끼들과 고등학교까지 같이 다니게 되었다. 충남 논산에서도 연무대. 이 촌구석에는 중학교가 하나밖에 없었고, 고등학교도 몇 개 되지 않았다. 성적이 엇비슷해 같은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입학식 날 함께 뭉쳐 시시덕거리는 그 새끼들을 본 순간, 나는 속으로 하느님과 부처님을 죽여 버렸다. 이 개새끼들. 능력 없는 새끼들. 니들이 그러고도 신이야?
  고등학생이 되었다고 달라진 것은 없었다. 오히려 그 새끼들은 좀 더 교묘하고 잔인하게 나를 괴롭혔다. 예를 들어
 
  “야, 한승준. 너 저기 보이는 계집애 보이지? 너 내일 모레까지 저년 꼬셔서 너네 집으로 데려가. 그리고 나한테 전화해. 어우, 씨발. 저년 빠구리 존나 잘 뜨게 생기지 않았냐? 아, 꼴린다. 알았지? 내일 모레다.”
 
  라거나
 
  “야, 한승준. 내 주머니에 손 좀 넣어봐라. 우리가 내일 술을 좀 마시려고 하는데 내 주머니가 이렇다. 술하고 안주 좀 사서 학교로 가지고 오고, 너 돼지 발정제는 사놨냐? 이 씨발새끼야, 내가 사놓으랬잖아. 아, 이 새끼 진짜. 담임 한번 따먹으려니까 이 새끼가 다 초쳐놓네. 야, 이 개새끼야. 술 먹는데 여자가 없으면 어떻게 하냐? 니네 누나라도 데려올래? 에이, 됐다. 니네 누나도 너처럼 생겨 먹었을 거 아니야. 씨발년. 줘도 안 먹어. 아무튼 개새끼야, 내일까지 어떻게든 담임한테 돼지 발정제 먹여라. 물에 타든 커피에 타든 타서 줘, 새끼야. 안 그럼 다른 년을 데려오던가.”
 
  라거나.
 
  이런 식으로 그 새끼들은 나를 통해 수많은 여자를 농락했고, 피폐하게 만들었다. 모든 부정과 방탕, 일탈은 그 새끼들이 했지만, 정작 그 과정에서 죄를 몽땅 뒤집어 쓴 건 나였다. 고등학교 3년 동안 경찰에 17번 불려갔다. 그 새끼들은 2, 3번씩 불려갔다. 그 새끼들도, 경찰도, 하느님도, 부처님도 다 한통속이다. 다 죽여 버릴 새끼들, 개새끼들이다.
 
 
 
  그의 이름은 고유명사가 되었다. 유영철 이라거나 조두순, 강호순처럼. 그의 이름은 추악하고 더러운, 인간임을 벗어난 행위를 대변하게 되었다. 나는 그의 이름이 점점 힘겨워졌다. 동창들에게 모두 전화를 해보았다. 그를 기억하는 동창들은 다들 -어머, 진짜 걔가 걔니? 어머나, 세상에- 라거나 -그 새끼 그럴 줄 알았어. 고등학교 때부터 재수가 없었다니까- 라는 말로 세상을 대변했다. 동창들은 그를 기억했지만 그 누구도 너와 그의 모습을 기억하지 않았다(단언컨대, 기억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물어보고 싶었다. 세상의 모든 너와 너를 추종하는 똘마니들에게. 또한 너와 너의 똘마니들을 눈감아주는 개자식들에게. 너와 그 중에 누가 더 나쁜 것이냐고. 듣고 싶었다. 최소한 ‘잘 모르겠어.’ 라는 대답을. 하지만 지금 세상은, 너와 그의 사이에는 관심이 없다. 어쨌든 그는 너를 죽였으니, 그는 죽일 놈의 개새끼인 것이다.
 
  너는 참 잘 자랐다. 그의 성적이 점점 추락했던 반면, 너의 성적은 팍팍 치고 올라갔다. 그 과정에 분명히 너와 그에 관련된 비리가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굳이 들춰내고 싶지는 않았다. 너는 결국 일류대에 합격했고, 후방 방위로 군 생활을 마쳤으며 수많은 대기업에서 스카우트를 받았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리고 모 대기업에 엄청난 연봉을 받고 입사했다. 반면 그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고, 최전방에서 핍핍한 군 생활을 마쳤으며 수많은 노가다 판을 전전했고, 원양어선에 몸을 팔았다. 너는 그의 인생에서 행복과 성공, 기쁨을 쭉쭉 뽑아갔다. 동시에 그는 너의 인생에서 불행과 실패, 슬픔을 건져와 끌어안았다. 너는, 개새끼이다. - 당신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 너는 히틀러만큼, 김정일만큼,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악당만큼 개새끼이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공부를 시작했다. 이제까지보다 훨씬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았다. 부모님은 내게 모든 기대를 걸고 계셨다. 다행히 노력과 성적은 비례해 올라가기 시작했고, 그 새끼는 성적이 바닥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그 새끼는 내게 성적을 바꾸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 새끼는 내 성적을 이용해 일류대학에 합격했다. 이건 절대 안 된다는,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새끼는 힘이 셌다. 결국 대학교 진학에 실패했다. 부모님은 큰 충격을 받으시고 두 분이 동반자살을 하셨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신을 수습하고, 누나와 단 둘이 장례를 치르고 난 후, 나는 한 번 더 다짐했다. 그 새끼를 기필코, 내 두 눈알을 걸고 죽여 버리겠다고. 씨발새끼, 개새끼. 그렇게 나는 노가다 판을 전전했고, 배를 탔다.
  그 새끼를 다시 만난 것은 서울 모 대기업 본사 빌딩에서였다. ‘만난 것’이라는 거창한 표현을 썼지만, 사실은 나 혼자서만 그 새끼를 알아봤다. 그 새끼는 모 대기업의 중역인 듯 보였고, 그 새끼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그 순간, 빌딩 바닥을 닦고 있었다. 욕설이 헛구역질과 뒤섞여 올라왔지만 억지로 삼켜버렸다. 그 새끼를 볼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새끼는 나에게 줄 관심이 없었다. 그 새끼와 내가 엮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를 상상했다. 피가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욕설과 헛구역질을 참느라 내 목구멍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괜히 바닥을 힘주어 닦았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이 바닥이 그 새끼와 나를 비추고 있다는 것을. 걸레를 바닥 속의 그 새끼에게 집어 던져버렸다. - 세상 참 엿 같다.
  이 우연한 접촉 이후로 나의 세계는 온통 그 새끼를 죽여 버릴 계획으로 가득 찼다. 망설임도, 고민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 새끼는 내게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부모님과 행복, 성공, 기쁨 모두. 그 새끼가 개새끼인 것은 분명한 것이고, 나는 두 번의 다짐을 통해 그 새끼를 죽여 버릴 것을 맹세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 새끼를 죽일까. 이 고민에는 남모를 희열이 약간 묻어있었고, 고민을 계속할수록 부모님 살아생전 온 가족이 함께 했던 생일날에야 느끼던 기분이 느껴졌다. 아, 행복하다. 그리고 얼마 후, 연락이 왔다.
  동창회. 동창? ‘동창’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들어오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 새끼를 죽여 버릴 때가 왔음을. 그 새끼처럼 성공하고, 돈 많이 벌고 남부끄럽지 않은 새끼들이 동창회에 참여함은 너무나 당연해보였고, 실제로 그는 동창회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그 새끼를, 죽여 버렸다.
 
  판사는 내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유일한 내 편이자 피붙이인 누나는 주저앉았고, 국선변호사는 내게 - 나는 이미 이번 재판 포기했습니다. 재판 때 무슨 말을 하던, 당신 맘대로 하세요. - 라고 말하던 그대로, 나를 포기했다. 그의 경력에 누가 되어 미안했다. 누나가 이해되지 않았다. 누나는 왜 울까. 판사의 입에서 ‘사형’이라는 단어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순간, 허전함만이 느껴졌다. 내가 그 새끼를 죽여 버렸다는 것이 확실함을 확인하는 순간이었기에 나는 더 허전했다. 그 새끼를 죽여 버리는 것은 내 삶의 목표였고, 유일한 다짐이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기쁨도 느껴졌다. 드디어 그 새끼가 죽었구나. - 두 눈알을 뽑지 않아도 되는구나. 스스로의 다짐을 지켰구나.
 
 
 
  그가 죽었다. 그러고도 7년이 흘렀다. 그의 살해 동기는 아직까지 ‘불명’인 채로 남았다. 세상은 그의 살인에 달아오른 속도만큼 그를 잊어버렸지만, 아직까지 그의 이름은 고유명사로 남아있다. 이건 정말 아니다 싶었다. 그가 순식간에 악의 또 다른 이름이 되어버린 지금의 세상은 미쳐버린 것이 틀림없다. 신이 있다면 이럴 수는 없다. 그렇게 나는 이틀에 한 번씩 그를 생각했고, 너를 증오했다. 그렇지만 세상은 하염없이 흘러간다. 아무튼 간에 내 딸은 12살이 되었고 회사는 버티고 있었으며 김정일은 여전히 세상을 집어삼키고 있었고 할리우드 영화의 영웅들은 세상을 구하고 있었다. 어쩌면 세상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아무튼 그가 죽은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죽였으며 협박하거나 엿 먹였고 복수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살해동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세상은, 아직도, 역겹다.
 
 
  “……. 이것 참.”
  정우진이 다소 힘에 벅찬 이야기를 끝내자, 유광선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나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조금 전 정우진의 이야기는 충분히 충격적이고 괴로웠다. 유광선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눈물이 고일만큼 슬픈 이야기였던가?
  “아니, 광선씨도 우진씨 같은 사연이 있는 거요? 왜 그렇게 슬퍼합니까?”
 
 
 
  2. 유광선
  너는 그를 죽였다. 그렇지만 나는 너를 위로하거나 응원할 생각이 없다. 기억하는가. 너와 그의 사이를. 너와 그의 사이에는 거리가 수십 개쯤은 끼었었다. 하지만 너와 그는 남남인 것은 아니었다. 너는, 그를, 죽일 만큼 괴롭혔다.
 
  그는 가끔씩 자기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잊어버린다며 머쓱해하곤 했다. 내가 보기에는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는 너희들이 일본을 싫어하는 만큼 일본을 싫어했으며, 너희들이 된장찌개를 좋아하는 만큼 된장찌개를 좋아했다. 너희들과 똑같은 학교들을 순서대로 졸업했고 너희들과 똑같이 군대를 다녀왔다. 그렇지만 너희들은 단 한 번도 그를 너희와 같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야, 아데. 옆 반 가서 다음시간 책 좀 빌려와.”
  그의 별명은 ‘아데’였다. 축구선수 ‘아데바요르’를 닮았다며 너희들이 지어준 별명이었다. 그는 그렇게 평생을 ‘아데’로 살았다. 그의 ‘차경훈’이라는 한국 이름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는 흑인의 외모를 지니고 태어난 한국인이었다. 누군가가 그의 출생에 대해 묻는다면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할머니는 중국인이고 우리 엄마는 북한사람이야. 그 사이에 어떻게든 됐겠지.”
  그러나 그의 여동생은 한국인의 외모를 지니고 태어난 한국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 알지 못했다. 어쩌면 그는 해외입양을 통해 아기 때 한국에 들어왔을지도 모른다.
  그는 평생을 약자로 살았다. 그것은 중학교부터의 불문율이었다. 흑인의 외모를 지니고 태어난 한국인을 너희들은 너희들의 발아래 두었다. 너희들은 그를 너희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는 어떻게든 너희가 되려고 노력했다. 그런 그를 너희들은 죽일 만큼 놀렸고, 죽일 만큼 괴롭혔다. 그 모든 것을 그는 참아냈고, 견뎌냈다. 어쩌면 그는 그것이 한국인으로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그가 참아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은 마늘과 쑥, 그리고 100일이 아니라 모욕과 욕설, 그리고 평생에 걸친 차별이었다. 예를 들어
 
  “야, 아데. 너네 할머니가 짱깨라고 그랬지? 엄마는 빨갱이고? 이 새끼네 가족은 진짜 피가 드럽게 섞였다니까? 그러니까 너 같은 깜둥이가 나오는 거지. 이 나라 핏줄, 저 나라 핏줄 죄다 섞어놓으면 너 같은 애가 나오는 거야. 더러운 새끼. 꺼져. 그리고 우리 반 교실 니가 다 닦아라. 어차피 너, 이 새끼야, 너 사회 나가면 이런 거밖에 못하잖아? 생각해봐. 누가 너 같은 새끼를 데려다가 사무실에 앉혀놓겠냐? 백인도 아니고. 그러니까 우리한테 고맙게 생각해. 미리 사회경험 시켜주고 있으니까. 깨끗이 해라. 니 핏줄이라고 생각하고 깨끗하게 청소해.”
 
  라거나
 
  “야, 아데. 이것 좀 봐라. 내가 어제 텔레비전을 봤거든? 근데 거기서 깜둥이들이 이런 거 먹더라. 그래서 너 주려고 특별히 만들어왔지. 먹어봐. 진흙이랑 과일껍질, 돼지 뼈 넣고 만든 거야. 특별히 너를 위해서 만든 거니까 다 먹어. 싫어? ‘우리 가족이랑 친척들이 먹는 거다’ 생각하고 먹어. 진짜 깜둥이들이 이런 거 먹더라니까? 야, 이 새끼 이거 안 먹으려고  한다. 이 새끼한테 이거 먹이자.”
 
  라거나.
 
  기억하는가. 네가 그를 죽이기 전까지 그는 평생 동안을 이렇게 살아왔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그는 나를 붙잡고 울먹거렸다.
  “나 이제 어떻게 하지? 대학교도 못 가고, 취업해야 하는데. 진짜 청소 같은 것밖에 못해? 좀 그럴듯한 직업은 못 얻는 거야? 제발 아니라고 해줘. 나 한국 사람이잖아. 나도 너희들하고 똑같은 학교 졸업했잖아.”
  그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에게는 너희들이 툭툭 던졌던 말들이 현실이 되었다. 그는 정말로 청소부가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그를 향한 경멸과 모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한참 외국인노동자가 물밀듯이 밀려들던 한국에서 그는 철저한 외국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주민등록증도, 한국인 부모님도, 한국인 여동생도 있었지만 그는 한국인이 아니었다. 사무직에 지원해 면접을 보러 갈 때면 ‘죄송합니다. 여기는 생산직이 아니라서 외국인노동자는 채용하지 않습니다.’ 라는 말을 들었고, 밤거리를 걸을 때면 ‘이런 새끼들 때문에 우리 일자리가 없어졌다니까.’ 라며 멱살을 잡는 취객들에게 시달렸다. 그렇게 그는 외국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너는 어떻게 되었는가. 너는 그와 같은 중학교,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 너는 6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그를 너의 종속노예로 만들었다. 너는 한국인으로써 그를 부려먹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 그를 부려먹지 못하게. 예를 들어
 
  한때 너와 비슷하지만 너보다 어깨가 좁은 아이가 그를 부려먹으려 했던 적이 있었다. 너는 괘씸한 그 아이의 얼굴을 발로 걷어찼고, 앞니 두 개와 송곳니가 나가 치료비가 2000만원이 나왔다. 너는
  “야, 내가 너를 위해서 저 새끼를 팼잖아. 내가 한 우정 하지 않냐. 그니까 돈은 니가 좀 내줘라. 너 나 아니었으면 지금쯤 저 새끼 똘마니나 되어있을 거 아냐. 알겠지? 치료비는 니가 부담하는 거다?”
  라며 그에게 2000만원을 떠넘겼다. 그와 그의 부모님은 너의 우정에 심하게 감탄하며 호주머니를 털었다.
 
  이런 식의 관계는 계속되었고, 고등학교 졸업식 날 너는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그리고 연무대에 커다란 구두공장을 하나 세우고 사장님이 되어버렸다. 너의 구두공장에서는 외국인노동자들을 대량 소비했고, 그는 80%쯤 외국인이 되어버린 몸으로 너의 공장에 취직했다.
 
 
 
  그는 처음에 구두공장이 네 것인지 알지 못했었다. 너는 현장 순찰을 거의 하지 않았고, 어쩌다 현장에 내려와서도 네 직원들을 걷어차며 일을 독촉했기 때문에 너의 직원들은 너의 얼굴을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너는 한국인이었다. 아무튼 그는 너의 공장에 취직했고, 독한 본드 냄새와 화학약품 냄새를 맡으며 일했다. 그리고 외국인노동자들과 함께 밥을 먹었고, 함께 잠이 들었다. 이 무렵의 그는 내게 말했었다. 인종과 민족, 국적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이 안개처럼 밀려오고 있다고.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흑인의 외모를 지니고 태어난 한국인이었고, 점점 흑인의 외모를 지니고 태어난 외국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무도 그를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해주지 않았고, 생산직 감독은 그의 주민등록증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외국인노동자들과도 어울리지 못했다. 외국인노동자들에게 한국말이 유창하고, 한국음식을 가리지 않으며 주민등록증까지 가지고 있던 그는 선망과 질투의 대상이었다. 그는 어디에도 끼지 못한 채로 땅거미처럼 숨어 지냈다.
 
  너희나라는 그런 나라였다.
 
  너와 그가 만난 것은 현장에서였다. 너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너의 직원들을 걷어찼고, 그의 엉덩이를 걷어차는 순간 익숙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그를 돌아보는 순간 너는 외쳤다.
  “아데!”
  너와 그가 그날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는 결코 알지 못한다. 다만 다음날 그는 외국인노동자들을 감독하는 현장감독이 되어있었고 너는 그를 통한 생산속도의 대폭향상을 꿈꾸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죽음의 씨앗이었고, 그의 행복의 씨앗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눈엣가시였던 그는 외국인노동자들에게 철저히 소외되어갔다. 그가 일을 시키면 외국인노동자들은 아예 일에서 손을 떼었고, 그가 너와 얘기하는 것이 발견된 밤이면 외국인노동자들은 네가 돌아오기 전에 숙소 문을 잠갔다. 그는 좀 더 깊은 인종과 국적에의 회의감을 느꼈다. 그는 한국인도, 외국인도 아니었다.
  아무튼 그는 네가 바라던 것들을 실현시켜주지 못했고, 너는 점점 화가 났다. 그리고 그날 밤, 너는 그를 불러냈고 조용히 이야기했다. 이런 식이면 아무리 친구라도 곤란하다고.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너에게 털어놓았고, 그의 말을 들으면서 너는 점점 화가 났다. 결국 너는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씨발, 이 깜둥이 새끼야. 그건 니 사정이고. 저 새끼들 닦달해서 일 좀 열심히 시키라고. 새끼가 분수에 안 맞는 일 맡겼더니만 일을 이딴 식으로 해? 이 개새끼야.”
  너는 그에게 소리를 지르면서도 점점 더 화가 났고, 너와 그의 옆에는 너를 말릴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날 밤, 너는, 그를, 죽여 버렸다.
 
  판사는 네게 3년형을 내렸다. 너의 가족들은 너무나도 긴 징역기간에 주저앉았다. 변호사는 네게 - 우리나라 풍토상 당신이 죽인 흑인에게 별로 동정심을 갖진 않을 겁니다. 판사도 마찬가지구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게다가 다들 외국인노동자로 알고 있지 않습니까.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으니 심한 판결은 나오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현역 최고인 제가 있지 않습니까. - 라고 말하던 그대로, 징역을 최소화했다. 그의 가족들은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냐며 울부짖었지만 그 누구도 흑인의 외모를 지니고 태어난 한국인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판사조차도 ‘외국인노동자 아니야?’라며 검사에게 물었다.
 
  그가 죽은 지 3년이 지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면 그는 네게 죽는 순간 행복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드디어 한국을 벗어나는구나. 드디어 벗어나는구나― 라며. 아무튼 그가 죽고 나서 세상은 많이 변했다. 네가 출소했고, 너의 회사는 굳건했다. 외국인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인권을 위해 시위를 거듭했고, 여러 TV프로그램과 영화에 출연하며 자신들을 돌아봐주길 부탁했다. 하지만, 세상은 아직 변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아무도 너와 그를 기억하지 않았고, 흑인의 외모를 지니고 태어난 한국인에게 관심이 없었다.
  세상이, 어떤지는, 아직, 모르겠다.
 
 
 
  “……. 이것 참.” 정우진은 조금 놀란 듯 보였다. 나는 조금 더 당황스러웠다. 세상에, 이럴 수가. 그들은 슬픈 기억들을 가슴속에 묻고 있었고, 오늘 같은 밤이면 더욱 거칠어지는 기억들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형은 뭣 때문에 여기서 혼자 있었습니까?” 정우진이 물어왔다.
 
  “나?”
 
  부끄러웠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서울, 1964년 겨울’이라니. 서적외판원이라니. ‘나’와 ‘안’을 바라고 있었다니. 그들은 서적외판원이 되었고, 나는 ‘나’와 ‘안’이 되어버렸다. 나의 어설픈 우울과 괴로움은 그들 앞에 무너져버렸다. 세상에 그런 일이 있었던가. 무관심에 반성이 앞섰다.
 
  “손님들. 가게 문 닫을 시간입니다. 죄송합니다.”
  “자. 그럼 일어납시다. 다들, 오늘 미안합니다. 이상한 이야기나 들려드리고. 자. 여기 명함이요. 다음에 한번 만납시다. 이것도 인연인데요.”
  “감사합니다. 꼭 연락드리죠.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다들 잘 들어가세요.”
 
  가게 앞에서 세 방향으로 갈라졌다. 뒤를 돌아다봤다. 그들은 주척주척 걷고 있었다. 사실은 그들에게 -그럼 그때 너희들은 뭘 했는데?―라며 묻고 싶었지만 물을 수 없었다. 그럼 그때 나는 무엇을 했던가. 나는 오늘이 되어서야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지 않았던가.
 
  비가, 잘박잘박, 내리는, 밤이다.

분홍사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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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turn.

 그는 다소 피곤한 몸짓으로 옷을 벗었다. 텁텁하게 말라붙은 그의 몸에서는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약간 회색빛을 띈 털들이 그의 몸 이곳저곳에 듬성 돋아나있었다. 그리고 깊게 패인 주름들. 멀리서 보면 그는 꼭 코끼리, 같았다. 왜소하고 자그맣게 죽어가고 있는 회색 코끼리. 그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십칠 번 옷장의 문을 잠갔다. 그리고 옷장 열쇠를 손목에 말아 감았다. 그가 걸을 때마다 열쇠는 찰랑찰랑 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너무 맑아 서러운 소리였다. 그는 소리와 함께 욕탕 문을 열었다. 언제나 같은 불편한 침묵이 수증기 틈새에 배어들어있었다. 십삼 년 째. 그가 이 목욕탕을 다닌 지난 십삼 년 동안 이곳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오래된 침묵도, 돌바닥 가득 낀 물때도, 정체불명의 물질들이 부유하는 탕도, 이년쯤 된 예능프로그램을 하루 종일 뱉어내는 텔레비전도. 달라진 것은 그 뿐인 듯 한 기분이 들었다. 끔찍한 기분들. 그러자 이곳의 모든 것들이 불쾌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는 온탕의 물이 너무 미지근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열탕의 물은 지나치게 뜨거웠다. 모든 것이 불편했다. 눅눅한 공기가 그의 목을 졸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서둘러 몸을 씻고 욕탕을 나왔다. 수건으로 회색빛 털이 돋은 겨드랑이를 닦다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눈과 마주쳤다. 그리고는 거의 구역질을 느꼈다. 거울 속에는 늙수그레한 코끼리 한 마리가 서있었다. 유난히 주름이 깊은 코끼리였다. 그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히 십칠 번 옷장의 문을 열었다. 열쇠는 끊임없이 찰랑거렸다. 그는 서둘러 옷을 입고 목욕탕을 나섰다. 카운터에 서있던 아주머니가 안녕히 가시라고 텁텁한 인사를 건넸지만 그는 애써 무시했다. 인사조차도 그에게는 불쾌하고 불편했다. 문을 거칠게 열고 무기력하게 걷기 시작했다. 어디인지 모를 그 어딘가를 향해서. 하늘엔 유난히 채도가 낮은 구름들이 서로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서있었다. 그는 차 위에 올랐다. sm5. 그는 이제 서른아홉이지만 서른아홉에 어울리는 차가 무엇인지는 몰랐다. 그래서 매장 문을 열자마자 눈에 들어온 차를 사버렸다. 딜러가 시키는 것들을 그대로 따라서. 자신의 경제 사정으론 조금 벅찬 감이 있었지만 그냥 그 차를 샀다. 늘 그런 식이었으니까. 그리곤 특별하달 것 없는 애정을 실어 차를 대했다. 일주일에 한번 세차, 딜러의 권유로 차 구매와 함께 들었던 자동차보험. 그는 그의 차역시도 자신을 특별하달 것 없는 애정으로 대하고 있다고 느꼈다. 큰 무리 없이 움직였고 큰 사고 역시도 내지 않았다. 툭, 투둑. 하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저 앞의 신호가 빨간불로 바뀌었다. 그는 와이퍼를 작동시키고 브레이크를 밟았다. 조금 가파른 내리막이었다. 낡은 국숫집이 있는 내리막.    무슨 하늘이 이렇게 구질구질해. 그녀는 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고는 라디오를 틀었다. 99.2㎒. 라디오에선 보청기광고가 흘러나왔다. 목소리만 보이는 남자성우는 힘이 잔뜩 들어간 채 보청기광고를 흘

  • 분홍사슴
  • 2011-12-02
슬프지만 비선형적인 관계(들).

[그림 설명. <그림자의 법칙>.        원 : 자신의 시야.        a = 타인에게 보이는 나의 머리 그림자.    b = 타인에게 보이는 나의 몸통 그림자.    c = 타인에게 보이는 나의 다리 그림자.        a' = 자신에게 보이는 머리 그림자.    b' = 자신에게 보이는 몸통 그림자.    c' = 자신에게 보이는 다리 그림자.]    [<그림자의 법칙> 설명.        원 : 자신의 시야.        a = 타인에게 보이는 나의 머리 그림자.    b = 타인에게 보이는 나의 몸통 그림자.    c = 타인에게 보이는 나의 다리 그림자.        a' = 자신에게 보이는 머리 그림자.    b' = 자신에게 보이는 몸통 그림자.    c' = 자신에게 보이는 다리 그림자.]     유난히 불안정한 날이다. 대기도, 기분도, 그리고 세상도. 모든 건 불안정해서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하지만 예보가 없어서 언제 무너져 내릴지는 알 수가 없다. 우산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손을 뻗었다. 우산이, 있는 어딘가로. 그리고 우산이 내게 왔다.    물리적인 것들은 문학적이고 아름답다. 공학도, 화학도, 기상학도 모두 아름답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런 것들을 공부하지 않았다. 너무 아름다워 슬프기까지 하니까. 그렇지만 그런 것들은 세상을 이루는 것들이라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왜곡하기로 했다.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으니까. 나는 조금 멍청한 축에 속하기 때문에 왜곡하는 것밖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림자는 자신의 망막에 맺히는 상과 타인이 바라보는 상이 다르다. 나는 그걸 '그림자의 법칙'이라고 이름 붙였다. 나는 그게 좀 우습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그림자뿐만이 아니었다. 나의 본모습 역시도 내게 보이는 것과 타인이 바라보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물리적인 것들과 공학, 화학, 기상학 같은 것들을 왜곡하고 외면하기로 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나는 사회적 페르소나와 자아를 동일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림자의 법칙'부터 왜곡해야 했다. 그 후로는 모든 것을 왜곡했고, 이젠 지금처럼 손만 뻗어도 어딘가에서 우산을 가져올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멍청한 축에 속하기 때

  • 분홍사슴
  • 2011-10-18
난 어디론가 자꾸 날 잃어가고

     Q. 어제는 할머니께서 노인정 관광이 있다구 곱게 차려입으시고는 꼭두새벽부터 집을 나서시더라구요. 그러더니 세 시간쯤 있다가 집에 전화가 왔어요. 경찰서라구, 거기 혹시 김명인씨 가족 되시냐구. 얼른 뛰어갔더니 할머니가 제 손을 꼭 잡고 그러시더라구요. 아가야, 나 치맨갑다. 워떡해야 쓸까잉. 그러더니 오늘 아침에도 일찌감치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입으시더라구요. 할머니, 어디 가시게요? 했더니 아야, 오늘 노인정 꽃구경이 있어부러서 할매가 나가봐야겄다. 그래서 할머니, 꽃구경은 어제였어요. 어제 할머니 노인정 가시다가 길 잃어버리셨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하니까 눈을 끔뻑끔뻑 하시더니 그랬냐아? 하시더라구요. 할머니한테 치매가 찾아온 건가요? 그리고 이정도면 증세가 심각한 건가요?    물음표 뒤로 커서가 깜빡거렸다. 글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봤다. 읽으면서 마음이 몇 번이나 덜컥 멎었다. 치매라니. 할머니에게, 치매라니. 마우스를 ‘등록’ 위로 가져갔다. 올릴까? 질문을 올린다는 것이 겁이 났다. 할머니에게 치매가 찾아왔다는 것을 인정해버리는 것 같았다. 등록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이젠 어쩔 수가 없다. 현실을, 인정해야한다. 예. 질문이 올라갔다. 그러나 답변을 확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질문을 등록하고 난 후, 할머니 방에 들어갔다. 할머니께서는 텔레비전을 보고 계셨다. 여섯시 내 고향. 텔레비전 속의 리포터는 힘찬 목소리로 노인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왠지 마찰음이 섞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할머니, 오늘이 며칠이에요? 으응? 가만있어봐. 오늘 사월 십구일 아니냐? 왜? 오늘 무슨 날이냐? 아니요. 날은 무슨요. 와. 저기는 어디예요? 마을이 되게 예쁘네.  그러나 오늘은 사월 이십삼일이다.    요즘 바빠? 통 문자를 못하네. 연락 좀 하자, 우리. 이번 주말에 시간 있어? 영화라도 한편 보러 갈래?    엄지손가락이 전송버튼 위에서 멈칫거렸다. 보내야하나? 요즘 들어 우리가 점점 멀어져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런 종류의 예감은 언제나 맞아떨어지곤 했다. 우리의 유통기한이 다 되어버린 걸까? 어쩌면 새로운 이별을 준비해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전송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닫았다. 답장을 받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말로, 답장이 오지도 않았다. 기분이 좀 더 우울해졌다.    할머니, 진지 드세요. 꽃게탕을 좀 끓였어요. 시장에서 다리가 두어 개 잘려나간 녀석들을 싼값에 샀다. 이런 게가 아니라면 절대 꽃게를 먹을 수가 없다. 초등학교 때부터 어머니에게 배워온 삶의 방식이다. 어이구야, 게가 참 맛나구나, 야. 웬일로 꽃게탕을 다 끓였다니? 그나저나, 너 오늘 왜 일 안 나갔니? 할머니도 참, 오늘 다 저물어 가는데 그걸 지금 물어보세요? 그냥, 몸이 좀 안 좋아서요. 그래? 그럼 푹 쉬야지. 할머니 때문에요, 라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nbsp

  • 분홍사슴
  • 2011-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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