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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turn.

  • 작성자 분홍사슴
  • 작성일 2011-12-02
  • 조회수 415

 그는 다소 피곤한 몸짓으로 옷을 벗었다. 텁텁하게 말라붙은 그의 몸에서는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약간 회색빛을 띈 털들이 그의 몸 이곳저곳에 듬성 돋아나있었다. 그리고 깊게 패인 주름들. 멀리서 보면 그는 꼭 코끼리, 같았다. 왜소하고 자그맣게 죽어가고 있는 회색 코끼리. 그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십칠 번 옷장의 문을 잠갔다. 그리고 옷장 열쇠를 손목에 말아 감았다. 그가 걸을 때마다 열쇠는 찰랑찰랑 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너무 맑아 서러운 소리였다. 그는 소리와 함께 욕탕 문을 열었다. 언제나 같은 불편한 침묵이 수증기 틈새에 배어들어있었다. 십삼 년 째. 그가 이 목욕탕을 다닌 지난 십삼 년 동안 이곳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오래된 침묵도, 돌바닥 가득 낀 물때도, 정체불명의 물질들이 부유하는 탕도, 이년쯤 된 예능프로그램을 하루 종일 뱉어내는 텔레비전도. 달라진 것은 그 뿐인 듯 한 기분이 들었다. 끔찍한 기분들. 그러자 이곳의 모든 것들이 불쾌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는 온탕의 물이 너무 미지근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열탕의 물은 지나치게 뜨거웠다. 모든 것이 불편했다. 눅눅한 공기가 그의 목을 졸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서둘러 몸을 씻고 욕탕을 나왔다. 수건으로 회색빛 털이 돋은 겨드랑이를 닦다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눈과 마주쳤다. 그리고는 거의 구역질을 느꼈다. 거울 속에는 늙수그레한 코끼리 한 마리가 서있었다. 유난히 주름이 깊은 코끼리였다. 그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히 십칠 번 옷장의 문을 열었다. 열쇠는 끊임없이 찰랑거렸다. 그는 서둘러 옷을 입고 목욕탕을 나섰다. 카운터에 서있던 아주머니가 안녕히 가시라고 텁텁한 인사를 건넸지만 그는 애써 무시했다. 인사조차도 그에게는 불쾌하고 불편했다. 문을 거칠게 열고 무기력하게 걷기 시작했다. 어디인지 모를 그 어딘가를 향해서. 하늘엔 유난히 채도가 낮은 구름들이 서로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서있었다. 그는 차 위에 올랐다. sm5. 그는 이제 서른아홉이지만 서른아홉에 어울리는 차가 무엇인지는 몰랐다. 그래서 매장 문을 열자마자 눈에 들어온 차를 사버렸다. 딜러가 시키는 것들을 그대로 따라서. 자신의 경제 사정으론 조금 벅찬 감이 있었지만 그냥 그 차를 샀다. 늘 그런 식이었으니까. 그리곤 특별하달 것 없는 애정을 실어 차를 대했다. 일주일에 한번 세차, 딜러의 권유로 차 구매와 함께 들었던 자동차보험. 그는 그의 차역시도 자신을 특별하달 것 없는 애정으로 대하고 있다고 느꼈다. 큰 무리 없이 움직였고 큰 사고 역시도 내지 않았다. 툭, 투둑. 하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저 앞의 신호가 빨간불로 바뀌었다. 그는 와이퍼를 작동시키고 브레이크를 밟았다. 조금 가파른 내리막이었다. 낡은 국숫집이 있는 내리막.

 

 무슨 하늘이 이렇게 구질구질해. 그녀는 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고는 라디오를 틀었다. 99.2㎒. 라디오에선 보청기광고가 흘러나왔다. 목소리만 보이는 남자성우는 힘이 잔뜩 들어간 채 보청기광고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또다시 맑은 목소리로 남자성우를 따라했다. 전파 저 너머의 남자, 얼굴도 모르는 남자이지만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라디오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컵 홀더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삼십대 초반의 싱글녀. 비싼 테이크아웃 커피를 마시는 것은 그런 페르소나에 어울리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조그마한 회사에서 경리일을 한다. 그런 페르소나에 대해서 그녀는 약간의 수치심마저 느꼈다. 그래서 그녀는 일부러 비싼 차를 사고 명품들을 긁어모았다. ‘조그마한 회사의 경리’ 페르소나를 뻑뻑 지우기 위해서. 가끔 벅찬 빚에 허덕이기도 했지만 빚 같은 건 시간이 지나면 얼마든지 없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빚은 억을 향해 넘실넘실 흘러갔다. 그녀는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다. 라디오도 재미없고, 날씨도 흐리고. 오늘 진짜 구질구질한 날이네. 이따 경아랑 파스타나 먹으러 가야지. 그녀는 경쾌하게 중얼거리고는 창문을 열었다. 찬바람이 스멀스멀 기어들어왔다. 그녀는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고 날카로운 바람을 움켜줬다. 그러자 그 위로 툭, 투둑. 하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짜증 섞인 몸짓으로 손을 다시 차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골목을 크게 돌았다. 저 멀리 조금 가파른 오르막이 보였다. 낡은 국숫집이 있는 오르막. 그녀는 와이퍼를 작동시켰다. 물방울들이 창문 양 끝으로 밀려갔다. 비다.

 

 어쩌면 정말로 지난 십삼 년 동안 변한 것은 그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십삼 년 전, 물방울이 까만 발자국을 남기며 바닥으로 스며드는 것처럼 그가 이 동네에 스며들었을 때, 저 국숫집에서 첫 식사를 했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우울하고 축축한 날이었다. 그러나 그때의 그는 지금의 그와 참 많이 다르다. 그는 이곳에서 멋지게 성공할 것이라는 의지와 자신감으로 뭉쳐있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치기. 스물여섯이었고 털들은 까맣기만 하던 때였다. 그는 낡은 국숫집을 흘끗 쳐다보며 어제들에 빠져들었다. 그리고는 괴리감 같은 것을 느꼈다. 스물여섯의 그로부터, 낡은 국숫집으로부터. 점점 모든 것들에게 낯섦을 느끼기 시작할 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 여보세요. 네. 네. 담배 안 펴요. 네. 네. 네. 조심할게요. 네. 건강 조심하세요. 네. 끊어요. 그가 뱉어낸 ‘단어들’은 차 이곳저곳에 떠다녔다. 그는 그것들을 바라보며 약간의 죄책감과 불안감을 느꼈다. 그의 어머니는 그보다 훨씬 더 코끼리를 닮아있을 것이다. 털들은 훨씬 더 회색빛이고 주름은 훨씬 더 깊은 코끼리. 그는 전화기를 한참 내려다봤다. 그리고 창문을 열어 ‘단어들’이 흘러나가게 했다. 그리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단어들’도, ‘엄마♥’도, 어제들도, 낡은 국숫집도 뒤로하고. 그는 성급하게 차를 몬다. 내리막은 좀 더 급한 경사로 그를 끌어안았다. sm5는 엔진소리를 내며 그를 저 어딘가로 데려가고 있다.

 

 와 저 국숫집이 아직도 있네. 이 동넨 오랜만인데 아직 안 망했구나. 신기하네. 이따 경아랑 파스타 대신 여기서 국수 먹어야겠다. 그녀의 차 역시 천천히 그 오르막으로 들어서고 있다. 비는 지저분하게 흩어지며 사라지는 것들 특유의 냄새를 내뿜었다. 불쾌하고 불편한 냄새. 그녀는 핸드백 구석을 뒤적여 향수를 꺼냈다. 그리고 차안 이곳저곳에 뿌렸다. 으, 비 냄새 싫어. 도대체 비는 왜 오는 거야. 아무도 좋아하는 사람이 없는데. 짝사랑인가? 쪽팔리게 짝사랑이나 하고. 그러는 사이에도 비는 계속 내렸다. 그리고 이유 없는 긴장감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빗방울과 냄새 사이에 숨어든 긴장감은 자꾸 부풀어 올랐다. 그녀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지저분한 빗방울과 냄새, 긴장감을 뒤로하고. 오르막은 좀 더 급한 경사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차가 낡은 국숫집 앞 신호등을 지나갈 무렵. 신호는 빨갛게 물들었다.

 

 그의 차가 낡은 국숫집 앞 신호등을 지나갈 무렵. 신호는 빨갛게 물들었다. 그는 갑자기 예전에 ‘엄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마무’라는 코끼리 이야기. 어른 코끼리들은 짙은 회색이지만 마무는 아직 아가라서 옅은 회색이었어. 그래서 마무는 비가 오면 항상 귀를 활짝 펴고 비를 맞았어. 비를 맞으면 색깔이 짙어지잖아. 마무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거든. 어리석은 마무 이야기. 그는 어느 순간부터 마무를 멍청한 코끼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침을 꾹 삼킨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어제들. 갑자기 전화벨이 울린다. 그는 무신경하게 핸드폰을 들어올린다. ‘어제’. 어제? 어제! 신호가 초록색으로 물든다. 그는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그리고 어느새 핸들을 돌린다. 반대편 차선으로. 낡은 국숫집으로. 어제? 어제!

 

 그녀는 핸들을 두드리며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린다. 그녀의 뒤로는 차들이 몇 대 서있고 반대편 차선엔 sm5 한 대만 서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향수를 뿌린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들 특유의 냄새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녀는 숨이 막혀옴을 느낀다. 신호가 초록색으로 물든다. 그녀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그리고 끼이익-. 그의 차가 그녀의 차를 덮친다. 둘의 차는 낡은 국숫집으로 밀려들어간다. 낡은 국숫집은 두 대 분의 차를 꾸역꾸역 밀어 넣는다. 그녀는 뒷목을 쥐고 차문을 연다. 무너진 벽돌들과 흩날리는 먼지들. 낡은 국숫집의 벽 한쪽은 완전히 부서지고 차들은 반쯤 쑤셔 박힌다. 다행히 국숫집엔 손님이 없다. 야, 이 미친놈아. 그녀는 차가운 말들을 자꾸 내뱉는다. 차가운 말들은 사라지는 것들 특유의 냄새와 섞여 이곳저곳을 떠다닌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는 죄송한 말들을 자꾸 내뱉는다. 죄송한 말들은 사라지는 것들 특유의 냄새와 차가운 말들과 섞여 이곳저곳을 떠다닌다. 비는 계속 내린다. 낡은 국숫집 주인 할머니는 이유모를 소란에 방문을 연다. 그리고 한쪽 벽이 무너져 내린 국숫집과 눈이 마주친다. 할머니, 주저앉아 울기 시작한다.

 

 핸드폰 주소록 어디를 뒤져봐도 ‘어제’라는 이름으로 저장된 번호는 없다. 그러나 분명히 핸드폰 화면에 적힌 이름은 ‘어제’였다. 그는 최근기록을 뒤적여 ‘어제’의 번호를 찾아낸다. 그리고 ‘어제’에게 전화를 건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다시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주저앉는다. ‘어제’. 그는 십삼 년 전의 날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u-turn. u-turn을 하고 싶다고. 코끼리는 뒷걸음질 치기 시작한다.

분홍사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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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지만 비선형적인 관계(들).

[그림 설명. <그림자의 법칙>.        원 : 자신의 시야.        a = 타인에게 보이는 나의 머리 그림자.    b = 타인에게 보이는 나의 몸통 그림자.    c = 타인에게 보이는 나의 다리 그림자.        a' = 자신에게 보이는 머리 그림자.    b' = 자신에게 보이는 몸통 그림자.    c' = 자신에게 보이는 다리 그림자.]    [<그림자의 법칙> 설명.        원 : 자신의 시야.        a = 타인에게 보이는 나의 머리 그림자.    b = 타인에게 보이는 나의 몸통 그림자.    c = 타인에게 보이는 나의 다리 그림자.        a' = 자신에게 보이는 머리 그림자.    b' = 자신에게 보이는 몸통 그림자.    c' = 자신에게 보이는 다리 그림자.]     유난히 불안정한 날이다. 대기도, 기분도, 그리고 세상도. 모든 건 불안정해서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하지만 예보가 없어서 언제 무너져 내릴지는 알 수가 없다. 우산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손을 뻗었다. 우산이, 있는 어딘가로. 그리고 우산이 내게 왔다.    물리적인 것들은 문학적이고 아름답다. 공학도, 화학도, 기상학도 모두 아름답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런 것들을 공부하지 않았다. 너무 아름다워 슬프기까지 하니까. 그렇지만 그런 것들은 세상을 이루는 것들이라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왜곡하기로 했다.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으니까. 나는 조금 멍청한 축에 속하기 때문에 왜곡하는 것밖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림자는 자신의 망막에 맺히는 상과 타인이 바라보는 상이 다르다. 나는 그걸 '그림자의 법칙'이라고 이름 붙였다. 나는 그게 좀 우습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그림자뿐만이 아니었다. 나의 본모습 역시도 내게 보이는 것과 타인이 바라보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물리적인 것들과 공학, 화학, 기상학 같은 것들을 왜곡하고 외면하기로 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나는 사회적 페르소나와 자아를 동일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림자의 법칙'부터 왜곡해야 했다. 그 후로는 모든 것을 왜곡했고, 이젠 지금처럼 손만 뻗어도 어딘가에서 우산을 가져올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멍청한 축에 속하기 때

  • 분홍사슴
  • 2011-10-18
난 어디론가 자꾸 날 잃어가고

     Q. 어제는 할머니께서 노인정 관광이 있다구 곱게 차려입으시고는 꼭두새벽부터 집을 나서시더라구요. 그러더니 세 시간쯤 있다가 집에 전화가 왔어요. 경찰서라구, 거기 혹시 김명인씨 가족 되시냐구. 얼른 뛰어갔더니 할머니가 제 손을 꼭 잡고 그러시더라구요. 아가야, 나 치맨갑다. 워떡해야 쓸까잉. 그러더니 오늘 아침에도 일찌감치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입으시더라구요. 할머니, 어디 가시게요? 했더니 아야, 오늘 노인정 꽃구경이 있어부러서 할매가 나가봐야겄다. 그래서 할머니, 꽃구경은 어제였어요. 어제 할머니 노인정 가시다가 길 잃어버리셨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하니까 눈을 끔뻑끔뻑 하시더니 그랬냐아? 하시더라구요. 할머니한테 치매가 찾아온 건가요? 그리고 이정도면 증세가 심각한 건가요?    물음표 뒤로 커서가 깜빡거렸다. 글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봤다. 읽으면서 마음이 몇 번이나 덜컥 멎었다. 치매라니. 할머니에게, 치매라니. 마우스를 ‘등록’ 위로 가져갔다. 올릴까? 질문을 올린다는 것이 겁이 났다. 할머니에게 치매가 찾아왔다는 것을 인정해버리는 것 같았다. 등록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이젠 어쩔 수가 없다. 현실을, 인정해야한다. 예. 질문이 올라갔다. 그러나 답변을 확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질문을 등록하고 난 후, 할머니 방에 들어갔다. 할머니께서는 텔레비전을 보고 계셨다. 여섯시 내 고향. 텔레비전 속의 리포터는 힘찬 목소리로 노인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왠지 마찰음이 섞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할머니, 오늘이 며칠이에요? 으응? 가만있어봐. 오늘 사월 십구일 아니냐? 왜? 오늘 무슨 날이냐? 아니요. 날은 무슨요. 와. 저기는 어디예요? 마을이 되게 예쁘네.  그러나 오늘은 사월 이십삼일이다.    요즘 바빠? 통 문자를 못하네. 연락 좀 하자, 우리. 이번 주말에 시간 있어? 영화라도 한편 보러 갈래?    엄지손가락이 전송버튼 위에서 멈칫거렸다. 보내야하나? 요즘 들어 우리가 점점 멀어져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런 종류의 예감은 언제나 맞아떨어지곤 했다. 우리의 유통기한이 다 되어버린 걸까? 어쩌면 새로운 이별을 준비해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전송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닫았다. 답장을 받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말로, 답장이 오지도 않았다. 기분이 좀 더 우울해졌다.    할머니, 진지 드세요. 꽃게탕을 좀 끓였어요. 시장에서 다리가 두어 개 잘려나간 녀석들을 싼값에 샀다. 이런 게가 아니라면 절대 꽃게를 먹을 수가 없다. 초등학교 때부터 어머니에게 배워온 삶의 방식이다. 어이구야, 게가 참 맛나구나, 야. 웬일로 꽃게탕을 다 끓였다니? 그나저나, 너 오늘 왜 일 안 나갔니? 할머니도 참, 오늘 다 저물어 가는데 그걸 지금 물어보세요? 그냥, 몸이 좀 안 좋아서요. 그래? 그럼 푹 쉬야지. 할머니 때문에요, 라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nbsp

  • 분홍사슴
  • 2011-07-12
서울, 2010년 겨울

 유난히 비가 잘박잘박 내리는 밤이었다. 가게에는 오늘따라 사람이 없었고, 거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울한 일이나 괴로운 일을 겪은 사람이 아니라면, 비오는 밤에는 누구도 나오고 싶어 하지 않는다. 빗소리는 오래된 와인처럼 점점 진해져갔고, 그만큼 우울의 농도역시 진해져갔다. 가게에는 우리 셋만 남아 각자 시간을 소비하고 있었고, 어느 순간  “안녕하십니까. 거, 가게도 다 끝나 가는데 합석해도 괜찮겠습니까? 저기 앉아있는 형씨까지 셋이서 가게 문 닫을 때까지 마시자구요.”  라는 그의 말과 함께  “아아. 반갑습니다. 앉으세요. 저기요, 형씨도 여기 와서 앉아요. 혼자서만 마시지 말고 셋이서 같이 마십시다. 이모. 여기 소주 두병하구 낙지볶음 하나 주세요.”  라며 셋이 합석하게 되었다.  나는 아내와 한참 얘기가 오가던 이혼문제로 속이 불편했고, 그들은 이런 밤에나 어울리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이 무슨 괴로움을 떠안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아무튼 나는 ‘서울, 1964년 겨울’의 서적외판원 같은 심정으로 그들과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들이 ‘나’와 ‘안’이 되어주길 바랬다.  “자. 통성명이나 합시다. 나는 김경운이라고 합니다. 서른일곱입니다.”  “반갑습니다. 나는 정우진입니다. 서른셋 이구요.”  “반갑습니다. 유광선입니다. 서른둘입니다.”  처음 합석을 권유한 이부터 악수를 청했다. 둘 다 나보다 한참 어렸다. 이것 참, 정말 김승옥의 소설처럼 되는 것은 아닌지. 웃음이 조금 나왔다.  “다들 어떻게 오늘 같은 밤 여기서 혼자 앉아있게 됐습니까?”        1. 정우진  그는 너를 죽였다. 그렇지만 나는 너를 동정하거나 연민할 생각이 없다. 기억하는가. 너와 그의 사이를. 너와 그의 사이에는 거리가 수십 개쯤은 끼었었다. 하지만 너와 그는 남남인 것은 아니었다. 너는, 그를, 죽일 만큼 괴롭혔다.    “지난 22일, 충남 논산시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의 용의자가 체포되었습니다. 용의자 한 씨는 박 씨를 21일 저녁 11시경에 목 졸라 죽인 것으로 밝혀져……. 한 씨는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폭력적인 아버지……. 박 씨는 학창시절 학업에 충실하고 운동에 뛰어난 소질을 보인 학생이었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특히 박 씨는 모 기업의 중역임이 밝혀짐에 따라 이번 살인사건의 여파가 더욱 클 것으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자꾸 띄엄띄엄 들렸다. 채널을 돌려봐도 모두 너와 그

  • 분홍사슴
  • 2011-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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