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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물레 언덕

  • 작성자 러블리아
  • 작성일 2015-02-17
  • 조회수 610

1.​ ​

단풍잎을 실은 바람이 손을 흔든다. 발 앞에 아버지의 정겨운 손 같은 낙엽들이 쌓여 있다. 우리 윤(輪)이, 잘 지냈니? 때 거르지 않고? 손주들도 보고 싶구나. 아빠의 목소리 같아 목이 멘다. 50줄에 들어설 때지만, 아직도 아빠라고 하고만 싶다. 내 그리움의 나이는 8살이니까. 아빠, 아이들 다 크고, 남편은 매일 늦게 들어와. 나 어린애도 아닌데 왜 이렇게 아빠가 보고 싶지?

발끝에서 그리움의 하이얀 명주실을 만든 지 40년이다. 오늘도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저 멀리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오른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 그리운 소리가 물레바퀴 돌리는 소리처럼 귓가에 감긴다. 어느 새, 간조가 되고 바다는 갯벌이란 속살을 드러낸다.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명주실을 감은 듯, 흰 물새가 가녀린 다리로 발끝에서 그리움을 건져 올린다.저 멀리로 명주실 한 꾸리가 날아갈 때 수평선 너머까지 명주실이 풀린다. 자전거의 물레바퀴가 돌며 명주실을 잣는다. 실 끝을 따라가면 아빠를 만날 수 있을까? 언제나 아빠의 품속 같은 작은 나루터에 발길이 머문다.

 

 

 

 

 

​2.
바닷가의 작은 마을에서, 시를 쓰는 아빠는 바람 같았다 .산과 들의 노래에 젖어 며칠간 집을 비우거나 노을이 사라질 때까지 바닷가에서 사색에 잠겨 있었다. 특히 자전거를 타고 언덕에 오르는 걸 좋아하셨다. 자전거 뒤에 솜이 삐져나온 방석을 묶어 어린 나를 태우고 언덕에 올라 키 큰 나무들이 실어온 바람소리를 듣게 해주셨다

“이 바다에는 신비의 바닷길이 있어. 70년에 한번 열린단다. 윤이가 태어났을 때 이 바닷길이 열렸어. 엄마랑 아빠가 널 업고 바닷길을 건너서 섬으로 갔지. 윤이가 할머니가 되면, 다시 열릴 거야.”

나무들이 신비의 바닷길 이야기도 실어온 것일까? 6번째 생일 선물로 받은 작은 자전거의 보조바퀴를 떼게 되었을 때 바다의 푸른빛이 다 내 것인 것만 같았다. 아빠와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있다니.

“윤아, 네 엄마 생각난다. 언제나 손으로 물레 돌려서 하얀 실 만들었었는데. 엄마 기억나? 이 자전거. 네 엄마가 실 잣고 번 돈으로 사줬어. 물레랑 당신 시만 있으면 된다고…….”

엄마라……. 기억 저편의 엄마는 언제나 하얀 물레바퀴 소리였다. 언제나 아침마다 들리는 물레 소리에 잠을 깼다. 누에고치를 넣고, 실처럼 흰 손가락으로 물레를 돌리면 하얀 명주실이 술술 나와 신기해했었는데. 오늘 나와 아빠는 자전거로 물레를 돌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날. 언덕 위에 큰 자전거와 작은 자전거가 나란히 놓인 적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윤아, 잘 있어.”
나를 뜨겁게 안아주던 품속에서 왜 그렇게 눈물이 났을까? 아빠는 조각배가 걸린 작은 나루터로 내려갔다. 따스한 품속의 기억만 남겨두고, 힘차게 노를 저어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곧 돌아올 거야. 햇빛이 퍼져 노을이 될 때까지, 노을까지 어둠에 가려질 때까지. 그렇게 언덕 위에서 조각배가 지나간 자리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검은 언덕을 혼자 내려간 것도 그날이 처음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아빠의 노는 흰 명주실이 감긴 베틀북이었다. 힘차게 젓는 노 소리에, 나의 명주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3.
양 갈래로 땋은 머리에, 까만 주름치마와 하얀 블라우스. 명문 여중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입에서 명주실을 풀어내는 나에게선, 어두운 방 안에서 혼자 물레를 돌리며 노는 아이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나 내일 준이랑 만나기로 했어.”
“누구? 그 옆 남중 다니는 애?”

“잘생기고 키도 크고. 얘, 내가 먼저 점찍어 둔 애야.”
​“미안해서 어쩌나. 벌써 이 언니의 님이 되신걸.”
​여중까지의 거리가 멀어 마을 친구들 모두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물레바퀴를 같이 돌릴 친구들이 늘어난 것이다. 내 명주실은 가닥가닥 엮어가며 더 단단해지고 있었다.
“잠깐만, 나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먼저 가.”
​뭐야, 좋아하는 사람 있나 보네. 친구들의 속닥거림이 멀리서 들린다. 아빠는 수평선 너머에서 뭘 하고 계실까?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함께 자전거를 타던 아빠. 처음으로 이불 위의 꽃물을 발견한 날이었지만, 그런 아빠와 저 수평선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었다.



아빠가 떠난 후, 가마솥의 찬밥을 꺼내 신 김치를 얹어 세 끼를 먹었다. 방 안에 고이 잠든 물레. 엄마의 숨결이 담긴 물레를 손가락으로 돌려봤다. 아빠의 아름다운 눈에 첫눈에 사로잡혔다는 엄마. 집안의 반대도 무릅쓰고 작은 집 하나만 갖고 아빠와 평생을 살았다. 물레를 돌려 명주실을 만들어 포목전에 팔아 한 끼를 먹었음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엄마. 그리고 엄마를 행복하게 해준 아빠

언덕의 나무들은 파도가 만들어낸 아련한 푸른 소리를 그대로 싣고 흔들렸다. 바다 위로 아빠가 보였다. 그러다 명주실에 칭칭 감긴 새가 되어 하늘을 수놓았다.

 
​4.
여고 2학년 때,가슴에 연분홍빛으로 물들인 명주실이 감겼다. 늦은 수업이 끝나고도 집에 가는 길마다 돌렸던 물레바퀴. 내 옆에 또 다른 물레를 돌리는 남자가 있었다. 흑진주처럼 빛나는 큰 눈, 페달을 밟는 늘씬한 다리선.
“언제나 이 언덕을 오르시네요. 나무들 노랫소리가 정말 아름다운 언덕이죠. 반가워요. 내 이름은 유(柳)라고 해요."
“아빠가 이 바다에서, 수평선 넘어 섬으로 떠나셨거든요. 내 이름은 윤이에요.”
​“제 아버지도 몇 년 전, 이 나루터에서 섬으로 떠나셨죠. 그 후로 지금까지 소식이 없어요. 매일 언덕을 오르며 아버지를 떠올리죠.”
​나와 이름이 비슷한 그도 가슴속에 흰 명주실을 간직하고 있었다. 서로의 명주실이 엮이며 아름다운 매듭이 만들어질 때, 어느 순간인가 그의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그의 매끈한 허리를 안고 바다에서 불어온 푸른 바람을 마시고 있었다. 마치 아빠의 자전거 뒷자리에 탔던 어릴 때처럼. 어두운 밤이면 자전거 등을 켜고 언덕길에 바람을 만들며 내려갔다. 어둠을 밝혀줄 빛같은 남자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은, 보드라운 비단으로 몸을 감싼 느낌이었다.



​언덕에서 그와 처음으로 입을 맞추던 그 날,우리는 평생 함께 물레를 돌리기로 했다. 자전거 핸들 위에 금반지를 낀 손가락을 얹고 오늘도 언덕을 올라간다. 햇살이 언덕 위에 베일을 벗을 때는 자전거 바구니 안에 정성껏 손으로 꼭 쥐어 만든 주먹밥이 들어 있고, 비가 오는 날에도 우비를 입고 빗물 사이를 지나며 명주실이 풀렸다. 비가 그치면 오색으로 물들인 명주실을 하늘 위에 펼쳐 말렸다.

우리 사이에 사랑의 결실이 하나 둘 맺힌 후에도 언덕길을 오르는 자전거는 멈추지 않았다. 작은 물레들도 돌아가며 명주실 매듭에 고운 색을 넣어줬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루터에 왔다. 아빠, 아빠가 떠나던 날 난 초등학교에 입학했었지. 내 나이만한 우리 아이들이야. 손주들 이만큼 큰 거 보여? 큰 아이가 바닷물에 손을 담근다. 작은 아이도 물에 손을 넣고 물보라를 만든다. 명주실에 쪽빛 물이 들었다.


 
​5.
​내 머리털 같은 은빛 눈발이 언덕 위에 날린다. 어느덧 아이들을 다 시집장가 보낸 지도 20년이 넘었다. 나뭇가지 위에 쌓인 눈송이들은 떨어지고 싶지 않아 나뭇가지를 붙들고 있다. 온 세상이 하얀 명주실에 휘감겨있다. 무릎에 파스를 붙여도 페달을 밟아 물레를 돌리기에는 힘이 부친다.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것만 같던 남편도 저 하늘 너머로 떠났다. 남편의 몸이 명주실 조각이 되어 가벼워지고, 언덕에서 날려 보낸 이후로 언덕을 더 자주 오르며 물레를 돌렸다.

그래도 아빠는 저 멀리 어느 섬에 살아계실 거야. 그때, 내 눈 앞에, 흰 비단이 덮인 땅이 드러났다. 언덕을 지나, 그리움의 나루터에서부터 이어진 땅. 70년에 한번 열린다는 신비의 바닷길이다. 손이 떨려서인지, 언덕에 자전거를 세우려고 해도 자꾸 넘어졌다. 왜 자꾸 넘어지는 거야? 얼른 서! 아빠를 만나러 가야 해! 간신히 자전거를 세우고, 바닷길을 건너갔다. 흰 비단길에 작은 발자국이 수놓인다. 한참 지나자, 눈 쌓인 갈대밭이 보인다. 내가 지날 때마다 눈들이 흩어지며 갈대의 노래를 들려준다. 갈대숲 안에 조각배가 보인다. 조각배 안에 누웠다. 아빠를 수평선 건너편으로 태워다 준 조각배 안에서 아빠의 숨결을 느낀다. 태곳적 양수 속 같은 편안함이 온 몸을 휘감는다.

 
​ ​6.
​저 멀리 아빠가 보인다. 뛰어도 무릎이 아프지 않다. 뛰어갈수록 명주실이 점점 감긴다. 처녀 시절로, 여고시절로, 다시 아빠가 떠난 그 시간으로. 명주실이 다 감겨 실뭉치가 되가면서 눈밭의 발자국이 점점 작아진다. 자전거 타는 법을 알려준 사람, 나와 엄마. 두 여자를 행복하게 해준 사람. 아빠의 품속에서 나는 다시 철부지 아이가 되어 따뜻한 명주 비단 속에 아빠와 내가 함께 몸을 감싸고 있다.

 

 

 

 

 

 

 

 

 

 

 

 

 

 

 

덧) 미카엘 두독 데 비트 감독의 단편애니 <아버지의 딸>을 소설로 각색해봤습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러블리아
러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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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블리아
  • 2015-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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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블리아
  • 2015-02-12
옷가지 속의 사랑

“너 오늘도 옷장 속에서 처자냐? 얼른 1번 룸 손님 안 받아?” 마담 언니의 목소리에 화들짝 깨어난 나는, 옷장에서 아무 옷이나 꺼내서 입고 자다 일어나 볏짚이 되어 있을게 뻔한 머리를 긴 갈색 가발로 가렸다. 이런 옷은 입고 싶지 않은데…….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돈을 벌려면, 그리고 먹고 살아가려면 말이다. 여기서 일하며 진 빚도 엄청나다.   1번 룸의 (진상)고객님은 제법 큰 회사의 부장님 쯤 되는지, 부하 직원처럼 보이는 남자들을 줄줄이 달고 있다. 나이 많은 남자도, 젊은 남자도 하나같이 취해 있다. “어어, 아가씨 예쁘네? 나 STV 김 전무야. 이리 와, 오늘은 나랑 놀자. 팁 짱짱히 챙겨줄게. 아이~ 빼지 말고.” STV. 새벽 늦은 시간에, 채널을 한참 위로 돌려야 나오는 그 케이블 방송. 거기다가도 월정액을 내고 결제해야만 볼 수 있다. 대기실에서도 많이 봤었다. 낯 뜨거운 이야기들을 걸쭉한 입담으로 풀어놓는 성인 토크쇼와, 민망한 미션까지 수행하는 성인용 버라이어티들. 그 방송국 직원들을 직접 만날 줄이야. 김 전무라고 하는 남자는 단단히 선 그것을 자꾸 다리 사이에 밀착시키려 한다. 허리를 끌어안고 부비부비까지……. 최악이다. 그때, 동석한 젊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바로 그였다! 맑은 눈의 남자.   얼마 전, 그는 여장을 하고 룸살롱 아가씨 대기실로 찾아왔다. 촬영 때문에 그런다니 양해해달라고. 케이블 심야 콩트 촬영 중이라서, 옷장에 숨는 미션을 수행해야 한다고 했었다. 그날도 고향집의 엄마 생각에 옷장에서 잠이 들었다. 잠결에 기척이 느껴졌다. 남자의 맑은 눈과 긴 목선이 눈에 들어오자, 그때서야 풀어헤쳐진 가슴골을 눈치 챘다. “헉, 뭐야? 저 남자 변태야?” 여장을 한 곱상한 외모도 타고난 남성미를 숨기진 못했다. 사회자는 자연스럽게 또 다른 미션을 던졌다. “네, 옷장 속에 섹시한 아가씨가 숨어있었군요? 키스해! 키스해! 딥키스! 딥키스!” 처음이었다. 본 적도 없는 여장남자와 입을 맞춘 것도, 내 옷장에 남자가 들어온 것도……. 그리고 남자의 혀를 맛본 것도. 딱 하나 뇌리에 깊게 남은 것은 그의 맑은 눈이었다.     맑은 눈 남자는 자리가 정신없는 틈을 타, 내 손을 잡아끌고 밖으로 나갔다. 맨살에 밤의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었다. 그때, 그가 옷가지 하나를 덮어주었다. 낯익은 냄새가 난다. 옷장 속 나프탈렌 냄새. 그리고 엄마가 만들어준 옷에서만 느낄 수 있는 냄새. 가장 아끼는 옷이 어디로 갔나 했더니, 이 남자가 그날 옷장에서 가지고 갔었나보다. “고생 많으시네요. 추운데 이렇게 짧은 옷을 입었어. 이거 먹고 기운차려요!” 그가 건네준 것은, 향이 좋으면서도 그리움을 탁 쏘는 맛이 있는 모과생강차였다. 엄마의 맛이 나는 모과생강차. 시골집에서 엄마가 떠난 지 몇 년이 흘렀을까. 나는 집에서 엄마가 만든 옷가지들을 챙겨 상경했고, 이런 곳에서까지 일하게 되었다. 내가 입고 싶은 옷은 이런 반짝이에다 등과 가슴골이 움푹 파이고, 짧은 옷이 아니라 엄마가 만

  • 러블리아
  • 2015-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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