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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친하루

  • 작성자 셀린저
  • 작성일 2015-04-22
  • 조회수 234

테이블 건너에 호석이 앉아 있다. 둘이 마주보고 있는 가운데 테이블의 옆쪽에는 영신이 앉아 있다. 영신은 이미 만취해 눈을 감고 있다 어깨에 힘이 풀려 축 늘어져 있다. 온 몸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버린 듯 그의 몸은 의자에 삼켜져 있다.

호석은 낙담한 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 아까부터 핸드폰 문자를 계속 주고 받고 있다. 하지만 한숨을 쉬며 그 위에 핸드폰을 내려놓는다. 회사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는 듯 했다. 무슨 일 때문인지 영 기운이 없다. 처음 입사했을 때 기뻐하던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맞아. 내가 잘 못 한 거. 요즘들어 의욕도 없고. 그런 실수할 떄도 지났거든. 거래처를 착각해서 일정도 엉망이 되었다가 간신히 수습하고."

그는 입술이 떨릴 정도로 한숨을 내뱉는다. 잠시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먼 곳을 보는 그의 눈이 붉게 충혈 되어 있다.

"요즘들어 그렇더라고. 우리 팀, 일도 별로 없고. 있다고 해도 나한테는 안주거든 여기가 내가 일하는 곳 맞나, 뭘 하고 있는 걸까. 의미도 없어 보이고. 정말 오고 싶던 곳 … 맞지. 그래서 진짜 하고 싶은 일, 하고 싶다. 컴퓨터만 멍하니 쳐다보다 메신저로 주식 얘기나 하는 그런 일 말고."

천천히 고개를 그덕인다. 잔을 들어 그에게 따라 줄 것을 청한다 술이 가득 찬 병에서 소주가 흘러 나온다. 그에게 병을 건네 받고 테이블 위에 무안하게 놓여 있는 그의 잔에 술을 따른다. 건배를 하고 술을 들이킨다. 쓰다 . 정말로 쓰다.

"그래서 후회되냐."

그는 고개를 젓는다.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럴 수 없다. 그가 내내 하고 싶어 했던 일은 그것 뿐이었다. 그리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회사 중에서도 최고의 회사였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하고 싶은 일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조차 못할 때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도 회사는 여전히 그의 꿈이었다. 그의 자부심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버지와 가족의 자부심이었다. 후회한다면, 그건 모두에게 미안한 일이 된다. 후회 조차 쉽지 않다.

"그냥 그런 거 있잖아. 난 내내 이 길만 걸었는데 이 길이 옳은 건가 싶고, 내 자리가 맞나 싶고. 정식이 있잖냐, 왜. 걔는 나보다도 늦게 들어왔는데 걔네 부서에서 인정받고 하고 싶은 일 다 한다고 하더라."

옳은 길이라.그런게 있던가. 얼마 전까지는 큰 거래를 성사시켰다며 좋아하던 그. 그는 정말 자신의 일을 하고 있지 않은 걸까. 그때 그는 이상에 젖어 있었지만 이젠 현실로 추락해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끌어 내렸을까. 무언가 큰 것을 이뤄낸 뒤의 조바심은 아닐까. 그래도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준다. 오늘은 그도 나도, 자고 있는 영신도 지친 하루니까.

"그래도 거기서 버티다 보면, 기회가 오겠지. 조바심 내는 것 같다. 괜히 비교하지 말어라. 꼭 남 신경 써야 하는 거 아니잖아. 꼭 인정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야, 주식 올라가면 얼마나 보람찬대. 옳은 길이 아니면 어떻냐. 뻐팅기는 게 중요하지."

오늘 내 하루는 어땠나, 돌이켜 본다. 기억은 술잔 위에서 출렁이는 조명처럼 희미하지만 뜨겁게 비추고 있다.

복지관 행사 중 윷놀이를 하다가, 한 칸을 더 옮겼느니 하는 소등에 싸움이 났다. 심한 말이지만 지는 노을이 더 뜨겁다고 했나. 어르신들은 절대 양보하려 들지 않았다. 봉사 온 고등학생과 대학생들도 당황했는지 토끼눈을 하고 서 있었다. 선배들은 쉽게 싸움을 말리려 들지 않았다. 그저 강 건너 불구경 하는 식이었다. 이런 싸움에 끼어들어봤자 좋을 거 없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놀란 탓에 그 자리에 붙박여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나섰던 게 나였다. 하지만 말리던 중 욕만 먹고 얼굴도 한 대 맞았다. 어디 어르신들 이야기 하는데 끼어드느냐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들은 내게 서로의 억울함과 고집을 토로해댔다. 한 시간을 그 이야기만 듣다 윷놀이는 흐지부지 되었다. 서둘러 다른 차례로 넘어갔지만, 이미 분위기는 싸늘해져 있었다.

아, 괜히 끼어들어서 맞기만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찰나에 선배 한 명이 말했다. 말릴 거면 확실히 말렸어야 하지 않았느냐고. 그말을 듣고 주위가 술렁였다. 나는 멍해졌다. 그 한 마디가 주인 없는 발톱이 되어 나를 공격했다. 내가 틀렸나? 나도 호석처럼 누군가의 자부심이고 싶었다. 혹은 누군가의 자부심이다. 그런데 일을 해놓고도 이런 신세라니. 아 , 이런 말 듣자고 그런 게 아닌데. 이러려고 출근 한 게 아닌데. 이러려고...... 딱 그런 날이었다. 잘했다. 수고했다. 그 한 마디면 됐는데.

이렇게 되지 않으려 했던 날이었다.

아직도 얼얼한 볼을 감싼다. 거, 노인네 힘 한 번 좋으시네. 그래도 맞는 일을 한 거겠지.

"한 건 없어도 힘들긴 한가보다. 참 웃기네.

그가 쓴 웃음을 지으며 술잔을 든다.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고, 내 잔에도 따라준다.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난 한 게 많아서 힘들다."

건배도 없이 곧바로 술을  들이킨다. 술이 위장을 맴돌고 가슴을 덮는다. 또 가슴에서 온 몸으로 퍼져나가며, 온 몸으로 마음이 퍼져나간다. 하루 동안의 마음이 온몸을 맴돈다. 가심이 짊어지고 있던 마음을 온몸이 나눠가진다. 갑자기 피곤이 밀려온다. 풀려오는 눈꺼풀을 애써 잡으며 호석을 본다. 여전히 의자에 삼켜진 채 일어날 기색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웃음이 나온다. 마음이 곳곳으로 퍼진 덕에 가슴에도 빈자리가 생긴 듯하다. 구름을 비집고 햇살이 새어나듯, 가벼운 웃음이다. 건너편 호석도 따라 웃는다. 우리는 좀 더 크게 웃는다.

"그래, 뭘 하든 힘든 건 다 똑 같나 보네.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모르면 어떻겠냐. 내가 하는 일이 내일이지. 미안해 하는 건 술마시고 마누라한테나 해야지."

그렇다 그가 하는 일이 그의 일이다. 적어도 그는 그의 아버지와 가족의 자부심이었다. 그가 또 미안해할 일이라면, 아내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겠지.

"나도, 일이 너무 많아도 그게 내 일인 걸 어쩌냐. 지들이 뭐라고하면 내가 어쩔까."

우리 둘은 대학 시절처럼 킥킥 웃는다. 딱 동네 친구들끼리 논두렁에서 술을 마시던 때처럼. 그때 논두렁 한 가운데 보물섬처럼 떠 있던 정자가 생각난다. 그곳에 앉아서 핸드폰 조명을 켜놓고 술을 마시던 때가 있었다. 벌레를 쫓아내면서도 온갖 벌레의 소리를 들으며 웃던 때가 있었다.  달이 노랗게 세상의 그림자들을 덮었고, 별들은 심해어처럼 반짝거렸다. 구름이 조금 낀 밤 하늘은 파도처럼 바람에 출렁였다. 그에 질세라, 논두렁의 모든 것들이 풀벌레 소리로 흔들렸다. 그 사이를 비집고 집으로 가는 길 위에 우리가 있었다.

잠들어 있던 영신이 비척이며 일어나 두리번 댄다. 아직 잠이 덜 깬 모양이다. 나와 호석이 눈으 마주치고 씩 웃는다. 그리고 영신의 잔에 술을 가득 따른다. 우리의 잔엔 물을 따른다. 취기가 가시지 않은 듯한 목소리로 영신이 건배! 하고 외친다. 술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풀벌레 소리처럼 울려퍼진다. ㅇ리는 물을 들이켜고 영신은 술을 들이킨다. 그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보며 한 번 더 웃는다. 그는 안주 먹을 정신도 못차리고 연신 고개만 흔든다.

"아 , 오늘 진짜 술 안 받네. 자자, 이제 집에 가자고. 내일 출근해야지."

호석이 시계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아아, 이 이상 늦었다가 마누라한테 죽는다. 일어나자. 야 영신아! "

"응? 응.."

"술도 못마시는 녀석이 뭔 술을 그렇게 마셨어."

영신이 일어나고 술집을 나선다. 유난히 밝은 달이 떠는 듯 빛나고 있다. 달빛에 덮인 구름을 보며, 각자 집으로 가는 길으로 걸음을 옮긴다.

 

셀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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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날

오늘은 첫째날이다. 꽤 의미 있는 날이지만 여전히 눈을 뜨기가 힘들다. 가슴 윗부분가지 피로가 짓눌려왔다. 속은 울렁였고, 위장 밑마닥서부터 알코올 냄새가 났다. 어제 먹은 모든 것들이 위액에 실려 혀 맨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렇게 몇 십분이 지났다. 여전히 눈꺼풀은 무거웠고, 속은 좀 진정이 되었다. 눈 앞이 컴컴했다. 피로의 색은 검은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몇 시간이나 되었을까. 점심쯤이면, 하고 손을 뻗는다. 이불 안을 더듬거리며 핸드폰을 찾는다. 허리 언저리 쯤에서 핸드폰이 잡혔다. 그대로 핸드폰을 켜 메세지를 확인했다. 친구들에게 잘들어 갔냐는 문자가 와 있었다. 밑에 윤이라고 되어있는 채팅창에는 아무런 메세지도 와 있지 않았다. 나 술마셔, 이 말은 마지막으로 차갑게 식어 있었다. 혹시나 해서 보낸 말이었다. 평소에 술 마실 때도 습관처럼 꼭 술마시는 중간에 보내던 말이었다. 그러면 윤은 그럼 내일 해장국 먹자, 하는 말을 건네오곤 했다. 머리가 아파왔다. 핸드폰을 구석에 내팽게 치고 몸을 돌려 누웠다. 술기운 속에 어제 기억이 떠돌았다.   '어제 울었나'   '아…울었지.'   처음에는 그냥 울컥대는 마음에 목에 쥐가 날 것 같았을 뿐이었다. 그러자 눈가가 축축해져 왔다. 친구 중, 한 명이 말했다.   "뭘 또 차였다고 우냐."   그들 간에 웃음이 오갔다. 그들이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상대의 슬픔을 정면으로 받기에는 아직 우린 좀 준비가 덜 되었다. 이제 막 대학교 1학년 티를 벗으려고 하는 떄이다. 어른인척 쿨한척, 진지해보이면서도 가벼운 것이 좋았다. 그렇게 술 몇 잔을 주고 받다가, 감정이 요동쳤다. 한척의 돛단배가 된 듯 커다란 감정에 뒤집힐 것 같았다. 웃으려고 했는데, 잘못해서 울음이 터져나왔다. 목구멍에 쥐가 풀렸고, 나는 엉엉 울었다. 친구들은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봤고, 난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한참 옆에 앉은 친구가 건네는 휴지를 받으며 훌쩍였다. 지금 생각하니 얼굴이 빨게졌다.   슬픔은 명치에서 시작되는 건가. 명치가 파르르 떨리자 미간이 좁혀졌다. 눈가가 축축해졌지만 참을만 했다.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모자를 쓰고, 어제 옷 그대로 바깥에 나간다. 시간은 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이미 해는 하늘 위에 서 있었다. 자주 가는 해장국집에 가려고 길을 나섰다. 해장국집이 있는 곳까지는 두 정거장 채 안되기 때문에 버스정류장을 지나쳐 걸었다. 걷다보니 왠지 거북한 기분이 들었다. 걸음을 멈추고 버스정류장에서 조금 앞에 있는 아파트 단지의 입구를 봤다. 윤은 항상 저곳에서 기다렸다. 우리는 너무 기뻐하지도 아예 차갑지도 않는 정도로 서로를 반겼다. 그리고 어젯밤에 뭐했는지, 아침에 어땠는지를 얘기했다. 나는 집에서 나올 때 고양이들이 참새를 쫓던 이야기나, 옆집 아줌마와 아저씨가 아침마다 싸우는 이야기,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하는 10살 정도 되보이는 남자애의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그러면 윤은 가만히 이야기를 듣다가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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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벅 저벅, 오늘도 언덕을 오른다. 허리를 굽히고 언덕 끝의 지평선이 접어 놓은 것 같은 바다를 향해 걷는다. 걸음을 멈추고 바다 앞에 선다. 이른 새벽, 낮과 밤의 사이를 가장 잘 머금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바다일 것이다. 제 몸을 출렁이며 밤의 색과 낮의 색으로 번갈아 움직인다. 또한 별을 머금고 있다. 온 세상의 모든 별들이 심해어처럼 바다 위에서 자신의 존재를 번쩍인다. 구름은 별들이 헤엄친 후에 인 포말같다. 아버지의 사촌인 김씨 아저씨를 만나러 왔을 때 보았던 바다와는 다르다. 그때 바다는 겨울을 머금고 있었다. 추수가 끝나고 찬바람이 일기 시작했을 때였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나를 데리고 바다로 왔다. 어릴적부터 농사 때문에 바빴던 우리 가족에겐 가족여행이란 건 떠올리기 힘들었다. 그래서 더 들떴던 것 같다. 버스를 몇 번이고 갈아타 도착한 그곳은 이름 없는 어촌이었다. 김씨 아저씨는 오징어잡이를 생업으로 하고 계셨다고 했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평생을 농사를 지었듯이, 그는 평생 동해 바다를 떠난 적이 없다고 했다. 겨울 바다는 신기했다. 아무도 없는 부두 위에서 눈과 같은 색으로 철벅이고 있었다. 학교에서 바닷물이 얼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 추운 날씨에도 흐르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달달한 비린내가 코를 가득 채웠다. 바다는 거대한 저수지 같기도 했고, 하늘이 베껴 놓은 스케치북 같기도 했다. 멀리 수평선을 쳐다보았을 땐, 신이 하늘을 반으로 접어놓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난 수평선 끝을 향해 손을 흔들며 부둣가를 힘껏 내질렀다. 바다에 눈이 팔린 나를 김씨 아저씨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옆에 다가와 말씀하셨다. 바다 신기하지? 네! 그, 엄청 커요 바다는 많은 걸 품고 있어. 그걸 끌어 올리는 게 어부야   아저씨 말을 들으며 내 모습이 비췄다, 부서지는 바다를 보았다. 세상 모든 것이 비췄다 부서졌다. 태양이 부서졌다, 꽃처럼 핀다. 겨울바다는 쓸쓸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웅장했다. 언젠가 어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가 물으셨다. 바다 굉장하지 ? 나는 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언젠가 저도 바다를 끌어올리는 사람이 됄래요! 아버지는  허허, 웃으셨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모습이 씁쓸해 보이기도 했다.   달을 향해 절을 한다. 하늘 위에 뜬 달이 아니라, 바다 위에 피어난 달을 향해 절을 한다. 어머니, 어머니, 부르며 두 번 절을 마친다. 기력이 빠져 자리에 앉아버린다. 모든 것을 품고 있는 바다는 어머니도 품고 있을 것이다. 부모님은 평생을 농사로 보내신 분들이다. 나또한 그랬다. 평생을 농삿일을 돕는 데에 써왔다. 그러나 나는 이제 어부다. 배에 타고 바다를 끌어 올린다. 남들보다 이른 시각에 일어나 배를 탄다. 나를 보조로 써주시는 김씨 아저씨의 배에서 그물을 가지런히 하고 잡일 거리를 도와드린다. 오징어잡이를 하는 김씨 아저씨의 배는 바다 위에서도 유난히 번쩍인다. 그것마저도 바다는 삼켜버린다. 그 불빛 때문에 오징어들은 놀라 정신을 차리지

  • 셀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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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자명종이 울리는 소리에 잠을 깬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 정신은 천장만을 바라본다. 몸을 일으켜 이불을 걷어낸다. 창백한 겨울 햇살이 책상위에 아른 거린다. 이른 아침 첫 차가 처량한 도로 위에 걸음을 뗀다. 몇몇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모두가 잠든 시간에 몸을 일으킨다. 내게도 오늘이 딱 그런 날이다. 준비해야 할 게 많은 날이다. 간단하게 세면을 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옥스퍼드 셔츠에 검정색 니트와 코트. 최대한 단정하게 보여야 하는 날이다.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며 창밖을 본다. 앞산의 정수리가 하얗다. 고요하고 단정해 보인다. 그 속에 깔끔한 모습으로 한철 잎들을 떠나보낸 나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거울을 보고 빗질을 한다. 머리 한 가닥 튀어나오지 않도록 벅벅 머리를 쓸어내린다. 나뭇잎들은 작별을 고할 때 붉은 모습으로 나무를 떠나간다. 나무들은 작별을 고할 때 단정한 나뭇가지들로 나뭇잎을 보낸다. 언제나 마지막은 기억에 남는 법이다.   문을 열고 집을 나선다. 계속해서 걷던 길 위로 다시 발걸음을 더듬는다. 언젠가는 일을 하러 가는 길이었고, 언젠가는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 또 언젠가는……. 또 언젠가는 당신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전혀 다른 길이다.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이지만, 당신을 보내러 가는 길이기도 하다. 당신을 보러 가던 길을 되감는다면 다른 모습의 당신이 보일까 기대한다. 나무 하나와 BUS라고 적혀 있는 표지가 달린 철봉 하나 뿐인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이 휑뎅그렁한 버스정류장에는 나 혼자 뿐이다. 고개를 떨어뜨리고 땅을 툭툭 차던 중 문득 나무 아래 무언가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정확히 추락해 있었다. 얼어 있는 철새 한 마리였다. 무리에서 빠져나와 제대로 떠나지 못한 모양이다. 무엇에 그리 미련이 남아 떠나가지 못한 걸까. 제때 이별하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되는 것인가.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면서 몸에 열이 난다. 잠시의 기대에 대한 보복인가. 길게 한숨을 내쉰다. 하얗게 날아오르는 숨 뒤로 버스가 멈춘다.   버스에 타 맨 앞자리 앉는다. 뒤를 둘러보니 세 명의 사람이 있다. 두 노부부와 한명의 학생이다. 노부부는 나란히 앉아 손을 꼭 잡고 있다. 저들도 헤어질 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다만 그 시간이 오지 않았다. 문득 창에 기대어 꾸벅 꾸벅 졸고 있는 학생에게 눈이 간다. 저들도 저 애 같은 나이가 있었겠지. 그 때는 서로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할아버지는 일을 나설 때나 학교 가는 길에 어떤 여인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길을 돌아서기도 했을 것이다. 할머니는 언젠가 심부름을 나섰다 마주친 누군가를 그리며 바느질을 하던 시절이 있었을 거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 아무 생각 없이도 그냥 길을 돌아서게 되어있었을 것이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바느질을 하게 되어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서로를 만난 것이다. 창에 기대 눈을 감는다. 곧 잠이 든다. 맨발로 기억을 더듬는다. 언젠가 나무 밑 벤치에 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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