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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 작성자 셀린저
  • 작성일 2015-05-24
  • 조회수 241

자명종이 울리는 소리에 잠을 깬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 정신은 천장만을 바라본다. 몸을 일으켜 이불을 걷어낸다. 창백한 겨울 햇살이 책상위에 아른 거린다. 이른 아침 첫 차가 처량한 도로 위에 걸음을 뗀다. 몇몇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모두가 잠든 시간에 몸을 일으킨다. 내게도 오늘이 딱 그런 날이다.

준비해야 할 게 많은 날이다. 간단하게 세면을 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옥스퍼드 셔츠에 검정색 니트와 코트. 최대한 단정하게 보여야 하는 날이다.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며 창밖을 본다. 앞산의 정수리가 하얗다. 고요하고 단정해 보인다. 그 속에 깔끔한 모습으로 한철 잎들을 떠나보낸 나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거울을 보고 빗질을 한다. 머리 한 가닥 튀어나오지 않도록 벅벅 머리를 쓸어내린다. 나뭇잎들은 작별을 고할 때 붉은 모습으로 나무를 떠나간다. 나무들은 작별을 고할 때 단정한 나뭇가지들로 나뭇잎을 보낸다. 언제나 마지막은 기억에 남는 법이다.

 

문을 열고 집을 나선다. 계속해서 걷던 길 위로 다시 발걸음을 더듬는다. 언젠가는 일을 하러 가는 길이었고, 언젠가는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 또 언젠가는……. 또 언젠가는 당신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전혀 다른 길이다.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이지만, 당신을 보내러 가는 길이기도 하다. 당신을 보러 가던 길을 되감는다면 다른 모습의 당신이 보일까 기대한다.

나무 하나와 BUS라고 적혀 있는 표지가 달린 철봉 하나 뿐인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이 휑뎅그렁한 버스정류장에는 나 혼자 뿐이다. 고개를 떨어뜨리고 땅을 툭툭 차던 중 문득 나무 아래 무언가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정확히 추락해 있었다. 얼어 있는 철새 한 마리였다. 무리에서 빠져나와 제대로 떠나지 못한 모양이다. 무엇에 그리 미련이 남아 떠나가지 못한 걸까. 제때 이별하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되는 것인가.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면서 몸에 열이 난다. 잠시의 기대에 대한 보복인가. 길게 한숨을 내쉰다. 하얗게 날아오르는 숨 뒤로 버스가 멈춘다.

 

버스에 타 맨 앞자리 앉는다. 뒤를 둘러보니 세 명의 사람이 있다. 두 노부부와 한명의 학생이다. 노부부는 나란히 앉아 손을 꼭 잡고 있다. 저들도 헤어질 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다만 그 시간이 오지 않았다. 문득 창에 기대어 꾸벅 꾸벅 졸고 있는 학생에게 눈이 간다. 저들도 저 애 같은 나이가 있었겠지. 그 때는 서로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할아버지는 일을 나설 때나 학교 가는 길에 어떤 여인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길을 돌아서기도 했을 것이다. 할머니는 언젠가 심부름을 나섰다 마주친 누군가를 그리며 바느질을 하던 시절이 있었을 거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 아무 생각 없이도 그냥 길을 돌아서게 되어있었을 것이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바느질을 하게 되어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서로를 만난 것이다. 창에 기대 눈을 감는다. 곧 잠이 든다. 맨발로 기억을 더듬는다.

언젠가 나무 밑 벤치에 앉아 싸구려 자판기 커피를 마시던 때가 있었다. 그렇게 그 밑에서 단풍을 맞이하며 누군가와 사소한 대화를 나누곤 했다. 이야기를 하느라 커피는 금방 식어버렸다. 나뭇잎이 은은하게 커피 잔 위에 흔들렸다. 나뭇잎 사이로 비집고 나온 햇빛은 달달한 자판기 커피냄새가 벤 것 같았다.

언젠가는 혼자서 커피를 마시게 될 것이다. 담담하게 단풍을 맞고 있을 것이다. 식지 않은 커피를 마실 것이다. 더 이상 자판기 커피를 마시지 않게 되었을 것이고, 햇빛에는 커피의 쓴 맛도 같이 베어들 것이다. 그러다 비가 내리는 날도 있을 것이다.

 

어느새 종점에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이곳이 어딘지 둘러본다. 처음 오는 곳이었다. 이 버스를 타고 한 번도 종점에 오지 않았다는 게 새삼 놀라웠다. 그러고 보면 그 사람과 오랜 기간 만나면서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보는 일. 당신은 항상 하자고 했던 일이다. 그런데 난 왜 그렇게 하기가 싫었을까.

 

막 제대를 했을 때였다. 마땅히 할 일이 없던 때였다. 그만큼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던 때였다. 군대 안에서 가지고 있던 막막함을 그대로 가지고 나왔다. 그렇다고 기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부모님께는 죄송했고 친구들에게는 쪽팔리거나 모두 같은 처지였으니까. 흑백사진처럼 억지 활기를 띈 듯한 때였다.

그날도 아무것도 할 것이 없어 공원에 산책을 나왔을 때다. 나무 아래 있는 벤치에 누군가 앉아 있을 게 보였다. 나이는 나보다 어려 보이는 여자 아이었다. 그녀는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주변 벤치에는 양복을 입고 도시락을 먹는 아저씨도 있었고, 햇볕을 맞으며 소년처럼 웃고 있는 할아버지도 있었고, 장기를 두는 어르신들도 있었다. 아이들과 산책하기 위해 나온 젊은 엄마도 있었다. 아이들은 호수가 근처에서 떨어져 나온 오리들은 따라갔다. 뒤뚱대며 어설프게 걷는 모습이 오리와 같았다. 새끼 오리들이 어미 오리를 쫓아가는 것 같은 풍경이었다.

그 속에서 그녀를 만났다. 우리는 같은 풍경 안에 들어와 있었다. 꾸벅꾸벅 조는 그녀는 누구를 기다리는 것 같진 않았다. 아니면 누구를 기다리다 잠이 든 걸까. 꽤 깊게 잠든 듯 그녀는 앞으로 쓰러질 듯 했다. 주변은 우리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좀 더 가까이 보고 싶었다. 그 때 휘청 하고 그녀의 머리가 내 쪽으로 쏟아졌다. 황급히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를 받쳐줬다. 적당히 따뜻했다.

그녀는 잠이 덜 깬 듯 눈을 반쯤 감고 나를 보았다. 그러다 그냥 일어나 가려고 했다. 마침 벤치위에 남아 있던 가방이 눈에 띄었다. 이 풍경에서 나가려는 그녀를 급하게 잡았다.

“저기요! 그쪽 가방이요.”

얼떨결에 손을 잡아버렸다. 그녀는 내 쪽을 한참 보더니 꾸벅 인사를 했다.

“그 저랑 점심 같이 안 드실래요? 제가 사드릴게요.”

내가 말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듯 했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신 밥을 제가 살게요 ”

그녀가 웃어보였다. 노을같이 빨갛게 물든 얼굴이 웃었다. 흑백 같던 삶에 노을빛 같은 그녀가 끼어들었다.

 

어쩌면 종점까지 가지 않으려 했던 건 처음이 노을 같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어느 것 보다 붉은 빛이었던 그녀. 종점에 다다르면 끝에 다다른 다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노을 같은 그녀는 금세 바다 위로 몸을 숨길 것 같았다.

굳이 그렇게 기를 쓰며 오지 않으려 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다. 어찌 되었건 때가 되니 오게 돼버렸다. 그럴 때인 것이다. 끝에 다다를 때. 왜 헤어진 걸까, 라는 질문은 모두 무의미 하다. 노을이 지고 밤이 왔다.

 

약속장소로 걸음을 뗀다 꾸역꾸역 한 걸음 한 걸음 걷는다. 제법 멀리 와버렸지만 괜찮다 시간은 많다. 새벽빛이 사라지고 완연한 아침이다. 그래도 시간은 많다. 종점이 있는 언덕을 내려와 도보를 걷는다. 여전히 세상은 고요하다. 도보 끝에 다리가 보인다. 다리 위로 차 한 대가 매섭게 지나간다. 차 소리를 따라 한 걸음씩 옮긴다. 차 소리에 고요가 묻혀간다. 처량해보이던 거리도 어느새 가득 차 있다. 차가 빠른 속도로 휭 자나가면 그 방향으로 바람이 불어왔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정신이 멍해진다. 나를 담담하게 만들던 모든 것이 차 소리에 묻힌다. 고요가 깨진다.

그러자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수가 없다.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묵직한 것이 올라왔다. 머리를 어지럽혔다. 다리 아래로 강이 햇볕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마주하게 될 우리를 생각한다. 나를 담담하게 하던 고요에 그녀가 집어삼켜질 것 같았다.

간신히 걸음을 뗀다. 그러자 이내 참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차가 지나갈 때마다 불길한 휘파람 소리가 났다. 눈물을 옮겨가며 황급히 다리를 빠져 나왔다.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그녀가 먼저 와 있다. 카페 가장 구석진 곳에 앉아 있다. 여전한 모습이었다.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조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저 고개를 들 수 없는 것뿐이다. 나도 고개를 떨어뜨린 채 자리에 앉는다. 그러자 종업원이 물을 한 컵 더 내왔다. 여전히 그녀는 아래를 보고 있다.

“왔어?”

그녀가 묻는다.

“응”

목이 메인다. 물을 한 잔 들이킨다. 그렇게 몇 분을 연신 물만 들이킨다. 뭐라고 말해야할까. 그녀가 머리를 쓸어내리며 밖을 본다. 사실 이곳에선 창밖이 보이지 않는다. 그냥 위쪽에 나타난 허공만 보일 뿐이다. 그래도 그녀는 무언가 보이는 듯 시선을 던지고 있다. 꼭 그래야 하는 것처럼 억지로라도 그러고 있다.

첫 만남에서 만졌던 그녀의 이마가 조명을 받아 빛나고 있다. 그리고 이마를 통해 느꼈던 따뜻함, 부드러운 머리칼. 너무 만지고 싶다. 손이 나갈 것만 같다. 그래도 참아야한다. 아무 소리 없이 참고 준비하는 거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우리는 어떨까. 이렇게 있으면 아직 연인 같을까.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모습이 처량해 보이진 않을까. 문득 예전에 공원을 걷는 중에 보았던 조각들이 떠오른다. 그들은 서로에게 등을 돌린 채 멈춰 있었다. 서로에게 고개 숙인 채 멈춰 있는 우리처럼.

버스 정류장에 죽어 있던 새가 떠오른다. 그들처럼 떠나지도 않고 남겨지지도 않은 채로 있을 순 없다. 자, 내가 일어난다. 이별을 시작된다. 그녀도 따라 일어난다. 우리는 카페를 나온다. 그리고 그녀가 내 쪽을 본다. 이번엔 내 쪽에서 먼저 고개를 떨군다. 눈을 감고 등을 돌려 걷는다. 일부러 뒤를 돌아보이 않는다. 귓가에 차가 내는 휘파람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하마터면 적막이 깨져 울 뻔 했다. 혹 이 휘파람 소리가 그녀의 울음소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걷는다. 이별이 끝나간다. 그러자 소리가 점점 멎어 갔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지며 고요해진다.

길게 한 숨이 나온다. 입김이 숨을 따라 둥실 떠올랐다가 아무것도 없는 시란 하늘 속에서 사라진다. 한참을 걸어 집에 도착한다. 아무 말도 없는 고요한 밤 속에 하루를 보낸다.

셀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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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날

오늘은 첫째날이다. 꽤 의미 있는 날이지만 여전히 눈을 뜨기가 힘들다. 가슴 윗부분가지 피로가 짓눌려왔다. 속은 울렁였고, 위장 밑마닥서부터 알코올 냄새가 났다. 어제 먹은 모든 것들이 위액에 실려 혀 맨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렇게 몇 십분이 지났다. 여전히 눈꺼풀은 무거웠고, 속은 좀 진정이 되었다. 눈 앞이 컴컴했다. 피로의 색은 검은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몇 시간이나 되었을까. 점심쯤이면, 하고 손을 뻗는다. 이불 안을 더듬거리며 핸드폰을 찾는다. 허리 언저리 쯤에서 핸드폰이 잡혔다. 그대로 핸드폰을 켜 메세지를 확인했다. 친구들에게 잘들어 갔냐는 문자가 와 있었다. 밑에 윤이라고 되어있는 채팅창에는 아무런 메세지도 와 있지 않았다. 나 술마셔, 이 말은 마지막으로 차갑게 식어 있었다. 혹시나 해서 보낸 말이었다. 평소에 술 마실 때도 습관처럼 꼭 술마시는 중간에 보내던 말이었다. 그러면 윤은 그럼 내일 해장국 먹자, 하는 말을 건네오곤 했다. 머리가 아파왔다. 핸드폰을 구석에 내팽게 치고 몸을 돌려 누웠다. 술기운 속에 어제 기억이 떠돌았다.   '어제 울었나'   '아…울었지.'   처음에는 그냥 울컥대는 마음에 목에 쥐가 날 것 같았을 뿐이었다. 그러자 눈가가 축축해져 왔다. 친구 중, 한 명이 말했다.   "뭘 또 차였다고 우냐."   그들 간에 웃음이 오갔다. 그들이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상대의 슬픔을 정면으로 받기에는 아직 우린 좀 준비가 덜 되었다. 이제 막 대학교 1학년 티를 벗으려고 하는 떄이다. 어른인척 쿨한척, 진지해보이면서도 가벼운 것이 좋았다. 그렇게 술 몇 잔을 주고 받다가, 감정이 요동쳤다. 한척의 돛단배가 된 듯 커다란 감정에 뒤집힐 것 같았다. 웃으려고 했는데, 잘못해서 울음이 터져나왔다. 목구멍에 쥐가 풀렸고, 나는 엉엉 울었다. 친구들은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봤고, 난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한참 옆에 앉은 친구가 건네는 휴지를 받으며 훌쩍였다. 지금 생각하니 얼굴이 빨게졌다.   슬픔은 명치에서 시작되는 건가. 명치가 파르르 떨리자 미간이 좁혀졌다. 눈가가 축축해졌지만 참을만 했다.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모자를 쓰고, 어제 옷 그대로 바깥에 나간다. 시간은 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이미 해는 하늘 위에 서 있었다. 자주 가는 해장국집에 가려고 길을 나섰다. 해장국집이 있는 곳까지는 두 정거장 채 안되기 때문에 버스정류장을 지나쳐 걸었다. 걷다보니 왠지 거북한 기분이 들었다. 걸음을 멈추고 버스정류장에서 조금 앞에 있는 아파트 단지의 입구를 봤다. 윤은 항상 저곳에서 기다렸다. 우리는 너무 기뻐하지도 아예 차갑지도 않는 정도로 서로를 반겼다. 그리고 어젯밤에 뭐했는지, 아침에 어땠는지를 얘기했다. 나는 집에서 나올 때 고양이들이 참새를 쫓던 이야기나, 옆집 아줌마와 아저씨가 아침마다 싸우는 이야기,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하는 10살 정도 되보이는 남자애의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그러면 윤은 가만히 이야기를 듣다가 살

  • 셀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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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가

저벅 저벅, 오늘도 언덕을 오른다. 허리를 굽히고 언덕 끝의 지평선이 접어 놓은 것 같은 바다를 향해 걷는다. 걸음을 멈추고 바다 앞에 선다. 이른 새벽, 낮과 밤의 사이를 가장 잘 머금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바다일 것이다. 제 몸을 출렁이며 밤의 색과 낮의 색으로 번갈아 움직인다. 또한 별을 머금고 있다. 온 세상의 모든 별들이 심해어처럼 바다 위에서 자신의 존재를 번쩍인다. 구름은 별들이 헤엄친 후에 인 포말같다. 아버지의 사촌인 김씨 아저씨를 만나러 왔을 때 보았던 바다와는 다르다. 그때 바다는 겨울을 머금고 있었다. 추수가 끝나고 찬바람이 일기 시작했을 때였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나를 데리고 바다로 왔다. 어릴적부터 농사 때문에 바빴던 우리 가족에겐 가족여행이란 건 떠올리기 힘들었다. 그래서 더 들떴던 것 같다. 버스를 몇 번이고 갈아타 도착한 그곳은 이름 없는 어촌이었다. 김씨 아저씨는 오징어잡이를 생업으로 하고 계셨다고 했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평생을 농사를 지었듯이, 그는 평생 동해 바다를 떠난 적이 없다고 했다. 겨울 바다는 신기했다. 아무도 없는 부두 위에서 눈과 같은 색으로 철벅이고 있었다. 학교에서 바닷물이 얼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 추운 날씨에도 흐르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달달한 비린내가 코를 가득 채웠다. 바다는 거대한 저수지 같기도 했고, 하늘이 베껴 놓은 스케치북 같기도 했다. 멀리 수평선을 쳐다보았을 땐, 신이 하늘을 반으로 접어놓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난 수평선 끝을 향해 손을 흔들며 부둣가를 힘껏 내질렀다. 바다에 눈이 팔린 나를 김씨 아저씨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옆에 다가와 말씀하셨다. 바다 신기하지? 네! 그, 엄청 커요 바다는 많은 걸 품고 있어. 그걸 끌어 올리는 게 어부야   아저씨 말을 들으며 내 모습이 비췄다, 부서지는 바다를 보았다. 세상 모든 것이 비췄다 부서졌다. 태양이 부서졌다, 꽃처럼 핀다. 겨울바다는 쓸쓸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웅장했다. 언젠가 어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가 물으셨다. 바다 굉장하지 ? 나는 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언젠가 저도 바다를 끌어올리는 사람이 됄래요! 아버지는  허허, 웃으셨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모습이 씁쓸해 보이기도 했다.   달을 향해 절을 한다. 하늘 위에 뜬 달이 아니라, 바다 위에 피어난 달을 향해 절을 한다. 어머니, 어머니, 부르며 두 번 절을 마친다. 기력이 빠져 자리에 앉아버린다. 모든 것을 품고 있는 바다는 어머니도 품고 있을 것이다. 부모님은 평생을 농사로 보내신 분들이다. 나또한 그랬다. 평생을 농삿일을 돕는 데에 써왔다. 그러나 나는 이제 어부다. 배에 타고 바다를 끌어 올린다. 남들보다 이른 시각에 일어나 배를 탄다. 나를 보조로 써주시는 김씨 아저씨의 배에서 그물을 가지런히 하고 잡일 거리를 도와드린다. 오징어잡이를 하는 김씨 아저씨의 배는 바다 위에서도 유난히 번쩍인다. 그것마저도 바다는 삼켜버린다. 그 불빛 때문에 오징어들은 놀라 정신을 차리지

  • 셀린저
  • 2015-07-15
지친하루

테이블 건너에 호석이 앉아 있다. 둘이 마주보고 있는 가운데 테이블의 옆쪽에는 영신이 앉아 있다. 영신은 이미 만취해 눈을 감고 있다 어깨에 힘이 풀려 축 늘어져 있다. 온 몸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버린 듯 그의 몸은 의자에 삼켜져 있다. 호석은 낙담한 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 아까부터 핸드폰 문자를 계속 주고 받고 있다. 하지만 한숨을 쉬며 그 위에 핸드폰을 내려놓는다. 회사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는 듯 했다. 무슨 일 때문인지 영 기운이 없다. 처음 입사했을 때 기뻐하던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맞아. 내가 잘 못 한 거. 요즘들어 의욕도 없고. 그런 실수할 떄도 지났거든. 거래처를 착각해서 일정도 엉망이 되었다가 간신히 수습하고." 그는 입술이 떨릴 정도로 한숨을 내뱉는다. 잠시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먼 곳을 보는 그의 눈이 붉게 충혈 되어 있다. "요즘들어 그렇더라고. 우리 팀, 일도 별로 없고. 있다고 해도 나한테는 안주거든 여기가 내가 일하는 곳 맞나, 뭘 하고 있는 걸까. 의미도 없어 보이고. 정말 오고 싶던 곳 … 맞지. 그래서 진짜 하고 싶은 일, 하고 싶다. 컴퓨터만 멍하니 쳐다보다 메신저로 주식 얘기나 하는 그런 일 말고." 천천히 고개를 그덕인다. 잔을 들어 그에게 따라 줄 것을 청한다 술이 가득 찬 병에서 소주가 흘러 나온다. 그에게 병을 건네 받고 테이블 위에 무안하게 놓여 있는 그의 잔에 술을 따른다. 건배를 하고 술을 들이킨다. 쓰다 . 정말로 쓰다. "그래서 후회되냐." 그는 고개를 젓는다.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럴 수 없다. 그가 내내 하고 싶어 했던 일은 그것 뿐이었다. 그리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회사 중에서도 최고의 회사였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하고 싶은 일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조차 못할 때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도 회사는 여전히 그의 꿈이었다. 그의 자부심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버지와 가족의 자부심이었다. 후회한다면, 그건 모두에게 미안한 일이 된다. 후회 조차 쉽지 않다. "그냥 그런 거 있잖아. 난 내내 이 길만 걸었는데 이 길이 옳은 건가 싶고, 내 자리가 맞나 싶고. 정식이 있잖냐, 왜. 걔는 나보다도 늦게 들어왔는데 걔네 부서에서 인정받고 하고 싶은 일 다 한다고 하더라." 옳은 길이라.그런게 있던가. 얼마 전까지는 큰 거래를 성사시켰다며 좋아하던 그. 그는 정말 자신의 일을 하고 있지 않은 걸까. 그때 그는 이상에 젖어 있었지만 이젠 현실로 추락해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끌어 내렸을까. 무언가 큰 것을 이뤄낸 뒤의 조바심은 아닐까. 그래도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준다. 오늘은 그도 나도, 자고 있는 영신도 지친 하루니까. "그래도 거기서 버티다 보면, 기회가 오겠지. 조바심 내는 것 같다. 괜히 비교하지 말어라. 꼭 남 신경 써야 하는 거 아니잖아. 꼭 인정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야, 주식 올라가면 얼마나 보람찬대. 옳은 길이 아니면 어떻냐. 뻐팅기는 게 중요하지." 오늘 내 하루는 어땠나, 돌이켜 본다. 기

  • 셀린저
  • 2015-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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