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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날

  • 작성자 셀린저
  • 작성일 2015-08-09
  • 조회수 229

오늘은 첫째날이다. 꽤 의미 있는 날이지만 여전히 눈을 뜨기가 힘들다. 가슴 윗부분가지 피로가 짓눌려왔다. 속은 울렁였고, 위장 밑마닥서부터 알코올 냄새가 났다. 어제 먹은 모든 것들이 위액에 실려 혀 맨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렇게 몇 십분이 지났다. 여전히 눈꺼풀은 무거웠고, 속은 좀 진정이 되었다. 눈 앞이 컴컴했다. 피로의 색은 검은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몇 시간이나 되었을까. 점심쯤이면, 하고 손을 뻗는다. 이불 안을 더듬거리며 핸드폰을 찾는다. 허리 언저리 쯤에서 핸드폰이 잡혔다. 그대로 핸드폰을 켜 메세지를 확인했다. 친구들에게 잘들어 갔냐는 문자가 와 있었다. 밑에 윤이라고 되어있는 채팅창에는 아무런 메세지도 와 있지 않았다.

나 술마셔, 이 말은 마지막으로 차갑게 식어 있었다.

혹시나 해서 보낸 말이었다. 평소에 술 마실 때도 습관처럼 꼭 술마시는 중간에 보내던 말이었다. 그러면 윤은 그럼 내일 해장국 먹자, 하는 말을 건네오곤 했다. 머리가 아파왔다. 핸드폰을 구석에 내팽게 치고 몸을 돌려 누웠다. 술기운 속에 어제 기억이 떠돌았다.

 

'어제 울었나'

 

'아…울었지.'

 

처음에는 그냥 울컥대는 마음에 목에 쥐가 날 것 같았을 뿐이었다. 그러자 눈가가 축축해져 왔다. 친구 중, 한 명이 말했다.

 

"뭘 또 차였다고 우냐."

 

그들 간에 웃음이 오갔다. 그들이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상대의 슬픔을 정면으로 받기에는 아직 우린 좀 준비가 덜 되었다. 이제 막 대학교 1학년 티를 벗으려고 하는 떄이다. 어른인척 쿨한척, 진지해보이면서도 가벼운 것이 좋았다.

그렇게 술 몇 잔을 주고 받다가, 감정이 요동쳤다. 한척의 돛단배가 된 듯 커다란 감정에 뒤집힐 것 같았다. 웃으려고 했는데, 잘못해서 울음이 터져나왔다. 목구멍에 쥐가 풀렸고, 나는 엉엉 울었다.

친구들은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봤고, 난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한참 옆에 앉은 친구가 건네는 휴지를 받으며 훌쩍였다. 지금 생각하니 얼굴이 빨게졌다.

 

슬픔은 명치에서 시작되는 건가. 명치가 파르르 떨리자 미간이 좁혀졌다. 눈가가 축축해졌지만 참을만 했다.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모자를 쓰고, 어제 옷 그대로 바깥에 나간다. 시간은 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이미 해는 하늘 위에 서 있었다. 자주 가는 해장국집에 가려고 길을 나섰다.

해장국집이 있는 곳까지는 두 정거장 채 안되기 때문에 버스정류장을 지나쳐 걸었다. 걷다보니 왠지 거북한 기분이 들었다. 걸음을 멈추고 버스정류장에서 조금 앞에 있는 아파트 단지의 입구를 봤다. 윤은 항상 저곳에서 기다렸다. 우리는 너무 기뻐하지도 아예 차갑지도 않는 정도로 서로를 반겼다. 그리고 어젯밤에 뭐했는지, 아침에 어땠는지를 얘기했다. 나는 집에서 나올 때 고양이들이 참새를 쫓던 이야기나, 옆집 아줌마와 아저씨가 아침마다 싸우는 이야기,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하는 10살 정도 되보이는 남자애의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그러면 윤은 가만히 이야기를 듣다가 살며시 웃었다. 그게 좋아서 나도 웃곤 했었다.

 

모두 생각하다보니 이 길을 걷는 게 좀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을 지난 뒤, 다시 뒤로 걸어와 그 해장국 집에 갔다. 도착하고 보니 1시 30분이다.  이미 사람들은 밥을 먹고 자리를 비웠다. 이모는 열심히 상을 치우고 있었다. 나는 조금 미안한 얼굴로 가게 문을 열었다.

 

"이모 저 왔어요."

 

쟁반 가득 뚝배기를 올리고 있는 이모가 날 반겼다. 나는 이모한테 가 쟁반을 빼앗아 주방으로 옮겨다 놓았다. 한시를 노았다는 듯 그녀는 땀을 훔쳤다.

 

"아이고, 정신 없어 혼났다 얘."

 

오늘은 첫째 날이었지만 이모는 그대로였다. 그대로인 그녀가 어색했지만 괜찮았다.

 

"그러게, 죄송해서 어떡해요. 저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뭘 또, 단골손님들 덕에 먹고 사는데. 상 금방 닦아줄테니까 기다려봐."

 

그녀는 종종 걸음으로 주방에 가 행주를 빨아왔따. 그녀의 두꺼운 팔 때문에 행주가 작아보였다. 그녀는 꽉 짜여있는 행주를 펼쳐 반듯하게 개켰다. 그리고 기계처럼 상을 스윽, 닦았다. 그러다 그녀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날 봣다.

 

"근데, 오늘은 왜 혼자여?"

 

나는 당황해 입술을 깨물었다. 명치에 뭐가 들이차고 있었다.

 

"그냥 뭐, 그렇죠."

 

이모가 상을 닦는 동안 어쩐 일인지 이곳이 계속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그대로였지만 어색했다. 빈 앞자리 윤과 함께였다면 조금 더 일찍 왔겠지. 윤이 전화를 하고, 난 힘들게 일어나 나왔겠지. 점심보다 좀 이른 시간에 오고, 혹시 늦게 왔다면 이모한테 미안해서 자기가 상을 닦겠다고 하겠지.

공기가 답답했다. 눈을 들고 가게를 둘러 볼 수가 없어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아,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어제 술을 너무 마셨나봐, 정신이 없네. 지갑을 놓고 와버렸네요. 다음에 올게요. 주문 안해서 다행이다."

 

그러나 이모는 손사레를 치며 말했다.

 

"됐어, 오늘은 그냥 줄게. 다음에 안올거여 ?"

 

"아, 아니에요. 늦게 왔는데, 그렇게까지. 내가 미안해서 못참아. 다음에 올게요. "

 

말을 더듬으며, 도망치듯 가게에서 나왔다. 왜 이러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친구들 말대로 뭘 또 차였다고 그럴까.

나는 그대로 아무데나 걷기 시작했다. 이 동네 곳곳을 지나다녔다. 내 기분과는 상관 없이 하늘은 맑았다. 드라마처럼 비가 오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대신 하도 걸어서 땀이 비가 오듯이 흘렀다. 그러다 짜증이나고 결국엔 잘 모르는 길로 빠져들었다. 그런데 오히려 명치는 가벼워졌다. 낯선 길이지만 그녀가 눈에 밟히지 않았다. 그렇게 몇 시간을 계속 걸었다.

다시 하늘을 봤을 때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전봇대에 전선들이 실뜨기를 하는 것처럼 얽혀 있었고, 놀 빛은 그 사이로 빗겨가고 있다. 그 위에 붉은 해가 줄타기를 하듯이 비틀대고 있다. 멀리 보이는 산 꼭대기에서부터 어둠이 몰려오는 것처럼 보였다. 새들이 어둠을 피해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다. 갑자기 피곤함이 몰려왔다.

오늘은 첫째날이다. 하루가 지나가고 있다.  어제도 이렇게, 그제도 이렇게 하루하루 보낼 뿐이었는데. 오늘은 왜이렇게 보내기 힘든 건지. 이렇게 피곤한 거지. 계속 걷다보니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멀리 걸어온 것 같지 않았다. 버스는 금새 윤의 집 앞을 지나갔다. 아직도 노을이 남아 있다. 노을은 조금이라도 시선을 떼면 산 아래로 뭉게질 것 같았다. 나는 윤과 걷던 길과 노을을 동시에 보았다.그러자 노을과 함께 그 길이 뭉게지기 시작했다. 버스가 달리면, 버스 창 안에서 모든 것이 뭉게지고, 어둠이 몰려왔다. 하루가 지나가고 있다. 명치가 떨려옴에 멀리 창밖으로 윤이 걸어간다. 또 지나간다. 눈을 돌리고 싶었지만 그대로 그녀를 본다. 내가 우는 것을 보고 시선을 돌리던 친구들을 생각한다.

노을 속에서 뭉게지고 있는 윤과 모든 것을 똑바로 본다.

또 한사람이 지나갈 뿐인데. 명치가 부르르 요동친다. 나는 또 다시 돛단배가 된다. 또 하루가 지나갔을 뿐인데, 한 사람이 지났을 뿐인데 말이다.

 

우리가 헤어진 첫째 날이 지나간다.

셀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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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가

저벅 저벅, 오늘도 언덕을 오른다. 허리를 굽히고 언덕 끝의 지평선이 접어 놓은 것 같은 바다를 향해 걷는다. 걸음을 멈추고 바다 앞에 선다. 이른 새벽, 낮과 밤의 사이를 가장 잘 머금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바다일 것이다. 제 몸을 출렁이며 밤의 색과 낮의 색으로 번갈아 움직인다. 또한 별을 머금고 있다. 온 세상의 모든 별들이 심해어처럼 바다 위에서 자신의 존재를 번쩍인다. 구름은 별들이 헤엄친 후에 인 포말같다. 아버지의 사촌인 김씨 아저씨를 만나러 왔을 때 보았던 바다와는 다르다. 그때 바다는 겨울을 머금고 있었다. 추수가 끝나고 찬바람이 일기 시작했을 때였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나를 데리고 바다로 왔다. 어릴적부터 농사 때문에 바빴던 우리 가족에겐 가족여행이란 건 떠올리기 힘들었다. 그래서 더 들떴던 것 같다. 버스를 몇 번이고 갈아타 도착한 그곳은 이름 없는 어촌이었다. 김씨 아저씨는 오징어잡이를 생업으로 하고 계셨다고 했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평생을 농사를 지었듯이, 그는 평생 동해 바다를 떠난 적이 없다고 했다. 겨울 바다는 신기했다. 아무도 없는 부두 위에서 눈과 같은 색으로 철벅이고 있었다. 학교에서 바닷물이 얼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 추운 날씨에도 흐르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달달한 비린내가 코를 가득 채웠다. 바다는 거대한 저수지 같기도 했고, 하늘이 베껴 놓은 스케치북 같기도 했다. 멀리 수평선을 쳐다보았을 땐, 신이 하늘을 반으로 접어놓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난 수평선 끝을 향해 손을 흔들며 부둣가를 힘껏 내질렀다. 바다에 눈이 팔린 나를 김씨 아저씨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옆에 다가와 말씀하셨다. 바다 신기하지? 네! 그, 엄청 커요 바다는 많은 걸 품고 있어. 그걸 끌어 올리는 게 어부야   아저씨 말을 들으며 내 모습이 비췄다, 부서지는 바다를 보았다. 세상 모든 것이 비췄다 부서졌다. 태양이 부서졌다, 꽃처럼 핀다. 겨울바다는 쓸쓸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웅장했다. 언젠가 어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가 물으셨다. 바다 굉장하지 ? 나는 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언젠가 저도 바다를 끌어올리는 사람이 됄래요! 아버지는  허허, 웃으셨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모습이 씁쓸해 보이기도 했다.   달을 향해 절을 한다. 하늘 위에 뜬 달이 아니라, 바다 위에 피어난 달을 향해 절을 한다. 어머니, 어머니, 부르며 두 번 절을 마친다. 기력이 빠져 자리에 앉아버린다. 모든 것을 품고 있는 바다는 어머니도 품고 있을 것이다. 부모님은 평생을 농사로 보내신 분들이다. 나또한 그랬다. 평생을 농삿일을 돕는 데에 써왔다. 그러나 나는 이제 어부다. 배에 타고 바다를 끌어 올린다. 남들보다 이른 시각에 일어나 배를 탄다. 나를 보조로 써주시는 김씨 아저씨의 배에서 그물을 가지런히 하고 잡일 거리를 도와드린다. 오징어잡이를 하는 김씨 아저씨의 배는 바다 위에서도 유난히 번쩍인다. 그것마저도 바다는 삼켜버린다. 그 불빛 때문에 오징어들은 놀라 정신을 차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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