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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비

  • 작성자 탈퇴 회원
  • 작성일 2022-09-29
  • 조회수 746

할머니는 소녀의 얼굴로 창밖을 보았다. 창문 너머로 쭉 이어진 벚나무의 행렬에 양 뺨을 살짝 붉혔다. 여든에 가까워 이제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이었지만 초봄의 내음 앞에서 그녀는 소녀가 되었다. 두 눈을 활짝 열고서 가만가만 떨어지는 꽃비를 응시했다. 노인답지 않은 풍부한 생기가 그 표정에 깃들어 있었다. 엄마는 종종 ‘어머니가 너무 늙으셔서 그래’하며 한숨을 내쉬곤 했으나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늙지 않았다. 다만 돌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지금껏 놓쳐온 과거를 향해서.

“너희 아빠랑 요양원 좀 알아보고 올 테니까 오늘만 할머니랑 둘이 있어.”

그 말과 함께 부모님은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고삼이 된 너를 배려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한숨을 쉬었다. 슬픔이나 연민 대신 피로가 묻어나오는 한숨이었다. 최근 들어 엄마와 아빠는 자주 그런 한숨을 토했다. 그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개 되지 않았다. 오늘도 평소처럼, 응, 그래, 괜찮아. 짧은 세 마디로 둘을 배웅했다. 부모님의 한숨을 닮아 무거운 미소를 지었다. 시선을 돌려, 거실 탁자에 주저앉은 할머니와 눈을 맞췄다. 머리도, 눈도, 뇌도, 새하얗게 질려버린 노인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어째서 우리의 몸은 이렇게 쪼그라들고 마는 걸까요. 그 사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도 못하면서.”

나는 창문에 기댄 할머니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올렸다. 거슬거슬한 촉감이 검지 손가락을 타고 전신에 감겼다. 젊음이 빠져나간 노인의 육체였다. 내 검지 손가락의 촉감이, 세월을 뚫고 올라온 그녀의 주름이, 그 사실을 열성적으로 증언하고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뇌는 그 사실이 퍽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며 몸을 웅크렸다. 시간이 흐른다는, 스스로가 늙어간다는,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저는 솔직히 말해서 어른들을 이해하기가 힘들어요. 시간이 흐른다는 것도 그 시간에 맞춰 자신이 점점 깎여나가는 것도 모두 당연한 거라고 다들 이야기했잖아요.”

그런 건 당연하다고 잘난 듯이 말하는 주제에, 어째서 기어코 어제를 돌아보는 걸까. 나는 할머니를 바라보며 허공을 향해 말했다. 어제, 수업을 시작하기 직전 담임이 내뱉은 중얼거림을 떠올렸다. 그는 분명 슬프다고 말했다. 우리 때가 참 좋을 때라고 말했다. 그 시간이 지나가 버린 지금은 그저 슬프다고 말했다.

우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그저 농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서 저녁 열 한시에 독서실을 빠져나오는 일상은 빈말로라도 그리워할 물건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맨 앞자리에서 담임의 눈꺼풀이 미묘하게 떨리는 걸 보았다. 그는 그때 과연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알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다.

“할머니, 꽃이 그렇게 좋아요?”

나는 그리 묻고서, 잠깐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중간고사가 마무리되면 벚꽃도 지겠지. 문득 그 사실을 실감했다. 평소라면 햇빛 아래서 벚꽃을 볼 일이 없는 탓이었다. 해가 지기 전에 집을 나와 해가 떨어지고서 돌아오는 나날에, 꽃놀이는 사치였다. 올해 들어 눈앞에서 벚꽃이 쏟아진 건 사실상 오늘이 처음이었다.

“응, 좋아. 나 나갈래.”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짧은 대답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활짝 미소 지으며 창문 밖은 손가락을 가리켰다. 다소 난처한 상황이었다.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실험 보고서가 있는데. 하지만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할머니는 입술 끝을 움찔거리며 울상을 지었다. 어린아이처럼 양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짜증이 난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으로나마 보고서의 내용을 정리하며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벚나무가 이어진 가로수 길로 걸음을 옮겼다.

“아.”

그리고 그 찬란한 분홍을 직접 마주하자마자 내가 처음 느낀 건, 우리가 이 장소에 조금 심할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후줄근한 고삼 손녀와 여든 살 치매 노인은 도무지 이 활기찬 분위기에 녹아들 수 없었다. 한창 꽃놀이를 즐기는 인파가 잠깐잠깐 우리에게 시선을 던졌다. 뭐야, 너희는. 그리 씹어 뱉는 듯했다. 그 시선이 두려워서 나는 더욱 맹렬히 보고서의 내용을 떠올렸다. 내가 할머니의 손을 쥐고 있다는, 꽃밭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할 만큼.

식물 단원에 맞춰 꽃이 지는 이유를 조사해오라고 생물 선생을 말했었다. 비교적 간단한 과제였다. 나는 꽃이 지는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으니, 세부적인 사항을 적당히 기록하는 것만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모든 꽃은 자살한다. 자신의 가장 빛나는 한때를, 번식을 위해 안간힘을 다해 피워올린 다음 가차 없이 떨어트린다. 그뿐인 이야기였다. 우리가 아름다워하는 꽃은 번식을 위한 수단, 미래를 위한 발판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건 자연의 순리다. 그건 당연하다. 당연한 것이다.

“너무 빨라.”

할머니의 부름에 나는 걸음을 멈췄다. 탁하게 번진 시야 사이로 분홍 잎 하나가 천천히 낙화했다. 벚꽃이었다. 그 벚꽃을 중심으로 서서히 시야의 초점이 돌아왔다. 숨을 몰아쉬는 가녀린 노인이 그곳에 있었다. 그녀는 화가 잔뜩 난 듯, 나를 향해 오른쪽 샌들을 힘껏 집어 던졌다. 나들이 일행이 오가는 파도 속으로 할머니의 일부가 확, 떨어졌다.

할머니의 샌들이 떨어지자 활기찬 행렬은 순식간에 표정을 구겼다. 나는 급하게 사과하며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강한 바람이 불었다. 나무에 매달린 꽃잎이 떨어지고 바닥에 떨어진 꽃잎이 퍼 올려졌다. 돌풍에 맞춰 쏟아지는 분홍. 나는 멍한 심정으로 그 일련의 흐름을 응시했다. 햇빛에 부딪히는 꽃잎의 그림자 사이로, 묘한 신기루가 그려졌다. 돌풍과 벚꽃의 모호한 색감, 봄날의 강한 햇빛이 직조한 작품이었다. 나는 그 환상경에 잠시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건 아름다운 소녀였다. 엄마의 어린 시절 같기도, 내가 아주 예쁜 옷을 차려입으면 그런 모습일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나도, 젊은 날의 엄마도 아니었다. 할머니의 단 한마디가, 그 소녀를 완성했다. 나는 그 목소리에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순자야.”

할머니는 소녀를 바라보며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바람은 금방 멎었다. 소녀는 역시 모습을 감췄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천천히, 할머니의 샌들을 들여다보았다. 할머니의 일부라고 생각했던 그것 역시 평범한 샌들이었다. 잠깐 나타났던 소녀는 환상일 뿐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꽃이 지는 것도, 젊은 날의 자신을 꿈으로나마 목격하는 것도.

나는 할머니를 향해 걸었다. 그의 맨발에 벗겨진 신발을 신겼다. 따뜻한 햇빛을 듬뿍 맞았으나 이 헛헛한 속은 도저히 덥힐 수가 없어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눈물 흘리지는 않았다. 꽃이 지는 슬픔만큼, 지금 쏟아지는 꽃비가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에. 꽃이 진다는 사실이, 그 슬픔만큼이나 아름다워서 나는 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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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 회원
  • 2022-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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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 회원
  • 2022-09-29
용의 말

선생은 나에게 용을 찍어오라고 말했다. 날개가 달린 붉은 용, 그것의 사진을 찍어오라고 말했다. 만약 양질의 사진을 찍어온다면 방학 중 과제는 그것으로 대체해 주겠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용의 사진이라.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간단하잖아요. 편애같은 건가요?” 한달 전 즈음, 하늘에서 용이 내려왔다. 은유가 아니며, 직유가 아닌, 문자 그대로의 붉은색 용이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에 무거운 몸을 내려 앉혔다. 파란 하늘이 지붕 천장이라도 되는 양 길쭉한 목을 빳빳하게 세운채 흘러가는 구름을 큼직한 주둥이로 집어 삼켰다. 물론 그 형태를 엄밀히 따지면 서양의 드래곤에 가까웠으나 용 본인이 스스로를 용이라 칭했기에 그는 용이 되었다. 외계에서 날아온 직립보행 도마뱀에게 붙일 마땅한 이름이 달리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찍어올게요.” 어려운 일은 아니었기에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망원 렌즈와 dslr을 챙겨 아스팔트를 밟았다. 녹아내린 타르 위에 점점히 발자국을 찍었다. 꼭 속이 뒤틀리는 듯 했다. 손바닥에서 피어오르는 열이 머리를 덥혔다. 이제와서 후회하는 건 분명 배부른 소리지만 그래도 너무 더워. 중얼거리며, 자세를 낮췄다. 안 그래도 짧게 줄인 치마가 무릎 위로 힘껏 당겨졌다. 얼핏 새하얀 속옷이 엿보였지만 나는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용을 보고 있다. 이곳의 그 누구도 여고생의 속옷 같은 건 신경쓰지 않는다. 우스운 일이었다. 나는 조소와 함께 파인더 너머 정경을 살폈다. 7월의 맹렬한 직사광선 탓인지 공원의 채도는 평소보다 두어 단계 낮아 보였다. 하늘은 맑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보도블록 사이에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주말이라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싶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돗자리를 펼쳐 앉았다.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미처 돗자리 지정석을 사수하지 못한 사람들은 별수 없이 두 다리로 본인의 몸을 받쳤다. 이들 모두 용을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용을 듣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을 좋게 여겨 보살피시고 모든 보살이 좋게 여겨 의지할 수 있게 합니다. 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을 얻고자 하는 선한 남자와 선한 여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이윽고 붉은 용은 입을 열었다. 땅이 울릴 만큼 거대한 목소리였다. 바삐 움직이던 도시의 흐름은 순식간에 개인이 되어 그 언어를 경청했다. 아직도 몇몇 종교, 정치 단체는 용의 발언을 모종의 예언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하지만, 그가 뱉어내고 있는 건 금강경의 구절일 뿐이다. 아마 평소와 같다면, 용은 오늘 종일 금강경을 낭독할 것이다. 그래, 낭독. 용은 대체 어디에서 왔는지, 어째서 도시 한복판에 둥지를 틀었는지, 생식 활동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런 건 누구도 알지 못한다. 다만 확실한 건, 용은 말한다. 급작스럽게 날아들어 와서는 해외 고전 문학을 차례차례 읊조린

  • 탈퇴 회원
  • 2022-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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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지현

    내셔님 안녕하세요. 노인과 손녀가 낙하하는 꽃을 맞으며 산책하는 이미지만으로 이야기를 이렇게 이끌어갈 수 있다는 게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이미지를 워낙 잘 그리시니 오감을 사용하여 꽃놀이 하는 주변 상황을 묘사해주시면 글이 생생하게 살아날 것 같습니다. 그럼, 다음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 2022-10-24 13:02:10
    송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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