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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친설近親說

  • 작성자 당근매니아
  • 작성일 2007-01-26
  • 조회수 5,134

  어느 겨울, 문득 나는 방랑벽이 동해 길을 나서 특별한 목적 없이 길을 걷다, 겨울바람을 느끼며 한참을 그리 걸으니 무릎이 저려, 가장 먼저 눈에 띈 카페에 들어갔다. 잠시 자리에 앉아 쉬고 있으려니 웨이트리스가 와서 주문을 받는데, 처자가 입은 옷이 메이드복이기에 비로소 나는 내가 메이드 카페에 들어왔음을 알았다. 오렌지 쥬스를 시키고 보니 내 앞 테이블에 어떤 남자가 앉아 있는데,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식식 거리며 화를 내고 있어 주변의 사람들이 그 불같은 형상을 두려워하였다. 나는 쥬스를 기다리는 겸 하여 그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 사람은 미처 분을 삭이지 못하고 내게 말하였다.
  "내가 알바를 뛰어 돈을 모은 지 세 달, 코미케 안내서를 보고 루트 연구하기를 한 달이며 개장 행렬에 끼어들 방법을 고심한지 한 달, 또한 개막 전 밤샘 줄에 참여한 것이 또다시 12시간이오. 내 그리도 많은 시간을 투자했건만, 러쉬를 이겨내 부스 앞에 서고 보니 내 앞에 선 자가 페이트 침대 커버를 남김없이 싹 쓸어가 나는 지난 다섯 달을 허투로 보낸 셈인데다 이제는 한정 프리미엄을 주고 그 약삭빠른 자에게 침대 커버를 사게 생겼으니, 어찌 화가 나지 않겠소."
  그 말을 듣고 내가 물었다.
  "내가 아는 페이트라 하면 몇 가지가 있으나, 그 중 코미케와 연관될 만한 페이트라면 지금 두 가지 페이트가 생각이 나네. 그러하다면 그대가 말하는 페이트는 타입문의 페이트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기동포격소녀 나노하의 그 페이트를 말하는 것인가."
  그는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 그대는 웹도 들어가 보지 않는 것이오. 후자의 사재기가 한창 문제가 되었던 것을 정녕 모른다 할 것이오. 나는 그 광경을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분노할 따름이외다."
  그 자를 다시 훑어보니 눈에는 미소녀계 오타쿠들이 가진다는 기이한 탐욕이 비추었고, 손과 가방에는 포스터, 게임타이틀, 동인지가 가득 들렸는데, 그저 로리 캐릭터들만이 큰 눈을 빛내고 있었다. 필시 아키하바라 구석의 동인샵을 들렀다 오는 길에 분통이 나 카페를 들린 것이리라 생각하며 나는 재차 물었다.
  "그대의 이야기와 품새를 보아하니 그대는 분명 로리콘인 듯하네. 2D는 종국에 허무한 것이고 로리타 취향은 자칫 잘 못하면 숭악한 범죄로 번질 수가 있는 것인데, 그대는 어찌 그리 사소하고 기기묘묘한 것에 연연하여 이 카페의 훈훈한 분위기를 망치는가."
  그러자 그 사람이 화를 내며 말하였다.
  "나는 2D의 절대적인 미를 사랑하는 것이지, 현실에서 그를 행할 정도로 우둔하지 않소. 그대는 어찌 나를 업수이 여겨 2D가 하찮다는 말을 하시오. 그대의 말은 나를 모욕함과 동시에 수많은 게임라이터들과 일러스트레이터들을 동시에 조롱하는 것이니 게이머의 한 사람 되어 어찌 그대의 이러한 우롱을 그저 넘어갈 수 있으리오."
  그러며 모카 커피가 담겨 있던 컵을 힘주어 쥐는데, 도자기 컵에 금이 후두둑 가는 것이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았다. 나는 좀 구체적으로 말할 필요를 느꼈다.
  "무릇 2D란 것은 현실과 동떨어져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으니, 말하자면 눈앞에서 어른어른거리는 신기루 같은 것이네. 2D를 쫓다 패가망신한 자가 무수히 많아 그것을 경고하려 하였을 따름이지, 내 어찌 그대를 놀리려는 생각이 있었겠는가. 내 잠시 이야기를 하나 할 것인데, 로리와는 또다른 모에의 한 가지 도로 일컬어지는 여동생 모에에 관한 것이 바로 그것이네. 내가 지금 로리에 대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 않아 가장 가까운 속성이라 칭할 수 있는 여동생 모에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인데, 혹여 중간에 거북하여 더 이상 듣기 싫다면 언제라도 자리를 떠도 좋으나, 내가 그대를 오늘 처음 보았음에도 관상이 특별히 온순하고 영특하여, 다른 것에 힘을 쏟는다면 어느 방향이든지 하나는 도를 이룰 수 있을 것임을 첫 눈에 알아 이야기하는 것이니, 부디 노기를 거두고 들어보기 바라네."
  그가 마지못해 알았다고 하는 것을 듣고, 나는 비로소 품고 있던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미소국의 고소한 향기가 하얗게 칠해진 방문과 같은 색의 문틀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코끝을 간질인 지 얼마나 되었을까. 요란한 소리를 내며 생선을 굽던 가스레인지의 푸른 불꽃이 사그러들고, 딱히 싸구려라 하기는 뭐하지만 확실히 고급품은 아닌 그릇들이 하나 둘 식탁 위에 가지런히 정렬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과 국, 노릇하게 구워진 생선과 밑반찬 몇 개. 전형적인 소시민의 식단이라고 할 만한 이 조촐한 음식들은 딱 보기엔 그리 먹음직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하나하나를 뜯어보면 음식마다 깃든 조리사의 정성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막 지어낸 밥은 압력밥솥이나 전기밥솥 같은 이기를 빌어 만든 것이 아니었다. 냄비에서 정성스레 지은 밥에는 윤기가 흘렀고, 혹여나 쌀을 씻는 것이 지나쳐 영양까지 쓸려나가는 것을 우려한 조심스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생선은 껍질 한 곳 떨어져 나간 데 없이 그윽한 향기를 피워 올렸고,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간이 맞춰진 미소국은 미세한 입자를 조용히 끌어안았다. 물은 투명한 글래스에 담겨 가지런한 젓가락들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사실 냄비로 밥을 한 것은 압력밥솥이나 전기밥솥 사용법을 몰랐기 때문이고, 생선이 완벽한 건 개나소나 완벽한 구이를 하게 해주는 신형 석쇠를 사용했기 때문이며, 미소국은 그저 레시피를 편집증적으로 따른 끝에 나온 완벽한 간일 따름이다. 요리를 할 때 레시피를 무시하는 건 바보짓이라는 걸 수백 봉지의 인스턴트 라면을 끓여온 소년은 알고 있는 것이다. 레시피는 그 누가 뭐라해도, 수십 수백 킬로그램의 재료를 수백의 요리사들이 낭비해가며 만들어낸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맛을 내는 최적의 비율이다.
  마지막 반찬까지 식탁에 올려지고, 이 모든 작업을 끝마친 조리사는 아까부터 방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미유키, 밥 먹어!"
  2층 자기 방 문 뒤에 기대서서 맛있는 냄새를 마시고 있던 소녀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다시 한 번 심호흡했다. 그리고는 방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전신거울 앞으로 재빨리 움직이더니 옷매무새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춘기 소녀다운 가벼운 볼터치는 도자기 인형 같은 소녀의 하얀 피부에 생기를 불어 넣었고, 밝은 톤으로 색을 맞춘 흰 셔츠와 푸른 스커트는 양쪽으로 나눠묶은 검은 머리카락과 어우러져 놀랄 정도의 조화를 연출해냈다. 마지막으로 스커트 아래로 쭉 뻗은 다리를 감싼 하얀 오버니삭스. 사실은 전에 사둔 목걸이도 해보고 싶었지만 목걸이 혼자만 너무 튀는 것 같아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이유로 어제 산 귀걸이도 기각.
  '치마가 너무 짧을라나.'
  소녀는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에는 '이 정도쯤이야' 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정도 대담함도 없다면 어떻게 대시를 하겠는가, 라는 생각이었다.
  준비완료.
  약간 붉어진 뺨을 양손으로 가볍게 때리며, 소녀는 전장으로 떠나는 신병처럼 긴장된 한 발을 내딛었다.


  식사는 시종 조용히 진행되었다. 조리사─켄지─는 평소에도 조용한 편이었지만 식사 시간 내내 조잘거리는 게 보통이었던 미유키마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고 그저 젓가락만 열심히 놀렸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대로라면 미유키와 한창 수다를 떨고 있어야할 사람들이 지금은 같이 식탁에 앉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늘상 집에 붙어 재잘대던 어머니와 그걸 불평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가끔 헛기침하던 아버지는 느닷없이 아버지 회사 주최로 열린 무슨 부부 동반 등산 여행인가 하는 걸 가버렸다.
  '밥은 대충 사먹어라' 라는 무책임한 쪽지가 발견된 것이 그저께. 아들네미 생일도 까먹고 놀러간 부모에게선 아직 아무런 연락도 없었지만 아무렴 어떠랴. 자고로 여행간 사람은 무소식이 희소식인 법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미유키의 부모가 아들인 켄지의 생일을 까맣게 잊은 채 여행을 가버렸다는 것이고, 그건 켄지의 생일인 오늘, 집에 있는 것은 미유키와 켄지 단 둘 뿐이라는 걸 의미했다.
  그리고 그건 다시 말해,
  "아."
  혼자 폭주해 버린 망상이 끝 간 데 없이 일직선으로 달려버린 순간, 가냘프고 하얀 손가락에서 젓가락이 미끄러졌다. 가느다란 나무젓가락은 떨어지며 물컵과 부딪혔고, 크지는 않았지만 식탁 위를 소란스럽게 하기에는 충분한 소리가 났다. 묵묵히 젓가락질을 하던 켄지의 눈길이 미유키의 당황한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오른손에 든 젓가락이 미끄러진 것이 다행이었다. 왼손에는 밥그릇이 들려있었으니까. 만약 이걸 엎었다면 한바탕 난리가 났을 것이다.
  "어디 몸이라도 안 좋은 거 아냐? 얼굴이 빨개."
  일순 들렸던 켄지의 고개는 다시 소심하게 숙여졌고, 켄지는 걱정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약간의 여림과 당황이 녹아있는 앳된 목소리. 고2라는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게 높은 옥타브였다.
  "시, 시끄러. 아무것도 아니니까! 바보 주제에 일일이 참견하지 말라고!"
  미유키는 쏘아 붙었다. 스스로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말한다면 할 수 없지만, 빨간 걸."
  "시끄럽다고 했잖아!"
  켄지는 미유키의 고함에, 화들짝 놀란 햄스터처럼 몸을 떨었고, 미유키는 그런 오빠에게 보이지 않게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젓가락을 다시 집어 들며 미유키는 자신이 어쩌다 여기까지 와버린 건지에 대해 고민했다.
  만약 켄지의 주변 사람들에게 '가토우 켄지라는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는 질문을 한다면 백이면 백, '무능력'이라는 답변이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켄지 본인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도 그랬다.
  그가 살아오면서 켄지의 별명은 몇 번의 변화를 겪었는데, 그 별명들을 순서대로 읊자면 울보-머저리-바보 켄지-무능력 등등이었다. 그 뒤에도 최근에는 '댁'이니 하는 기묘한 별명이 따라붙는 것 같았지만, 미유키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확실한건 언제나 켄지보다는 미유키가 훨씬 더 어른스러웠다는 것이었다.
  소학교 시절 켄지가 빼앗긴 장난감을 다시 돌려받아낸 것도, 켄지의 실내화에 콜라를 부은 녀석을 알아내 흠씬 두들겨 팬 것도, 중학교 때 켄지를 괴롭히는 녀석들을 찾아가 담판을 벌인 것도 전부 다 미유키였다. 공부건 운동이건 항상 아이들을 이끌어나가는 위치에 있었던 미유키에게 약자라 할 수 있는 오빠는 한심한 존재였고, 자신이 돌봐줘야 하는 존재였다. 오빠보다는 남동생을 다루듯 하는 것이 당연했다. 가끔씩은 자신을 감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감싸야만 하는 허약한 오빠에게 화도 나고, 자기 오빠가 상급생인 것이 자랑인 양 구는 아이들을 볼 때는 짜증도 났다. '학교에서는 아는 척 하지 마!' 같은 말을 안 해본 것도 아니었지만, 그날 어떤 이유인지 켄지가 같은 반 녀석들에게 두들겨 맞고 있는 걸 보고 달려 나가는 바람에 위장공작은 스스로 파기한 셈이 되었다.
  그날 퉁퉁 부었던 켄지의 눈가와, 상처 난 볼을 타고 흐르는 투명한 눈물방울. 미유키는 그 모든 걸 기억하고 있다.
  언제부터였을까. 이리도 한심한 오빠를 좋아하게 된 건.
  자신을 위해 싸우다가 다친 미유키의 손등을 보며 울상을 짓는 모습을 보았을 때? 직접 만든 음식을 먹는 미유키를 바라보는 그 해맑은 얼굴을 마주 보았을 때? 분노와 억울함을 담은 오빠의 눈을 난생 처음 대했을 때? 그도 아니면 이상한 물건들을 잔뜩 사들고 왔다가 부모에게 된통 혼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아니면 미유키가 다른 아이들의 질투 때문에 왕따를 당하고 있었던 작년, 언제나처럼 소심한 목소리로 어설픈 위로를 했을 때일지도 모른다.
  모성애 비스무레한 것인지 아니면 그와는 다른 것인지 그녀 자신도 확실히 할 수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미유키의 눈에는 오빠의 나약한 모습이 상냥한 것으로 비춰지고, 소심한 점은 사려 깊은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속되게 말하곤 하는 콩깍지라고 하는 물건의 영향일 것이다. 문제는 그 판타스틱하기 짝이 없는 도파민의 렌즈가 향해서는 안 되는 곳을 향해 버렸다는 것 정도다.
  어느 샌가 미유키는 오빠를 좋아하고 있었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에는 당황보다는 '아아 역시' 하는 생각 정도만 들었다. 그렇게 연민은 호감이 되고, 그 호감이 사모에 이르는 것은 자신도 놀랄 만큼 금방이었다. 더 이상 가버리면 선을 넘어버리고, 돌이킬 수 없게 된다는 것 따위는 알고 있다.
  하지만 브레이크가 먹지 않았다. 뭐라 해도 너무 가깝다. 일단 얼굴을 봐야 애정이 유지된다는 건 만고의 진리였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애정도 식는다는 말은 세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속담이자 지혜다. 그렇다면 그 반대는 어떤가. 매일 아침부터 얼굴을 맞대고 밥을 먹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눈길이 마주친다. 전진할지언정 후진 따위는 불가능했고, 이미 생겨난 사모가 발전해 나가는 건 금방이다. 정지조차 맘대로 되지 않는 감정의 폭주가 일어난 지는 이미 오래다.
  늘 꿈꿔왔고 상상해 왔던 날이다. 둘만이 집에 남을 때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상상을 해왔다. 그리고 결국 오늘까지 와버렸다.
  집에는 둘 뿐.
  고민도 할 만큼 했고, 주저하기도 이미 수십 번이다. 어제 하루만 해도 몇 번이나 결심하고 포기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지겨워졌다. 확실하게 말하기 위해, 그리고 그 다음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을 위해 신경 써서 속옷을 고르고 옷을 입은 거 아니었나. 뒷일 따위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던 게 바로 20분 전이다.
  말한다. 말하고 나서 어떻게 되든 간에 될 대로 되라지. 더 이상 벙어리처럼 끙끙 앓고 있는 건 신물이 난다.
  말한다. 말할 거다.
  그리고 미유키는 운을 뗐다.
  "오빠."
  "저기, 난 다 먹었는데."
  아니, 운을 떼려다 선수를 뺏겼다. 먼저 침묵을 깨고 말을 꺼낸 쪽은 미유키가 아니라 켄지였다.
  "다 먹은 거야? 다 먹었으면 그릇 치울까 해서."
  그렇게 말하며 소년은 싱긋 웃어보였다. 그 미소를 보고 미유키는 살짝 현기증이 났다. 잠시의 침묵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켄지는 자신의 그릇을 치우고, 이윽고 미유키의 그릇도 치우기 시작했다.
  "저, 저기."
  "응?"
  조심스럽게 흘러나온 미유키의 말에 설거지를 위해 싱크대로 그릇을 나르던 켄지가 고개를 돌려 미유키를 바라봤다. 미유키는 의자에 앉은 채 몸을 꼿꼿이 하고 평정을 가장했다.
  "할 말이 있어."
  "뭔데 그래?"
  켄지는 그릇을 싱크대에 올려놓고는 다시 식탁 쪽으로 걸어왔다.
  "오늘, 그러니까 오빠 생일이잖아."
  켄지는 멍청한 얼굴을 했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오늘이었나."
  "저기 그래서 말인데. 내가 선물을 사오려고 생각은 했었는데 며칠 전에 지갑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못 샀거든."
  "응. 그래서?"
  "그러니까, 지난 번 내 생일 때는 오빠가 선물 줬었잖아. 오빠는 줬는데 나는 못 주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불공평하니까."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켄지가 알아채면 어떻게 하나 미유키는 걱정했다. 한 마디를 뱉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실제로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소녀가 그 말을 하기 위해 고민한 시간은 그보다 훨씬 더 길게 느껴졌다.
  "오늘은 오빠가 원하는 거, 뭐든지 다 들어줄게."
  그리고 소녀는 말했다.
  켄지는 동생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깨닫지 못한 모양이었다. 둘이 멀뚱히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기를 몇 초. 미유키의 볼은 점점 더 상기됐다. 그 볼이 사과를 연상시키는 색이 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그럼 난 방에 가있을 테니까. 뭘 하면 좋겠는지는 천천히 생각해서 이따 알려줘."
  그 말만 남긴 채 미유키는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고 자신의 방이 있는 2층으로 후다닥 올라가 버렸다. 식탁 앞에는 켄지만 혼자 남아 멍한 표정으로 서있을 뿐이었다.


  시간이 흐른다.
  초침이 시계의 중심을 축으로 삼은 채 한 발짝씩 걸어 나가는 메마른 소리가 방 안 가득 울린다. 초침의 끝은 원을 그린다. 무한히 같은 반지름과 같은 중심을 가진 원을 그리고, 전지가 전부 떨어질 때까지 그 발걸음은 멎지 않는다. 돌고 돌지만 결코 중심으로 빠져드는 소용돌이를 그리지는 못한다. 고정된 축과 초침의 끝이 비록 한 뼘 길이 밖에 되지 않더라도 초침의 끝에게 그 짧은 거리는 수십의 지평선을 건너야 비로소 마주하는 바다와 같다. 초침의 바늘은 짧아질 리도, 휘어질 리도 없다.
  일반적으로는 그렇다.
  위성이 행성의 주변을 돌고, 행성이 항성을 맴돌지만 그 둘은 만나지 못한다. 물론 불가능한 건 아니다. 하지만 위성이 행성을 만날 때에 위성은 행성을 멸망시키고, 자신 또한 산산조각 나 사라진다. 행성과 항성이 입맞춤 할 때는 오로지 항성이 자신의 죽음을 알고 한껏 부풀어 올라 마지막 연료를 전부 다 태워버릴 때뿐이다.
  위성과 행성의, 행성과 항성의 충돌은 그 행성에 사는 생명체들에겐 그저 하나의 비극이다. 바늘이 휘어진 시계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점점 더 휘어 점점 더 짧아지는 바늘의 끝은 소용돌이를 그리고, 시간은 맞지 않게 된다. 시간이 맞지 않는 기묘한 초침을 가진 시계 위로 뱅글뱅글 도는 소용돌이 모양 집을 가진 달팽이가 하나 겹쳐진다. 달팽이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그저 하얀 시트가 깔린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있다. 껍질 속으로 몸을 완전히 넣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온몸에서 힘을 뺀 채 사지를 늘어뜨리고 기다리고 있는 것뿐이다.
  쩔그덕 쩔그덕
  초침은 너무나도 더디게 다음 초를 향해 움직인다. 느리다고는 해도 소녀의 방에 걸린 시계의 바늘은 배배 꼬이지 않았고 착실히 다음 시간을 허공에 새겨나간다. 그 시계 밑에 누운 바늘 휜 시계는 쉼 없이 한 마디의 말을 되뇐다.
  ─11시쯤에 내 방으로 와줘.
  그 둔감한 사람조차 자신의 마음을 알아줬다. 사실 가장 큰 장애물은 과연 소녀의 말에 담긴 속뜻을 그가 알아줄까 하는 부분이었다. 방문 너머에서 들려온 저 말을 듣기 전까지 배배꼬인 시곗바늘을 눈으로 삼은 하얀 달팽이가 계속 생각했던 것도 더욱 직접적으로 말했어야 했나 하는 후회였다. 다행히도 그는 이해해 줬고, 또한 그녀의 바람에 답해줬다. 남은 것은 기다리는 것뿐이지만 그 기다림의 시간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저녁 식사가 끝난 것이 6시 반. 그가 방 앞으로 와 준 것이 7시 반. 그리고 지금은 10시 반. 남은 시간은 삼십 분 밖에 되지 않았지만, 더 이상 매만질 머리도 옷매무새도 없었다. 책장에 꽂아 놓은 만화책도 들어봤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글자가 눈에 들어올 리 없다. 때문에 달팽이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채 침대에 누워 자신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시계의 초침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이다.
  쩔그덕 쩔그덕
  그리고 그가 말한 시간이 된다. 옷이든 머리든 간에 더 이상 정리할 것이 없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마지막 점검을 빼먹는 건 꼼꼼한 소녀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다. 방 한 구석에 세워진 전신거울 앞에서 만전을 기한 뒤에야 소녀는 그의 방으로 향했다.


  "잠깐만 기다려줘."
  문을 두드리자 그 너머에서 약간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혹스러웠지만 지금은 그 또한 자신만큼 떨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에서 뭔가 특별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방을 정리하는 소리도, 옷을 다시 갈아입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딸깍 딸각하는 정체모를 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그 소리는 왠지 모르게 말끔하게 정리된 사무실을 연상케 하는 소리였다.
  켄지의 방문 옆에 미유키가 잠시 몸을 기댈만한 콘솔이 하나 있긴 했지만, 소녀는 콘솔에 의지하려 하지 않았다. 자신의 두 다리로 서서 문 너머에 귀를 기울이고는 문이 열리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거라는 걸 소녀 자신도 자각하고 있었지만 이미 정신력으로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소녀가 자신의 왼쪽 가슴 안에 든 건 사실 단백질 덩어리가 아니라 캠과 베어링에 문제가 생긴 기계 장치가 아닐까 하는 망상을 할 즈음이 돼서야 켄지의 우물쭈물하는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저, 저기 들어와도 돼."
  미친 듯이 쿵쾅대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기 위해 소녀는 깊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하얀 손을 뻗어 레버식으로 되어있는 손잡이를 내렸다. 기름칠을 한 지 좀 된 문이 살짝 마찰음을 내며 열렸다. 그리고 문과 문틀의 가느다란 틈새로 어두운 방안의 풍경이 보였다. 켄지는 일부러 전등을 꺼둔 듯 했다.
  청소를 한다고 들어온 적은 많지만 이런 상황에 마주치게 되니 그 사소한 풍경도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만화책과 소설책이 가득 꽂혀있는 책장과 어설프게 정리한 책상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나름대로 정리를 한다고 한 모양이었지만 소녀의 방에 비하면 난장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시선은 방 중앙에 놓여 있는 컴퓨터와 그 옆에 있는 침대, 그리고 컴퓨터 의자에 앉아있는 그에게 향했다. 소녀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하는 걸까 고민했다. 수없이 많은 로맨스물을 읽고 보아왔지만 현실과 가상은 다른 법이다. 거대한 손이 그에 걸맞게 커다란 붓을 들고 진하게 간 먹물을 듬뿍 머금게 한 뒤 자신의 머릿속에 처덕처덕 바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상상이 스치고 지나갔다. 서로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던 듯 했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좀 더 가까이 와줘."
  그 말을 한 소년의 얼굴이 어두운 방 안에서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소녀는 똑똑히 보았다. 안 그래도 이미 붉은 볼이 더 붉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소녀는 천천히 그가 앉아 있는 의자를 향해 다가갔다. 떨리는 다리에서 수줍음을 느껴졌지만 망설임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소녀였지만 두어 발자국 소년에게 다가갔을 때에는 작은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소년의 바지는 이미 내려가 있었다. 그 또한 부끄러운 듯 양손으로 가리기는 했지만 바지와 속옷을 내린 틈으로 그의 발기한 그것이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애초에 각오를 하고 오기는 했지만 이 정도의 급전개가 될 줄은 몰랐던 소녀는 당황했다. 그렇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뒤로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 뒷걸음질 친다면 앞으로 이런 기회는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소녀는 앞으로 다시 한 걸음을 다가갔다. 이제 소년과의 거리는 0에 가깝다. 언제든지 서로 껴안을 수 있을 거리다. 소녀는 애써 웃으며 소년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주면 돼?"
  소년은 자신의 가랑이 사이에 대고 있던 오른손을 들어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을 켰다. CRT 모니터는 약간의 시간을 두고 어두운 방안에 빛을 뿌렸다. 소년과 소녀의 옆 얼굴로 인공적인 빛이 산란한다. 빛은 방안을 조금 밝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소녀의 눈은 오로지 소년의 얼굴만을 향해 있었다. 모니터에 신경을 쓸 여유는 가지고 있지 못했다. 눈이 서로 마주치자 소년은 살짝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소녀는 자신의 후들거리는 다리를 원망했다. 또 다시 묘한 정적이 흐른다.
  그리고 침묵을 깨며 결국 소년은 토해내듯 말했다.
  "나 대신 클릭해 줘."
  소년의 손가락은 모니터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화면에 띄워진 것은 바야흐로 H 신에 돌입한 에로게의 캐릭터.
  화면 밖을 향해 있는 대로 가랑이를 벌린 화면 속의 소녀와, 속옷을 내린 소년. 그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순진한 소녀. 그 애처로운, 아니 악몽 같은 군상 위로, 달빛이 쏟아진다.
  아아, 오늘 밤은, 이렇게나, 달이 아름답다.
  그리고 투 사이드 업의 흑발에 떨어지는 은은한 빛을 받으며, 소녀는 이렇게 말했다.
  "이 조평시나!"

 

 

  "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일세. 이와 같이 천하에는 가상과 2D에 탐닉하는 통에 현실을 돌아보지 못하고 결국에는 목표조차 잊는 자가 수도 없이 많네. 꿈속에서 헤매이다 꿈이 현실로 화하여 자신의 앞에 서있는 데도 그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대체를 목표로 여기게 되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는가. 아까도 말하였듯이 그대의 관상을 보니 온순하고 영특하며 총기가 돌아, 그 기세를 다른 일에 쏟는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대성할 상이건데, 이토록 무의미한 일에 분통을 내고 앞을 보지 못한다면 그리로 전진해 얻을 것은 낭떠러지 밖에 더 있겠는가. 부디 허망함을 알고 안개를 흩어 총명한 눈으로 청명한 세상을 보고 살았으면 하는 바람에 이렇듯 두서없는 이야기를 풀어놓았던 것이니, 지금 내가 가진 것은 그대가 내 뜻을 왜곡치 않고 선의를 그대로 받아들여 주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뿐이네."
  내가 이야기의 끝을 고하자 내 앞에 앉아 이야기를 경청하던 남자와 메이드 카페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내게 고마움을 뜻하고 가게를 떠나가는데, 그 손에는 하나 같이 들고 들어왔던 봉지가 보이지 않더라. 나는 내 뜻이 그들에게 받아들여졌음을 그로써 느끼어, 그들이 버리고 간 봉지를 하나하나 주워섬기는데, 뒤에서는 지배인의 살기어린 눈총이 어리어도 나는 양손 가득한 동인지가 마냥 즐거울 뿐이더라.

 

 

 

 

──────────────────────────────────────────────

 

 

 

 

 

이 꼴 같잖은 것 쓰느라 정말 오래 걸렸습니다.




옛날옛날에 사이좋은 오누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빠는 사실 에로게임 오타쿠였어요.
그런 오빠의 생일날, 착한데다 미소녀이기까지 한 여동생은 오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하루, 오빠가 하고싶은 걸 들어줄게."
여동생은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생각해보고는 얼굴을 붉혔고 오빠 역시 당황했답니다.
오빠는 잠시 후 여동생에게 이렇게 말했죠.
"조금 있다가 내 방으로 와줘."
얼마 지나지 않아 오빠가 여동생을 불렀답니다.
여동생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받잡으며 오빠의 방으로 들어갔죠.
놀랍게도 오빠는 의자에 앉아서 바지의 지퍼를 내린 채였고, 책상 위의 PC에 소위 에로게임이라고 불리는 것을 켜 둔 상태였습니다.
오빠가 여동생에게 말했습니다.
"부탁한다. 나 대신 클릭해줘."




요 우스갯 보고 이걸 좀 늘려볼까 하고 쓴 건데
원작의 포스는 머나먼 말머리 성운처럼 아득하군요.
필력이 부족해서 그런 거겠죠.

여하튼 쓰고난 감상은
1. 나는 모에물을 절대 쓸 수 없는 대가리를 가지고 있쿠나.
2. 워해머를 하고 싶다.
입니다.

부디 재미있게 읽으셨기를 바라며 저는 당매 125선언의 다른 과제를 수행하러 이만.

 

 

 

 

 

Special Thanks

 

이 끈기없는 글쟁이를 기다려주신 광신도 님.
글 쓰는 동안 끊임없이 귀찮게 군 저에게 지치지 않고 조언을 해준 프로그레시브.

고맙습니다.

당근매니아
당근매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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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근매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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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근매니아
  • 2006-04-08
어느 늙은 용병 이야기

  딸깍.  나는 주머니 속에 처박혀 있던 지포를 꺼내 그 뚜껑을 열었다. 여기저기 흠집투성이인 지포는 이미 20년을 넘게 함께 지낸 녀석이다. 20년 전과 달라진 것이라면 이 녀석이 불을 붙이는 것이 바뀌었다는 것 정도.   라이터 옆구리, 길게 긁힌 자국에 오른손 검지를 가져다 댔다. 그리고 손톱으로 살짝 그 자국을 긁는다. 언제부턴가 불을 붙이기 전마다 하게 된 버릇이다. 라이터 옆이 긁힌 것이 13년 전 리비아의 반정부 게릴라 소탕전에서였을 테니 아마 그 때 즈음해서 가지게 된 버릇일 것이다. 매끈한 표면에 난 거칠한 부조리함을 즐긴다. 라이터를 오른손에 쥐고 긁다 보면 어느 순간 니코틴이 고파지는 때가 있다. 마치 갈증과도 같은 그 감각. 그 순간에 들이쉬는 타르의 끈적끈적한 쾌감을 위해 느긋하게 기다린다.  도시 한복판에 마련된 공원은 공원이라기보다 공터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바닥에 심어놓았던 잔디는 이제와선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고 곳곳에는 담뱃재와 휑하니 맨살을 드러난 땅 뿐이다. 매연이 가득하고 주변은 허름한 빌딩뿐인 이런 곳에 사람들이 휴식을 목적으로 올 리 만무하다.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이 작은 공간은 쓰레기나 버리러 가끔 들르는 공간이 되어 있었다.   오른손에 들려있는 지포를 손톱 끝으로 긁다가 왼손에 눈길이 갔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진 담배는 오늘도 완전한 한 개비가 아니다. 누군가가 피우고 가다 내 앞에 던지고 지나가는 반쪽짜리 꽁초들. 담배 살 돈이라고는 없는 빈털터리인 내가 니코틴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다. 그 끝에 비록 남의 타액이 묻어있다지만 내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불쾌한 경험이 한두 번이어야 꺼림칙한 것도 있는 법이다.  잠시 붉게 타올랐지만 지금은 하얀 재로 덮여있는 꽁초 끝을 내려다보다가 무언가가 생각났다. 손에 든 담배를 살짝 뒤집어 담배 옆구리에 써있는 상표를 읽었다. 혹시나 해서 확인한 담배는 역시나 고급이었다. 입가에 살짝 쓴웃음을 머금었다. 피우고 버리는 담배의 상표조차 그가 가진 돈과 연관이 되는 세상. 아까 이 꽁초를 버리고 간 사람은 검은 양복을 쫙 빼입은 중년 남자였다. 금으로 된 넥타이핀을 한 채 최신형 휴대전화를 들고 있던 남자. 통화 내용으로 봐서는 어느 회사의 중역인 듯 했다. 길이라도 잘못 든 거겠지.  어쩌면 오늘은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지저분한 빈민가의 길가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온통 가난한 인간들뿐이기에 부드러운 맛의 이런 고급 담배는 입에 대보기조차 힘들다. 그저 가난할수록 한 개비 한 개비가 독한 담배를 찾고 부유할수록 부드러운 것을 찾는다. 전자가 더 해로움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건강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자들은 그저 니코틴을 바랄 뿐이다. 이 시대에 한 인간이 손에 넣은 돈의 양은 그의 수명과 직결된다.  문득 니코틴이 고파졌다. 손에 들고만 있던 꽁초를 들어 입에 물고 손톱 장난을 그만 두었다. 지포를 오른손에 바로 잡고 톱니에 엄지를

  • 당근매니아
  • 2006-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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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ㅋㅋㅋ당매군 글 잘봤습니다. 댓글이 너무 재밌군요. 초록불쌤이 일일이 지적하시는 게 정곡을 찔러서일까요. 여하튼 글이나 댓글이나, 재밌게 봤습니다.

    • 2007-01-27 17:42:07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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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풉, 이글 올라왔을 때부터 예상했던 반응. 사람들은 자신의 거부반응은 과장되게 드러내도 괜찮은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때문에.

    • 2007-01-27 10:06:45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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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ㅎㅎㅎ; 글에는 자기 나름대로 읽히는 뉘앙스라는게 있는 거니까요. 그것까지 고려하고 상대를 비판해야 하는게 개념인의 자세 아닐까요 ㅋㅋㅋ (한 쪽에 국한되서 하는 말이 아니라) 인터넷상의 댓글이라는게 얼굴 맞대고 하는 대화같지 않아서, 어조, 제스쳐 같은 요소들이 빠지다 보니 소통 과정에 오해가 생겼던 것 같네용. 논쟁이라기 보다 언쟁 비슷하게 가는 느낌이니, 좀 흥분을 죽이시고 자기가 썼던 글이 어떻게 읽힐 수도 있는가를 되돌아보고 배려하시길;ㅅ;

    • 2007-01-27 08:44:44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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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록불

    바람의울림 / 역시 흥분할 일이 아닙니다. 글에서 상당한 흥분이 느껴집니다. 우리는 흔히 원인을 따지고 그에 따른 결과에 당위성을 부여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원인에게 돌리려는 행위일 수 있습니다. 당근매니아 님의 댓글에도 오버한 측면이 있으나, 그것이 바람의울림님 댓글의 오버를 정당화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근매니아 님과 바람의울림 님은 다들 한발자국 뒤로 물러나 생각을 가다듬어 보기 바랍니다.

    • 2007-01-27 02:12:36
    초록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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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파시스트나 군부독재자 같은 사람이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남의 작품이 맘에 안들다고해서 '당신은 이렇게 하시오 그런 내용은 옳지 않아 산뜻한 방법으로 다시 고쳐!'라고 말했습니까? 솔직히 당근매니아님께서 하신 주장에는 정작 리플 단 사람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확대해석과 비약을 하신 거 아니십니까 저는 순문학을 읽으시라고 당위성을 부여한적도 없습니다! 당근매니아님 작품도 필사해서 더 좋은 시를 내려고 한 제가 잘못한 거군요 매일 올라오는 게시물 중에서 필사를 하고 있답니다

    • 2007-01-27 01:25:54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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