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일곱시 삼십분 소녀

  • 작성자 진명훈
  • 작성일 2007-09-09
  • 조회수 10,121

 



일곱시 삼십분 소녀


 

 


                                                                -진명훈



 

 일곱시 칠분, 서둘러 집을 나선다.

 

 오늘은 늦잠을 자 버려 칠분이나 늦어버렸기 때문이다. 빠른 걸음을 내 딛으며 대강 목에 걸쳐진 교복 넥타이를 똑 바로 잡아매고 교복 옷 매무새를 다듬는다. 구겨진 와이셔츠 깃이 신경쓰이지만 뭐 어쩌랴, 그녀와 마주 치는 순간은 채 5초도 되질 않는걸, 그 순간에 지나치는 행인의 와이셔츠 깃까지 세세하게 살피지는 않겠지 뭘.

 

 이른 아침의 덜 녹은 공기가 미풍을 타고 얼굴을 스쳐가자 정신이 점점 투명해진다. 교과서며 참고서며 잔뜩 들어간 무거운 책가방도 그녀를 만나러 가는 이 순간만큼은 깃털처럼 가볍기만하다. 시장통의 북적북적한 사람틈도 인상한번 구기지 않고 무사 통과했다. 예전 같으면 바쁜 등굣길을 막는 사람들 틈을 억지로 파고들며 한바탕 전쟁을 치루었을 텐데 지금은 길까지 양보해가며 시장을 통과해 가는 것이다. 내 등굣길이 이렇게 행복하게 된 것은 약 두달전 횡단보도 맞은편에서 그녀, 일곱시 삼십분 소녀를 본 탓이다.

 

 아, 내 기억속의 그날에는 왜 이리도 복잡한 도시 위에 안개가 많이 끼였는지. 간헐적으로 지나치는 차의 질주하는 소리, 먼 곳에서 들려오는 개의 짖음, 가게문을 여는 소리를 제외 하고는 마치 라디오의 불륨을 최대로 낮춘 것처럼 정적만이 흐르고 있을 뿐이였다. 그 안개의 해운을 해치며 횡단보도 앞에 다다른 나는, 여느날처럼 헛된 공상을 하며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따르르---- 마침 신호등이 바뀌는 소리가 꿈결처럼 들리고 나는 앞으로 나에게 닥쳐올 그 무시무시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예상하지 못한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던 것이다.

 

 안개에서도 꽃 향기가 나는 건가. 나는 코끝을 알싸하게 젖어들어오는 꽃향기에 의문이 생겨 고개를 들었다. 그때 저 안개 너머 무엇인가 희미하게 내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짙은 안개속에 그림자처럼 흔들거리는 무언가는 나지막히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내 귀를 파고들어 온몸으로 젖어드는듯한 그 노래에 땅에 뿌리 박힌 듯 움직일수가 없었다. 신호등의 파란불은 점점 꺼져가고 내 앞에 다가오는 꽃향기의 근원의 모습은 점점 진해졌다.

 

 “아.”

 

 짧은 신음이 심장에서부터 전류를 타고 입밖으로 흘러나왔다. 약간 젖어있는 검은 머리칼 사이로 감은 듯 뜬 눈은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음계를 쫓고 있어 살짝 웃고 있었다. 이 세상엔 존재 하지 않는 천사의 나팔소리라도 듣고 있는 걸까.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그녀는 호수위를 걷듯 가벼운 걸음으로 천천히 내곁을 스쳐갔다. 지금도 귓가에 선명한 그녀의 콧노래 소리를 회상하면 아직도 그날의 전류는 내 몸에서 전율한다.


 어느 샌가 나는 그녀를 일곱시 삼십분 소녀라 부르고 있었다. 나처럼 교복을 입은 학생이고. 이름표를 차지 않아 이름은 알수 없었다. 내가 그녀에 관해서 알고 있는 것이라곤 그녀는 항상 7시 30분에 이 횡단보도를 건넌다는 것이고, 그녀는 학생이고, 나는 어느사이엔가 그녀를 좋아하게 되어버렸다는 사실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이렇게 가슴아프고 슬픈일인지는 나는 지금에서야 깨달을수 있었다. 소심한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나와의 운명의 끈을 이을만한 용기가 전혀 없었다. 그저 그녀를 마주칠수 있는 7시 30분을 기다리며 밤을 새우는 것 밖에 할수 없었다.

 

 나는 그녀를 잊지 않기 위하여 머릿속에 항상 그녀를 그려보았고, 알수 없는 미지의 그녀를 향해 수많은 시도 써보았다. 하지만 그 시의 끝은 항상 이런 식으로 끝을 맺었다. ‘해가 뜨면 사그라드는 안개같은 일곱시 삼십분 소녀여.’ 그렇다. 꿈결같은 이른 아침의 안개가 사라지는 동시에 그녀 또한 내 등뒤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나는 이와같은 사실에 좌절하며 눈물짓고 그녀를 잊어 볼까 하며 나를 자책했지만 어김없이 나는 내일 일곱시 삼십분을 위해 일찍 잠에 들었고, 자명종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떳던 것이다. 나는 결코 그녀를 잊을수 없다. 이런 결론을 내리자 나는 어찌할수 없는 절망감에 고개를 베겟잎에 쳐박았다.


 점점 나는 야위어 갔다. 밤에는 잠들기가 두려웠다. 하루 일과를 모두 마치고 불을 끔과 동시에 그녀의 미소가 불현듯 가슴속에서 치고 올라와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워 버리는 것이였다. 점점 선명해져 가는 그녀의 기억 앞에서서 손에 닿을수 없는 그녀에 대한 내 간절함은 더욱 골이 깊어져 갔고, 그녀에게 말 한마디 건내보지 못한 내 무능력함을 한 없이 자책하고 가슴아파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 손으로 내 심장의 균열을 후벼파다가 지쳐 쓰려져 잠이드면 꿈 속에서 조차 그녀를 그리다가 아침엔 다시 그녀를 만난다는 두근거림으로 내 하루는 그녀를 중심으로 돌고, 또다시 돌고 있었다. 이런 하루는 나를 점점 야위어 가게 만들었다.


 편지를 쓰자. 나는 그녀에게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녀 앞에 서서 단 5초라도 마주보고 대화할 자신감이 없으니 그녀에게 이 편지를 안겨주고 도망가자. 비겁한 나의 최후의 발악이였다. 죽지 않기 위한 나의 최후의 선택이였다. 편지지에 팬을 세우고 나는 머리를 쥐어짜다가, 화려한 미사여구 보다는 내 가슴안에서 불타오르고 있는 진심을 꺼내 놓기로 했다. 두서 없이 편지지 위에 꺼내 놓은 내 심장은 정황이 없었으나, 가장 진실하고 가장 아름다운 편지라는 생각에 마음에 들었다. 편지지에 곱게 싼 편지를 가슴에 품으며 나는 그녀를 그렸다. 일곱시 삼십분 소녀. 이 편지로 인해 나는 그녀와 새로운 운명의 끈을 이을지도, 아니면 영원히 안녕할지도 모른다. 이 편지가 그녀와 나의 운명을 판결짓는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가자 나는 이 편지를 태워 버릴까 하는 충동이 일었다. 그냥 이대로 그녀와 나는 횡단보도 앞에서 마주치는 평범한 행인의 운명을 순종하면 되지 않을까? 힐끔 바라본 그녀의 미소에 만족해 하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나는 이 편지로 인해 그녀와 내가 서먹서먹한 관계가 되어 결국엔 내 자신이 그녀를 피해버릴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며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든 그녀와 나의 관계를 정확히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대로 가다간 나는 미쳐버릴지도 모를 일이였기 때문이였다.


 오지 말았으면 했던 아침이 어김없이 밝아져왔다. 조금더 감겨 있었으면 했던 나의 눈꺼플은 어김없이 떠졌다. 오늘, 내 이 가눌 길 없는 사랑의 종지부를 찍으리라. 굳은 결심을 하며 나는 길을 나섰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나는 횡단보도 앞에 섰다. 횡단보도 맞은편에는 어김없이 그녀가 서있었다. 이로서 나는 내 운명의 심판을 피할길이 없음을 확신했다. 마침내 빨간 불이 파란불로 바뀌고 그녀가 횡단 보도를 건너오기 시작했다. 나는 다리에 못 박힌 듯 꼼작않고 서있었다. 여전히 음악에 취해 살며시 미소를 띄며 나를 스쳐가는 그녀의 손을, 잡고 말았다. 결국 그녀의 일상에 나라는 존재를 끼워 놓고야 말았다. 안개의 입자 하나하나를 바라보는 듯이 흐릿했던 그녀의 눈동자가 일시에 나를 바라보자, 나는 도망치고 싶다는 충동에 몸을 움찔했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는 나를 무슨 일이냐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붉어진 얼굴로 품속에 고이 접어두었던 편지를 그녀의 손에 쥐어주고 나는 서둘러 빨간불인 횡단보도를 건넜다. 건너오던 차들이 빵빵 거리며 나를 피해갔다. 그냥 차라리 나를 치어버려! 나를 치어버리라구! 나는 뒤돌아 보지 않고 숨도 쉬지 않고 한참을 뛰기만 했다. 이른 아침의 안개속을 빠져 나왔을 때야 나는 거친숨을 몰아 쉬며 터질 듯이 쿵덕거리는 심장을 움켜쥐었다. 기어코 저지르고 말았다! 좌절감 보다는 무언가 가슴이 시원해 지는 느낌에 나는 바닥에 주저 앉아 가쁜 숨을 쉬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그녀에게서 평범하게 스쳐지나가는 행인이 아닌것이다. 그녀의 손에 러브레터를 지워준 이상하고 수상스러운 남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 그녀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으로 내가 담겨 있다는 것 만으로도 나는 너무나 감사하게 여긴다. 그래, 그거면 된것이다. 그거면 된 것이다......


 그날 하루는 도저히 어떻게 흘러 갔는지 알수가 없었다. 친구들의 수다에도 그저 망연한 미소만을 띄운채 흘려 듣고 선생님의 말소리 조차 먼 산의 메아리처럼 울려 올 뿐이였다. 나는 햇빛이 쨍쨍한 이 오후의 하늘 아래에서도 그 일곱시 삼십분의 안개에 둘러 쌓여 그녀를 그리고 있었다. 어느새 밤이 되고 나는 내 방 침대에 누워 있었다. 불꺼진 뒤 찾아온 이 무섭도록 조용한 정적속에 그녀의 콧노래와 그녀의 향기와 그녀의 미소가 가득차 흐붓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나는 이대로 죽는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무섭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행복했을까.


 다음날 아침에 나는 여덟시에 집을 나섰다. 일곱시 삼십분 소녀를 볼만한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였다. 결국은 이렇게 되고야 말았구나. 나는 일곱시 삼십분 소녀를 피해서 다니는 도망자가 되고야 말았다. 그녀에게 평범한 행인이였던 지난 날이 미치도록 그리웠지만, 나는 과거를 후회하지 않고 천천히 그녀를 지워가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자 마음만은 가벼워져 그녀로 가득찬 머릿속을 잊을수가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채 횡단보도에 선 나는 왠지 내 앞에 일곱시 삼십분 소녀가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감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아니야, 이 바보 같은 녀석아. 지금은 여덟시야. 일곱시 삼십분 소녀는 삼십분 전에 이미 떠나갔어. 나는 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든 순간 나의 눈은 커지고 다시 온 몸이 굳어버렸다. 내 앞에 일곱시 삼십분 소녀가 방긋이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는 일곱시 삼십분 소녀잖아. 왜 여덟시에 있는거지? 이른 아침의 안개는 이미 걷혀졌어. 그런데 너는 왜....?


 빨간불이 꺼지고 파란불이 들어오자 그녀가 내게로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차마 다리를 움직일수가 없어 긴장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귀에는 이어폰이 없었지만 여전히 지난 날처럼 흐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가 마침내 횡단보도로를 다 건너고 내 앞에 섰을때, 그녀의 꽃 향기가 진해졌을때, 그녀의 미소가 내 앞에 선명해 졌을때, 그녀는 내게 말했다.


 기다렸어. 평소에도 네가 오는 일곱시 삼십분을 기다렸어. 우린, 서로를 기다려 했었네?


그녀는 빙긋이 웃었다. 음악을 들으면서 웃었던 것이 아니였고 나를 향해 지어주던 웃음이였었나. 그랬었구나. 그랬었구나. 나를 향해 웃어주던 것이였구나. 알수 없는 미묘한 감정에 나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그녀에게 있어서 일곱시 삼십분 소년이였던 것이다.

 

진명훈
진명훈

추천 콘텐츠

초혼

   “그래요, 언제부터 였나요.” “하지만......” “그러니까, 지금은 어떠한 의심도 없이 묻는 겁니다. 당신 안에 아버지가 계시다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건가요?” 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진료실을 박차고 나가 버렸습니다. 뒤통수를 쫓는 어머니의 애절한 눈빛은 제 머리채를 쥐어 잡는 듯 했지만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수 없었습니다. 그는 제 안에 가득한 아버지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저에대한모욕이자 아버지를 모독하는 것이였습니다. 아버지를 헛된 허깨비의 망상으로 여기는 그의 태도에 너무나 화가 났습니다. 병원 밖을 나와 어머니가 나올 때까지 어머니의 차앞에서 기다렸습니다. 어머니는 무척이나 탐탁지 않은 표정이셨습니다. 차가 병원을 떠나고 깊은 터널을 지나고 있을 때 어머니는 입을 열었습니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주홍빛 조명이 물들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어.” “경수야, 너 왜 그러니?” “뭐가 말이야.” 글을 쓴다는 친구였습니다. 그는 말 없이 제 옆에 앉아 있다가도 이따끔씩 저런 질문을 하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전 말없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끝까지 저를 추궁해 답을 얻었을 텐데, 그 친구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말 없는 미소가 그에게는 더 확실한 대답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친구는 그 말없는 미소의 의미를 여러모로 파헤친 생각들을 소설화 시켜 글을 써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참 재미있는 친구인것 같습니다 아버지. 그 아이는 여러편의 소설을 제게 보여주었는데, 사실 제가 유령이였다느니, 몇 년전에 이 학교에서 자살한 귀신이였다느니, 독특한 상상들이 가득한 소설들이였습니다. 그 친구는 오늘도 제 옆자리에서 무언가 골똘하게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뭐가 말이야.”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생각에만 몰입하는 일.” 저는 말없는 미소를 다시 지어 주었을 뿐이였습니다. 그날밤 이였을까요, 아니면 그 후 얼마더 지나서 였을까요. 저는 제 안에 가득한 아버지의 존재를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순간부터 저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결핍되 오던 외로움을 잊을수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4 촉도 낮은 형광등 아래 어머니와 저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 상자안의 사람들은 뭐가 그렇게도 즐거운지 책상을 손으로 텅텅 치며 배를 잡고 웃음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어머니와 저의 얼굴에는 알록달록한 텔레비전의 색채가 여기저기 일그러지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입을 열었습니다. “뭐가 말이야.” “의사가 하는말 못들었니? 너 정신병이라잖아.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온 정신병이......” 저도 모르게 어머니에게 소리를 질러버렸습니다. 텔레비전 속 방청객들의 환호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습니다. 어머니는 놀란 눈으로 나를 올려 보았습니다. 눈가에는 눈물이 이미 가득 고여 있었습니다. 잔주름을 가득 적신 눈물은 그마저도 모자라 어머니의 볼 위로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순간 마음이 울컥 저려왔습니다. “경수야.” 저는 탁 풀려버린 맥에 그

  • 진명훈
  • 2007-08-26
블루 다이어리

  학교 점심시간 이였다. 핸드폰을 학교 선생님에게 들키면 압수 당하기 때문에 화장실 칸에 들어가서 핸드폰 폴더를 젖혔다. 경숙의 문자였다. 폴더를 다시 닫았다. 닫히는 순간 들리는 딱 하는 소리가 정적속을 날카롭게 파고 들었다. 초조한 마음에 핸드폰을 엄지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머뭇거리다가 다시 핸드폰을 열었다. 그리고 경숙의 번호를 꾸욱꾸욱 눌렀다. 한 번호 번호를 누르기가 왜 이렇게 망설여 지는지 알 수 없었다. 짧은 신호음이 흐르고 딸깍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운 목소리였다. “미안하...” “수술비는 내가 낼게.” “뭐?” “그런데...?” “끊을게. 곧 수업 시작해.” 2  경숙은 짧은 미니스커트에 귀걸이를 한 차림새로 날 맞이했다. 나는 그녀의 억지로 짓는 미소 띈 얼굴보다 그녀의 배를 먼저 보았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자신의 배를 살짝 본 그녀는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배가 고픈 게 아니야. 알지?” “아주 식성 좋은 아이가 태어날 것 같군.” “나 사실 무서워.”  콜라 컵의 뚜껑을 열었다. 때마침 얼음이 미끄러져 사그락 거리는 맑은 소리를 냈다. 나는 얼음을 입에 넣고 오도독 씹었다. 얼음을 씹을 동안 그녀는 가만히 나의 말을 기다렸다. “그래, 지우자. 마치 연필로 잘못 쓴 글자를 지우개로 지우듯 지워버리자. 그 아이는 어떤 글자를 잘못 썼을까. 모음을 잘못 썼나 자음을 잘못 썻나 아님, 마침표를 잘못 썼을까?” 3  동시에 방문이 열리고 현철이와 여자들이 소란 거리는 소리가 문 밖에 들려왔다. 문이 열리고 현철이가 방안에 들어와 여자들에게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마루에서 여자들은 발에 묻은 백사장의 모래를 털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현철이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찌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자들은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나는 그들이 하는 이야기에 간간히 고개만 끄덕여줄뿐 다행이 분위기는 현철이가 재미있게 이끌어 가고 있었다. 처음 마신 소주가 이제야 취기를 돋기 시작했다. 이미지가 정신 없이 허물어지고 여자들의 톤 높은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울리는 와중에 나는 그 사이로 눈동자 두 개를 보았다. 그 눈동자는 마블링처럼 물위에 퍼지는 이미지 가운데 또렷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어지로움을 참지 못하고 화장실 다녀오겠다는 말과 함께 숙박집 문을 나섰다. 그리고 해변가로 터벅터벅 걸어나갔다. 밤이 되자 해변가는 낮보다는 한산했다. 여름방학동안 추억을 쌓자며 현철이와 동수는 억지로 나를 이곳으로 끌고 왔다. 그들은 표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였고 나는 조용한 사람이였다. 그들에겐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나 같은 존재가 필요했다. 사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 보단 관심이 없기에 대충 흘려듣고 나는 내 속의 이야기들에만관심이 있었다. 증거 없는 거짓말이기에 그들은 완전히 속아 나를 배려심 많은 친구라고 믿은 것이다. 어둠과 맞닿은 바다의 해안선을 바라보다가 뒤쪽에서 모래가 사각 사각 밟히는 발소리가 들

  • 진명훈
  • 2007-08-02
자 살자 살자

                       “캬아- 쓰다!” “에이, 죽는날까지 안주벌레 꼴 이라니.”  아파트 옥상이라 그런지 밤바람이 유난히도 심하게 불었다. 영훈은 술에 취해 빨개진 볼이 찬 바람에 에인듯해 두 손으로 따뜻이 감싸다가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아파트 난간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난간에 팔을 걸치고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수천의 저마다의 창문마다 환하게 밝혀 있는 불빛들이 보였다. 저 불빛 하나하나에 사람들은 저마다의 꿈을 간직하며 살고 있겠지. 그때, 딸랑하는 문에 달린 종소리와 함께 손에 케이크를 든채 빵집을 나서는 중년의 사내가 보였다. [문자메시지 001 이잖아. 미안해.]  영훈은 신발을 나란히 벗어 놓고 난간위로 비틀 거리며 올라섰다. 높은 곳을 그렇게도 무서워 했었는데, 지금 심장은 이상하리 만큼 고요하고 평안했다. 술을 마셔서 그런가. 심장은 내가 세상에게 이별을 고하는 마지막 이 순간, 자신의 고동소리가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움직여주었다. 밤바람이 내 등을 떠밀기라도 하려는 듯이 세차게 몸에 부딪쳐 왔다. 넥타이가 마치 피리에 반응하는 인도의 뱀처럼 요란스럽게도 춤을 추었다. 바람아 서두르지마 곧 뛰어 내릴테니까. 영훈은 차가운 밤공기를 폣속 깊이 들이 마셨다. 얼음가루가 섞인듯한 공기가 찌르르르 뱃속을 훑고 지나갔다. 마지막 호흡이다. 살면서 들이쉬는 마지막 호흡이다. 영훈은 눈을 꽈악 감았다. 그리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여기서 한발만 내 딛으면 모든게 끝나는 거야.  “허억, 죽는줄 알았네!”  그녀는 영훈의 놀라는 흉내까지 내면서 배꼽이 빠질정도로 웃어 재꼈다. 얼굴이 빨개진 영훈은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아 그만 웃고 빨리 가! 남 자살하려는 게 그렇게 웃겨?”  그녀는 씨익 웃더니 영훈이 보란듯이 소주를 한잔 더 따라 마셨다.  “결국, 난간에서 내려오셨네요 아저씨.”  “한잔 마시고 얼굴 빨개지는 아저씨 보단 잘하니까 걱정마세요. 그리고 제 이름은 당신이 아니에요. 서경숙에요. 서경숙.” “죽으려는 사람이 왜 남의 눈은 신경쓰실까. 그냥 콱 뛰어 내리면 되지.”  “왜요, 아저씨?”  “생일인데 왜 못 죽어요?”  경숙은 그런 영훈의 모습을 빤하게 잠시동안 쳐다보더니 이윽고 웃음보를 터트렸다. 영훈은 괜히 말했다는 생각에 얼굴이 빨개져 경숙에게서 고개를 돌려 소주를 한잔더 들이켰다. 경숙은 배를 쥐어잡으며 웃으며 말했다.  경숙은 갑자기 웃음을 멈췄다. 갑자기 찾아온 무거운 정적에 영훈을 놀라 경숙을 바라보았다. 경숙은 방금까지 웃음으로 가득했던 표정을 거두고 왠지 진지해진 표정으로 멍하니 무언가를 떠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가 의식속에서 떠오른듯

  • 진명훈
  • 2007-06-03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
  • L is fatal

    뭔가 해서 와 봤더니ㅋㅋ

    • 2007-10-19 13:26:41
    L is fatal
    0 /1500
    • 0 /1500
  • 익명

    관심^^

    • 2007-09-17 03:36:10
    익명
    0 /1500
    • 0 /1500
  • 익명

    이야, 이런 분위기의 글...정말 좋아해요. 잘 읽고 갑니다~

    • 2007-09-16 22:58:32
    익명
    0 /1500
    • 0 /1500
  • 코리엘

    워, 엄청난 댓글. 아무 이유 없이 늘려봅니다. 글 자체는 특출난 맛이 없네요. 좀 평범하달지..

    • 2007-09-15 20:18:22
    코리엘
    0 /1500
    • 0 /1500
  • 익명

    좀 허무하긴 하지만 좋네요. 자살자살자는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 2007-09-15 14:48:14
    익명
    0 /1500
    •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