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
- 작성자 위다윗
- 작성일 2024-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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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수 260
항상 그랬듯, 이번 토요일 아침의 여유 또한 바울에겐 닿지 못할 별과 같은 신기루였다. 새벽동이 트고, 그의 답답한 방의 창문 너머로 새들은 지저귀었지만, 입시생인 그의 피폐한 루틴을 더 극명히 보여주는 자연의 싱그러움일 뿐이었다. 물론 가끔 예상치 못한 기쁜 날도 있었다. 특별히 부모님의 기분이 좋은 날이면, 아침 7시쯤 급하게 준비를 하고, 아빠가 모는 차를 타고 서울을 벗어나 양평공기를 쐬곤 했었다.
오늘은 어떨까.
“바울아, 엄마아빠 바람 좀 쐬러 갈게. 밥 먹고 공부하고 있어라.”
“네.”
역시 시험을 몇달 남기고 누가 산책이나 시키겠는가, 하며 바울은 내심 탈출을 기대했던 자신이 우스웠다. 그리고 그들과 같이 잠시 웃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의 고통이 해결될 리는 없었다. 어느날 갑자기 자기를 읽씹하고 투명인간 취급하는 현석이형을 그렇게 쉽게 잊을 수는 없었다. 현석이형은 더이상 바울에게 존재하지 않았고, 어쩌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더 끔찍하게 존재하지 않았다. 형의 전화번호, 연락처, 주소는 더이상 그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현석이오빠? 군대에서 되게 잘 지내다던데? 너 연락을 안 받는다고? 좀 이상하긴 하다. 내가 뭐 보내면 바로 답 옴.”
“아 그렇구나…뭐, 내가 밉나보네…”
“내가 한번 왜 너한테 차갑게 구냐고 찔러볼까?”
“아니 절대. 어차피 이유를 모르는 것도 아니거든. 넌 그냥 신경 꺼.”
서현이와의 대화가 다시 떠올랐다. 도대체 왜. 이 말 외에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렇다. 현석이형은 바울과의 단절에 대해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보란 듯이 그의 주변 사람들과도 편하게 연락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군대생활도 무척이나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핸드폰으로 자기가 두달 전에 보낸 장문의 문자를 읽어보았다.
“사랑해.”
이 사랑은 마치 매혹적인 마약처럼 바울자신을 더 깊은 늪으로 빠지게 만드는 동시에 현석이형이 그를 영원히 떠나게 만든 악취였다. 사랑이 이렇게 아픈걸까. 사랑이 이렇게 악한 걸까. 교회에서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마치 정수기의 물처럼 흘러나왔다.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 성도들 간의 사랑. 사랑이 그렇게 순수하고 이상적일 리가. 어릴적 미소를 짓게 했던 이 단어는 오늘 바울에게 한숨을 내쉬게 만들었다.
바울은 부얶으로 나가, 찬 맨밥을 전자렌지에 돌리고, 밥이 나오자 아무 반찬없이 아침을 먹었다. 김치와 멸치 반찬은 안 그래도 없는 밥맛을 깔끔하게 지워버릴 것이 뻔했다. 맨밥은 누가 설탕을 뿌린 것처럼 희미하게 단 맛이 담겨 있었다. 그는 마치 지친 걸음으로 오르막길을 오르듯이, 밥그릇에 찬 쌀을 입에 달린 구멍에 느리게 넣었다.
밥을 다 먹으니 오전 10시였다. 시간은 마치 바울의 지루함을 달래주듯이 경주마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이제 드디어 책을 펼 시간이 왔다. 책상에 책을 피고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공부? 누가 공부를 할 수 있는건가? 학교에 가면 반겨주는 또래애들이나 동생들이 있는 애들? 자기가 마음이 식어버린 사람들을 씹어도 본인은 절대 씹히지는 않는 잘난 사람들? 뭐, 현석이형도 공부를 잘하지는 못했지만 아예 시작조차 떨어지지 않는 자신보다는 더 나았을 듯 했다.
“시발, 어쩌라고. 잠이나 자야지.”
바울은 그렇게 어젯밤 불면증과 씨름했던 침대에 다시 누워 배고픈 짐승처럼 잠을 먹었다. 깊은 잠 속에 모든 감각을 잃은 채로 숨을 내뱉고 마시고를 반복하다, 핸드폰 알람 소리에 깨었다. 지금 뭐하고 있냐는, 부모님의 심문질문이 틀림없었다. 아니면, 아니, 그 가능성일 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것을 미치도록 기대하고 있었다. 설렘과 공포와 비몽사몽한 정신에 휩싸여 핸드폰을 집어 홈 버튼을 눌렀다.
현석이형: “난 너가 역겨운데 끌려.”
뭐라고?
‘정말 형은 이제까지 날 좋아했던 거야? 형이 5년 전 내게 가장 좋아하는 동생이라고 말했던 것이 변하지 않았던 거야? 그런데 어떻게 나에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어? 내가 얼마나 역겹길래? 그래도 형, 그저 그 진심이라도 간직해줘. 우리 서로 친하지 않더라도, 계속 이렇게 차가워야 하더라도 그게 형의 진심이라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해.’
바울은 눈물겨운 미소를 짓고 그저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마비되었다. 형에게 답장하고 싶은 수많가지의 말들이 있었지만 아무런 글자도 보낼 수 없었다. 그저 이 말도 안되는 모순을 끌어안는 길 말고는 없었다.
바울은 기상용 알람을 희미하게 들었다. 설마 그 문자가 꿈이었을리가. 이 알람소리는 진짜여서는 안됬다. 아주 선명하고 날카롭게 울렸던 그 문자 알람 소리가 허구였다면, 그것은 그의 갈대같은 소망이 꺾이는 일이었다. 바울은 알람소리가 계속될 수록 무엇이 허구의 소리였고 무엇이 현실의 소리였는지 분간했다. 그 두 세상은 마치 바울을 끌어안으며 내뱉기를 반복하는 것만 같았다. 그는 현실에도, 상상에도, 속하지 못한 존재였다. 그는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확인해보았다. 현석이형과의 문자에선 역시 자신이 보낸 장문만이 남겨져 있었다. 한편, 현석이형의 그를 향한 마음은 아무도 알 수 없는 비밀로 남겨져 있었고 바울은 역시, 다시 살기 위해 형을 잊어야 했다. 영원히 아프더라도 영원히 이 아픔은 부정되리, 라고 외로이 되새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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