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내가 쓴, 마지막 소설

  • 작성자 화자
  • 작성일 2024-03-21
  • 조회수 353

이야기의 끝은 언제나 씁쓸하다. 그것이 무슨 이야기든지 간에 끝난다는 건 씁쓸하다. 왕자와 공주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있는 통속적이고 관념적인 여느 이야기 마저 그렇다. 

처음 글이 아름다울 수 있다고 꺠달은건, 황순원 작가님 덕분이었다. 초등학생이었을 때<소나기>를 보고 내 영혼이 젖어버림을 느꼈다. 이 후 씨의 작품을 열렬히 사모하게 되었다. '막은 내렸는데', '눈', '우산을 접으며' '땅울림'등등의 것들을 읽으며 나는 곧 소설이 사람의 영혼을 담아낼 수 있는 장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김멜라씨의 소설을 읽을 때도 그러했다. <제 꿈 꾸세요>와 <설탕 더블더블>, <물질계>와 <이응이응>을 읽을 떄, 그곳에서 내가 만난 것은 나의 어떠한 깊은 심장이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생긴 것은 김현 평론가의 글을 읽으면서이다. <행복한 책읽기>와 <김현문학전집>을 읽으며, 나도 이런 평론가의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게 소설로 방향을 튼 것은 아마 권여선 작가의 책을 읽고나서 일 거다. 어떤 연상작용이었는지 몰라도 나의 비평은 소설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솔직히 하자면 태어나서 세계문학전집같은 걸 눈에 담아본 적 없다. 누군가 톨스토이와 카뮈와 카프카를 이야기 할 때, 나의 좁은 식견으로는, 그들의 무거운 글들을 잡아서 소화해낼 마음이 서지 않았고, 애초에 관심도 없었다. 폴 드 만과 데리다 정도가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외국 작가였다. 또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었다. 어디 가서 부끄럽게도, 하고 있는 일이 없습니다, 라는 말을 꺼내기 싫어서, 억지로 토해내듯, 글 써요, 하는 말을 내뱉을 때, 난 수치심을 느꼈다.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런 내가 부끄러웠다. 그러면 주변에서 대치동 강남에서 학원받으며 과학고 간 친구들은 콧방귀를 뀌고, 누군가는 한심하게 쳐다본다. 초등학교 떄 별볼일 없던 친구가 예고의 문예창작헉과에 들어간 것을 보면, 알 수 없는 열등감에 시달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너도 글 써? 나도 글 쓰는데...하고 말하면 듣는 말이, 좋아하는 작가 누구야? 카프카? 톨스토이? 글 보여주면 좋겠다...등의 것들이다. 난 사실 정지용과 황순원과 김멜라와 권여선을 사랑한다, 라고 말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어떤 연상작용이었는지 모른다. 그 곳에서 뽐내기 위해 아는 척 했다. 톨스토아보단 도스토예프스키지 않아? 사실 난 그 누구의 작품도 읽어본 적 없다. 이건 고해성사가 아니다.  지금 내가 이렇게 하고 있는 말의 의중을, 나는 알지 못한다. 당신들은 알까? 

마지막으로 쓴 글은, 작년 11월에 글틴에 기고한 <카뮈의 시네마와 이상한 세상에 대한 연구>다. 그건 내 전부다. 나는 그 글을 쓰며 나에게 글이란 무엇인지 알았고, 이 후로는 글을 쓸 수 없었다. 내 모든 걸 쏟아부었다. 이 후 알게 된 사실은, 결국 글이란 세상이란 거다. 문장이란 것을 조립, 배치하며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 나간다.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재미다. 근데 그 세상에서 내가 보았던 것은 가장 외면하고 싶은 진실이었다. 결국 내 세상은 어떠한 욕망의 발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 조립된 세상의 이면에는, 그 어떤 계기나 동력도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하고싶은 말이 있는데, 그것을 왜 하는지 모르겠지만, 하게된다. 그건 나르시스적이다. 누군가는 그것으로부터 변명하기위해 사회참여적인 글을 쓴다. 나는  글에 사회참여적인 것 따위를 넣지는 않을 거다. 연대를 위한 사리사욕을 채우고 싶지는 않다. 그것도 결국 욕망의 변주와 다르지 않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욕망을 피해야 한다. 욕망이 배태하는 것은 윤리의 도태고, 윤리의 도태가 배태하는 것은 영혼의 상실이다. 영혼없는 글쓰기란 의미없는 짓이다.

학교에서 친우들과 말을 하지 않게 되고, 가정에 소홀해지며, 과묵해지고, 아나키스트가 되어 그 어떤 영향도 행사하지 않으려고 할 떄, 나는 욕망을 잃었고, 어느새 관찰자의 시점에서 이성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내가 글을 쓰지 않게 되었던 것은 그 때 부터였다.  몇달이 지나면 일상에서 멀리떠나 가끔 뜬 구름 잡는 창 문을 바라보고, 의미없는 소리를 내뱉고, 팔과 고개를 꺽어들고 어눌한 발음으로 대화하며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다.  그저 어딘지 모를 곳에 앉아있다. 혹자는 나를 정신병에 걸린 거 같거나 영혼없어 보인다고 질정하지만, 나는 영혼을 찾고 있는 중이다. 영혼을 찾는 길에는 당신들이 없다. 나도 없다. 아무도 없다. 그곳에 있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내 영혼은 온전할 수 있다. 

본래 글이란 기록의 산물이었다. 기록을 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인간이란 존재는 자신의 영혼을 담기 위해 기록의 산물에 허구를 더해, 왜곡을 하고, 소설이란 것을 만든다. 내 글도 그런 것이었는지 모른다.  옛날에는 그랬을거다. 

내가 글로 하고 싶었던 것은 영화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써본 소설인, 글틴에 등재되어있는 <이명>은, 새로운 스릴러 영화를 크면 찍고야 말겠어!라는 심부를 지니고 초등학생 떄 부터 가지고 있던 일종의 시놉시스였다. 중학생이 되고, 한 해를 지나고, 글틴을 알게 되며, 혹시 모르니 메모 형태로 남기자,하는 생각으로 쓴 글이다. 일주일 고민하고 세 시간만에 한고로 퇴고해서 올렸다. 솔직히 그 떄는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브레송과 히치콕의 영화를 소설화한 버전 같다는 느낌도 있었다. 알지 못하는 과거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이 어떻게 공포로 변모할 수 있는지 표현하려고 했다. 이제와서 보면 쓰레기다. 영화로 만들어져야할 것이 텍스트로 존재하고 있으니, 일종의 딜레마에 빠진 작품인 거다.

그리고 쓴 글이 '우리를 나서며'와 '연필을 깎으며'인데, <우리를 나서며>에서는 누벨바그, 특히 <400번의 구타>를 전적으로 모방하고자 했고, <연필을 깎으며>는 잠시 쉬어가는 취지로 쓴 간단한 글이다. 네번째 쓴<빗물/문자풀이>는 황순원 작가님의 4.19에 대한 강렬한 통렬을 담아낸 명단편 <문자풀이>의 리메이크 버전에 지나지 않았다. 이 두 작품을 쓰며 나는 내가 월장원에 목이 말라있다는 것을 꺠달았다. 실은 내게 중요한 게 무엇이었는지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글을 쓰는 목적을 상실했고, 문학성 있는 글을 쓰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그떄는 시간만 나면 글틴에 접속해서 코멘트를 찾고 월장원을 꾸준히 지켜보았다. 마음 속에 영혼을 상실하고 욕망으로 누덕거리던 나는, 폐인마냥 휴댚폰과 아무 전자기기에 머리를 박고, 나보다도 못났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월장원에 당선되는 것을 보며,  내가 알던 사람들이 성공하고, 나는 어딘가로 꾸준히 빨려들어가서, 결국은 묻혀지고 있음을 느꼈다. 드러운 곳에서 나 혼자 질척거리고 있었다. 당신들이 너무 미웠고, 그랬던 내가 더 미웠다.  그랬던 내가 나를 담아낸 건 <카뮈의 시네마와 이상한 세상에 대한 연구>에서 부터였다. 

<카뮈의 시네마와 이상한 세상에 대한 연구>는 회복하는 글쓰기였다. 정말로 미안했고, 아무래도 내가 아닌 것 같게 되어버린 나를 구하려고 쓴 글이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내 모든 것을 말 그대로 쏟아부어 나의 잘못과 오랜 더럽고 혐오스러운 욕망으로부터 도망쳐나왔다. 나는 다시 살아났다. 그제서야 영혼을 담은 글이란 이런 것이로구나, 하고 깨달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에게 의미있는 글이었다. 


내가 살아난 세상은 너무나도 어려운 세상이었다. 그 글에서 나는 나를 너무나도 많이 쏟아낸 나머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한 해를 떠나보냈다. 영혼을 어떻게 쏟아부었는지도 모른 채, 나는 쏟아부었고, 남아나지를 않았다. 글을 쓰지 않으며 나 역시 세상과 유리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무언가라도 해보자고 쓴 졸문들이 있다. <광화문 소나타>, <검은 세상, 하얀 겨울>이 그렇다. 그럴수록 나를 허공으로 이끈 것은 메너리즘이었다. 오히려 욕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때 보다 더 퇴후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펜을 끊었다. 이런 글들을 쓸 바에야 차라리 제대로 된 글을 쓸 것이고, 제대로 된 글이 써지지 않는다면, 그 떄까지 글을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나는 여느 여름날 내가 그러했듯, 또는 단풍이 쌓여왔던 가을날 그러했듯, 책상에 앉아, 어느 동력도 없이 이런 글을 끄적이고 있다. 이 글을 쓰는 나에게는 영혼이 있을까. 이 행위의 알맹이가 비어있음을 꺠달은 나에게 더 이상의 진심은 없다. 그런데 왜, 왜, 나는 이렇게 앉아서 연필을 들고 있는거죠? 

하아....

저는 어떻게 해야하죠?  

........

누군가는 이 것을 읽고 소설도 아니라고 할지도 모른다. 글 같지도 않다고, 찟어버려야 할지도 모른다고 하더라도 나는 원망치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소설이다. 이 글은, 화자의 소설이다. 나의 소설이다. 지금껏 나는 소설을 써오며, 그 세상에 들어가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여럿있었다. 그떄는 알지 못했다. 사실 진정으로 내가 영원히 살고싶었던 순간은 소설 속 세상이 아니라, 삐그덕거리는 의자에 앉아, 종이 위에 연필을 끄적이고 있는, 고요하고 행복하고, 순수하다고 믿어왔던 나의 어떤 시간이었음을. 결국 나에게 조립하고, 재배치할 수 있었기에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던 세상은, 나의 허구적 세상이 아니라, 그런 세상을 창조하고, 행위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나에게 소설은 그런 것이었다.  나는 글을 쓸 때가 가장 행복한데, 정작 나의 행복에는 근본이 없다. 도저히 이래서는 안된다.

 다시 글을 쓰면 이렇게 될 줄 알았다. 

글쓰기가 무섭다. 

나는 이 글에 나의 영혼이 담겨있다고 믿는다. 내 영혼은 이미 내가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고있다. 행복도 결국 욕망의 산물이다. 

나는 나를 위해 나를 떠난다.

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

밤이었고, 유리창으로 별이 얼어붙어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나는 책상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그 곳에서 나는 또,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감정에, 어딘가 모르게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다. 이 후, 한 참 동안 연필만 끄적거리다가, 연필을 놓는다. 이면지 위로 지우개 똥이 흩뿌려져있고, 난 수많은 원고를 들고 일어서 어딘가로 떠난다. 나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허전하지만, 후련해 보인다. 나의 형상이 흐릿해져갈 때 즈음, 난 더 이상 소설이 없을 것이라는 어떠한 확신에 가득 찬다. 그렇게, 나는 나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가고 있었다. 나는 이제 이 이야기가 끝나야 할 시간임을 안다. 유리창에 차게 서리가 낀다. 오랜 사족을 끊어버리자.  저 만치 하나의 점 하나로 멀어져가는 나의 뒷모습에 오래오래 행복한 시간만이 가득하기를. 부디 이 이야기가 완전히 끝나버렸기를. 그렇게, 나는 저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추천 콘텐츠

가을 소나타

디귿씨는 요몇칠 동안 인력 사무서를 전전하고 있었습니다. 본래 모 기업에서 사무부장을 지냈다는 디귿씨는, 회사 내부평가에서 “당신은 이 회사에 무얼해주실수 있나요?”라는 대표이사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까요? 내부평가 다음날, 디귿씨의 책상에는 각종서류들과 필기구, 타자기 등이 대용량 상자에 담긴 채, 한쪽 구석으로 치우쳐져 있었습니다. 지저분했던 자신의 자리에는 오랜 직장동료 임 차장이 앉아있었지요. 임차장은 대용량 상자를 아무렇지 않게 디귿씨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날 디귿씨는 해고통보를 받았습니다. 회사를 위하지 않은 사람은 필요없으니, 이제 그만 퇴직하시라는 대표이사의 통지서와 함께 말이지요. 집에 돌아가는 길, ‘당신은 아무래도 회사를 위하지 않고 있군요.’라는 대표이사의 말이 자꾸만 눈에 걸렸습니다. 30년 동안 뼈빠지게 오로지 한 직장에 몸담아온 디귿씨는, 자신이 버텨원 세월들이 부정당한 것만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이 회사에 무얼 해주실 수있나요아무리 그 질문을 상기시켜본다해도 디귿씨는 답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이 질문이 임 차장에게 돌아갔다면 임차장은 답 할 수 있었을까요? 이사 본인조차 이 질문에 답은 하지 못할 것 같은데. 나는 그냥 돈을 위해 회사를 다닌 것 뿐인데. 디귿씨는 잠시 상심했습니다. 이제 자녀들의 대학비와 식비, 자취비, 아내의 용돈,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월세와 세금은 어떡하나요. 그는 그 모든 것을 위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가족들에게는 해고통보를 차마 말할 수 없어서 비밀로 부치던 참이었지요. 해고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디귿씨는 사람들이 즐비한 인력 사무소에 들어섰습니다. 형광등이 나란히 마주 앉은 사람들 위로 길게 늘어져 있습니다. 디귿씨는 형광등의 끝자락에서 처음으로 놓여진 등에 다다를 때까지 오래간 기다렸지요. 그렇게 해가 저무는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상담원에게 닿을 수 있었습니다.막노동이라도 할 참이니 아무거나 주시오. 디귿씨의 말에 상담원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이제 환갑을 바라보시는 분이니 막노동도 힘들 것 같다고. 애 쓰지 마시고 집에서 편히 쉬시라고. 디귿씨는 억울했습니다. 무릇 인간이라면 늙기 마련인데. 나이를 먹는다는게 디귿씨의 잘못은 아니잖아요. 이 녀석들은 꼭 디귿씨를 노인 취급입니다. 디귿씨는 이만 나가보라는 상담원에게 자신이 앉아있던 접이식 의자를 집어던졌습니다. 홧김은 아닙니다. 눈에는 타오르는건 분노가 아니라 억울한 울음이 일그러져 있었으니까. 사람들은 모두 디귿씨를 쳐다봅니다. 이 것을 시작으로 벌써 삼주 동안 인력 사무소만 드나들었습니다. ***이른새벽부터 디귿씨는 정장차림으로 버스에 몸을 욱여 넣었습니다. 아내는 아직도 자신이 사무부장을 지내는 줄로만 알아서, 입으나 마나인 정장을 답답하게 걸치고 있습니다 . 요 몇달간은 퇴직금으로 여차저차 월급을 메꾸었다지만, 이제 퇴직금도 밑바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버스 창문으로는 여러 직장인들이 스칩니다. 디귿씨는 ‘회사를 위해 무얼해주실 수 있나요’란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자신 스스로가

  • 화자
  • 2024-01-10
검은세상, 하얀 겨울

세연에게 가고 있다. 겨울이었지만 눈은 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몰랐다. 눈이 내리지 않았기에 노동자들은 폭설로 인해 공사를 잠정중단하거나, 일당을 미지급받을 일도 없었다. 그런 일이 없었기에 하루에 붙들릴 일도 없다. 서울역 노숙자들은 눈 오는 날보다 따수운, 그러나 여전히 찬 겨울을 감사하며 보낼 수 있다. 늘 막히는 한강대로도, 눈으로 인해 교통체증을 빚을 일이 없었고, 택시나 버스가 운행을 중단하는 일도 없다. 눈을 녹이기 위해 도로에 뿌려질 염화칼슘이 세연에게 가기를 괴로워하는 나를 설득하듯, 발을 내딛을 때마다 발믿서 오독오독 비명을 지르며 부숴질 일도 없었고, 그게 신경은 좀 쓰이겠지만, 나를 멈춰세울 일이 없었다. 눈사람을 만들려고, 또는 어느 벽 담장에 메달린, 산성비가 굳게 되어버린 고드름을 핥으려 안달난 아이들만 아니었다면, 눈은 우리를 막는 병폐로 존재할 뿐이었다. 아이들은 눈이 얼마나 많은 어른들을 괴롭히는, 비효율적인 자연재해인지 알 턱이 없다. 그들은 교통체증으로 피해 볼 일이 없고, 노동을 할 일도 없으며, 노숙을 할 일은 더욱이 없었다. 누군가를 괴롭게 만나러 갈 일도 없다. 아이들은 그것을 모르기에, 여전히 추운 겨울을 피해 집으로 들어가, 만화영화를 보다가 힐끔, 창 밖을 확인하며 눈이 내리길 기다리고 있다. 여전히 찬 눈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아이들은 유리창 앞에 서서, 언젠가는 눈이 내릴 거라는 희망을 지닌다. 어른들은 출근하기 전 창 밖을 보며 눈이 내리지 않을 거라는 희망을 지닌다. 교통체증으로 직장에 늦을지는 않을지, 날씨가 추워서 하루가 고되지는 않을지 걱정 하며, 눈이 내리지 않았으면 하는 희망을 지닌다. 나는 눈이 내리지 않기를 바란다. 눈이 내리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을 사람은 나다. 나는 구질구질한 어른들의 세계에 살아서, 눈이 내리고 나버리면, 나를 가로막을 하얀 얼음, 그 모든 것들 때문에 도저히 세연에게 갈 수 없을거다. 세연은 눈이 내리길 바라고 있을테지. 그녀에게는 나를 만나는 것 보다 눈이 내리는 것이 더욱 중요할까. 알 수는 없지만, 나는 적어도 하나를 알고있다. 이 세상은, 겨우 동심 하나로 어른들의 세상을 덮어 버리기엔 너무나도 비효율적인 세상이다. 이 세상은, 그런 세상이다. ***세연에게로 가고있다. 세연을 만난 건, 눈 내리지 않는 육년 전 겨울이었다. 당시 초임 영화 평론가였던 나는, 삼류 독립영화 감독들을 취재하기 바빴고, 광화문에서 한 신인 감독이 저예산 영화를 찍고 있다고 해서, 잡지사는 촬영지 근처 살고 있던 내게 신인감독 인터뷰를 맞겼다. 영화촬영장은 굉장히 지저분했고 스태프도 대여섯명 밖에 되지 않았다. 반면 감독이라는 작자는 꽤 단아하고 청순한 여인이었는데, 어림잡아 이십대 중반, 나와 엇비슷한 또래 같아 보였다.안녕하세요, 신인감독 이세연입니다.그녀는,기운이 밝고 흔쾌해서 늘 깐깐하게 굴던 여타 중견감독보다 훨씬 좋았고, 질문에 답을 빙 돌려대서 말하는 어느 예술감독에 비해 시원시원한 답들과 기상천외한 담론들을 꺼내 들어서

  • 화자
  • 2024-01-07
잊을 수 없는 잊혀짐2: 막은 내렸는데 / 황순원

주인공 나와요! 아, 아, 걸음걸이가 그래서 쓰나. 끼니가 없어 죽는 자살자는 아니잖어. 실연한 자의 죽음두 아니구. 어깨를 좀 펴구 큰걸음으루 걸어요. 한 손은 포켓에 찌른 채루 좋아! 그렇지, 그 손으룬 약을 만지작거려야지. 이따가 먹을 극약 말야.내가 죽음을 두려워하구 있는줄 아나보군. 천만에. 자살하기루 작정한 뒤룬 오히려 마음이 담담해졌다는 걸 알아야지. 내 걸음이 이런 건, 요 얼마전부터의 습관에서 온 것 뿐인데.남자는 약간 걸음에 신경을 쓰면서 앞으로 걸어간다.오늘밤에도 길에는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다. 남자는 사람들의 얼굴을 통 보지 않고 걷는다. 이것도 최근에 생긴 습관이다. 이 끊임없는 행인들 속에서 남자는 저만치 유리돼있는 자기를 느낀다. 돌연 앞에서 불빛이 번쩍한다. 거리의 사진사가 플래시를 터친 것이다. 물론 남자 자기를 향해서일 리 없다. 옆에 팔을 끼고 걷는 남녀를 향해서인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어쩌면 자기의 어느 한 부분이 사진 속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는다. 아무런 개체를 지니지 못한, 사진 주인편에서 보면 거추장스럽기 마련인 한낱 군더더기로서. 그러면 어쨌다는 건가. 남자의 입가장자리에 잠깐 쓴 웃음이 번진다.남녀에게서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린다. 쇼윈도우가 눈에 들어온다. 남자는 살 물건이나 있는 것처럼 가까이 가 들여다본다.주인공의 뒤를 펜끝이 바싹 쫓는다.형광등 불빛 속에 진열돼있는 각종 시계들. 그것들이 모두 저저끔의 시간을 가리킨 채 멎어있다. 남자는 아직 시간에 구애될 때가 아니라는 걸 안다. 그러면서도 점포 안에 걸려있는 괘종시계를 기계적으로 바라본다. 아홉시 삼십분 조금 전. 시계에 이어 진열된 보석에 시선을 옮긴다. 갖가지 보석과 귀금속들이 저나름대로의 모양을 지니고 저나름대로의 광택을 발하고 있다. 남자는 한번도 이러한 것들을 소유해보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그것들의 용도가 없는 것이다. 그저 이러한 보석 귀금속들을 대낮에 허공을 향해, 또는 밤거리를 향해 짝짝 뿌려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한다. 지금도 남자는 이것들을 몇 움큼 쥐어서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포도에다 흩뿌려봤으면 하는 생각을 하며 그 앞을 물러난다. 얼마를 가다 남자는 눈에 띄는 한 골목으로 꺾어든다. 그리고 서너 집 들어 간 곳에서 걸음을 멈춘다. 왕대폿집 앞이다.술 생각이 나는가보군. 들어가두 좋아. 그렇지만 너무 취하도록 마셔선 안 돼. 몽롱한 상태에서의 자살은 내게 필요없으니까. 어쩌면 또 자살 하려는 결심을 마비시킬지두 모르는 거구.아니지. 남자는 얼른 부인한다. 술따위에 사로잡힐 내가 아니지. 남자는 홀 안으로 들어선다. 상당히 큰 홀 안이 왁자그르르하다. 아무데고 빈 자리를 찾아가 앉는다. 한 탁자에 여럿이 동석을 하게 된 자리다. 먼저 와 있는 옆의 사람들이 일방 마시고 일방 떠들어댄다. 남자는 막 리 반되를 시켜 따라 마신다.주위는 한결같이 왁자지껄하다. 그 소음 위로 간간 높은 노랫소리와 웃음소리가 솟는다. 이런 속에서 남자는 또 생각한다. 나는 혼자다. 떨어져나온 하나의 조각이다. 그러다가 남자는

  • 화자
  • 2023-12-03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
  • 작은토마토

    문장을 따라가며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제목이 가지는 의미심장함과 더불어 글을 관통하는 사유며 주제의식이 언젠가 제가 느꼈던 그것과도 무척 닮았기에, 해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창작욕을 가지고 있다고 해요. 예술의 존재 자체가 이를 뒷받침하죠. 누군가는 선율을 만들고, 누군가는 가사를 붙이고, 누군가는 붓을 놀립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반인들이 창작욕을 해소하는 방식은 글 쓰기라고 합니다. 음치에다 그림 실력이 꽝인 사람이라도, 어떻게든 글자는 쓸 줄 아니 글을 끄적여 본다고요. 그나마 쉬운 방법이라 여겼던 거겠죠. / 흐음, 글쎄요. 썩 공감가는 논라는 아닙니다만. 글쟁이들에게 어느 정도의 비참함은 기본 스탯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문학 시장의 경쟁은 어지간한 대입이나 취업판보다 험한 것이 현실이지요. 성공한 작가 지망생들의 글을 실패한 작가 지망생들이 소비하는 구조. 글 써서 언제 밥 벌어먹고 살래? 라는 말은 단순한 잔소리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린 모두 알고 있겠지요. 모른 척 부정하거나 난 특별할 거라고 막연히 되뇌면서도. 하지만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쉬워 보여서’ 글판에 뛰어들지요. / 네에, 어렵습니다, 어려워요. 이 짓거리가 얼마나 고단하고 고독한 일인지, 진득하게 파본 사람은 알잖아요. 다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시작했다가 얼마 못 가 발을 뺀다지만. / 하지만요. 우리는 아니잖아요. 아무리 외롭고 힘들고 서글플지라도, 고단하고 고독하고 비참할지라도. 우리는 아직 여기서 글을 쓰고 있잖아요. 창작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구차함과 추함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동시에 그 안에 담긴 아름다움과 매력에 반해 여태 벗어나질 못하고 있지 않나요. 글이라는 말만 들어도 설레어 박동하는 심장을 가진 우리가 아니던가요. 우리가 지금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창작이 단순한 창작욕의 표출이 아니라는 반증입니다. 내 손끝에서 창조되는 하나의 세계, 점과 선으로 확립되는 하나의 인생, 흑과 백으로 맺어지는 또 하나의 역사- 글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우리가 아니던가요. / 그러니까 부디, 계속 쓰셨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어요.주저앉지 말고 이어나가라고. 정지용이 어때서요. 황순원이 어때서요. 톨스토인 또 어떻고 까뮈는 어때서요. 내가 좋아하는 글을, 내가 좋아하는 작가를 감추지 마요. 모르는 글에 감동받은 척 하지 마요. 진심을 가장하고 위인을 욕보이지 마요. 있잖아요. 멋있게 뽐내고 남들 앞에 자랑하기 위해서라면 우린 글을 선택했으면 안 됐어요. / 저는 글을 누구보다 많이 사랑한다고 감히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고, 이 길을 걸으며 정말 많이 헤메고 방황했어요. 그래서도 더 말씀드리고 싶어요. 건강하고 행복한 창작을 하시라고요. 영혼 없는 글쓰기는 의미없는 짓이라 하셨죠. 불행한 글쓰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구차하고 구질구질하더라도, 보잘것없고 추잡함을 기본값으로 전제하더라도 그 속에서 행복을 발견해 좇아야 한다고. 행복하지 않은 창작은 영혼이 상실된 글쓰기에 다름 아니라고.

    • 2024-04-16 10:01:41
    작은토마토
    0 /1500
    • 작은토마토

      단순한 소설에 버튼 눌려서 제가 괜히 과민반응하는 걸지도 모르지만여.. 별 일 아닌데 혼자 흥분한 걸지도 모르지만요.글틴이니까요!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글을 쓰는지는 다들 잘 알 것이라 생각하기에, 굳이굳이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2024-04-16 10:02:16
      작은토마토
      0 /1500
    • 화자

      @작은토마토 늦었지만, 이제라도 이런 졸문을 넓게 사유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사실 글을 쓸 때마다, 매 작품을 시작할 때 마다 어딘가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고는 했는데, 그게 곧 매너리즘의 토대로 발현되어버렸습니다. 위로를 받기 위해서 쓴 글은 아니었지만, 이런 반응과 생각을 들으니 우연치 않게 찾아온 위로라는 점에서 매우 뭉클하게 다가왔어요. 감사합니다.

      • 2024-05-03 10:37:04
      화자
      0 /1500
    • 0 /1500
  • 작은토마토

    댓글이 삭제 되었습니다.

    • 2024-04-15 20:51:32
    작은토마토
    0 /1500
    •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