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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어붙은 여름

  • 작성자 enska
  • 작성일 2024-04-17
  • 조회수 172

눌어붙은 여름의 냄새가 났다.

떨어진 꽃잎들과 뒤섞인 빗물에서, 이틀 째 주인을 기다리는 텅 빈 투명 텀블러에서, 액체도 고체도 아닌 상태의 복숭아 마이쮸에서. 

복숭아 마이쮸. 

그래, 복숭아. 콕 찍어 입에 넣으면 순식간에 녹아내리던 상큼한 초여름의 복숭아가 아니라, 할아버지께서 종종 가져오시던 꾸덕한 캔 복숭아가 아니라, 애매하게 녹아내린 복숭아맛 마이쮸. 누군가의 침과 한 데 뒤섞여 눌어붙었을 그것을, 너는 참 열심히도 긁어냈었다.

교실의 초록 커튼은 그해 여름의 햇살 앞에서 무용지물이었다. 그 빛에 아이들이 녹아내렸다. 연둣빛으로 물든 채 책상에 몸을 꼭 붙이던 아이들. 그 속에서 너만이 꼿꼿이 앉아 있었다. 광합성이라도 하던 것이었을까. 너의 미소는 꼭 오얏꽃을 닮았었으니까.

너는 건반이 몇 개 빠진 낡은 피아노로 히사이시 조의 <Summer> 를 연주하곤 했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지겹도록 들었던 곡이었는데도, 너의 서툰 연주가 나를 끌어당겼다. 완벽하다고 할 순 없었지만 어설프지는 않던 묘한 매력. 너의 연주가 그랬고 네가 그랬다. 나는 속절없이 너에게 끌려갔다.

너는 의자 위에 올라서지 않고서도 창가 옆 달력에 닿을 수 있던 유일한 학생이었다. 4월의 달력을 뜯어내던 날. 교실에는 너와 나뿐. 가라앉은 공기. 어색하지만은 않은 침묵. 멋쩍은 미소. 너의 눈동자에 내가 비치던 유일한 순간. 복숭아 맛과 포도 맛 중 하나를 고르라던 너. 아주 잠시 느껴졌던 네 손끝의 온기. 마이쮸가 녹아내릴 정도로 손을 꼭 쥐었던 나. 축축한 내 손바닥에서는 희미한 복숭아 향기가 났다.

오얏꽃을 닮았던 너의 곁에는 봉숭아꽃을 닮은 아이가 항상 함께였다. 사랑스럽고도 상큼한 미소로 누구든지 녹아내리게 했던 아이. 그러면서도 종종 성숙한 어른의 모습을 보이곤 했던 그 아이. 네가 그 아이에게 끌려갔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까. 아니 서로가 서로를 끌어당겼던 걸까. 

자리를 바꾸었다. 칠판 바로 앞, 더 이상 너의 뒷모습을 볼 수 없는 자리로. 나는 여름 내내 그 자리에 눌어붙어 있었다.

너와 나 둘 중 누구의 손길도 닿지 못한 달력은 한 학기 내내 5월이었다.


초록 커튼을 돌돌 말아 정리하던 날 나는 다시 달력 앞에 섰다. 까치발을 힘껏 들자 손끝에 닿던 뻣뻣한 종이의 질감. 나는 어느새 의자 없이 달력에 닿을 수 있는 두 번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너 웃으면 해바라기 같아. 누군가가 말했다. 해바라기. 해바라기라. 너를 바라보던 나는 어느새 예쁜 해바라기가 되었구나.

여름과 가을이 완전히 지나가고 난 후에는 까치발을 들지 않아도 달력에 손이 닿았다. 11월의 달력을 뜯어내던 날 내 자리는 맨 뒷자리가 되었다. 아마 너는, 그때도, 여전히 ,꼿꼿하게 앉아 있었겠지. 하지만 어느새 곳곳에 동그란 뒷통수들이 솟아올라 있었고, 이제 나는 네가 아닌 겨울의 태양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걸려 있던 달력을 완전히 뜯어내던 날. 교실에는 여전히 너와 나뿐. 들뜬 연말의 공기. 자연스러운 웃음. 환한 미소. 너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이 참 예뻤었던 순간. 행복을 빌며 나눈 건조하고도 따뜻했던 악수.

마지막으로 둘러본 책상 서랍의 구석에 무언가가 있었다. 네게 받았었던 복숭아 맛 마이쮸였다. 여름 햇살의 따스함에 속절없이 녹아내렸을 마이쮸. 그 덕에 더욱 단단하게 굳을 수 있었던 복숭아 맛 마이쮸.

교실 문을 잠그며 마이쮸를 입에 넣었다.

여름의 향기가 났다.

ens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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