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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세계

  • 작성자 이창진
  • 작성일 2005-06-14
  • 조회수 459

 

그림자 세계

 


-똑….

차갑고 맑은 물방울이 작은 물웅덩이에 떨어졌다.

-똑….

다시 한 번 들려온 소리에, 그는 깨어났다.


********************************************************************


-부스럭


어둡고 차가운 거대한 돔 모양의 회색동굴 속으로 주기적으로 들려오던 물 떨어지는 소리 외에 갑자기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은 사물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의 어둠이 존재했지만 깨끗한 공기와 한줄기 맑은 물이 모여 흐르는 거대한 동굴이었다. 동굴 천장 군데군데 커다란 종유석들이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다행히 박쥐는 없어보였다. 물줄기가 동굴 저 너머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물 흐르는 동굴의 물 흐르는 반향음 덕분으로 알 수 있었다.


-부스럭


이번에는 조금 더 크고 선명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가 스치며 나는 듯한 소리였다.

“음….”

갑자기 작은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인간의 성대를 통해서만 생성되는 종류의 소리였다.


-부스스스….


사람으로 짐작되는 물체가 천천히, 약간은 힘겨운 듯이 일어나서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가….”

약간 굵지만 선명하고 뚜렷한 목소리였다. 분명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의 출처에는 짧고 검은 머리를 하고 있는 남자의 입이었는데, 외모와 목소리로 짐작해서는 20대 중반 가량의 젋은 청년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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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은 현재 정신이 없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메모리 센터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도중에 갑자기 의식을 잃었다가 차가운 물방울소리에 깨어나 보니 웬 차가운 동굴 안에 혼자 쓰러져 있었다.

“대체 이게….”

그는 혼란을 느끼며 생각에 빠졌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 나는 메모리 센터에서 기억을 주입받은 후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오늘 받은 지식이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 ‘그림자의 세계’, ‘정신분열’등이었지 아마? 아, 맞아. 갑자기 그때 머리가 어질, 해지더니 정신을 잃었지. 왜 그랬지? 아침에 뭘 잘못 먹었나? 기억 주입의 부작용이라도 생긴 걸까? 음, 근데 여긴 또 어디야? 그러고 보면 마을 근처에는 이런 동굴이 있을 리가 없잖아!! 우리 마을은 평지라 사방에는 동굴 그림자도 볼 수 없는데…. 그럼 최소한 마을 근처는 아니군. 하지만 우리 행성에는 동굴이 몇 군데 있다고 배웠으니 어딘지만 알면 우리 집까지는 찾아갈 수 있을 거야. 내가 아는 곳이면 어떻게 해서든 집으로 돌아갈 수는 있으니까……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져갔다. 청년은 일단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히며 물줄기가 흐르는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자신이 지금 무슨 상황에 처한 것인지 잘 몰랐다. 청년은 정신 똑바로 차리자고 생각했다.

‘사영인! 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어! 하물며 여기는 호랑이도 없잖아?’

…라는 생각을 속으로 하며 청년, 사영인은 속도를 올려 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달리기 시작한지 오래되지 않아서 저쪽 끝에서 조그만 흰색 점이 보였다. 동굴의 입구이다. 가까이 달려갈수록 흰 점은 점점 커지더니 종래에는 환한 빛이 되어 영인의 몸을 집어삼켰다.

-화악


갑자기 눈으로 몰려온 환한 빛에 시야가 어두워진 후, 밝아진 영인의 시야로 드러난 풍경은 객관적으로 볼 때는, 입을 다물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것이었다.

환한 햇살은 금빛의 그물이 되어 바로 앞의 나무의 나뭇잎을 휘감고 있었고 그 나뭇잎에서 떨어진 푸르고 시린 물방울은 바로 아래의 커다란 달팽이의 미끈하고 동그란 등껍질을 두들기며 빛으로 산화했다. 달팽이 등껍질 너머로는 초록으로 빛나는 숲의 한가운데로 빨강 파랑 지붕의 아름다운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보였고, 마을의중앙 부근으로 푸른 물줄기가 가로지르고 있었다. 푸르고 시원해 보이는 그 물줄기는 바로 그가 나온 동굴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젠장…”

그러나 그 때 영인의 등을 훑고 지나간 것은 아름다운 것을 봤을 때의 짜릿한 전율이 아닌 한 줄기의 서늘한 공포였다. 그는 눈앞의 아름다운 풍경이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당황했다.

집을 향해 걷던 도중 갑자기 의식을 잃더니 동굴에서 깨어났고, 혹시 아는 곳일까 하며 동굴에서 나와 보니 알지도 못하는 곳이었다. 이런 황당한 경우는 무슨 경우일까? 영인은 납치를 당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곧이어 의문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왜? 어째서? 나를 납치할 이유가 있나? 돈이 필요한 거였다면 왜 하필 나를 납치했을까? 우리 마을에는 나보다 부유한 집안의 꼬마들도 많았는데. 돈 문제가 아닌가? 그런 것은 제쳐두고라도 주위엔 가릴 거라곤 하나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무슨 수로 내 정신을 잃게 한 것일까? 멀리서 마취광선이나 마취총 같은 것으로 저격이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땅에다 정신을 잃을 정도의 트랩이라도 설치해 놓은 것일까? 아니,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현대에는 허허벌판에서도 내가 눈치 못 채게 정신을 잃게 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그런데 이 동굴은 어디지? 설마 만든 걸까? 아니면 설마… 다른 행성? 근데 왜 내 몸에 아무런 구속도 취해놓지 않은 거지? 납치가 아닌가? 목적을 이루어서?’

……

수많은 상념과 물음표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되었다. 수백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뇌를 스쳐지나갔다. 머리 속이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

머릿속에 명확하게 떠오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있을까?


가장 중요하고 가장 궁금한 생각을 끝으로 일단 생각을 접기로 한 영인은 눈앞 저쪽에서 평화로움을 자랑하고 있는 마을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일단 이곳이 어디인지 알아낼 생각이었다.


갈색의 등껍질을 가진 달팽이가 평화롭게 나뭇잎에 앉아서 마을을 향하는 청년을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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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은 마을에 들어섰다. 아이들이 길 이곳저곳에서 뛰어놀고 있는 모습과 길 양옆의 가게에 앉아서 장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사람들의 머리는 모두 검은색이었고, 피부는 모두 살구색을 띄고 있었다. 청년과 같은 머리색과 피부색이었다.

청년은 생각했다.

‘다른 행성에서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인가 보군. 불행 중 다행…인가.’

그는 마을을 걸으며 계속해서 생각했다.

‘마을은 작아 농경지를 뺀 우리 마을의 규모와 비슷하네…. 마을공동체로 다른 지역과의 교류 없이 자급자족하는 마을인가? 사람들은 사냥이나 채집을 해서 살아가는 듯 한데…. 아니면 생필품을 팔아 생계를 잇고있는 것 같군. 팔고 있는 물건이나 생활 방식을 보니 문명이 우리 행성의 약 200년 전 정도쯤? 꽤 구식 행성으로 납치되어 왔나보군.’

그런데 이상한 위화감이 갑작스럽게 영인의 눈을 통해 전달되어 머리 속을 자극했다.

‘뭔가…이상한데?’

영인은 그 느낌을 확신하지 못해, 그냥 무시하고 지나쳤다.


청년은 일단 마을을 찬찬히 둘러보고 나서 사람들한테 뭘 물어도 물을 생각이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옛 말도 있었으니까.’

일단 마을의 분위기를 살피며 흙길로 된 마을의 중앙 대로를 따라 걷던 영인은 마을 저 옆의 언덕 부근에 따로 떨어진 동화에서나 볼 법한 귀엽고 아담한 집을 보았다. 울창한 숲의 바로 앞이었다.

흰색이 약간 섞여있는 왠지 질이 아주 좋아 보이는 통나무 여러 개를 아름다운 모양으로 쌓아올려, 빨간색의 아담한 삼각지붕을 얹어놓아 화려하지는 않지만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는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집이었다.

주위로는 잘 만들어진 나무 담장도 보였다. 담장위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서 하품하고 있었다.

‘정말 동화같은 집이군…. 근데 어째 눈에 익은걸? 나중에 저런 집이나 하나 장만해서 살아야겠어….’

영인은 그 집을 좀 더 구경해볼 요량으로 그 집을 향해 다가갔다.

그때, 저쪽에서 검게 윤기나는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아내린 귀여운 꼬마아이 한 명이 영인에게 달려오며 소리쳤다.

"큰오빠!!“

‘큰오빠?’

영인은 속으로 놀라며 반문했다. 낯선, 하지만 어딘가 낯익 분위기의 여자 아이 한 명이 달려오며 그를 향해 소리친 단어의 뜻 때문이었다.

근데 더욱 놀라운 일은 그때 일어났다.

“은…영아.”

영인은 갑자기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에 너무도 놀라 그만 펄쩍 뛰었다. 처음 보는 아이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단어-를 무의식적으로 말한 것이다.

그러나 꼬마는 영인의 말을 못 들은 듯 영인을 향해 달려와 팔을 벌리며 매달렸다.

영인은 또다시 무의식적으로 같이 팔을 벌리고 달려드는 꼬마를 안아, 한바퀴 빙글 돌려주었다. 왠지 익숙한 느낌이었다. 꼬마의 얼굴도 낯익어보였다.

‘내가 어떻게 된 거지? 분명히 처음 보는 아이인데!’

영인은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생각은 그대로 언어가 되어 영인의 입을 뛰쳐나왔다. 이번에는 여자아이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소리였다.

“이게… 뭐지?”

그리고,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고양이가 놀라 잠에서 깨서 그 모습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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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인아,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거라. 분명 우리가 기억나지 않느냐?”

영인의 앞에는 중후하지만 부드러운 분위기의 중년인이 앉아있었다. 중년인은 구릿빛 피부를 하고 탄탄해 보이는 몸을 가지고 있었는데 영인을 향해 다정한 어조로 묻고 무언가를 묻고 있었다. 수염이 많지만 깔끔하게 깎아서인지 험악해 보이지 않는, 다정하고 편안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

영인은 자신이 여기 앉게 된 경위를 잠시 생각해보았다.

그는 아까 자신을 향해 뛰어왔던 여자아이-그녀의 주장으로는 작은 동생-이 아까 자신이 중얼거린 소리를 듣고 나서는 휘둥그래진 눈으로 서 있다가-영인은 그 모습이 무척이나 귀엽다고 생각했다- 큰소리로 “아빠-! 오빠-! 큰오빠가 말했어!! 말을 했다구!!” 라고 외치면서 통나무집으로 달려가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러다 잠시 후 집에서 ‘우당탕-’소리가 나더니 문을 벌컥 열고 뛰쳐나온 중년인과 지금 중년인의 옆에 앉아있는 소년에게 이끌려 여기에 앉게 되었다. 그 와중에 영인은 마을사람 몇몇이 놀란 얼굴로 뛰어오는 모습도 보았었다.

들어와본 집안은 놀랍도록 편안했다.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커다란 목재 괘종시계가 일단 눈길을 끌었고 소탈한 인테리어의 집안도 내 몸과 마음에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었다. 거실의 오른쪽 구석 부근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꽈배기형 계단도 눈에 띄었다.

“저어….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어렴풋이 기억나기는 하지만…. 그러니까, 이름정도는 조금씩 기억이 나는 것도 같지만… 정확한 것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영인은 왠지 죄를 짓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단호하게 모른다고 말하기에는 주위에서 바라보는 세 명의 시선이 너무 초롱초롱했기 때문이었다. 왠지 모른다고 하면 그들이 무척이나 실망할 것 같아서 영인은 약간 망설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이름정도 기억한다는 말은 진실이었다. 왜인지는 영인 그 자신도 몰랐다.

“그래. 정신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런 것은 차차 다시 기억해내면 되겠지.”

중년인은 약간 힘이 빠진 듯하지만 다정한 어조로 영인에게 말했다. 양옆의 아이들이 중년인의 말에 기쁜 얼굴로 끄덕였다. 한 명은 아까 보았던 여자아이였고 한 명은 검은 단발머리를 한, 침착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미소를 띤 성숙한 분위기의 소년이었다.

“그런데 뭘… 말씀이십니까?”

영인은 이 중년인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내가 네 애비라는 것 말이다.”

-쿵

“그리고 이 아이들이 네 동생들이라는 것도 말이지.”

-쿵

‘원, 내가 지금 꿈이라도 꾸나?’

영인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현실도피를 시작했다.


내가 살아온 곳은 ‘미르’라는 행성의 작은 마을이었다.

더 이상의 과학 이론을 발견하지 못해 과학 발달이 정체되었을 정도로 극도의 과학발전이 진행된 고도의 문명이 번성한 행성이었다. 약 200년 전에 ‘지구’라는 행성의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갈라져 나온 민족이 정착한 행성 중 하나였다. 우리 마을은 미르가 만들어낸 작품 중 하나인 ‘전통식 농경마을’로 그야말로 ‘전통식 농사’에 최적화된 마을이었다. 다른 마을에서는 유전자 복제를 이용해 대량으로 우수 품종의 농산물을 생산하지만 전통식 농경마을은 옛날부터 내려온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농사 방식을 사용해 농산물을 생산했다. 국가 차원에서 몇 가지 남지도 않은, 사라져가는 우리 전통과 문화를 보존하자는 생각으로 복원한 것이었다. 때문에 다른 곳에서는 간단하게 유전자 복제를 통해 대량 생산하는 곡물을 우리 마을은 직접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해서 생산했다. 작은 마을이라 해도 논밭은 아주 넓었기에 그 작업량은 엄청난 것이었다. 하지만 명령어 몇 개 읊으면 휴머노이드들이 땅도 갈고 씨도 뿌리고 다 알아서 하기에 별로 힘들이지 않고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유전자 복제에 비해 별로 양이 되지도 않고 품질이 그다지 좋지도 않지만 그곳에서 나는 농작물은 모두 다른 행성이나 우리 행성의 가난한 곳에 싼 가격으로 수출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했어도 빈부의 격차는 아직 존재했다. 유전자 복제 콩은 비싸서 못 먹는 사람들이 널렸던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며-정확히는 휴머노이드에게 명령을 내리며- 어머니를 모시고 단 둘이 살고 있었다. 행성연구학자셨던 아버지는 어머니가 나를 낳으신 후 얼마 안 있어 제트 크래프트(jet-craft : 미르의 공식 공중 교통수단. 호버크래프트의 진화형)를 몰고 다른 행성을 둘러보시다가 충돌 사고를 당하셔서 돌아가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에 대해 종종 ‘은하철도도 있는데 왜 제트 크래프트를 타고다녀서…’라고 말하며 안타까워하시곤 하셨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성함은 ‘사준영’이시다.

그런데, 지금 그 돌아가셨다는 아버지가 버젓이 살아있다고 한다. 그것도 다른 누가 아닌 본인이 내게 직접 그런 사실을 말하고 있다. 혹시나 해서 질문해보니 이름까지도 앞에 있는 중년인-아빠라고 해야하나?-과 일치했다.

뿐만 아니라,

“네 어미는 8년 전에 죽었다.”

…라고 한다.

‘으아, 미쳐버리겠네.’

영인은 잠시 정말로 미쳐버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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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인의 예상대로 8살 정도의 귀여운 여자아이는 영인의 막내 동생, 16세 정도로 보이는 침착한 소년은 영인의 첫째동생이라고 한다. 각각 이름은 은영과 진영. 그리고 한쪽에 앉아 꼬리를 흔드는 4살 난 은빛 털의 개는 실버우드.

중년인-아버지는 주장했다.

“너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고 기억을 잃었다. 아마 그때가 한 8년 쯤 전이었지. 은영이가 태어나던 해였으니까. 은영이를 낳고 네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출산의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게지. 너는 그때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모습을 지켜보고 난 후부터는 말을 잃었다. 실어증에 걸린 게지. 아니, 자폐증인가? 뿐만 아니라 눈빛도 늘 흐릿해져서 생각도 전혀 하지 못하는 것 같더구나. 너는 그 후로부터 자주 저 마을 위의 동굴로 올라갔지. 너 자신도 생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항상 네 어머니와의 추억이 가장 많이 깃든 추억의 장소로 가는 것 같더구나. 네 동생들은 아직 나이가 많지 않아 네 어머니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도 몰랐단다. 나도 슬펐지만 너처럼 모든 것을 잃은 듯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었단다. 나에게 맡겨진 너와 네 동생들 때문에 말이다. 때문에 나는 열심히 장작을 패고, 사냥을 해가며 너와 네 동생들을 먹여 살렸단다. 너도 네 동생들한테 만은 무의식적으로 잘해주는 듯 하더구나. 네 동생들도 그런 너를 무척 따랐고 말이다. 나는 그것을 위안삼아 실어증에 걸린 너를 잘 돌보며 죽은 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잊어갈 수 있었단다. 이제는 나도 상처가 아물었으니 너도 너만의 세계에서 돌아올 때가 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네 의식이 돌아왔구나. 축하한다, 아들아.”

그 말은 거대한 충격의 해일이 되어 영인의 뇌 속을 휩쓸었다. 영인은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얼마 전에 기억주입기를 통해 주입받은 것 중 무언가가 자꾸 그의 뇌를 건드리는 듯 했지만 영인은 그 느낌을 무시했다. 그러고 보면, 기억 주입기와 메모리 센터도 존재해서는 안 되었다. 그것도 모두 허구여야 했다. 그의 상상이 만든…

‘그렇다면 내가 이제까지 살아왔던 삶은? 내가 쌓아왔던 어머니와의 추억은? 내가 이제껏 살아왔던 인생이 모두 거짓이라는 얘기? 내가 이곳 세계에서 15살까지 살았다면 내가 미르에서 보냈던 1살부터 15살까지의 기억은?  그리고 경험은? 기억이, 경험이 겹쳐질 리는 없잖아! 내가 미르에서 1살부터 15년을 살았다면 이곳에서는 15살까지의 인생이 있을 수 없지. 내 기억과 경험이 8년 전까지는 없어야 이곳에서의 경험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야. 그런데 내 기억은 그보다 훨씬 오래…  뭐, 뭐지? 왜 기억이 없는 거야? 가만, 원래 내 기억이 그때부터 없었나? 15살 때 생일의 기억부터 밖에 없잖아? 아! 그때 계단에서 굴러서 기억 상실증에 걸렸었지, 그래도 경험은 있어. 분명히 있다고. 기억이 없다고 해서 진실로 했던 경험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잖아? 그래. 그럴 리가 없지. 그럴 리가 없고말고.’

영인의 머리 속은 혼돈으로 가득 찼다. 혼란스러웠다. 머릿속의 모든 게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이제까지 진실이라고 알고 살아왔던 세계가 진실이 아니었고, 살아왔던 삶이 모두 가짜였고, 알던 세계가 환상이었고, 허구였다니. 자신이 경험했던 모든 것이 현실도피였고, 꿈이라니. 믿고 싶지도 않았고 믿어서도 안 되고 믿을 수도 없는 이야기였다.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 같았다. 내가 이제까지 쌓은 나의 자아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미르가 없었고 농경마을이 없었고 어머니가 없었고 은하철도가 없었고 친구들이 없었고 내 모든 추억이 없었고 내 모든 경험과 지식과 느낌이 가짜였다니.

이건 마치,


‘누군가가’


내 인생을


‘갖고 노는 것 같잖아!!’


신의 농간 같았다. 나는 분명 기억을 잃은 게 아닐 거야. 누군가가 나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잠시 납치해 온 것 뿐이라고. 저들은 모두 연기를 하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그렇게 생각했다.


“으아아아아아아!!”

영인은 소리를 지르며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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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나무집에서 얘기하는 세에 시간은 훌쩍 지나 어둠이 내려앉아 만물을 포용했고 차갑고 고고한 달빛이 어둠의 장막을 뚫고 은은하게 물상의 테두리를 은빛으로 비춰주고 있었다.


“헉, 헉….”

달빛과 함께 어둠의 장막을 찢으며 달리다가 지쳐 영인은 풀밭에 주저앉았다. 영인이 처음에 나온 동굴 근처였다. 약간 경사진 언덕이라 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보였다. 물소리가 졸졸졸- 들려왔다.

멀리서 누군가 쫓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혀, 혀엉-!”

진영이었다. 꽤 빠르게 달렸는데 기를 쓰고 쫓아온 모양이었다.

“그렇게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가면 어떡해? 은영이가 많이 놀랐다고. 아빠한테 안겨서 엉엉 울고 있잖아!”

진영이 숨을 헐떡대며 약간 질책하는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옆에 앉았다.

영인은 가슴이 답답해져서 말없이 들판에 누워 하늘을 봤다.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아름다운 빛을 뿌리며 떠올라 있었다. 검은 먹물 중간 중간에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흩뿌려놓은 것 같았다. 그중에 영인이 아는 별자리는 없었다.

‘가만, 내가 아는 별자리가…뭐지?’

영인은 갑자기 생각했다.

‘기억주입기를 통해 별자리를… 가만, 기억 주입기는 또 뭐지? 그런 게 원래 진짜로 있었던가? 저 아저씨 말로는 내가 공상 소설을 많이 읽었다고 하니까. 혹시 아버지의, 아니 저 아저씨의 말대로 내 기억이 나의 상상을 통해 만들어진 거라면…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영인은 자신의 마음에 찾아오는 의혹을 부정했다.

‘기억주입기를 통해 주입받은 기억이라는 것도… 다시 모두 생각해보면 지금의 내 기억 속에는 없어. 그렇다면 그것을 통해 받은 지식도 모두 내 상상의 세계 안에서만 통용되는 지식이라는 얘긴데…. 내 상상의 범위가 그렇게 방대했나? 완벽한 하나의 세계를 갖출 만큼? 아니, 완벽한 하나의 세계?’

영인은 자신이 살던 세계를 떠올려보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진흙탕에 빠진 것처럼, 안개가 낀 것처럼 기억이 불투명했다. 대략적인 큰 기억과 세계를 이루는 중요하지만 간단한 기억들은 떠올랐지만 세계의 세세한 부분이나 약간 복잡한 이론이나 원리 같은 것은 거의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처음부터 존재하지, 그래서 기억하지 않았던 것일 지도 모른다. 그의 기억 속에서도 완벽한 세계란 존재하지 않았다.

영인은 처음으로 그 가능성, 자신의 원래 세계가 완전한 세계가 아닌, 상상을 통해 만들어진 세계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물론 그것은 아직 하나의 가능성이었다.

영인에게 어머니와의 추억은 매우 소중했다. 결코 잃을 수도 없고, 부정하고 싶지도 않은 소중한 기억이었다. 남편을 잃은 후 혼자서 힘겹게 자식을 기른 어머니를 생각하면,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이었다.

영인은 갑자기 피리를 불고 싶어졌다.

그는 곧 주위에 있는 풀 중 쓸만해 보이는 풀을 물색했다. 그 위에 달려 있던 무당벌레를 쫓아버린 뒤, 그 풀을 따 정성들여 풀피리를 만들었다. 무당벌레가 항의하듯 머리위로 천천히 날아다녔다.

그리고는 어머니께 자주 불어드렸던 간단하지만 아름다운 선율을 흘렸다.

“아, 이 소리는!”

같이 누워서 별을 보던 진영이 말했다.

영인은 잠시 피리소리를 멈추고 진영에게 물었다.

“이 곡을 네가 아니? 내가 지어서 우리 어머니께만 연주해드린 건데.”

“응, 어렸을 때 언젠가 들은 기억이 있어. 언제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났는데 형이 들려준 건가봐. 약간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이 곡을 불 줄 아는 사람을 찾아다녔는데 도저히 못 찾겠더라구. 어쩐지… 형이 불어준 곡이었구나. 이제 왜 못 찾았는지 이해가 간다.”

진영이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영인도 마주보며 같이 웃어주었다. 뭔가 가슴이 찡-한 느낌이 들었다. 목구멍으로 뭔가 울컥 솟아오르며 별이 물을 먹은 듯 보였다.

다시 조용한 피리 소리가 동굴에서 은은히 메아리쳤다.

아름다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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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짹짹, 짹짹잭

아침의 찬란한 햇살이 투명한 사각창문을 뚫고 들어와 영인의 머리위를 꿰뚫으려는 듯 뚫어지게 비추었다.

영인은 그 빛에 이기지 못하고 ‘끄응’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장식품이 거의 없지만 깔끔한 방안이었다.

잠시 주위를 멍한 눈으로 쳐다본 영인은 기억을 더듬어봤다.

어제 진영과 함께 누워서 피리를 불었다. 피리소리를 들었는지 피리를 불기 시작한지 얼마 안돼 아버지와 은영도 동굴 앞 들판으로 다가왔다. 은영은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기쁜 듯이 달려와서 나와 진영 사이에 누웠다. 그리고는 피리를 부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워서 살짝 깨물어주고 싶었다. 물론 아프지 않게 말이다. 아프게라도 하면 왠지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지며 천벌을 받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피리소리를 듣던 은영이 먼저 잠든 후, 나도 피리를 불다가 따라서 잠이 들었었다. 그런데 자신이 이곳에서 자고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이곳으로 자신을 옮겨왔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이 풍경이 낯설지 않은 것을 보면 자신을 옮겨왔을 법한 사람은 한 명이 떠오른다.

“아…버지….”

많이 입에 담아보지 못해 아직은 입에 익숙지 않은 말이지만 이제는 불러보려고 한다. 아직도 확신은 하지 못하겠지만 이곳이 자신이 있을 곳인 것 같았다. 어머니와의 아름다웠던 추억도 추억인 것이다. 어머니도 존재했다. 나의 세계에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그가 잊지 않는 이상. 영인은 어젯밤 자신을 보며 너무도 기뻐하는 동생들을 보며 그렇게 마음먹기로 했다. 아니, 그게 진실이다.

‘그래, 아버지의 말씀대로였어… 그 세계는 내 어두운 내면이 오랫동안 만들어 낸 그림자 세계였던 거야. 내 부정적인 의식과 내 상상, 아니 공상이 내 정신을 그곳에서 머물게 한 거지. 어머니와의 추억은 진짜였어. 그곳에서 존재하는 어머니도 분명 나의 어머니였어. 내가 그걸 기억하면 돼. 그러면 어머니는 계속 내 세계 속에 존재할 테니까.“

영인은 잠시 몽롱한 정신을 추스른 후 방 문을 열었다.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보였다. 그는 2층의 방에서 자고 있었던 것이다.

계단을 밟고 내려올 때 부엌에서 아침을 깨작깨작 먹고 있던 은영이 영인에게 흥분한 목소리로, 그리고 또다시 초롱초롱 눈망울 어택을 하며 말했다.

“오빠, 어제 피리 진짜진짜루 멋있었어!”

“그래, 고맙다 은영아. 이 오…빠도 기쁘다.”

오빠라는 생소한 단어도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게 하는 단어였다.

“응! 나중에 또 불어 줘야해?”

“알았어. 당연하지. 이 오빠만 믿으라구!”

갑자기 또 가슴 한 켠이 따뜻해졌다. 입가에는 저절로 미소가 걸렸다.

“형! 나한테도 불어주는 거 잊지 마!”

식탁의 또 한쪽을 차지하고 있던 진영도 내 피리소리가 어지간히 다시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자꾸 그렇게 듣고 싶으면 직접 불어보라고. 내가 가르쳐 줄게.”

“정말? 으하하하! 이제야 진짜로 형이 있다는 실감이 나는구나!”

진영의 말을 듣고 보니 조금 씁쓰름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까지 형, 오빠 노릇도 제대로 해주지 못한 것 같아 동생들에게 너무도 미안했다. 진영이 그런 내 표정을 보더니 약간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그렇다고 이제까지 형이 없었다거나 하는 건 아니야. 형은 언제나 우리의 곁을 지켜주던 든든한 벽이었어. 어디로도 가지 않고 항상 굳건히 우리를 지켜주던.”

이렇게 말해주니 더욱더 동생들에게 미안한 감정이 증폭되었다. 제대로 해준 것도 없는데 이렇게도 마음 씀씀이가 넓다니. 이런 나에도 불구하고 정말 너무도 잘 자라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는 정말 좋은 형과 오빠가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이제까지 동생들에게 해주지 못했던 것만큼.

“그래, 이제까지는 든든한 벽일 뿐이었겠지만 앞으로는 좋은 조언자이자 친구, 그리고 좋은 형, 오빠가 되어주마!”

“왈! 왈!” 아름다운 은빛 털을 휘날리며 실버우드도 내 말에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드디어 내 환상이 만들어낸 거짓의 세상, 그림자의 세계에서 완전히 탈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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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스크린이 보였다.

스크린은 몇 개의 화면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각각의 나누어진 화면 위로는 그 화면의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들이 새겨져 있었다.

커다란 강 같은 물줄기가 맑은 물소리를 내며 흘러나오는 동굴을 비추는 화면에는 ‘달팽이-34의 눈’

아담한 삼각형 빨간 지붕 아래의 사각창문에 매달려서 2층 창가를 들여다보는 화면에는 ‘새-523의 눈’

빨간색의 삼각형 지붕이 보이는 아담하지만 아기자기한 맛이 있어 보이는 통나무집을 담장이 있을 법한 곳에서 비추는 화면에는 ‘고양이-17의 눈’

커다랗고 고풍스러워 보이는 목재 괘종시계 한 개가 보이는 집안에서 간간히 행복해 보이는 웃음을 터뜨리며 담소를 나누는 청년과 조용히 과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중년인, 비슷하게 은은한 미소를 띤 소년과 환하게 웃고 있는 소녀가 보이는 화면에는 ‘개-2의 눈’

그 밖에도 여러 가지의 화면들이 주기적으로 바뀌며 ‘무당벌레-52의 눈’, ‘종유석-23의 눈’, ‘풀-484의 눈’, ‘개미-1154의 눈’, ‘나뭇잎-2154의 눈’ 등등의 많은 ‘눈’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흰 가운을 입은 자가 손에 평가 체크 리스트를 들고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화면을 바라보던 그는 곧이어 체크 리스트에 여러 가지를 표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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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체크 리스트


   영인(影人 ; 그림자 인간) - 4호


                   대기 적응      - 100

                   식수 적응      - 100

                   육류 음식 적응 - 100

                       .              .

                       .              .

                       .              .

                   정신 적응      - 100

                       .              .

                       .              .

                       .              .

                   ‥‥           - 100

                   ‥‥‥적응     - 98


    비고사항 - 기억주입기를 이용, 단편적인 기억의 삭제와 주입이 유효했음. 전체적인 적응속도 대단히 빠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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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장에 걸쳐 더 무언가를 작성한 그는 마지막에 유일하게 나온 ‘98’이란 숫자를 잠시 쳐다보다가 커다랗게 도장을 찍었다.

‘다시 실험을 요함’

그리고는 스크린을 쳐다보았다.

스크린이 일시에 초기화되더니 잠시 후 하나의 커다란 화면으로 통합되어 나타났다. 통합된 화면 위에는 작게 ‘종유석-37의 눈’이라는 글씨가 써져있었다.

그리고… 우측 하단에 작게 ‘영인 5호 - Start’라는 문구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화면으로는 한 남자가 거대한 원형의 종유석 동굴 안에 쓰러져있었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갈색머리의 남자였다. 그는 잠시 후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에 몸을 꿈틀, 하더니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멍하니 있던 그는 주위를 어리둥절한 눈으로 둘러보며 의문 섞인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What the hell….”

이창진
이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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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록불

    SF 스타일의 글이군요. 잘 읽었습니다.

    • 2005-06-14 21:40:16
    초록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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