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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인형

  • 작성자 루시페린
  • 작성일 2005-09-06
  • 조회수 618

 

 

 

곰인형

 


  직접 읽고 쓰는 것과 손으로 직접, 발로 직접 뛰는 일은 점점 줄어들고,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이 더욱 발달하게 된, 과거의 ‘미래사회’인 현재. 수십 년 전, 젊은 학생들이 열띤 얼굴로 기대에 부풀어 이야기하던 것과 같이 방안에서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으며 먼 곳을 구경할 수도 있게 되었다.

 

 

  첨단 프로그램과 사이버 배우를 통한 영화 제작은 서너 평 남짓한 쪽방에서 이뤄지며 음성 인식으로 밥이 지어지고, 설거지가 되고, 각종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 갈수록 저렴해지는 플라스마나 LCD와 같은 대형 벽걸이 미디어 플레이어- 방송 수신, 음악 및 동영상 파일 재생, 인터넷 연결 가능 -로 인해 너도나도 홈 시어터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컴퓨터 서버로 전국의 연결망을 동원하여 사용자의 이상형에 가장 적합한 사람을 찾아내 주는 사이버 마담뚜의 등장으로 각지의 솔로들은 새 희망과 새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으며, 고도로 정밀하게 발달한 가상 시뮬레이션으로 인해 각종 업무 처리와 경기 및 콘서트의 관람이 집안에서 이루어졌다. 게다가 최근에는 실제 관광과 똑같은 가상 관광 체제를 구축한 ‘모얼리티 쇼어 알파 1.0’이 ‘로마의 트레비 분수와 이스터 섬이 눈앞에서 펼쳐집니다. 라면을 먹으며 소파에 앉아 모나리자의 미소를 감상해보세요’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대히트를 기록하고 있다.

 모든 것이 사실이 되었다. 반세기 전, 아이들이 컴퓨터 없는 사무실을 상상할 수 없다고 대답했던 것처럼, 아무런 획기적인 대변화도, 신세기적 혁명도 일어나지 않은 채였지만 사람들은 가위에 적응하고 가스레인지에 적응한 것과 같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신상품들에 꼬박꼬박 적응해 나간 것이다.

 

 

 

  닫힌 커튼 사이로 빛이 스며들고 있다. 그러고 보니 햇빛을 보지 않은 지도 벌써 3일이나 되었다. 그래도 다른 사람에 비하면 난 나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몇 년 동안 밖에 나가지 않았노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친구 녀석도 있으니까. 극단적인 소외, 폐쇄적인 사회 구조. 집밖을 나가지 않아도 모든 것이 해결되니 사람을 직접 만나지도 않았다. 거기에는 오존층의 소멸로 인한 자외선의 위험과 각종 기상이변이 한몫을 했다. 그 대신 컴퓨터 전원만 작동시키면, 메신저에 수십 명의 접속자 목록이 떴고, 그들과 대화하면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지금 내가 빈둥빈둥 시간을 보내면서 기다리고 있는 다애도 메신저 친구 중 한 명이다. 옛날부터 알고 지내온 사이에다, 지금 나와 함께 서버 영일의 유저 1로써 고등 레벨 프로그램을 진행 중인 녀석이다. 안 그래도 평소에 집밖을 나서길 싫어하는 애가 웬일인지 내 생일을 챙겨주겠다며 집으로 오겠다고 하니, 당연히 기대가 될 수밖에.

 

 

  벽에 걸린 플레이어의 전원이 들어오고 문 앞에 서 있는 다애의 모습이 보였다. 문을 열라고 지시하자 잠시 후 다애가 내 앞으로 달려와 반갑다는 말도 없이 뭔가를 불쑥 내민다. 뭐냐고 물었더니 한껏 자랑스러워하면서 새로 나온 곰 인형 ‘위스퍼’ 모델이란다.

 

   곰인형. 그것은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컴퓨터보다도 더 깊숙이 생활 곳곳에 자리 잡게 된 물건이었다. 10대부터 할아버지 할머니, 중장년층까지 고루 애용하게 된 그것. 사람들은 하루 종일 혼자 방안에 틀어박혀 지내면서, 자기 혼자 말하고 움직이는 것에 대해 무서울 만큼 익숙해져 있었다. 그들은 혼자였고, 복잡하고 외로운 심정을 달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슬픈 정적. 가끔씩 우연히 빚어진 가벼운 소음에 사람들은 깜짝 깜짝 놀라곤 했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곰인형.

 

 

  단순한 형태를 지닌 그것은 인형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품안에 들어가기 좋게 만들어진 ‘진짜’ 봉제 인형. 사람들은 곰인형을 안고 그 누구에게조차 말할 수 없는 비밀이나 괴로운 속내, 슬프고 답답한 마음, 자조적이고 염세적인 문장들을 들려주곤 했다. 그것은 아무런 대답도, 동작도 하지 않지만, 출시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일본에서는 곰인형이 사라지자 자살한 사람까지 생겨났다.

 

 다애는 신이 나서 내게 위스퍼의 새로운 기능을 떠들어대다가, 내가 반응이 없자 책상 위에 놓인 나의 구형 곰인형을 집어 들고는 요리조리 살피며 다시 말을 잇는다.

 “뭐야, 너 아직도 머머 쓰냐? 5개월이나 된 걸? 갖다 버려라 버려. 야, 오랜만에 왔으니까 새 모델 시험도 해볼 겸 영화나 보자. 제일 재미있는 거 다운 받아 놨어. 왜, 곰인형 최고의 기능을 이 영화관 모드로 꼽는 사람들도 있잖아.”

 

  그렇다. 곰인형과 영화를, 지상 최고의 궁합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은 한층 더 외롭고 쓸쓸했던 사람들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떠들지 말라고 시끄럽다며 꾸중들을 일도 없고, 영화 줄거리와 배우와 감독 등 사전 지식을 좔좔 읊어대도 화내지 않고, 도중에 ‘어- 나 그거 아는데’라며 말꼬리를 자르지도 않으며, 오히려 자기에게 마구 떠들거나 말을 못 알아먹어 불필요한 소음을 자꾸 만들게 하지도 않는 곰인형. ‘함께 있다’는 느낌을 주되, 절대로 귀찮게 하지 않는다는 곰인형의 가장 큰 장점 덕에, 사람들은 옛 연인들이 극장을 꼭 영화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 다른 이유로 찾았던 것처럼 곰인형과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각자의 곰인형을 데리고 우린 안경과 장갑을 비롯한 필수 복장을 착용한 채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 전에 나는 극장 안에 3-40명의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설정을 맞춰 두었다. 영화의 주제는 어머니에 관한 것이었다. 여주인공이 입고 나온 붉은 코트를 보니 엄마 생각이 났다. 나는 눈앞의 영상엔 신경 쓰지 않고, 곰인형을 끌어안고 말하기 시작했다.


『엄만 예전의 생활들에 대해 말하길 좋아했어. 내가 영화를 보고 있으면 “옛날에는 극장이 따로 있었고 시간도 정해져 있어서 간혹 가다 영화를 중반부부터 봐야 하는 일도 있었어. 라고 말하고, 방송을 시청하고 있으면 “많은 부모들이 자녀가 TV보는 걸 싫어해서, 전깃줄을 잘라 버리기도 했단다.” 라고 말하는 식이었어. 나도, 아빠도 그런 엄마를 고리타분하다며 비웃었지만 엄만 아랑곳하지 않았지. 귀찮아 죽겠다는 나를 붙들고 엄만 첨 술 마셨던 날, 비 오는 날 달리다가 넘어져 아빠를 만났다는 일, 내 어렸을 적 버릇들 같은 이야기를 시시콜콜 몇 시간이나 떠들곤 했으니까.  곰인형이 나왔을 때는 엄마를 위해 만들어 진 것 같아서 사다드렸지만 엄만 사용하지 않았어. 엄마는 항상 기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거든.

 

 “요즘에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기들이 걸음마와 옹알이를 하기도 전에 프로그램 조작법과 키보드 사용법을 배우는 세상이잖니.” 라고, 언젠가 한창 옛날 얘기를 하다가 엄마가 말했었지. 나는 그때 엄마의 그런 태도에 완전히 신물이 나, 화가 나서 소리쳤고.

 

 “아, 그래서 대체 뭘 어쩌란 거야! 옛날 그 불편했던 시절이 그리워서 돌아가고 싶다는 거냐고! 우린 이렇게 편리한 세상에서 살고 있잖아. 뭐가 불만이야 대체? 갈수록 모든 게 빠르고 편리해 진다니까! 엄마의 추억은 시간과 에너지를 절약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단 말야!”

 

  난 엄마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지만 엄만 그냥 날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었어. 나는 그런 엄마의 태도에게, 그러고 있는 그 시간이, 또 나 자신에게 질려 방으로 들어가고 말았고. 그리고 몇 달 안 되서 엄마하고 아빠는 이혼을 했어.』

 

 

 아빤 유독 그런 엄마를 견딜 수 없어 했다. 아빠는 항상 바빴고, 여유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빠는 큰 다국적 기업의 제작선단에서 일하고 계셨으니까. 난 자주 기계들의 작업 처리속도가 너무 느리다며 투덜대는 아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 이래선 안돼! 이렇게 느려 터져 가지고서야 뭔 일이 되겠어?” “왜요 아버지?”

“말 걸지 마라. 난 우리 회사의 개발․연구 부장이야. 거의 유일한 ‘사람’이라고. 벌써 다른 부서의 로봇들은 이미 서류를 다 제출했다던데, 이렇게 뒤떨어져서야…”

 

 직업을 구하기가 힘든 상황이었으니까, 난 아빠를 이해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빤 항상 다른 경쟁자들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며 신속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럴 때의 아빠는 모든 걸 속도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처럼 보였고, 스스로에게 너무 냉정했다.

 

 

『역시 아빠와 엄마는 너무 안 어울렸어.』 난 다시금 인형에 대고 속삭였다. 성격의 차이가 부모님을 헤어지게 만든 거라고.


  고개를 들었을 때, 영화는 이미 끝나 있었다. 조금 당황스런 기분으로 영화 관람용 마스크를 벗자, 옆에 다애가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혼자서 영화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게 좋아서 솔로들은 인형들을 구입하는 건지도 몰라. 이제 곰인형이 없는 생활은 상상할 수조차 없지. 컴퓨터가, 플레이어가 몽땅 사라져도 곰인형만은 없으면 안돼.”

 

 다소 심각한 다애의 말에 곰인형이 작동을 멈추자 욕조에 들어가 목숨을 끊었던 19살 소녀가 생각났다. 최근 어째서인지 곰인형들의 갑자기 작동을 멈추고 영원히 고장나버리는 일이 자주 생기곤 했다. 그렇다고 제품에 하자가 있어서 리콜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 주인들이 자살을 하거나 혹은 시도하려 한다는 것이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곰인형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많이 있다고. 단지 이 기계에만 의존한다는 것은 너무 지나쳐. 요즘에는 곰인형 프로그램도 인터넷에 떠돌고 있잖아. 외롭다면 소수의 친목클럽이나 동호회에 가입하고 그들과 어울리면 되잖아. 온갖 게임이라든가 영화도 쉽게 얻을 수 있고. 그러면 한꺼번에 많은 친구를 만들 수도 있고, 메신저로 애들과 얼굴을 보며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데, 뭐가 외롭다는 거야. 남는 게 시간인데. 곰인형은 그저 심심풀이 장난감이야.”

 

 “아냐, 틀렸어. 아직 모르는구나 너는, 다행히도?”

다애의 갑자기 격앙된 어조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흥분한 목소리와 달리 얼굴빛만은 담담했다.

 

 “난 오랫동안 괴로워서 고민했었지. 니가 말해준 방법들을 알아, 하지만 난 그 어느 곳에서도 안식처를 찾지 못했어. 그 곳은 단순한 놀이터일 뿐이야. 해가 지면 엄마가 밥 먹으라고 불러들였던 옛날의 놀이터라고. 난 내가 뭘 원하는 지 알아, 그런 것들은 단순히 내 느낌을 감춰서 무디게 만들어버리는 것에 불과해. 모르겠어? 누군가 내 말을 들어주길 기대하고, 어떤 ‘내용’을 말하느냐보다는 누군가와 ‘함께’ 말하고 있다는 게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시간들을 넌 이해할 수 없다는 거야! 누가 나를 이해해 줄까,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너무나 바빠서, 자기의 이익에만 충실해서 나 같은 건 아랑곳하지 않는 듯 보여. 대체 우린 그들을 얼마나 알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네가 말하는 메신저의 친구들은 정 반대의 인물일 수가 있어. 그들에게는 말하지 못해. 우린 끔찍하게 멀어져 버렸다고. 그래서 나는, 곰인형이 아니면 안 되게 되어버렸어.

 

 봐, 모든 것의 목적은 단 하나야. ‘신속, 정확, 편리’ 이것만을 위해 다들 최단 시간에, 최저의 스트레스 누적으로, 최단 소모 열량에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들었지만. 그렇게 편리한 세상이라면 왜 우린 곰인형이 필요한 거지? 그들은 없던 불편함을 만들고 또 만들어 자신들이 포장한 ‘편리’라는 이름으로 감싸 버리는 게 아닐까, 하고 넌 그런 질문을 가져 본 적 없는 거야? 이게 없으면 불편해서 어떻게 살려고, 라고 속삭이면서, 사실 우린 아무런 것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냐고!”

 “다애야.” “됐어, 갈래. 생일인데 이런 소리해서 미안해. 내가 선물해 준 곰인형이랑 있으면서, 너도 그런 걸 좀 알게 됐으면 좋겠어.”

 

  스르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옵션이 꺼지지 않아서 사람들이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극장 속에서, 나는 할 말을 잃고 위스퍼를 바라보았다. 곰인형의 눈이, 반짝였다.


 해가 지고 있다. 나는 유난히 넓게 느껴지는 방의 한쪽 구석에 앉아, 다애가 하고 갔던 말들을 곰곰이 되새기고 있는 중이었다. 한 번도 그런 말은 하지 않았던 녀석이었는데. 메신저에서도, 채팅에서도, 화상팅에서도, 그런 내색을 비춘 적은 없었는데. 정말이다. 결국 내가 컴퓨터로 다애와 함께 나눴던 만화와 애니에 대한 취향과 좋은 영화에 대한 탐구, 시시콜콜한 일상생활의 잡담들이 ‘다애’의 전부가 아니었다. 겉돌고 있었다. 몇 년이나 알고 지낸 사이였지만, 나는 가끔씩 다애가 누구인지를 기억하기 위해 애쓰는 일이 종종 있었던 것이다.

 

 

 이런 기분을 느낄 때 사람들은 그 심정을 곰인형에게 털어놓는 걸까. 나는 괴롭고, 시리고, 아프고, 쓸쓸하다고. 네가 내 곁에 있어 주어 다행이라고 쓰다듬으면서.

 

 -짤깍.

 

 등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나 혼자만 살고 있는 집인데.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니 곰인형만 소파에 덩그러니 앉아 있다. 기계 부속품 중에서 뭔가가 맞물리며 나는 소리인가 보다.

 

 『모르겠어, 나는 모든 것이 옳다고만 생각했지 뭔가가 잘못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어. 우리가 그렇게 대단한 걸 잃고 있는 거야? 놓치면 후회할 만큼? 아니면,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해서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키고 싶은 것을, 지켜야만 하는 것을 잃고 있는 걸까.』

 

『…그것에 관해서는 명확한 답을 줄 수 없어. 하지만 뭔가를 얻는 만큼 잃는 것도 있어야 하겠지. 그리고 둘 중 어느 게 값진 것인가는 자신이 생각해야 하는 일이고.』

 

 - 곰인형이, 소파에 앉은 곰인형이, 일체의 미동도 없이 말을 하고 있었다.

 

위스퍼의 새로운 기능 중에 대화 메뉴도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혹시 내가 다애의 말을 듣지 못한 걸까?

 

『넌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말해주지 그래.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을 대신할 만한 것은 없는 거야?』

 

 곰인형의 대답이 없다. 너무 어려운 질문을 하면 작동해 주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시간, 그러니까 속력과 편리함에 관련이 있는 거니? 반비례하는 거야?』

 

여전히 대답이 없다. 나는 안달이 났다. 대답을 들어야겠다. 그러면 다애의 마음도 알 수 있을 거야. 내가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나서야, 천천히 곰인형의 사이보그 적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언제부터, 우리가 오직 편리함만을 위해- 달리게 되었을까.』

『그건, 생활의 여유로움을 위해서야. 편리하면, 좋잖아. 우린 시간을 아낄 수 있어. 지루하고 답답하게 기다리거나 불편함을 겪지 않아도 된다고.』

『그럼, 그렇게 해서 아낀 시간들을, 우린 무엇을 하며 보내지? 인터넷이 전세계에 완벽하게 구축되었고, 그럼으로써 우린 1초도 되지 않아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정보와 사람들하고 접촉할 수 있었어. 컴퓨터가 보급 된지 얼마 되지도 않아 한 사람이 평균적으로 노트북 하나, 데스크탑 한 대를 가지게 되었지. 디지털카메라와 핸드폰에 내장된 카메라. 이런 것들은 모두 간편하고 쉽게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줬지. 그래, 시간이 정말로 단축되었어. 그럼 그 시간을 넌 어떻게 쓰지?』

『우린 문화 생활이나 여가, 스포츠나 레저 활동을 할 수 있어. 폭넓은 선택을 할 수 있단 말이야.』

 

『 그래서, 우린 그만큼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시간이, 밖에 나가서 축구를 하고 꽃을 보기 위해 나들이를 가는 횟수가 많아졌나? 정말로 우리는 이전보다 여유를 느끼게 되었나?』『…하지만 그런 것까지는 상관없어, 그래도 좋아. 그렇다 해도 전체적으로는 이익이잖아. 모든 것을 다 끝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아, 그런 건.』

 

『그렇다면, 왜 내가 필요한 걸까? 궁금해 한적 있니? 정말 누군가에게 절실히 말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정작 주위를 둘러보면 적당한 사람이 없어서 고민한 적 있냐고? 그래서 결국 그 생각을 꾸역꾸역 밀어 넣은 채 쓸쓸해 한 적은 없어?

 나는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에만 이용되는 게 아냐. 이미 상처를 받아서 자신을 감추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은 하고 싶은 말을 혼자서 실컷 떠들 수 있는 상대가 필요했어. 남들에게 하면 곤란한 이야기들, 가식으로 둘러싸인 자신의 속마음, 남을 헐뜯고 비난하는 말들을 듣는 것도 역시 나야.

 지금의 생활은 편리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이기적으로 만들었어. 집밖을 나갈 필요도 없는데, 사람을 만날 필요도 없는데. 모든 것이 내 손안에서 움직이는데, 어째서 귀찮게 남의 속마음을 헤아려 행동해야 하며 다른 이의 고통과 행복을 걱정해야 하지? 나를 포함한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들은 사람들을 비뚤어지게 했어. 비뚤어진 사람들의 모습도 나는 보지. 그러면 나는 소름끼치게 무서워져.

 지금 세상을 봐. 인터넷만 봐도 알아. 보여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이건 모두 그림자 놀이야. 실상을 아무도 몰라, 본모습은 아무도 모른다고. 말하기 전에는 들리지 않아, 보여주지 않으면 자신의 마음 같은 건 아무도 알지 못해. 사이버 중매 프로그램은 입력된 데이터에 따라서 사람들을 만나서 결혼하게 하지. 기계에 의해 입력되어진 0과 1의 조합을  또 다른 기계가 읽어 들여서 빚어내는 일이야. 아냐, 그렇지 않아, 그게 다가 아냐. 사람이라는 건 그렇게 간단한 동물이 아니야.』


 

  나는 할 말을 잃고 내 앞에서 주절대는 분명한 곰인형, 위스퍼를 쳐다보았다. 한 곳에 시선을 두다 보니 초점이 사라져 이젠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곰인형은 마지막 말을 멈추더니만,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이젠 대답하는 일도 없다. 꿈을 꾸는 것 같다. 제작사의 돌발 이벤트일까? 나는 당첨된 것일지도 몰라, 아마 내 모습이 방송되고 있을지도 몰라….

 

 분명히 귀중하고 중요한 말들을 들은 것 같은데, 머릿속에 남아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제발, 내가 명쾌한 해답을 들을 수 있도록 해줘. 아무도 모르는 그 마지막 비밀을 내게 들려줘.

 

 나는 다애가 놓고 간 곰인형의 포장지를 뜯었다. 그러자 지금껏 한번도 보지 못했던 제품설명서가 툭 하고 떨어졌다. -당신의 진정한 친구, 곰인형- 이렇게 시작한 설명서는 곰인형의 기능과 장점과 사용법들을 주르륵 나열하고 있었다. 그중 눈에 띄는 구절이 있었다.

 

 ‘-아무런 귀찮음도 끼치지 않습니다. 그저 당신의 말을 열심히 듣고 있을 뿐입니다.’

 

 


틀렸어.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나는 곰인형을 바닥으로 집어던지고, 밟고, 잡아 뜯고, 마구 내리쳤다. 흉하게 엉망이 되어 버린 곰인형의 몸 속으로 여기저기 얽혀 있는 전자 회로와 센서들과 소형 칩들이 보였다. 갑자기 속에서 머리로 뭔가가 올라왔다.



나는 알았다.

어째서 곰인형들이 갑자기 작동을 멈췄는지를.

어째서 사람들이 따라서 목숨을 끊었는지를. 그들도 나와 비슷한말을 들었을 것이다.


 

나는 문의 손잡이를 열고 뛰쳐나갔다. 내 발걸음은, 다애의 집을 향하고 있다.

다애도,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 늦지 않았으리라.

루시페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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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시페린
  • 2006-07-06

1   부피가 큰 잡동사니가 담긴 주황색 마대자루를 힘겹게 안고 내려와 건물 뒤 분리수거 박스 안으로 자루 입을 벌려 들이대고 있는데, 속에서 몇 개의 종이들이 팔랑팔랑 떨어져나왔다. 무심코 주워드니 옛날에 적어두었던 일기에서 찢겨져 나온 듯한 것들이었다.  당신과 헤어지고 보낸 지난 몇 개월은 어디다 마음 둘 데 없어 몹시 괴로운 날들이었습니다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잊을 것은 잊어야겠지요 ...그러나 다 내 조국 산천의 아픈 한 봄입니다  흥. 웃기고 있네. 일기에서 부분부분 뜯어진 낱장이었기에 전체 내용은 알수 없어도 수하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소로웠다. 뭐가 행복하시길 비라는 거야, 뭐가 안녕이라는거야. 웃기지마. 너 따위 절대로 안돼, 행복하게 둘 수 없어. 고통스러워해, 피를 토하고 죽어, 죽고 다시 죽어. 그래야만, 해.  쓰레기를 들고 건물 현관을 막 나섰을 때, 찌부등하게 흐린 하늘에서 결국 빗줄기가 떨어졌다. 후두둑후두둑, 차가운 겨울비는 아무런 표정도 냄새도 없이 주위를 얼어붙게 하고 있었다. 분리수거 박스까지는 대략 스물다섯 걸음 정도. 급격히 내려간 온도에 저절로 진저리가 쳐지긴 했지만 수하는 우산을 가지러 돌아갈 생각도 비가 그칠때까지 기다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젖으면 어떠냐. 수하는 쓰레기봉투를 한손에 든 채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해요 그럼? 빨리 이쪽으로 와요.” “춥지만....그래도 괜찮아요.” “아니, 이미 젖었는데 뭐하러 조바심을 내요? 아저씬 안 그래요? 한번 옷 버렸는데 아끼고 할 게 뭐 있어요?”  남자는 짧게 대답했지만, 맙소사, 맞는 말이었다. 한번 젖은 옷이라도 언젠가는 말라야 하니까. 어째서 그걸 잊고 있었을까. 언젠가는 말라야 할 운명의 젖은 옷을 입은 채, 수하는 그제서야 낯선 사람에 대한 긴장을 풀고 슬며시 웃었다. 3  “.....엇.”  “아뇨 그냥. 아는 분 가게여서 일하고 있어요.”  “와 깨끗하고 좋네- 무슨 약국이 이렇게 반짝반짜...” 수하는 그제서야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대강의 증상을 설명했다. 목이 부어서 침 삼키기가 힘들고 코가 좀 막힌 것 같고 앞이 어질어질하다는 둥, 병원에 가긴 너무 머니까 그냥 해열제나 주면 좋겠다고.  “그럼 어디 한번 이걸로 재봐요. 어제 봄비 맞더니 그게 고대로 걸렸나보네. 그러니까 춥댔잖아요.”  “봄이 오는게 싫은가봐요.”  “이거랑 같이 먹어요. 자취하죠? 기운 없으면 병도 늦게 나으니까 가져가요.” 침묵.  “박카스? 쌍화탕보다 훨씬 싼건데? 나야 좋지 뭐 돈도 굳고.”  아니 무슨 해열제하고 박카스가 이렇게 비싸! 언제 이렇게 값이 오른거야 혹시 이거 폭리 아냐? 궁시렁궁시렁 속으로 중얼대면서 수하는 가져간 돈의 전부인 오천원짜리 한 장을 내민다. 아는 사람이라고 깎아줄까 싶었더니 속은 기분이다. 뒤도 안 돌아보고 척척 밖으로 나서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4 5  어쩔

  • 루시페린
  • 2005-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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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록불

    미안하네요. 지난 주에 이미 읽었구요. 잘 보았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주장원 심사평에서...^^;;

    • 2005-09-11 23:38:19
    초록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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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이번 주에 올라온 글이 다 하나씩은 덧글 달고 있는데 내것만 없어서 자플 놀이-_-; 중 2때 썼던 걸, 그것도 과학의 날 행사에 맞춰 썼던 과제용 소설을 다시 들춰 올리는 심리는 무엇일까~요. 이 글 간만에 보니 새롭네-_-;;;

    • 2005-09-11 16:23:49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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