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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함 ―최후의 예술혼(藝術魂)

  • 작성자 폭음열도
  • 작성일 2005-10-25
  • 조회수 148

 

초조함

―최후의 예술혼(藝術魂)―


 

  버스가 자신의 몸 안 가득 담고 있던 사람들의 날숨을 거칠게 토해내는 그 순간, 나는 앉아있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넘어지듯이 버스의 뒷문을 향해 달려갔다. ‘슈우욱’하는 통쾌한 소리와는 대조적으로 문은 너무나 느긋하게 그 육중한 몸을 움직이고 있었고, 초조해진 나는 열리려는 문을 손가락으로 밀어젖히며 조금이라도 그것이 빨리 열리기를 빌었다.

  

  이내 내 몸이 빠져나갈 만큼의 틈이 생겼다. 나는 방금 전 내가 자리를 박차며 밀쳐낸 뚱뚱한 아줌마에게 사과의 말조차 하지 못한 채, 재빠르게 문밖으로 튀어나갔다. 문밖으로 “뭐야, 저 사람. 사과도 없이…….”라는 아줌마의 뚱한 말투가 문밖으로 가냘프게 새어나왔다.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쓸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나는 낡을 대로 낡은 나의 운동화가 메마른 아스팔트 바닥에 지긋이 눌리는 것을 느끼자마자, 눈앞에 있는 역의 입구를 향해 달렸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촘촘한 가시가 되어 성을 내며 나의 눈언저리를 할퀴면서 지나갔고, 개중에 어떤 것들은 나의 가슴을 옥죄며 거친 숨을 토하게까지 했으나, 역시 나는 개의치 않고 연신 무릎을 흔들며 역의 계단을 두 칸씩 뛰어 내려갔다.

  

  양귀비꽃을 먹고 반쯤 미쳐버린 멧돼지처럼 뛰어내려오는 내 모습에 놀란 몇몇 사람들이 내 주위를 피하며 나에게 꺼림칙한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나는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그들 덕분에 좀 더 수월하게 계단을 내려올 수 있었던 나는, 마지막 층계에서 주머니에 잔뜩 구겨진 천 원짜리 지폐 한 장과 동전 2개가 있음을 확인하고 매표소로 뛰어갔다.

  

  매표소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훨씬 많았다. 처음에 나는 그러한 현실이 불러오는 막연한 불안감에 발을 동동 굴렀으나, 이내 모두 부질없는 짓임을 깨닫고 발작하듯 움직이는 몸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생각의 여로(旅路)를 다시금 곱씹어보았다.

  

  이제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전시회. 본래 주어진 기간은 2달 남짓 할 정도로 길었다. 그러나 게으른 천성 때문에 작품 만들기를 하루, 이틀 미뤄왔고, 결국 엊그제서야 발등에 불이 떨어졌음을 느끼고 작품 구상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 오늘, 기발한 아이디어가, 내가 생각해도 기특한 작품의 계획이 나의 머리에 떠올랐다. 정물화 속의 추상화, 혹은 그 반대개념 모두를 포용하는 기발한 작품의 모습이 내 머리 속에 아련히 피어난 것이다. 수정조차 필요 없을 정도로 완벽한 구상이었기에, 나는 급히 짐을 챙겨서 신촌의 작업실로 향했다.

  

  잠시라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작품이라는 것은 구상된 모습에서 세세한 획 하나라도 변형되면 전혀 다른 작품으로 구체화된다. 지금 머리에 담겨있는 그 모습 그대로를 작업실까지 안전하고 신속하게 운반하여 캔버스 위에 표현하는 것이 현재 나의 임무였다. 그렇기 때문에 푸근한 이웃집 아줌마 같았던 버스 안의 그녀를 밀치고도 사과 한 마디 안한 것이었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 것이다.

  

  그렇게 생각에 골몰해있을 때, 매표소 입구에서 짜증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요?”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얼른 돈을 내밀며 신촌 행 표를 한 장 끊었다. 그리고 서둘러 개찰구로 발을 옮겼다. 운 좋게도 개찰구를 넘자마자 지하철이 도착하였기 때문에, 나는 별 탈 없이 지하철을 탈 수 있었다.

  

  신촌행이라 그런지, 유난히도 사람이 많았다. 앉아있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서있는 사람들도 빽빽해서, 나는 인파를 밀치고 노약자 석 앞의 조그만 공간에 겨우 발을 딛고 서있을 수 있었다. 가느다란 한숨이 나옴과 동시에, 몸이 데워지며 발가락이 욱신거렸다. 긴장이 풀린 것이다.

  

  그러나 초조함과 긴장은 전혀 별개의 것인지, 여전히 작품에 대한 압박은 끊임없이 나의 머리에 떠오르며 나를 괴롭게 했다. 몸이 괜스레 비비 꼬이고, 아랫도리가 근질거렸다. 눈알은 뱅글뱅글 돌았다. 무언가 딴 생각, 딴 일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여기저기를 휘젓던 나의 시야는, 나의 앞에 앉아 얌전히 책을 읽고 있는 임산부를 향했다. 불룩한 배와 땡땡한 장딴지, 손으로 당기기만 하면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은 임신복.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한 순간을 위해 가장 추한 모습으로 열 달을 버티는 박애적인 인간의 모습이었다.

  

  얼마나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문득 이 여자에게 조롱을 받는다면 얼마나 우스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상상의 꼬리를 지표삼아 가상의 시나리오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떡하면 이 여자의 이목을 끌면서 나를 한심하고 귀찮은 존재로 부각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한도 내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일단 그녀가 들고 있는 책을 북북 찢어버리는 것이다. 분명 나의 그러한 행위에 그녀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하여서 나를 노려볼 것이다. 그럼 나는 춤을 춘다. 내가 어릴 적, 아버지가 매일 방에서 혼자 연습하시던 지르박을, 그야말로 지랄 맞게 추는 것이다. 그리고는 말한다.

  

  ‘태아의 정서적인 안정을 위해서는 지르박이 최고입니다. 지르박!’

  

  마지막 ‘지르박’을 외칠 때에는,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갈라지게 한다. 그럼으로써 히틀러와 레닌의 열변과 같은, 비장함과 진지함, 그리고 격양됨을 한껏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게거품을 몬 뒤 유유히 다음 칸으로 사라진다. 얼마나 병신 같을까!

  

  스스로의 생각에 도취 된 나는 그만 실없는 웃음을 흘리고 말았고, 책을 읽던 임산부는 깜짝 놀라 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는 헛기침을 한 뒤 시선을 황급히 피했다.

  

  젠장, 뭘 쳐다보는 거야. 내가 생각한 일에 내가 우스워 웃는 것이 뭐 그리 놀랄만한 일이라고 어깨를 들썩이는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저 유명한 데카르트의 명언(明言)도 있지 않은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곱씹어볼 수록 너무 멋진 말이었다. 그와 동시에, 이러한 명언을 만든 데카르트에 대한 한없는 열등감과 질투심이, 나의 뱃속에서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이곳은 내 머리 속에 비치되어있는 작은 교실이다. 나는 짧은 스포츠머리에 추리닝 바지를 입고, 각목을 어깨에 지고 있는 약간은 폭력적인 체육 교사이다. 나는 어깨에 놓여있던 각목으로 바닥을 툭툭 치며 잔뜩 겁먹은 학생들에게 말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고 말한 새끼 누구야. 이리로 나와.’

  

  침묵.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전보다 더욱 화가 난 나는 교탁을 발로 걷어차며 다시 한 번 반복한다.

  

  ‘귓구녕이 막혔어! 그렇게 말한 새끼 나오라고!’

  

  나의 불같은 성격에 굴복한 한 학생이 손을 든다. 그리고 그 녀석은 4분단 3번째 줄에 앉아있는 데카르트를 가리킨다. 지목된 데카르트는 자신을 밀고한 학생을 원망스럽게 쳐다보면서도, 말없이 나에게 다가온다. 나는 무언(無言)으로 데카르트에게 칠판을 잡고 엉덩이를 내밀라고 명령한다. 그는 내 말에 따른다. 나는 각목을 높이 쳐든다. 데카르트도 허벅지에 힘을 잔뜩 준다. 내 머리 위에 있던 각목이 빠른 속도로 하강한다. 그 순간.

 

 


  

  “이번 역은 신촌, 신촌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상상의 벽마저 뚫어버릴 만큼의 강렬한 소리가 귀를 찔렀다. 정신을 추스름과 동시에 지하철의 문이 열렸고, 나는 도망치듯이 지하철을 나왔다. 그리고 지하철 밖에서 내 앞에 앉아있던 임산부를 바라보았다.

  

  지하철 문이 서서히 닫힘과 동시에 두툼하던 그녀의 배도 점차 얇아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지하철의 문이 닫히자, 그녀의 배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이런 시팔!”

  

  절규에 가까운 나의 목소리가, 작업실의 구석구석까지 퍼져 공기를 흔들었다. 은은하게 방안을 비추던 전등 불빛이 격렬하게 흔들렸고, 눈이 시릴 정도로 하얗던 캔버스가 점차 혼탁해보이기 시작했다.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단 하나도. 내가 구상했던 작품의 단 한 획도 떠오르질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분명히 까먹지 않게 잘 기억을 해뒀는데, 몇 번이고 떠올려봤는데. 막상 붓을 드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역시, 작업실과 집의 거리가 너무 먼 탓이었나? 난 어렸을 때부터 항상 이런 식이었다. 무언가 내게 소중한 것은 내 주변사람들이 알지 못할 정도의 먼 거리에 두는 습성이 내게는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 아끼던 장난감 총을 걸어서 30분 걸리는 이웃동네에 숨겨놓았었다. 고등학교 시절 사귀던 여자 친구도 버스로 5정거장이나 걸리는 동네에 사는 여자였다. 내가 정해놓은, 불안함이 잠식될 정도의 이 거리가, 결국은 나의 머리를 압도할 정도의 위대한 예술혼마저 부식시키고 만 것이다. 이 거리가 뺏어간 시간 속에, 나의 기억이 들어있을 것이다.

  

  아냐, 무언가 좀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의 이 해명에도 불구하고 가슴은 여전히 답답하지 않은가. 나는 다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구상 된 작품이 날라 간 이 시점에서, 나의 이 두뇌를 아낄 필요성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된 두뇌는 재빠르게 망각의 실마리를 찾아냈다.

  

  초조함. 나의 전신을 떨게 만들었던 그 초조함이다. 그것이 나의 기억을 뺏어간 것이다, 라고 뇌는 말했다.

  

  에이, 설마. 그까짓게? 임산부와 지르박이? 데카르트와 체육 교사가? 게거품과 각목이 이 모든 일의 원인이라는 거야?, 라고 나의 몸은 말했다.

  

  그리고 뇌가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나는 폭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침이 질질 흘러 턱 끝을 적시고, 손가락이 저릴 정도의 웃음이 배에서부터 입까지 터져 나왔다. 멈추려하면 할수록 입에 침은 더욱더 고일뿐이었다.

  

  웃음으로 몸을 가누기도 힘든 그 상태에서, 나는 붓을 들었다. 그리고 제법 호기롭게 곡선 하나를 그려내었다.

  

  그것은 지하철에서 본 임산부의 배였다. 그것은 또 휘둘러지고 있는 각목이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이 이 한 획에 담겨있었다.

  

  진정한 예술혼의 완성품이었다.

 

 

 

 - -
'초조함'이라는 감정에 대해, 제 나름대로 끄적여 본 작품입니다. 지루한 작품이겠지만,
재밌게 읽어주시고 많은 비평 부탁드립니다. 저는 비평 잘해주는 여자가 제일 좋아요 ^ ^
(남자분들도 좋습니다)

폭음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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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폭음열도
  • 2006-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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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견 하나 올리자면, 제 생각에는 초조함이란 소심한 사람이 갖는 그런 감정 같네요. 작은 일에도 깜짝놀라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그런 반응 말이죠. 초조함을 나타내는데 급하게 달리는 모습보다 표를 사기위해 발을 동동 거리는 모습등을 강조하면 더 좋을거라 생각합니다. 비록 모자른 비평이지만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 2005-10-28 19:28:05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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