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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 작성자 이현욱
  • 작성일 2005-12-25
  • 조회수 448

<첫사랑>

 

“으악~~~~~~~ 지각이다.” 부엌에선 설거지 소리가 들립니다. 이미 아침식사가 끝난거죠.

“그러니까 엄마가 알람 맞추랬잖니.”

“엄만 치사하게, 입학 첫날부터 이런 게 어딨어!”

“학교가선 밥 잘 챙겨먹고, 수업시간에 졸지 말고……”

“다녀오겠습니다.”

오늘도 아침부터 체력 단련하게 생겼네요. 아, 제가 누구냐구요?

이름 : 김현아.

나이 : 17세(한국나이)

학교 : 이수여고

제가 바로 대한민국 새내기 여고생, 김현아예요.

이수여중을 졸업했는데, 졸업하는 날까지 지각을 했다니까요. 제 생각에는 아마 모르긴 몰라도 체력만큼은 제가 세계 1등일 거예요. 오늘도 헐레벌떡 뛰어가고 있는데, 이럴 수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바로 눈앞에서 버스가 지나갔습니다. 그렇게 운동장에서 교장선생님의 말씀이 거의 끝날 쯤에 학교에 도착하고 제가 배정된 1학년 5반으로 들어갔는데, 그 입학 첫날의 어수선한 분위기가 저를 맞이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가장 친했던, 그리고 같은 초등학교 ․ 중학교를 거쳐 지금은 같은 고등학교, 같은 반이 된 정은이 옆으로 갔습니다.

“정은아 안녕?”

“어, 오늘은 평소보다 좀 늦었네.”

“뭐! 얘는......”

제 제일 친한 친구, 현정은.

애가 워낙에 착하고 순진해서 저랑은 반대지만, 그래서 우린 더욱 친하답니다.

근데 한 구석에서는 어느 키 크고 예쁜 여자애를 중심으로 열명 정도의 애들이 모여 있는 게 아니겠어요?

“정은아, 쟤들 뭐하는 거야? 왜 저렇게 모여 있어?”

“어, 가운데 애가 은별이라는 앤데, 정은별. 우리학교 수석입학이래. 예쁘지?”

“응, 그러네. 근데 수석입학을 했다고?”

“그래, 거기다가 집은 얼마나 잘 사는지 몰라. 외국에서 살다왔다는데……”

“완전 퀸카다!”

“그래서 애들이 저렇게 모여 있는 거야.”

“음, 그렇구나.”

얼마 후, 선생님께서 들어오셨다. 남자선생님인데, 이름은 배광호. 나이는 한 30대 후반정도 되어보였다. 결혼도 하셨다는데 굉장히 잘 생겼다.

“1번 김정용, 2번 김진규, 3번 박주원, … ,22번 김현아, … 32번 박진주, 33번 신루비, 34번 정은별, 35번 현정은.”

‘내 번호가 22번, 정은이는 35번이네. 박진주, 신루비, 정은별. 아까 되게 친한 것 같던데.’

“자, 여러분들은 이제 어엿한 고등학생이에요. 중학교 때의 나쁜 버릇은 버리고 이제는 고등학생답게 행동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여러분들 옆에 앉아있는 친구들과 여러분은 보통 인연이 아니에요. 저와도 마찬가지고요. 우린 수억 겁의 인연으로 ……”

‘후~ 또 시작이다. 중학교 선생님과 고등학교 선생님은 좀 다를 줄 알았는데, 선생님들은 다 똑같은 가봐. 우리도 이제 고등학생인데 저런 소린 좀 안하면 안 되나?’

근데 옆에서 정은이는 뭘 적는지 계속 적네요. 꿈이 ‘기자’라는 정은이는 다른 사람이 말할 때 적는 걸 좋아합니다. 그래서 순진하기는 하지만 굉장히 날카로운 면도 있죠. 지루하게 말씀을 끝내시고 난 후 선생님께서는 나가셨고 애들은 또다시 ‘정은별’이란 애를 중심으로 모였어요. 은별이 옆에선 ‘신루비’와 ‘박진주’라는 애가 항상 서 있었는데 그 둘은 은별이의 친구가 아니라 부하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 애들이 하는 얘기에 귀 기울이고 있던 나는 내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정보를 듣게 됩니다.

“야, 우리학교 옆에 남자 학교 있지?”

“응. ‘진성고’라는데, 왜? 무슨 일 있어?”

“오늘 그 학교에서 싸움한대~~.”

애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하네요.

한창 선생님 말씀하실 때 적은 것을 보고 있던 정은이에게 저는,

“정은아, 우리도 오늘 수업마치고 진성고 가보자. 남자애들끼리 싸움한다잖아.”

“싫어, 얘. 그런 건 왜 구경하려고 그래.”

“이런 게 다 네가 나중에 기자할 때 도움이 되는 거야. 이런 사건․사고 현장에 네가 자주 있어봐야지, 안 그래?”

“그런가?............ 응, 알았어.”

입학식이 끝나고 우린 진성고체육관으로 직행했습니다.

바로 옆 학교라 빨리 간다고 갔는데 벌써 그 학교에는 벌떼같이 주변학교 학생들이 모여있는 게 아니겠어요?

‘이 싸움이 그렇게 대단한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미 정은이는 관전하기 좋은 장소를 택해서 저를 불렀습니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 수십 명의 남학생들이 우루루 나왔는데, 정은이는 언제 그런 걸 조사했는지 오늘 싸움에 대해서 제게 말해줬습니다.

오른쪽이 태권도부고, 왼쪽이 유도부야. 둘 다 진성고의 대표적인 운동분데, 하필 입학 첫 날부터 두 부의 기싸움이 생긴거야. 그래서 오늘 싸움은 각 부의 주장들의 대결이래.”

“주장들끼리? 유도랑 태권도랑?”

“응. 근데, 더 웃긴 건 그 주장들이 모두 1학년이래. 우리랑 동갑이지.”

“1학년? 이 학교도 오늘 입학식한 거 아니야?”

“맞아. 근데 오늘 운동부 1학년의 주장들을 모두 뽑았대. 아, 그리고 태권도부 주장 이름은 한정태. 완벽한 킹카지. 그래서 오늘 이렇게 사람들이 모인 거고. 유도부 주장은 이유식. 중학교 때 전국대회 나가서 우승도 했대.”

우와~ 정은이는 언제 이런 걸 다 알았을까요? 정말 천성 기자인 아입니다.

그리고 전 태권도부 주장을 봤는데, 세상에, 전 심장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태권도부 주장 한정태를 보는 순간, 전 마치 큐비트의 화살을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변하고 주위에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싸움이 시작됐는데, 승패를 쉽게 가릴 수 없을 정도로 팽팽했습니다. 때리고 맞고 또 때리고 맞고. 그러기를 20분. 함성을 끊이지 않았고 두 사람 모두 체력이 떨어졌는지 헉헉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이유식이 막 달려가더니 한정태를 잡으려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정말 눈 깜짝 할 사이에 마치 한 마리 용이 승천하듯 한정태는 ‘뒤돌려차기’라는 것으로 이유식을 쓰러뜨렸습니다. 전 정말 그 순간 미친 듯 환호성을 질러댔고 흰 도복을 입은 왕자님을 보는 듯 했습니다. 아니, 왕자님을 봤습니다.

그렇게 저의 고등학교의 시작은 제 첫사랑과 함께 시작됐습니다.

다음날, 은별이는 정말 오랜만에 알람을 맞춰놓고 아침밥도 먹고 제 시간에 학교에 가서 기쁜 마음으로 있던 저를 한 순간에 화나도록 만들었습니다.

“야, 내가 진성고 한정태 찍었으니까 너희들 아무도 건들지마.”

“은별아, 다 말하고 왔어.” 루비와 진주가 말했습니다. 루비와 진주는 이미 다른 반에 가서 다 말하고 온 것 같았습니다.

“싫어. 나도 한정태 찍었는데!” 전 당당히 말했습니다.

“풋, 뭐? 야, 쟤 뭐야?”

“이수여중 나왔다는 ‘김현아’라는 앤데 니가 신경 쓸 애 아니야.”

“뭐! 신루비,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그 순간 담임선생님께서 들어오셨고 그렇게 쥬얼리파(정은별, 신루비, 박진주 모두 이름이 보석이라서…)와 저와의 전쟁은 시작됐습니다.

저는 쥬얼리파가 별로 겁나지는 않았어요. 물론, 친구들 중 반 이상이 쥬얼리파 편이었지만, 그래도 제가 친구들은 많은 편이라 제 편도 어느 정도 있었거든요.

그 이후, 저는 수업을 마치고 정은이와 함께 진성고 교문앞을 기다렸습니다.

“현아야, 너 왜 그렇게 자꾸만 웃어?”

사랑한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요? 가슴이 두근두근 대고 아무 일도 없는데 계속해서 웃음이 나오고. 그러다가 막상 그 사람을 만나면 숨어버리게 되는……

며칠을 그러다보니 항상 한정태의 주변에는 세 친구가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정은이한테 물어보니, 정은이도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갑자기 그 세 친구 중에 한 사람을 가리키며 “저기 경수 아니야?” 하는 거예요. “뭐? 경수?” 자세히 보니 정말 경수였습니다.

경수는 누구냐고요?

이름은 이경수. 저와는 초등학교 동창이에요. 경수도 어디 빠지지 않는 인물이에요. 크게 친하지는 않았지만, 한정태의 친구라니, 왜 이리 반가운건지…….

다음날, 저는 경수의 핸드폰번호를 알아내서 문자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경수야, 오랜만이다. 나 현아야, 김현아. 초등학교 동창. 기억나?’

‘오? 진짜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응. 너도 잘 지냈지?’

‘그럼. 근데 갑자기 웬일이야?’

‘어, 알고 보니 네가 진성고에 다니더라구. 난 옆 학교, 이수여고 다니거든.’

‘진짜? 신기하다.^^ 아직도 현정은이랑 같이 다녀? 우리 언제 한 번 보자.’

‘응. 그래서 말인데, 우리 오늘 만날래?’

‘오늘? 음… 좋아.’

‘5시에 진성공원에서.’

‘알았어.’

그렇게 전 정은이와 함께 5시에 진성공원으로 갔습니다.

“여기야!”

“어, 안녕? 일찍 왔네.”

“오랜만이다. 많이 변했네, 김현아.”

“안녕? 나 알지? 현정은.”

“그럼 김현아하면 현정은, 현정은하면 김현아 아니냐.”

“근데, 너 지금 진성고 태권도부야?”

“어. 어떻게 알았어?”

“니가 방금 맞다고 그래서 알았지.”

“저번에 정태랑 유식이랑 한 판 붙을 때 너희도 왔어?”

“응. 그 때 너무 멋있었어.”

“그 때 정태가 이겼잖아. 현아 너, 정태 좋아하나보구나. 그 때 정태 뒤에서 나 있었는데, 못 봤지?”

“아니야! 얘는… 당연히 너 봤지.”

“정태 싸움 잘하지?”

“뭐, 그래, 싸움은 잘하더라.”

“싸움만 잘하냐? 키도 크지 운동도 잘해, 얼굴도 잘 생겨, 집도 좋아, 애가 공부도 잘해요.”

‘역시, 한정태. 킹카 중에 킹카다.’

“그래? 근데 너 하교할 때 주위의 친구 3명은 누구야?”

“야, 김현아. 이제 솔직하게 말하시지.”

“뭐가~?”

“현정은, 니가 말해봐. 너희들 나 만나러 온 이유, 따로 있지?”

“어…사실은 그게…”

“정은아! 말하지마. 말하면, 너 배신이야.”

“하지만, 경수도 다 아는 거 같은데? 너, 다 알고 있지?”

“글쎄, 딱 보니까 김현아가 정태를 좋아하는 거 같은데, 맞냐?”

“거봐, 알고 있잖아.”

‘으이구, 니가 친구냐! 니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좀 부끄럽겠냐고.’ 애가 착한건지, 바본건지, 가끔은 저도 헷갈린다니까요.

“……”

“김현아, 그러니깐 정태에 대해서 궁금한데, 하필 하교할 때 내가 정태 옆에 있는 걸 보고 나한테 연락한거다. 그거야?”

“응, 미안해.”

“괜찮아. 정태는 원래 인기가 많아서, 이런 경우 종종 있었어.”

“그래? 그럼 기분이 좀 나쁘겠다.”

“아니. 나, 너희들이 생각하는 거만큼 그렇게 인기 없진 않거든. 나도 어느 정도는 인기 있다고!”

“현아 말에 그렇게 화낼 거까지야. 근데, 그럼 그 때마다 한정태에 대해서 애들한테 얘기해줬어?”

“현정은, 나 그렇게 입 싼 놈 아니야. 당연히 아무 얘기도 안 해줬지.”

“그러면, 우리한테도 아무 얘기 안 해줄 거야?”

“글쎄, 그건 생각 좀 해보고.”

“한정태가 항상 하교할 때 너랑 친구 2명이랑 같이 다니던데, 친구들 누구야? 경수야~ 우린데 뭐 어때, 우리 초등학교 동창이잖아!”

“글쎄다. 그런 얘기라면 난 간다.”

“야, 너 정말 이러기야!”

갑자기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왜 갑자기 눈물을 흘렸을까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현아야. 야, 이경수. 현아 울잖아.”

“뭐야? 너답지 않게 왜 이래?”

“그러니까 빨리 대답해줘. 얘, 진짜로 한정태 좋아한단 말이야.”

“아, 나 참. 미치겠네.”

“흑흑흑. 왜 ‘흑흑’ 말 ‘흑흑’ 안 해줘?”

“아, 사실, 정태가 여자한테 관심이 없걸랑. 그래서 그냥 너만 상처받을까봐. 그러니까 그냥 포기해라. 응?”

“싫어. 앙~~~~~~~~~엉엉엉.”

“미치겠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여기서 다시 만나자.”

“현아야, 그렇게 하자, 응? 경수한테도 생각할 시간을 좀 줘야지. 경수도 친구얘기를 함부로 할 순 없잖아.”

그 날 밤, 전 부끄러워 죽는 줄 알았습니다. 별로 친하지 않았던 초등학교 동창 앞에서, 그것도 한정태의 친구 앞에서. 왜 울어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약 올려서 그랬을까요? 저의 소중한 첫사랑을 가지고 말이죠.

어쨌든 다음날 오후 5시. 우린 진성공원에서 다시 만났어요.

“그래, 도대체 뭐가 궁금한 거야? 물어봐.”

“진짜? 있잖아, 그 친구들, 한정태 친구들.”

“나와 태현이, 진건이, 그리고 정태는 삼총사와 달타냥 같은 사이야.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지. 태현이는 왜 곱슬머리인 애 있지, 굉장히 착하게 생긴, 걔가 최태현이야.”

“아, 알아. 그 한정태 오른쪽에 있던 애?”

“몰라. 그건 잘 모르겠는데. 그런 건 어떻게 아냐? 진짜 무지하게 좋아하나보네.”

“그리고 진건인가, 하는 애는?

“진건인 안경 낀 애 있지, 우리 태권도부 부주장이야. 김진건.”

“전부 태권도부야?”

“아니, 태현인 빼고. 걘 운동 잘 못하거든.”

“정태에 대해선 궁금한 거 없어?”

“한정태에 대해서는, 한정태한테 직접 알아 낼거야.”

“뭐? 하하하. 니가 어떻게 한정태랑 사귈 건데?”

“그러니까 니가 우리 좀 연결되게 도와줘.”

“나도 그럴려고 이렇게 알려주는 거잖아. 뭐, 다른 방법 있어? 어떻게 도와줄까?”

“어떻게? 음… 그런 건 아직 생각 안 해봤는데.”

“뭐? 휴~ 너도 참 걱정이다, 걱정. 현정은, 넌 뭐 다른 생각 없어?”

“생각해봤는데, 4:2 미팅이 어때?”

“4:2 미팅? 미팅은 무슨, 그게 말이 되?”

“다른 뜻 없고 말 그래도 그냥 만나는 거야. 넌 너 친구들한테 오랜만에 만난 초등학교 동창을 소개시켜주는 거지. 그렇게 해서 일단 한 번 보는 게 중요한 거니까.”

“음, 좋은 생각이다. 그럼, 내일 모레 6시에 ‘스쿠다이스’라는 레스토랑에서 보자. 김현아, 어때?”

“좋아, 좋아. 이경수, 고마워.”

“고맙긴, 이왕 도와주려면 제대로 도와줘야지. 그럼, 그 때 봐.”

이렇게 우린 헤어졌습니다. 정은이는 어떻게 그런 좋은 생각을 했을까요? 정말 제가 친구하난 제대로 뒀다니까요.

그렇게 이틀 동안은 수업도 제대로 듣지 않고, 기대에 부풀어, 설레는 마음으로 보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저는 6시에 ‘스쿠다이스’에 있더군요. 그리고 옆에는 정은이, 앞에는 삼총사와 달타냥.

“이쪽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나의 Best-Friends. 그리고 이쪽은 내 초등학교 동창. 일단 자기소개부터 하자. 난 이경수. 모두 알지? 이번에 만나기를 주도한 사람.”

“난 진성고 1학년 3반 최태현이라고 해.”

“난 김진건. 나도 진성고 1학년 3반이고 현재 태권도부 부주장이야.”

“난 한정태야. 마찬가지로 진성고 1학년 3반이고 태권도부 주장이지.”

“안녕? 난 현아의 둘도 없는 친구, 이수여고 1학년 5반, 현정은이야.”

“안녕? 난 김현아야. 나도 이수여고 1학년 5반.”

“자, 내가 이렇게 만나자고 한 이유는, 앞으로 우리 6명 모두 친하게 지내자는 의미에서야. 우리 모두 친구로서 말이지. 정태 너도 말 한마디 해.”

“나?...... 배고프다. 우리 일단 밥부터 먹자.”

그렇게 우린 한바탕 웃고 저녁식사를 하고 전화번호도 교환했어요. 그 때 정태를 보고 저는 생각했죠. ‘역시 이 남자가 내 남자다.’

다음날 학교에 가니, 쥬얼리파가 절 부르더군요. 옥상으로 말이죠.

“야, 김현아. 너 어제 한정태 만났다며?”

“그래. 정태 친구들도 만나고 정태랑 전화번호도 교환했어.”

“뭐? 정태? 이게 진짜!”

“은별아, 진정해, 진정.”

“어, 그래. 후~ 진주야, 이런 애들은 니가 해결했어야지. 도대체 너 뭐 했어!”

“미안, 미안해. 난 감히 너한테 도전할 애는 없다고 생각했지.”

“김현아! 이 정은별이가 하는 첫 번째 경고다. 다시는 우리 정태씨 만나지마.”

“정은별! 이 김현아가 하는 첫 번째 경고다. 다시는 우리 정태씨 만나지마.”

“뭐? 무서운 걸 모르는구나, 너. 무서운 걸 모르면 가르쳐줘야지. 얘들아!”

“뭐야, 왜이래? 아, 아, 아아, 아,…”

“학생주임 떴다!”

“뭐, 젠장. 너 하여튼 조심해, 알았어? 얘들아, 가자.”

쥬얼리파 애들은 가고, 조금 있으니, 정은이가 달려왔습니다.

“괜찮아? 많이 아파? 이런 나쁜 애들.”

“어, 괜찮아.”

사실은, 무지하게 아팠습니다. 둘이서 번갈아가면서 때리는데, 정말 아파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신루비, 박진주, 그리고 정은별. 언젠가는 꼭 복수하리라고 다짐했습니다.

거울을 보니 머리는 심하게 헝클어지고 얼굴엔 멍도 들었습니다. 부모님껜 장난치다 다쳤다고 했죠, 뭘. 그 후로 며칠동안은 정태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직 멍의 흔적이 남아있을 무렵, 정태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습니다.

‘김현아, 나 부탁이 있는데, 한 가지 들어줄래?’

‘응. 뭔데?’

‘나 어느 모임에 가야 하는데, 애인동반이래. 그래서 니가 함께 가줬으면 좋겠는데.’

‘내가? 내가 어떻게…’

‘친구 좋다는 게 뭐냐? 바로 이럴 때지. 부담 갖지 말고 그냥 같이 가주면 되.’

전 정말 그 때 미치게 좋으면서도 미치게 슬펐습니다. 제가 얼굴에 멍이 들었잖아요.

‘언젠데?’

‘3일 뒤’

‘어떡하지? 나 그 때 약속 있는데.’

‘뭐, 그렇담 할 수 없고.’

‘어, 미안해.’

‘괜찮아.’

정태와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은 지 얼마 후, 경수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습니다.

‘야, 김현아, 너 바보아냐? 어떻게 그런 기회를 차버리냐?’

‘어쩔 수 없었어.’

‘설마… 너 튕겼는 건 아니지? 그런 수작은 애초에 버려.’

‘그런 거 아니야. 사실… 나 얼굴에 멍들었단 말이야.’

‘뭐? 어쩌다가?’

‘친구랑 장난치다가.’

‘너답다. 너다워. 으이구, 이런 바보멍텅구리 같으니라구.’

‘니가 정태한테 내 얘기 해줬어?’

‘그래! 정태가 그걸로 고민하길래, 내가 너랑 가라고 그랬지.’

‘이야~고맙다, 경수!’

‘에휴~ 근데 아무 소용없어 졌잖아. 뭐, 여하튼 몸조리 잘하고 다음에 보자.’

‘그래, 근데 누구랑 가는지 알면 나한테 알려줘.’

전 정말 그 때만큼은 당장에 쥬얼리파 애들을 패고 싶었다니까요. 그런데, 그것은 약과였습니다.

이틀 후, 경수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습니다.

‘누구랑 가는지 알았어!’

‘진짜? 누군데?’

‘정은별이라고… 너희학교라는데?’

‘뭐, 정은별?’

‘알아? 걔가 며칠 전부터 매일 정태를 기다리다가 선물도 주고 마땅히 갈 사람도 없고 해서, 정태가 걔랑 가기로 한 거 같던데.....’

한정태랑 정은별이랑 둘이 애인행세를? 전 너무나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정은아, 정태가 은별이랑 간대. 나 어떻게 해야 되? 은별이한테 가서 때려버릴까?”

“때린다고 너랑 정태랑 가는 것도 아닌데 뭘. 일단, 진정해.”

“그렇다고 둘이 가게 놔둘 순 없잖아.”

“만약에 정태가 은별이랑도 안 가면 그 모임에서 정태 입장이 어떻게 되겠어. 은별이는 성격 좀 안 좋은 것만 빼면 애가 괜찮으니까 정태한테 해는 안 끼칠 거야. 그리고… 내가 가서 감시할게.”

“뭐? 니가 간다고? 어떻게?”

“나, 사실… 태현이랑 가기로 했거든. 미안해. 난 너도 같이 갈 줄 알았어.”

“정말 갈 거야? 야, 너 배신이야.”

“내가 가서 둘이 감시한다니까! 믿어. 나, 너 제일 친한 친구 현정은이야.”

“흠… 너, 태현이 좋아하지? 그렇지?”

“아니야, 얘는......”

“태현인 착해서 너한테도 잘 해 줄 거야. 잘해봐라.”

“아니라니까…”

“태현인 정태랑도 제일 친한 친구니깐 네가 잘되면 나도 잘 될 수 있을 거야. 대신, 내일 가서 정태랑 은별이 잘 감시해야 해.”

“알았어. 그건 걱정 마.”

다음 날, 저는 홀로 쓸쓸하게 집으로 갔다가 학원에 갔다가 밤늦게 다시 집으로 갔습니다.

그 날, 전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일기를 썼습니다. 우정에 대한 배신의 눈물도,  복수의 눈물도 아니었습니다. 그건… 사랑에 대한 그리움의 눈물이었습니다.

그 때 정은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여보세오?’

‘나야, 자다가 깼어?’

‘아니. 이 때까지 놀았어?’

‘어.’

‘재밌었나보네. 어땠어?’

‘정말 우리가 노는 거랑은 다르게 놀더라. 학생들끼리의 모임인데, 수다만 떠는 게 아니라 공부얘기도 하고 시사적인 얘기도 하고 그랬어. 학문적인 모임인 거 같아.’

‘그래? 재밌었네…’

‘어. 근데, 현아야, 이번 주 주말에 애들끼리 모여서 놀기로 했어. 그 때 쯤이면 니 멍도 풀릴 것 같아서.’

‘정말? 우리 6명이서?’

‘아니…9명이서.’

‘9명? 혹시, 쥬얼리파도 같이?’

‘으응......어쩔 수가 없었어. 은별이가 만나자고 했거든.’

‘알았어.’

‘그래, 그럼 내일 보자.’

‘어, 너도 오늘 피곤했을 텐데, 잘 자.’

며칠이 지나고, 드디어 주말이 되었습니다.

4:5 미팅을 한거죠.

“얘들아, 안녕? 여기야, 여기.”

경수가 우리를 남자애들 쪽으로 부릅니다.

“김현아, 너 요즘 많이 바빴나 보네. 통 얼굴을 보지 못했어.”

“미안, 조금 바빴어. 정태 넌 잘 지냈지?”

“그럼, 정탠 잘 지냈지.”

갑자기 우리 둘의 대화를 훼방 놓는 사람이 불쑥 나타나는 게 아니겠어요? 누군지는 뻔합니다. 정․은․별

“그걸 니가 어떻게 알아?”

“어머, 얘는 무섭게 갑자기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아, 왜 그래, 어차피 오늘 즐겁게 놀려고 만났는데!”

역시 경수가 해결해 주네요. 그러면서 정태를 신경 쓰라고 저에게 눈치를 보냅니다.

“우리 5명은 너희 4명이 모두 같은 반이듯이 모두 같은 학교, 같은 반이야.”

“아, 그래? 그건 또 몰랐네!”

“자, 길거리에서 이럴 게 아니라, 일단 영화부터 보는 게 어때?”

그 말을 꺼낸 은별이는 아마 자기가 표를 끊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자기가 정태 옆에 앉으려고 말이죠. 말없는 신경전. 결국 좌석 배치는,

‘신루비 박진주 김진건 정은별 한정태 김현아 이경수 최태현 현정은’이 되었습니다.

우린 영화를 보고 식사를 한 후, 노래방에도 갔습니다. 정태는 어쩌면 저렇게 못하는 게 없을까요? 노래도 어찌나 잘하던지… 다만 중간에 은별이와 커플노래를 불렀다는 것만 빼면 오늘은 아주 좋은 휴일이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은별이가 절 옥상으로 부르더군요.

“우리 1:1로는 말해본 적 없지? 풋, 너와 단둘이 꼭 해야 할 얘기가 있어서.”

“우리 둘이? 무슨 얘긴데?”

“마음의 준비를 좀 해두는 게 좋아.”

“무슨 얘긴데, 그래? 빨리 말해.”

“나 어제부터 정태씨랑 사귀기로 했어. 우리 이제, 커플이야.”

“뭐? 정태가? 너랑? 그런 거짓말을 나보고 믿으란 말야?”

“거짓말? 하기야 믿기지 않겠지 아니, 믿고 싶지 않겠지!”

“그런 거짓말로 날 포기하게 만들 거면 당장 그만둬.”

“믿든 말든 니 마음대로 해. 못 믿겠음 정태씨한테 물어보면 될 거 아냐!”

그리고는 은별이는 내려갔습니다. 전 옥상 문을 향해 계속해서 걸어갔습니다. 그런데도 문은 가까워지기는커녕 그대로 있을 뿐이었습니다. 뿌옇게 변하면서 말이죠. 전 머릿속으로만 가고 있었습니다. 가서, 은별이 머리채를 잡고 마구 때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몸은 눈물을 흘릴 뿐 그대로 있었습니다. 사랑은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는 걸 그 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제 마음속으로는 충격에 휩싸여, 저 혼자 좋아해놓고 배신에 휩싸여,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그날 밤, 전 인생 최악의 날이라며 일기를 썼습니다. 한 남자 때문에 두 번째 눈물을 흘리면서…

그리고 그 때 걸려온 전화.

‘여보세요?’

‘여보세요? 나 정은이야.’

‘어, 웬일이야?’

‘아니, 뭐 별다른 일은 없고, 그냥 네가 오늘 우울해 보여서.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은, 아무 일도 없어…… 흑흑흑’

‘뭐야, 너 우는 거야? 무슨 일인데, 말해봐.’

‘사실, 흑흑 정태랑 흑흑 은별이랑....... 사귄대.’

‘뭐? 누가 그래?’

‘은별이가 흑흑 그랬어.’

‘은별이가? 그럼 확실하지 않은 거 아냐. 정태한테 물어봤어?’

‘아니.’

‘이런 바보! 확실한 정보는 당사자한테 물어봐야 하는 거야. 은별이 이런 나쁜! 일단, 진정 좀 해봐.’

‘근데, 은별이는 정태한테도 물어봐라고 하면서 사실 같이 말했단 말야.’

‘그건 사실일 수 있겠지만, 사실과 진실은 엄연히 다른 거야. 사실은 객관적이지만, 진실은 주관적이거든. 그러니까 무슨 사연이 있을 거야. 니가 내일 정태랑 만나봐. 정태한테 직접 물어보란 말야. 알았지?’

‘어, 알았어.’

‘으이구, 넌 그런 게 있으면 나한테 먼저 말했어야지. 혼자 울고 있긴......’

‘미안해. 나도 오늘 너무 정신이 없었어.’

‘안 봐도 뻔하다. 너 지금 울면서 일기 쓰고 있지?’

‘히히.’

‘웃지 마, 울다가 웃으면 신체이변 생기는 거 몰라? 그럼 내일 학교에서 보자.’

‘어, 알았어. 잘 자.’

지금 생각해보면, 정은이는 정말 제 친구이지만 정신연령은 저보다 한 수 위인 것 같아요. 아님 정말로 천성 기자인 걸까요? 그 때도 기자같이 당사자니, 사실이니, 진실이니, 했으니까요.

다음 날, 수업이 끝나고 전 혼자서 진성공원으로 갔습니다. 정태와 단둘이서만 보기로 했거든요. 한참을 기다리자 옷에 흙먼지를 묻혀선 오는 거예요. 보나마나 또 운동을 하고 오는 거였겠죠. 보자마자 눈물이 나오려는 걸 꾹 참고 잘 지냈냐는 의례적인 인사로 우리의 대화는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난 뒤…

“야, 너 은별이랑 사귄다며? 진짜야?”

“어. 어떻게 알았어?”

“은별이가 말해주더라. 둘이 정말로 좋아해?”

“당연하지, 서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사귀는 사람들이 세상에 어딨어?”

“그래서 은별이........ 사랑해?”

“야, 너 왜 그래? 고개 푹 숙이고.”

그 때 전 이미 눈에서 사랑과 배신과 기다림과 억울함과 그리움과 분노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빨리 대답하란 말이야!”

“너는! 너는 나 사랑해?”

갑자기 정태가 소리쳐서 전 무척 놀랐습니다.

“당연하지.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나, 너 무지하게 좋아한단, 웁........”


그것이 제 첫키스였습니다. 물론, 귀에서 종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뭐랄까… 둘이 하나가 됨을 느꼈다고 할까요?

“사실은, 나도 너 사랑해. 아마 니가 날 사랑하기 훨씬 전부터 내가 먼저 널 사랑했을거야.”

“아니야, 내가 먼저 널 좋아 했을 걸? 난 고등학교 입학식 날부터 널 좋아했다구.”

“고등학교 입학식? 너, 중학교 때 기억나? 중학교 2학년 때. 난 아직도 잊지 못해, 그 해 10월 10일을.”

“10월 10일?”

“그래, 그 때도 넌 지각을 했었어. 그리고 난 그 날 전학을 왔고. 그래도 기억 안 나?”

“응, 기억 안 나는데.”

“니가 그 때 담장 넘으려고 했었는데, 내가 엎드려 줬잖아. 그 날부터 난 널 좋아했었어.”

“아, 기억난다. 그 때 그 애가 너야?”

“그래! 기억도 못 해주고, 이제 와서 날 좋아한다고? 진짜야?”

“그래. 내가 너 때문에 흘린 눈물 합하면 생수공장을 차렸지 싶다, 정말. 근데 그럼 은별이랑 사귄다는 건 뭐야?”

“아, 그거? 너 질투 나게 하려고 그랬지. 니가 도통 나한테 관심이 있어야 말이지. 너 나 좋아 한다 그래놓고 다른 애들처럼 선물을 좋냐, 나보고 얼굴이 빨개졌냐? 좋아하면 표현을 해야 할 거 아냐!”

“허, 누가 할 소릴? 넌 중2 때부터 날 좋아했다면서 어떻게 내색 한 번 안 할 수 있니? 그럼, 그 때 은별이랑 모임 간 것도, 노래 같이 부른 것도 그래서 그런 거야?”

“당연하지.”

“근데, 은별이는 애가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집도 부자고 내숭도 잘 떨어서 남자들한테 인기도 많은데 넌 왜 은별이보다 내가 더 좋아?”

“왜냐면, 걘 김현아가 아니잖아. 넌 내가 이 지구라는 별에서 받은 최고의 선물이야. 그리고 다시는 울지 마. 니가 울면 내 가슴이 너무 아프단 말야.”

그 날이 바로 7월 3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저의 사랑은 시작됐습니다. 그 날, 전 세상을 다 가진 거 같았습니다. 이런 게 행복이란 걸까요?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도 사라지게 만드는, 이런 것이 말이죠. 만약, 이것이 행복이라면,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위대한 행복은 바로 사랑으로 이루어진다고.

그리고 전 나중에야 알았는데, 정태가 저와 만나기 전에 학교에서 진건이를 만났더라구요.

이 얘기를 듣고, 전 ‘정태가 혹시나 바람둥이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떨쳐버렸어요.

“정태야, 너 어디 가?”

“어. 누구 좀 만나기로 했거든.”

“정은별?”

“아니. 다른 여자애 만나러 간다, 왜?”

“정은별 눈에서 눈물 흘리게 하지마라.”

“뭐? 뭐라고?”

“정은별 가지고 장난치지 말라고, 자식아!”

“너… 정은별 좋아하냐?”

“난 언제나 2인자였어. 공부도, 인기도, 운동도 그리고 사랑도. 언제나 너의 뒤에 있었단 말이야!”

“너.......”

“내가 정은별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대신에 네가 행복하게 해 줘라.

“미안하다. 내가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어서… 나 사실, 김현아 좋아한다. 벌써 2년 가까이 되어가. 정은별이랑 사귄 건 현아가 질투심을 느끼게 하려고… 욱, 욱, 아.”

“헉헉, 니가 인간이야 자식아? 넌 사람 마음을 가지고 장난치냐? 욱, 욱”

“헉헉, 네가 걜 좋아하는지 난 몰랐어, 임마. 알았으면 내가 미쳤다고 그랬겠어?”

그렇게 둘은 싸우면서 더욱 더 친해졌다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시간은 갔습니다. 어느 덧 여름방학이 시작되었고, 여름방학동안 우리 아홉 명은 산으로, 바다로 많은 여행을 다녔습니다. 그러던 중 우정도 더욱 돈독해지고, 사랑도 싹트게 되었지요. 그래서 우리 아홉 명 중 세 쌍의 커플이 탄생했습니다.

한정태♡김현아, 최태현♡현정은, 그리고 김진건♡정은별.

전 그 때 소중한 걸 깨달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근본적으로 나쁜 사람은 없다는 것을요. 쥬얼리파 친구들과 저, 정은이는 어느 누구보다도 친한 친구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세 커플들은 약속했습니다. 나중에 결혼할 때, 같은 날, 같은 곳에서 결혼을 하자고요.

그러던 중 다시 개학을 하고 2학기 중간고사도 치렀습니다. 보통, 성적은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예민한 부분이지만 우린 아니었습니다. 잘하는 친구는 못하는 친구를 도와주고, 못하는 친구는 또 잘하는 친구에게 열심히 배우고 했으니까요. 역시나 우리학교에선 은별이가 1등이었고 정은이는 반에서 5등 안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전 중위권을 유지했고 루비와 진주는… 비밀입니다. 정태는 전교 5등 안에 들었고, 진건이는 10등 안에, 태현이와 경수도 50등 안에는 들었습니다. 전교생이 두 학교 모두 500여 명인 걸 감안하면, 제 친구들은 모두 공부를 잘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저와 정태의 100일이 되던 날, 10월 10일, 진성고 태권도부는 경기가 있었습니다. 단체 경기였는데, 참가한 팀들 모두를 꺾으며 승리를 거두었고 금메달을 땄습니다. 상금도 받아서 진성고 태권도부는 회식을 했는데, 거기에 태현이와 우리 5명도 끼였습니다.

“정태야, 이 분이 네 애인이셔? 안녕하세요? 전 정태 선배 이규진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진건이 선배 김균경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정은별이에요.”

“태현이 애인이세요? 안녕하세요? 전 태현이 친구 유성진입니다.”

“아, 예, 안녕하세요?”

이렇게 우린 태권도 부원들과 인사를 하고 맛있게 식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 있을 태권도 경기, 개인전에 나갈 진성고대표로 정태가 나가는 것도 뽑았습니다.

우린 모두 헤어지고 정태와 전 진성공원으로 갔습니다.

“오~ 한정태, 오늘 멋지던데?”

“그래? 고맙다. 내가 그 소리 들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좋다, 기분이다. 내가 선물로 안아줄게.”

“안아주는 것도 좋은데, 그 말투랑 호칭 좀 바꾸면 안되냐?”

“말투랑 호칭?”

“그래. 그게 어디 남자친구 부르는 소리고 남자친구한테 말하는 투야?”

“그럼, 자기야~ 이렇게?”

“아니. 그건 좀 그렇다. 다른 거.”

“오빠~”

“하하하, 미안하다, 미안. 그냥 원래 하던 대로 하는 게 낫겠다. 하하하.”

“뭐야, 너 장난쳐? 내가 정말 애교한 번 떨려고 해도 지가 싫대요, 지가.”

“그래, 그게 제일 좋다. 제일 너다워.”

그렇게 해서 전 정태한테, 따뜻하게 ‘자기야~, 정태씨~’ 이런 거 한 번 못해봤습니다.

“저기, 현아야.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

“오늘? 우리 만난 지 100일 된 날!”

“그래서 말인데, 여기!”

“와~ 예쁘다!”

“커플링이야. 현아야, 사랑한다.”

“나도 사랑해. 내가 끼워줄게.”

“고마워, 네 건 내가 끼워줄게.”

“아, 나도 준비한 거 있어. 여기, 학 백 마리야.”

“우와~ 예쁘다.”

“나 이거 접으면서 백 번 소원을 빌었는데, 백 번 모두 같은 소원을 빌었어. 우리, 영원히 사랑하게 해달라고.”

“현아야, 우리 올해 첫 눈 오는 날 만나자. 바로 여기서.”

“진짜지? 너 약속어기면 안 돼!”

“당연하지. 근데 내가 혹시나 조금 늦더라도 기다려줘야 돼.”

“알았어.”

“꼭 만나는 거다. 꼭!”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했나요? 이렇게 행복한 저에게도 아니, 우리에게도 잊을 수 없는 슬픔이 찾아왔습니다.

일주일 뒤, 태권도 경기 개인전에 진성고대표로 나간 정태는 결승전까지 올라갔습니다.

“정태야, 조심해. 쟤 박태준이라는 앤데, 유식이랑 제일 친한 친구야.”

“걱정 마, 나도 알고 있어. 실망시키지 않을게, 진건아.”

‘유식이? 유식이가 누구지?’

“정은아, 유식이가 누구야?”

“너 몰라? 진성고 유도부 주장, 이유식. 입학식 날.”

“뭐? 걔? 그럼 정태 상대가 걔 친구란 말이야?”

그렇게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결승전다운 박진감 넘치는 경기가 계속되었고, 남은 시간은 1분.

“와~~~~~”

“한정태! 한정태!”

“박태준! 박태준!”

“VICTORY 한정태!”

“박태준! 이겨라!”

그렇게 두 학교의 끝없는 응원 속에 전 선수대기실에 가방을 두고 온 게 생각났습니다. 가방을 가지러 가는데, 너무 빨리 뛰어가다가 반지가 빠졌습니다. 우리의 커플링이! 반지를 찾은 후, 제가 가방을 가지고 다시 체육관으로 갔을 땐 이미 경기는 끝난 상태였습니다. 전광판을 보니, ‘한정태 勝!’ 그런데 점수 스코어는 7:7. 분위기가 뭔가 이상했고, 정태는 어디 간지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정은아, 무슨 일이야? 정태가 이긴 거 아니야?”

“맞아, 정태가 이겼어.”

“근데 분위기가 왜 이래? 너도 그렇고…”

“……”

“니가 대답해 봐. 은별아, 왜 그래?”

“저 나쁜 자식이 갑자기 정태를 잡더니 아주 세게 정태 발목을 걷어찼어. 그리고는 발로 마구 정태를 밟았는데, 아무래도 정태가 많이 다친 거 같애.”

“뭐…라…구?”

10월 17일. 정태는 병원에 입원했고, 상대선수는 ‘2년 동안 출전정지’라는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정태는 치료를 받기 위해서 미국으로 갔습니다.

“김현아, 괜찮아?”

“경수야, 어떻게 된 거야, 정태 많이 다쳤어?”

“응, 좀. 그 나쁜 자식이 정태 다리를 못 쓰게 해놨어. 다시는 걷지도 못하게 말이야. 그래서 미국에 갔어.”

“미국에서 치료하면 다시 걸을 수 있대?”

“나도 자세한 건 몰라. 갑자기 정태 가족 모두 이민을 가버렸거든. 그래서 우리들과도 연락이 끊겼어.”

“……”

“우리 모두, 이제… 정태와는… 이별한거야.”

전 그 뒤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우는 것을 싫어하던 정태에게 들리지 않게, 아주 작은 소리로 하지만,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저의 첫사랑은 끝났습니다.

그리고 전 지금, 정태와 약속했던 장소에서 약속을 지키고 있습니다.

벌써 몇 년 째인지 몰라요.

몇 년 동안, 같은 장소에서, 첫눈을 보고 있죠. 혼자서……

역시나 약속을 안 지킬 줄 알았습니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왜 해가지고는… 꼭 지키겠다고 해놓고선.

전 정태와 그렇게 헤어지고 한동안 방황했습니다. 그런데, 정은이가 제게 그런 말을 해주었어요. 훗날, 정태가 돌아왔을 때, 니가 어떤 모습이길 바라겠냐고. 너의 밝은 모습을 좋아했는데, 이렇게 슬프게 지내는 너의 모습을 보고 어떻게 생각하겠냐고. 그 뒤로 전 정말 바쁘게 지냈습니다. 애써 행복할 자신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슬픈 모습 또한 보이지 않게 전 공부에 미쳤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전 이제 대학생입니다. 이제는 잊을 수 있다고, 잊어야 한다고 수백 번, 수천 번 다짐을 해보지만, 그게 제 마음대로 잘 안되네요. 아직도 제 심장은 한 사람을 향해서만 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현욱
이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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