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沿

  • 작성자 부산댁
  • 작성일 2005-12-31
  • 조회수 1,233

 

“무당 같은 건 좋아하는 게 아냐.”


“어...?”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 그녀는 몸을 돌렸다. 난 조금씩 멀어져가는 소연이란 이름의 동급생을 보며 멍하니 서있었다.



“푸하하하하!! 완전히 차였구만!”


“웃지 마, 자식아. 그리고 고백한 것도 아닌데 차이긴 뭘 차여.”


책상에 엎드린 채로 난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라는 녀석은 신나게 웃어대고 있고, 정작 목표했던 사람은 다짜고짜 그런 말이나 남기고 가고.

아, 우울해...

일의 발단은 내 앞에서 배를 부여잡고 웃고 있는, 온갖 소문의 메카라 불리는 내 베스트 프렌드 현민이와 노닥거릴 때 내놓은 한마디 때문이었다.



“응? 굿을 보고 싶다고?”


“응. 인터넷이나 도서관에서 책 뒤적이는 걸로 자료 수집은 어느 정도 하지만... 동영상이 없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그걸 직접 보느냐 마느냐는 차이가 있으니까.”


난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든 빵을 베어 물었다. 옆에서 한 입 달라고 매달리는 현민이에게 빵을 약간 떼어주자 녀석은 오물거리며 무언가 고민하는 듯 했다.


"왜 그래?"


"아, 얼마 전에 들은 얘기가 있어서."


현민이는 잠깐 말을 멈추더니 입 안에 든 빵을 넘기고 말을 이었다.


"무속 집안인 애가 있다고 들었었거든."


"어, 진짜?"


"내가 너한테 왜 거짓말을 하겠냐. 근데 갑자기 그건 왜?"


"요새 재개한 게 있어서."


나는 씨익 웃으며 지갑을 툭툭 건드렸다. 현민이는 이해하지 못할 행동이긴 하지만. 현민이는 그런 내 동작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질문을 던졌다.


"글 쓰는 거?"


"..."


난 순간 동작을 멈췄다. 바로 정답이 나온 것이다. 괜히 무안한 마음에 뒷머리를 긁으며 넌지시 물어보았다.


"어떻게 알았어?"


"너 예전에 글 쓴다고 얘기했을 때 그런 쪽으로 관심이 많은 것 같았거든. 요새는 뜸해서 포기했나 싶었는데..."


"뭐, 그렇게 됐다. 그보다 네가 얘기한 걔는 몇 학년이냐?"


"우리랑 동갑이야. 찾아가보게? 반까지 가르쳐주리?"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현민이는 주머니에서 수첩 같은 걸 꺼내더니 이리저리 뒤적였다. 온갖 소문이 적혀있다는 수첩이 저건가. 어떤 사람은 살생부라고 부른다고... 그 수첩이 공개되면 다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나.

자기 말로는 기자가 되기 위한 정보 수집 연습이란다. 하지만 치정 소문이나 모으고 다니는 것은 암만 생각해 봐도 스캔들 정도에 필요한 것 같은데.

내 상념이 전개되는 동안 현민이는 부지런히 수첩을 이리저리 넘겨댔고 이내 한 곳에서 멈췄다. 나도 모르게 몸을 내밀었더니 녀석은 수첩을 홱 뒤로 빼내며 혀를 찼다.


"쯧쯧. 지나친 호기심은 몸의 안위를 위협하지."


"관두고 본론이나 말해."


"농담이 안 통하는 자식 같으니."


현민이는 투덜거리며 수첩에 적힌 내용을 읊기 시작했다.


"김소연. 2학년 8반의 8번. 성격이나 신상명세도 불러주리?"


"아니, 괜찮아. 땡큐."


난 그렇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는 고민에 잠겼다. 아무리 그래도 전혀 안면이 없는 사람을 불러내는 건 무리니까. 어떻게 해야 하나...


“갑자기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대기나 하고. 뭐냐?"


"고민하는 거다, 자식아."


옆에서 들려온 현민이의 말에 맥이 탁 풀려서 대꾸했다. 잠시 현민이와 티격거리긴 했지만, 그 날 하루 동안 어떻게 그 여자아이에게 접근하나 하는 고민에 잠겨 있었다. 결론은 나지 않았지만.



이미 귀에 완전히 익은 종소리가 들려온다. 나른한 5교시의 종료를 알린 종소리에 반응하는 드르륵거리는 소리는 다른 시간보다 훨씬 적다. 대부분 자리에 그대로 엎드려 있기 때문이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에 있던 교과서를 들고 사물함으로 갔다. 그곳에 5교시에 썼던 교과서를 넣고 6교시를 위한 교과서를 꺼내 자리로 돌아왔다. 탁 소리가 나게 책을 책상 위에 던지고 자리에 앉으려는 찰나, 옆에서 현민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야, 앉지 말고 바로 매점 가자.”


“돈 없어.”


실제로 지갑이 텅텅 비었기에 녀석의 제안을 단칼에 자르고는 자리에 앉으려 했다. 그러나...


“내가 사줄게.”


“감사합니다.”


곧장 현민이의 뒤에 바짝 붙어 따라간다. 먹을 거 사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이현민.


"그래, 저번에 얘기했던 건 잘 되어가냐?"


"아? 무슨?"


계단을 내려가며 녀석이 던진 질문에 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녀석은 와이셔츠 앞주머니에 넣어놓은 수첩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아, 저번에 내가 물어봤던 거 얘긴가.


"별로 성과 없어."


"아? 왜?"


"아무리 내가 막나가는 놈이래도, 처음 보는 사람한테 다짜고짜 '굿을 보여줘' 라던가 하는 식으로 얘기할 순 없잖아."


"하긴..."


현민이는 수긍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짤막한 대화였지만 어느새 매점에 도착했고 난 빵 하나를 골라들었다. 500원짜리 햄버거였고, 현민이가 산 것도 같은 거였다.

나는 현민이 것까지 받아들고는 매점 앞에 놓여있는 전자렌지에 햄버거 두 개를 모조리 넣었다. 그리고 1분을 예약하고 작동. 이내 우웅하는 소리와 함께 전자렌지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조금은 낡은 기계지만 아직까지 충실히 돌아가고 있었다.


"포기할 거냐?"


"아니. 내가 미쳤냐."


갑작스런 질문이긴 했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가거나 하진 않았다. 난 단호한 음성으로 대답했고 녀석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그렇지. 어떤 면에서 보면 나보다 질긴 게 너니까."


"적어도 그런 수첩은 안 들고 다녀."


난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현민이도 실없이 웃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교회 다닌다는 놈이 굿 같은데 관심 가져도 되냐?”


“안될 이유라도 있어?”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현민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이럴 때는 마음이 맞는 친구란 게 편하다. 그 이후로는 나이에 맞는 일상의 대화가 이어졌다. 어떤 게임이 재미있느니, 어떤 만화책이 새로 나왔느니 하며.

그러는 동안 1분이 지났고 전자렌지는 삑삑하는 소리로 1분이 지났음을 알렸다. 난 따끈하게 데워진 햄버거를 꺼내서 하나는 현민이에게 넘겼다. 동시에 포장을 뜯고 쓰레기통에 버린 우리는 햄버거를 먹으며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곧장 교실에 들어가려는 우리 앞을 누군가 가로막았다.


“저기.”


“음?”


나와 현민이는 동시에 그 쪽을 쳐다봤다. 우리 학교 교복이고, 여자?


“무슨 일..”


“난 김소연이라고 해. 네가 날 찾는다고 들었는데. 맞아?”


어? 김소연이라면 분명...

난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현민이를 쳐다봤다. 내가 쟤를 찾는 건 현민이 말고는 아무도 모를 텐데. 그러나 현민이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자기는 아무 말도 안했음을 밝혔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의아해하고 있는데 자신을 김소연이라 소개한 여자아이의 냉랭한 한마디가 귓전을 때렸다.


"무당 같은 건 좋아하는 게 아냐."


"어...?"


간다..?

그렇게 나와 현민이는 멀어져가는 한 소녀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그 정도에 포기할쏘냐. 뒤에서 날 붙드는 현민이의 만류를 뿌리치고, 난 결국 그 여자아이의 뒤를 밟기로 했다. 오늘은 토요일이니 시간은 충분했다.

사실 법 좋은 대한민국에서 미행이 어인 말이냐 하는 생각이 안 든 건 아니지만 그런 황당한 상황을 겪은 이상 나도 그에 맞게 대응해 주겠다, 란 심리였다. 무속인의 딸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이해 못할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 심리라는 게 묘해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집까지 찾아가서 어른에게 직접, 그리고 정중하게 말씀드리면 아까처럼 황당하게 당하진 않겠지.

어찌됐든 그 여자아이와 멀찍이 떨어져서 20여분을 걸었을까, 어느 주택으로 들어가는 걸 볼 수 있었다.


"좋아, 여기란 말이지."


난 손을 비비면서 중얼거렸다. 코트에 딸린 모자를 덮어쓰고 있었다고는 해도 추위를 완전히 막아내는 건 무리였나 보다. 귓불이 떨어져나갈 듯이 차갑다. 열심히 비벼댄 통에 조금은 따끈해진 손을 귀에 가져다대며 김소연이 들어간 집 앞으로 걸어갔다.

겉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주택이다. 명패를 떼어낸 건가? 명패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페인트로 말끔하게 칠한 철제 대문과 담벼락, 그리고 문 옆에 붙어있는 초인종은 다른 집과 다를 게 없었다.

잠깐 심호흡을 하고 벨을 눌렀다. 딩동하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약간을 서서 기다렸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시 한 번 벨을 누르고 기다려 보았다.


"집에 아무도 없는 건 아닐 텐데."


혼자서 그렇게 뇌까린다고 누군가 대답해 줄 리는 없지만 나도 모르게 말이 흘러나왔다. 어른은 외출하셨다고 해도 김소연이란 여자아이가 나와야하는 거 아닌가? 설마 카메라 같은 걸로 보고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건가?

추위와 더불어 무시당했다는 불쾌함이 섞이자 괜한 심술이 삐져나왔다. 발을 들어 대문을 툭하고 차고는 돌아섰다.


"어..?"


끼익하는 희미한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렸다. 난 살짝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봤다. 주택 여러 개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골목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몸을 돌려 자그맣게 생긴 틈을 보고 있자니 왠지 들어가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깨닫고는 당황했다. 누군가의 뒤를 밟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무단 가택 침입까지 하려고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


왠지 모르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 집 안에서 뭔지 모를 존재가 내게 손짓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잠시 갈등하던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앞으로 한 발을 내딛었다. 무언가가 날 끊임없이 부르고 있다는 느낌에 넘어가기로 한 것이다.



끼익하는 낡은 쇳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육중한 푸른색 쇠문이 열리며 집 안의 광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천천히 발을 들어 집 안으로 들어선 나는 바짝 긴장했다. 조금 들어간 현재로는 여느 집과 다를 바 없었다.

붉은색 벽돌로 이루어진 집. 문은 까만 빛의 철제였다.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두들기려다 멈칫하고는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살짝 힘을 주고는 쉽게 움직이는 걸 확인했다. 여기도 열려 있다.

이번에는 기름칠이 제대로 되어있었던지 소리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문을 열고 한 걸음 내딛자 바깥보다 퀴퀴한 공기가 코를 자극했다. 조심조심 걸음을 떼고 있는데 희미한 소리가 잡혀왔다. 난 잠시 가만히 서서 소리가 나는 곳을 파악하고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집 안에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고, 아무도 없었다. 대신 걸음을 옮길수록 희미하던 소리가 가까워져왔다.


“뒷문인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멀찍이서 요란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문을 통과하고 들리는 소리라 그런지 분위기만 요란했지, 소리는 크지 않았다. 벌써 세 번째 통과하는 문이다. 조심스럽게 여는 건 마찬가지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긴장이 덜했다.


“삼순구식 호강이라, 찬밥한술 진수성찬-”


문을 열자 알아듣지 못할 말이 일정한 리듬을 타고 들리고 있었고, 귀를 때리는 여러 가지 악기 소리가 들려왔다. 짤랑거리는 방울소리와 어우러진 청아한 목소리는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안 보이는데...”


좀 더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아까보다 바깥의 광경이 잘 보이긴 했지만 여전히 잘 보인다고는 할 수 없었다. 언뜻언뜻 강한 원색의 소매가 눈에 들어왔다.


“배를 곯아 원한 드니, 무엇으로 풀리이까. 여기 여기 놓여있는 산해진미 잡수시고-”


조금 더 몸을 기울였다. 그러자 굿판이 어느 정도 보였다. 음식을 차려놓은 상 앞에서 무당이 이리저리 뛰며 춤을 추고 있었고, 주변에는 걱정스런 얼굴로 서있는 사람이 여러 명, 그리고 악기를 치는 사람이 여러 명, 마지막으로 무당 앞에 멍하니 앉아있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멍하니 앉아있는 남자의 눈에는 초점이 맞지 않았다. 귀신이 빙의라도 한 건가? 그렇다면 저 사람이 이번 굿의 대상?

한창 클라이맥스로 가는 중인지 굿판의 격정은 대단했다. 그 때 갑자기 무당이 춤을 멈추며 손에 쥔 신칼로 남자를 가리켰다.


“이제 그만 떠나시게. 이 사람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러시는가.”


“으..어...”


남자의 입에서 괴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게 사람의 목소리라고? 놀란 나는 눈을 홉뜨고 그 광경에 시선을 고정했다.


“흐으..윽...”


순간 털썩하는 소리가 나며 남자의 몸이 스르르 무너졌다. 주변에 긴장하고 서있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울렸다. 그 남자 앞에 있던 무당도 살짝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그리고 곧장 걸음이 이쪽으로 돌아서자 난 깜짝 놀라서 몸을 돌렸다.

잠깐 뒤통수가 따끔해서 손을 가져다 댔으나 아무 것도 집히지 않았다.

어쨌든 지금은 나가야겠다. 무단가택 침입으로 걸리는 걸 피하는 게 먼저겠지. ...근데 이럴 거면 뭐 때문에 위험감수하고 들어온 걸까.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지만 날 부른 그 묘한 감각 때문이라는 대답 밖에 나오지 않았고, 그걸 알아내지 못했다는 걸 알고 그제야 속으로 탄식했다.



“다녀왔습니다-”


“늦었네?”


“예. 어디 좀 다녀온다구요.”


반겨주시는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코트를 벗어서 벽에 걸고, 마이를 벗어서 옷걸이에 걸고는 넥타이를 풀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후우...”


원했던 굿을 보긴 했지만 아무래도 처음부터가 아니라서 좀 그랬다. 뭣보다 그나마도 제대로 보이질 않았으니.


“뭐하니? 얼른 옷 갈아입고 나서 씻고 밥 먹어라.”


“예-”


어머니의 독촉 소리가 들려와서 시키는 대로 했다. 옷을 갈아입고 대충 손발을 씻고 세수를 하고 식탁으로 갔다. 막 끓인 따끈한 찌개가 모락모락 김을 내며 식탁에 놓여 있었다.


“솥에 밥 더 있으니 알아서 해라. 난 이제 가게 내려가야겠다.”


“예입. 안녕히 다녀오세요-”


식탁에 앉은 채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는 핸드백을 들고 나가셨고, 난 식사를 재개했다.



시간이 흘러 12시가 10여분 정도 남았다. 컴퓨터를 하고 있던 나는 잠긴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현관으로 가서 돌아오시는 부모님을 맞았다.


“안녕히 다녀오십니까.”


“어, 그래. 뭐하고 있었냐?”


“컴퓨터요. 아하하하...”


“적당히 해라, 적당히.”


“옙.”


늘 듣는 잔소리를 웃음으로 넘긴다. 난 다시 컴퓨터 앞에 앉으려다 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일어서야 했다.

거실로 나가보니 어머니는 주방 쪽에 서계셨다. 성큼성큼 다가서니 어머니는 밥솥을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그 많던 밥을 다 먹은 거야?”


“아니.. 저, 그게 배가 고파서...”


“아니, 아무리 그래도 배가 고프고 어쩌고로 설명할 게 아닌데. 2, 3인분도 아니고 내일 아침까지 해결할 수 있게 하려고 6인분 정도 지어놨었는데...”


“...”


말없이 뒤통수만 긁적였다. 정말로 설명하기가 곤란한 것이, 나도 그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먹고 나서도 그리 배가 부르지 않아서 이것저것 찾아서 먹으며 스스로 의아해 했으니까.


“너무 과식하지 마라.”


“예.”


어머니의 말씀에 그냥 그렇게 대답하고 방 안으로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속에서 무언가가 올라왔다.


“우욱..!!”


황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에 매달려 엎드린다. 속에서부터 토사물이 잔뜩 올라와 보기 흉하게 뿌려진다. 한 번의 토악질로 끝나지 않고, 연이어 계속된 토악질에 속에 들어있던 음식물이 모조리 토해진 것 같았다.


“너 왜 그래? 괜찮아?”


“아, 괘, 괜찮아요. 좀 과식했나 봐요.”


걱정스런 기색으로 묻는 어머니에게 그렇게 대답하며 물을 내렸다. 속은 이제 꽤 가라앉았다. 어머니는 여전히 걱정이 묻어나는 눈길로 날 한 번 쳐다보고는 방으로 들어가셨다.

난 내 방으로 돌아와 컴퓨터의 전원을 껐다. 아무래도 컨디션이 안 좋은가 보다. 일찍 자는 게 좋겠지.

전등의 전원을 끄고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눈을 감자 이내 정신이 흐릿해져왔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괜찮겠지...



“좋은 아침... 근데 너 표정이 왜 그러냐?”


“말도 마라. 이틀 전부터 토하고 아주 죽겠다.”


현민이의 인사에 그렇게 대꾸하며 책상에 엎어졌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오히려 찝찝한 꿈을 꾸고서 기분이 엉망으로 변했다. 아침은 또 아침대로 토하고... 그런 상태로 사흘째다.


“어디 아프냐?”


“딱히 그렇진 않은데.. 나중에 병원 가보려고.”


“그래라. 병이란 건 미리미리 잡아야지.”


현민이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고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잠이나 좀 자야...


“야, 미안한데 잠시만 일어나 봐.”


“뭐야 또...”


현민이의 목소리에 몸을 일으켜서 안경을 착용했다. 흐릿했던 시야가 깨끗하게 변하며 현민의 얼굴이 보였다. 난 짜증섞인 표정으로 녀석을 노려보앗다.

현민이는 어째서 나한테 그러냐는 듯한 표정으로 마주 노려보며 교실 앞문을 가리켰다.


“어?”


“잠시 나와 보랜다.”


김소연? 설마 어제 몰래 들어간 게 들킨 건가? 그런 것 같진 않은데?


“쟤가 널 왜 찾냐?”


“몰래 쫓아간 게 들킨 걸지도..”


그 말에 현민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보다가 한마디 던졌다.


“미친 놈.”


끄응... 대꾸 못한다는 게 슬프구만...



“그래, 날 부른 이유는 뭐야?”


“자네도 정말 대단하군. 부탁을 거절했다고 해서 뒤를 밟고, 거기다 집에 무단으로 들어오기까지 하고.”


“저기, 무슨 말이신지?”


“온 몸이 딱딱하게 굳어 있군. 그런 상태에서 하는 거짓말은 상대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네.”


“......”


역시 들통 난 건가. 그래, 그냥 차라리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게 낫겠지. 근데 아까부터 말투가 좀 이상한데...


“어제 일은 미안. 나도 모르게 그..”


“그건 중요하지 않네.”


내 말을 자른 김소연은 내 양 볼에 손을 얹더니 빤히 눈을 들여다보았다. 물론 그 갑작스런 행동에 나는 당황했고.


“무, 무, 무슨 짓이야!! 아까부터 이상한 말투도 그렇고!”


“그야 사람이 다르니 말투도 다른 거지. 어쨌든 역시나 그랬군.”


사람이 달라? 무슨 말이야, 그건? 그리고 역시나? 뭐가?

내 머릿속은 무수한 물음표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물음을 풀어줄 생각 같은 건 없는지 김소연은 자신의 묵묵히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어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얘기해줘야...”


순간적으로 내 입을 다물게 한 건 김소연의 주머니에서 나온 칼이었다. 설마 가택침입을 했다고 칼로 찌르겠단 건 아니지? 하하하...


“다, 다가오지 마!!”


“겁낼 건 없네. 날이 서있지 않은 검으로는 사람을 벨 수 없어.”


어라? 그러고 보니 정말 날이 서있지 않네. 무딘 칼날은 칼이라고 하기보다는 몽둥이라고 해도 어울릴 정도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아무리 그래도 검을 든 채로 태연히 사람에게 다가오지 마!”


그러나 김소연은 내 반응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태연히 입을 열었다.


“자네 혹시 엄청난 식탐을 느끼지 않았나? 그리고 거부반응이 있었고.”


“어..?”


오늘은 아무래도 놀라는 일의 연속인가 보다.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 거지?


“이제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생겼나.”


“칼만 내려놓으면 얼마든지 대화에 응해줄게.”


“그러도록 하지.”


그녀는 순순히 대답하며 주머니에 다시 칼을 넣었다. 어떻게 넣은 건지 50cm 정도는 되어 보이는 칼이 무리 없이 쏙 들어갔다. 주머니를 개조하기라도 한건가?

어쨌든 흉기는 최소한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걸 어떻게 안 거지?”


“흐음. 예수쟁이인건가. 하긴, 그러니 걸귀(乞鬼)에 씌이고도 이 정도로 끝난 거겠지.”


“무슨 소리...”


“사람을 잘못 선택했군, 자네. 괜히 그곳에 머물다가 봉변을 보지 말고 어서 나오게. 까딱 잘못하거든 혼이 소멸당할 수도 있네. 억지로 제압할 생각은 없네. 칼을 넣은 걸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그 말이 끝나자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였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놀랍게도 눈앞에는 반투명한 색의 사람이 공중에 떠있었다. 그 남자는 잔뜩 웅크린 채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우.. 우...]


“이미 신명나게 굿판 한 번 벌여주지 않았나. 그만 잊고 올라가게. 자네의 한(恨)은 내 자알 알았네. 내 자네가 들어갔었던 아이에게도 설명해 줄 터이니. 자, 얼른 가게나.”


잠시 후, 그 남자의 형상이 차차 희미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난 얼빠진 표정으로 김소연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빙글 몸을 돌려 날 쳐다본 김소연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자네에게는 첫 만남이겠군. 반갑네, 신이 얼마 남지 않은 이 땅에-”


까딱하고 고개를 약간 숙인다.


“-무당으로 살고 있는 이 아이에게 내린 신이네.”



“걸귀란 굶어죽은 사람의 귀신을 말하는 것이네. 현대에는 찾아보기 힘든데 이렇게 사람에게 빙의했더군. 자네가 만약 예수쟁이가 아니었다면 먹다 지쳐 쓰러졌을 걸세. 그리고 아까 칼을 겨눈 것은 함부로 도망쳐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걸 막기 위해서였네. 놀라게 했다면 사과하겠네.”


예수쟁이란 말이 약간 걸리긴 하지만 일단 넘어간다. 아까 일에 대해 정중히 사과 받기도 했고. 난 그 일 이후로 말없이 자신을 신이라 소개한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말투가 이상한 건 이제 이해가 된다. 일단 자기 말로는 신이라니까. 이중인격, 같은 게 의심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아까 같은 장면을 보고 나면 신빙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 대충 짐작이 가긴 하지만... 어제 이 아이를 쫓아온 이유를 묻도록 하지. 왜 그랬나?”


갑자기 내게 던져진 질문에 상념이 멈춘다. 난 잠시 대답할 말을 찾다가 입을 열었다.


“오기도 있었고...”


“있었고?”


“무언가가... 날 부르고 있었던 것 같았어요.”


잠시 평대를 해야 할지 존대를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존대를 선택했다. 신이라니까 나보다 연배가 높겠지.

어쨌든 자칭 ‘신’은 잠시 고민하다가 손가락을 세우며 말했다.


“영감이 강한 것 같군, 자네는.”


“에?”


“뭐, 얘기한 대로지. 그런데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나 보군.”


“모태신앙이긴 합니다만...”


난 약간 벙 찐 표정으로 대답했다. 소연의 얼굴을 한 ‘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귀신이 들러붙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니. 이번에는 조금 부주의했던 것 같군.”


“그런데 영감이 강한 거랑 무슨 상관이죠, 그게?”


‘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얘기를 하고 있었지? 본론으로 돌아가서, 아마 그 걸귀의 간절한 원을 느낀 것이 아닌가 한다.”


“원이라고요?”


“그래. 바램, 희망. 그 때에 걸귀는 강한 원을 발산하고 있었지.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아- 어째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거야- 라고.”


“그럼 그걸 제가 느꼈다는 겁니까.”


‘신’은 빙그레 웃으며 긍정을 표시했다. 고개를 끄덕거리던 ‘신’은 동작을 멈추더니 날 보면서 얘기했다.


“이만 가도록 하지. 아무래도 한계가 된 것 같으이.”


“...?”


“이 아이가 날 견딜 수 있는 한계 말일세. 그럼 다음에 보도록 하세나.”


“어...”


손을 흔들던 ‘신’은 내가 뭐라고 대답할 새도 없이 눈을 감았다. 무슨 일이 생기려나하고 보고 있으니 금세 눈을 떴다.


“아, 저기...”


“점심시간에 다시 너희 반으로 찾아갈게. 기다리고 있어.”


“어..?”


내가 무어라 말을 꺼내려하자 자기 할 말만 전하고 훌쩍 가버린다. 난 잠시 황당해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따지고 들려하자 쉬는 시간의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난 속으로 약간 투덜거리며 교실로 들어갔다. 점심시간에 온댔으니 그 때 얘기하면 되겠지.



점심시간이 되어 도시락을 꺼내들고 친구들과 모여 앉는다. 요즘에는 급식을 요청하는 건의가 심심치 않게 올라와 곧 급식으로 바뀔 것도 같은데...

책상을 붙이고 막 도시락 뚜껑을 열려는 찰나, 교실 앞문에서 쉬는 시간에 봤던 얼굴이 보였다.


“...잠깐만. 아, 내가 오기 전에 내 도시락 건들면 죽인다.”


“걱정도 팔자다. 연애사업이나 잘하고 와.”


나와 함께 앞문을 본 녀석들 중 하나가 히죽 웃으며 그런 헛소리를 지껄였다. 난 친절하게 감자를 먹여주고는 김소연 쪽으로 갔다.


“밥 먹고 하자. 뭐가 그리 급하..”


“따라 와.”


“응?”


그렇게 말하면서 내 손목을 덥석 잡고는 끌고 간다. 난 약간 당황하면서도 교실 쪽을 향해 소리쳤다.


“야, 내 도시락 던져!! 수저집도!”


“잘해봐라!”


“닥쳐!!”


내 말을 들은 친구 하나가 그렇게 말하며 도시락과 수저집을 던져줬고, 나는 그것들을 아슬아슬하게 공중에서 잡아내며 대꾸했고 김소연에게 이끌려 걸어갔다.



김소연이 날 이끌고 간 곳은 옥상이었다. 전망이 좋기도 해서 봄철이나 여름에는 애용되지만 가을이 지나고 나면 찾는 사람은 드물다. 뭐니 뭐니 해도 춥기 때문이다.


“날 부른 이유가 뭐야?”


“같이 있으려고.”


“...”


엥?

내가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으니 김소연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한 생각하지 마. 네 몸 상태 때문에 그러는 거니까.”


“내 몸 상태?”


“그래. 걸귀가 빙의한 이후로 상당히 흐트러져 있으니까. 그리 심각한 건 아니라 옆에 신기(神氣)를 가진 사람이 함께하는 정도면 충분해. 이런 식으로 하루에 조금씩, 며칠 있으면 다시 안정될 거야.”


“그런 거야 교회가도 해결되지 않아? 난 교회에 다닌다고.”


“학교나 학원 빠지고 교회에 갈 작정이면 그렇게 하던가.”


싸늘한 대답에 난 잠깐 헛기침을 했다. 확실히 그 말이 옳았으니. 빡빡한 하루 일과는 고등학생에게 그다지 여유를 주지 않는다.

난 괜히 머쓱한 기분에 말을 멈추고 도시락통의 뚜껑을 열었다. 수저도 꺼내들고 식사를 시작하려하니 아무것도 없이 날 빤히 쳐다보고 있는 소녀가 내 앞에 있었다.


“김소연? 뭘 그리 사람을 빤히 쳐다보고 있어?”


“아무 것도 아냐.”


내가 말을 걸자 고개를 돌린다. 그걸 본 나는 다시 젓가락을 쥐다 말고 김소연에게 질문을 던졌다.


“도시락 안 쌌어?”


“요리를 잘 못해서. 한 끼 굶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김소연은 답지 않게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난 잠시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내 앞의 도시락통과 수저를 건넸다.


“받아. 아직 손도 안 댄 거니까.”

“괜찮아. 네 도시락이고.”


사양하며 다시 나에게 떠민다. 이미 내민 걸 받는 것도 웃기고, 그럴 마음도 없다. 난 다시 내밀었다.


“한 끼 굶는 걸로 안 죽는다고 한 건 너야.”


그렇게 말하자 할 말이 없는지 반론하지 않고 받아든다. 가끔 날 힐끔거리긴 하지만 그래도 맛있게 먹는 것이 배가 고프긴 했나보다.


“...”


물론 나도 배가 고프다.



그렇게 한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나도 점심시간마다 소연이에게 불려 나가는 것도 익숙해졌다. 본인은 뭐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 와중에 꽤 친해졌고. 서로를 성 빼고 이름으로 부를 정도니 내 착각은 아니겠지.

또 그 날 이후로는 어머니에게 부탁해서 도시락을 따로 하나 더 챙겨왔다. 부모님이 바쁘셔서 도시락을 챙겨오지 못하는 친구가 있다고 말씀 드렸다. 물론 어머니는 흔쾌히 승낙해주셨고 소연이도 그리 내색은 하지 않지만 내심 도시락을 맘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가끔씩은 소연이에게 빙의한 ‘신’이랑도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리고 방학 하루 전의 점심시간. 평소처럼 도시락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좀 춥긴 하지만 옆에서 시끄럽게 구는 사람이 없어서 좋은 장소거든.


“그런데, 방학하면 어떻게 할 거야?”


“응?”


“내가 네 집에 가야하는 거냐?”


“아니. 별로 그럴 필요는 없어.”


“응? 무슨 소리야?”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다 말고 소연이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소연이는 잠깐 나와 시선을 맞추더니 다시 식사를 재개하며 대답했다.


“이제 괜찮은 것 같아서. 많이 안정 됐거든.”


아... 그 얘긴가.


“그럼 방학 때는 만날 일이 없으려나.”


“네가 원한다면. 그렇지만 너한테는 아쉬운 일일 건데...”


내 혼잣말에 답하는 소연이의 중얼거림이 귀에 들어왔다. 이거 놓치면 상당히 후회할 것 같은데...

난 은근한 눈빛으로 소연이를 쳐다봤다.


“무슨 일인데?”


“다다음주에 일이 있거든.”


일이라면... 굿인가?

사실 처음에는 그런 걸 흥밋거리로 여기는 건 싫다며 차가운 태도를 보였었다. 하지만 부끄러움을 느낀 내가 솔직히 사과하자 그 사과를 받아주고 조금은 도와주겠다고 했다.

사실 ‘신’과 대화한 게 큰 계기 같지만 그 대화는 내가 들을 수 없으니 확신은 할 수 없다.

어찌됐든 지금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좋은 기회가 찾아왔단 거다.


“무슨 요일인데?”


“아마 일요일. 올 수 있어?”


“어, 시간 보고...”


“오후에 해.”


“아, 그럼 괜찮아. 나 오후에는 교회 안 나가거든.”


속으로는 기쁨의 환성을 지르고 있었지만 애써 겉을 담담하게 꾸몄다. 그렇게 벼르고 별렀던 걸 드디어..! 란 심정에 기쁘기만 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소연이는 말이 끝나자 식사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방학식은 금요일에 있었다. 학원 수업 시간이 본격적으로 변하는 건 다음주 월요일이고 하니 토요일은 여유로웠다.

그리고 그 덕분에 거실에서 뒹굴거리며 편히 쉴 수 있었다.


“얘야!!”


“예?”


볼 일이 있다며 내 방에 있는 컴퓨터를 하시던 어머니가 날 부르셨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걸어갔다.


“왜 그러세요?”


“문자 왔네. 여기.”


“아, 감사합니다.”


어머니가 내민 휴대폰을 받고 폴더를 열었다. 새로 온 메시지라고 찍혀있는 제목 아래로 폰 화면을 메우는 문자들이 보였다.


‘나 소연인데 오늘 시간 있어? 혼자서 준비하려니까 힘도 들고 못 드는 것도 있어서. 저번에 왔으니까 내 집이 어딘지는 알지?’


‘알았어. 곧 갈게. 어차피 할 일도 없었으니까.’


문자도 굉장히 정중하게 보내는군. 나도 덩달아 최대한 맞춤법에 맞춰서 답장을 보냈다. 난 피식 웃으며 벽걸이에 걸린 옷을 집어 들었다.


“나가려고?”


“예. 잠시 나갔다 올게요.”


“언제쯤에 들어오는데?”


“잘 모르겠는데... 한 대여섯시에는 돌아오겠죠.”


“알았다. 너무 늦지 말려무나.”


“예. 다녀오겠습니다.”


난 옷을 갈아입고 집에서 나섰다. 코트까지 갖춰서 입었건만 금세 옷 사이사이를 파고드는 겨울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난 예전의 기억을 더듬어 길을 찾아 나갔다. 잠깐 헤매기도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눈에 익은 주택이 나타났다.

가까이 다가가서 초인종을 누르려다 저번의 일이 떠올라 쓴웃음을 지었다. 초인종을 누르니 딩동하는 소리에 이내 인터폰을 타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일꾼.”


장난스런 대답에 인터폰 너머에서 작은 한숨이 들려왔다. 난 어깨를 으쓱해 보였고 소연이는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수화기를 놓았다.

잠깐 기다리자 자박거리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덜컥하고 잠긴 문이 열렸다. 끼익하는 쇳소리를 내며 열린 문 뒤에는 소연이가 서있었다.


“어서 오게.”


“아, 신이군요. 그런데 문 잠겨있네요? 저번에는 왜 열려있었어요?”


"일이 바빴었네."


'신‘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날 안내했다. 신이 날 데리고 간 곳은 저번에 봤던 뒷문으로 나가면 보이는 장소.

담이 쳐져있긴 했지만 전망은 탁 트여있었고 꽤 널찍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한창 준비중인 제상이 있었다.


“이거에요?”


“그러하네. 자, 그럼 그동안 못 옮기고 있던 것부터 들어볼까.”


“맡겨만 주십쇼.”


그리고 난 ‘신’의 지시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키는 일이 끝나자 어느덧 해가 저물었다. 겨울이라 해가 일찍 떨어지기는 하지만 벌써 시간은 여섯시 정도. 난 아직 한참 남은 일거리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한 것만으로 죽겠는데 언제 다하냐... 다음주부터는 시간이 잘 나지도 않을 건데.”


“아줌마는 사람을 잘 부려먹으니까.”


“정말 그렇.. 아줌마?”


문득 귀에 들어온 호칭이 굉장히 신선했다. 그렇게 말하며 소연이를 돌아보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허 참... 아줌마라니...

소연이는 살짝 미소를 띄우며 덧붙였다.


"본인은 그런 호칭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지만. 그보다 오늘 수고 많았어. 고마워."


"뭘. 나도 얻는 게 있는데. 그럼 다음에 보자."


"응, 잘 가."


난 손을 흔들어주고 돌아서려다 그 자리에서 멈췄다. 내가 나가는 걸 기다렸다가 문을 잠그려 했던 소연이도 나를 따라서 멈췄다.


"아, 맞다. 나 평일에는 못 올 거야. 주말에는 혹시 모르니까 문자 보내봐."


소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문을 넘어 내가 사는 집으로 향했다. 뒤에서는 철커덩하고 문이 잠기는 육중한 소리가 났고.

몸이 좀 고단하긴 했지만 그래도 미래를 위한 투자 정도로 생각하니 즐겁기만 했다.



그렇게 한 주가 흐르고 토요일에 다시 한 번 더 찾아가 일을 거들어 주었다. 상당히 일이 진척 되었다고 하니, 다음주는 여유롭게 할 수 있을 듯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일요일에는 아침부터 교회에 간다. 중고등부 예배가 9시부터 10시까지이고 대예배가 11시부터 12시 넘어서까지 진행된다. 중고등부 예배도 드리니까 9시부터 12시 반 정도까지는 교회에 있게 된다.

그래서 중고등부 예배를 마친 10시 반쯤, 평소처럼 중고등부 부원들과 노닥거리고 있는데 집사님 한 분이 날 부르셨다.


"예? 부르셨어요?"


"그래. 너 찾는 사람 있더라. 교회 입구 쪽으로 나가 봐라."


"어? 그래요? 예, 알겠습니다."


난 따뜻하게 데워져 있는 방 안에서 나가는 게 아쉬워 구시렁대며 바깥으로 갔다. 교회 입구에 가보니 놀라운 손님이 있었다.


"어, 소연아?"


"아니, 틀렸네. 그보다 여기가 자네가 다니는 교회인가보군?"


'신'? 여기에는 갑자기 왜..?"


"저기, 여기에는 무슨 일로.."


"네 친구니?"


"아, 집사님..."


교회 대예배당 쪽에서 걸어 나오시던 집사님 한 분이 우릴 보셨나보다. 집사님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 둘에게 말을 걸어오셨다.


"예. 학교 친구에요."


내가 미처 뭐라도 하기도 전에 '신'이 소녀의 목소리와 말투로 냉큼 대답했다. 내가 그 태도에 황당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데 집사님과 둘의 대화가 시작됐다.


"너는 교회 다니니?"


"아뇨, 안 다녀요."


"그래? 그럼 여기에 다녀 볼 생각은 없니? 네 친구도 있는데."


집사님과 대화하는 '신'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저 집사님은 평소에 종교에 대해서만큼은 배타적이기로 교회 내에서도 이름이 있는 사람이라서... 굉장히 불길한데, 제발 느낌으로 끝났으면 좋겠다.

내가 불길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을 때도 둘의 대화는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생각해 볼게요. 저기, 그런데 기독교 말고 다른 종교는 믿었던 적 없으세요?"


"아니, 기독교 밖에 믿은 적 없는데. 그건 왜?"


"다른 종교를 믿은 적이 있다면, 나름대로 비교가 되지 않을까 해서요."


그렇게 말하며 헤헷하고 웃는다. 지금 저 집사님을 떠보는 건가? 하긴, '신'은 나를 계속 '예수쟁이'라고 불러왔다. 기독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미지가 상당하다는 말이겠지. 그걸 확인해보려 하는 것일 거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건 상대가 너무...


"나는 비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단다."


"예?"


"기독교는 유일한 종교이기 때문이지. 다른 건 모두 이단이고 사이비란다."


"모두요?"


"그럼."


여전히 미소를 띄우고 있는 집사님과 비교해 볼 때 '신'의 표정은 조금씩 굳어갔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집사님은 말을 이어나갔다.


"불교니 뭐니 하지만 모두 구원을 얻지 못하고 지옥불에 던져진단다. 신내림이니 뭐니하며 한심한 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말이지."


"한심..해요?"


"그래.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건 모두 귀신이란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에서 쫓아내고 하셨던 귀신. 결국에는 예수님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거지. 그냥 단순한 잡귀야, 잡귀. 그리고..."


"아, 잠깐만요."


'신'이 집사님의 말을 가로막았다. 손을 번쩍 든 '신'은 지나치게 쾌활한 목소리였다.


"오늘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겠네요. 얘한테 숙제 물어보려고 잠시 왔었거든요."


"아.. 그러니. 그래, 그럼 나중에 또 얘기하자꾸나."


집사님은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대답하고는 다른 건물 쪽으로 걸어가셨다. '신'의 얼굴에 여전히 떠올라 있는 미소가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난 이만 가보겠네."


"아, 저기..."


'신'은 타다닷하는 경쾌한 발소리를 내며 골목길을 달려 빠져나갔다. 난 잠시 멍하니 서있다가 마음을 굳히고 신이 사라진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막 달려 나가는 나를 향해 친구 한 명이 말을 걸어왔다.


"어? 너 어디 가냐?"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 어쩌면 조금 늦을지도 모른다고 전해줘!!"


얼떨떨해하는 표정의 친구를 뒤로 한 채, 난 앞서 달려간 '신'을 쫓아갔다.



그리 오래 달리지 않았지만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교회 뒤쪽의 골목길을 약간 돌아서 나오는 허름한 공터. 가끔 교회 아이들이 공을 들고 가서 노는 그곳에 소연이의 몸을 빌린 '신'이 말없이 서있었다.


"자네인가."


"예에."


난 약간 멀찍이 떨어져서 멈췄다. 텅 비어 있는 공터 한가운데 서있던 '신'에게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기억하는가, 자네. 자네가 날 처음 만났을 때 이 땅에 신이 얼마 남지 않았노라고."


"예, 기억합니다."


신기하게도 기억이 잊혀지지 않고 있었다. 첫 만남이 줬던 인상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일까. 내가 과거를 더듬는 동안에 '신'은 말을 이었다.


"모두 다 떠났어. 어부들을 돌봐주던 용신도, 마을을 지켜주던 서낭신도. 그 뿐인가. 가정을 지켜주던 부엌신, 역병을 막아주던 처용신... 신들이 사라진 이 땅에 난 이렇게 남아있네."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있었다. 독백하듯이 얘기하고 있는 '신'의 목소리에 담긴 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슬픔도 아니었다. 그저 회한. 일이 어찌 이리 됐을까를 고민하는 씁쓸함.


"산을 다스리던 산주인이 사라졌어. 그러니 야생동물들이 차에 치인다는 기사가 끝도 없이 실리지. 백두의 호왕(虎王)이, 지리산의 웅제(熊帝)가, 한라의 대저(大猪)가 남아 이 땅의 맥을 이어간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남아있을지 모르네."


예전에 얼핏 들은 기억이 있다. 백두에 호랑이라면 한라에는 멧돼지라고. 지금 '신'이 말하는 건 그 얘기일까?


"작두를 넘나들던 무당의 신기(神技)가 땅을 파는 민초들에게서 사라진 지는 오래되었네. 대신에 새로이 들어온 종교가 이 땅의 모든 걸 억압하고 있었지. 귀신이라, 사탄이라, 마귀라. 나도 알고 있네. 아까 같은 사람들이 일부라는 것을... 하지만 그 일부가 왜 그리도 이 가슴을 아프게 하는 건지. 면전에서 들은 것은 처음이라 그런 건지 모르겠네. 괜한 장난기에 내 무덤을 판 것 같아."


난 침을 꿀꺽 삼켰다. 평소와는 너무도 다른 분위기다.


"난 그동안 김소연 이 아이가 바라던 초혼무(招魂舞)를 반대해 왔네."


"초혼..무?"


"사라진 혼을 부르는 굿. 이 땅을 버린 신령들과 산주인에게 염을 전달하여 다시 불러들이는 굿. 내 그걸 바라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아직 미숙한 아이에게 너무 부담을 주는 것이기에 만류해 왔다네. 하지만..."


'신'은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이제는 말리지 않을 생각이네. 지금 받은 굿은 취소하고 초혼무를 준비할 생각이야. 미안하네, 기껏 도와주었는데. 그럼 다음에 보세."


그 말을 남기고 '신'은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 사라졌다. 빨리 안 오느냐는 친구의 문자 때문에 핸드폰이 울리고 있을 동안에도 난 멍하니 '신'이 서있던 자리만을 보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토요일 새벽이 되었다. 평소 습관 때문에 자정 이전에는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기에 그 날도 깨어있었다.

2시나 되었을까, 막 잠에 들기 위해 안경을 벗던 순간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토요일 아침 10시 초혼무'


짤막한 단어 조합에 제대로 찍혀있지 않은 번호. 하지만 누군지는 당장에 알 수 있었다. 난 방망이질치는 가슴을 안고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는 않았다. 결국 그 날은 밤을 지새우고 말았다.



아침밥조차 먹는 둥 마는 둥하며 초조하게 시간이 흐르는 걸 기다렸다. 소연이의 집까지는 걸어서 약 15분. 조금 서두른다면 10분이면 충분한 거리다.


"..."


결국 9시 30분에 집에서 나왔다. 난 쌀쌀한 아침공기에 옷깃을 여미며 나도 모르게 계속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도착. 문이 잠겨 있으면 담이라도 넘을 생각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문이 열려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소리를 들으며 문을 열었다.

능숙하게 길을 찾아간 나는 조용히 뒷문을 열었다.


"아..."


소연이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마 내가 들어오기 전부터 여기를 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내가 오면 시작할 생각이었는지 소연이는 날 보자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에는 제상이 놓여있다. 비록 화려한 음식은 없을지라도 정갈하고 정성이 느껴지게 차려져 있었다.

보통 드럼통 위에 얹어둔다는 작두는 보이지 않았다. '신'은 작두신령이 아닌 모양이었다.

소연이의 복장은 알록달록한 원색이 교차되는 복장에 붉은색 모자. 치마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언뜻언뜻 드러나는 버선발. 한 손에 쥔 건 방울이었고 한 손에 쥔 건 신칼이었다.


"먼데가신 신령들아- 먼길떠난 산주인들-"


이전에 들었던 기억이 있는 신비한 목소리가 소연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오른손에 들고 있는 방울이 격하게 흔들리며 짤랑거리는 소리를 낸다. 동시에 소연이의 눈이 몽롱해지며 움직임이 점차로 속도를 더해갔다.

무당은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가운데에 서있는 사람. 저 방울소리를 통해 이 세계에 머물던 정신을 저 세계로 보내어 교신을 시도한다.


"어이하여 먼데가여 그대 땅을 버리는고, 어이하여 먼길떠나 그대 산을 버리는고-"


왼손에 있는 신칼도 방울소리에 맞춰 스스로의 율동을 시작했다. 작두는 없지만 신칼이 작두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 같았다.

보는 사람은 한 명 뿐인 굿이 점점 고조되어 갔다. 그리고 난 내 눈을 비벼 보아야 했다.


"어...?"


제상 주위로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형체들이 하나 둘 생겨났다. 젊어 보이는 청년도, 수염을 멋지게 기른 노인도, 아리따운 젊은 여인도, 펑퍼짐한 중년 여인 등. 그 모습은 다양했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근심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째서..?"


떠나버린 그들을 부르는 굿이다. 소연이가 무리를 해가며 감행하고 있는 굿인데...


"이리 오소, 이리 오소, 이 강산에 돌아오소..."


그리고 사슴, 노루, 호랑이, 멧돼지, 곰, 매 등. 다양한 종류의 동물들도 하나 둘 생겨나고 있었다. 만약 동물에게 표정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의 표정도 결코 좋아 보이지 않았다.

흐르던 세월 속에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떠나간 그들을 불러냈다. 애착을 가지던 장소에 불러주었는데 어째서..?


"흐르던 세월...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불러..."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던 중 뇌리를 번뜩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난 잠시 망설이다가 사람들의 형체도, 동물들의 형체도 모두 날 보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용기를 얻었다.


"잠깐-!!"


"이 내 몸이 부르나니, 이 목소리 들리거든..."


내 고함에 대항하듯 소연이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난 굿판 쪽으로 달려갔다. 곁눈질로 슬쩍 살펴보니 얼굴에 미소가 서린 것이 내 생각이 맞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만! 멈춰! 이대로는 소연이만 다칠 뿐이에요!"


"물러서라! 어디 굿판에 부정을 태우려느냐!!"


소연이의 양팔을 잡아 만류하려하자 벼락같은 호통이 들려왔다.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신칼이 날 겨누고 있었다.


"당장 꺼지지 못할까! 내 사라지는 것들에 관심을 갖는 너의 태도가 갸륵하여 이 곳으로 불렀거늘, 어째서 훼방을 놓는게냐!!"


"저 사람들을 봐요!! 그리고 저기 서있는 산주인들을 봐요!!"


"뭐..?"


예전에 들었던 산주인이란 단어가 떠올라 끼워 넣어 소리 질렀다. 내 외침에 '신'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째서..."


신이 확인한 것은 고개를 젓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었다.


"분명히.. 분명히 그들은 이 땅을 떠나갔습니다! 자신들이 서있던 대지를 떠나고, 자신들이 지키던 산을 떠났습니다!"


난 이런 부문에 얕은 지식을 쌓은 애송이일 뿐이고, 상대는 베테랑이라 할 수 있다. 설득이 힘들 거라고 알고는 있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마음을 열어준 친구가 다치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건 물이 흐르는 것처럼 당연한 거였어요."


차츰 음성이 잦아든다. '신'은 호통 치는 것조차 잊은 채 날 보고 있었다.


"물이 흐릅니다. 물이 흐름에는 멈춤도 있습니다. 막혀버린 곳까지 내려간 물은 멈춥니다. 그리고 흘러넘치죠. 조금씩 흘러넘치고, 조금씩 증발하면서 사라집니다."


"......"


난 입 안에 가득 고인 침을 힘겹게 삼켰다.


"마찬가지였어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었던 겁니다. 사람들은 마을을 지켜주고 집을 지켜주던 신을 잊었습니다. 거기에 화가 나 한두 번 벌을 준다 해도 잠시 뿐. 사람들은 금세 신을 잊을 겁니다. 지금 저들을 부른다고 해도 저들은 곧 떠날 겁니다. 그들이 발붙일 장소가 없으니까. 그들을 찾는 사람이 없으니까."


순간 목이 메여 왔다. 하지만 꾸욱 참고 말을 이어 나갔다.


"다른 종교의 배척도 그래요. 그 종교의 가르침이, 교리가 배척을 조장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그 배척을 묵인하지 않으면 배척은 이루어질 수 없어요."


"그럼..."


비로소 '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네는 포기하라고 말하는 건가? 어쩔 수 없다고, 그게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다고! 포기하라고 얘기하는 건가! 문명이라는 미명으로 이 땅의 옛것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만 있으란 건가!"


"아뇨. 그런 게 아닙니다. 전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어요. 다만 지금 신이 뭘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 얘기하는 겁니다."


"잘못... 생각...?"


"적어도 그런 식으로 과거를 강요한다면 문명을 강조하는 현대와 다를 게 없어요. 조금씩... 조금씩 손을 잡는 겁니다. 제 생각은 그래요."


한 번 숨을 고른다. 뒷목이 저릿저릿하고 숨이 모자라지만 그래도 말을 잇는다.


"그런 식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있을 겁니다. 그 가운데서 옳은 것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그러면 분명 이 땅에 신이 설 자리가 다시 생길 겁니다."


난 말을 마쳤다. 그 자리에 불려왔던 혼령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모두가 사라졌을 때까지도 나와 신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게 초혼무(招魂舞)는 끝이 났다.



"이보게."


"예?"


"지금 문득 든 생각인데 말야. 저번에 내가 그 걸귀가 자네를 불렀다고 했었지?"


"네."


"사실은 소연이 이 아이가 부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네. 이 아이가 바라지 않는 걸 내가 강요한 게 아니었나 싶으이. 똑같이 이 땅에 신이 다시 서기를 원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늘."


"그건 무슨 말입니까?"


"이 아이도 소녀란 말이지."


"무슨 말인지 잘..."


"쿡쿡... 잘해보게. 응원하고 있겠네."


"......!!"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지쳐 잠들었던 소연이가 일어났다.


“소연아?”


“아... 너구나.”


소연이와 신은 한 몸을 공유하면서 생각과 감정은 공유하지 않지만 기억은 공유한다. 내가 끼어들었던 일, 그 이후의 대화. 모든 걸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난 잠시 우물쭈물 거리다 그 굿을 통해 확인한 것을 밝히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응. 저기... 할 말이 하나 있는데.”


“응? 무슨 일 있어?”


“나 너 좋아하는 것 같아.”


“......”


“......”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에 흘렀다. 그리고 이내 소연이의 입에서 언젠가 들어보았던 말이 흘러나왔다.


“무당 같은 건 좋아하는 게 아냐.”


난 잠시 이런저런 말을 생각하다가 간신히 끄집어낸 단어들을 말로 옮겼다.


“아냐. 절대로.”


소연이는 나를 보며 환하게 웃어 주었다. 그리고 나도 소연이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두 명의 사람과, 다수의 영혼들에게만 시끄러웠던 겨울이 지나갔다.

하지만 나는 그 날 이후로 한 가지를 소망하게 되었다. 기독교라는 입장을 떠나, 이 땅에 발을 디딘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이 땅 위에 수많은 신이 서있고, 산에는 산주인이 버티고 서있는 것이 물이 흐른다는 사실처럼 자연스러워지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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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부에 있는 지갑을 톡톡 건든다거나 하는 건 맥을 읽어본 사람들을 위한 복선이었습니다 ^^;;

 

개인적으로 꽤 오랜 시간 매달렸고 정말 좋아하는 소재와 늘 얘기하고 싶은 주제를 전한 거라 뿌듯하네요.

마지막에 좀 뒷심이 부족하여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요 OTL

부산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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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댁
  • 2006-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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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댁
  • 2005-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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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송하지만 타입문맹 쪽의 프레스토 님 ? …… ;

    • 2006-01-04 02: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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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제가 잘못 생각했었네요. 옛것을 돌아보았으면 하는 의미였군요^^ 지갑에 대해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2006-01-02 15:27:03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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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그리고 지갑을 톡톡 건드리는 건, 저번 글인 맥에서 주인공이 하나 남은 깃털을 지갑 안에 살포시 넣은데서 기인합니다. 그 소녀 덕분(때문?)에 꿈을 다시 찾았으니까요.

    • 2006-01-02 13:33:35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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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고백부분은.. 이번에는 기왕 하는 거 하고 싶은 걸 다 해보자는 생각으로 썼던지라 ^^;; 그리고 나중에 개인적으로 여기에서 다른 쪽으로 더 뻗쳐나가기 위한 안배 같은 거라서요. 여기서 평가될 때 좋은 영향은 주지 않겠지만 그래도 후회는 안합니다. 하핫; 현대사회의 건조함..으로 비쳤나보군요. 비슷하긴 해도 옛것을 돌아보지 않는 게 아쉬웠는데 Orz 아, 그리고 신은 무당에게 내리는 존재인데 일반적으로 저렇게 붙어다니진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했냐면... 해보고 싶은 거였거든요[...]

    • 2006-01-02 13:28:12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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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거기다 주인공 둘의 사랑까지 겹치면서 주제의식이 흐려진거 같기도 합니다. 낮은 실력으로 이런 말씀드리려니 부끄럽네요. 앞으로도 좋은 이야기 써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글을 다 읽어도 맨 처음 지갑을 톡톡 건드리는 행위의 암시의 의미가 뭔지 모르겠네요. 무엇인가요?(순수한 호기심)

    • 2006-01-02 13:05:30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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