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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거울

  • 작성자 M.B
  • 작성일 2006-01-28
  • 조회수 1,201

 

 

평행거울

 

 


기분 나쁠 정도로 농밀한 향수 냄새 속에서, 눈을 뜬다.
손끝에 스치는 맨살의 감촉이 불안해진다. 보통 이불을 덮을 정도면 이만큼의 노출은 하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고자 몸을 일으키니, 멍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의 나신이 눈에 들어왔다.
어깨를 타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에 잠시 시선을 빼앗겨 내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잊어버렸다. 내가 마주 대한 것은 거울. 자기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다니 나사 빠진 짓이다. 아래로 흘러내린 이불을 끌어올리며, 나 자신이 어느 호텔방에 알몸으로 던져져 있다는 걸 발견했다.
카펫은 붉고 벽지도 따스하다. 고풍스런 디자인이지만 향기만큼은 머리를 쪼갤 만큼 지독하다. 나는 코가 빨리 마비되어 주길 기다리면서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전날 밤의 상황을 기억해보려 하지만, 약이라도 먹었는지 기억이 왕창 날아간 상태다. 추측을 해보려 해도, 알몸으로 혼자 호텔방에 누워 있는 여자라면 자연스레 그 쪽으로 상상이 닿을 수밖에 없다. 동행한 자가 있었나 생각해보지만, 애초에 여기까지 오게 된 경위조차 알 방도가 없다.
가만히 누워 있어봤자 상황이 바뀔 리 없으니 일단 이 곳을 벗어나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침대 주변을 뒤진 나는 소지품이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알고 당황했다. 소지품은 둘째치더라도 입고 있던 옷가지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나?
하지만 나는 말 그대로 맨몸뚱이만 던져진 상태였다. 나 자신과 일어나면서 흐트러진 이불 외에는 호텔방 어디에도 사람의 흔적이 없다. 이 정도로 괴이한 상황에 빠지면, 기막힌 수준을 넘어서 오히려 차분해지기 마련이다.
"누군가가 있어."
머릿속에 담고 있던 말을 내뱉자 그 생각이 좀 더 분명해졌다. 그래, 누군가가 있다. 물건도 꼭꼭 숨겨놓은 채 알몸으로 누워있는 걸 내 자의로 했을 리가 없지. 어떤 갈아 마실 놈인지는 몰라도 나를 여기다 처박은 놈이 분명히 있단 말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여기 있어줄 순 없다. 타월이든 뭐든 걸치고 나가서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다행히 이곳은 여러 사람이 쓰는 호텔이다. 안 되면 호텔 보이라도 불러서 상황을 설명하면….
철컥!
막 침대 밖으로 다리를 내밀던 나는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누구지? 설마…. 나는 몸을 다시 침대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침대 머리맡의 전화기에서 연결선을 빼내 슬그머니 이불 안쪽으로 감췄다. 일부러 신경 써서 보지 않는 한, 그 둘둘 말린 선의 일부가 내 손에 쥐여져 있다는 걸 알아챌 일은 없을 것이다.
다행히 그 모든 일은 문을 연 누군가가 방 안에 들어서기 전에 끝났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러움을 가장하며 눈을 감았다.
부드러운 카펫 위에서도 뚜벅, 뚜벅, 하고 발소리가 울린다. 건장한 남자의 것이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나는 낙담을 감출 수가 없었다. 손에는 나름대로의 도구가 있다지만, 이 알량한 전화선을 과연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빠릿빠릿하게 달아오른 신경 앞에서 발소리는 내 바로 옆까지 다가와 멈췄다. 얼굴에 개미들이 잔뜩 기어 다니는 것 같다.
"휴우."
굵은 한숨과 함께 침대의 한쪽이 푸욱 꺼졌다. 갑자기 몸이 기우뚱 하고 흔들리자 나는 하마터면 소리를 낼 뻔 했다. 남자가 내 옆에 걸터앉은 것이다.
나는 나신의 여자 옆에 앉은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할 지 상상하느라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달리 남자는 내 몸에 손을 대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봉투 같은 것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날 뿐. 하지만 그 일시적인 행위가 끝난 뒤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진 나는 몸을 홱 일으켰다. 다행히 남자는 침대에 앉아있느라 자연스레 내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기회다!
"윽!"
허를 찔린 듯한 목소리. 하지만 약자는 이쪽이다. 독기를 품고 덤벼들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전화선을 잡아당겨 거기 딸려 나온 수화기로 남자의 머리를 힘껏 내려쳤다. 남자가 신음을 흘리며 순간적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나는 전화선을 그의 목에 한 바퀴 감고 힘껏 잡아당겼다.
남자는 눈에 띄게 가냘픈 신음소리를 내며 목에 감긴 전화선을 붙잡았다. 하지만 이쪽도 이미 필사적이다. 나는 침대 위에 일어선 채로 남자의 등을 밟아 자세를 단단히 했다. 이제 남자가 그 목줄에서 쉽게 벗어날 일은 없을 것이다.
남자는 목이 졸린 채로 어색한 기침을 토해냈다. 나는 선을 약간 느슨하게 잡았다. 적어도 이 남자가 날 가둔 게 분명한 이상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알아내야 한다.
"넌 누구지? 날 왜 이 방에 처박은 거야?"
대답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등을 밟은 발을 꾹 누르며 무언으로 협박했다. 남자는 순간 숨을 멈추는가 싶더니 이해할 수 없게도 끅끅거리는 웃음을 토해냈다.
"큭큭큭… 처박았다고? 내가?"
진심으로 어이없어하는 듯한 목소리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그러더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고 나는 황급히 수화기를 잡아당겼다. 남자는 큭 소리를 내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는 난색을 표시하는 의미로 양손을 들어보였다.
"이봐요. 우리 좀 더 편한 자세에서 이야기하는 게 어떻습니까?"
"내겐 이게 편해. 그리고 이 상태 그대로 너도 편하게 만들어줄 수도 있지. 그렇게 되기 싫다면 순순히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당신은 지금 착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얌전히 이걸 푸세요. 그러면 상황을 설명해드리죠."
"설명이 먼저야.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해준다면, 나도 이런 짓은 안 해."
"그 말을 순순히 믿을 만큼 바보는 아닙니다만?"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남자의 말이 맞다. 필요한 만큼만 듣고 나면 죽든 기절하든 일단 쓰러질 때까지 목을 조른 뒤에 여기서 탈출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남자도 그걸 모를 만큼 순진한 건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일단 최소한의 설명은 해드리죠. 당신을 여기 데려온 건 이것 때문입니다."
그러더니 남자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까 전의 그 소리였다. 남자가 봉투에 손을 집어넣고 있다는 건 명백했지만 그 내용물은 남자의 등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불안을 느낀 나는 즉시 줄을 잡아당겨 남자를 뒤로 젖혔다.
"허튼 짓 하지 마!"
하지만 그 때의 망설임이 모든 걸 결정지었다.
남자는 저항 없이 내가 하는 대로 끌려왔다. 그는 더 나아가 오히려 내 발을 뒤로 밀어내었다. 자세가 흐트러진 나는 한 발짝 물러나다가 그 상태 그대로 딱딱하게 굳었다. 아예 등을 침대에 대고 누워버린 남자의 손에는 권총이 쥐여 있었다.
"꽤 멋진 반항이었지만 여기까지입니다. 어느 쪽이 빠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죠?"
더운 공간도 아닌데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남자의 비웃는 듯한 얼굴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내가 보고 있는 건 오직 하나,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검은 총구다.
아무리 내 힘으로 세게 조른다 해도 남자는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시간만큼은 깨어있을 터였다. 나는 최대한 침착해지려고 노력했다. 저 총이 진짜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그런 근거 없는 의심만 믿고 남자의 목을 조를 수 있을까?
남자는 총을 들지 않은 손으로 천천히, 하지만 강하게 목에 걸린 줄을 끌어당겼다. 놓을 생각 따윈 없었는데도, 수화기는 내 손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튕겨나갔다. 전홧줄을 목에서 푼 남자는 한숨을 쉬며 권총을 집어넣었다. 검은 구멍이 눈앞에서 치워지자 나는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이번에는 자는 척 하다가 목을 조르기라니. 정말 당신도 끝을 알 수 없는 여자군요."
무슨 소리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펌프질된 피가 목까지 차올라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멍해져 있는 내 눈앞에서 남자는 장난스럽게 전홧줄을 흔들어보였다. 그 끝에 매달린 수화기가 번지점프를 하듯 대롱대롱 튕겨 다닌다.
"그리고 전홧줄 같은 걸 잡아당길 땐 바로 옆에서 잡아당기시죠. 목 졸린 시늉 내느라 힘들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으면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남자는 그런 내 몸을 이불을 던져 가려놓았다. 나는 그제야 내가 알몸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긴장이 가라앉으며 수치심이 다시 떠오른 나는 이불로 재빨리 몸을 감았다. 남자는 그런 내 모습이 우스웠는지 쿡쿡거리며 예의 종이가방을 다시 뒤적거렸다.
"자, 옷입니다. 다른 소지품도 별 필요는 없겠지만, 도로 챙겨왔어요. 물론 옷장에도 기본 복장이 걸려있긴 하지만, 여기에서 그걸 입는 건 자살 행위니 관두도록 합시다."
남자는 내 앞에 온갖 물품을 툭툭 던져놓는다. 나는 가장 먼저 옷을 집어 들었다. 사이즈는 어떻게 알았는지 조금 기분 나빠지는 속옷과, 특별할 것도 없는 셔츠와 바지다. 그래도 펑퍼짐한 셔츠치곤 제법 곡선을 살린 게, 신경 써서 만든 물건이란 생각이 들던 찰나-.
"…이건?"
나는 거기에 천천히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셔츠를 뒤집자, 집어넣었던 손가락 하나만이 두드러지게 보인다. 나는 손가락을 빼고 셔츠에 난 구멍을 쳐다보았다. 무엇으로 뚫었는지는 몰라도, 그을음이 주변에 묻어있는 그 구멍은 섬뜩하게도 심장 부근에 나 있다.
"38구경입니다."
셔츠를 살피던 나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제대로 보지 않았던 얼굴이 시야에 잡힌다. 아무렇게나 자라게 놔둔 듯한 늘어진 머리. 코와 턱에 돋아난 짧은 수염들. 그렇게 갱 같은 인상을 하고 있으면서도, 남자는 내게 존댓말을 썼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로 아까의 말을 반복했다.
"38구경이라고요. 뭐라 할 말도 없이 즉사였습니다. 관자놀이에 대지 않은 게 조금 뜻밖이었습니다만, 어차피 그런 건 중요하지 않으니…."
"잠깐만요. 즉사라니, 그게 무슨 말이죠? 지금 죽은 사람의 물건을 훔쳐온 거란 말이에요?"
남자는 무슨 소릴 하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손가락을 들어 내 가슴팍을 똑똑히 가리켰다.
"당신 물건입니다. 당신. 아직도 기초적인 지식조차 기억나지 않는 겁니까?"
"그런데 그게 왜…."
"당신은 38구경 권총을 가슴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관통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 심장을 파괴하기엔 충분했죠. 난 당신이 죽은 뒤에 유품들을 수습해 여길 찾은 겁니다."
"내가…?"
"예."
"내 가슴에…?"
"그렇습니다."
나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 * * * * *

 

 

욕실에 가서 샤워를 했다. 남자를 방안에 둔 상황에선 지나치게 대담한 행동이었지만, 몸에 달라붙은 식은땀을 씻어내지 않고선 배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그가 뭔가를 할 생각이었다면 진작 당했어야 했을 것이다. 살이 익어버릴 정도로 뜨거운 물줄기 속에 선 나는 조금씩 기억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아니, 이것은 기억이 아니다.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알고 있어야 하는 최소한의 지식이다. 어딘가 엇나갔다는 것만 알고 있는, 모호하기 짝이 없는 삶과 죽음의 개념.
죽으면, 사람은 리셋 된다. 기억을 잃고, '숙소'에서 깨어나 새 삶을 찾는다. 없어지는 기억에는 편차가 있지만, 대체로 죽기 직전까지의 기억이고, 따라서 일상을 유지하는 데에는 큰 상관이 없다.
그렇다는 말은 나 또한 되돌아갈 일상을 찾을 수 있단 얘기지만, 어째선지 거기에 대해선 조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생각나는 건 이 빌어먹을 세계에 관한 규칙들뿐. 난 혹시 되는 대로 살고 있던 무계획적인 인간이었나.
한숨을 쉬며 물을 잠갔다. 이 호텔은 다시 태어난 이들을 위한 '숙소' 중 하나. 맨몸으로 던져진 이들에게 돈을 받아먹지는 않는 친절한 곳이지만, 정신이 들면 24시간 이내로 퇴거해야 하는 한시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내가 호텔방에 나신으로 누워 있었던 건 새 생명을 얻은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다면 저 남자는 뭐지?
나는 몸의 물기를 닦은 수건으로 거울을 문질렀다. 가는 물방울들을 머금고 뿌옇게 되어 있던 거울은 내 모습을 보여주었다. 노란 조명 아래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퀭한 눈빛. 그게 내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쓴웃음이 나왔다.
나는 긴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가로대에 수건과 함께 걸어뒀던 옷을 집었다. 일단 뭐라도 얘기해보지 않으면 도저히 정리할 수가 없겠군.
"의뢰를 받았습니다."
남자의 대답은 간결했다. 침대에 걸터앉아 머리를 싸고 있던 타월을 방구석에 던져버린 나는 남자가 내 소지품이랍시고 갖다 준 물건들을 뒤져보았다. 도대체 무슨 생활을 해왔던 건지 손가방 안에 굴러다니는 건 온통 흉악한 무기뿐이다. 나는 기분 나쁜 표정으로 낡은 나이프를 옆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의뢰라니, 어떤 걸 말이죠?"
"당신을 이 도시 밖으로 데려가 달라는 의뢰."
나는 남자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사실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나는 그 남자의 말을 듣고서야 여기가 도시란 걸 알았으니까. 반발할 수도 찬동할 수도 없던 나는 다른 정보를 얻기 위해 침대 맞은편에 걸터앉아 있던 남자에게 계속 질문했다.
"누가? 아니, 무슨 이유로?"
"모릅니다. 저 같은 사람들은 이유를 묻지 않죠. 알 필요가 없으니까. 그리고 의뢰인에 대해선 당신이 더 잘 알 테지만, 기억을 잃었으니 어쩔 수 없나."
"내가 더 잘 안다고요?"
남자는 피식 하고 웃었다.
"그야 의뢰는 당신이 했으니까요."
믿을 수 없는 말을 듣고 멈칫해졌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지만, 나는 내가 했었던 일을 타인의 것처럼 들어야 하는 모순된 상황을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나 이외에 누가 그런 의뢰를 부탁하겠는가.
하지만 이 남자의 말을 계속 믿을 지도 의심스럽다. 솔직히 말해, 이 남자가 되는 대로 말을 지어내고 있다 하더라도 그 거짓을 판별할 능력은 이쪽에 없다.
"처음 그 얘길 들었을 땐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도 이 도시에서 꽤 오래 산 편이지만, 당신처럼 여길 벗어나고 싶어 했던 사람은 본 적이 없었죠. 다만 몇 번 죽고 난 다음엔 지금처럼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게 되더군요. 솔직히 말해서 전 이 상황이 꽤나 피곤합니다. 죽었다 깨어난 사람에게 매번 같은 설명을 하는 것도 곤욕이라서 말이죠."
넉살좋게 늘어놓는 말에서, 남자가 나를 무지한 자로 보고 있다는 느낌이 묻어난다. 기분이 나빠졌지만, 딱히 반박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속으로 화를 삭였다. 그리고 지금은 화를 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널려있다.
난 벌써 여러 번 죽었던 건가.
과거의 나에게 묻고 싶어진다. 그렇게 몇 번이고 죽어도 상관없을 만큼 이 도시를 떠나고 싶어 했냐고. 당신들이 지금의 나와 똑같은 상황에 놓여있었을 땐 대체 어떻게 행동했냐고. 나는 현기증에 가까운 두통을 느꼈다. 이전의 경험이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는 이상 나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죽었던 시점에서 이미 그 의뢰는 무효가 아닌가요?"
"아닙니다. 생사는 고려치 않았으니까요. 덧붙이자면, 그 때의 당신은 여러 번 죽는 걸 각오하고 있었고 또 지금 당신이 보이는 것과 같은 반발도 예상했습니다. 그래서 왈, '반항하면 기절시켜서라도 끌고 나가라'고 했었죠. 외곽 구역은 위험해서 자기 발로 뛰어주지 않으면 저라도 힘들기 때문에, 그렇게 한 적은 없습니다만."
나는 남자의 말에 어이가 없어졌다. 나는 손을 내밀어 증거를 요구했다.
"그런 말을 믿어줄 것 같아요? 나라면 당신에게 말하는 거로 그치지 않고 기억을 잃은 나를 설득시킬 만한 다른 방법을 강구했을 거예요. 글로 썼든 영상을 찍었든, 내가 그 의뢰를 인정했다는 증거를 내보이시죠."
남자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정곡을 찔린 건가? 남자의 부정적인 반응에 나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만약 지금 한 말이 전부 거짓이라면….
하지만 돌아온 남자의 대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친필로 쓴 편지가 있습니다. 정확히는 있었다고 해야겠군요. 아쉽게도 지금은 없어졌습니다."
"왜?"
"지금부터 두 번 죽기 전의 당신이 찢어 태워버렸거든요."
그 말을 들은 나는 맥이 빠져버렸다.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남자를 본다. 찢었다고? 내가 직접? 그것도 기억나지 않는 과거의 일이라니. 내 표정을 읽었는지 남자는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내밀었던 손을 힘없이 떨어뜨렸다.
그리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 끝을 쓰러진 가방 입구에 가져다댔다.
들키지 않았는지 조심하면서 남자의 눈치를 본다. 다행히 남자는 아직 내가 하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다.
"믿는 건 당신 자유지만, 뭐, 너무 고민할 필요 없습니다. 기억이란 건 그렇게 간단히 없어지는 게 아니니까, 뭔가 계기만 있다면 금방 떠올릴 수 있겠죠. 이전까지의 당신이 제게 협력했던 것도 어느 정도 그 기억을 되찾았기 때문입니다."
"……."
"어쨌든 그것도 지금 당장은 무리일 테니 일단 이곳을 벗어나고 봅시다. 향수 냄새가 지독해서 여기 계속 있다간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군요."
남자가 맞은편에서 일어난다. 그의 발치에 걸리는 건 처음 들고 왔던 그 검은 가방. 이제 잔짐을 정리하느라 등을 돌리겠지. 나는 잘 넘어가지 않는 마른침을 억지로 삼켰다. 아까처럼 망설이면 안 된다. 뭔가를 캐물을 생각일랑 하지 말고 그대로-.
"그 전에 해야 할 게 있는데."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뒤돌아볼 찰나 다시 이쪽으로 몸을 돌린 남자는 내게로 다가왔다. 남자의 시선은 내 손 언저리에 가 있다. 내 손이 가방 안쪽까지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 있다. 안 돼, 들켰어! 더 이상 주저할 수 없던 나는 가방을 씌운 채로 권총을 쥔 손을 들어올렸다.
"그 옷…."
탕!
내 소매로 팔을 뻗던 남자는 총소리와 함께 뒤로 물러나 벽에 부딪혔다. 나는 온몸을 떨면서 소음의 진원지를 바라보았다. 가방의 터진 끝에서 흰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 연기의 연장선상에는 배에 검은 구멍이 뚫려있는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불신의 표정을 지으며 연기가 이는 배의 구멍에다 손가락을 갖다 댔다. 소스를 묻힌 것처럼 핏방울이 손가락 끝을 타고 흘렀다. 그 진한 핏줄기가 내 속의 무언가를 때려박아서, 나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방아쇠를 연달아 당겨버렸다.
탕탕탕!
뒤이은 연사에 남자는 뒤로 나자빠졌다. 바닥에 엎어진 남자는 몇 번 꿈틀대더니 곧 그 움직임을 멈췄다.
남자의 처리를 끝낸 나는 총을 가방 안으로 떨어뜨렸다. 방아쇠를 당겼던 손이 제어할 수 없을 만큼 떨린다. 반대편 손으로 그 팔목을 저릴 정도로 꽉 붙잡았다. 운동도 하지 않았는데 숨이 끝까지 차오른다.
"옷…?"
맥박을 따라 고동치는 머릿속에서, 남자의 마지막 말이 가뭇하게 떠올랐다. 나는 내가 입고 있던 옷을 내려다보았다.
"…아아."
그래, 이 옷. 희고 펑퍼짐한, 여자 몸에는 조금 맞지 않는 푸른 무늬의 라운드 티. 옷장에 걸려있던 '기본 복장'이다. 남자는 이 걸 입고 나가는 걸 자살 행위라고 했지만, 가슴에 구멍이 뚫린 셔츠 따윈 불길하다고 내가 막무가내로 입고 있었지.
결국 남자가 문제 삼으려고 했던 건 단순한 옷차림이었단 말인가.
"하, 하하."
어이가 없어진 나는 몸을 침대 위에 팽개쳐둔 채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속마음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행동만큼은 호의로 일관했던 사람을 너무도 간단하게 죽여 버렸다.
"…어쩔 수 없어. 지금 신용할 수 있는 건 나 자신뿐인걸."
마음을 굳게 다잡고, 누워있던 침대에서 일어선다. 권총을 비롯해 몇 가지 무기를 손가방에 담고 나자, 현금이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시체의 곁으로 다가가는 건 상당한 곤욕이었지만,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쓰러진 남자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다행히 손가락 끝에 지폐 몇 장이 걸려 올라와, 전부를 손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어지러운 내부를 두고 방을 나서기 직전, 일말의 양심이 걸렸던 나는 시체에게 한 마디를 던졌다.
"미안해."
당연한 얘기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 * * * * *

 

 

닫히는 방문이 눈앞의 살풍경을 가린다. 걸쇠가 맞물린 문은 철컥, 하고 자동으로 잠겼다. 이제 본인도 퇴거한 이상, 방 안은 24시간 이내로 리셋 되겠지.
잠긴 문고리를 바라보며, 나는 문득 남자가 이 방에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해졌다. 하지만 이미 죽은 사람의 능력을 논하는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빼앗기고 싶진 않았다. 나는 호텔 로비로 짐작되는 곳을 향해 복도를 걸었다.
복도를 다 지나왔을 즈음엔, 나는 남자에 대한 생각을 거의 잊고 있었다. 어차피 이 세계에서 죽는다는 건 딱히 슬픈 일도 아니니까.
"아무도 없나…."
외관은 호텔이지만 어디까지나 태어난 자를 위한 임시 수용소이다.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의무는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황량한 로비를 보니 기분이 나빠진다. 어쨌든 여기도 사람이 드나드는 곳인데 최소한의 관리 인원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인적이 없다는 것만 제외하면 내부는 꽤 세련된 장소였다. 텅 빈 카운터 뒤로 시계가 박혀있고, 원형 기둥을 감싼 둥근 소파 옆에는 큰 화분이 놓여 있다. 바닥에 깔린 것은 객실보다 화려한 카펫. 이런 곳에서 24시간 이상의 기억을 가질 수 없다는 건 왠지 안타까운 일이다.
"일단 밖으로 가볼까."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시간을 더 낭비할 필요는 없다. 거리를 걷다 보면 우리 집이라도 생각날지 모르지.
-지잉.
바깥에 나오자마자 따가운 공기가 얼굴에 흠뻑 끼얹어졌다. 느낌이 불쾌하다. 조금 전까지 머물렀던 호텔을 등진 채, 나는 낯선 거리에서 익숙함을 찾기 위해 애썼다.
자동문 바깥의 거리는 호텔 내부와는 딴판이었다. 미적 요소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철저히 기능적인 건물들.
아니, 이것은 기능적이란 말도 맞지 않다. 짓다가 만 것은 물론 안전과는 담을 쌓은 듯한 증축까지, 어린애가 짓이겨 놓은 듯한 형상을 줄지어 세워놓은 거리는 미와 기능 양쪽을 모두 포기한 무계획적인 공간이다.
엉망인 것은 건물뿐만이 아니었다. 포장도로란 말이 무색할 만큼 흙먼지로 덮인 길은 건조하기 짝이 없다. 나는 거리를 휩쓰는 열풍 속에서 흰 옷을 여미며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걷다 보면 떠오를 거라니, 너무 안일한 생각이었나….
하지만 그 외엔 딱히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수준 이하의 거주민들이 득실댈 듯한 장소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나는 무작정 걸어야 했다. 나는 막연히 큰길이 나올 것 같은 방향을 잡아 발걸음을 바삐 옮겼다.
얼마가 지났을까.
다리가 조금씩 후들거려지는데도 주변의 풍경은 바뀌지 않는다. 걷는 사람도 없고, 건물에서 내다보는 사람도 없다. 먼지 섞인 바람만이 덜 마른 머리칼을 상하게 한다. 어느 새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나는 이를 악물었다.
"빨리 떠올려, 이 멍청아. 언제까지 방황할 생각이야."
까마득하게 긴 골목에 정신을 잃을 것 같아서, 독설로 나를 채찍질했다. 이름을 부르려고 했는데 정작 내 이름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보통 죽음을 겪으면 기억이 없어지는 게 정상이지만, 이 정도로 중요한 정보까지 잃는 경우는 거의 없을 텐데도 나에겐 그 모든 것이 먹칠을 한 것처럼 깜깜하기만 하다.
그 남자의 말이 사실인가. 죽고 죽고 또 죽어서, 자신이 누구였는지조차 잊어버리게 된 건가.
그렇다면 내게 남은 길은 뭐지.
"……."
남자의 말을 들었어야 한다는 후회가 떠오른다. 적어도 그는 나를 알고 있는 단 한 사람이었다. 어차피 믿을 수 있는 기억이 없다면, 편리하게 그를 따랐으면 되었을 것을. 사실이든 거짓이든 간에, 자신에게 가능한 길은 그 한 가지뿐이 아니었던가.
고개를 억지로 흔들어 망설임을 떨쳐냈다. 기억을 잃었든 어쨌든 간에, 내 몸의 주인은 나다. 그렇게 다른 이에게 함부로 주도권을 넘겨줄 만큼 하찮은 몸이 아니다. 당장의 고난에서 생기는 유혹을 따라가 줄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은 지금까지 걸어왔던 거리 이상의 부담이다. 수 킬로를 걸었어도 조금도 바뀌지 않은 풍경은 곤욕스럽다. 먼지 낀 창문 위로 철근이 돋아난 건물들은 흉물스런 야수의 형상이 되어 거리를 걷는 자를 노려다본다. 사람이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거대한 반복의 크기가 나를 질리게 했다.
"야!"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는 발걸음을 한 번 더 떼었을 때, 거친 목소리가 갑자기 뒤에서 들려왔다. 그와 함께 바람이 마법처럼 불어와 내 등을 때렸다. 바람에 튕겨 올라온 모래들이 거리를 휩쓸며 요란한 소리를 낸다. 깨진 고요도 고요이거니와, 그 첫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나는 차마 뒤를 돌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내 무반응에 화가 났는지, 씩씩거리는 발이 타박타박, 하고 도로를 밟으며 온다. 이미 놀란 마음에 멈춰선 뒤라 못 들은 척 하기도 늦은 순간이다. 어쨌든 상대의 모습이라도 파악해야 도망치든 얘기를 나누든 행동을 취할 수 있었기에 나는 뒤로 시선을 돌렸다.
"한창 바쁠 때 안 나타나고 무슨 짓이야? 또 썰리고 싶어?"
돌아보기가 무섭게 얼굴로 패악한 독설이 쏟아졌다. 등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상대는, 조금 마르긴 했지만 젊은 여성 특유의 생기가 넘치는 여자였다. 붉은 기가 도는 탁한 머리카락을 위로 올려 묶은 여자는 어째선지 골이 잔뜩 난 채로 내가 뭐라 대꾸할 새도 없이 멱살을 잡아 올렸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생각도 못할 광태를 겪은 나는 기가 막혀서 변변찮은 반항도 하지 못했다.
"이 년이 오냐오냐 해주니까 쓸데없이 존심만 커져서는, 기둥서방 믿고 뻗대겠다 이거지! 그깟 반푼이 새끼는 내 손짓 하나면… 어라? 세실이 아니잖아?"
"이제라도 알아주니 고맙군요."
멱살을 잡힌 것도 모자라 반쯤 허공에 떠 있던 나는 딱딱하게 대꾸했다. 자신이 착각했음을 깨달은 여자는 금방 나를 내려놓았고, 나는 어색한 기침을 하며 구겨진 옷소매를 털었다. 여자는 아직도 상황이 제대로 이해가 안 되었는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당황해했다.
"어, 하지만 그 옷은 기본 복장인데, 설마 도심에서 여기까지 온 건 아닐 테고… 어, 그러니까 여기에서 태어난 게 아니…?"
"맞아요."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여자는 아까보다 더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아, 그렇군요. 세상에. 여기에 아직도 내가 모르는 년, 죄송, 여자가 있을 줄은 몰랐어요. 이상하네요. 이런 데 당신 같은 미인이 흘러들어온다면 금방 소문이 퍼질 텐데…."
나는 아까 전의 우악스러움이 씻은 듯이 사라진 여자의 태도를 보고 속으로 헛웃음을 짓는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하는 말로 봐서 그녀는 여기 정착하고 있는 주민인 듯하다. 나는 어느 새 자기 세계에 빠져 횡설수설하고 있는 여자를 불러 세웠다.
"아까 일은 됐으니까 너무 염두에 두지 말아요. 그보다 시내 중앙으로 가고 싶은데,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 거죠?"
"네?"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저런 반응을 보이지? 난 일단 중심지로 가는 게 제일 합리적이지 않은가 싶어서 물어본 건데. 나는 조금 불안감을 느꼈지만, 여자는 곧 뭔가를 납득했는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아하, 그렇게 된 거였군. 어쩐지."
"무슨 뜻이죠?"
"아, 별 거 아니에요. 당신 도심에 살던 게 맞죠? 간혹 그런 사람이 있어요. 외곽 근처에서 죽어서 '숙소'가 여기 외곽 쪽으로 옮겨진 사람. 뭐 때문에 도심인이 이런 곳까지 나오는 진 모르겠지만 당신도 기억에 없을 테니까 쓸모없는 질문이겠죠."
"외…곽?"
그러고 보면 그 남자한테서 언뜻 그런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짧은 중얼거림이었지만 여자는 거기서 내 속내를 금방 짐작해낸 듯, 태연하게 설명을 읊어댔다.
"그래요. 외곽. 여긴 에덴의 가장자리에요. 십 수 년도 전에 방사풍 때문에 확장을 포기한 곳이죠. 덕분에 치안도 전무한 상황이라 이런 저런 뜨내기들이 모여 사는 곳이랍니다. 뭐 이런 건 나중에 기억이 돌아오면 금방 떠오를 테니까 넘겨들으셔도 상관없어요. 그보다 시내로 가는 길을 찾으셨죠?"
"네… 네."
"마침 저도 그 쪽으로 향하던 참이었으니까 같이 가요. 데려다드릴 테니까."
그러더니 여자는 나를 지나쳐서 내가 걷고 있던 방향으로 경쾌하게 걷기 시작했다. 이전에 만났던 사이도 아니면서 붙임성 있게 접근하는 모습은 약간은 부담스럽기도 했다. 저 여자를 믿고 따라가도 좋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이대로 홀로 길을 찾는 것도 가망이 없어보였기에 순순히 그녀 뒤를 따르기로 했다.
"고맙습니다. 친절하시네요."
"뭘요. 그보다 성함이…? 전 켈리라고 해요."
"아, 그렇군요. 죄송하지만 제 이름은 아직 기억나지 않아요."
"그래요? 어지간히 험하게 죽으셨나 보네. 하긴 이쪽엔 별의 별 놈들이 많으니까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죠. 이제라도 절 만날 걸 행운으로 생각하셔야 해요."
켈리는 내 기억상실증을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넘어갔다. 확실히 분위기만 봐도 이 외곽은 상식과 너무 동떨어진 장소다. 아직까지 나에게 이렇다 할 일은 없지만 그녀는 여기서 갖가지 경험을 해왔던 걸 테지.
한편 켈리의 다른 말이 내 마음에 걸렸다. '험하게 죽었냐고?' 나는 켈리의 뒤편에서 화약 냄새가 진동하는 손가방을 열었다. 예의 권총은 그대로 있다. 준비된 총알은 아마도 12발. 그리고 그 직경은 약 0.38인치.
그 남자는 내가 내 가슴에 대고 직접 방아쇠를 당겼다고 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내가 자살할 만큼 절박한 상황에 처해있었단 건가? 비록 기억나는 인생은 두 시간 정도가 고작이지만, 내 성격이 얼마나 심지가 빳빳하게 굳어 있는가는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런 내가 죽으면서까지 잊고 싶어 했던 경험이란 말인가.
"하양 씨!"
켈리의 말에 퍼뜩 정신이 든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켈리가 이쪽을 조심스럽게 보고 있었다.
"제 말 듣고 있던 거예요, 하양 씨?"
"아, 그보다 하양 씨는…."
"일단 뭐라도 불러야 되잖아요. 흰 옷이니까 하양. 단순하죠?"
하양? 웃기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그래도 거듭해 불러보니 조금 괜찮아진 것 같았다. 하양을 계속 불러보는 내 모습에 흐뭇해졌는지 켈리는 헤실 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이대로 이 이름이 굳어질까 걱정이군.
그런데 그녀가 정말 타인에게 멋대로 이름을 붙여줄 만큼 넉살이 좋은 사람일까? 나는 기분 좋게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켈리를 보며 말로 할 수 없는 껄끄러움을 느꼈다. 그저 이런 골목에 어울리지 않는 심성이라 여기면 편하겠지만, 그렇다면 맨 처음 내 멱살을 잡고 쏟아냈던 말들은 설명이 안 된다.
"켈리 씨. 그런데 아까 저보고 세실이라고 한 것 같던데…."
켈리가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그것은 걷는 속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만큼의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그녀는 다시 움직이면서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밑에서 일하는 여자애에요. 당신처럼 흑발이라서 착각했어요. 자비고 뭐고 없는 연좌제니까, 걔가 포주한테 대들면 우리 같은 애들까지 골치 아파지죠. 그런데 그 년한테 밤마다 엉겨 붙는 놈이 무슨 바람을 불었는지 툭하면 방을 떠나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려요. 이번에 한 번 크게 터져서 찾으러 다니는 거죠. 저는 시내 쪽을 찾기로 했어요."
켈리는 내 눈치를 흘긋 보고는 큰 소리로 웃었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얼굴이 붉어진 모양이다.
"하하, 하양 씨에겐 좀 적나라한 얘기였나? 그 쪽도 사정은 다를 거 없으면서 뭘 그래요? 어딜 가나 발전하는 건 변태적인 것들밖에 없죠. 좁은 도시에 갇혀 사는 신세니까 어쩔 수 없을 거예요."
"갇혀 살아요?"
이번만큼은 켈리도 좋은 시선을 보내지 않았는데, 아마 당연한 사실을 너무 모른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기억이 돌아오지 않은 걸 어쩌란 말인가. 시내로 가는 길은 아직도 멀었는지, 똑같은 행로를 계속 밟아가며 켈리의 설명이 이어졌다.
"전 무식해서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옛날에 핵전쟁이란 게 있었나 봐요. 그 전까지만 해도 사람 수가 수십억이나 되고, 에덴 시보다 훨씬 큰 도시가 전 세계에 수백 개는 있었다고 하네요. 하지만 핵전쟁 이후로 전부 사라져버리고, 근근이 살아남은 사람들이 이 곳 에덴 시에 모이게 된 거죠. 다른 곳은 몰라도 여기만큼은 낙진이 떨어지지 않아요."
"그 중에서도 이 외곽 지역은 건설 도중에 바람을 타고 낙진이 흘러 들어와서 폐쇄된 구역이에요. 지금은 이상이 없는데도 시에서는 접근할 생각을 하지 않죠. 기왕 빈민들 소굴이 된 거, 방해 분자들을 여기로 밀어 넣고 무시하겠다는 거예요. 이 좁은 데서 십 몇 만 명밖에 안 되는 시민을 그렇게 구분 짓는 걸 보면 참 한심하다고 느낄 때가 많아요. 하긴 여기 남자들은 전부 어린애 같아서 함부로 섞여들었다간 큰일 치를 테지만."
"낙진…."
나는 입술을 가볍게 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설득력 있는 얘기지만, 뭔가 이상하다. 내 기억으론 인간은 방사능 따윈 극복한 지 오래였다. 물론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긴 하지만, 이렇게 비좁은 곳에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할 만큼 두려움에 떨어야 했던 존재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게다가,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몸에 두려울 게 뭐가 있으랴.
하지만 켈리는 그런 내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듯 했다. 내 말을 들은 켈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처럼 심각한 상실증은 정말 처음 보네요. 시에서 매번 경고 방송 나가는 거 못 들었어요? 이유는 몰라도 낙진 구역에 닿으면 말 그대로 증발한다구요. 저도 몇 년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죠. 붉은 페인트로 경계선을 칠해놨는데, 거기서 한 발만 벗어나도 깨끗하게 사라지는 게 무슨 마술을 보는 거 같더군요. 그리고 선을 넘었던 그 남자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숙소'에서 24시간을 죽치고 앉아 있어 봐도 코빼기도 안 보였다 이 말이에요. 당신이 진짜 죽음을 맛보고 싶다면, 망설일 것 없이 그 곳으로… 뭐야? 왜 그래요?"
나는 켈리의 뒷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머릿속에 폭탄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나는 나도 모르는 새 자리에 멈춰 서서, 그녀의 마지막 말을 멍하게 되풀이하고 있었다.
탈출이 아니다.
도시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다른 곳도 아닌 진짜 죽음이다.
머릿속에서 팽개쳐두고 있던 고리들이 그 말 하나로 맞물려갔다. 나는 전신이 오싹해질 정도의 고양 속에서 남자의 말을 생각했다. 의뢰. 내가 직접 내린 의뢰. 무슨 일이 있어도 생사를 불문하고 반드시 도시 밖으로 데려가 달라던 의뢰!
'나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어!'
발 끝 하나만 내밀어도 비참한 윤회에서 소멸하는 곳. 더 이상 거울 너머의 자신을 끝없이 세워둘 필요가 없는 이 세상의 끝.
'난 완전한 죽음을 원했던 거야!'
그래서였나. 그래서 난 자살을 택한 건가. 도대체 무슨 우라질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부활 없는 죽음을 꿈꿀 정도로 터무니없는 경험을 했던 거라면, 그런 거라면, 도중에 참지 못하고 자기 가슴에 총탄을 꽂아버릴 이유로는 충분하잖아!
나는 몸을 돌려 이제껏 걸어왔던 길을 거슬러 갔다. 뒤에 남겨진 켈리가 당황하며 나를 불렀다.
"자, 잠깐만요! 하양 씨, 어딜 가는 거예요?"
"미안해요. 저 볼일이 생각났어요. 시내는 켈리 씨 혼자 가세요!"
바보 같은! 왜 좀 더 빨리 확신하지 못한 거야! 그 때 그대로 돌아간다면 아마도 똑같은 결정을 내렸을 테지만, 나는 막무가내로 거리를 걸었던 과거의 나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돌아갈 길은 지금까지처럼 까마득해도, 최소한 목적지만큼은 분명히 너머에 있다. 내가 깨어났던 외곽의 호텔. 아마도 내 총에 죽은 남자 또한 그 '숙소'에서 새 삶을 시작하겠지. 그 남자가 죽고 나서도 아직 의뢰를 기억하고 있다면… 그에게 물어볼 말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다.
눈물이 쏙 빠질 만큼 걷긴 했어도 길 자체는 지극히 단순한 경로다. 큼지막한 모퉁이를 돈 것이 단 두 어 번. 그 부분만 정확히 기억하고 있으면 도착하는 건 시간문제다. 흥분에 몸을 떤 채 탁한 황금빛의 거리를 걷는 나에게, 그 남자가 거짓말을 지껄였으리란 의심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 내 앞에서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바람 때문에 머리카락이 치솟은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은 잠깐, 반사적으로 위험을 느낀 나는 앞으로 몸을 넘어뜨렸다. 내가 서 있던 허공을 가르고 무시무시한 소리가 울렸다. 바닥에 넘어진 채 뒤를 돌아본 나는 어느 새 내 뒤까지 접근한 켈리가 딱딱한 곤봉 같은 것을 손에 쥐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녀는 먹잇감을 대하듯이 날 내려다보며 가멸찬 미소를 지었다.
"하, 중간에 도망치다니 끝마무리가 안 좋잖아. 100미터만 더 갔으면 완벽했는데 말이야."
켈리의 말에선 맨 처음에 겪었던 독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역시 이게 본모습인가. 조금 전까지의 친절함은 완전히 벗겨진 채, 켈리는 여유 섞인 적대감만을 가지고 나를 상대하고 있었다.
이 정도로 뻔뻔하게 태도를 바꾸면 화낼 기분도 안 든다. 어차피 켈리를 신용하지도 않았던 나였기 때문에 이 상황은 오히려 내 경계심을 만족시켜줄 뿐이었다. 덕분에 생각보다 훨씬 침착한 태도로 켈리를 관찰한 나는, 그녀가 쥐고 있던 게 정확히는 작은 동상임을 알아챘다. 한 손에는 책을, 다른 손에는 횃불을 든 그 인물은 아무리 봐도 타격용으로 만들어진 것 같지는 않았다.
"조각상?"
"행운의 무기지. 맨 처음 잡았던 년이 갖고 있던 건데, 방심하던 사이에 끄집어내서 머리에 한 방 먹여줬거든. 지금까지 실패 없이 잘 넘어갔는데, 네가 이걸 피한 첫 번째 사람이야. 거기에 대해서는, 뭐, 짧은 축하 정돈 해주겠어. 하하하!"
슬슬 켈리의 정체를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바닥에서 무너졌던 자세를 바로잡으며 천천히 대꾸했다.
"기억났다. 너희 같은 무리들이 있었어. 어쩌다 흘러들어온 여자들을 잡아서 매춘부로 부려먹는 집단들. 처음 잡은 여자는 일단 끝도 없이 죽여서 기억을 없앤 후에 편한 데로 교육시키지. 뒤가 구린 년인 줄은 짐작했지만 상상 이상이군."
"어머, 완전 백치는 아니었네? 멍청하게 굴길래 교육 중이던 신참인가 의심도 했는데, 아직 죽은 맛이 부족한 모양이야. 이제 나한테 잡혔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럼 날 죽일 거야?"
"글쎄, 어떨까?"
켈리는 입술을 핥으며 조각상을 한 바퀴 돌려 잡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씁쓸함을 느꼈다. 그래, 조각상 따위로 사람을 죽이려 들 리가 없지. 저건 단순한 포획용이다. 하지만 일단 저 상에 맞아 기절하고 나면, 나는 100미터 너머에 있는 그녀의 아지트에 끌려가 무슨 짓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
"그럼 한 가지만 더 말할게."
나는 어정쩡하게 일어서면서 말했다. 나 따윈 단번에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일까, 켈리는 그 모습을 보고도 움직이지 않은 채 태연히 답했다.
"뭔데?"
"아까까지 너 정말 역겨웠어."
켈리는 살짝 굳었다. 하지만 곧 그녀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말했지? 좁은 곳에 갇혀 살면 변태적인 것만 발전한다고. 짧은 유희였어. 함께 해 줘서 고마워."
"미친 년."
나는 무표정하게 대꾸하며 어깨에 걸려있던 손가방에 손을 넣어 권총을 집었다. 그러나 켈리는 그런 내 행동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빠른 반응을 보였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켈리는 가방에서 꺼내려는 내 손을 잡고 조각상으로 머리를 후려치려 했다.
그러나 생각한 것보다 빠르게 움직인 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총은 마치 자석이라도 달린 것처럼 내 손에 자연스럽게 달라붙었다. 나는 켈리가 내 손목을 낚아채기 전에 먼저 팔을 꺼낼 수 있었다. 뒤이어 권총은 너무나도 부드럽게 움직여 켈리의 가슴에 겨눠졌고, 완전히 피할 수 없는 지근거리에 섰던 켈리의 안색은 하얗게 바뀌었다. 끝났어! 나는 자신 있게 그녀의 심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으윽!"
독한 연기와 냄새가 총구에서 뿜어 나온다. 총탄에 정확하게 맞은 켈리의 몸은 들썩 하고 뒤로 튕겼다. 안타깝게도 약간은 피한 모양이다. 그녀는 왼쪽 어깨 부분을 꽉 누른 채 제자리에서 비틀거렸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마무리 지을 두 번째 총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방심하고 있던 나는 켈리가 손을 뗐을 때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분명히 켈리의 어깨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손을 뗀 손가락 사이에서 굴러 떨어지는 금속 물체는 분명히 찌그러진 총탄이었다.
"어떻게…?"
방탄복도 아닌 평범한 피부인데도, 총알이 다 박히지 않고 찌그러지다니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잠깐의 멈춤이 내겐 패착이었다. 켈리는 내가 멍해져 있는 틈을 놓치지 않고, 내 관자놀이에 그녀가 쥐고 있던 조각상을 용서 없이 때려 박았다. 번개 같은 흰빛이 눈앞을 차지하는가 싶더니, 내 의식은 누전된 퓨즈처럼 순식간에 나가버렸다.

 

 

* * * * * *

 

 

똑. 똑.
어렴풋이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세웠다가, 켈리에게 맞았던 부분이 시큰거려 얼굴을 찌푸렸다. 정말 쳐 죽이려던 심산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강한 일격이었다. 이렇게 멀쩡하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으로 느껴진다.
똑. 똑.
그 동안 버려두고 있던 사지는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를 나무라듯 저릿저릿한 고문을 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피부에서 느껴지는 공기는 건조하던 바깥과는 달리 차갑고 음습하다. 아직 눈을 뜨진 않았지만, 틀림없이 주변은 새카만 시멘트로 도배가 되어 있으리라고 짐작한다.
어딘가에서 줄곧 들려오는 물소리가 묘하게 신경에 거슬렸다. 수도관의 틈에서 새어나오기라도 한 걸까, 이슬이 맺혔다기엔 지나치게 빠른 간격이다. 듣고 만지는 것 외엔 차단당한 신경은 그 남은 신호에 매달려 극도로 예민하게 변해 있었다.
똑. 똑.
똑. 똑.
"일어나."
나는 오랜 꿈에서 부상했다. 상대는 내가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허우적거리는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어딘가 경쾌하게까지 들리는 소리와 함께 내 뺨이 확 돌아갔다. 차갑게 식어있던 몸에 불길이 인다. 얼얼한 볼에서 쓴맛을 느끼며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잔뜩 지저분해진 여자의 다리가 보였다.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건, 내 다리다. 나는 의자에 묶인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숙인 채로 장시간 굳어있던 목이 고통스러웠지만, 나는 억지로 탁한 눈을 들어 방을 살폈다.
짓다가 만 건물의 일부인지, 내부 공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방이다. 본래라면 판들 뒤에 숨어있을 파이프들은 겉으로 드러난 채 혈관처럼 천장을 어지러이 돌고 있었다. 먼지와 거미줄이 잔뜩 낀 그 파이프들의 겉면은 부식의 결과로 너덜너덜한 산화철 자국이 가득했다. 천장도 벽도 바닥도 모두 시멘트의 짙은 암회색. 그나마 다른 빛을 띠고 있는 부분은 습기를 따라 침식해온 곰팡이 무리다. 주인이 이곳을 무슨 용도로 쓰는지는 몰라도 절대 숙식은 아니리라.
나는 등받이 뒤로 돌려진 손을 흔들어보았다. 하지만 그 정도로 묶인 팔이 풀릴 리가 없다. 흔들수록 줄에 맞닿은 부분이 아파올 뿐이다. 내가 무의미한 반항을 해보는 사이, 우악스런 손이 고개 밑을 비집고 들어와 턱을 치켜들었다. 나는 억지로 자신을 마주보게 만든 상대에게 비몽사몽간에 중얼거렸다.
"쌍… 년."
퍽! 강렬한 손등치기가 뺨을 반대쪽으로 날렸다. 이빨이 흔들거리면서 쓴 액체가 왈칵 뿜어 나왔다. 고통 자체보다 피로 입안이 데워지는 감각이 훨씬 소름 돋는다. 차마 피를 삼키지 못한 나는 그걸 입 밖으로 흘려보냈다. 허벅지 위로 뜨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머리 위에서 욕설이 떨어졌다. 날 한 번 후려친 것으로는 화가 다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깊숙한 뒤편 어딘가에서 남자의 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하하하하… 정말 제대로 된 여자를 낚았구만, 켈리! 배짱이 보통이 아니야!"
"입 닥쳐. 젠장, 정작 잡으려고 했던 년은 코빼기도 못 보고 어깨에 총까지 맞았다고. 옷만 보고 방심했는데 의외로 독한 년이야."
"그러니까 막 태어난 애들한테 장난치는 버릇 좀 고쳐. 보스도 별로 좋아하지 않아."
"흥, 색에 취한 병신 따위가 아랫것 일에 일일이 신경 쓸 리 없잖아. 어차피 뭐라 떠들어도 이 계집만 던져주면 당분간 닥쳐 주겠지. 몇 달 만에 들어온 신품이니까 말이야."
그러더니 내 머리채를 움켜잡은 상대는 자기 얼굴을 똑바로 내게 갖다 댔다. 물론 켈리다. 왼쪽 팔을 붕대에 매달고 있던 그녀는 천성이 그런 것처럼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그래, 어떻게 생각해? 여기서 죽을 때까지 노리개로 지내는 게 말이야. 아니, 죽어도 도로 데려올 테니 영원히 인가?"
마침 고인 피가 가득하다. 나는 경멸을 담아 입안에 담고 있던 것을 눈앞의 얼굴에 내뱉었다. 그러나 켈리는 그걸 예상하고 있었는지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피 섞인 침은 전부 내 무릎 위로 떨어져 다리를 더럽혔다. 켈리는 킬킬거리며 틀어잡은 내 머리를 흔들어댔다.
"미안하지만 너 같은 년 상대를 한두 번 해본 게 아냐. 얌전히 우리말대로 따르는 게 좋을 거야. 일단 순응하기만 하면, 뭐, 여기도 꽤 편한 곳이라고. 사람 사는 데가 다 그렇잖아?"
똑. 똑. 켈리에게 두 번이나 얻어맞은 덕분에 터질 것처럼 윙윙거리던 고막에 아까의 물방울 소리가 잡혔다. 나는 초췌한 눈을 들어 소리가 나는 곳을 찾으려 애썼다. 몸이 완전히 포박된 채 지랄 맞은 성격의 여자를 앞에 둔 이 상황에서 그건 지독하게 의미 없는 행동이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내가 주의를 기울이기엔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이런 식으로밖에 상대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게 어찌 보면 참 뒤틀린 상황이다.
나는 곧 물방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상상하기 두렵게도, 물소리와 함께 파문이 이는 물웅덩이는 다름 아닌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아니, 붉다기보다는 오히려 질척하고 검은 느낌이 강한 그 웅덩이는, 대부분이 내 앞에 선 켈리에게 가려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너머의 밝은 모습이 보고 싶기도 했고, 동시에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상반된 감정에서 내가 혼란에 빠져있을 때 켈리는 몸을 비켜 나에게 그 소리의 근원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하지만 못대가리가 함부로 튀어나오면 이렇게 때려 박아야 되지. 사정없이."
계속해서 들려오던 물방울 소리를 다른 것이 덮었다. 심장 소리였다.
덜컹. 덜컹. 덜컹. 덜컹. 이 정도가 되면 이미 박동이 아니라 진동이다. 긴장으로 조여진 심장이 뛸 때마다 가슴에서 폭탄이 터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머리가 붙잡혀 있었기에 내가 할 수 있던 도피는 눈을 감는 것뿐이었지만, 켈리는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귓가에서 표독스럽게 속삭였다.
"자, 소개할게. 저게 바로 진짜 세실이야. 도망치자마자 잡혀와 성격 나쁜 큰머리 아저씨한테 이런 저런 짓 당해버렸지. 감상이 어때?"
"비꼬지 말고 이름은 똑바로 불러. 그렇게 우습게 부르면 좋냐."
"꼴에 부끄럼 타지 마. 빅헤드. 그 별명도 웃기긴 매한가지야."
창문도 남아있지 않은 뚫린 창가에 비스듬히 누워있던, 청록색 니트모를 쓴 청년은 시시한 농담으로 켈리를 되받아쳤다. 하지만 나는 그들처럼 태연하게 농담을 나눌 여유 따윈 갖고 있지 않았다. 나는 미칠 듯한 기분 속에서 반복되는 물소리를 들었다.
똑. 똑.
의자와 마주보는 위치에 세워진, 모서리가 닳아빠진 콘크리트 기둥.
거기에 못 박힌 '무언가'는 일정한 박자로 피를 바닥에 쏟아내고 있었다.
"…맙소사."
졸지에 미숙한 해부학도가 된 기분이다. 시체를 눈앞에 둔 채 구토할 준비를 갖추는 애송이 말이다. 게다가 저건 솔직히 말해 사람이 아니라 요리에 가깝다. 껍질을 벗겨내고 속살만을 잘라 전시하는 날 생선처럼, 세실이라 불렸던 그것은 내장을 흩뿌린 채 뼈와 근육을 밖으로 내놓고 있었다.
벗겨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꼼꼼하게 고정시켜둔 피부나, 진작 죽고도 남을 상처로 처절하게 살아있는 몸에서 강박적인 집착을 느낀 나는 치를 떨고 말았다. 사람을 고문하는 기술을 저렇게까지 갈고 닦을 필요가 뭐가 있으며, 또 저 지경에 이르기까지 몇 명을 희생시켰나. 긴장으로 숨을 흠뻑 들이키자 나 아닌 다른 이의 피 냄새가 코로 스며들었다. 바닥은 이미 피바다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끔찍하다.
"우… 우."
여자의 입에서 희미한 울음소리가 나왔다. 내가 그녀의 입을 보고 있었기에 간신히 알아챘던, 잡음이나 다름없는 미세한 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로 상대가 사람이란 느낌이 확실하게 새겨졌다. 혐오감에 진저리치는 나에게 켈리가 말했다.
"아무래도 사람이란 건 좀 관리하기 불편해. 암만 죽인다고 해봤자 12시간 만에 '숙소'에서 멀쩡하게 걸어 나오면 그만이거든. 경계에 던져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 대신 우린 좀 더 건설적인 방법을 쓰지.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내리는 것. 하지만 결코 쉽게 죽도록 내버려두지는 않는 것. 그래야 마지막에 죽고 나서라도 더 이상 반항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게 되는 거니까."
말을 마친 켈리는 벽에 못 박힌 물체에게 총을 쏘았다. 그것의 몸이 잠깐 경직되더니 머리로 짐작되는 부분이 앞으로 쓰러졌다. 잠시 후 물체와 바닥에 떨어진 피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것을 벽에 고정시키고 있던 잡다한 소도구들만이 남았다. 믿기 어려운 증발이었다.
"너도 곧 그렇게 될 거야."
켈리는 어깨를 고정시키고 있던 붕대를 잡아 뜯었다. 총에 맞았던 팔을 움직여 본 켈리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다소 불만족스러운 한숨을 토했다.
"조금 낫긴 했는데, 역시 저 년으론 부족하군. 좀 더 죽여야 될까봐."
"그럼 저 여자를?"
"흥. 속 편하게 다 잊게 해서 '숙소'로 돌려보내라고? 방금 내 말은 뭐로 들었어? 빅헤드. 한 번 더 힘써줘야겠어. 교육이고 뭐고를 떠나서, 이 년도 한번 해체해놓지 않으면 분이 안 풀려."
켈리의 말을 들은 나는 소름이 오싹 끼쳤다. 해체라는 말에는 웬만큼 담이 크다고 생각했던 나조차도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눈앞에서 한 사람이 그 꼴로 사라지는 걸 지켜본 직후다. 어찌 태연할 수 있겠는가.
나는 질린 얼굴로 빅헤드라 불린 사내가 창가에서 일어나는 걸 보았다. 모자를 고쳐 쓴 빅헤드는 벽에 기대 세워져 있던 사람 키만 한 배낭에 손을 얹었다. 저 안에 '해체' 도구가 들어있는 걸까? 하지만 그는 배낭을 열고 줄톱 따윌 꺼내는 대신 켈리를 향해 난감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봐, 켈리. 해체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데, 사람을 그렇게 발라내는 것도 대단한 곤욕이라고. 아까 세실도 두 시간은 족히 걸렸지. 오늘은 쉬고 싶어."
"일류 해체업자의 이름이 울겠군. 언젠가는 열 댓 명도 거뜬했던 거 같은데?"
"내가 말하는 요지를 모르는군. 세실은 너희 조직이 부탁한 일이지만 저 여자를 해체하는 건 순전히 네 개인의 요구잖아. 내가 대가 없이 승낙해줄 인간이 아니란 건 잘 알 텐데."
"하."
켈리는 방금 전까지 세실이 박혀있던 기둥에 기대선 채 세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세 뭉치."
"적어."
"일주일은 피울 수 있는 양인데 왜 생색이야?"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피곤하다니까."
"좋아. 다섯."
"괜찮군. 내일까지 준비해."
"망할 새끼."
빅헤드는 켈리의 욕설을 비웃음으로 답해주고는 배낭을 어깨에 졌다. 크기만큼이나 무게도 상당해보였지만 그는 어렵잖게 배낭을 지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내 위로 빅헤드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렇게 가까이 와서야 눈앞의 사내가 얼마나 큰지를 실감한다. 나로서는 일어서도 가슴팍까지밖에 닿지 않을 만큼의 신장차였다. 빅헤드는 무릎을 굽혀 내 초췌한 모습을 보며 인상 좋게 웃었다.
"자, 아가씨. 몸에 힘 빼도 좋아. 어차피 직접 움직일 일은 하나도 없을 테니까."
거울이 있다면 바라보고 싶다. 내 얼굴은 틀림없이 창백하게 질려 있겠지. 새파란 입술을 한 채 생기를 모두 놓아버린 얼굴이겠지. 어차피 한 시간 뒤엔 얼굴이란 게 남아 있을지조차 의문이지만.
거듭된 상상 속에서 신경만이 바짝 타들어간다. 두통으로 핑핑 도는 시선을 들자 빅헤드가 가방 위에 매달린 지퍼를 여는 것이 보였다. 과연 저 안에서 뭐를 집을까? 도끼? 톱? 나이프? 머릿속에 떠오르는 날붙이들이 하나하나씩 내 몸을 조각내는 상상이 나를 소름 돋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겪었던 것 중에 가장 악몽 같은 기다림이다.
자신이 무엇을 하려는지 자각이나 하는 건지, 빅헤드는 소름 돋게도 휘파람까지 흥얼거리면서 가방 안을 뒤적거렸다. 저 남자를 이대로 내버려두면 나는 산 채로 회를 뜨이게 될 판이다. 젠장, 생각해! 원하는 대로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마법의 말은 없는 걸까. 혹시 꿈이라면 제발 이 즈음에서 땀에 젖은 채로 천장을 볼 수 있게 해줘!
하지만 빅헤드가 팔을 꺼낸 순간, 꽉 찬 머릿속은 폭풍을 맞은 것처럼 뻥 뚫려버렸다.
빅헤드가 꺼낸 건 면도칼이었다. 면도칼이라고 해도 그 대상이 황소라도 되는지 크기가 무지막지했다. 날이 시퍼렇게 서 있는 칼을 겁도 없이 허공에 던졌다 받기를 반복한 빅헤드는 칼날을 비스듬히 해서 내 목에 대었다. 차가운 금속이 열을 빼앗는 감촉이 느껴졌다. 그 것은 마음속에서 뭉쳐놓고 있던 공포를 현실 위로 떨어뜨리는 잔혹한 신호였다.
"보통 나는 비명을 지르게 내버려두는 편이지. 그래야만 자기가 겪는 고통을 더 실감할 수 있거든. 하지만 지금 나는 좀 피곤한 상태고 여자가 악쓰는 소릴 들으면서 작업하고 싶진 않아. 그러니 지금부터 먼저 성대를 도려내겠다."
빅헤드는 원생들을 가르치는 유치원 교사처럼 덤덤한 말투로 자신의 행동을 설명했다. 제풀에 지쳐 있던 나는 이렇다 할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그는 면도날을 조금 눕혀서 목젖을 겨냥하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할 말 있으면 해라."
칼날을 목에 겨누고도 조금도 떨지 않는다. 동정심이라곤 깨끗이 지워버린 이 남자는 내 유언을 끝으로 주저 없이 내 몸을 찢어발기겠지. 나는 이를 악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 이상 추한 생각하기도 싫다. 언젠가 비명을 지르며 살려달라고 울부짖게 된다 해도, 지금 당장만큼은 꿋꿋해지고 싶다.
나는 눈을 뜨면서 눈앞의 사내에게 똑똑한 발음으로 말했다.
"에스라트."
낡은 나무 손잡이를 잡은 두툼한 손이 잠깐 멈췄다. 행동을 멈췄다는 것에 대해선 멀리서 보고 있던 켈리 또한 마찬가지였으리라. 나는 전혀 의도 밖의 말을 꺼낸 스스로에게 놀랐다. 어째서 그런 단얼 말한 거지? 나는 닥치고 엿이나 먹으라고 말할 참이었는데.
빅헤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면도날을 치우고 내 턱을 치켜들었다. 서글서글한 눈매가 나를 똑바로 쏘아보고 있었다. 빅헤드는 여유가 가신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어떻게 내 이름을 아는 거냐."
마음 같아선 '아, 당신 이름이었어?'라고 빈정거렸을 테지만, 내게 그럴 만한 기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내가 힘없이 시선을 내리자 그는 내 멱살을 붙잡았다.
"말해!"
나는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빅헤드를 보았다. 이유가 궁금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마지막으로 욕이나 실컷 퍼부을 참에 문득 내뱉은 말이 당신 이름이었다고 말하면 믿어주기나 할까? 아무런 연상 없이 백지에서 곧바로 튀어나온 그 이름은 나를 빅헤드 못지않게 당황케 했다. 되풀이해 그 이름을 생각해봐도, 머릿속에서는 먼지만 한 기억의 파편도 건져지지 않는다. 빅헤드가 대답 않는 나를 한 번 더 다그치려 들 때, 바깥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일순간 방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옷 주름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귀에 들어올 정도였지만, 처음 그 침묵을 조장했던 총성은 정작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켈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발인가?"
하지만 총성이 몰고 온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거미다!" 건물 아래쪽에서 들려온 비명은 채 마무리되지 못하고 총소리와 함께 사그라졌다. 전투가 벌어진 게 분명할 정도로 복잡한 총성이 각지로 반사되어 시끄럽게 울렸다. 욕설을 내뱉으며 총을 꺼내드는 두 명 앞에서, 나는 '거미'라는 호칭에 찾아온 뜻 모를 익숙함을 이해하기 위해 애써야 했다.

 

 

* * * * * *

 

 

아래쪽이 소란스럽다. 총소리는 잦아들었지만 소강상태일 뿐인지, 거친 고함소리와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소리가 뒤섞여서 내 귀에 들어왔다. 불안한 마음에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보려 했지만, 그 곳에 계단이 있다는 것 외에는 더 알아낼 수가 없었다.
빅헤드는 가방을 세운 채 켈리에게 눈짓했다. 켈리는 총 한 자루를 들고 기민하게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마도 아래층으로 내려간 걸 테지. 계단을 내려가는 사람 특유의 침강하는 발소리가 들린다.
나는 빅헤드도 여기서 나름대로 침입자를 대비하리라 예상했다. 그러니까 어딘가에 숨어서 입구를 겨눈다던가, 그런 행동 말이다. 하지만 그는 내 기대를 깨트렸다. 빅헤드는 다른 곳으로 움직이는 대신 내 두 무릎 사이의 의자받침에 한 발을 올렸다.
"그럼 우린 계속 하던 얘길 해보도록 하지."
나는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이 남자가 제정신인가? 나는 바로 아래서 벌어지는 총격전까지 무시할 정도로 이름에 집착하는 빅헤드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허리를 굽혀 나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내 본명은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알려준 적이 없어. 20년 동안 누구에게도 말이다. 그런데 왜 외곽에 얼굴 한 번 비춘 적 없는 너 같은 여자가 내 이름을 부르는 거지? 지인 중에 똑같은 이름이라도 있는 건가?"
물론 그런 지인 따위 있을 리가 없다. 나는 앙칼지게 대답했다.
"몰라. 나도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도저히 모르겠어. 물어볼 게 그거뿐이라면, 일찌감치 포기하고 다른 할일이나 찾아보시지."
빅헤드는 목을 조금 꺾었다. 그렇게 그가 이쪽을 물끄러미 노려보고 있자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내 얼굴에서 뭔가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빅헤드는 몸을 뒤로 뺐다.
"그래?"
갑자기 눈앞에 뭔가가 날아들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물러나려다가 의자 째로 넘어갈 뻔 했다. 정신을 차린 나는 한 뼘 되는 거리에 검게 도색된 관이 내 쪽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빅헤드가 나에게 들이댄 것은 거대하고 긴 총이었다. 보통 머리에 그런 걸 겨누면 굳는 것이 정상일 테지만, 방금 전까지 면도날로 성대가 잘릴 뻔 한 나에겐 오히려 안심이 될 정도였다. 나는 그 모순적인 반응에 묘한 기분을 느끼면서 빅헤드에게 물었다.
"무슨 속셈이야?"
"선택권을 주겠다."
빅헤드의 목소리는 단조로웠다. 아까 전까지 흥분하며 멱살을 붙잡던 사람 같지는 않았다. 빅헤드는 그 거대한 총을 한손으로 들고 있으면서도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총구 끝을 내 이마에 대고 꾹 눌렀다.
"원한다면 한 방으로 고통 없이 끝내주지. 도로 잡혀올 수도 있겠지만, 운이 좋으면 여기를 벗어날 수도 있겠지. 아니면 의자에 묶인 채로 이번 삶을 조금 더 연명해도 돼. 하지만 내가 너를 해체하는 건 예정된 수순임을 명심해."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빅헤드의 제안은 거의 파격에 가까웠다. 이성적으로 본다면 당장 죽는 것이 옳다. 하지만 나는 이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을 남겨둔 채 죽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빅헤드가 내게 좀 더 너그러워졌다고 확신한 나는 조심스럽게 이유를 물었다.
"왜… 이렇게 대해주는 거지? 이름을 불렀다는 게 그렇게 큰일이었나?"
빅헤드의 눈빛이 희미하게 바뀌었다. 그리고 그 때를 맞춰 아래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전투가 재개되었다.
"으윽!"
"다시 온다!"
"죽여! 이 인원으로 한 명을 막지 못한다니 제정신인가!"
"크아아악!"
나는 총소리에 묻혀 들려오는 비명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놀랍게도 아래층은 단 한 사람의 침입자에게 유린당하고 있었다. 나는 빅헤드가 그들을 돕기 위해 내려가야 하지 않나 생각했지만, 그는 선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래쪽과 자신이 전혀 상관이 없다는 투로 평온하게 말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죽은 게 약 20년 전이지."
그 숫자의 길이는 묘하게 나를 질리게 했다. 이쪽은 태어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았다. 20년이 정확히 얼마나 긴 시간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벌어지는 살풍경으로 봐서 결코 짧은 인생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빅헤드의 말은 끝나지 않았기에 나는 딴 생각을 멈추고 주의를 그 쪽으로 돌렸다.
"그 때 무슨 이유로 죽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 다만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나는 심각하게 기억을 잃고 있었지. '숙소'의 방에 누운 채 떠올릴 수 있던 건 오직 내 이름뿐이었어. 에스라트. 그게 내 과거와 연결된 단 하나의 단서였다."
빅헤드는 천천히 자신의 옛이야기를 꺼냈다. 비명과 총성이 시시각각으로 빈도를 높여가며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는데도 저 남자는 조금도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내가 그 이름 대신 이 별칭을 얻은 건 바로 그 날 겪은 사건 때문이었어. 그 시절만 해도 이 지역은 아직 시의 손길이 닿아서 사람도 많고 북적거리기도 했지. 기억이 전무하니까 뭐라도 묻기 위해 근처의 가게에 들어갔는데, 우연히 거기 있던 건달과 시비가 붙게 된 거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거긴 술집을 위장한 매춘업소였지. 나처럼 막 태어난 얼간이를 받아줄 리 없었어. 어쨌든 나는 건달과 의도하지 않은 격투를 벌이게 되었고, 내가 그 놈의 나이프를 뺏어들었을 때 상황은 끝났다."
빅헤드의 손이 살짝 떨렸다. 20년이나 지났다지만 거기서 오는 느낌은 아직도 바라지 않고 생생했다.
"빅헤드의 의미를 알아? 머리를 제외한 전 부위의 피부가 발라내진 사람을 생각해봐. 뼈와 근육만 남은 몸에 멀쩡한 머리는 오히려 커 보이기 마련이지. 그 때 건달의 모습이 그랬어. 나도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 그 뒤로 몰려온 조직원들을 보고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 보스는 내 능력을 사서 자기 밑으로 끌어들였다."
"……."
"어쨌든 그런 시시껄렁한 이유 때문에 내 별칭은 빅헤드가 되었고, 외곽에서 발을 빼지 못한 채 지금까지 살아오게 된 거다. 그 사건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에, 내 이름은 빅헤드 하나만으로도 충분했어. 결국 진짜 이름은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한 채 20년 동안 내 머릿속에서만 잠들어 있던 거지."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빅헤드가 보였던 놀란 반응을 조금 이해할 것 같았다. 20년 동안이나 숨겨왔던 사실이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 이의 입에서 튀어나온다면, 누구라도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문득 나는 이마의 압박이 사라졌음을 알아챘다. 빅헤드는 어느 새 내 이마에 대고 있던 총구를 떼고 있었다.
"하지만 너는 내 이름을 알고 있었어. 비록 그게 무의식 속의 기억이었다 할지라도 말이지. 그 사실에 조금 감상적으로 된 것뿐이다."
잠깐의 망설임.
"…어쩌면 우리는 20년보다 더 전에는 서로 알고 있던 사이가 아닌가 하고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거대한 체구의 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묘하게도 그 시점에서 총탄의 비도 멈췄다. 더 이상 찢어지기를 멈춘 공기 속에서 튀어나간 탄피가 바닥을 구르며 공허한 소리를 낸다. 멀어서 잘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아마도 사람을 불러 모으는 듯한 목소리. 마침내 침입자를 잡은 것인가.
외부의 소음도 줄어들었다. 둘 다 더 할 말이 없었기에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생각에 잠겨 있는 빅헤드의 얼굴을 아까와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정말 나는 이 남자를 알고 있었던 걸까. 빅헤드란 음침한 별명을 갖고 사람들을 저미기 이전의, 에스라트라 불렸을 남자를.
어쩌면 우리는 지인 이상의 친구였을 지도 모른다. 누구보다 사랑하던 연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낭만적인 상상은 의자에 묶인 채 피투성이가 된 여자와 그 여자를 조각낼 준비를 끝낸 해체업자 앞에선 일언의 가치도 없는 얘기다.
결국 에스라트와 그를 알고 있던 여자는 모두 죽은 셈이다. 그리고 더 이상 부활하지도 않는다. 멋지군. 나는 정말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어도 살아나길 반복하는 이 불사의 세계에서는, 오직 망각만이 인간을 죽일 수 있다. 이에 비하면 그 붉은 경계를 넘어 돌아오지 못했다는 남자는 약과다. 그라는 존재는 켈리라는 불사의 인간에게 영원히 회자되고 말 테니까. 그녀가 망각으로써 그를 죽이지 않는다면.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에스라트."
아무 생각 없이 처음 그 단어를 내뱉었을 때와는 달리, 나는 빅헤드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 이름을 꺼냈다. 눈앞에 들려 있는 총구가 처음으로 떨렸다.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하면서,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의미 없는 대화였고, 의미 없는 시간이었다. 이다음에 깨어날 나는 또다시 백지에서 시작할 테니까. 지금의 내가 그렇게 이전의 인생들을 묻어버린 것처럼. 이제 한 번 더 에스라트란 이름을 망각할 때이다.
"날 죽여줘."

 

 

* * * * * *

 

 

예상대로 빅헤드는 망설이지 않았다. 이마에 다시 서늘한 감각이 오며 안전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빅헤드는 마지막으로 짧게 중얼거렸다.
"그럼."
방아쇠의 스프링이 찰칵 소음을 낸다. 내가 죽기 전에 총알의 감각을 느낄 수 있을까 생각하던 차에-.
탕!
귀를 세게 찌르는 소리에 어깨를 움츠린 나는 내가 그런 동작을 취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놀랐다. 혹시 호텔방에 돌아와 있나 싶어 살짝 눈을 떠 보지만 아까의 폐건물 그대로다. 다만 아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빅헤드가 내 눈앞에서 사라져있다는 것과 그 덕분에 그 뒤편의 기둥에 있는 총탄 자국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구멍에서 부스러기들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아 아까의 발포로 인해 난 자국이 틀림없다. 나는 빅헤드가 혹시 죽었나 의심했지만 그는 단지 내 정면에서 비켜났을 뿐 '숙소'로 돌아간 건 아니었다. 빅헤드는 다른 쪽의 기둥을 엄폐물로 쓰면서 내 뒤편에 있을 적을 향해 나에게 쏘려 했던 총을 쏘았다.
투두둑! 투두둑!
기묘한 발사음이었다. 하지만 곧 들어온 응사로 보아 맞추진 못한 것 같았다. 빅헤드는 칫 소리를 내며 기둥 뒤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사람의 민첩한 발소리가 내 뒤쪽에서 위치를 옮겼다. 결과적으로 상대와 빅헤드는 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한 셈이 되었다.
상대는 시야 밖에 있고, 빅헤드는 기둥 뒤로 숨었기에 내게는 두 사람 다 보이지 않고 있었다. 사이에 끼인 나 때문인지, 아니면 그 밖의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는 몰라도 둘은 모두 공격을 서두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잠시 지루한 침묵이 흐르던 중 빅헤드의 목소리가 앞쪽에서 울렸다.
"패거리를 따돌리고 온 건가. 대단한 능력이로군, 거미! 그 기지를 높이 사지. 마침 이쪽도 피곤하기는 마찬가지니, 서로 피 흘리는 일 없이 얌전하게 끝내는 게 어때?"
응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내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바닥을 타고 흘렀다.
"당신 말을 어떻게 믿지?"
"이봐. 내가 널 죽일 생각이었다면 저 편 건물에서 여길 관찰하고 있는 너를 봤을 때 당장 쏴버렸을 거다. 목적이 무엇인지는 대충 짐작이 가니, 네 볼일이 끝날 때까지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그러고 보니 빅헤드는 창가에 앉아있었다. 뒤에서 신음소리가 났다.
"괴물 같은 놈. 그늘에 숨어 있었는데, 그 거리를 맨눈으로."
"난 네 쪽이 더 괴물 같은데? 10년 가까이 사지를 뛰어다니면서도 한 번도 죽었다는 소문이 없지. 내가 너처럼 살았다간 한 달 만에 끝났을 거다."
"개소리 집어치우고 협조할 거면 밖으로 나오기나 해."
내 눈앞에 커다란 총이 떨어졌다. 잠시 후 기둥 뒤에서 빈손의 빅헤드가 걸어 나왔다. 등 뒤에 있던 남자는 그걸 보고 내 옆까지 걸어 나왔고,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던 상대의 모습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내가 호텔에서 죽였던 그 남자다.
나는 그 상황을 믿을 수 없어 눈을 깜빡였다. 설마, 의자에서 기절해 있던 동안 12시간이나 지났던 건가? 하지만 켈리의 성격으로 봐서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이유 없이 나를 묶어둘 리가 없다. 하지만 그런 근거리에서 총을 맞았는데 어떻게? 내가 의문에 빠져있는 사이 그 남자는 빅헤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내 포박을 풀었다. 몸이 자유로워진 나는 안도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곧 몰려오는 극심한 통증에 도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잡아요."
남자는 처음과 같이 고분고분한 말투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걸 잡고 일어나려 했으나 그렇게 버틸 힘이 없었다. 남자는 허리를 굽혀 내 겨드랑이 밑에 자신의 어깨를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보며 빅헤드가 코웃음 쳤다.
"역시 그 여자가 목적이었군. 어느 조직에도 어울리지 않고 겉돌던 녀석이 무슨 바람이 분 거냐? 지켜야 할 애인이라도 되나?"
"…의뢰인이다."
남자의 말에는 이상하게 힘이 없었다. 나는 그가 상당히 쇠약해진 것을 눈치 챘다. 방금 전까지의 격렬한 전투의 결과일까? 아니면…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배에 난 총 자국을 곁눈질했다. 옷을 물들인 피의 양으로 보아 의외로 옅은 상처인 모양이지만, 신경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일에는 철저한 남자인가. 좋은 품성이다. 질기게 살만 하군."
적에게 덕담을 건네는 행동이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남자는 으르렁거리며 빅헤드에게 총을 똑바로 겨눴다. 하지만 빅헤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능글맞은 표정을 지었다.
"쏴 보시지. 여기서 계속 총소리를 내봤자 네게 이득될 건 아무 것도 없어. 그것도 굳이 무저항인 상대를 죽이기 위해서 말이야."
옆에서 곧바로 신경질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그럼 못 쏠 줄 알았나?"
그러더니 남자는 정말로 빅헤드를 쏘아버렸다. 하지만 그는 그 반응을 예상했는지 가볍게 그 공격을 피했다. 뒤편의 콘크리트가 작은 원형으로 박살났다. 빅헤드는 회피하느라 굽혔던 허리를 들며 아까 버렸던 총을 도로 주워들었다. 나를 부축하고 있던 남자는 거기에 제대로 반응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된 남자는 딱딱하게 몸을 굳혔지만, 빅헤드는 그 총으로 남자를 쏘는 대신 자신의 배낭에 집어넣었다. 배낭을 고쳐 멘 빅헤드는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를 향해 피식 웃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 어차피 난 프리랜서니까 이 조직에게 보일 의리도 없고, 너에 대해서도 꽤 긍정적인 관심을 갖고 있는 편이다. 그리고… 그 여자도 상당히 흥미로워서 말이야. 방해하고 싶지 않아."
나는 그 말에 움찔했다. 빅헤드는 우리를 지나쳐 계단으로 나가는 대신 가까운 창문턱에 발을 댔다. 설마 저 쪽으로 나갈 생각인가? 바깥 풍경으로 미루어 짐작해볼 때 여긴 최소한 3층 이상이다. 하지만 뚫린 창문턱에 올라서는 빅헤드의 동작에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빅헤드는 뛰어내리기 직전 문득 생각이 난 것처럼 이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3번가의 무너진 2층 건물. 그 지하실에 내 임시 작업장이 있다. 참고해."
그 말을 남긴 채 빅헤드는 그 거구를 미련 없이 밖으로 던졌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그가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너무나 상식 밖의 행동이었기에 창밖을 흘긋거리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한편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펴 본 남자는 이 방에 우리 둘밖에 없는 것을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 상황을 정리할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남자의 어깨를 더듬어 내리고 싶다는 표시를 했다. 저 의자에 도로 앉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남자는 얌전히 나를 의자에 앉혔고 우리 둘은 어색하게나마 두 번째 대면을 하게 되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먼저 침묵을 깬 쪽은 남자였다. 그는 훈계할 꼬마를 내려다보는 식으로 콧바람을 뿜으며 내게 말했다.
"구하러 왔습니다."
무슨 반응을 보여도 궁색해지는 한 마디였다.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다소 부적절한 질문을 던졌다.
"죽은 게 아니었나요?"
"세상은 넓고 방탄복도 많지요. 그래도 근거리에서 맞아서 좀 타격이 컸습니다. 정말… 당신 상대하면서 웬만한 일에는 이골이 났는데 총까지 쏠 줄은 몰랐군요. 무의식중에 점점 총기에 익숙해져서 그런 건가."
남자는 그 때 일을 회상하며 노골적으로 넌더리를 냈다. 그래도 저 정도 불평이면 오히려 미안해진다. 쏴 죽여도 할 말이 없는 판국에 구출까지 해줬으니까. 하지만 이유가 의심스러운 호의를 계속 받아주는 것도 내 성미엔 맞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기억은 돌아왔습니까?"
마침 남자가 내가 신경 쓰고 있던 부분에 관해 물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난 여전히 의뢰 같은 건 모르겠고, 당신이 이렇게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날 구출하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아요. 어떻게 여기까지 추격했는지는 몰라도 차라리 이번의 나는 죽게 놔두고 다음의 나를 데려가는 게 더 편한 방법 아닌가요?"
"편하긴요. 죽으면 죽을수록 옛 기억은 떠올리기 점점 더 힘들어집니다. 설득하기 어려운 건 둘째치고라도, 당신은 이 방에 와 있는 시점에서 이미 조직의 그물 안에 들어온 겁니다. 죽는다 해도 조직원들이 '숙소' 앞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으면 빠져나갈 방법이 없죠. 그렇게 될 바에야 최대한 일찍 빼내는 게 이롭습니다."
내 두 눈이 약간 가늘어졌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어딘가 편리하게 화제를 바꿔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남자도 그걸 느꼈는지, 서둘러서 말을 돌렸다.
"아무튼 여기서 머뭇거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총소리도 났으니 유인했던 조직원들이 도로 몰려올 겁니다. 그 전에 빨리 빠져나가죠."
백 번 옳은 말이다. 나는 의자 등받이를 잡고 한 번 더 일어나려 애썼다. 아까보단 힘이 많이 들어갔지만, 여전히 몸은 찢어지게 아팠고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
"으윽."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몸이 한심스러웠다. 눈앞에서 계속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도와달라고 하는 것 같아서 싫다. 나는 억지로 몸을 의자에서 떼어냈지만, 그 바람에 오히려 바닥으로 우당탕 넘어지고 말았다. 남자는 한숨을 쉬며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앞으로 고정시키고 대신 나를 들쳐 메었다. 또다시 도움 받는 신세가 된 나는 얼굴을 붉히며 객기를 부렸다.
"괜찮아요. 내려놔요! 혼자 걸을 수 있어요."
"걷는 거론 안 됩니다만. 제가 뛰는 것보다 빨리 달릴 자신 없으면 얌전히 업히십시오."
"총도 맞은 사람이 뭐 잘났다고 사람까지 짊어지고 뛰어요? 문제없으니까 그냥 내버려둬요."
"후들대는 다리로 강한 척 하지 마시죠. 미안한 줄 알면 그냥 입 다무시기 바랍니다."
"그, 그런 걸 일일이 지적할 필욘 없잖아요! 아아, 정말 매너도 더럽게 없어!"
정곡을 찔린 탓에 황급히 반발한 나는 내가 말을 꺼내놓고도 황당해졌다. 거기서 매너가 왜 튀어나와? 남자는 내 말을 듣더니 소리 내어 웃고는 등에 진 나를 똑바로 했다.
"미안하게 됐군요. 레이디. 그래도 내려줄 생각은 없으니 이만 타협을 보지 않겠습니까? 네, 그럼 내려가도록 하죠."
남자는 내 대답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나 스스로 말문을 막아버린 꼴이 된 나는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아, 정말 입이 원수야. 왜 이런 말도 단속하지 못할 정도로 긴장을 풀어버렸던 거지. 나는 내 이마에다 주먹을 대는 것으로 반성을 대신했다.
잠잠하던 주변에 바람이 생겨난다. 조금 힘겨워 보이긴 했지만, 남자는 미완성된 건물을 빠르게 내려갔다. 지나치는 아래층에선 군데군데 격렬한 전투의 흔적이 보인다. 주인을 잃고 내던져진 총기들. 충실하게 엄폐물 역할을 수행해 수많은 실금들을 새긴 기둥들. 나 때문에 이런 일을 벌였다고 생각하니 조금 울적해졌다. 한편 아무렇게나 모아둔 듯한 옷가지들이 군데군데 점처럼 버려져 있는 걸 발견한 나는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저건?"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질문이었지만, 남자는 질문의 요지를 능숙하게 집어냈다. 그는 옷가지들의 정체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죽은 뒤의 소지품이죠. 몸은 '숙소'로 돌아가지만 옷은 그렇지 않으니까요. 죽은 자리에 그대로 남겨집니다."
"아아."
나는 멍하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세실이 켈리의 총탄 한 방에 사라졌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남자도 쓰러지긴 했지만 시체는 온전히 남아있었다. 그 시점에서 이미 살아있었단 걸 깨달았어야 하는 건데.
남자가 유품이랍시고 건네줬던 구멍 난 셔츠도 생각났다. 나도 그 옷만을 남기고 숙소로 사라졌겠지. 나름대로 내 최후랍시고 나풀나풀 거리며 떨어지는 빈 옷을 상상하자 왠지 기분이 나빠졌다.
"……."
문득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설마 새로 태어난 나에게 그 옷을 던져준 게 이번만의 일은 아니겠지…?
나는 눈썹을 찌푸리며 남자에게 그 사실에 대해 추궁하려 했다. 하지만 남자는 놀랍게도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먼저 푸념했다.
"네, 꽤 됩니다. 안 그러면 이 후진 동네에서 여자 옷을 무슨 수로 구하겠습니까? 어차피 땀 같은 노폐물도 죽을 때 같이 사라지니 기분 나빠할 것까진 없어요. 하긴 빨래를 해준 적은 없지만."
그러더니 남자는 목을 돌려 내 표정을 흘긋 보고는 예상대로라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일 것이다.
"어떻게 당신 생각을 알았는지 궁금한가 보군요."
'당연하지!' 라고 소리쳤다. 물론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 내 부루퉁한 얼굴을 보았는지 남자는 쿡쿡대며 말했다.
"사실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똑같은 패턴을 벌써 세 번이나 겪었으니까요. 이제 고함을 빽 지르고 짜증만 내시면 됩니다. 대충 대처법도 파악하고 있거든요."
"대처법?"
남자의 말에 나는 순간 화내는 것도 잊고 순수한 호기심이 들었다. 그 대처법의 대상이 다름 아닌 나이니 당연한 일이다. 나는 몸에 살짝 도는 긴장을 느끼면서 남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떻게 했기에 내가 잠잠해졌다는 걸까? 내 짜증을 받아내려면 보통 일론 안 될 텐데-.
약간의 흥분을 느끼던 차에, 남자가 말했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빈 다음에 깨끗하게 잊으면 됩니다."
…….
딸꾹.
가벼운 딸꾹질이 든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물론 입을 막는다고 딸꾹질 자체가 안 나오는 건 아니다. 소리를 내지 못한 딸꾹질은 대신 등으로 올라가 작게 작게 들썩거렸다. 딸꾹. 딸꾹. 물론 몸을 맞대고 있는 남자도 그 진동을 느낄 것이다. 이 남자는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얼굴이 너무 달아오른다. 나는 여전히 입을 막은 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이런 반응을 보이려던 게 아닌데. 하지만 대답이 너무 우스웠다. 싹싹 빈 다음에 까먹는다고? 그게 뭐야. 그런 건 허영심만 강한 철없는 말괄량이한테나 보일 법한 대처법이잖아.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우스웠던 것은… 그 말괄량이에 나를 이입시켜보니, 묘하게도 그 상황을 납득해버렸다는 점이다.
"…하하."
나는 마음속의 웃음을 밖으로 꺼내보았다. 그러자 남자도 같이 쿡 하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 반응이 마음의 족쇄를 풀어버려서, 나는 남자의 뒤통수에 이마를 대고는 한심한 웃음을 마저 풀어버리고 말았다.
"하하, 아하하핫! 아하하하하!"
온몸에 짜릿한 기운이 돌아 간질거린다. 나는 폭소하며 고개를 치켜들어 얼굴로 덮쳐오는 바람을 만끽했다. 얼굴의 열기가 뒤쪽으로 빠져나가서 기분이 좋다. 소리를 내서 좋을 것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바람 소리를 반주 삼은 그 웃음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기쁨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렇게 우스운 말도 아닌데, 가슴에 퍼지는 이 따뜻함은 뭘까. 그건 정말 나에게만 들어맞는 농담이다. 내가 아니면 그 설명이 그렇게 웃기게 들렸을 리가 없지. 거기에선 나를 오랫동안 알아온 듯한 남자의 배려가 느껴진다. 정말, 그렇게까지 말해버리면 의심하고 싶어도 의심할 수 없어지잖아.
조그만 감정이었지만, 그것으로 저울이 기울었다. 타인을 믿지 않는 성격인 나도 이 남자만큼은 어떻게든 괜찮을 거란 원인 모를 확신이 든다. 나는 짧게 웃으며 그동안의 경계 섞인 태도를 버리고 남자의 등에 이마를 기댔다. 땀에 젖은 피부 위로 남자의 체온이 느껴진다. 뜨겁다.
"그래요. 그럴 듯 하네요. 먼저 얘기를 했으니, 특별히 용서해주겠어요. "
나는 일부러 건방진 투로 대답했다. 남자는 개의치 않는다. 나는 돌아올 말을 듣지 않고 눈을 감았다. 숨 쉬는 데에 집중하고 있는 그의 입 대신, 딱딱하게 건물을 울리는 발소리가 그 대답을 대신하고 있다. 한 사람을 짊어진 채 상처까지 입은 상태에서도 신속한 그 걸음은 남자가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맥락이 닿지 않는단 걸 알았지만,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봤자 어색할 뿐이란 걸 느꼈지만, 그래도 나는 진심을 담아 남자에게 속삭였다.
"이제 와서 이런 말 할 자격 없는 거 알아요. 하지만… 그 때 당신이 죽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갑자기 밝은 빛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자, 꺽다리 건물들에 갇혀 빛을 보지 못하는 초라한 골목이 보였다. 건물을 빠져나오고도 한참을 간 모양이다. 밝은 부분은 금방 사라졌다. 어둡고 좁은 통로만을 골라 한동안 달리던 남자는 어느 구석진 구역에 들어가고 나서야 나를 내려놓고 숨을 돌렸다.
"후욱! 후욱…! 하아."
남자에게서 떨어진 나는 벽에 기대섰다. 다리가 후들거리긴 했지만 어떻게든 주저앉는 것은 면했다. 골목의 앞뒤를 거칠게 둘러본 남자는 일단 안전하다고 느꼈는지 편한 자세로 바꾼 채 뚝뚝 끊어지는 말투로 말했다.
"일단은… 꽤… 벗어난 것 같군요. 하아! 그래봤자 아직… 안심할 수 없는… 범위긴 합니다. 조금만 쉬었다가, 휴, 다시 출발하도록 하죠."
나는 안도감을 느끼며 똑바로 서기 위해 노력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이럭저럭 걸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제 혼자 설 수 있을 만큼 회복된 나와는 반대로, 하얗게 변한 남자의 얼굴에선 땀이 비 오듯 떨어졌다. 그런 남자가 안쓰러워 보여 무심코 땀을 닦아주려 하던 차에, 아까까지의 태도를 뒤집고 갑자기 친절하게 굴려 하는 내 모습을 느끼고 재빨리 내밀던 손을 집어넣었다.
"……."
쪽팔린다. 나는 망을 핑계 삼아 거리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손을 도로 뺀 행동 자체도 부끄럽긴 하지만, 그보다 갑자기 이상한 미소를 짓기 시작한 남자가 더 마음에 걸린다. 나는 얼굴을 붉히며 유들거리는 남자를 쏘아붙였다.
"뭐, 뭐가 웃겨요?"
"오, 죄송합니다. 제가 웃었습니까? 힘들어서 찡그린 것뿐인데."
아까까지 한 생각 다 취소다. 이 남자는 호텔에서 진작 죽여 버려야 했다. 켈리한테 손가방을 뺏긴 것이 못내 아쉽군. 속으로 이를 갈던 나는 문득 그 직전에 켈리와 나눴던 대화가 생각났다. 나는 황급히 쉬고 있던 남자를 불렀다.
"어, 당신."
"거미라고 불러요. 뒷세계 호칭이긴 하지만."
나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빅헤드도 그렇고, 여기 인간들은 왜 이렇게 별명 짓는 꼴이 구리구리한 거야. 나는 일부러 그 이름을 건너뛰고 말을 이었다.
"아무튼 물어볼 게 있어요. 그러니까, 당신은 과거의 제가 처음 의뢰를 맡긴 때를 기억하죠?"
"예. 그 이후로 죽은 적이 없으니까요."
"좋아요. 그럼 혹시 그 때 죽고 싶다거나 아무튼 뭐, 그런 자살에 관한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거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는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던 대답을 했다.
"아니요."
"젠장! …아아니, 별 일 아니에요.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아무튼… 그러면 이 도시의 경계선에 대해선 알고 있는 게 있어요? 그걸 넘으면 어떻게 된다던가, 예를 들어서 되살아나는 일 없이 완전히 죽는다던지…."
횡설수설거리긴 했지만 거미는 내 말의 요지를 알아들은 것 같았다. 그는 팔짱을 낄 만큼의 여유를 회복한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착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경계를 밟는다 해서 완전히 죽는 건 아닙니다. 다만 '숙소'가 다른 곳으로 바뀔 뿐이죠. 기억도 대부분 잃기 때문에, 거의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도심에는 그런 자들을 위한 구제제도가 잘 갖춰져 있으니까 큰 문제는 없습니다. 하지만 장소를 이곳에만 한정시켜 생각해본다면 완전히 죽는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겠군요."
거미의 대답을 듣고 난 나는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완전한 죽음'이니 뭐니 같은 건 착각이었을 뿐이다. 나는 그저 켈리의 정체를 조금이라도 일찍 알아낼 수 있었다는 데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기절해서 끌려갔다는 데에는 달라질 게 없지만, 적어도 한 방은 먹일 수 있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런 얘길 하는 걸 보니 기억이 돌아온 모양이죠?"
"…그건 아니에요. 조금 들었을 뿐이죠."
기억 얘기가 나오자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나는 그 기분을 씻어내기 위해 의식적으로 말을 돌렸다.
"이 도시… 에덴 시는 핵전쟁 이후 유일하게 살아남은 곳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경계를 벗어나면 낙진 때문에 증발해버린다고도 하고. 하지만 당신 말을 들으니 사실인 것 같진 않군요."
켈리에게서 그 말을 들었을 때도 느꼈지만, 방사능 따위로 사람이 '증발'할 리는 없다. 게다가 '숙소'까지 뒤바뀐다는 것을 보면 뭔가 더 복잡한 일이 얽혀있는 게 분명하다. 거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을 속여 넘기기 위한 편리한 핑계입니다. 핵전쟁 따윈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에덴보다 큰 도시도 많고, 나라도 존재하죠. 에덴의 인구는 그에 비하면… 뭐… 육만 분의 일 정도 되겠군요."
나는 살짝 충격을 받았다. 결국 에덴 밖의 세상은 있었다. 그렇다면 도시를 탈출하고자 했던 과거의 내가 지향했던 목적지는 분명하리라.
하지만 왜? 뭐가 다르지? 어째서 에덴만 그 거대한 집단에서 떨어져 나온 채 자신 외엔 누구도 없다는 식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있는 걸까?
"에덴은 뭐죠?"
나는 머릿속에서 불거져 나온 말을 툭 던졌다. 거미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대꾸했다.
"불사의 도시입니다. 그리고 불로의 도시죠. 에덴이란 이름에 걸맞은 곳이랄까."
거미의 말은 비꼬는 듯 하면서 두루뭉술했다. 뭔가 다른 설명이 뒤따라오길 기대했던 나는 거미가 말을 마친 걸 보고 황당해졌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따지려던 차에 거미가 나를 쏘아붙였다.
"그리고 어차피 그런 건 중요하지 않잖습니까? 의뢰 내용을 생각해보시죠. 요는 이 에덴에 사는 사람이라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이 도시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겁니다."
거미는 뒷말을 강하게 덧붙였다.
"절대로."
나는 인상을 굳히며 입을 다물었다. 얘기를 좀 더 파 들어갈 참이었는데, 그 단어가 주는 심란함이 예정을 지워버렸다. 에덴이라는 새장 속에서 끝없이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하는 미래를 생각하자, 바닥없는 늪 속에 머리부터 들이미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러고 보면 나란 존재는 대체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던 걸까. 부모도, 유년도 기억나지 않는다. 내게 남은 필름은 앞부분이 뭉텅 잘려나간 중반부터다. 그리고 그 반대쪽 끝은 무한히 뻗어 닿을 리도 없는 곳이지. 나는 빅헤드의 이번 삶이 20년째라는 말에 놀라했던 자신을 비웃었다. 중간의 수명이 무슨 상관이람. 어차피 영원히 산다는 점에선 별로 다를 것도 없는 인생이면서.
처음 욕실에서 느꼈던 위화감이 고스란히 돌아왔다. 이 세계는 어딘가 잘못되어 있다. 얼마나 깊은 곳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모르는 내 가치관들은 에덴 속의 삶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미래가 없어 괴롭다' 따위가 아니다. 엉성한 TV 속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내 가슴은 그 모든 걸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하게 주장하는 듯 했다.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그런 걸 아는 거죠?"
안정된 호흡을 찾아가던 거미는 고개를 들었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를 추궁했다.
"솔직히 말하죠. 아무리 봐도 당신은 뒷골목 깡패 이상으로 보이지 않아요. 뭐 나름대로 수완은 좋은 모양이지만, 그거랑 이건 별개잖아요?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죠?"
내 말을 들은 거미는 피식 웃었다. 비웃는다는 느낌이 나는 그런 조소였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기분이 나빠지기보다 의미심장한 기시감을 느꼈다. 어디서 저 미소를 봤지? 아마도 호텔에서 처음 그를 봤을 때, 내가 의뢰인이 누군지를 묻자….
"당신이 알려준 겁니다."
…또 이런 귀결인가.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내가 했다는 행동을 자꾸만 남에게 확인받아야 한다는 게 바보 같아서 싫었다. 하지만 궁금증을 삼킬 수 없던 나는 결국 거미에게 힘없이 되물었다.
"내가요?"
"네. 사실 당신만큼 이 도시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제게 그런 의뢰를 할 수 있었겠습니까. 당신은 그것을 성공시킬 지식이 있었고, 필요한 만큼을 제게 넘긴 겁니다."
"그런…."
나는 말꼬리를 흐렸다. 거미가 계속해서 얘기해주는 내 과거는 너무나 이질적인 것들뿐이었다. 기억나지 않는 옛날의 자신이 나와 동떨어진 타인처럼 느껴져 갔다.
애초에, '그녀'가 나인가? 같은 몸과 같은 정신을 선점했다는 이유만으로, 이후의 나에게까지 자신의 길을 강요할 자격이 '그녀'에게 있는 건가? 사람이 과거의 기억에서 현재의 동기를 끌어내는 거라면, 이미 그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 '그녀'와 나는 별개의 존재가 아닐까.
나는 애써 진정되었던 머리가 다시 혼란해지는 걸 느꼈다. 이대로 거미를 따라가는 것이 옳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제는 그를 신뢰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설령 이 도시를 벗어난다 해도, 그리고 그 곳에 지금보다 훨씬 나은 삶이 기다리고 있다 해도, 나는 이런 마음가짐으로 그 행운을 누릴 자신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억지로 떠밀려 간 곳에서도 행복을 주워 담을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는 내 안의 뭔가를 영원히 되찾지 못하게 될 것 같아서, 그것이 두렵다.
"숙여!"
뭐? 생각에 빠져있던 나는 거미가 내 얼굴을 향해 손을 뻗는 것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놀란 것도 잠시, 내 머리를 붙잡은 거미는 그 손을 사정없이 내리눌렀다. 악 소리를 내려던 나는 머리 위로 지나가는 무언가를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오늘 하루 동안 질리게 봐서 설명하고 싶은 마음도 안 드는 물체다. 거미는 짧은 욕설을 내뱉었다.
"찾았다! 거미가 이쪽에 있어!"
총알이 날아온 쪽에서 조직원인 듯한 자의 외침이 들렸다. 앞으로의 전망을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해진다. 하지만 거미는 내가 잡생각에 빠져있을 틈을 주지 않았다. 총알이 날아온 쪽으로 응사한 그는 곧바로 나를 붙잡고 골목을 뛰쳐나왔다.
"제길, 생각보다 일찍 들켰군! 서두릅시다! 포위망이 만들어지면 빠져나가기 힘들어요!"
좀 낫다 싶어지자마자 혹사되는 몸이 아우성을 쳐댔다. 나는 거미의 손을 뿌리치고 그 자리에서 비명을 지르고 픈 욕구를 느꼈다. 한 번 더 죽어도 되니까 이런 고생은 제발 그만 좀 시켜! 하지만 거미는 어디에서 났는지 불가사의할 정도의 힘으로 나를 끌어당겨 뒤쳐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얼기설기 세운 판자 위를 누덕한 종이가 기우는 헌 벽들이 난다. 낙오된 포석 위를 이름 모를 풀꽃이 메우는 돌바닥이 난다. 냉혹한 힘의 논리로 움직이는 자들의 거주지지만, 여기에서만큼은 소박한 정겨움을 느낄 수 있을 법한 풍경이다. 그러나 그 풍경을 5초 만에 주파해야 하는 나로서는 정말 죽을 심정이었다. 나는 턱까지 올라오는 심장 소리를 느끼며 남자에게 애원했다.
"자… 잠시만…."
"시간 없습니다!"
내 부탁을 일갈로 끝낸 거미는 아예 내 다리와 등을 잡고 통째로 들어올렸다. 깜짝 놀란 내가 항의하기도 전에, 거미는 몇 단계 발판을 밟고 올라가 나를 한 건물의 열린 2층으로 던져 넣었다. 뒤이어 2층의 난간을 잡고 올라온 거미는 쓰레기 더미로 된 발판들을 발로 차 쓰러뜨렸다. 워낙 잡동사니가 많은 골목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단서가 없는 한 추격자들은 골목을 따라 계속 이동할 것이다. 대충 그렇게 합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나는 거기에 맞춰 반응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 정말 무슨 짓이…!"
나는 말을 멈추고 허리를 잡은 채 헉헉거렸다. 온몸의 뼈마디가 새로 조립되는 소리가 들렸다. 게다가 주인 없는 건물의 바닥은 먼지로 가득했다. 나는 순식간에 검어진 옷과 손바닥을 보고 최악의 기분을 만끽했다.
우리가 올라온 곳은 정확히는 인테리어상 바깥으로 돌출시켜놓은 1층과 2층의 경계선이었다. 당연히 사람이 움직이도록 만든 공간이 아니었고 몸을 추스르던 나는 하마터면 아래로 떨어질 뻔 했다. 그런 나를 붙잡아 올린 거미는 신속하게 좁은 길을 따라서 모서리로 이동했다. 우리가 골목과 수직인 방향의 벽까지 돌아갔을 때, 뒤에서 큰 고함소리가 났다.
"빌어먹을, 놓치지 마!"
"이번에야말로 잡히면 회를 떠버릴 테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고함소리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리고 있었다. 우리가 달려온 골목과 같은 곳으로 들어선 게 틀림없었다. 내가 당황해하는 사이 거미는 침착하게 지형을 살폈다. 그는 벽면의 움푹 들어간 부분에 나와 자신의 몸을 쑤셔 넣었다. 벽면이 직각으로 네 번 꺾여서 만들어지는 그 좁은 틈은 두 사람이 간신히 설 수 있을 만큼 좁았다. 어깨를 잔뜩 좁힌 채 긴장하고 있던 나는 발소리가 바로 옆에서 멈추는 걸 느꼈다. 우리가 밟고 올라왔던 그 쓰레기더미 근처다.
사방이 꽉 막혀 있어 내가 떨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잔인하게 뜯겨 있던 세실을 생각하니 쉽게 진정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거미는 조용히 권총을 양손으로 쥔 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남자의 담력은 끝이 의심스럽다.
"어떡하지?"
"여기서 더 찢어질 순 없지. 이쪽으로 가자!"
발소리가 다시 움직였다. 다행히 뭔가를 타고 올라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나는 그걸 황급히 도로 들이켰다. 우리의 시선 앞을 유유히 지나가는 조직원들의 등이 보였기 때문이다.
수평 거리만 따지고 보면 코앞이나 다름없는 위치다. 아까까지는 용케 들키지 않았지만, 저들이 뒤돌아보기만 한다면 건물 2층 위에 서 있는 우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도박에 강한지는 시험해본 적이 없어서 모른다. 결과를 확인하고 싶지 않던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은 운을, 그리고 이 남자를 믿을 수밖에 없다.
조직원들이 도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쿵쾅쿵쾅. 쿵쾅쿵쾅. 아니, 이건 내 심장 소리인가? 진정할 수 없던 나는 손에 집히는 것을 꽉 붙잡았다. 그것이 거미의 빈손이란 생각도 들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이건 놀랄 필요 없다는 듯이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다. 안정을 전해받기엔 충분한 물건 아닌가. 살며시 숨을 죽이고, 가슴을 가라앉혀서, 너무 가라앉은 나머지 그대로 기절해서 앞으로 쓰러지는 게 아닌가 생각할 즈음에-.
"갔습니다."
거미의 단조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떴다. 골목은 비어 있었다. 온몸의 힘이 풀린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픈 충동을 느꼈다. 거미는 손을 들어 그런 나를 막고 먼저 아래로 뛰어내렸다. 관리하지 않아 수풀이 무성한 마당에서 거미는 이쪽을 향해 양팔을 내밀었다. 나는 거의 떨어지다시피 해서 뛰어내렸고, 거미가 받쳐줬음에도 불구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거미는 아까처럼 나를 재촉하지는 않았다. 나는 벽면을 짚으며 일어나 숨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아니요. 당신은 적어도 다섯 시간은 묶여 있었습니다. 그 몸으로 이렇게 뛴 것만 해도 기적이죠. 그러면 지금은 조금 천천히 가봅시다. 눈여겨둔 장소가 있습니다."
거미는 내 미적거림을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넘겨버리곤 태연히 나를 안내했다. 벽과 건물 사이를 머뭇대지 않고 걷는 그의 모습은 이 주변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지금은 무작정 따르는 것 외엔 다른 방도가 없다. 한심하군. 나는 수풀을 헤쳐 걸으며 자학에 가까운 태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갑자기 바늘 같은 통증이 느껴져 이빨을 도로 떼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강한 척 하지 마시죠.'
거미의 말이 무섭게 뇌리에 꽂혔다. 이번엔 농담이 아니다. 물론 변명해볼 수는 있다. 내 입술은 켈리가 뺨을 후려친 덕에 잔뜩 망가져 있었으니까. 그러나 사정이 어찌됐든 나는 고통을 인내하지 못하고 포기해버렸다. 자신의 각오를 다지고자 했던 행동마저 그렇게 좌절당하자 나는 자기혐오를 숨길 수 없어졌다.
상황은 우울했다. 쫒고 쫒기며 위험한 상황을 만들어낸 원흉은 나인데 정작 나 자신은 그런 위험을 만들어야 했던 이유조차 모르고 있었다. 망각으로 죽였던 '그녀'가 망령으로 살아나 나를 인형처럼 다루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녀'가 만든 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 거미의 손을 뿌리쳐봤자 내게 닥칠 운명은 조직에게 도로 끌려가 해부당하고 노리개로 전락하는 끝 모를 삶뿐이다. 거미 역시 더 나을 건 없다. 그는 내가 아니라 '그녀'의 의뢰를 받고 행동하고 있으니까.
아무도 내 의견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무도 내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도시 하나로 점찍을 수 있는 이 좁은 세계에서조차 나는 혼자다.
세상은 내가 나로서 존재할 것을 원치 않는데, 유일한 아군인 나는 정작 잠깐의 고통도 참지 못해서 입을 떼버리는 나약한 모습만 보이고 있었다. 거기에서 한줌의 자기애조차 집을 수 없다는 사실이 내겐 너무 슬프게 느껴졌다.
"……."
해가 졌다.
도시 위에는 태양이 감춰놓고 있던 별빛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많지는 않지만 구름 대신 하늘을 장식하기엔 충분한 수다. 그나마 살아있는 가로등들이 비춰줄 이를 찾아 하나씩 점등되었다.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검은 거리에서 그 새하얀 빛은 어쩐지 을씨년스럽다.
이제 발소리와 고함소리, 욕설이 혼재하던 공간은 사라졌다. 사람이 지나다니라고 만든 곳인지 의심스러울 만큼 불편한 거리에 남은 것은 오직 우리 둘뿐이었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골목 안에서 거미는 멈춰 섰다.
"여기서 잠깐 쉬죠. 더 걷기가 힘들군요."
그것이 바닥난 체력을 의미하는 건지 발끝도 보기 힘들 만큼 어두운 시야를 얘기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전자일 것이다. 나는 더듬거리며 거미의 맞은편에 앉았다. 더러운 것도 개의치 않고 다리를 쭉 펴자 거미의 무릎이 발에 닿는다. 길은 그 정도로 좁았다.
길 자체는 어둡긴 했지만 골목을 이루는 건물의 위쪽은 그나마 푸르스름하게 보였다. 정확히는 5층 위부터다. 그 아래의 어둡고 축축한 분위기는 내가 갇혀있던 방을 수십, 수백 배로 늘려놓은 것 같았다. 멀쩡한 사람도 폐쇄공포증을 느낄 법한 곳이니 우연히 사람이 지나다닐 일은 없을 것이다.
"내일만 조심하면 될 겁니다."
거미는 서두를 자른 채 무미건조하게 계획을 설명했다. 그 외에 신경 쓸 건 없다는 투였다.
"우리는 목적지까지 매우 가까운 데 와 있습니다. 운이 좋다면 내일 오후에는 경계선에 다다르게 됩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이 추적자들이군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집요한 추적입니다. 혹시 짐작 가는 이유가 있습니까?"
거미의 말에 내 머릿속에는 켈리가 떠올랐다. 빅헤드와 주고받은 대화를 보면 그녀는 조직 내에서도 상당한 위치에 있는 것 같다. 만일 켈리가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거라면 그녀가 이 추적을 선동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예상을 말하지는 않았다. 나는 어깨를 조금 움츠리며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얘기했다.
"몰라요.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뭐죠?"
"이대로 내 기억이 돌아오지 않으면 어떡할 거죠?"
보이진 않았지만 나는 거미가 주춤거렸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잠시 할 말을 생각하는 듯, 침묵만을 보내던 거미는 빈말을 중얼거렸다.
"그건 당신 개인의 문제이지 제가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닌 것 같군요."
"그러면 조금 질문을 바꿔보죠. 내가 예전의 나를 떠올리지 못한다 해도 당신은 날 에덴 밖으로 보낼 건가요?"
거미는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는 처음부터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잠시 뒤 어둠 너머에서는 못 내켜하는 듯한 극히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예."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거미의 소극적인 화법은 나를 조금 화나게 했다. 하지만 그 반응은 내가 그로서는 밝히고 싶지 않은 사실에 계속 근접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나는 끈기를 갖고 거미에게 계속 질문했다.
"도대체 그 대가로 예전의 저에게 무엇을 받기로 한 거죠? 돈? 명예? 권력?"
"그건 목표로는 좋지만 소유물로는 쓸모없는 것들의 대명사군요. 안됐지만 당신은 부자도 아니었고 귀족도 아니며 정치인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전 딱히 보수 때문에 일을 하는 건 아닙니다."
"보수 때문이 아니라고요? 그럼 애초에 의뢰라는 말을 쓸 필요가 없지 않았나요?"
"…그만하시죠. 피곤한데 말다툼해서 서로에게 이득 볼 것 없습니다."
짜증스럽게 대화를 끊는 거미의 목소리에는 고단함도 함께 묻어있었다. 그 피로를 느낀 나는 이대로 계속 묻는 것이 괜찮을지 망설여졌다. 어쨌든 유일한 조력자를 괴롭혀서 좋을 건 없으니까.
그러나 나는 거미를 조력자로 여겨야 한다는 사실 자체에 의문을 품고 있는 것이었다. 이대로 그가 '그녀'의 의뢰를 실행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건 나에게 떳떳하지 못한 일처럼 느껴졌다. 낮의 고뇌를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움직여야 할 시간이었다.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뇨. 전 알아야겠어요. 당신이 정말로 누구인지, 예전의 나와 무슨 거래를 한 건지, 이렇게 해서까지 나를 바깥으로 보내야 하는 이유가 뭐가 있는지 전부 말이에요. 말 해봐요. 어차피 기억을 되찾을 때 떠올릴 거라면 밝히지 못할 것도 없잖아요?"
거미는 입을 닫았다. 세 번째 침묵이었다.
나는 대답이 돌아와야 할 시간이 훨씬 지나고도 아무 반응이 없자 분노했다. 발끈하여 거미에게 따지려던 나는, 그렇게 해봤자 거미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며 서로에게 불유쾌한 기억만을 만들 것이란 걸 깨닫고 그만두었다. 그 대신 나는 항의의 의미로 무릎을 억지로 접어 내 앞에 갖다놓았다. 이제 거미와 내 몸이 겹치는 부분은 없어졌다. 조금 관절 부분이 쑤시긴 하지만 이 정도는 참아낼 수 있다.
우리가 침묵으로 감정을 교환하는 사이, 낮 동안 잠들어 있던 풀벌레들이 세상에 나왔다. 인공물들의 틈바구니 사이로 난 작은 풀줄기에 의지해서 짝을 찾는 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찌륵찌륵. 찌륵찌륵. 찌르르르르르. 그것은 몸에 맞지 않는 모험으로 지쳐있던 나에게 모처럼의 평온을 안겨주는 소리였다. 나는 달아오른 머리도 식힐 겸 그 소리와 함께 함께 고요에 잠겨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평온은 깨졌다. 곤충을 닮았지만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는 종족 때문에.
"이번엔 제가 질문을 던져 보죠."
오랜 정적을 깨고 나타난 거미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가라앉아있었다. 낮 동안 잠깐 다져놓았던 호의는 금방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분위기다. 그에게 밀리기 싫었던 나는 어떻게 나오는지 두고 보자는 각오로 거미가 있는 곳을 똑바로 응시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너무 무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둠을 꿰뚫고 차갑게 날아든 거미의 말은, 그런 내 각오 따윈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예리했다.
"그런 걸 알려주면 대체 뭐가 바뀝니까?"
나는 거미가 내게 달려드는 환상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 거미는 악귀 같은 얼굴로 내 가슴에 작살을 꽂고는 그대로 사라졌다. 나는 들리지 않는 비명을 지르며 가슴을 붙잡았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곳에 가슴을 뚫고 비죽 튀어나온 철막대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순간 그것을 실제로 착각할 만큼의 고통을 느꼈다.
상처 입은 몸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듯이 나를 아프게 조여든다. 나는 신음이 배어나올 것 같은 입을 강하게 틀어막았다. 거미는 그 2층집에서 내가 고통스럽게 되새겼던 사실의 핵심을 정확히 집어내고 있었다. 거미는 내 동요를 느꼈을 테면서도 냉혹하게 말을 계속했다.
"저를 따라 에덴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어떻게 할 생각이죠? 조직에게 잡혀서 영원히 매춘부 생활을 보낼 겁니까? 조금 치졸한 질문이군요. 그러면 얘기를 바꿔봅시다. 당신이 나를 떠난다면, 그리고 조직에게서도 벗어난다면, 당신에게 무슨 길이 남아있습니까? 당신은 집도 모르고, 직업도 모르고, 가족도 이웃도 동료도 없는 완벽한 혼자입니다. 뭘 할 수 있습니까? 설마 당장의 위기만 벗어난다면 모든 게 잘 돌아가리라고 생각하는 낙관주의잡니까? 우습군요. 전 당신이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가슴이 너무 두근거렸다. 나는 헐떡이며 거미의 말을 애써 반박했다.
"그런… 게 아니에요.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건 사람의 당연한 본능 아닌가요? 저는 제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찾겠어요. 이 도시에 남아봤자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하지만 그건 이 도시 밖에서도 마찬가지겠죠. 조직에게 잡히는 거나 당신을 따라가는 거나 본질적으론 다를 게 없어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가기 전에 전 제 당위성을 찾을 거예요."
나는 더듬거리나마 말을 계속하면서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는 걸 느꼈다. 어설프긴 하지만 내 생각은 서서히 틀을 다잡아 갔다. 어쩐지 무참하게 현실을 찔러대는 거미의 화법 앞에서 논리 따윌 내세운다는 게 너무나 가소롭게 보였지만, 내겐 그 알량한 이성 외엔 의지할 곳이 없었다.
"변명입니다."
안정이 무너진다. 현실이 또 하나 파헤쳐졌다.
"포장을 그럴 듯하게 해봤자 알맹이는 바뀐 게 없죠. 당신은 도대체 제가 이 상황을 몇 번이나 겪었으리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몇 번이나 당신에게 무의미한 설득을 반복했겠습니까? 지금 똑똑히 말해두죠. 당신은 그저 저에게 끌려 다니는 현실이 싫은 겁니다. 반발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죠. 아는 게 없으니까! 그러니 몸은 제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고 입만이 살아 자존심을 채우려 드는 겁니다. 틀립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추운 날씨도 아닌데 턱이 오들오들 떨려서 말하는 걸 막고 있었다. 나는 두 팔로 양 무릎을 세게 끌어안았다. 이제는 익숙한 고통이 찾아왔지만 그것이 오히려 반가울 지경이었다.
거미가 한 말은 무서우리만큼 잔인했다. 나는 그 중 하나도 찬성할 수 없었지만, 선뜻 나서서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는 내가 꺼낸 말에서 이기적인 부분만을 거칠게 잡아 뜯어 눈앞에 들이대고 있었다. 나는 빅헤드가 내 목에 면도칼을 겨누었을 때보다 훨씬 더 끔찍한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거미는 차갑게 내뱉었다.
"사실을 인정한다면, 두 번 다시 그런 말은 꺼내지 마십시오. 다른 때라면 모를까, 저도 이제 그런 투정을 받아 줄 만한 여유가 없으니까."
"……."
"알겠습니까?"
빌어먹을 자식.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까보다 더 아팠지만 이번에는 이빨을 떼지 않았다. 이제 내가 더 이상 반박하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거미는 잔인하게 나에게 재확인을 요구했다. 치욕감을 참는 나를 거미가 한 번 더 다그쳤다.
"알겠습니까?"
"…그만."
"알겠냐고 묻고 있…."
"그만! 알았으니까 이제 그쯤 해둬요! 당신 말은 똑바로 알아들었다고요!"
참지 못한 나는 비명 같은 고함을 질렀다. 좁은 골목 안에 메아리들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나는 씩씩대며 아픈 목을 감쌌다. 뭐라도 바뀌었으면, 하다못해 차가운 바람이라도 골목을 쓸어갔으면 했지만,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유일한 청중은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견딜 수 없이 비참해진 기분이 든 나는 세운 무릎 위를 이마로 들이받았다. 그리고 한 번 더 그렇게 했다. 이런 식으로 끝내기 위해 꺼낸 말은 아니었는데. 그런 게 아니었는데. 흘리지 않으려 했던 눈물이 눈꺼풀 밑을 비집고 나와 아래로 흘러내렸다. 수막이 씌워져 흔들거리는 시야 속에서, 나는 어느 새 내 발밑까지 푸른빛이 와 닿아 있음을 발견했다.
달이 골목까지 움직였다. 건물 사이의 좁은 틈까지 선선히 얼굴을 보여준 달 덕분에 나는 희끄무레하게나마 골목 내부의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길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아볼 수 없다. 이 달빛은 조명으로 쓰기엔 너무 약했다.
나는 눈을 깜빡여 눈물을 씻어냈다. 그러자 다른 눈물이 그 위를 메웠다. 억지로 그것들을 훔쳐낸 나는 거미의 얼굴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치우쳐진 달 때문에 반쪽만 보이는 그 얼굴은, 정확히 읽어낼 수 없었지만 어딘가 애상 깊은 표정이었다.
문득 나는 거미가 그런 말을 꺼낸 이유가 나뿐만이 아닌 자기 자신까지 몰아세우려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거미를 위한 변명을 떠올린 내 머릿속을 저주했다.
"일어나죠."
이 빛 아래서는 거미도 내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을 때, 거미는 내 동의를 구하지 않고 일어섰다. 말리고 자시고간에 그에게 말을 걸 기분이 아니었던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거미가 말했다.
"빛이 들어오니 계속 앉아있기도 마땅찮은 곳이 되었군요. 일부러 인적 없는 곳을 골라 왔지만 안심하는 건 이르니까요."
덧붙이지 않아도 될 설명이었다. 그래서 난 그 내용보다 목소리에 더 신경이 쓰였다. 거미의 낮은 목소리에는 전보다 힘이 부쩍 없어진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그걸 나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라고 해석하지는 않았다.
골목의 끝에 다가감에 따라 들어오는 빛의 양도 조금씩 많아졌다. 그리고 그에 따라 내 앞을 걷고 있는 거미의 모습도 더 분명하게 보였다. 나는 우울한 눈으로 눈에 띄게 비척대는 거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심결에 시선을 바닥으로 훑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이건…?"
단순한 굴곡으로 생긴 그림자라고 보기엔 간격이 너무 일정했다. 나는 바닥의 어두운 부분에 손을 찍어보았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었을 때, 거기엔 마찬가지의 어둠이 묻어있었다.
나는 놀란 눈으로 거미를 부르려 했다. 하지만 거미는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옆구리를 붙잡고 벽에 쓰러지듯이 기대 멈춰 섰다.
"당신…!"
무심결에 말을 걸어버린 나는 뒷부분을 분노로 삼키며 거미에게 다가갔다. 거미는 웃옷 위를 손으로 누른 채 고통을 참고 있었다. 내가 그의 앞에 막 다가갔을 때 거미는 그 옷을 들어 올리고 방탄복을 벗었다. 피로 젖은 피부가 드러나며 피 냄새가 내 얼굴로 치밀어 올랐다. 나는 욕지기가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그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방탄복에 의해 위력이 감쇄된 총알이 끝끝내 집요하게 살을 파먹은 흔적이었다.
"나 때문에?"
거미는 고개를 저었지만 나는 상처의 위치를 기억하고 있었다. 무슨 수단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아물었던 흔적이 있다. 그 동안의 격렬한 활동을 견디지 못한 것이리라. 비록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내가 만든 상처 앞에서 분노를 표현할 수 없게 된 나는 억울함을 느꼈다. 그러나 지금은 나를 염두에 둘 상황이 아니었다.
소매라도 대줄 생각으로 팔 부분을 찢으려던 나는, 오늘 내내 펼쳤던 모험의 대가로 옷이 먼지투성이가 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마침 거미가 차고 있던 가방에서 붕대를 꺼내자 나는 그것을 거칠게 빼앗았다.
"줘 봐요."
만지기는커녕 본 것도 처음인 붕대이지만, 어떻게 감는지는 알고 있다. 나는 나름대로 능숙한 손길로 거미의 허리에 붕대를 감았다. 처음 붕대가 상처에 닿았을 때 거미는 신음을 흘렸지만, 그 뒤로 다른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상처 부위에 대자마자 빠르게 검은빛으로 변하는 붕대를 보니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위로 드러난 핏자국이 한 뼘 조금 못 되는 정도로 줄었을 때, 나는 붕대 말이에 꽂혀있던 휴대용 가위로 그것을 자르고 클립으로 고정시켰다. 거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남은 붕대를 받아들고 중얼거렸다.
"고맙군요."
"…언제부터 이랬던 거예요?"
"방금 전에 깨달았습니다."
"바보 같이. 당신 아까부터 피 흘리고 있었어요."
내 타박에 거미는 뒤를 돌아보았다. 얽힌 골목 아래 점점이 찍힌 핏자국을 본 거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하다니 실격이군요. 서둘러야겠습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라도 핏자국을 발견하면 금방 추격해올 겁니다."
"네? 어떻게 당신 것인 줄 알죠?"
"제 피는 에덴인들과 조금 다르니까요. 게다가 저는 그 조직과 충돌이 많아서 몇 번 피를 본 경험이 있죠. 웬만큼 오래된 자들이라면 눈치 챌 겁니다."
그러더니 거미는 한 발을 내딛었다. 정상인이라면 신경 쓸 필요도 못 느끼는 그 행동이 지금의 그에겐 산을 움직이는 대역사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미는 무려 네 걸음을 옮겼고 그 것이 한계였다. 아까와는 반대되는 형국으로 거미는 내게 몸을 기댔다. 겨드랑이 아래로 내 어깨를 집어넣은 채 거미는 재미없는 농담을 꺼냈다.
"이걸로 주고받은 겁니까? 당신이 날 쏜 대신 나는 당신을 구하고, 내가 당신을 비난한 대신 당신은 나를 부축하는군요."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똑바로 걸어요."
나는 딱딱하게 거미를 잡아끌었다. 거미는 큭 하고 신음을 내면서도 별로 뒤쳐지는 일 없이 나를 따라왔다.
골목을 벗어난 거리는 그보다 좀 더 크고, 밝으며, 소란스러웠다. 물론 유흥지는커녕 멀쩡한 집조차 없는 거리에 사람이 돌아다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몇 건물만 넘으면 그 너머에서는 낮에 가까운 조명 아래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 산다는 행동에 간간히 총소리가 섞이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지만, 그 작자들이 사는 방법에 내가 간섭할 필요는 없다.
멀리서 갈림길이 보였다. 도착하기엔 아직 먼 거리였지만 나는 거미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죠?"
"오른쪽… 쓰레기통 옆의 샛길로."
거미는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확히 어디로 가는 건지 묻고 싶었지만 거미의 상태를 생각해서 그만두었다. 아마도 자신만이 알고 있는 아지트를 향하는 걸 테지. 그리고 적어도 이 남자는 아지트를 코앞에 둔 상황에서 돌아가겠다고 말해도 자유의 여신상으로 머리를 후려치진 않을 것이다.
우리의 발걸음은 몹시 불안정했다. 여자의 몸으로 사내를 끌어서만은 아니다. 거미만큼은 아니었지만 나 역시 정상적인 사람의 몰골이라곤 할 수 없었다. 한발씩 내딛는 발걸음에 거미의 무게가 실릴 때마다 나는 온몸의 관절이 튀어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거미처럼 신음소리를 내고 싶진 않았던 나는 애써 이를 악물고 멀게만 느껴지는 골목 입구를 향해 몸을 옮겼다. 다른 사람이 이걸 봤다면 허무하리만큼 느린 전진에 조소를 보냈을 것이다.
"…재미있군요."
나는 거미가 또다시 실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는 걸 들었다. 너무 아픈 나머지 머리가 어떻게 되었나 싶다. 나는 그런 말 할 기력이 있으면 걷는 데나 쓰라고 쏘아붙이려다가, 나름대로 흥미를 돋우는 말이었기에 내버려두었다. 나는 거미와 별 반 다를 바 없는 죽어가는 어조로 말했다.
"뭐가 말이죠?"
"이전의 당신은 훨씬 연약했으니까요. 총도 다룰 줄 모르고, 피를 보는 것도 두려워했죠. 그 때의 당신은 이 외곽에조차 나오지 못했습니다만 지금은 그게 다행으로 느껴집니다. 이전의 당신이 조직에 붙잡혔다면 저라도 구해내긴 힘들었을 겁니다."
나는 거미가 이전의 '그녀'가 아닌 '나'를 겨냥해서 말하고 있다는 데 대해 조금 놀랐다. 이제까지 그는 나를 평가한 적이 없었다.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거미는 말을 할수록 오히려 그 어조가 또렷해져갔다.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불사라지만, 그래도 사람은 죽음을 겪을수록 안의 무언가가 바뀌는 모양입니다. 단순한 기억의 상실 때문만이 아니라 말이죠. 그걸 볼 때마다 솔직히 당신을 똑같은 사람으로 봐야 하는지 고민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한 당신에게 저는 수임자가 아닌 납치범이나 다름없었으니까요."
어느 새 그에게 집중하고 있던 나는 말로 할 수 없는 복잡한 심경을 느꼈다. 그는 내가 토해냈던 것과 똑같은 고민을 다른 관점에서 얘기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아까 전의 독설을 변명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느껴지진 않았다. 거미는 말했다.
"그래서 저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당신에겐 조금 기분이 나쁠 지도 모르는 결론입니다. 저는 납치범이 되어도 좋으니, 당신을 반드시 이 도시 밖으로 보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고요. 보수가 상관이 없다는 건 그 말입니다. 아니, 처음부터 그 의뢰에 보수 따윈 없었다는 게 정확하겠군요. 저는 제가 원했기에 그 일을 한 겁니다."
"당신이… 원했다고?"
나는 믿기지 않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조금은 의심했어야 옳았다. 그의 행동은 이해관계로만 해석하기엔 너무나 헌신적인 구석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고, 때문에 본인의 입에서 곧바로 그 해답을 듣는 것은 상당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거미에게, 나는 물었다.
"무엇 때문이죠? 에덴과 에덴의 밖은 무엇이 다른 거예요? 내가 그 곳으로 넘어가는 게 어떤 의미가 있길래?"
"당신은 거기서 완전히 죽을 수 있습니다."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말이 우습게 들린 것은 아니었다. 거미의 목소리는 멍해진 내 머릿속을 계속해서 흔들었다.
"에덴의 밖은 에덴과 다르지 않습니다. 도심에서는 고상한 사람들이 고상한 삶을 누리고, 변경에서는 난폭한 사람들이 난폭한 삶을 누리죠. 돈이 사람보다 우선시되며, 총기와 마약을 사탕 사듯 끌여대는 곳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늙을 수 있고, 죽을 수 있고, 그만큼 자식을 남길 수 있죠. 앞의 두 가지에 대해선 슬퍼하는 사람이 많지만, 어쨌든 에덴 밖에서 그것은 거론할 필요도 없는 충실한 규칙입니다."
"그것의 반대가… 에덴이란 말이군요."
에덴인은 죽지 않는다. 다시 태어날 '숙소'가 있으니까. 에덴인은 늙지 않는다. 내가 보았던 에덴인들은 모두 육체의 전성기에 가까운 젊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늙는다는 것은 어른에서 노인뿐만이 아니라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데에도 적용된다. 에덴인들에겐 자식이 없다. 영원히 줄지 않는 인구로도 도시를 지탱하는 데에는 바로 거기에 원인이 있었다.
거미는 힘 있게 중얼거렸다.
"인간은 이런 삶을 살 수 없어요. 살아선 안 됩니다. 당신이 설령 이 도시의 꼭대기에서 군림한다 해도, 절대로 놓고 싶지 않은 행복을 맛보며 살고 있다 해도, 그 곳이 에덴인 한 전 당신을 내버려두지 않을 겁니다. 당신이 두 번째 죽음을 겪었을 때 전 그것을 맹세했습니다."
"네? 두 번…?"
나는 거미의 말에 의문을 느꼈지만 거미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마지막 말을 내뱉은 걸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거미를 다그칠 마음이 들지 않았다. 가볍게 한숨을 쉬면서, 나는 골목에 거의 다다른 걸 확인하고 고개를 숙였다. 특별한 이유가 있던 것이 아니다. 그저 지친 목을 잠깐 쉬어주기 위해 취한 사소한 행동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행동 덕분에 나는 발치에 떨어진 그림자를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붕대의 효력이 다한 건가 의심했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광원 때문에 뒤에서부터 뻗어온 긴 그림자는 우리 아닌 다른 자의 것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우리에게 닥쳐온 위험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망가진 몸으로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르게 행동했다.
거미를 품 안으로 끌어들인다. 발이 뒤엉킨 거미가 황망히 내 앞으로 쓰러진다. 쓰러진 거미를 뒤로 하고 등을 돌린다. 뒤편의 가로등에서 오는 빛이 눈부시다. 그 아래 서 있는 여자는 누구인가. 빛을 등진 채 자신의 모습을 감춘 여자의 팔이 짧아졌을 때, 나는 그녀가 그 팔을 이쪽을 향해 들어 올렸다는 것, 그리고 그 끝에 잡혀 있는 권총이 발사한 총탄이 내 가슴을 꿰뚫을 것이라는 것을 순식간에 알아차렸다.
피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탕!
"안 돼-!"
나는 두 팔을 조금 벌렸던 자세 그대로, 가슴에 붉은 꽃을 피운 채 뒤로 쓰러졌다.
바닥에 부딪히는 감각이 없다. 가슴이 너무 아파서 그런가보다. 거미가 급박한 어조로 뭔가를 외치는 것 같았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어차피 죽음을 맞이하게 된 시점에서 그런 건 상관이 없었다. 귓가에서 총소리가 왕왕거린다. 몸이 어디로 끌려가는 것 같긴 한데 분명치 않다.
애써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건물 뒤에서 총을 겨누고 있는 누군가가 보인다. 시선이 직각으로 서 있었기 때문에, 그 누군가가 거미임을 알아차리는 건 꽤 긴 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 동안 곁눈질을 유지하는 게 고통스러웠던 나는 곧 눈을 돌렸다. 고통도 그렇지만 온몸이 빠르게 식어가는 느낌이 좋지가 않다.
아무렴 어때. 잊어버리면 그만인 것을.
거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번 삶은 틀린 것 같다. 나는 마음을 놓은 채 하늘을 보았다. 분명히 어두운 밤일 텐데도 나에게는 푸른빛이 보였다. 태양을 품에 안은 채 구석에서 검은 얼룩을 피어 올리는 그 하늘은 분명히 지금 여기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그렇군.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것은 틀림없이 내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과거의 기억.
나는 죽음의 말미에서 연어처럼 시간을 거스른다.

 

 

* * * * * *

 

 

보통은 탈 리 없는 무언가가 불타는 소리. 고개를 돌렸지만 달라지지 않는 풍경.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는 걸 알아차린 나. 그런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소름끼치도록 높은 건물들.
나는 폭발의 중심지에 놓인 나를 발견했다.
등이 뭔가에 얹혀있는지 비스듬하게나마 바닥이 보인다. 본래는 약간의 군청색을 띄었을 아스팔트 도로는 폭발의 여파로 새까맣게 그슬려 있다. 내부 요인을 위해 특수하게 설계된 차는 나를 죽음에서 건졌지만 온전히 살린 것도 아닌 모양이다. 그러나 저기 반만 남은 문짝 위에 걸려있는 오른팔을 보면 불평할 생각도 가셔버린다. 온통 피투성이라 팔이란 것밖에 알 수 없지만, 저 정도 크기라면 누군지 알아채는 건 간단하다. 이제 예전처럼 멋진 자세로 담배를 필 수는 없겠군. 에스라트.
샬로트는 목만 남았으니 죽은 게 틀림없지만, 하시모토는 그나마 사지가 남아서 꿈틀거리고 있다. 연료에 직접 불을 붙여도 이런 폭발은 일어나지 않을 터. 반에덴주의자들은 사망자 명단을 보면서 환호하겠군. 물론 나는 그들 뜻대로 테러의 희생양이 되고 싶지는 않다. 내겐 지켜야 할 사람이 있다. 어떻게든 2차 폭발의 가능성이 있는 곳에서 벗어나려 해보지만, 목 아래의 감각은 없고 귀는 고막이 터져 가는 이명만 들린다.
먼지 구름은 가라앉기는커녕 더욱 거세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는 출혈사보다 질식하는 것이 먼저다. 누워있으면 안 된다. 어서 그를 데리고 안전한 곳으로 피해야 한다.
바로 옆에서 일어난 불길이 나를 한 층 더 채찍질한다. 아래를 곁눈질로 내려다본 나는 다리의 감각이 돌아온다 해도 걸을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거기에 아쉬움을 느끼며 팔을 휘젓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그나마 으깨지거나 타지는 않았다는 것에 감사한다. 그러나 팔을 움직일 수 있게 된다 하더라도 내가 뒤이어 찾아올 고통을 견딜 수 있을 지 의문스럽다. 쇼크사는 결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털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연기를 헤치고 누군가가 다가온다. 나는 그 자가 연기를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검게 보인다는 것에 당황한다. 오염된 안구는 더 이상 내게 정상적인 시야를 용납하지 않는다. 나는 어떻게든 상대를 추측하기 위해 애써본다.
됐다. 그다.
나는 안도감을 느끼며 잠시 가라앉는다. 하지만 그가 이곳에 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깨닫고 소스라친다. 처음에는 방탄차가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맨몸으로 두 번째 폭발을 맞는다면 이번과 같은 행운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미 틀렸다. 그만이라도 빠져나가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 나는 고함쳐 그를 멀어지게 하려고 해보지만, 폭발로 마비된 폐는 그럴 공기를 주지 않는다. 처음으로 이 상황을 절망한다. 서른아홉 해 동안 한 번도 불러본 적 없는 신을 부르며, 그에게 빠져나갈 길을 달라고 기도해본다.
그리고 나는 죽었다.
소름끼칠 거라 생각했던 죽음의 순간은 없었다. 있다 하더라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요컨대 일어날 리 없는 잠이다. 평생 동안 수만 번을 겪지만 우리는 그 중 단 하루라도 잠 속에 빠지는 감각을 알지 못한다.
연어는 조금, 하류로 되돌아갔다.
직장에 늦어 택시를 탄다. 구제 제도로 오랫동안 일했던 시청 근무를 마친 뒤 얻은 첫 직장이라 긴장이 한층 더하다. 출근 시간이 반시간도 채 안 남은 걸 보고 발을 굴러보지만 차는 제자리일 뿐이다. 쌔근덕대며 불안한 눈으로 창밖을 보는 사이 조그만 집이 눈에 들어온다.
언덕길의 중턱에 있는 조금 외떨어진 집이다. 아담하면서도 작은 것 특유의 산뜻함이 가미된 디자인이 나를 매혹케 한다. 그 집을 좀 더 자세히 보려던 차에 택시가 매정하게 출발한다. 이럴 때 항상 찾아오는 생활의 법칙을 느끼며 나는 불만족스런 표정으로 시트에 몸을 파묻는다.
새 직장인 출판사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다. 오는 길에 다시 언덕 위의 집이 보여서 방향을 돌린다. 그 집 앞에 내려 택시를 보낸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연신 감탄사를 흘린다. 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정말 부러운 집이다. 지금 모아놓은 돈으로는 어림도 없겠지만 몇 년 후에는 이 집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인기척이 없는 걸 확인하자 호기심 어린 눈으로 실례를 무릅쓰고 창문 안을 들여다본다.
집안은 거울도 없는 세면대가 바깥에 나와 있는 조금 독특한 구조다. 그 옆에는 그릇이 잔뜩 쌓여있는 걸 보니 도자기 쪽 일을 하는가 보다. 그 외에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이 몇 가지 있어, 주인의 정체를 내심 궁금케 한다. 더 이상 바깥에서 서성거리다간 이상한 취급을 받을까 싶어, 아쉬움을 누르고 집에서 나오려 한다.
집에서 도로로 내려가는 순간, 반대로 오던 사람과 마주쳐 버린다. 틀림없는 집주인이다.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주인 앞에서 당황하여 변명을 떠올려본다. 결국 집이 예뻐 구경해버렸다는, 변명치곤 솔직한 말을 들은 주인은 가벼운 웃음을 떠올린다.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검은 머리. 햇빛을 받고 빛나는 옅은 갈색 눈. 어디선가 만났다는 느낌이 들던 차에 아련한 그리움이 내 몸을 휩쓴다. 원인 모를 감정이 전신을 떨리게 한다. 갑자기 눈물이 흘러나오자 당황 속에서 한 걸음 물러난 내게 주인이 의아한 눈으로 말을 건넨다.
"정신이 듭니까?"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꿈은, 깨어나자마자 대부분이 소실되어 버린다. 나는 내가 무슨 환상을 거쳤는지 제대로 떠올릴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울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나는 두 눈을 쓱쓱 비볐다. 그러나 한번 터진 눈물은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나는 차라리 울기 시작한 거 마음 놓고 펑펑 우는 게 낫겠다고 느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우는지도 모르면서 목을 놓는 것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뒤따라왔다. 그래서 나는 계속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다.
"왜 우는 겁니까."
눈물을 꼭 짜내서 굴절되는 시야를 바로잡는다. 인공적인 불빛 아래서 거미의 얼굴이 보인다. 코앞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 모습이 왠지 익숙하다. 어쩐지 방금 전까지 그를 이렇게 보고 있었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단지 느낌일 뿐이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어요."
거미는 조금 몸을 떼었다. 그는 처음 호텔에서 그랬던 것처럼 내가 누운 침대 곁에 앉아있었다. 단 그 침대는 호텔처럼 고급스러운 장식이 없이 기능만 중시한 딱딱한 철제 가구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살풍경한 빈 방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침대와 테이블 외엔 아무것도 없는, 심지어 벽지조차 떼어낸 거무죽죽한 방이다. 창문 대신 천장에 환풍기를 달아놓은 걸 보니 지하인 모양이다. 웬만큼 궁핍하지 않으면 이런 곳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 나는 고개를 돌리느라 옆으로 흘러나간 눈물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여기는…?"
"빅헤드가 알려줬던 임시 작업장입니다."
거미는 뜻 모를 한숨을 쉬었다. 그는 침대에 누워있는 내게 물었다.
"설명하기 전에 확인부터 해봐야겠군요. 어디까지 기억하십니까?"
"총 맞은 부분까지요."
나는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대답을 하고 나자 이렇게 속편하게 누워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맞아, 난 가슴에 총을 맞았는데? 하지만 상체를 일으킨 나는 몸이 생각만큼 아프지 않다는 걸 느꼈다. 오히려 전보다 가뿐해진 느낌이다.
나는 거미가 호텔에서 보여줬던 그 셔츠의 윗단추를 풀고 상처를 확인했다. 그것은 흉터조차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아물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입술도 멀쩡하고, 두통도 가셔 있다. 나는 갑자기 회복된 몸에 놀라움을 느끼며 거미에게 그 순간 가장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당신이 갈아입혔어요?"
"…별 수 없었습니다. 마침 원래 옷은 당신이 버려두고 갔으니 수습해두고 있었죠. 저 옷을 계속 입혀두기도 뭐하잖습니까."
거미는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걸레를 가리켰다. 나는 피와 먼지로 떡이 된 그 물체를 옷이라고 여겨보려다가 결국 포기했다. 그리고 어차피 이런 때 묻은 몸을 가지고 야한 상상을 하는 게 더 이상하다. 나는 거미에게 따지는 것을 그만두고 상황이나 묻기로 했다.
"여섯 명이었습니다. 아무리 핏자국이 있었다지만 추적하기 곤란한 환경이었는데도 그렇게까지 일찍 따라붙을 줄은 몰랐죠. 당신이 쓰러진 뒤에 교전을 벌이던 중 퇴각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살아남은 게 기적 같군요."
"그런가… 혹시 그 중에 여자는 없었나요?"
"켈리요?"
나는 예상치 못한 이름을 듣고 당황했다. 염두에 두지 않았단 게 아니라, 그렇게 곧바로 튀어나올 줄 몰랐단 얘기다. 나는 놀란 얼굴로 거미를 가리켰다.
"그녈 알아요?"
"이 바닥에선 유명하죠. 여자의 몸으로 중간 간부쯤 되는 위치까지 올라갔으니까요. 대신 그만큼 성격이 뒤틀렸다는 평을 듣습니다만. 저도 몇 번 만났지만 확실히 곁에 두고 싶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거미는 볼을 긁적였다.
"그 고문실을 감시했을 때 켈리와 같이 있는 걸 봤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 보군요."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거미도 그녀를 잘 아는 모양인데 그런 년에 대해서 설명하는 데 입 아프게 체력을 소모하고 싶진 않다. 거미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쨌든 상관없습니다. 그녀는 죽었으니까요."
"네?"
"무리하게 나서다가 눈에 맞았습니다. 그녀가 죽고 나자 다들 물러간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죠. 죽은 사람이 다시 태어나려면 12시간은 있어야 하니, 이제 7시간 동안 그녀를 볼 사람은 아무도 없겠군요."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그 실루엣은 켈리의 것이었던 모양이다.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은 나를 안심하게 했다. 만약 살아있었다면 지금쯤 코앞까지 찾아와서 환풍기 뚜껑을 따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잠시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이마를 꾹 누르던 차에, 거미의 옆구리에서 짧은 비프 음이 울렸다.
"뭐죠?"
"치료기입니다. 휴대용이라 성능은 시원찮지만."
거미는 그렇게 말하며 어느 새 갈아입은 웃옷을 들어올렸다. 방탄복과는 달리 좀 더 부드러운 재질의 복대가 보였다. 벌크로, 보통은 찍찍이로 통용되는 테이프를 뜯고 나자 복대는 손쉽게 벗겨졌다. 그러자 그 아래에서는 마른 피가 눌어붙은 총상의 흔적이 드러났다.
바라보는 것도 거북한 그 상처는 내가 보기엔 그다지 바뀐 게 없었다. 하지만 거미의 혈색은 아까보단 많이 돌아온 상태였다. 어디까지나 상처에 비해서지만 말이다. 그는 아까처럼 붕대를 쓰는 대신 거즈를 대고 테이프로 고정했다. 처치가 끝나자, 거미는 방탄복을 입은 뒤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복대를 가방에 집어넣었다.
밋밋한 겉면과는 달리 안쪽에는 뭔가 복잡한 회로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저런 것으로 상처를 치료한다니 놀랍다. 나는 침대에서 발을 내린 채 질문했다.
"나도 저걸로 치료한 건가요?"
"아뇨. 몇 명을 죽였습니다."
나는 이제 거미가 꺼내는 말에는 놀라지 않기로 했다. 아무래도 그럴 의도로 말을 비꼬는 게 틀림없어 보이니까.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는 대신 한숨을 쉬었다.
"설명해요."
"여긴 에덴 내에서도 좀 흉폭한 지역입니다. 총기를 이용한 이해하기 쉬운 시스템 덕분인데, 규칙은 두 가지죠. 죽으면 신체 능력이 떨어지고, 죽이면 반대로 올라갑니다. 약간의 회복 효과도 누릴 수 있고요. 극단적으로 말해서 게임과 다를 게 없습니다. 다만 아바타가 아닌 실제 목숨을 다루는 게 문제죠."
"그래서요? 내가 기절해 있던 사이 누굴 쏴 죽이기라도 했단 말인가요?"
"여기 있던 빅헤드의 해체 대상들을 쐈습니다."
나는 거미의 말에 움찔했다. 아직 내 머릿속에는 벽에 못 박힌 세실의 모습이 강하게 남아있었다. 그러나 거미는 나와는 달리 연민 따윌 느끼지는 않는지 변함없는 어조로 말했다.
"다른 방에다 왕창 묶어놨더군요. 우리에게 여길 알려준 것도 그 자들을 제공하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왜 그런 호의를 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방안을 찾기엔 당신 상태가 너무 심각했습니다. 당신 손에다 권총을 쥐어 주고 하나하나 쏴버렸죠."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남이 기절해 있는 사이 그 손으로 살인을 시켰다는 걸 저렇게 뻔뻔스럽게 말하다니.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 자들에게는 계속 묶여서 해체당하길 기다리는 것보다는 죽어서 '숙소'에서 깨어나는 게 더 나을 지도 모른다. 이상한 것은 오히려 살인에 이토록 심각한 거부감을 느끼는 나일 것이다. 순간적으로 그들이 고문당하게 나두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으니까.
"당신도 그렇게 하지 그랬어요?"
"전 그런 식으론 회복하지 못합니다."
거미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내 옆의 시트가 불쑥 솟아올랐다. 그는 내 맞은편으로 타박타박 걸어가 벽에 기대앉았다. 중상자 주제에 몸을 아끼지 않는 그 자세가 내 신경을 건드렸다.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거미를 쏘아붙였다.
"그렇게 하면 나을 상처도 안 아물어요."
"상관없으니 당신은 거기서 쉬고 계시죠. 내일까지는 경계선에 도달해야 하니까요. 켈리가 죽자마자 추격을 단념한 거로 봐서 그다지 의욕 있는 상대는 아닙니다만, 마음만 먹으면 여기까지 오는 건 순식간일 겁니다. 이럴 바에는 온전한 사람이라도 체력을 보존해둬야 가능성이 생깁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저 얼토당토않은 말에 설득당한 건 아니다. 어차피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억지를 써서 앉아있을 게 뻔한 사람에게 내 동정심을 헛되게 쏟아 부을 생각은 없다. 나는 천장의 불을 꺼버리곤 도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너무 누워만 있던 나머지 오히려 허리가 아플 지경이었지만 입을 비죽 다물며 참았다.
어둠 속에서 한참을 그렇게 있으려니, 거미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자고 있습니까?"
"…애 돌보는 보모처럼 굴지 말아요. 침대 밑에서 괴물이 튀어나올까봐 벌벌 떠는 나이는 지났으니까."
나는 보일 리도 없는 인상을 팍 쓰면서 대꾸했다. 나이를 먹지도 않으면서 어린 시절을 언급한다는 게 우습지만 내 입은 자연스럽게 그런 말을 내뱉고 있었다. 그 말이 어느 과거의 나에게서 튀어나온 건지 궁금해진다. 나는 반대편에서 상체를 세운 채 쉬고 있을 거미에게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대로 밤을 새도 괜찮을 느낌이에요. 지금이라도 안 늦었으니 고집 피우지 말고 자리 바꾸지 그래요?"
"미안하지만 침대는 안 됩니다."
"왜? 더러워서?"
"이 상태로 누우면 다시는 못 일어날 것 같으니까요."
거미의 어조는 평온했기 때문에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듣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생각보다 거미의 상태가 심각한 것을 깨달은 나는 심한 부채감을 느껴야 했다. 제대로 생각나지도 않는 위로의 말을 몇 가지 떠올려 본 나는 결국 전부를 폐기처분해버렸다. 어차피 이제 와서 미안하단 소리를 듣는 건 거미도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왜 그렇게까지 날 에덴 밖으로 보내려 하는 거죠?"
대답은 없다. 다만 씁쓸한 한숨이 나올 뿐이다. 문득 그가 하고 있을 생각을 알아차린 나는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아니, 그 때 꺼낸 말다툼을 다시 하자는 건 아니에요. 당신 말은 상당히 기분 나쁘긴 했지만, 어쨌든 인정해요. 그 때 나는 어떻게든 내 자신을 합리화하고 싶었으니까요."
나는 거미를 다그쳐 이유를 묻는 것으로 그에게 끌려 다녀야 하는 현실을 납득해야만 했다. 거미의 독설은 신랄했지만 그렇게 비난받아야 할 부분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거미와의 반응과는 별개로 그 말은 나 자신의 다짐부터 부정하고 있던 모순된 발언이었다.
"난 당신을 믿기로 했어요. 경계 밖의 세상이 여기보다 훨씬 우울한 곳이라 해도, 당신이 나를 속이고 거짓으로 이끌고 있다 해도 지금은 당신을 믿고 경계를 넘을 거예요."
이 남자만은 어떻게든 괜찮을 거라 확신했다. 다른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 해도 이 남자만큼은 믿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나는 채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검은 골목에서 그에게 믿어야 할 이유를 요구하고 있었다.
후회는 결과가 나온 뒤에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비록 그 믿음이 맹목적인 신뢰라 할지라도, 애초에 내게 다른 객관적 근거 따윈 없었잖은가.
"하지만 지금 난 당위성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의 이유를 알고 싶은 거예요. 당신과 난 어떤 사이죠? 설마 지금도 의뢰인과 수임인의 관계라고 주장할 건가요?"
이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잠시 입술을 핥다가 끊긴 흐름을 이었다.
"기절해 있는 동안 꿈속에서 당신을 봤던 것 같아요."
거미에게서 반응이 돌아왔다. 상당히 동요한 듯한 눈치였다. 나는 어둠 속에서 눈을 감은 채 잠시 느낌을 더듬었다. 막연한 장면장면만 남은 기억이지만, 그것이 죽으면서 잊혀졌던 내 옛 과거라는 사실은 당연하게 느껴졌다.
"나는… 집을 봤어요. 아담하고 잘 정리된 집이었죠. 그 구조가 마음에 들어서 구경하는데 중간에 집 주인과 마주쳤어요. 나는 갑자기 눈물을 흘렸죠. 이유는 모르겠지만요. 그런데… 아마도 그가 당신이었던 것 같아요."
꿈이라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인상만큼은 기억한다. 거칠고 딱딱하지만 어째서인지 편안해지는 모순된 느낌. 언제의 과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남자는 분명 내 옆에 앉아 있을 남자와 동일 인물임이 틀림없다.
거미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는 혼잣말처럼 아련한 느낌으로 얘기했다.
"벌써 3년 전이군요. 아니, 4년인가? 당신은 우리 집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찾아왔었죠. 그게 첫 인연이 되었습니다만. 틈만 나면 좁쌀만 한 돈을 갖고 와 집을 사겠다고 바락바락 우기는 통에 거절하느라 진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으윽."
내가 그랬단 말야? 왠지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는단 게 슬프다. 그래도 생각보다 오래된 인연이군.
"그래도 그런 식으로 빈번하게 만나서 관계를 쌓긴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친한 사이라 해도 무리는 아니겠군요."
거미의 말에 나는 종종 스쳐지나갈 때면 웃음을 교환하거나 초인종을 누르면 반갑게 나와 보는 친구 사이를 상상해보았다. 하지만 오늘 이런 저런 일을 겪긴 했어도 거미를 그런 가까운 이로 두기엔 아직 어색할 뿐이다. 다른 사람이 찍은 영화를 보는 것처럼 그런 아득한 느낌밖에 오질 않는다.
솔직히 말해, 지금 그에게 갖고 있는 신뢰감이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는 나 자신이 잘 알고 있다. 다만 그가 내게 보이는 호의를 언젠가 의심 없이 돌려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막연히 바랄 뿐이다.
"그래서, 의뢰는 왜 하게 됐는데요?"
나는 별 생각 없이 본론을 물었다. 하지만 거미는 어느 새 정색하며 이야기를 끊었다.
"미안하지만 이제 쉬어야겠군요. 내일 해가 뜨기 직전에 출발하도록 하죠."
나는 읍, 하고 불만을 터트렸다. 대답도 똑바로 한 주제에 이제 와서 쓸모없는 대화 취급을 하다니. 하지만 초인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난행을 해낸 그이니만큼 굳이 타박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친 몸으로 부상자를 붙잡고 6명이랑 총격전을 벌여야 했으니, 원래라면 말도 못 꺼낼 만큼 힘들었을 테지. 과연 어느 새 어둠 너머에서는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멈춘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곯아떨어진 그를 보고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하지만 피로한 건 그렇다 쳐도, 조금 이상한 건 사실이다. 내가 기억을 되찾는 게 자신에게 훨씬 유리하다는 듯이 말하면서도, 그는 정작 내 과거를 얘기하는 데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거기엔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높이도 짐작가지 않을 만큼 어두컴컴한 천장을 보았다. 백색보다 오히려 깨끗해 보이는 어둠은 내가 계속 사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마음의 도화지였다.
그래. 나는 한숨을 쉬며 도화지를 채웠다. 사실은 나도 굳이 더 캐묻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말을 이어나가기 위해 관성적으로 던진 질문일 뿐이다. '그녀'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희끄무레하게 떠오르는 사람의 형상에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모습을 채워 넣어야 한다는 게 부담스럽기만 했다. 같은 몸, 같은 정신. 결코 떨어질 수 없는 한 울타리 속에서 나는 나와 '그녀'의 경계를 어디까지 세워놓아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생각과는 무관하게, 난 기억을 되찾을 것이다. 벌써 한 번 떠올렸으니까, 그 두 번째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그리고 그 때가 되었을 때 난 이미 '내'가 아니게 되겠지. 과거를 알고 현재를 사는 나는 현재에만 매달린 채 과거를 두려워하던 '나'의 모습을 비웃고 말 것이다. 어차피 자신의 기억인 것을 왜 그렇게 거부했느냐고 말이다.
나는 그것이 슬픈 일인지 자신할 수 없었다. 우스운 일인지도 확신하기 어렵다. 하룻밤 새 결론짓기 어려운 고민을 하던 나는 어느 새 피곤하지도 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 * *

 

 

내가 눈을 떴을 때 주변 모습은 바뀌어 있었다. 어디선가 새어 들어온 빛이 방 안까지 반사돼 어둠을 걷어내 버렸다. 눈을 비비며 나는 침대 위의 내 몰골을 관찰했다. 피먼지를 덕지덕지 묻힌 몸으로 제대로 씻지도 못해 찜찜하기 짝이 없는 잠자리였다. 눈앞의 상황에 넌더리를 내며 침대에서 내려온 나는 거미가 일출 전에 출발하자고 했던 말을 기억해냈다.
"먼저 일어났나…?"
그건 아니다. 거미는 침대 맞은편 벽에 기댄 채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봐도 시체에 가까운 그 자세에 나는 오싹 한기를 느꼈다. 나는 황급히 거미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반응이 없다. 조명을 켜지 않아 어두운 방이지만 혈색이 없다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몇 번 어깨를 더 흔들어 봐도 거미가 일어날 생각을 않자 나는 코 밑에 손가락을 갖다대보았다. 콧바람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고 내가 경악하려는 순간 거미가 눈을 떴다.
"뭐…."
거미의 몸이 순간 바람처럼 움직였다. 그는 순식간에 내 앞을 빠져나가 내 팔을 뒤로 꺾었다. 아차 하는 순간에 몸이 결박되어 버린 나는 기가 막힌 속에서 생각했다. 정말 이 남자다운 기상법이다.
내가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있었던 건 거미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쇠약했기 때문이다. 나는 단순히 뒤로 젖혀지기만 한 팔을 거칠게 털었다. 사람을 죽였느니 뭐니 해서 회복된 나와는 달리 황천길이 눈에 선한 상태였던 거미는 그 힘조차 이기지 못했다.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거미를 붙잡은 나는 그의 퀭한 두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생기가 없는 그 눈을 보니 갑자기 열이 받는다.
"진정해요! 나를 봐. 날 알아보겠죠?"
내 윽박지름에 거미는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곧 얼굴에 그나마 사람다운 표정이 돌아왔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붙잡고 있던 내 팔을 놓게 했다. 몸을 추스른 거미는 방 밖에서 들어오는 빛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미안합니다. 할 말이 없군요. 해가 뜬 지… 한 시간쯤 지났으려나. 켈리도 다시 태어났을 테니 서두릅시다. 솔직히 그녀가 추격자라면 우릴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에서조차 쫒아온다 해도 전 놀라지 않을 겁니다."
동감이다. 거미는 비틀거리며 한옆에 놓아두었던 자신의 짐을 챙겼다. 그러나 그가 가방 하나조차 제대로 들어 올리지 못하자 보다 못한 나는 그 짐을 뺏어 대신 챙겨들었다. 거미의 못 미더워하는 눈에 기분이 나빠진 나는 거기서 권총 하나를 꺼내 몇 바퀴 돌려 잡는 시범을 보였다.
"이래봬도 권총 정돈 다룰 줄 알아요. 당신보단 훨씬 잘 쏠 자신 있으니 지금부터는 나에게 맡기시죠."
일단 말부터 호기롭게 하긴 했는데, 실제로 총을 잡아보니 전보다 나아진 느낌이다. 오래된 건맨처럼 총을 허리춤에 꽂아 넣는 나를 본 거미는 파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엔 생기가 좀 드러나는 웃음이었다.
"과연 믿음직스럽군요. 그러면 경계선까지는 레이디에게 경호를 맡기도록 하죠."
그러더니 거미는 내게 자연스럽게 몸을 기댔다. 의도 상으로는 그랬단 얘기다. 가만히 나뒀다면 엎어졌을 그를 부축한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에덴 안이든 밖이든 간에, 빨리 치료할 만한 곳을 찾아야겠다.
우리가 하룻밤을 보낸 방은 반지하에 있었다. 빛은 바로 그 복도 끝의 쪽창에서 새어 들어온 것이었다. 지하에서 나온 나는 그 입구가 건물 잔해들 사이에 교묘히 감춰져있음을 알고 감탄했다. 일부러 잔해 사이를 헤치고 들어오지 않는 한 이곳에 입구가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저 쪽이, 경계선입니다."
길 밖으로 나온 거미는 머리를 들어 간신히 길을 지시했다. 나는 황금빛 태양을 곁에 둔 채 서서히 제 색을 찾아가는 하늘 아래의 에덴 시를 걸었다.
거미는 사람이 나오면 숨어 있다가 다시 진행하거나 아예 다른 길로 돌아가는 방법을 택했다. 켈리가 추적을 포기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이유였다. 나는 그 이유 자체에는 별 의견이 없었지만, 그의 다 죽어가는 몸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해야 한다는 게 부담스러웠다.
"경계선은 어떻게 넘죠?"
나는 대답하기 힘들 거란 걸 알면서도 거미에게 질문했다. 어차피 당장 회복될 수 없는 거라면 기력이 아직 남아있을 때라도 물어봐둬야 했다. 거미는 조금 떨리긴 했지만 어떻게든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경계선의 정체는 말 그대로 '죽음'입니다. 다른 이유가 필요 없죠. 에덴인은 그 곳을 통과하면 무조건 기억을 잃고 내부의 '숙소'로 돌아가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경계선에 도달한 후 그 '죽음'의 기능을 마비시킬 겁니다."
거미는 내가 지고 있는 가방을 가리켰다.
"그 가방 안에는 메인 시스템의 해킹이 가능한 컴퓨터가 들어있습니다. 에덴의 메인 시스템이 통제하는 범위는 대단히 크기 때문에 다운을 막기 위해 헐겁게 설계되어 있죠. 잠깐 동안 경계선을 마비시키는 정도라면 시스템에서도 눈치 채지 못할 겁니다. 그 사이 당신은 경계선을 통과해 저와 같이 중간 접선자를 만나 탈출하면 되는 겁니다."
"메인 시스템…?"
나는 불길한 예감을 담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거미가 꺼내는 용어들은 죽음의 원인을 설명하기엔 지나치게 인공적인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거미는 비유나 연상을 목적으로 그 단어를 꺼낸 게 아니었다. 그는 잠시 복잡한 얼굴로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 얘긴 차차 할 때가 있겠지요. 이제 쭉 앞으로 가십시오."
나는 적절한 순간에 도로가 나온 건지 거미가 도로를 보고 적절하게 말을 꺼낸 건지 알 수 없어졌다. 이유가 어찌됐든 말이 끊겨버린 나는 한숨지으며 거미가 가리킨 길을 따라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도시의 끝에 다다랐다곤 하지만, 바뀐 건 없었다. 변경답게 2층 언저리를 한계로 키가 낮아졌다뿐, 여전히 건물들은 석상처럼 늘어서 있고 포장이 벗겨진 도로는 버려진 장소 특유의 감성만을 전달할 뿐이다. 나는 호텔을 처음 벗어났을 때와 비슷한 풍경이 도대체 어디까지 뻗어있는 건지 궁금해졌다. 정말 오늘 하루가 지나도록 경계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거미는 끝 모를 길을 도중에서 빠져나왔다. 골목은 물론, 계단을 오르고, 집안을 지나, 개조한 것이 분명한 집 사이의 연결 복도를 몇 번이고 걸은 끝에, 나는 에덴의 끝을 마주하게 되었다.
처음 내가 그곳에서 받은 인상은 하나의 광장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외곽에서 느꼈던 불규칙성은 대부분 폐쇄적인 쪽이었다. 마구 세워진 가건물들과 개조물, 고층 건물 사이에 뒤늦게 자리를 잡고 세워진 조그만 단층 주택 등 조화를 깨는 방법은 모두 빈 공간을 틀어막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여기는 반대다. 분명히 나란하게 세워져 있어야 할 건물들은 중앙을 공터로 두고 빙 둘러서 있었다. 그것이 임의로 만든 공터라는 건 분명하다. 채 파괴하지 못한 기초가 흉물스럽게 그 곳을 메우고 있었으니까.
건물이라는 거대한 단위로 만든 원이었기에 그 모양은 상당히 비뚜름했다. 단지 곡률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 공터는 한 부분이 건물 아닌 다른 것으로 막혀 있었다. 사막과도 같은 넓은 평야를 그 너머에 둔, 사람 키를 조금 상회하는 철조망이 건물의 원을 자르는 현이었다.
철조망 바깥의 붉은 색이 눈을 어지럽힌다. 철조망을 두른 붉은 페인트의 경계선은 대략 10여 미터 너머까지 칠해져 있었다. 그 너머에는 모래밖에 없다. 바람을 따라 느리게 파도가 이는 황금빛 대지는 내게 아득한 느낌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에덴이란 도시는 이처럼 막막한 곳에서 홀로 자신을 지탱했단 말인가.
한 가지 공터라는 인상에 방해를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철조망의 가운데 쌓여있는 잔해들이었다. 공터를 만들기 위해 부순 건물들의 것임이 분명하리라. 치우기 귀찮은 쓰레기를 한 곳에 몰아넣듯 철조망 쪽에 밀어붙인 그 잔해더미는, 이미 자기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철조망 너머까지 쓰러진 지 오래였다. 덕분에 그것은 철조망을 넘기 위한 작은 언덕처럼 보였다. 거미는 이걸 알고 여기로 온 것일까?
"처형장입니다."
나는 거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다행히 아까보다 많이 회복한 것처럼 보였다. 거미는 한결 나아진 동작으로 내게서 가방을 받아들고는 그 안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완전한 죽음이라는 개념이 없는 에덴에서 이곳은 사람을 유일하게 소멸시킬 수 있는 구역이죠. 때문에 극렬한 대립 관계에 있는 조직들 사이에서는 간혹 복수심을 과시하기 위해 이런 퍼포먼스를 취하곤 합니다. 넘기도 편하면서 사람도 오지 않기 때문에, 경계선을 넘기엔 최적의 장소입니다."
가방 안에서 조그만 수첩 같은 것을 꺼낸 거미는 가방을 잔해 구석에 내던졌다. 터프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내가 보기엔 놓치려던 걸 간신히 위장한 것 같았다. 언덕 아래의 작은 돌멩이들이 만드는 경사면에 주저앉은 거미는 수첩을 열고 안의 자판을 두들겼다. 자판의 반대면 에는 내용을 잘 알 수 없는 프로그램이 떠올라 거미의 입력에 반응했다.
"이제 외부 접선자와 연락을 시도하겠습니다. 에덴은 외부인의 접근을 막기 위해 사막 한가운데 만들어졌죠. 접선자의 도움이 없으면 당신은 몰라도 저는 절대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그들과 연계하면 우리는 에덴 밖의 세계로 무사히 갈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거미는 내게 자세한 설명을 했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어서일까? 아니면… 흐려져 가는 스스로의 정신을 붙잡기 위한 고육책일까? 나는 해석할 수 없는 수첩을 들여다보는 대신 철조망의 바깥을 보았다. 현의 한쪽 끝과 다른 쪽 끝을 잇는 그 지평선은, 건물이 없다 해도 내 시야 끝까지 이어질 것이다. 저 너머에 에덴보다 훨씬 거대한 집단이 있다니 실감나지 않는다. 그곳에서도 사람들이 여기와 다를 바 없는 삶을 꾸리는 건가. 다만 그들은 우리처럼 다시 태어나는 기회는 얻지 못하겠지. 나는 그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궁금해졌다. 적어도 나에게는 불행이다.
나는 거미를 돌아보았다. 에덴인과 다른 피를 흘리고, 에덴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그는 내가 보았던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단연 이질적인 존재다. 나는 확신을 갖고 있었기에 질문이 아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에덴인이 아니죠?"
타자를 치던 손이 잠깐 멈췄다. 거미는 깊게 숨을 들이쉰 후 작업을 재개했다.
"예."
"에덴의 밖에서 온 것인가요?"
"…예."
"그 곳에서 에덴은 어떤 존재죠?"
탁!
거미는 강하게 자판을 내려친 뒤 더 이상의 동작을 취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대답하기 힘든 질문을 던진 건가 생각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이제 응답이 돌아오길 기다리면 됩니다." 라고 말한 거미는 수첩을 닫고는 그 것을 옆의 평평한 잔해 위에 올려놓았다. 그 뒤로 거미가 말을 꺼내는 순간은 좀처럼 오지 않았고 나는 막연하게 그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구름 없는 끝 모를 하늘을 올려다본다. 어제의 혈투는 어디 갔냐는 듯이 너무나 평화롭다. 따지고 보면 그 혈투란 것도 오늘과 마찬가지로 푸른 하늘 아래서 벌어졌지만. 언제나 하늘이란 것은 사람 사는 일엔 관심이 없는 법이다.
"바깥에서 에덴은 많은 논란을 낳고 있는 장소입니다."
시선의 아래쪽에서 거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동안 생각을 정리하고 있던 것인지, 일단 시작한 거미의 말은 비교적 순탄하게 풀려나갔다.
"그것의 필요성 여부를 두고 반대하는 사람들과 찬성하는 사람들이 극명하게 대립하고 있죠. 규모를 비교해보자면, 반대하는 쪽이 좀 더 큽니다. 하지만 에덴을 건설하고 또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쪽은 기득권층이죠. 높은 사람들에게 에덴은 여러 가지로 유용한 실험장입니다. 그리고 그 유용함이란 일부 반대 측에게도 돌아가는 것이기에, 에덴이 아직까지 몇 번의 사고에도 불구하고 돌아갈 수 있는 걸 테죠."
"실험장…."
그렇다면 나는 무균실 안에서 병균이 주사되길 기다리는 모르모트인가.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제 보았던 기억의 잔상들과, 거미가 말해줬던 단서들을 모으면 에덴이 어떤 곳인지 막연한 추측은 가능했다. 거미는 계속 말했다.
"에덴인들의 육체는 에덴 밖의 사람들보다 훨씬 우수합니다. 그들은 음식을 먹을 필요가 없고, 병에 걸리지도 않으며, 더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가질 수도 있죠. 약간의 도움만 준다면 심지어 죽음을 뛰어넘는 것도 가능합니다."
살이 뭉개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거미는 허벅지 안으로 떨어뜨려둔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목소리는 흥분을 담아 조금 거칠어져 있었다.
"하지만 인간은 그 몸을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허약하기 짝이 없는 육체에 몇 십만 년 동안 적응해온 정신이 새 용기에 담길 때 과연 온전히 보존되겠습니까? 죽음을 넘는 것은 경외가 아니라 공포입니다. 사람들은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눈앞의 이점만 보고 달려들 수 없는 영역이라는 건 명백했지요. 그래서 그들은 에덴이란 타협점을 세운 겁니다."
나는 몸을 떨었다. 거미의 말은 이제 한 마디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내가 갇혀 있었던 세계, 기억을 잃은 채 시작조차 모르고 떠돌던 도시와 구차한 삶을 되풀이해 살아왔던 긴 시간들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규정하는 것은 단 한 마디로 충분했다. 그것은 내가 겪을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선고가 될 것이다.
나는 거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몸은 제멋대로 입을 열어 거미를 막았다.
"나는…."
그 기억 속의 감정과 같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정처 모를 눈물. 눈 밖으로 흘러나오진 않았지만 눈시울을 데우기엔 충분했다. 나는 손을 들어 입을 감쌌다. 입을 막지 않으면 그 곳으로 내 안이 터져나갈 지도 몰랐다. 나는 입을 틀어막은 채 중얼거렸다.
"우리는…."
거미가 내게 고개를 돌린 것이 보였다. 표정은 흐릿한 시야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거미가 살짝 고개를 젓는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게 손을 내미는 그가 보인다. 거미는 대체 무엇을 말하려고 한 걸까.
나는 그 것을 알 수 없었다. 갑자기 날아든 충격이 거미를 옆구리부터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욱!"
거미는 힘없이 나가떨어져 철조망까지 나뒹굴었다. 넓은 망이 상당히 긴 거리까지 출렁거린다. 당황한 나는 충격이 전해진 곳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 곳을 채 인식하기도 전에 왼쪽 어깨가 박살이 났다.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물체는 내 어깨를 파고들어 근육을 으스러뜨렸고 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순식간에 어깨를 타고 피가 번졌다. 나는 망가진 왼팔을 붙잡으며 경악한 눈으로 총탄이 날아온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공터의 입구에서 양손으로 잡아도 모자랄 장총을 어깨에 기댄 채 걸어오고 있는 여자가 누구인지는 직감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켈리…!"
잔해들을 밟고 선 켈리는 내 중얼거림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미소를 지었다. 이 거리에서도 알아볼 수 있는 끔찍한 미소였다.

 

 

* * * * * *

 

 

"어떻게…?"
켈리와의 거리는 그녀가 손가락 크기로 보일 만큼 멀었다. 중얼거리는 수준의 말을 알아들을 리 없었지만 그녀는 내 말에 반응했다. 광소에 가까운 웃음으로 공터를 메운 켈리는 장총으로 어깨를 탁탁 두들기며 내게 들릴 만큼 큰 소리로 말했다.
"간단한 추리지. 너는 경계라는 말에 격한 반응을 보였고 실제로 이동 경로도 변방으로 향하고 있었어. 그리고 이곳에서 특별히 갈 만한 경계 지역은 한 군데밖에 없거든? 바로 이곳, 조직들의 처형장이야."
엄청난 속도로 켈리가 걸어온다. 실제로는 산책을 나가듯 가벼운 동작이지만, 제대로 발 디딜 곳이 없는 저 잔해더미에서 그런 걸음은 엄청나게 빠른 종류다. 켈리의 윤곽이 점점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어쩐지 그녀의 몸 구석에는 피도 묻어있는 것 같았다.
"도박에 가까운 선택이었는데, 너희는 날 배신하지 않았어. 그걸로 날 죽인 뒤에 도망친 죄는 사해주도록 하지. 다만, 즉석에서 회가 뜨일 것은 각오해야 할 거야. 빅헤드보다야 못하겠지만 나도 고문에는 자신이 있다고."
나는 켈리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저 년은 보통 미친 게 아니라 아주 뿌리부터 미쳤다. 나는 허리춤에 꽂아뒀던 권총을 찾았다. 그러나 손을 옷 밑으로 가져간 순간 켈리의 장총이 다시 불을 뿜었다.
"크윽!"
발등이 관통당한 것 같다. 나는 발에서 피를 흘리며 무릎을 굽혔다. 그러나 어제 그 고생을 한 덕분인지 고통을 참는 것은 한결 쉬웠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어떻게든 활로를 찾기 위해 켈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내 눈빛을 어떻게 받아들인 걸까, 켈리는 피식 웃으며 장총의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그 대신 총열의 중간을 잡은 켈리는 상처로 신음하는 내 앞에 당당히 섰다.
"지금쯤 놀라고 있겠지."
놀라긴, 자식아. 구역질이 난다. 하지만 자신에게 도취된 켈리에겐 내 경멸의 눈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행동하는 데 아무런 위험도 없다는 듯이 총 끝으로 내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설령 태어난 직후에 목적지를 알았다 해도, 이 거리를 맨몸으로 달려오는 건 시간상 불가능하니까 말이야. 하지만 난 성공했어. 왜인지 알아?"
그 질문과 함께 탁, 하고 총신은 내 머리 위를 짓눌렀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진 나는 그 총을 옆으로 쳐낸 뒤 벼락같은 속도로 허리춤의 권총을 뽑아 켈리의 이마에 겨누었다.
"궁금해 한 적 없어!"
빠르다. 내가 생각해도 그 동작은 정말 빨랐다. 설령 거미였다 해도 이 겨냥은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켈리도 마찬가지였지만, 나는 그녀가 반응하지 못한 게 아니라 일부러 서 있던 게 아닌가 의심했다. 하지만 그런 망설임은 내가 방아쇠를 당기는 것까지 막지는 않았다.
탕!
손을 타고 오는 격심한 진동을 느낀다. 나는 뒤로 넘어가는 켈리의 머리를 보며 죽음을 확신했다. 그건 의심할 수 없는 일격이었다. 아직 사라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하지만 발사 후의 몇 초는, 정말 지독하게 오랫동안 흘러갔다.
격발된 슬라이드가 뒤로 후퇴하며 가스압으로 탄피를 뿜어낸다. 연기가 나는 총구 앞에는 한 걸음 물러선 붉은 머리 여자가 있다. 뒤로 가뜩 젖혀진 그 이마에서는 당장이라도 피가 뿜어 나올 것 같지만, 눈앞을 적시는 붉은색은 어디에도 없다. 잠시 후 그녀가 고개를 내렸을 때, 그리고 생기가 죽지 않은 두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을 때, 나는 공포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말도 안 돼."
붉은 실 몇 줄이 켈리의 얼굴을 가로지른다. 켈리는 피투성이가 된 이마에 손을 가져다대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살이 찢어지는 기괴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손에는 피 묻은 탄환이 쥐여 나왔다. 그 탄환을 내팽개친 켈리는 입술로 들어간 핏줄기를 살짝 핥았다.
"조금 만용이었나. 역시 이 거리에서 맞는 건 상당히 아파."
켈리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다음 순간 그녀가 무엇을 할지 짐작한 나는 온전한 한 발로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간발의 차로 내가 앉아있던 곳이 흙먼지를 튀기며 부서져 올랐다. 나는 꼴사나운 것도 잊은 채 다친 몸을 이끌고 허겁지겁 잔해 뒤에 숨었다.
켈리는 기분 나쁘게 웃기만 할 뿐 서둘러 나를 추격하려 들진 않는다. 어차피 그녀에게 이 상황은 잔인한 놀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엉성한 잔해 뒤에 등을 기댄 나는 낙담하며 뒤통수를 쿵쿵 찧었다. 이마에 대고 쏴도 멀쩡한 년이라면 이 거리에서는 돌멩이를 던지나 총을 쏘나 다를 게 없잖아! 기껏 약점이라 할 만한 곳은 입 안이나 한 번 다친 이마 정도뿐이지만 그것도 그나마 가까이 접근한 뒤의 일이다. 어깨와 발이 하나씩 박살난 이 몸으로는 거기까지 멀쩡하게 접근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고 보니, 빚진 녀석은 한 명 더 있었지."
귀가 번쩍 뜨였다. 켈리는 거미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는 거미가 날아갔던 철조망으로 걸어갔고 그 이상은 잔해의 언덕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골머리를 앓으며 장소를 옮긴 내가 철조망에 기대앉아 있는 거미를 발견했을 때, 내게서 등을 돌린 켈리가 말했다.
"기억나진 않지만, 날 죽인 녀석은 너라고 하더군. 거미. 일 관계로 만났을 땐 뒤탈 없이 지내는 게 관례이지만, 직접 죽고 나서야 그럴 순 없지. 저 뒤에 숨어있는 년이랑 나란히 살을 발라주겠어. 터프한 몸이시니 그 정도는 참을 수 있겠지?"
"터프? 발라내기는커녕 칼로 한 번만 쑤셔도 죽을 거다."
거미는 옆구리가 터진 주제에 태연하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말했다.
"어떻게 이마에 총을 맞고도 멀쩡한 거냐. 켈리."
"아하! 역시 거미는 달라. 물어봐야 할 걸 정확하게 물어봐주는군."
켈리는 기분 좋게 웃으며 총을 목 뒤에 받쳤다. 그녀는 그 총이 안마기라도 되는 양 목 뒤를 두들기며 자신이 벌인 일을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숙소'에서 깨어났을 땐, 저 년을 해체하려던 차에 네가 침입한 걸 알아챈 이후로 기억이 없었지. 얘기를 들어보니 잘도 우릴 따돌리고 저 년을 빼갔더군. 그런데 멍청한 부하 놈들은 코앞까지 추적해놓고 내가 죽으니까 손을 털어버렸어. 도움도 안 되는 잡것들, 그 목숨이라도 유용하게 써야지."
거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 또한 그녀가 한 짓을 눈치 채고 전율에 떨었다. 거미는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설마 전부 죽인 건가? 힘을 키우기 위해?"
"물론. 내 눈 앞에 보인 녀석은 하나도 빼지 않고 전부 다 말야. 설마 총알까지 막겠냐고 생각했는데, 가능하더군. 난 지금 이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즐겁게 목록을 세 보고 있어. 1, 2번은 너희들의 해체로 정해놨지만 말야."
켈리의 말은 나를 오싹하게 했다. 거미는 고통 때문인지 당황 때문인지 모를 이유로 얼굴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바보냐? 그들을 모두 적으로 돌리면 너라고 해서 살아남지 못해. 얌전히 죽게 놔두지도 않을걸. 영원히 고문터에 끌려가서 해체당하는 꼴을 맛보고 싶나?"
"그것들이 그럴 수 있게 될 때에 난 이미 여기에 없을 거야. 그리고 한 번 죽은 게 뭐 대수라고, 기억나지도 않는 일로 화내야 한다는 게 우습잖아?"
"자기부터 부정하는군. 켈리. 우릴 따라온 건 네 죽음에 대한 복수 아니었냐."
켈리는 하, 하고 웃었다.
"아니. 이건 그냥 놀이야."
"놀이?"
"그래, 놀이."
말을 마친 켈리는 장총을 똑바로 잡고 아래를 향해 쏘았다. 거미의 얼굴로 피가 팍 튀겨 오른다. 나는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 했다. 거미는 켈리에게 가려 보이지 않는 상처 부위를 붙잡고 비명을 질렀다. 고통에 신음하는 거미를 내려다본 채 켈리는 킥킥거렸다.
"10번가의 그 머저리 알아? 같은 옥상에서 매번 뛰어내려 골통을 깨지. 그렇게 얼마나 죽었는지 이젠 말하는 것조차 잊어버렸고, 바닥은 보도가 깨지다 못해 흙바닥조차 구덩이가 패일 지경인데 투신을 절대로 그치지 않아. 왜지?"
나는 결심했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일단 시도해봐야 한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거미는 죽고 만다. 나는 켈리의 뒤편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다친 몸으로 소리 없이 다가간다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었지만, 그리고 신체 능력이 비약적으로 올라간 켈리가 그걸 눈치 채지 못할 가능성은 바닥에 가까웠지만, 나는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죽을 줄 모르는 멍청이들은 긴장이란 게 없지. 마약을 처먹거나 여자랑 퍼질러 자도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고 살아. 그런 점에서 이곳은 그나마 마음에 든 곳이야. 어떻게 하면 적게 죽고 많이 죽일 수 있을까. 목숨을 건 규칙 아래 암묵적인 룰을 세우고 편을 갈라서 치고받고 싸우지. 미치는 걸 막는 방법으론 신선하지만 그것도 이젠 질렸어."
켈리의 올려 묶은 머리 아래 하얀 목덜미가 드러나 보인다. 제아무리 튼튼한 몸이라 해도 목뼈가 나가면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어쩌다 흘러들어온 년들을 꽤서 팔아넘기는 것도 지겹고, 사내애들 안 미치게 싸움 붙여주는 일도 지겨워. 때마침 찾아온 너희들은 신선한 활력소였어. 거미 너는 홀몸으로 조직들을 오가는 주제에 한 번도 죽지 않는 이상한 녀석이었고, 내 뒤에 숨어있을 년은 처음으로 내 몸에다 총질을 한 건방진 여자였지. 마지막 길에 한 가지 물어볼께. 거미. 보아하니 너는 특별히 몸이 튼튼한 것 같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 긴 시간 동안 한 번도 죽지 않았지?"
거미의 얼굴은 눈에 띄게 창백했다. 얼굴에 튄 피가 대조되어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지금 당장 눈을 감고 죽어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이는 거미는 스러져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너희들처럼… 여벌의 목숨이 없으니까."
한 순간 거미의 시선이 나와 교차했다. 나는 그 짧은 순간 그의 눈빛에 실린 힘을 읽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찰나였기에 나는 그가 전하고자 한 걸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뭐였지? 내가 당황한 사이 거미는 불분명한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네 놈들은… 총의 무게를 몰라. 아침에 쏘아죽인 녀석을 저녁에 길가에서 만날 수 있는 것들이니 당연하지. 나는 너희들과 달라. 죽으면 그 다음은 없다. 지금까지 이 거리에서 수백 번은 넘게 총격전을 벌였지만, 그 중 나 이상으로 공포와 긴장에 떨었던 녀석은 아무도 없었을 거야. 그런 것들이 날 죽인다고? 나는 소년기를 부활 없는 거리에서 보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목숨 값을 모르는 놈들에게 죽는다면 그 거리에서 죽어 다시는 태어나지 못할 사람들에게 미안해지지."
나는 거미가 힘겹게 말을 계속하는 걸 보고 거미의 의도를 눈치 챘다. 그는 켈리의 주의를 자기 쪽으로 끌려고 하고 있었다. 그가 그 일에 사력을 다하고 있다는 걸 느낀 나는 그 희생에 최대한 응하기로 했다.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켈리에게 다가가는 동안 거미의 말은 이어졌다.
"말로는 남자들을 어르는 역할인 양 잘난 척 하고 있지만, 내가 보기엔 달라. 켈리. 네가 가장 위험한 부류야. 가짜 긴장조차 갖지 못해 공허함을 견디지 못하는 것들이지.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짓을 봐. 이게 제정신을 가진 인간이라고 보이나? 넌 완전히 미쳤어! 켈리! 네가 다루는 남자들과는 달리 네 년을 통제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닥쳐!"
켈리는 갑자기 지금까지의 태도를 버린 채 버럭 고함을 지르며 총구 끝으로 거미의 이마를 찍었다. 또다시 출렁 하고 철조망에 파도가 인다. 방아쇠 한 방이면 거미의 머리가 박살날 상황에서 켈리는 웃음기가 사라진 말투로 빠르게 지껄였다.
"이게 다 네 놈들이 벌인 짓이잖아! 난 알아. 거미, 넌 에덴인이 아니지? 이 에덴을 만들고 밖에서 구경하고 있는 놈들과 한패일 테지? 숨길 생각 하지 마. 네놈이 오기 전에도 너 같이 겉도는 녀석이 몇 명 있었거든. 어느 조직에도 붙지 않고, 시간이 지나도 변색될 뿐 없어지지 않는 피를 흘리는 놈이 말이야. 물론 몇 달 만에 다 뒈졌지만, 넌 다르더군. 그런데 그런 놈들이 왜 꼭 한 명씩 줄줄이 나타나는 걸까?"
켈리는 총으로 거미의 머리를 밀어붙였다. 거미는 이를 악물며 총과 철조망 사이에 끼인 고통에서 저항했다. 괜찮아, 조금만 더 가면 돼. 조금만 더 가면 저 년의 목덜미에 대고…!
"내가 이 도시가 핵전쟁으로 세워졌다고 착각할 줄 알았어? 에덴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걸 믿을 줄 알았나? 헛소리! 이 총들, 이 건물들, 게다가 도심에서 바글대는 차! 이런 게 이 조그만 도시 하나로 수십 년 동안 지탱될 리가 없잖아! 네놈들이 우릴 만들었어! 목숨 하나에 살려달라고 벌벌 떠는 비굴한 놈들이 죽지 않는 우리를 만들고 에덴 속에 가둬 키웠어! 내가 이 몸으로 뭘 할 건지 말했던가? 에덴을 쓸 거야. 이 빌어먹을 도시의 심장에 가서 싸그리 없애버릴 거야! 그리고 안전할 거라 생각했던 네 놈들의 심장에다 총알을 박고 말 테다!"
켈리의 절절한 외침은 순간 내 동작을 멈추게 했다. 빠져나간 피 때문일까, 눈앞이 일순간 노랗게 바뀌었다. 비틀거리며 바닥에 쓰러질 뻔한 것을 나는 간신히 참았다.
일순간… 일순간이지만 나는 켈리를 죽이고 싶지 않다는 충동을 느꼈다. 나도 그녀와 똑같았다. 나를 이렇게 만든 에덴 밖의 무리들에게 총을 겨누고 싶었다. 하지만 그 순간 눈에 비친 거미의 죽어가는 모습은 내 마음을 바로잡게 했다. 에덴이 무엇이든, 에덴 밖이 무엇이든 지금은 중요하지 않다. 그 순간 나를 움직이는 것은 거미를 살려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본능과도 가까운 명령이었다.
"켈리!"
앞으로 달려가며 바보같이 그녀를 불러 주의를 끌었다. 붉은 머리채가 회전을 따라 한 바퀴 돈다. 그렇게라도 부르지 않으면 그가 거미를 죽일 것이란 생각이었을까. 이미 목덜미를 노리는 건 실패했지만, 나는 대신 이 쪽으로 돌아선 그녀의 이마를 노리고 권총을 겨눴다. 다음 순간 내 몸이 산산이 부서진다 해도, 지금 당장 그녀를 죽일 수만 있다면-.
쾅!
쥐인 권총이 박살났다. 조각이 산산이 튀어 내 얼굴에 상처를 냈다. 손까지 피떡이 되는 게 아닌가 의심했지만, 다행히 켈리가 쏜 총알은 내 총만을 부수어버렸다. 그러나 그 손도 어젯밤 회복시켜두지 않았다면 손가락 한두 개는 각오해야 했을 것이다.
무기를 잃은 나는 균형을 잃고 뒤로 나가떨어졌다. 쓰러진 눈앞에 내게 장총을 겨누는 켈리의 분노한 모습이 보인다. 나는 찾아올 죽음을 각오하며 주먹을 꾹 쥐었다. 켈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게…."
터엉!
그러나 켈리는 나를 채 쏘지도 못한 채 허리를 뒤로 젖힌 자세로 날아가 버렸다. 내 머리 위를 지나 한참 떨어진 곳에 가서야 바닥을 뒹구는 그녀를 보고 나는 황당함을 금할 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켈리의 모습을 확인하기 전에 거미의 손에 쥐인 샷건을 보았다. 맙소사, 그 와중에 가방에서 무기를 꺼낸 것도 대단하지만 저 몸으로 그런 무식한 총을 썼단 말이야?
"미쳤어요?"
나는 황급히 거미의 옆에 미끄러지다시피 해서 내려왔다. 거미는 고통으로 앙다문 입을 가지고도 잘도 웃었다.
"크크큭. 덕… 분에 이 팔은 못 쓰게 됐군요."
"지금 그렇게 웃을 때가…."
"됐으니까 빨리 한 번 더 쏴요!"
거미가 피를 토하듯이 외쳤다. 정신이 든 나는 거미의 손에서 샷건을 뺏어들고 켈리를 겨눴다. 그녀는 등에 산탄이 박혀 피투성이가 된 주제에 멀쩡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성보다 공포가 먼저 몸을 감싼 나는 그녀를 향해 주저 없이 샷건을 날렸다. 좀비처럼 비뚜름한 자세로 서 있던 켈리는 힘없이 뒤로 날아갔다.
"한 번 더!"
쾅! 아까보다 거리는 멀었지만 효과가 있었다. 거의 공터 중앙까지 가서야 굴러가는 몸을 멈춘 켈리는 일어날 기색이 없었다. 하지만 몸이 사라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죽은 건 아니었다. 그 때 거미가 나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끝에서 작은 램프가 점멸하고 있는 그것은 권총의 탄창처럼 생겼지만 총알이 있어야 할 부분은 그저 밋밋하게 때워져 있을 뿐이었다. 이게 대체 뭐길래? 의아해하는 나에게 거미가 다급하게 말했다.
"빨리 던져요. 몇 초 후면 폭발해!"
폭탄이었냐!
나는 경악할 틈도 없이 켈리를 향해 탄창 폭탄을 집어던졌다. 그것은 마치 똑같은 크기의 돌멩이를 던진 것처럼 밋밋하게 바닥에 튕겨 나뒹굴었다. 급하게 던진 폭탄은 쓰러진 켈리의 가까이에도 가지 못하고 멀찍이서 멈췄다. 나는 효과가 있을 것인지 의심했지만, 거미는 내 소매를 붙잡고 언덕의 틈바구니로 들어가기 위해 애썼다. 내가 낑낑대는 그를 잔해 밑에 집어넣고 막 구멍 안에 발을 내딛었을 때, 점멸하던 폭탄이 마침내 터졌다.
쿠와아앙-!
귀를 찢는 폭음과 함께 뜨거운 폭풍이 내 등을 쳐댔다. 파편들이 날아드는 속도는 내 몸을 찢고도 남을 정도다. 실제로 폭풍이 밀려오는 그 수 초만에 셔츠의 등 부분은 채찍에 맞은 것처럼 너덜너덜해졌다. 나는 거미의 머리를 안은 채 폭발이 빨리 끝나기를 간절하게 빌었다. 불길한 소리와 함께 언덕이 요동을 친다. 이대로 잔해가 무너져서 우리를 깔아뭉개는 게 아닐까 절망하던 차에, 마침내 공기가 잠잠해졌다.
나는 잔해 밖으로 나와 거미를 끌어냈다. 폭발 후의 공터는 흙먼지 탓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비죽비죽한 잔해로 넘치던 그 곳은 이제 말끔한 구덩이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켈리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크기는 조그만 주제에 정말 무식한 파괴력이다.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며 거미에게 따졌다.
"당신 저런 걸 가방 안에 넣어 다닌 거예요?"
"걱정 마시죠. 제 신호가 없으면 코끼리가 밟아도 멀쩡하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때 거미가 거센 기침을 토해냈다. 그 끝에 피가 묻어나오는 걸 보고 나는 인상을 굳혔다. 피를 토할 정도라면 내상이 심각한 수준이란 말이다. 나는 서둘러 거미를 그나마 먼지가 없는 곳으로 옮겼다. 조금 더 자세히 그의 몸을 들여다보니,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심각한 상처들이었다. 나는 그가 이제 제 발로 일어설 수 없을 것이란 걸 확신했다.
"당신…."
나는 뒷말을 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누구보다 헌신적이었던 그, 나를 경계 밖으로 보내기 위해 전심을 다했던 그가 이제 경계를 앞에 둔 채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이걸 운명의 장난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에게 꺼낼 말을 찾지 못한 나는 그저 말없이 입가에 흐른 피를 닦아주는 수밖에 없었다. 거미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웃음 지었다.
"울지 않는군요."
"…바보 따윌 위해 울어주진 않아요."
"그러면… 바보를 위해 수첩을 가져다주시겠습니까? 이제… 접선자에게 연락이 들어올 때가 되었으니까요."
거미가 간신히 내뱉는 말에 아까 그가 조작하던 수첩이 생각이 났다. 아마 외부와 이곳을 중계하는 컴퓨터였으리라. 마지막으로 올려놓은 장소는 기억이 나지만, 이 폭발 속에서 수첩이 멀쩡히 남아있을 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나는 거미를 얌전히 눕힌 뒤 수첩이 있던 곳으로 걸어갔다.
먼지구름을 헤치며 수첩을 찾았다. 그것은 본래 장소에서 한참 튕겨있긴 했지만, 다행히 눈에 보이는 곳에 끼여 있었다. 잔해 사이로 비죽 튀어나온 수첩을 본 나는 반색하며 언덕을 올라갔다. 그것은 경계를 넘는 언덕의 거의 중턱에 닿아 있었다. 건너편으로 넘어간 부분과 다를 게 없는 언덕이지만, 철조망이 만드는 가상의 선을 넘으면 몸이 증발해버린다는 게 상상이 되질 않는다. 나는 아무런 방해자도 없으리라는 생각과 함께, 태연하게 멀쩡한 손을 들어 수첩을 집었다.
그리고 그 손은 연기를 헤치고 나온 피투성이 손에 붙잡혔다.
"으앗!"
놀란 나는 잔해를 잘못 밟고 미끄러졌다. 언덕에 등을 댄 채 누워있는 내 눈앞에 손의 주인이 드러났다. 연기 너머에서 얼굴을 들이민 그 자는, 틀림없이 폭발에 죽었어야 할 피투성이의 켈리였다.
나는 설명할 수 없는 광경을 눈앞에 두고 몸을 떨었다. 그 폭발에서도 살아남다니 이건 이미 인간을 뛰어넘은 괴물이다. 물론, 그녀도 멀쩡한 건 아니어서 내 팔을 잡은 반대쪽 반신은 대부분이 날아간 상태였다. 귀에서부터 한쪽 눈알까지가 사라진 켈리는 비틀린 입을 열어 신음 같은 말을 뱉어냈다. 피부가 날아간 채 표정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그 얼굴은 너무나 끔찍해서 살아있다는 걸 의심케 할 정도였다.
"어째서… 방해… 하는 거야."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할 말이 있다 해도 꺼내고 싶지가 않았다. 켈리는 하나뿐인 손으로 내 목을 붙잡았다. 다 죽어가는 자의 손이지만, 본래 힘이 너무나 강했기에 그 손은 내 목을 비틀기엔 충분한 악력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감히 그녀를 막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켈리가 저주스럽게 토해내는 말들을 그대로 받아야 했다.
"너도… 에덴의… 꼭두각시인… 주제에!"
맞는 말이다. 목이 붙잡혀 그럴 수 없었지만, 나는 마음속이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켈리에게 공감하고 있었다. 그녀처럼 에덴의 밖에 있는 사람들을 저주하고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나에겐 지켜야 할 사람이 있었으니까.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을 만큼 살려야 할 사람이 있었으니까.
어째서 그에게 이렇게까지 간절한 느낌을 갖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추억은 내가 아닌 '그녀'의 것에 불과하다. 단순히 도움 받은 것에 대한 보상 심리일까. 그런 반사적인 반응으로 해석하기에 내 감정은 너무도 깊고 슬프다.
"죽일… 테야!"
목뼈에서 기괴한 소리가 난다. 이대로 힘을 빼고 죽어버릴까 생각했다. 내 목을 비트는 것으로 그녀의 분노가 조금이라도 풀린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내가 그녀의 복수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족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건 정말 유혹적인 충동이었지만, 난 그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켈리의 손목을 잡았다. 한 손은 무리였지만 다른 손을 보태자 균형이 기울어졌다. 망가진 어깨가 고통스럽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켈리의 눈이 절망으로 일그러진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은 붉게 충혈된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차라리 눈물을 흘리는 편이 덜 슬펐을 것이다. 나는 차마 그 얼굴을 바라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켈리의 손은 내 목에서 차츰차츰 멀어져 갔다.
"크아악!"
일순간, 켈리는 외마디 괴성을 지르며 무시무시한 힘으로 내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그녀는 내 목을 아예 찢으려는지 손가락을 세워 내 목에 박아 넣었다.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고통이 전신에 엄습했다. 나는 몸을 버둥거리며 켈리를 떼어내려 했지만 그녀는 떨어지지 않았다. 눈앞이 흐려진다. 이제 난 '숙소'로 돌아가게 되는 건가…?
하지만 켈리는 날 내버려두고 일어났다.
갑자기 고통에서 해방된 나는 놀란 눈으로 켈리를 바라보았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 또한 놀란 것에 있어선 나 이상인 듯 했다. 연기가 상당히 걷힌 후에 나는 그녀가 자의로 일어선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켈리의 목덜미를 잡고 있는 거대한 손, 그 손의 주인이 켈리를 억지로 떼어낸 것이었다.
"넌…!"
켈리가 말 그대로 피를 토하며 소리쳤다. 나는 그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니트 모자로 짧은 머리카락을 감춘 청년은 망가진 장난감 같은 켈리의 몸을 쥔 채 언덕을 올라갔다.
"빅헤드!"
"아니, 에스라트다."
내 호명을 무덤덤하게 교정한 빅헤드, 아니 에스라트는 언덕의 꼭대기에 섰다. 이제 거기서 조금만 나가면 에덴인은 기억을 잃고 다른 곳의 '숙소'로 떨어지게 된다. 그것은 죽음이라고도 죽음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어정쩡한 소멸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켈리에게는 죽음이 맞을 것이다. 그녀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불가사의할 정도로 또렷한 목소리로 갑자기 나타난 에스라트를 질타했다.
"빅헤드! 이게 무슨 짓이야!"
"이제 쉬어야 할 시간이다. 켈리. 넌 지나치게 큰일을 벌였어."
"속지 마! 이 멍청아! 우린 에덴 밖의 사람들에게 사육당하는 버러지다! 현실을 똑바로 봐! 이 도시가 어떻게 홀로 유지될 수 있는지를! 에덴 시는 단지 그럴싸하게 만들어진 서커스 장에 불과하단 말이야!"
"그래. 내가 그렇게 만들었지."
"뭐?"
마지막의 얼빠진 되물음은 켈리와 내가 동시에 내뱉은 말이었다. 에스라트는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내가 그 죄악을 만드는 걸 도왔어. 그리고 스스로 그 속에 뛰어드는 얼빠진 짓을 했지. 언제 기억해낼 지 모르겠지만, 지금 너에게 사과한다. 켈리."
"그만 둬…!"
켈리의 외침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말을 마친 에스라트가 켈리를 언덕 너머로 집어던졌기 때문이다. 이미 몸 절반이 날아간 그녀다. 켈리는 변변찮은 반항도 못한 채 걸레처럼 언덕을 나뒹굴다가, 그대로 사라졌다.
너무도 허망한 죽음이었다. 이제 12시간 후면 그녀는 도심의 어딘가에서 기억을 잃은 채 깨어나겠지. 켈리란 이름을 기억해낼지도 의심스럽다. 설령 그녀가 이름을 안다 해도, 이제 외곽에서 광기에 사로잡혔던 켈리란 인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망각은 그렇게 덧없다.
나는 멍한 눈으로 에스라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는 어딘가 다른 분위기였다. 내게 다가온 에스라트는 다친 내 몸을 안아들었다. 나는 상황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다급히 수첩을 가리켰다.
"저, 저걸…!"
빅헤드는 내가 가리킨 곳을 힐끔 보고는 무릎을 굽혀 수첩을 주워들었다. 한 손으로 수첩을 펼쳤다 닫은 그는 가벼운 웃음을 띠었다.
"재미있는 물건이군."
"뭔…지 알아?"
"아니."
나는 순간 다친 어깨도 잊고 에스라트를 때려주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러나 에스라트는 웃음기를 지우고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저 아이에게 물어보면 알 테지."
저 편에 누워있을 거미를 떠올린 나는 기분이 침울해지는 걸 느꼈다. 한편으로는 거미를 예전과 다르게 지칭하는 에스라트에게 의문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거미에게 걸어갔다. 그의 곁까지 와서 나를 바닥에 내려준 에스라트는 수첩을 거미의 손에 쥐어 주었다. 거미는 그 팔을 들어 올리지도 못한 채 눈만을 돌려 무릎 꿇은 에스라트를 보았다. 에스라트가 말했다.
"뒤늦게 기억해냈다. 왜 너희들에게 그런 호감을 느꼈었는지. 곧바로 켈리를 뒤쫓아 왔지만 너무 늦었던 것 같군."
에스라트는 침통하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거미는 옅게 웃었다.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은 기침을 내뱉은 그는 가래 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랬군. 당신이…. 뒤늦게라도 기억해주니 다행이군요."
"잠깐만요.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죠? 뭘 기억해낸단 말이에요?"
이상한 예감을 느낀 나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에스라트는 우울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나를 못내 불안하게 만들었다. 에스라트는 내게 넌지시 물었다.
"기억나지 않나?"
"도대체 뭘…."
"20년 전 우리는 동료였다. 나는 의체를 다루는 기술자였고 너는 에덴의 네트워크를 총괄하는 프로그래머였지. 에덴의 특성상 분야는 달랐지만 활발한 의견 교환이 필요했던 우리는 다른 동료들을 포함해 꽤나 절친한 사이였다. 그리고 반에덴주의자들의 테러가 벌어졌지."
심장이 망치로 으깨지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정말로 한 순간의 일이었다. 불현듯 잊고 있던 기억들이 깨어진 심장의 틈바구니에서 새어나왔다. 온몸을 저릿하게 만드는 기억의 홍수는 '나'라고 하는 존재를 불시에 씻어버렸다. 내가 '나'인가? 내가 '그녀'인가? 나는 '나'도 아니고 '그녀'도 아닌 그 모든 걸 끌어안는 나였다. 절망스러운 과거가 나를 벼락처럼 내리꽂는다. 나는 비틀거리며 에스라트에게서 기듯이 물러났다.
"아…냐."
나는 경악한 눈으로 거미를 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별 생각 없이 보고 있던 남자의 얼굴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진다.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저 청록색 니트모의 남자도 그렇다. 내가 앉아있는 땅, 건조하게 불어 닥치는 공기, 그리고 그 아래 존재하는 나, 그 모든 게 부조리하기만 했다.
"난…."
어떻게 잊고 살았던 거지. 어떻게 모르고 있었던 거지. 기억을 잃고 나서부터의 행동들이 따갑게 나를 찔러댔다. 아무 것도 모른다는 이유로 상처주고 있었다. 알지 못하기에 더욱 잔인해질 수 있는 방법으로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환멸감이 나를 뒤흔들어버렸다. 나는 떨리는 손을 들어 에스라트를 가리켰다.
"에스라…트."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슬라브인. 30대로 접어든 지도 오래인 주제에 밤낮으로 의체를 해부해도 끄떡 않는 무쇠 체력이 자랑이었던 남자. 연구소 내부가 금연이라는 이유로 테라스로 쫓겨나와 쓸쓸하게 담배를 무는 걸 볼 때면 반하겠다고 농담을 던지곤 한 내 친한 친구.
그는 내가 그를 기억해냈다는 걸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거미가 있었다. 온갖 인종들이 넘치는 에덴 시에서 그와 나는 뿌리칠 수 없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검은 머리. 갈색 눈. 노란 피부. 그리고 성인이 된 지금도 남아있는 어릴 적의 흔적들.
눈물을 흘리고 싶은데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울면서 슬픔을 씻어내고 싶은데 내 몸이 그렇게 놔두질 않는다. 대신 나는 양손으로 입을 감쌌다. 울지 않는 눈으로 흐느낀다는 것은 모순된 행동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했다. 실제로 내 목소리는 우는 때보다 더 심하게 떨리고 있었으니까.
"당… 신은…."
거미는 반쯤 감긴 눈으로 나를 보았다. 차마 입을 더 뗄 수 없었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이제 당신을 기억한다고, 우리가 어떤 과거를 공유했는지 기억한다고 그렇게 전해주었다. 하지만 그 기억은 사람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비참한 이야기였다.
"윤… 하."
나는 마침내 거미의 이름을 말했다. 윤하. 성 윤하. 말인지 신음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발음이었지만 거미는 눈을 감았다. 틀림없이 그는 이해했으리라. 그리고 그 얼굴에 드러난 표정은 어쩐지 우는 것 같기도 했다.
윤하.
그것은 내 하나뿐인 아들의 이름이다.

 

 

* * * * * *

 

 

지금으로부터 약 100여 년 전, 인간은 인간의 영혼을 데이터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기적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 아래에는 치밀한 연구과 뼈를 깎는 노력이 있긴 했지만, 얻어낸 성과에 비하면 그것은 기적을 치장하는 작은 장식에 불과하다. 심지어 개발자 자신도 자신이 얻어낸 결과를 믿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결과가 과학계에 발표된 직후 전 세계는 일대 혼란에 휩싸였다.
이제 인간은 인간을 하드디스크에 복사해서 다니게 되었나? 0과 1의 기호로 인간을 정의내릴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과학자들은 그것이 시기상조임을 깨달았다.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다. 데이터화한 인간의 영혼은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DNA의 배열 지도와도 같다. 인간의 염기서열이 밝혀진 것은 까마득한 옛날이지만 아무도 그 자체를 인간이라고 부르진 않는다. 그들은 단지 소프트웨어만을 구축했을 뿐, 그것이 활동할 하드웨어까지 마련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영혼의 데이터화 기술이 밝혀진 지 36여 년 후에, 그에 버금갈 만한 성과가 세상에 등장했다.
의체라고 불리는 그것은 거의 인간과 흡사한 몸이었다. 따라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약점도 몇 가지 갖고 있었다. 의체는 때때로 물을 마시거나 잠을 자줘야 하며, 꽁무니에서 불을 뿜으며 하늘을 날거나 달려오는 열차를 한 손으로 막는 짓은 하지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인간의 원래 육체에 비하면 그 몸은 대단히 편리했다. 음식을 먹는 대신 체내 소자의 자체 동력을 사용하며, 극히 낮은 효율이지만 태양빛을 통한 충전도 가능하다. 또한 정밀하게 설계된 뼈와 근육은 보통의 인간 이상의 하중을 견딜 수도 있다. 그리고 가장 큰 장점은, 당연한 말이지만, 데이터화된 영혼을 받아들일 수 있던 것이었다.
이제 인류의 운명은 희극적인 의미에서 종말에 다다랐다. 이런 몸이라면 누구라도 의체로 갈아타려 할 것이다. 하지만 두 가지 족쇄가 그들을 가로막았다. 하나는 의체의 생식이 불가능하단 점이고, 다른 하나는 약간의 신호만 있으면 의체를 산산 조각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의체의 설계 과정에서 발생한 부작용인 그 특수 신호는, 의체를 마이크로에서 나노 단위에까지 이르는 기본 소자로 분해해 깨끗하게 증발시킨다. 총이나 독약보다 훨씬 편리한 살해 방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의체를 원하는 사람들은 갈수록 늘어만 갔다. 대부분이 생식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노년층이거나 본래 몸이 추스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장애인 또는 알코올 중독자들이었다. 선거 시 적지 않은 영향을 줄 집단들에 대해 정계는 골머리를 앓았다. 그러나 그들의 지지만 믿고 무책임하게 의체를 배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의체와 데이터화된 영혼을 통해 얻는 영속성은 지금까지 인류가 만들어온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파괴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들이 취한 타협안이 바로 에덴이었다. 영속성을 가진 의체가 인류의 생활방식을 공유할 때 발생하는 각종 사회적 현상의 관찰을 목적으로 한 그 인공 도시는, UN의 지도하에 외부와의 교란 - 더 나아가 반대자들의 접근 - 을 막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의 사막 한가운데 건설되었다. 그리고 에덴이 완공된 후, UN은 소수의 희망자와 다수의 범죄자들을 모아 총 12만 여 명에 달하는 인간을 그 구성원으로 삼았다. 거주민 전원은 의체로 갈아탄 뒤 뇌사 상태가 되어 세계 각지의 병원에 장기를 기증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인간의 본래 몸에서 의체로 영혼이 복사될 때 그들은 많은 기억을 잃었다. 때로는 정상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먼저 그런 자들을 위한 구제 제도를 마련한 시청은, 정상 생활을 가장하기 위한 일거리와 배경을 던져주었다. 사람들은 핵전쟁 하에 자신들만이 살아남았다고 굳게 믿으며 에덴 안에서 생활했다. 의혹을 피하기 위해 이공계열 직업은 배제되었으며, 시청 업무도 극히 하위직으로 제한되었다. 나중에는 범죄 문제를 다루기 위해 고의적으로 빈민 구역을 조장하기도 했다. 삐거덕거림은 많았지만, 여러 차례의 조정 끝에 UN은 그럴싸한 시스템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들이 만든 또 하나의 구조는 '숙소' 시스템이다.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의체가 자연사할 일은 극히 드물었지만, 12만 명이 사는 도시라면 사고로 목숨을 잃을 여지는 많다. 그들을 부활시키기 위해 도시에는 보이지 않는 광역망이 깔려 있었다. 사망 당시의 영혼을 다운로드한 메인 시스템은 가까운 '숙소'에서 그 데이터를 바탕으로 의체를 새롭게 제조한다. 영혼에 기록된 유전 정보에 따라 세포나 다름없는 기본 소자들을 모아 최적의 육체를 만드는 것이다. 한편 사망에 이른 육체는 자동으로 분해되고, 적은 양이나마 수거돼 새로운 의체의 제조에 이용한다.
그 밖에도 에덴에는 복잡한 시스템이 많았다. 이를테면 지역별로 의체의 조건을 달리 해, 그 행동 패턴을 분석하여 궁극적으로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끌어내는 것이다. 실제로 에덴을 대상으로 한 심리학, 사회학적 논문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다양하다. 그리고 그런 인문학적 성과는 에덴 건설 후 약 30년 만에 투입된 나와는 큰 상관이 없었다.
나는 에덴의 메인 시스템을 관리하는 프로그래머였다. 그 당시는 인간의 존엄성 파괴다 뭐다 해서 반에덴주의 운동이 한창 격렬해지던 때였지만, 슬하에 어린 아들을 둔 이혼녀에게 높은 봉급은 물론 숙소까지 제공하는 에덴은 분명히 매력적인 장소였다. 구성원이 모두 20대 초반의 몸을 가진 에덴에서 정상적인 교육이 가능할까 고민도 했지만, 내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안에서 약, 6년을 보낸 듯하다.
아들, 윤하는 열 살이 되었고 나는 서른아홉 살이 되었다. 돈은 충분히 모였고 아들도 클 만큼 컸다. 슬슬 에덴 밖의 생활을 생각해볼 때였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시청에서 회의가 있던 날, 나는 주변의 어린애가 혼자뿐이라 그런지 유난히 어리광을 떠는 윤하를 안은 채 뒷좌석에서 에덴 시청에게 후임을 물색해두라고 요구할 생각을 했다. 그 결정이 1년만 빨랐더라면. 그랬더라면 나는 한국에서 그 사건을 남의 일처럼 바라볼 수 있었을 텐데.
차 밑에 붙여둔 반에덴주의자의 폭탄이 터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바로 어젯밤에 보았던 기억이 무섭도록 현실감 있게 내게 닥쳐온다. 얼룩과 파랑이 공존하는 하늘. 종이처럼 찌그러진 파편들 사이에 누운 채 올려다본 하늘은 눈이 부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내가 에덴에서 일한 이후로 처음 똑바로 올려본 하늘이었던 것 같다. 그 속에서 마지막으로 살아있는 윤하를 본 뒤, 나는 죽었다.
죽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관자놀이에 총구를 들이대고 있는 나는 대체 뭐지…?
"…으."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굳어있는 에스라트도, 바닥에 누운 채 씁쓸하게 피를 되씹고 있는 거미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마주보고 있는 것은 끔찍한 괴물, 자신이 낳은 아들과 살을 맞댄 더러운 짐승밖에 없었다. 견디지 못할 기억과 씨름하던 나는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어디서 집어 들었는지도 모르는 그 권총을 거칠게 바닥에 내팽개치고 절규했다.
"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아!"
얼마나 세게 내려쳤는지, 권총은 다른 것이 켈리의 총에 맞았을 때처럼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나는 다친 손과 멀쩡한 손 모두를 들어 양머리를 쥐어뜯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어. 내가 그런 짓을 했다는 걸 믿을 수 없어! 좌절감 속에서 몸부림치던 내가 결국 권총을 부숴버린 걸 후회하며 혀를 깨물려 들었을 때, 거미의 낮은 목소리가 나를 멈추게 했다.
"…드디어 자살을 멈췄군요."
나는 머리를 붙잡은 양손을 천천히 풀었다. 그 손가락에는 긴 머리카락 여러 가닥이 집혀 나왔다. 거미, 아니 윤하는 계속 입가로 피를 흘려대면서도 말했다.
"힘들었습니다. 언제나 당신은 그 현실을 견디지 못했죠. 그 셔츠의 구멍도 모든 걸 기억해낸 당신이 스스로 낸 것입니다. 그리고 숙소에서 모든 걸 잊은 채 깨어나는 것이 현실에서 도망치는 당신 나름의 방법이었죠."
나는 양손을 피가 나도록 꽉 쥐었다. 정말로 손톱 사이로 피가 배여 나왔지만, 그리고 다친 어깨에서는 피가 왈칵 쏟아졌지만 나는 아픔을 느낄 수 없었다. 어차피 만들어진 몸, 망가뜨려봤자 다시 태어나면 그만일 텐데.
"어떻게…?"
꽉 다문 입에서 흐느끼듯 새어나온 그것은 내 모든 것을 담은 질문이었다. 윤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대로 죽어버리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긴 침묵이 흘렀을 때, 그는 조용히 말했다.
"긴 얘기가 되겠군요."
한 줄기, 바람이 일었다.
"저는 에덴에서의 기억은 제대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아마 무의식 속에 가둬버린 거겠죠. 하지만 그 폭발 때만큼은 기억이 납니다. 당신이 저를 안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 폭발에서 튕겨나간 몸으로도 저는 멀쩡하게 살아있었습니다. 약간 쑤시기만 한 몸을 일으켰을 때 주변은 아비규환이 되어 있었죠."
나를 포함한 에덴의 핵심 인물들이 줄지은 차들 속에 타고 있었다. 그것은 반에덴주의자들 자신도 놀랄 만큼 정확한 공격이었으리라.
"몇 명은 죽었지만, 몇 명은 살아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몇 명은 곧 죽었지만, 몇 명은 구급차가 올 때까지 살 수도 있었죠. 아마 당신도 그 중 한 명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거기서 죽었습니다."
그 대목에서 거미는 씁쓸하게 웃었다.
"제가 뾰족한 잔해로 당신을 찔렀으니까요."
이미 갖은 충격으로 몸을 추스를 힘조차 없던 나보다 에스라트가 더 격양된 반응을 보였다. 그는 그 큰 몸을 움찔하고 떨면서 경악스런 말을 내뱉었다.
"어, 어째서?"
"지금도 잘 이해되지 않지만, 아마 저는 그렇게 하면 어머니가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믿은 모양입니다. 그런 모습만 봐왔으니까요. 당신도 알겠지만 에덴은 살인이 폭행, 강도만큼이나 빈번한 도시입니다. 죽으면 12시간 뒤에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세계. 저는 어머니를 고통에 떨게 내버려두는 것보다 그 편이 낫다고 여긴 걸 테죠."
나는 더 이상 찾아올 공간이 없다고 생각했던 자기혐오가 한 층 더 몸을 불린 것을 느꼈다. 이 저주스런 몸을 당장 찢어버리고 싶은데 그러기엔 손아귀에 들어가는 힘이 너무나 작다. 나는… 윤하에게 대체 무슨 고통을 지게 한 걸까.
"하지만 당신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도 않았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저는 제가 속한 세계가 사실은 에덴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기에 저는 너무나 큰 죄를 저질러 버렸죠. 얼마나 길었는지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 끝에, 저는 제가 한 에덴주의자의 양자로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양자…."
나는 멍하게 그 말을 되짚었다. 저주스런 전남편 외에는 맡길 친척이 없어 에덴으로 데리고 온 윤하다. 어차피 입양 외에는 길이 없었겠지. 윤하는 말했다.
"반에덴주의자의 테러로 어머니를 잃은 나이니만큼, 그 입양은 자신들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한 하나의 쇼였겠죠. 양부모는 부자였지만 내게 큰 관심을 보이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거리로 나갔습니다. 마약을 사고, 여자를 품고, 총기를 휘둘렀습니다. 계부는 그런 나에게 격분했지만 차마 밖으로 내치진 못했습니다. 그것은 쇼의 실패를 말하니까요. 그는 대신 나에게 에덴으로 쫒아버리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아마 그렇게 하면 제 트라우마를 건드려서 얌전히 다룰 수 있겠다고 여긴 모양입니다. 저는 그런 그를 비웃듯 기꺼이 에덴행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들어온 곳이 에덴 중에서도 꽤나 흉폭한 구역인 이 외곽입니다. 시스템이 살인을 장려하는 몇 안 되는 장소인 여기는, 정작 이 시스템 내부의 사회 현상을 제대로 관찰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 일을 맡았죠. 에덴의 구성원인 양 위장해서, 조직들을 오가며 역학 관계를 시청에 보고하는 겁니다. 에덴 밖의 거리에서 목숨을 내놓고 살았던 저에게 그 일은 생각 외로 쉬웠습니다. 어릴 적의 기억도 다 사라진 것 같았죠. 그 과거를 극복했다고 과시라도 하듯, 저는 일부러 옛날에 제가 살았던 집을 다시 쓸 수 있도록 시청에 요구했습니다. 도심에 있는 터라 자주 들어가진 못했지만, 저는 거기서 제가 과거를 이겨냈다고, 그렇게 얼빠진 놈처럼 믿고 있었죠."
윤하의 눈이 흐려졌다.
"몇 년 뒤… 당신이 찾아왔습니다."
나는 그 집에서 느꼈던 편안함의 정체를 깨닫고 전율했다. 그건 차라리 기시감에 가까웠을 것이다. 첫눈에 보고 반했던 집, 아름답다고밖에 느낄 수 없던 집은 과거 내가 어린 윤하와 삶을 살았던 장소였다.
"첫눈에 마주친 당신은 눈물을 흘렸죠. 저는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아무 의심도 하지 않았죠. 비록 죽은 어머니와 비슷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당신은 에덴인이었습니다. 죽어서 돌아오지 않던 어머니가 그렇게 살아계실 리가 없었습니다. 저는 당신을 조금 독특한 구석이 있는 아가씨로만 생각한 채 첫 만남을 끝냈습니다."
그 뒤의 일은, 나 또한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윤하가 흐릿한 말로 내 기억을 뒷받침해주었다.
"당신은 그 뒤로도 집에 관심을 갖고 종종 찾아왔죠. 그래서 당신을 어느 정도 신뢰하게 된 저는 제가 외곽에 나가있는 동안 집을 관리해달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단지 관리인 격으로 짐을 꾸렸었지만, 어느 새 그 집은 당신이 없으면 완성되지 않는 곳이 되었죠. 3년쯤 지났을까, 저는 어느 새 당신과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이성을 세워, 혀 대신 집어넣은 손을 깨물었다. 깨물지 않았더라도 이미 내 몸을 채운 고통에는 변화가 없다. 두 눈에서 왈칵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나로선 도저히 직시할 수 없는 현실을 윤하는 덤덤하게 털어놓고 있었다. 그는 쓸쓸하게 말했다.
"다음 날 저는 홀로 침대에 누워있는 제 몸을 발견했죠. 부엌에서 바닥에 떨어진 식칼을 본 뒤, 그리고 저녁 무렵 기억을 잃은 채 집으로 돌아온 당신을 맞이한 뒤 비로소 저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몰랐죠. 당신이 그런 식으로 몇 번을 죽을 때까지 몰랐습니다. 어느 새 저와 보냈던 기억도 희미하게 떠올릴 때, 저는 우연 끝에 자살하려던 당신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이 20년 전 죽었어야 할 어머니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멍해진 제가 당신의 손을 놓았을 때, 당신은 제게서 뺏어든 권총으로 머리를 날렸습니다. 다음 날 돌아온 당신은 나를 자기 집에 들어온 침입자처럼 대했죠."
아아, 윤하야. 부탁이니 나를 용서하지 마. 나를 저주해. 나조차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겠어!
"그리고 저는 이 빌어먹을 도시에서 당신을 빼내기로 결심했습니다."
나는 물고 있던 손을 힘없이 떨어뜨렸다.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 답답했다. 그런 식으로 죄를 흘려보내는 건 너무나 가증스럽다. 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그걸 통제할 수 없던 나는 신경을 꺼버렸다. 나 자신은 이리도 나약하건만, 저 아이는 어떻게 그 고통 속에서 나를 살릴 생각을 한 걸까.
"저는 먼저 합법적으로 당신을 빼낼 구실이 있는지 알아보았습니다. 물론 불가능했죠. 그래서 저는 반에덴주의자들과 연락을 취했습니다. 에덴 내부의 증언을 확보하는 건 그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제 정체를 알고 있는 그들은 제 접근을 상당히 조심스럽게 받아들였지만, 긴 협상 끝에 당신을 에덴 밖으로 빼낼 수 있는 루트를 만들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당신의 유품 중에 메인 시스템의 일부 사본이 감춰져 있었기에 가능한 루트입니다. 그것이 이 경계선을 넘는 방법이죠."
에덴은 중앙의 시청 건물 아래에 있는 지하 통로로 외부와 교류한다. 물론 그 구역에 에덴인은 들어갈 수 없으며, 설령 발을 디딘다 해도 수십 개의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특수 신호 아래 증발하게 된다. 그에 비하면 예산과 관리 문제로 외벽조차 없는 외곽은 탈출에 유리한 곳이다. 물론 사막 밖에도 나름대로의 감시망이 있지만, 윤하가 말하는 루트는 그 감시망을 모두 고려한 경로이리라.
"문제는 이곳까지 오기 위해 당신을 설득하는 것이었습니다. 10년 가까이 이곳에서 지낸 저였기에 외곽을 통과하는 건 약간의 위험만 감수하면 되었지만, 평범한 도심인이었던 당신은 빈민 구역에 접근하는 걸 두려워했죠. 저에 대한 신뢰도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저는 당신을 설득하기 위해 온갖 거짓말을 덧붙였고, 어느 새 도시를 탈출하고 싶어 하는 당신의 의뢰를 받은 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그것을 요구했다는 말에는 당신도 어느 정도 의견을 굽혔으니까요. 그리고 몇 번 죽은 뒤엔 오히려 당신이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내는 때도 있었습니다. 저는 저조차도 뭐가 진실인지 알 수 없어진 채 끊임없이 자살하는 당신을 외곽으로 옮기고 또 옮겼습니다."
윤하는 피로한 목소리로 말을 마쳤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그 끝에 도달했군요."
나는 이제 모든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윤하가 겪어야 했던 모든 고통을 듣게 되었다. 이빨이 으스러질 것 같다. 내가 윤하의 어머니라는 사실이 나를 미치도록 고통스럽게 했다. 왜 난 그 때 과거를 기억하지 못했던 걸까. 조금만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하다못해 그 저주스런 밤이 지나기 직전에라도 그 기억을 떠올렸더라면!
그 날의 바보스러운 공모가 오늘을 만들었다. 단지 조금 두려웠을 뿐이다. 에덴 안팎으로 위험한 테러가 벌어져 뒤숭숭한 때였으니까. 하지만 그렇다 한들, 우리 자신을 의체로 만들자는 생각은 결코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에스라트가 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당연한 얘기지만, 의체가 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일단 의체가 된다는 것은 관리자가 아닌 관리 대상으로 전락하는 거니까. 하지만 우리를 향해 가해지는 테러의 강도는 연일 높아지고만 있었어. 두려워진 우리에게 죽지 않는 몸은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에덴의 부작용은 크게 부각되지 않았기도 했지. 그리고 어느 날, 비밀스럽게 모인 우리는 칩을 심었다. 그 칩이 우리의 뇌, 아니 영혼을 번역해 메인 시스템에 유령 인물로 끼워 넣는 거다. 그럴싸한 인물들 몇 명을 제거하고 대신 우리의 정보를 끼워 넣는 건 시스템을 총괄하는 프로그래머에겐 손쉬운 일이었지."
그렇다. 그 모의는 내가 없었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기꺼이 그 일을 했다.
그리고 그 폭발 속에서 죽은 날, 우리의 영혼은 새 몸을 받아 에덴에 태어났다. 정확히는 꽤 큰 시간차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썼으니까. 시체 속에서 그 칩을 발견했다 한들, 우리가 어디에 있는 지까지 추적당할 일은 거의 없었다. 그 결과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살아있는 나와 에스라트다.
윤하는 어디를 바라보는지 모를 눈으로 위를 응시했다. 나는 끔찍한 기분에 사로잡혀 그에게 기어갔지만, 윤하는 죽은 것이 아니었다. 정신을 차린 그는 수첩을 힘들게 조작했다. 이제 기억을 되찾은 나는, 비록 20년 후의 프로그램이긴 했지만 대충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이제 특수 신호를 발산하는 에덴의 경계선을 마비시킬 준비가 되었다는 표시였다.
"이 버튼을 누르면 몇 초간 신호가 해제됩니다. 에스라트, 당신이 도와준다면 어머니는 시간 내에 경계선 밖으로 탈출할 수 있을 겁니다. 조작 방식은 20년 전과 크게 다를 게 없으니, 어머니라면 이걸로 접선자와 연락해서 어떻게든 방향을 잡을 수 있겠죠. 그들은 당신을 치료하고 보통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배려해줄 겁니다. 언제일진 몰라도 그 몸의 수명이 다하는 때에… 당신은 더 이상 부활하지 않고 완전히 죽을 수 있겠죠."
"윤하…!"
나는 울먹이며 윤하의 손을 잡았다. 그는 자신이 없는 상황을 가정한 채 내게 뒷일을 설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다는 건 나 또한 잘 알고 있다. 윤하는 잠깐 정신을 잃었다가, 그 때까지 손을 붙잡고 있는 나에게 슬프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전 당신을 어머니라고 생각하기보다… 연인이라고 여겼습니다."
나는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다. 한 손으로 꼭 쥔 윤하의 손은 차갑다. 윤하는 아마 다시는 뜨지 못할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제대로 기억할 수 없는 어머니로서의 당신보다 내 곁에서 함께 웃어줄 수 있는 연인으로서의 당신이 나에겐 더 큰 의미를 가졌죠. 그런 당신이 과거에 부딪혀 끊임없이 자신을 죽이는 모습은 제겐 너무 큰 고통이었습니다. 설령 에덴 밖에서 당신이 또다시 자살을 택한다 해도… 두 번째, 세 번째의 죽음을 더 이상 맞이할 필요가 없다는 것만으로, 제겐 충분합니다."
말을 마친 윤하는 마지막으로 편안하다는 듯이 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잠드는 것처럼, 그렇게 숨을 거뒀다.
나는 힘을 잃은 윤하의 손을 조용히 옆에 내려놓았다. 이상하게도 막상 그가 죽은 뒤엔 더 이상의 눈물이 나지 않았다. 내 눈물은 오히려 그가 이룬 것을 더럽힐 뿐이니까. 그렇게 나는 윤하의 곁에 주저앉아 침묵으로 그를 애도했다. 바람으로 밀려온 사막의 모래가 그 위에 얕게 덮일 때까지, 나는 쭉 그렇게 앉아있었다.
"윤하가 만들어준 길이다."
나는 천천히 에스라트를 돌아보았다. 그 때까지 나와 마찬가지로 움직이지 않았던 에스라트는 부동의 자세를 깨고 천천히 무릎을 폈다. 그 모습은 마치 바위가 자리를 떨쳐 일어나는 것 같았다. 에스라트는 자기 뒤편에 있는 잔해의 언덕을 가리켰다.
"에덴을 떠나. 넌 반드시 그래야 해. 그것이 네 아들, 네 연인을 위하는 길이다. 마지막으로 봤을 땐 엄마밖에 모르는 철부지였지만, 네 아들은 경탄스러울 정도로 훌륭하게 성장했군."
"너는?"
나는 메마른 목소리로 에스라트에게 물었다. 사실 그런 건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나는 에스라트는커녕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것도 벅찼다. 아마 에스라트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는 성의껏 대답했다.
"나는 됐어. 저건 너만의 길이야. 난 대신 다른 동료들을 찾아볼 생각이다. 몇 명이나 남아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녀석들도 과거를 돌아볼 필요가 있겠지. 어차피 내게 남는 건 시간이니까 상관없어."
나는 시선을 윤하의 배 위에 놓인 수첩으로 옮겼다. 저 위의 네모난 버튼, 그것 하나만 누르면 경계선의 신호는 해제된다. 한 발이 박살난 이 몸으론 무리겠지만, 에스라트가 던져주는 조금은 꼴사나운 방법이라면 어떻게든 에덴을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접선자와 연락해 오스트레일리아의 사막을 떠난다.
나는 결심했다. 수첩을 집어든 나는 그 자리에서 메인 메뉴로 들어가 조작을 시도했다. 20년이나 지났지만, 자판을 이용한 인터페이스의 진화는 이미 우리 세대에서 극에 달했기 때문에 나는 어렵잖게 프로그램을 다룰 수 있었다. 이윽고 장시간의 조작을 끝낸 나는 수첩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발이 망가진 관계로 비틀거리던 나를 에스라트가 부축했다.
"이제 떠날 생각인가?"
"아냐. 방금 접선자와 얘기했어. 난 에덴에 남을 거야."
에스라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나는 머뭇거리는 입으로 나를 설득하려는 에스라트를 막았다.
"에스라트. 기억하지? 그 때 내가 윤하에게도 칩을 심었던 거 말야."
그는 뭔가를 깨달은 표정이 되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 때 두려워했던 건 사실은 내가 아닌 윤하가 죽는 것이었다. 아니면 내가 죽고 나서 혼자 남겨질 윤하던가. 나는 그런 생각 아래 윤하에게도 영혼을 백업할 칩을 심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오히려 영원히 살아갈 내가 그 뒤로 윤하 없는 삶이 지속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윤하는 에덴의 '숙소'에서 다시 태어날 거야. 그리고 내가 그랬던 것처럼 죽어도 죽지 않는 삶을 시작하겠지. 난 그 아이를 데려오겠어. 그리고 이 터무니없는 도시를 탈출하도록 노력할 거야."
사람이 죽어야 할 이유는 사람이 살아야 할 이유만큼이나 충분히 많다. 왜 그토록 당연한 것을 나는 무시하며 살아왔을까. 어디로 갔는지, 언제 태어날 지 아무 것도 알 수 없지만, 난 언젠가 윤하를 찾아낼 것이다. 그 아이도 지금 이 순간을 떠올릴 수 있을 테지. 아무리 잊혀진 기억이라도, 그것은 결코 사라진 것은 아니니까.
삶과 죽음이 맞물린 세계.
나는 마주본 거울이 영혼을 포박하는 도시로 걸어 들어갔다.

 

 

* * * * * *

 

 

콧노래를 부르며 계단을 오른다. 교육을 받고 직장을 나와 집까지 구입했으니 구제 제도의 성공 사례 중 하나로 꼽아도 될 것이다. 나는 페인트투성이 작업복이 든 가방을 한 손으로 휘두르며 집에 가서 놀 일이 뭐가 있는가 궁리했다. 친구놈들 불러다 술 처먹는 건 이제 슬슬 그만둘 때도 됐는데 말이야.
조그만 아파트의 복도에 선다. 비록 지금은 코딱지만 한 방을 쓰지만 언젠가는 시청 주변처럼 으리으리한 집을 살 계획이다. 물론 외벽은 내가 직접 칠해야지. 지나다니는 사람마다 잊을 수 없도록 형광색 바탕에 야광 별똥별을 가미할 작정이다. 내 원대한 계획을 들은 친구들은 역시 정신 나간 것으론 나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며 칭찬해주었다. 그리고 우정을 담은 펀치를 몇 번 교환하다보면 어느 새 이렇게 저녁이 된다.
집 앞이 가까워져 열쇠를 꺼내던 차에, 복도 저 편에서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술집이었다면 옆자리를 곧장 차고앉았을 미인이다. 나와 똑같이 검은 머리칼을 갖고 있는 그 여자는,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일몰을 구경하고 있었다. 하긴, 그래도 이 복도에서 보는 해질녘 하늘은 제법 멋있긴 하다. 누굴 기다리냐고 슬쩍 말을 걸어보려다가, 피에로처럼 뺨에 붉은색 페인트가 찍힌 내 처지를 생각하고 관두기를 했다. 남자는 곧 죽어도 스타일이다.
"성 윤하 씨죠?"
막 문을 열려던 나는 갑자기 옆에서 들리는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몸을 벌떡 세웠다. 방금 전까지 내 옆에서 해를 보고 있던 여자다. 우웃, 선공인가? 지금까지 수작 건 적은 많았지 걸려본 적은 없던 나는 살짝 당황하며 대답했다.
"그런데요…?"
그러자 여자는 웃으면서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저는 이 서현이라고 합니다."
나는 순간 심장이 저며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왜였을까? 그녀의 말에는 단순한 이름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감정을 실어 보내는 듯한 무게가 있었다. 그건 단순한 이름 이상의 의미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가슴 속에 숨어있던 뜻 모를 감정들이 그에 반응해 뛰쳐나오는 걸 느꼈다. 그것은 대양처럼 컸고 깨진 알만큼 슬펐다.
나는 갑자기 그런 감정들이 튀어나올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눈에 갑자기 눈물이 고이는 걸 눈치 챈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재빨리 그것을 숨겼다. 처음 보는 여자 앞에서 청승맞게 우는 것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이제 와서 멋있는 척 해봤자 뺨에 찍힌 곤지가 우스꽝스럽다는 걸 망각한 나는 붉은 석양을 받으며 짐짓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신지?"
여자는 다시 한 번 웃었다. 그 희비가 교차하는 복잡한 얼굴을, 난 아마 다시는 잊지 못할 것이다.
"의뢰를 받았습니다."

 

 

 

- END -

 

 

 

 

----------------------------------------

 

 

...길군요 -_-;

 

......많이 (..)

 

올려야 될 지 많이 망설였습니다. 글틴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하면 너무 이질적인 것 같아서 ; 그래도 규정상 제한은 없는 것 같아 올려봅니다..

 

보름 정도 컴퓨터 앞에 들러붙어서 쓴 작품입니다. (덕분에 몸이 좀 많이 망가졌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만족스럽지만 후반에 지나치게 집중된 것 같네요...

 

글에 필요한 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단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글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평가 부탁드려요..

 

 

 

 

ps. 오게 된 경위는 presto가 가르쳐줬음.

 

 

M.B
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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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 사람

일 관계로 부산에 내려올 일이 있어 부모님 집에 묵기로 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해 부모님이 매우 반기는 눈치였다. 얼큰한 추어탕과 함께 저녁을 먹고 런닝 차림으로 TV 앞에 앉았을 때, 구석에 쌓아둔 오래된 앨범들이 눈에 들어왔다. 기억도 나지 않는 까마득한 날의 내가 그 안에 있었다."아, 그래. 봐라. 치울라꼬 내놓은 긴데 니가 마침 잘 와서 보네.""흐흐흐, 니 기억이나 나나?"어릴 적의 나는 색바랜 사진 속에서 자장면을 얼굴에 뒤집어쓰고 맨땅에서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이런 건 원래 기억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아, 이 사진은 기억나네요. 아마 구정 때였죠?""야, 맞다맞다. 이기 몇 살 때고?""여섯 살 아인교? 닷 살인가?"나는 양 뺨을 부풀린 채 제사상 앞의 대추를 집고 있었다. 그 뒤편에는 상을 차리는 치맛바람의 아줌마가 있었다. 뒷모습인데다 허리도 구부리고 있어 누군지 알아보는 건 거의 불가능했지만, 난 그 아줌마를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뭔가를 집어먹으려 할 때마다, 따끔하게 손등을 때리며 예절교육을 한 것이다. 나와 정확히 무슨 관계냐는 질문을 하자 부모님은 고개를 갸우뚱하셨다."이기 누꼬? 당신 기억나나?""모르겠는데. 혹시 처제 아이가? 금식이.""아, 그런갑다. 금식이 근처 살아가꼬 잠깐 돕는다고 왔었재. 야가 내 사촌동생이다. 그니까 니한테는 진이종고모 되는기다. 원래 법적으로는 관계없는데, 그냥 이모라고 부르면 된다."그때 아버지가 뭔가 생각났는지 손사래를 치셨다."아이다. 처제보다 늙은 거 같은데? 혹시 형수님 아인가?""당신 형수님이 어디 한둘이가. 말 똑바로 해야제.""그니까 내 둘째 삼촌 며느리 말이다.""아, 봉필이 엄마 말이제? 동서가 하도 많아가꼬 이제 안 보고 사니까 헷갈리라칸다. 니하곤 어떻게 되노. 보자. 당숙모 되네. 그럼 봉필이가 야 재종형젠가?""그래. 금마 좀 있음 제대한다 카더라."그러더니 부모님은 봉필이라는 언제 봤는지도 모를 6촌 동생을 가지고 이야기꽃을 피우셨다. 그러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방바닥을 탁 내려치셨다."맞다. 동서가 아니라 당질며느린갑다. 백부님이 좀 나이가 많으셔가꼬 당질 내외도 그쯤에 제사 같이 안 했나.""그른가? 당질며느리보단 좀 늙은 거 안 같나?""사진이 흐리가꼬 말이제. 니 야 기억나나? 안 나제?""야가 뭐 알겠노. 당질며느리 맞다니까.""아이다. 가만있어보소."나는 더는 부모님의 대화를 듣고 있을 정신이 없었다. 내가 9시 뉴스를 보고 있는 사이 부모님은 한참 동안 십 수 명의 이름을 거론하다가 마침내 내 재종백숙모인 용식이 엄마로 결론을 내리셨다. 그러면 얼굴은커녕 이름도 그때 처음 들은 용식이란 놈은 내 8촌인 삼종형제가 되는 셈이었다. 아버지가 껄껄 웃으시며 말해준 그 결론에 나는 하품을 하며 알았다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 마루에 깐 요에서 늘어지게 늦잠을 잔 뒤 다음날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후에 그 사람은 일손을 도우러 온 옆집 아주머니로 판명이 났다.     --------

  • M.B
  • 2006-07-28
주차전쟁

  영세한 복사기 제조업체에 다니는 K씨는 출근을 앞두고 멈칫거렸다. 아파트 야외주차장에 주차해놓은 자신의 뉴소나타 앞에 잘 빠진 에쿠스 한 대가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코너에 주차한 덕택에 두 벽면과 옆 차에 가로막혀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뒤에서 밀어봤지만 제동장치가 걸려 있었다. 연락처도 없었다. 경비실에 연락했더니 외부 차량이란 소리만 해댔다. 경비를 향해 20분 동안 버럭버럭 고함을 질러댄 후에야 차주가 바로 앞 건물에서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왔다. 짧은 머리에 무스를 바른 채 한창 젊음을 즐기고 있는 남성이었다.“저쪽 벽에만 붙여놔도 사이로 잘 빠져나갈 거 아뇨?”“안 쓰는 차처럼 보여서.”차주는 K씨가 말한 위치로 차를 옮기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출근 시간을 훨씬 넘긴 시점이었다. 직장에서도 계속해서 씩씩대던 K씨는 집으로 돌아와 사과를 깎는 아내와 주변에 몰려든 아이들에게 아침에 겪은 일을 털어놓았다. 아내가 사과 껍질을 버리며 핀잔을 주었다.“차가 구리니까 그런 소릴 듣는 거예요.”“소나타가 뭐가 어때서? 국민차야.”“뒤에 숫자라도 붙으면 말을 안 해. 하다못해 알파벳도 없잖수?”“이거 나올 때만 해도 국내 시장 휩쓸었어.”“강산 바뀐 지가 언젠데 그 소리야.”입맛을 쓰게 다시는 K씨에게 철모르는 아이들이 등 뒤로 달라붙었다.“아빠 차 바꿀 거야?”“내 친구는 그랜저 타고 다녀.”“우리도 에쿠스 타자.”난생 들어본 적 없던 매를 든 K씨는 베란다에서 담배 반 갑을 죽였다. 국내 중형차 시장을 석권하고 전 국민적으로 사랑받았던 뉴소나타는 어느새 늘 타고 다니는 자신 말고는 아내조차도 외면하는 폐물이 되어 있었다. 왜? 왜? 왜? 아내가 말했다. 에쿠스 타고 온 사람이 박가네 둘째딸 부부라더라. 사업 하나 잘 돼서 부모님 해외여행 시켜드리기 전에 며칠간 들린다더라. 왜 볼 때마다 개기름이 철철 흐르던 중년들이 비행기 타고 빠리니 로우마니 눈구경 가게 해주려고 내 소나타가 헛질을 해야 하는가? 왜? 왜? 왜? 게다가 박가놈 그 자식은 대머리잖아. 나가봤자 한국 중년의 위상이 위태로워질 뿐 아닌가.다음날 집으로 돌아온 K씨는 문제의 에쿠스가 바로 자신이 주차했었던 자리에 놓여 있는 걸 발견했다. K씨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잘 됐다, 이 뺀질이 새끼. 대한민국 가장의 애환을 느껴봐라. 어쩌다 대박 하나 터트려서 돈쓸 곳만 찾아다니는 한량들은 기껏 버는 푼돈도 야금야금 갉아먹는 애새끼들 그래도 제 자식이라 좋다고 밤마다 자는 놈들 머리 한 번 쓰다듬어준 뒤 노곤하게 잠드는 남자의 인생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K씨는 에쿠스 코앞에 우아하게 주차한 뒤 근처에 숨어 동태를 살폈다. 몇 시간이 지났지만 그래도 K씨는 숨었다. 미친 짓이란 게 뻔한데 어디서 그런 기력이 남아도는지 자신도 모를 지경이었다.드디어 차주가 걸어 나왔다. 전보다 더 재수 없어진 걸음걸이였다. 소나타와 벽으로 가로막힌 에쿠스 앞에서 난감하게 멈춰선 차주를 보고 K씨는 마음속으로 의기양양하게

  • M.B
  • 2006-07-12
노을

   “비가 올 거예요.”내가 소녀에게 돌린 관심은 잠깐의 눈짓이 전부였다. 나는 다시 거리를 내다봤고 소녀도 거리를 내다봤다. 유쾌하지 않은 날씨에 지나다니는 행인은 거의 없었고, 재빠른 차들만이 파도를 만들며 빗길을 나아갔다. 우리는 아까 전부터 그렇게 처마 밑에서 시간을 낭비하던 중이었다.…그러니까, 이 상황에서 소녀의 말은 완전히 난센스였다.“이미 오고 있잖아.”나는 그리 사교적인 인간이 아니다. 처음 보는 꼬마가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릴 한다고 해서 그걸 바로잡아주는 성격은 아니란 얘기다. 하지만 한 시간을 햇빛 아래 기다렸고 두 시간을 빗속에서 기다렸다. 이쯤 되고 보면 뭐라도 말을 꺼내고 싶어지기 마련이다.거리에서 눈 돌리지 않은 채 대답한 것이었지만, 소녀가 나를 빤히 올려다보는 것 정도는 눈치 챌 수 있었다. 어색하게 대답한 게 퉁명스럽게 들렸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소녀의 음색은 경쾌했다.“세상이 절 앞질러 버렸군요?”나는 아까와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소녀를 보았다. 내가 ‘세상’이란 형이상학적인 단어를 들을 때는 대부분 앞에 ‘빌어먹을’이라던가 ‘엿 같은’ 따위의 질 낮은 수식어가 붙곤 했었다. 이 꼬마처럼 ‘세상’을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부끄럽지 않나. 문득 나는 세상을 얘기하는 것이 부끄러워야 할 이유를 생각해 보았지만, 머리가 아파져 그만두기로 했다.소녀는 그 사이의 침묵을 질문으로 해석한 듯싶었다. 소녀는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제가 비가 올 거라고 했는데, 세상이 한 발 앞서 비를 내려버렸어요. 그러니 세상이 제 말을 두 시간 앞질러버린 거죠. 하지만 이 정도는 양보해줄 수 있어요. 제 자신이 세상을 한참 앞지르고 있거든요.”나는 따라 웃어줄 수 없는 내 처지가 불쌍해졌다. 아이들 유머는 이해하기가 힘들다. 이 꼬마의 경우에는 철학적인 냄새가 지나치게 많이 배여 있긴 하지만.호응 없는 농담 때문에 분위기는 조금 뒤숭숭해졌다. 나는 다분히 의도적인 헛기침을 꺼냈다.“누구 기다리니?”“아뇨. 그냥 서 있는 거예요. 아저씨야말로 누굴 기다리나보죠?”“그래.”정곡이군. 나는 속으로 툴툴거렸다. 시은이 녀석, 평소에 하늘같이 떠받들어줬더니만 기껏 한다는 짓이 남친 바람맞히기이다. 처음 한 시간 정도는 아량 있게 기다려줬지만 비가 오기 시작한 후부터는 기분이 바닥에 깔려버렸다. 진작 택시 잡아 가버릴걸 왜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지 모르겠다. 통화도 안 되고.“누군데요?”“…친구.”“에, 너무한다. 한 시간 넘게 기다렸는데.”그 때부터 이 애가 여기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인기척도 없이 나타난 이 애의 존재를 알아챈 게 조금 전의 일이다. 내가 그렇게 넋을 놓고 있었는지 한심해지기도 하고, 그렇다곤 해도 한 시간씩이나 자신을 감출 수 있던 소녀의 정체가 궁금해지기도 한다.“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는 걸 보니 아주 소중한 사람인가보네요.”“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네?”“일단, 기다리는 사람이 정확히는 내 여자 친구야. 하지만 걔가 보고 싶어서 이러고 있는 건 아니야.”“그럼요?”“

  • M.B
  • 2006-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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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밌게 읽었습니다. 길군요. 많이;

    • 2006-02-05 15:40:04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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