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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편지

  • 작성자 찐빵
  • 작성일 2006-03-01
  • 조회수 173

유난히 동아리 홈페이지에 출석을 안하는 나는

모처럼 접속을 해서 이방 저방을 돌아다니던 중에

지난 여름, 갑작스런 불치병으로 휴학을 하게된 친구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같은반, 같은 동아리였던 내친구.

하얗고 맑은 그아이. 웃는모습이 해맑은 천사같은 친구죠.

그아이에게 무서운 병이 있다는걸 알았을땐, 마치 내일인냥

눈물이 주르륵 흘렀죠. 그 친구는 아무렇지 않은듯 날 위로해 주었구요.

정말 바보같죠. 지금은 수술준비중인 그친구..

다음번엔 무어라고 글을 올릴까요..

'수술 정말 성공적으로 끝났다'라는 내용이었음 좋겠네요..

 

 

1. 링겔을 기다리며

 

 

제가 있는 곳은 삼성병원 12층 59호 입니다.  12층에는 두대의  컴퓨터밖에 없고, 아이들과어느 아주머니께서 게임,채팅에 빠지셔서 제 차례가 돌아오기까지 정말 한참이나 걸렸어요.

와, 그래도 이렇게나마 모두에게 인사할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저희 식구들 모두 보고싶습니다. 부장언니, 부장오빠 , 파트너 세환이 ,선생님, 그리고  다른 부원 모두들 정말 보고싶습니다. 이렇게 인사하게 되서 좀 미안해요. 갑작스레 병원에 가게되서 잠시 휴학하는 사실도 알리지 못하고 나오게 됐네요. 모두들 놀라게 해서 정말 미안하구요, 그래도 우리 편집부

모두 사랑하는거 알죠?  일부러 안알리려고 한건 아니구요, 단순종양이라고 해서  별 걱정 안했거든요. 그런데 골육종이라는 무시무시한 병일줄이야...그래도 의사선생님께서 열심히 치료하면 완치 될 수 있다고 하셨어요. 모두들 응원해주세요.

 

 

검사를 두가지 정도 해야하는데 제가 아직 생일이 안지나서 만 15세로  필히 입원 수속을 밟게 되어있대요. '고1'이라는 말로 제 나이를 대신해왔던 지난날동안 제 나이에 잠시 무관심 했나봐요. 친구들은 17살인데 아직 15살 이라니 말이에요. 조금 놀랐지만 어리다니 기분은 좋네요 헤헤. 어쨋든 지금은 초라한 환자복을 걸치고 제법 잘 돌아다니고 있어요. 그런데

병원에만 있으면 엄마들은 그렇게 뭘 먹이고 싶나봐요. 무얼 잘했다고 그러시는지.

 덕분에 나는 먹고 먹고  또 먹고. 그렇게 오늘 하루가 다 간거 같습니다.

(조금 약올리자면, 더블초코케잌, 우유, 귤, 참치,불고기,누드 김밥, 유부초밥, 아이스크림.

맛있겠죠?) 벌써 어둑어둑해져서 8시가 갓 넘었갔네요. 아, 달랑 오기 뭐해서 '까르마조프의 형제들'란 두꺼운 책을 한권 가지고 왔는데  어딜가도 TV 소리때문에 책을 읽을수가 없어요.  병원은 조용한 줄 알았는데, 책 읽을 곳이 못 되나봐요. 학교 다닐때는 그렇게 TV가 보고싶더니, 하루종일 TV앞에서 사는 지금은 마냥 바보가 된거서 같아 조금 슬프네요.

아무튼 저는 지금  2인실에 있어요. 그런데 옆에 있는 아이가 다리 교정 수술을 했다는데 수술실에서 막 온 다리가 기부스라서 너무 안타까워요.그 아이를 보고 '나는 그래도 한 다리만 아프니까 감사하자' 이런 생각을 잠시했어요. 아무래도 전 이기적인것 같아요. 나쁜 생각인데 말이에요. 오늘 밤 12시부터는 금식이라서 엄마는 지금도 많이 먹으라고 하시지만

사실, 먹는것도 이제 질렸어요. 정말 행복한 비명이죠. 점심은 잔치국수 사 먹었는데 엄마 국밥까지 제가 다 먹었어요. 근데 아까 위에서 말했던 음식들도 다 먹고 병원식사까지 먹었으니 질릴만도 하죠 ? 음.. 병원식을 먹은 사람으로서, 우리 학교 급식에 감사하며 먹으라고 말해주고 싶네요. 왜 자꾸 먹는 얘기만 하는지 모르겠는데 이해해주세요. 오늘 하루가 온통 먹는것 뿐이었으니까요. 온통 먹기뿐이었어요 먹기. 아..내일은 하반신 마취를 하고 조직검사를 할 거에요. 그래서 하루종일 꼼짝도 못할것 같아요. 얼마나 지루할까. 여러분은 앉아서 모의고사를 보겠지만, 저는 티비를 보겠지요. 수다스러움이 그립습니다.  지난주에 잠시 나갔던 학교가 어찌나 좋았던지. 정말 상상만 해도 즐겁습니다.

 

휴.. 지금 저는 TV가 정말 싫어요 ! 하지만 병실에는 침대랑 티비밖에없잖아요.

책을 조금 보다가도 금방 TV 보게 되요. 별별 소식도 금방 알게되었습니다.

아무리 우리 티비를 꺼놓더라도, 옆침대의 아이가 계속 티비를 보고 있어서 자꾸만 눈길이 갑니다. 책장을 넘기면서도 뭘 읽었는질 몰라요. 이런거 진짜 싫은데.. 자꾸만 짜증을 내는것 같아서 무서워요. 다시 해맑게 웃을수 있는 날이 오겠죠? 어쨋든, 병원에서의 하루는 생각보다 시간이 빨리갔습니다. 좀 있다가는 링겔을 맞을 것 같은데 별로 안 무서워요.

제가 사실 엄살이 진짜 진짜 많아서 전에 신체검사할때도 피뽑기 전 발을 동동 굴리고 내내 긴장하고 있었거든요. 아무튼 주사가 진짜 무서웠는데 병원 몇 번 다녔다고 하나도 안 무서워 졌어요. 마취 주사가 좀 아프더라도 참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 나는 내일 검사에 대한 걱정 아주 조금과 좀 졸릴것 같다는 생각뿐이에요. 아차,  까르마조프의 형제들 이름도 제 머릿속에 있네요. 자꾸만 이름이 헷갈려서 둥둥 떠돌아다니고 있어요. 표드르와 뾰트르가 왜 활자로는 구분이 않되는지 모르겠다니까요. 간호사 언니들이 너무 친절해서 긴장이 안되는 것도 있나봐요. 검사 하나 받으러 내려가는데도 봉사하는 사람이 와서 안내해주는거 있죠? 이런 친절을 받고나니 입원비가 비싼것도 이해가 가더라구요. 친절만큼이나 그 값어치 하는게 바로 비데!  헤헤. 좀 부끄럽지만, 비데를 처음 써봤는데, 버튼을 누르고 반응이 없길래 그냥 일어났거든요.. 그 다음이 상상이 되려나? 물벼락 맞았습니다. 그래서 환자복을 다시 갈아 입었지요. 흑흑.. 어쨋든, 사람들의 친절이 이렇게나 위로가 되는 줄 몰랐어요.내게 이과적 성향이 아주 조금만이라도 있다면, 간호학과를 지원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들었던걸요. 휴, 이 컴퓨터가 백원에 4분인데  오백원 넣어서 얼마 않 남았어요. 사실 아까도 쓰다가 돈이 모두 떨어져서 글을 못 올리고 날렸거든요. 마음이 조급해지고 있습니다. 

으으, 그럼 이만 끝낼게요.

 

2. 심심함을 달리다가

 

입원이 조금 길어질 것 같아요. 어서 병원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져야 겠다는 약간의 위기식이랄까. 하여튼 그런 생각이 듭니다. 다소 슬픈 생각이죠. 어제 깜짝놀란건 병원에서의 시간은 할 일없이 가만히 있어도 은근히 빨리 간다는 것. 시트콤을보고 바로 자리에 누웠을 때가 10시였으니, 하루가 짧을 만도 하다고 위로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오늘도, 1시반쯤에 PET촬영이 있었는데 그게 두시간 정도가 걸리는 검사여서 끝나니까 하루가 다 간듯한게 어쩐지 허무하기도 하고 이상했습니다. 시간을 죽이기만 하는 것 같아 씁쓸하네요. 아, 그런데 이런 지루한 일상중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제 옆자리(2인실에서의 옆자리가 얼마나 중요한 자린줄 알죠? 유일한 친구라곤 옆 침대뿐이니까요.)에 미국의 택사스에서 오신 외국인 아줌마가 오신거에요. 처음엔 놀랍기만 했지만, 지금은 마냥 즐겁기만 하네요. 

어제 저녁에 포도를 갖다 드리면서 짧은 영어로 대화도 나누었는데, 제가 잘못듣지 않았다면 아줌마는 선교활동 하러 오셨고, International high school에서도 선교 활동을 하신다나, 학생을 가르치신다나 그랬던 것 같아요. 물론 천천히 말씀해주시고 한국에 오신지는 2년째라시니, 제 어설픈 영어도 알아서 이해하시고 넘어가 주신 덕에 가능했던 대화였어요. 
아침에는 그 아줌마의 가족들이 미국에서 왔어요. 대화가 끊이질 않았지요. 디스크 수술을 받으셔서, 아프실텐데도 가족들과 쉴새 없이 얘기하시더라구요. 웃기까지 하시고.

병문안 오신 큰엄마가 말씀하시길, 사는 방식이 다르데요. 눈만 마주쳐도 웃으니까.

왜, 우리는 조금만 아프면 인상부터 쓰잖아요. 물론 모두가 그런건 아니지만. 아무튼 좋은점은 본받으라셨어요. 긍정적인 아줌마의 모습을.  우리 엄마가 포도랑 음료수 잡다구리한 음식들을 갖다주니까 Your mother is so helpful! 하면서 웃으시는거 있죠? 
지금, 모두들 8교시를 하고 있을 시간이네요. 저도 어서 그곳에 앉아 수업도 듣고 때론 졸기도 하고 싶습니다. 따분한 오후에, 이렇게 뭐라도 생산해내지 않으면 제 자신이 너무 무기력해질 것 같아서 엄마에게 휠체어까지 끌어달라고 하면서까지 이렇게 공동 컴퓨터앞에 앉아있어요. 여러분에게 글쓰는것만으로도 무언가를 해냈다는 기분이 드니 모두가 저에게 힘이 되는 존재인가봐요. 고맙습니다 정말.  사실, 오늘은 어제보다 기분이 안 좋아요. 담당 의사선생님이 약물치료라고만 말씀하시던걸, 오늘 소아과 의사선생님으로부터 직접 항암치료라고 들어버렸거든요. 알고 있었으면서도 8층으로 병실을 옮긴다는 말에서부터 덜컥 겁이 났어요. 저는 지금 1360호의 창가자리에요. 웬지 아늑하고 좋은 병실이라 이런곳에서 약물치료 받으면 괜찮겠다 싶었는데 환경이 바뀌는데다가 또 겁나는 치료까지 받아야 한다니요.그래서 PET 검사 받으면서 그 동그란 의자에 꼼짝없이 누워 있으면서 별별 생각을 다 했어요.

'8층으로 갔는데 6인실이면 어쩌지.' '창가자리 아니면 답답할텐데' 등등. 그런데 잠도 안오면서 오랜시간 누워있다보니 이런 생각도 들더라구요. '적어도 죽진 안잖아!' 하구요.

요즘들어 정말 사무치게 어떤 형태로든 살아있다는것이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지 느끼고 있으니까요. '적어도 죽진 않잖아.' 하는 말을 되내여 봅니다.

벌써 어제부터 '금식', '검사', '먹기' 또 '금식', '검사', '먹기' 이런 패턴이라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있어요. 아침에 거울을 보면서 "어머어머, 피골이 상접해.." 하는 따위의 말을 스스로 내뱉었으니까요. 지금 검사가 끝난 오후입니다. 실컫 먹어야 하지만, 벌써부터 지쳐버렸어요. 방금 전복죽을 한대접이나 먹었거든요. 워낙 건강한 위장들이긴 한지만 생으로 굶다가 또 무리하게 먹다가 하면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아 살짝 걱정스런 마음도 듭니다. 
그렇지만 아마도 컴퓨터 이용이 끝나고 병실로 돌아가면 또 먹지 않을까싶네요. 심심하거든요. 병실안은. 하루종일 TV를 보면서 건지는건 캐치온에서 틀어주는 최신 영화 정도뿐인것 같네요. 오랜만에 정말 풍부한 문화생활을 하고 있어 너무 즐거울 따름입니다.
어제는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를 절반쯤 보다 검사하러 내려갔었는데,그 영화에 스칼렛 요한슨이 나오거든요. 영화가 진짜 수백장의 명화를 보는 듯한. 색체와 빛이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또 주저리 주저리 무언가 많이 써놨네요. 심심하면 학교생활이 아닌 병원 생활에도 관심을 기울여 주세요. 너무 심심한 나머지 바쁜 여러분에게 부탁을 하네요. 그럼 이만 줄일께요. 그나저나, 아직 30분이나 남은 컴퓨터를 뭘하면서 보낼까요? 에이, 뭐 할게 없으려구요. 그럼 교지 열심히 만드세요. 화이팅!

 

3.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

 

글을 짧게 쓰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지만 사실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하고 제목을 달면

내용은 이것 뿐입니다 : 누워서 지내고 있습니다.

 

지금도, 침대에 의지하고 허리에 배게 끼워서 겨우 상체를 45도 정도 일으켜 자판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낮잠을 자다가 하루종일 누워있는 허리가 베겨서 짜증이나 깼거든요. 억지로 억지로 이만큼까지 일으킨 것만으로도 좋아라 하고 있습니다. 오늘이 아마 2차 항암에 들어간지 5일째쯤 접어든것 같네요. 그러니까 근 5일은 아무것도 못 먹고 토만 하고 있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됬냐면.. 음 사실 별건 없지만,  그러니까 1차 항암이 들어가고 3일 째 되던 딱 한달 전인 9월 말이었습니다. 쇼파에서 TV보다가 토가 올라와 '욱'하던 순간에 그만 그 아픈 다리에서 무시무시한 '뚝'소리가 났던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생각한건 '뭔가 큰일이구나.'와 '그런데 진짜 억울하다.'라는것. 내가 뛰어다니다가 혹은 방정맞게 움직이다가 뚝 소리난 것도 아니고 그냥 얌전히 앉아서 토하려던것 뿐인데.  뚝소리가 나고 다리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발끝까지 엄청나게 시린 아픔을 맞아야 한다는게 119로 실려가면서도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응급실에서 진통제를 맞고 그날 겨우 특실이 하나 남아서 소아과 병동으로 올라가고 또 진통제를 맞고 또 맞고 하면서도 저는 제가 왜 암에 걸려서 항암치료까지 하게 됬는지. 또, 그 치료하다가 다리까지 부러져야 되나 싶어서 억울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생각 끝에 고통이 좀 진정되고 다리에 어설픈 붕대만 감아놓은 상태였을 때, 소아과 병동 2인실에서 깨달은건 '진짜 인생은 내가 어쩔 수 없다.' 라는 것과 '그래도 그나마 발가락이라도 까닥 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라는 것 입니다.  그런 생각하면서 좀 뿌듯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게 자만이라고 까지 할 수 있나요?

 

때는 소아과 6인실. (소아과는 일단 입원하면 2인실이 주어지고,  신청하면 6인실로 갑니다. 아니 모든 병동이 다 그래요 이 병원은. 근데 2인실은 하루 입원비가 13만원이고, 6인실은 9800원이니. 거기다 6인실이 2인실보다 혼자 쓰는 공간이 더 넓거든요~ )

정형외과 의사선생님이 말씀하시길 그 어설픈 붕대는 위험하다. 그러니까 보조기를 달자.

뼈가 좀 붙고나서 목발 집고 걸을 수 있다. 하시길래, 그 다음날로 당장 까만 가죽으로 된, 그냥 별로 흉물 스럽지않은 보조기를 달았습니다. 허벅지를 고정해주는 역할이라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그 보조기를 달고 며칠 후에 엑스레이를 찍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저는 억울함을 못 버리고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나름 기특한 생각도 했고 '인생은 어쩔 수 없어.' 라는 훌륭한 교훈도 배웠고, 하나님께 감사하단 말까진 못 했지만, 옆에서 고생하시는 엄마를 보며 눈물도 많이 흘렸었습니다. 그런데 엑스레이 검사 결과가, 그닥 좋지 않았습니다. 친히 소아과 까지 내려오신 정형외과의 제 주치의 선생님께서 "보조기를 차고 뼈가 조금 더 어긋난거 같네요. 불안해서 안되겠습니다. 내일, 통 기부스를 합시다." 하시는 겁니다.

통 기부스란 무엇이냐! 가슴 밑에서 부터 발목까지 꽁꽁 싸매는 그 기부스. 석고로 된 그 기부스. 그거 차면 허리도 못 펴고 하루종일 누워있는데다가 간지러우면 그걸 어떻게 참으며 그리고 무려 기약 없이 뼈가 붙을 때 까지라니. 항암 치료 하면, 도통 못 먹어서 뼈 붙기도 힘들겠다라는 의사선생님의 말씀도 있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나가자 마자 전 엄마를 붙잡고 그냥 통곡했습니다. 정말 그때는 어떤 교훈이고 인생의 법칙이고 뭐하나 하는생각도 할 수 없었고 단지 '억울해' 하는 외침뿐이었습니다."내가 뭘 해도 상황은 자꾸 어긋나잖아. 왜 자꾸 나빠지기만 해." 하면서 엄마를 붙잡고 아침부터 밥도 못 먹고 그렇게 울었습니다. 바보. 인생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저는 그 생각을 함으로서 앞으로 인생에 무슨 구원이라도 내릴 줄 기대하고 있었던 겁니다.  지금에와서 생각하면 온통 감사드릴 일 뿐인데. 통기부스라고 하셨지만 석고붕대는 아니었고, 신기하게 자크도 달려있어서 앞판을 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간지러움을 참을 필요가 없었다는 겁니다.)거기다 엎치락 뒤치락 해가며 자세를 바꾸면 허리도 그닥 아프지 않았고. 단지 밥 먹는게 좀 불편했지만, 그때는 항암치료 한지 20일즘 되서 건강한 위장 덕분에 소화는 문제 없었습니다.

 그리고 진짜 진심으로 두번이나 말하지만 저는 정말 감사해야 합니다.  다리가 부러졌지만 어긋나지 않아서 수술을 피했고. (이건 정말 무서운 일인데 소아과 선생님이, 만약에 항암치료를 다 못 받고 수술하게 되면 다리를 잘라야 할지도 모른다고 그러셨거든요. 그말 듣고도 한참을 무서워서 울었습니다.) 무시무시한 추같은걸 다리에 달지 않아도 되고, 음식 먹여주고 배설물 받아내주는 엄마가 있고, 딸 심심할까봐 책방까지 가서 만화책을 한아름 사오는 아빠와 동생도 있고. 아, 최신영화가 나오는 캐치온 채널도 나오고. 다리가 부러진지 한달. 이제서야 이런 생각을 하며 억울할건 하나도 없다,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뭐, 요즘엔 속이 너무 안 좋아서, 좀 더 괴롭고 그래서 잘 뒤집지도 못해서 허리도 많이 베기고 아프지만, 그래서 짜증도 많이 내지만 정말 지금 상황에 감사하다는 생각은 꼭 꼭 합니다. 음 지금은 집입니다. 이번주 월요일날 퇴원했습니다. 토일월 삼일동안을 항암주사를 맞고 그 후로 열흘을 못 먹다가 그런데 그 열흘 뒤에는 또 골수의 타격으로 백혈구 적혈구 혈소판 등등의 수치가 확 떨어져서 세균감염에 유의하며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골수가 회복되면 퇴원하고 또 좀 먹을만 하면 다시 항암치료. 이런 스케쥴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번주 일요일날 입원하기로 되어있는데 그게 좀 걱정입니다. 아파트로 이사왔는데 아파트의 엘레베이터가 너무 작아서 저를 들고 나르시는 분들이 직접 계단으로 9층까지 들것에 실어서

옮겨주셨거든요. 나갈때도 그렇게 해야 할 텐데. 뭐 제가 무겁지는 않지만..(사실이에요.항암치료 받고 몸무게가 4~5kg이 확줄어서 정상 몸무게에서 무지 벗어나 버렸다는 것!)

아, 참. 항암치료 받고 20일쯤 되면 머리도 엄청나게 빠집니다. 그게 또 좀 스트레스라, 제 얼굴이 TV에 비치기만 해도 깜짝깜짝 놀라게 되버렸습니다. 그치만 이런 거 쯤이야. 머리야 항암치료가 끝나면 또 금방 자랄테니까요. 지금은 다리를 잘 추스려서 무사히 4차 항암까지 받고, 수술을 하고 재활치료도 해서 다시 걷는 날만 생각해야 할 때! 다른 쓸데없는 걱정은 좀 더 나중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티비만 보다 멍청해질 머리, 관절 수술이 아프다는데... 수술후 고통 걱정 이런거 했습니다. 아, 진짜 길게 썼습니다. 요는 이건데. 누워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엄청 지루하겠군요. 원래 남의 얘기 듣는게 쉬운게 아닌걸요. 그려려니 하고 읽어주세요. 그리고 민영이 언니에겐 편지를 쓰겠습니다. 언제가 될진 모르겠는데 허리좀 추수릴 수 있을 때, 제 책상에 앉아 또박또박한 글씨로 편지를 보낼께요.  언니 시험도 벌써 여러번 봤을 텐데. 힘내라고 말 한마디 못한게 너무 미안해요. 명색이 교정 파트너인데요.

아, 진짜 여기까지 헤헤.. 반가웠습니다. (너무 오랜만이라 말이 많았습니다~)

 

4. 잘될것 같은 느낌 !

 

모두의 게시판에 저만 글을 쓰는것 같아 미안함이 드네요. 일주일만에 집으로 돌아왔어요.
열이 날 것을 염려해 노파심에 입원했던 병원에선, 근 일주일간 미열만 계속 되다가 결국 열도 안나서 주사도 안 맞고, 항생제도 안 쓰고. 그러니까 편하게 지내다 왔습니다.

중요한건, 입원중에 정형외과랑 연락이 되서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아직은 안 붙었을 거야' 하는 저의 걱정 과는 달리 선생님은 뼈가 아주 잘 붙었다면서 당장 기부스를 풀러 보고 앉자고 하시는 거에요! 와~ 그날 저녁은 정말 잠도 잘 수 없었습니다. 무려 허리를 펴고 앉아 있는데다가 내일이면 휠체어도 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지나면
목발 집고 걸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병원에서 주치의 선생님이 저를 직접 안아 주셔서 휠체어로 옮겨주시고. 그래서 아빠랑 엄마랑 두시간이 넘도록 같은 자리를 계속 돌아었요.
그렇게 백혈구 적혈구 면역력 수치가 정상보다 훨씬 좋아질 떄까지 병원에서 먹기도 잘 먹으면서 퇴원해 지금은 집입니다. 어제는 시장가서 아줌마들이랑 엄마랑 대게를 사가지고 오셔서 막 다리 뜯어먹고 그랬어요. 입원했던 855호는 정말 소란스러운데 아줌마들의 수다도 한몫하지만, 먹을 게 또 그렇게 넘칩니다. 엄마가 냉장고가 꽉찬 6인실을 처음본다고 하셨거든요.그제는 불닭도 시켜먹고, 골뱅이니 뭐니 탕수육, 짜장면까지 다 시켜서 먹기도 하고 그랬어요.

 

이사한 집입니다. 아파트인데, 모든게 다 새거에요. 햇빛도 잘들고, 산이랑 가깝고 그래서 당장 구입하셨다고 하시더라구요. 원래 살던 집은 기와집인데, 안마당엔 목단나무도 있고, 뒷마당에 앵두나무 감나무, 마당도 있는 집이었는데 면역력 약한 사람이 살기엔 가장 나쁜 집이라고 병원에서 그러더라구요.거기다 강아지 까지 키우니까. 처음 살아보는 아파트이지만 엄마랑 아빠랑 같이 있어서 그런지 어색하지도 않고 마냥 좋습니다 정말, 좋아지고 있다고,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내내 웃기도 많이 웃고, 먹기도 많이 먹고. 요즘엔 그래요.  모두들 잘 지내고 있으시니 저도 잘 지냅니다. 무슨말인지 모르겠네요. 헤헤. 그럼 다소 짧은 글이었습니다!

 

5. 2005년 한해를 정리하면서..

 

벌써 12월이 다 가고 있네요. 그러고 보니 학교에 못 간지도 3개월이 넘어간는군요. 추석에 중간고사 공부한다고 가져온 짐이 예전 집에 그대로인데. 얼마전까지만해도 학교 책상에 내가 쓰던 책이며 연필꽃이, 일기장이 그대로 있었는데.  나만, 두 발로 계단을 걸어 올라서 우리 반, 내 책상에 가서 앉으면 되었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어요. 지난 몇달 동안은.

그리고 아마 앞으로 몇달동안은 더욱 학교는 내게 걸어가기에 먼 곳일거야. 늘, 한 해가 가면 다가올 한 해가 지난 해 보다 더 긴 것 같고, 어른에 조금 더 가까워졌다는 부담감에 허덕였었지만 이번 년 만큼 연말이 아쉬웠던 적이 있었을까 싶어. 당장 앞인 1월 11일에 수술이 잡혔거든요. 수술이 끝나고 회복대는 대로 5차 항암에 들어가고, 6차까지 끝내고 나면 항암보다 힘들다는  방사선 치료를 하고 힘들일이 훤히 보이는 2006년이라 나는 나에게 수고했다, 잘 견뎠다 할 수가 없어요. 앞으로 헤쳐나갈 길이 훨씬 고통스러울 것이란 걸 알고 있으니까요. 앞으로 계속, 교복입은 아이들을 보며 가슴 쓸어야 할 테니까요. 그래도 나름대로 2006년을 반갑게 맞고자 스스로를 다독거려봤는데 '그 고통 다 견딘 거, 잘했어, 잘했어' 하고말이에요. 근데 그게 전혀 위로는 안 되고, 마냥 2005년이 더 아쉬운 듯, 정말 행복한 해였는데 하는 생각만 들게 했어요. 결국 아침에 눈만뜨면, 수술이 얼마 남았나 달력을 세보게 됬습니다. 난 다가오지도 않은 일 걱정하는데 선수거든요. 어쨋든 결론은 2005년은 나에게 정말 행복한 최고의 해였다는 겁니다. 1월엔 친구랑 KTX타고 부산 바다갔던 일,  학기 초에 교지부에서 면접봤던 일, 중학교땐 한번도 불러보지 못한 선배라는 말이 자연스러워 진 것. 기숙활동을 마치고 집에돌아가는 주말마다 일주일에 한 번 보는 동생이 쑥쑥 자라 수다도 많아진 것, 밤에 대문 빗장 열고 광명역에 캔커피며 아이스크림이며 사가지고 돌아다니다 아빠한테 조금 혼난 일... 그리고 7월 초, 아픈 다리에 별 거 아니야 하면서도 어쩐지 불안해 여기저기 많이도 쏘아 다닌 것,(이때 엠티도 가고, 처음으로 취재도 가보고~ 그랬지)

수술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친구와 요구르트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 하던 일.(물론, 그 요구르트 아이스크림이 내가 2005년에 먹은 마지막 요구르트이자 아이스크림이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항암중엔 요구르트도, 아이스크림도 못 먹게 하거든요) 모두모두, 어느 것 하나 넘길 수 없는 추억이되었어요. 물론 아픈 아이들을 만나고,그 아이들 만큼

아파보고, 링겔에 팔이 팅팅 붓고, 처음으로 삭발을 해봤고, 소독약 냄새가 입 안에까지 멤돌아 짜증스러웠고, 먹은 족족 게워내고... 했던 일들도 2005년에 일어났지만. 나는 그 일들 마저 견딜 수 있을 만한 고통이었다고 생각해요. 하나님께 너무 너무 감사한 일이라고.

지나고 나니까 그 날들마저도 행복했다고. 정말이지 2005년은 최고의 해였어요. 우리 친구들과 선배님들 에게도, 그랬길 바랍니다. 내년엔 얼굴 볼 날이 있겠지요. 수술하기 전까진 차가 닿는 거리에선 외출도 가능하니까 혹시 얼굴 볼 기회가 되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무지 반가울거에요. 그럼 그때까지 안녕히 계세요.

(어쩌다 보니 제목이 너무 거창하네요 헤헤.)

찐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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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나 그렇듯이 주말엔 누워 지내는 것이 대부분의 하루 일과다. 차라리 신나게 놀고 오는 사람은 휴일을 매우 가치 있게 보내고 온 것이다. 학생도 아니고 주말에 공부를 하지 않는 이상 별다르게 칭찬 받을 일도 없고, 그냥 일주일 내내 쌓인 피로를 푸는 차원에서 잠만 질리도록 자는 게 대부분이다. 시계를 보니 벌써 3시가 넘어가고 있다. 아까 열고, 닫아두지 않은 창문에서 선선하게 바람이 불어온다. 나른한 몸엔 더없는 수면제다. 하루 종일 누워 지낸 것도 모자라다는 듯 내 눈은 또 한 번 서서히 감기고 있었다. 이따금씩 ‘탁’ ‘탁’ 거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오긴 했지만 이미 몽롱한 기운이 내 몸속 깊숙이까지 번져 들어갔다.  오빠와 나는 늘 붙어 다녔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대신 해 엄마가 일을 나간 시간동안은 집안에 우리 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오빠는 어딜 가도 나를 항상 데리고 다녔다. 그 즈음엔 한참 비비탄 총이 유행을 했다. 오빠와 나는 그 총을 사기 위해 엄마가 매일 조금씩 주시는 용돈을 밥그릇에 차곡차곡 모으기 시작했다. 엄마 몰래. 돈이 어지간히 모였을 즈음엔 오빠와 함께 동네 문방구로 향했다. 문방구로 가는 길에서도 비비탄 총을 가지고 노는 아이를 흔하게 볼 수 있었다. 개중엔 꽤 큰 총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도 많았다. 총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도 대부분 남자아이들이었지만, 그나마 총을 가지고 노는 여자애들은 대부분 소총은 썼고 남자애들은 소총을 거의 쓰지 않았다. 들뜬 마음으로 문방구에 도착했을 땐 이미 다른 아이들도 많이 와 있었다. 오락기 앞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애들 등. 대부분은 비비탄을 사러 온 아이들이었다. 문방구에서도 비비탄 총이 유행하는 것을 감안하여 기존에 자전거로만 가득 차 있던 문방구 입구에 비비탄 총 진열대도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막상 가서 가격을 보니 만만치 않았다. 우리 옆에는 오빠 친구들도 많았는데 모두가 큰 총이었다. 다시 가격표를 보니 작은 총을 사면 두 개를 살 수 있지만 큰 총을 사면 한 개 밖에 사지 못하는 가격이었다. 오빠 친구들은 그냥 큰 총을 사라고 부추겼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결국 오빠는 큰 총을 샀다. 돈을 더 모아서 내 총도 사주겠다고 하고. 속이 상했지만 이번 주 내로 내 총도 사준다고 했으니, 나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그 말을 믿고 그냥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오빠는 새 총을 등에 메더니 걸음이 더욱 당당해 진 것 같았다. 오빠와 나는 늘 그랬듯이 또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매일 밤마다 들르는 만화방을 지나 우리만 고물상이라고 부르는 쓰레기장에 갔다. 그곳엔 버려진 냉장고도 꽤 많았다. 오빠는 내게 시범을 보여준다면서 때가 낀 손톱으로 냉장고 고무에 감춰진 냉장고 자석을 빼내곤 했다. 나는 잘하지 못했음으로 결국엔 오빠가 다 빼 주었지만. 우리는 그 더러운 것도 보물인 냥 집의 냉장고 문에 붙여 놓고 조금 긴 것은 오빠 꺼, 조금 짧은 것은 내 꺼라 정해 놓고 매일 그 수를 늘려갔다. 엄마는 우리가 그러는 것에 질

  • 찐빵
  • 2007-09-03
어두운 방 안에서

 엄마는 나를 만나는 날이면 곱게 치장을 하고 나왔다. 하지만 남들이 보기엔 똑같은 ‘홍등가 여자’였다. 아빠는 나를 데려다 주고 언제까지 데리러 오면 되겠냐는 질문 외에는 엄마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엄마는 그것이 꽤 서운한 눈치였으나 내 앞에서만은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같았다. 하루를 이래저래 엄마와 보내고 나면 내가 아빠에게 다시 돌아가는 순간 엄마는 눈물을 줄줄 흘려댔다. 다음 달에 또 보자는 엄마를 보며 나는 얼른 들어가라는 손짓만 보였다.    집에 돌아오니 새엄마가 반겼다. 내가 좋아하는 피자를 만들고 있다며 어서 들어오라고 했다. 과연 집에는 치즈 냄새가 나고 있었다. 새엄마는 식탁에 앉아 있는 나에게 당분간 아빠는 못 오실 거라셨다. 이유는 자세히 모른다며 일주일가량 못 오시니 그렇게 알라고 하셨다. 새엄마는 아빠의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던 회사 식구였다. 인테리어 회사를 운영하는 아빠의 사무실에서 소품 디자인을 담당했었는데, 내가 아주 어려서부터 잘 따랐었다. 내가 세 살이 되기도 전에 아빠는 엄마에게서 나를 데리고 왔다. 그 곳은 아이가 자랄 곳이 아니라며 아빤 다리를 잡고 늘어지는 엄마를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매일같이 울며 전화하는 엄마에게 큰 인심을 쓴 것이 한 달에 한 번 나를 보게 해 주는 것이었다. 새엄마는 그것을 인정해 주었지만 내가 엄마에게 다녀오는 날이면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것은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내가 새엄마가 생긴 이후로 엄마를 찾는 일이 더 줄어들었다며 새엄마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긴장을 하곤 했다.  인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해서….” 언젠가 한 번 유학을 가고 싶다고 조른 적이 있었다. 일, 이 년만이라도 다녀왔으면 좋겠다고 했었는데 아빠는 혼자서 그 먼 데를 어떻게 가냐며 딱 잘라 말했다. 그 이후로 까마득하게 잊고 지냈는데 아빠가 먼저 유학 얘기를 꺼낸 것이었다. 아빤 마침 새엄마도 공부를 더 해보고 싶다고 하니 옆에서 보호해 주는 사람도 있고 해서 다녀와도 괜찮을 것 같다면서 아직도 생각이 있으면 말해 보라고 하셨다. 새엄마도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학교를 다녀간 이후로는 1일이 되어도 엄마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처음 한 달은 그러려니 했지만 몇 달이 지나도 아무런 연락이 없자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사실 엄마가 내 앞에서 엉엉 울던 모습이며 좁은 골목길로 사라지는 초라한 뒷모습이 계속 생각났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1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아빠에게 물어보고 싶었으나 아빠는 엄마에 대한 얘기는 듣는 것조차 싫어하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안 꺼내는 것이 좋다 생각하고 그만 두었다. 그러는 동안 아빠는 나와 새엄마의 유학을 차츰 준비하고 있었다. “일 년에 두 번씩 내려와. 그렇게 이년만 있다오면 둘 다 많이 배워 올 수 있을 거야.” 아빠는 새로 짓고 있는 아파트의 단체 인테리어 계약을 맺었다며 그동안 아빠도 바쁠 테니

  • 찐빵
  • 2007-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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