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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소리

  • 작성자 Na
  • 작성일 2006-09-09
  • 조회수 636

 

 


  K는 앞을 보았다. 길고 좁은 골목이다. K가 보는 이쪽에서는 골목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이 골목은, 끝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K는 잠시 바닥에 내려놓았던 짐 가방을 왼손으로 들어 올린다. K의 오른쪽 어깨가 살짝 기운다. K는 시린 오른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고는 자신의 발끝을 보며 앞으로 걸어간다. 주머니 속에서 만져지는 납작하고 차가운 열쇠 . K는 열쇠를 손안에 쥔다. K손안에서 점점 미지근해지는 열쇠를 느끼며 K는 계속 발걸음을 내딛는다.

 얼마나 그 골목 위를 K가 걸었을까 . K는 걸음을 멈추고 발끝에서 시선을 들어올린다. 오불고불한 골목 바닥이 앞으로 늘어지면서 K저쪽으로 계속 이어지는 골목길이 보인다. K는 왼손에 들고 있던 짐 가방을 주머니에서 뺀 미적지근한 오른손으로 바꿔든다. 왼쪽 어깨가 살짝 기운다. K는 꿉꿉해진 왼손을 주머니에 넣고는 주위를 둘러본다. 붉은색 벽돌이 낡게 퍼져있는 담장에는 아록다록한 쪽문들이 달려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쓰레기봉투들이 주둥이를 꽉 다문채로 삼삼오오 몰려있는데 K, 그 중 한 곳에서 움직이는 것을 발견한다.       

 K는 지금 고양이를 보고 있다. 고양이는 까만 앞발을 뻗어서 쓰레기봉투를 툭툭 치며 고개를 뻗댄다. K는 찬바람에 어깨를 웅크리면서 고양이에게 다가간다. 고양이의 앞발로 봉투에 금이 갔다. 고양이가 그 사이로 앞발을 들이밀자 닭 뼈, 생선 가시와 귤껍질 등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그것과 동시에 샛노란 물이 줄줄 흘러나와 어긋난 블록 사이로 스며든다. K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것을 본다. K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은 노랗게 지린 물이 블록 사이에서 계속 움직이기 때문에.

 K는 조금 더 앞으로 다가간다. K 코앞으로 쉰내가 확 풍긴다. 누구의 쓰레기가 저렇게 봉투 밖으로 터져 나왔는지 K는 잠시 궁금해진다. K는 쓰레기봉투에서 나온 내용물을 뒤적이는 고양이를 굽어본다. 고양이는 까맣다. 까만 고양이는 자신만큼 까만 K의 그림자가 자신의 주위를 덮고 있다는 것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하다. 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생선 가시를 연분홍빛 혀로 핥는 것을 K는 얼마간 그렇게 바라본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니, K?

 K, 굽히고 있던 등을 편다. 등을 펴는 K를 마주하고 있는 건 좁게 난 초록 쪽문이다. K는 들고 있던 짐 가방을 왼손으로 넘기고 오른손을 주머니에 넣는다. 그 안에서 구르고 있던 열쇠를 잡아 문지르는 K손가락에 무른 열이 오른다. K, 잠시 주춤하더니 고양이를 넘어  K의 그림자를 끌고 살짝 열린 초록 쪽문을 밀어 그 안으로 들어간다. 어느 순간에.

 K의 현관은 가운데이다. 콘크리트 벽에 박혀있는 세 개의 현관 중 K의 현관은 바로 그 가운데인데 K는 자꾸만 옆을 기웃거린다. 오른쪽을 봤다가 왼쪽을 봤다가. 뭐가 보이니, K?   K는 주머니에 꽂아뒀던 손을 꺼낸다. K의 가슬가슬한 손바닥에는 K온도만큼 데워진 열쇠가 쥐어져 있다. K는 자꾸 자신의 뾰족한 구두코만 본다. 그러다 구두 굽으로 바닥을 톡톡 치기도 하고 언뜻 생각난다는 듯 손을 펴 쥐고 있던 열쇠를 보기도 한다.  K, 문을 열어봐. 열쇠를 꽂아봐.

 K는 멀뚱히 보고 있던 현관문 앞으로 가까이 다가간다. 그리고는 열쇠구멍에 열쇠를 꽂는다. 금속의 착 감기는 느낌. K는 손에 힘을 주고 열쇠를 돌린다. 차락, 풀리는 구멍.

 방바닥엔 노란 장판이 깔려있다. 노란 장판 위로 쏟아지는 겨울의 햇살. 그 안에 문 앞에 선 K의 그림자가 머뭇거렸다. K의 그림자는 문 안으로 들어온다. 그림자는 허리를 굽혀 방바닥에 가방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곧 신발을 벗고 방바닥 위로 발을 딛는다. K발바닥으로 저미는 방바닥의 찬 기운이 K를 움직이게 한다. 그러면서 사라지는 K의 그림자. 열린 현관문으로 비쳐 들어온 햇살이 문의 폭 만큼만 번져서 차마 닿지 못하는 곳. 그곳으로 가서 K는 서성거린다, 그림자를 지우고. 왜 그러니, K? 방바닥이 차서 앉지를 못하겠니?

 K는 벽에 등을 붙이고 서서 방바닥위에 햇살이 만들어 놓은 무늬를 본다. 바람결을 따라 울렁이는 무늬에 K는 자신의 발을 담그고 싶다. 열린 현관문으로 세차고 냉한 바람이 불어 든다.

 K는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다 언뜻 옆을 보았다. 구석에서 무엇인가가 잔뜩 웅크리고 있다. K는 고개를 뒤로 젖히다가 다시 앞으로 내민다. K는 벽을 손으로 짚으며 가까이 다가간다.  어머, 이런 게 왜 여기 있을까, K? 앉은뱅이책상이 단단한 자세로 가만히 앉아있다. K는 허리를 숙이고 그것을 들여다본다. 구석의 옅은 어둠을 가만히 받치고 있는 앉은뱅이책상을 누가 놓고 간 것일까. K가 책상 앞에 주저앉는다. 방바닥의 시큼한 기운이 K엉덩이를 확 문다.   

 K는 살금살금 책상 위를 손으로 훑어본다. 울퉁불퉁한 표면위에 아스라이 쌓여있는 먼지가 K손바닥아래서 이리 모였다 저리 모였다 한다. 곱게 빻은 빛 가루가 K주변에서 흩날린다.

 K는 책상 밑에 달린 서랍을 잡아당긴다. 나무 서랍이 힘겹게 열리면서 뻑뻑한 소리를 낸다. 반 정도 몸을 내민 서랍 안에 얼룩이 짙은 공책이 보인다. K는 조금 뒤로 물러나 앉으면서 서랍을 마저 다 연다. K등 뒤로 싸늘한 바람이 불어와 목 언저리가 얼얼하다. K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 앞으로 간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손잡이를 잡고는 끌어당긴다. 문이 닫히며 꼬리가 끊긴 바깥의 아릿한 공기가 K머리카락 사이사이로 파고든다. 오소소 소름이 돋는 K.

 K는 몸을 호르르 떨며 혀를 축 내밀고 있는 책상 앞으로 가서 앉는다. 무릎을 양 팔로 감싸며 K는 서랍 안에 누워있는 공책을 본다. 공책은 이 안에서 이미 많은 잠을 잔 것 같다.그래도 졸려 보이는 그것. K는 한동안 무릎 위에 턱을 대고 있다가 무릎을 안고 있던 한쪽 팔을 푼다. 그리고는 색이 바랜 공책 겉장을 펼친다. 이게 뭘까, K? 누리끼리한 종이위에 납작하게 붙어있는 그림이 K눈앞에서 흠칫한다. K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그림 위로 초점을 맞춘다. 그것은 그림이 찍힌 엽서다.  

 K는 마른 손가락으로 엽서를 집어 든다. 한 소녀가 유채꽃밭에서 꽃을 꺾고 있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양쪽으로 땋은 머리를 딸랑거리며 앞으로 늘어뜨린 채 허리를 숙이고 있는 소녀. 노란 유채꽃을 한 팔에 가득 안고 있다. K는 엽서를 뒤집어 뒷면을 본다. ‘꽃을 잃은 나비는, 어디로 날아가는지.’ 검은 색 잉크 펜으로 선명하게 쓰여 있는 글귀를 보고 K, 마음이 두근거린다. 울리는 마음을 엽서를 들고 있던 손으로 지그시 누른다. 엽서 안에 핀 소녀의 유채꽃이 K가슴 위에서 파르르 떨린다.    

 K는 공책을 덮고 그 위에 엽서를 올린다. 그것을 바라보며 K는 코트 주머니 속에서 열쇠를 꺼낸다. K는 꺼낸 열쇠를 높이 들어 본다. 저무는 햇살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그것이  K는 비밀스럽다. K는 열쇠를 서랍 안에 넣는다. 열쇠의 은밀한 빛이 공책 옆에서 폭 꺼진다. K는 살며시 힘을 주어 서랍을 밀어 넣는다.

 K는 책상에 앉은 채로 몸을 반쯤 돌린다. 현관문 앞에서 두툼하게 앉아 있던 가방이 K의 눈길을 담담하게 받는다. K는 앉은 채로 가방에까지 간다. 바닥의 냉한 기운에 K몸이 얼얼하다. K는 코트를 벗어서 몸 위에 덮고는 가방위에 머리를 눕힌다. 짐이 담뿍한 가방이 듬직하다. 누운 K앞에 네모난 천장이 떠있다. 천장 곳곳에 핀 곰팡이가 줄기를 뻗어 장미 넝쿨처럼 서로 얽혀있다. K는 둥글게 피어오른 곰팡이를 보면서 스르르 눈을 감는다. 점점 사그라지는 오후 햇살이 K머리맡에서 꿈틀대고, 방바닥으로 가라앉은 K의 건조한 손바닥이 경계를 푼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K가 눈을 반짝 떴다. K의 눈이 거뭇거뭇한 방안에서 빛난다. K는 눈을 깜빡 거린다. 방금 들렸던, 커다란 소리는 뭐지? K는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본다. 현관문으로 가로등 불빛이 새어들고 있다. K는 잠결에 곱은 다리를 접으며 금방 무엇을 들었는지 몽롱하게 생각한다. 시린 손으로 다리를 두드리다가 찬 바닥에 대고 있던 등이 아리아리해서 K는 코트를 등 위로 덮는다. 순간 갑자기 어디선가 불쑥 그 소리가 터져 나온다. 와아- K는 몸을 들썩한다. K가슴이 놀라서 두근거린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지. K는 마른침을 삼키며 손바닥으로 가슴을 짓누른다. K는 주위가 허전하여 엉덩이로 방바닥을 밀며 왼쪽 벽으로 가 붙어 앉는다. 그때 다시 커다란 함성 소리가 방안을 왕왕 울린다. K는 몸을 한껏 웅크린다. K는 등에 덮었던 코트를 앞으로 해서 어깨까지 올려 덮고는 벽에 등을 바싹 기대고 있다. 왠지 벽 너머에서 어떤 웅얼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K는 머리를 벽에 기댄 채 가로등 불빛 가운데 있는 가방을 본다. 자신이 베어서 풀이 죽은 가방이 어스레한 가로등 빛 아래 있다. K는 다시 코트 안에 감춰진 자신의 세워진 무릎 위로 시선을 고정한다. 그런 K귀로 웅얼대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린다.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K? 

 K는 고개를 외로 꺾어 벽에 귀를 대어본다. 이번에도 갑자기 터지는 함성 소리가 벽에 몸을 기대고 있던 K 안으로 울려 퍼진다. 함성 소리는 좀 전보다 더 크고 길다. 그러나 이제  K는 별로 놀라지 않는다. 그저 꼼작 않고 벽에 귀를 대고 있을 뿐이다. 곧 웅얼대는 소리가 이어지더니 점차 선명하게 들린다. 옆집에서는 텔레비전을 보는 가 봐, K. 왼쪽 벽 너머에 사는 사람이 보는 프로는 야구중계인 것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K에겐 모든 함성이 다 야구 관중의 소리 같으니까.

 K는 벽에서 귀를 뗀다. 방안은 점점 어두워지고 가로등 불빛은 진해진다 . K는 고개를 숙여 얼굴을 무릎에 파묻는다. 그렇게만 있어도 소리는 그대로 벽을 통과해 K등에, 어깨에, 머리에 뚝뚝 떨어진다. 채널을 돌리는지 광고 노래 소리가 맥이 끊기며 들린다. 눈을 감는 K. 

 

 L과 같이 갔던 야구경기장을 기억하니, K? 내리쬐는 여름 낮 아래로 역동적이던 치어리더의 탄탄한 다리가 기억나니, K.

 L의 눈이 자꾸만 그녀들의 다리로 꽂히는 것을 K는 애써 모른 척 했다 . 후텁지근한 사람들 틈 속에 우두커니 박혀있는 K. 경기장 입구에서 산 파란색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K의 얼굴에는 화끈화끈 열이 오른다. K는 좁고 딱딱한 관람석 의자에 등과 엉덩이가 배겨서 힘들다. L은 어떤지 L쪽으로 고개를 돌려 본다. 한창 경기에 열이 오른 L은 에어방망이를 들고 그것을 퉁퉁 부딪쳐가며 함성을 지르고 있다. K는 다시 앞을 본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경기장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관중석은 한창 떠들썩하다.

 K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런 K를 야구 게임이 가득 묻은 표정으로 L이 올려다본다.

 “목이 말라서!”

 K가 한껏 목소리를 높여 말한다.

 “자기도 목말라?”

 K가 묻자 L은 앞에서 쏘는 햇살에 눈을 찌그리며 소리친다.

 “콜라 사다 줘!”

 K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리를 숙이며 관중석을 빠져 나간다. 그때까지 탱탱한 다리 위로 노란 치마를 입은 치어리더들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음악에 맞춰 통통 튀어 오르고 있다.

 사람들 틈에서 빠져나와 건물 안쪽으로 들어오니 제법 선선하다. K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매점 쪽을 건너다본다. 한산한 매점 곁으로 몇몇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다. K는 계단을 거의 다 내려와서 바지 주머니로 손을 올린다. K의 주머니는 K허벅지 위로 딱 달라붙어 있다.

 “아, 지갑.”

 K는 계단을 다시 오르려 몸을 돌렸다. 그때 계단 한쪽 구석에 서서 울고 있는 아이가 K두 눈에 잡혔다.  K는 아이 쪽으로 몸을 돌린다. 아이 앞으로 다가간 K.

 “얘, 왜 울고 있니?”

 허리를 숙여 K는 물기가 진득하게 뭍은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아이는 K의 두 눈을 보며 울상을 짓는다. 아이의 눈은 지쳤는지 더 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는다. 그저 아이의 입에서 울음이 새어나올 뿐이다.

 “얘, 엄마는 어딨니?”

 아이는 눈물 자국이 짙은 얼굴을 흔든다.

 “몰라? 아, 그러면 이름이 뭐야? ”

 K는 무릎을 굽혀 아이 앞에 앉는다. 아이의 하얀 원피스가 여기저기 쓸렸는지 군데군데 까만 때가 탔다. K는 아이의 끈적이는 손을 조심스럽게 잡는다. 아이는 지금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더 놀라면 흠칫 날아가 버릴 것만 같다.

 “응? 이름이 뭔지 나한테 말해줄래 ?”

 아이는 모자를 쓴 K를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눈으로 바라보며 울음 섞인 입을 뗀다.

 “나.......리.”

 K는 빙긋이 웃으며 아이에게 말한다.

 “이름이 예쁘네. 나리.”

 K는 잠시 아이의 등을 토닥이다가 서있는 아이의 허리를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살며시 안는다.

 “울지 마. 나리야.”

 

 K, 감은 눈 속이 빨갛게 물든다. 햇살이 K의 얼굴위로 포개진다. 한쪽 손으로 이마를 가리며 눈을 뜬다. 현관문으로 흘러드는 아침 햇살에 K는 부스스 몸을 일으킨다. 밤새 찬 바닥에 몸을 눕힌 K는 이곳저곳이 찌르르 하다.

 벽에 몸을 기댄 K는 이쪽 구석으로 비치는 햇살을 본다. K를 막 스쳐 구석으로 고이는 빛. K는 흐르는 빛을, 빛 속에서 떠도는 먼지들을 손을 뻗어 힘없이 움켜쥔다. K의 손이 닿았던 자리의 먼지들이 이리저리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마구 흔들린다. 너희들의 주인은 누구지. 너희는 어디에서 왔을까. 보이지 않으면 모르는데. K는 문득 그렇게 묻고 싶다.

 K는 한동안 그렇게 벽에 기대어 앉아있다. 그러다가 K는 덮고 있던 코트를 몸에서 걷어낸다. 그리고는 무릎으로 기어서 현관문 앞에 묵묵히 앉아있는 가방으로 간다.

 가방 앞에 앉은 K는 순간 갸웃해진다. 내가 저 큰 가방 속에 무엇을 담아서 왔더라, 내게 숨겨올 짐들이 저렇게 많았나. K손을 뻗어 가방을 잡는다. K손에 잡힌 가방의 한쪽 모서리는 갈라진 가죽을 따라 주름이 잡힌다. 오래된 갈색 가죽 가방은 햇살을 받아 더 엷다. K는 가방을 오므리고 있는 지퍼를 연다. 열린 지퍼 사이로 비치는 K의 짐들. K는 그 안으로 손을 불쑥 넣는다. K가 손을 넣었다 뺄 때마다 찬 방바닥 위로 알록달록한 옷가지들이 쌓인다. K, 이게 다 뭐니? 지금 입기엔 너무 얇지 않을까, K?

 K는 가방 안에서 옷가지들을 잔뜩 끄집어 놓고는 자신도 얼떨떨한지 방바닥 위로 쏟아진 것을 멍하게 본다. 언젠가 한 번쯤 K를 삼켰다 뱉어냈을 축 늘어진 옷들은 기진맥진해 보인다. K는 그것들을 보며 잠깐, 방으로 넘어지는 햇살만큼 창백한 미소를 띤다. 그런데 있지, K. 지금 네 방안에서 햇살을 머금고 황홀한 외출중인 저 먼지들처럼 너도, 저 옷들을 걸치고 날고 싶었던 걸까? K뒤에서 흐르는 먼지들, 너희가 K를 태워줄 수 있겠니?

 K는 몸 안에 것들을 다 빼고 풀썩 주저앉은 가방 안에 다시 손을 넣는다. 덩그러니 가방 바닥에 놓여있던 지갑이 K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밖에서 들어온 K손을 덥석 물고 늘어진다. K는 지갑을 쥐고 일어나서 벽 앞으로 간다. 벽 아래에 벌러덩 누운 코트를 집어 들어 몸에 걸치는 K. 어디 가게, K? K는 구두를 신으면서 차갑게 식어 있는 플라스틱 현관문 손잡이를 잡으며 문을 민다.

 초록 쪽문을 나서는 K얼굴로 좁은 골목의 겨울이 훅 끼친다. K는 코트 단추를 잠그며 깃을 여민다. 쪽문 아래로 내려서며 코트에 달린 모자를 쓰는 K는 초록 쪽문 맞은편에 있는 담벼락을 본다. 담벼락 앞으로 세워진 전봇대 아래에 쓰레기봉투가 빵빵해진 채로 옹기종기 모여 있다. 사람이 산 흔적들. 까맣고 길쯤한 고양이가 그것을 할퀴어 놓고 있는데 K는 지나칠 수 없다. 잠시 멈춰서는 K. 고양이의 아찔한 발톱 끝으로 K의 시선이 모아진다.

 고양이가 긁어버린 쓰레기봉투는 갈라진 틈이 점점 길어지더니 금방 쫙 벌어진다. 그곳에선 빈 요구르트 병, 뭉텅이진 휴지조각, 방안의 먼지들, 머리카락, 구겨진 종이 그리고 무엇을 싸고 있었을 껍질들을 우르르 쏟아낸다. 고양이는 쏟아진 것들을 앞발로 이리저리 굴려보다가 이번에는 옆에 있는 쓰레기봉투를 송곳니로 물어뜯는다. K는 지갑을 움켜쥔다. 고양이가 물어버린 쓰레기봉투는 음식물 찌꺼기와 누렇게 상한 물을 함께 좁은 골목의 바닥 위로 하염없이 토해낸다.

 K는 고양이가 온통 어질러놓은 전봇대 아래를 보면서 온 몸이 침침하다. K는 고양이에게로 다가가 고양이만큼 까만 K의 그림자를 그 위로 드리운다. 고양이를 내려다보는 K. K는 생각한다. 내 마음 속 L을, 그때 만난 아이를, 또 다른 어떤 것들을 찍어 눌러 터뜨린다면 무엇이 나올까. 그것은, 꼭 눈물일까. K는 과일 껍질을 핥아 먹는 고양이를 내려다보며 얼마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좁은 골목을 빠져나와 걷는 K는 지금 신호등 앞에 섰다. 신호등은 이제 막 빨간불로 바뀌었다. 대기하고 있던 차들이 출발하기 시작한다. 신호등 앞에 멈춘 K는 마트에 들러서 무엇을 살지 생각해본다. K는 거센 바람에 한껏 옴츠렸던 등이 뻐근해짐을 느낀다. 고개를 푹 수그리며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는 K . 바람이 불어 말라 바스러진 플라타너스 잎들이 보도블록 위에서 이리저리 쓸려 다닌다. 신호등 주위로 서서히 사람들이 모인다. K는 더 몸을 수그리며 땅을 본다. 파란불로 바뀌는 신호등. 달리던 차들이 멈춰서고 사람들의 발이 앞으로 나간다. 아래를 보고 있던 K도 사람들의 발을 보며 종종걸음으로 신호등을 건넌다.

 마트 안은 후끈하다. K는 모자를 뒤로 넘기고 코트 단추를 푼다. 두 뺨에 홍조를 띈 K는 주위를 둘러보며 매장 안쪽으로 들어간다. 사람이 별로 없는 매장이 K마음을 좀 편하게 해준다. K는 쇼핑카트를 빼내어 두리번거리다 생필품 코너로 간다. 카트 손잡이를 잡은 K의 굳은 손이 따뜻한 매장 공기로 점점 풀린다.

 K는 카트에 샴푸, 비누, 칫솔, 치약을 담는다. 그리고는 또, 뭘 담을까, K? K는 잠시 멈춰서 있다가 다시 카트를 끌고 뒷걸음을 한다. 생리대를 집어 드는 K. 그것을 카트 안에 있는 샴푸 위에 올려놓는다.

 K는 식품코너로 가서 생수 한 병과 봉지라면을 고르고 계산대로 카트를 밀며 간다. 계산대에 카트 안에 있던 것들을 올려놓는 K. 바코드를 찍는 여직원의 손이 빠르다.

 “비닐봉투 필요하시죠?”

 여직원은 물건들을 옆으로 밀면서 K에게 묻는다.

 “네. 주세요.”

 여직원은 벌써 봉투를 벌려 그 안에 물건을 담고 있다.

 “만 삼천오백 원입니다. 봉투 값은 안 받을게요.”
여직원은 피곤해 보이는 눈매로 살짝 웃으며 말한다.

 “아, 네.”

 K는 수줍은 듯 웃으며 지갑을 열어 돈을 꺼낸다. K는 여직원 손에 돈을 놓고 묵직한 비닐봉투를 든다.

 “안녕히 계세요.”

 “네, 또 오세요.”

 밖으로 나오자 따뜻하게 녹았던 K몸이 살을 저미는 찬바람을 무방비 상태로 맞는다. K는 몸을 후르륵 떨며 들고 있던 것을 바닥에 내려놓고 코트 단추를 채운다. 그리고 모자를 덮어 쓰고 내려놓은 것을 든다. 비닐봉투는 안에 있는 것들로 터질듯이 팽팽하다.

 한쪽 손에 잔뜩 무게를 실은 K는 걷다가 바람에 휘청 한다. K는 가벼운 다른 손으로 모자가 벗겨지지 않게 깃을 여며 잡고 걷는다. 조금 더 걸어 K, 한길에서 벗어나 안쪽 길로 접어든다. 바람이 좀 덜 한 것도 같다. K, 이제 등을 조금 펴고 걸어 봐. 응?

 K는 지치는지 흑흑 입김을 내뿜으며 걸음을 멈춘다. 그런데 K, 무언가를 보고 있다. 네 앞에 있는 걸 보고 있는 거니, K?

 ‘목욕합니다’라고 빨갛게 써진 입간판 앞에 K가 서있다. K는 고개를 꺾어 두꺼운 유리문으로 덮여 있는 그 안쪽 어두운 공간을 본다. 유리문에는 ‘삼진 목욕탕’이라고 테이프로 만든 글자가 붙여져 있다. K는 입술을 잠시 깨물었다가 입간판 앞에서 목욕탕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K는 몸을 외로 돌려서 어깨로 유리문을 밀고 들어간다. 안으로 들어서니 훅한 기운과 같이 물 냄새가 끼친다. K는 어정어정 카운터 앞으로 걸어간다. 카운터 유리 안에는 입술이 빨간 앳된 여자가 앉아있다. 여자의 빨간 입술은 껌을 씹고 있는지 씰룩씰룩 한다. K는 비닐 봉투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어른 한 명이요.”

 K는 카운터 유리에 난 반원형 구멍 쪽으로 얼굴을 숙이고 말을 한다.

 “그렇게 안 해도 소리 다 들려요, 언니.”

 여자는 K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한다.

 “언니 하나면 삼천 오백 원.”

 K는 지갑을 열어 돈을 꺼내 반원형 구멍으로 밀어 넣는다. 

 “근데 아까 밖에서 서 있는 거 여기서 계속 봤는데, 언니 그 짐 어떻게 할 거에요?”

 여자는 분홍티켓과 수건 두 장을 구멍으로 넘겨주면서 묻는다.

 “네?”

 “그 비닐 봉다리 말예요. 터질 것 같이 꽉 찬 거. 옷장에도 다 안 들어갈 텐데. 괜찮을까?”

 여자의 빨간 입술이 귀엽게 오물거린다. 곱게 핀 진달래 꽃 같다고, K는 생각한다.

 “언니, 여기다 두고 갈래요?”

 “아, 그래도 돼요?”

 K는 멋쩍게 웃으며 코트 모자를 뒤로 젖힌다. 

 “그으럼요.”

 앳된 여자는 카운터 안쪽에서 일어나더니 카운터 옆에 난 문을 열고 나온다. 여자의 둥근 배. K의 눈이 여자의 배로 쏠린다. 여자는 주황색 임부복 위로 감색 스웨터를 입고 있다. 여자는 허리를 한쪽 손으로 받치며 K를 본다.

 “언니, 그거 들어서 이쪽으로 넣어줄래요?”

 여자는 열어놓은 문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K는 황망하게 여자의 배와 비닐 봉투를 번갈아 보다가 입을 뗀다.

 “아, 네. 잠깐만요.”

 K는 허리를 숙여 비닐 봉투 안에서 샴푸와 비누 칫솔 치약을 꺼낸다. 여자는 수그린 K의 뒷등을 보다가 말한다.

 “어, 근데 목욕탕 안에 치약이란 비누는 있어요. 그냥 샴푸하고 칫솔만 가지고 들어가요. 근데 때 수건은 있어요?”     

 “아, 그래요?”

 K는 비누 곽과 치약을 도로 봉지 안에다 넣는다. 그러다 다시 중얼거린다.

 “때 수건? 아니, 없는데.”

 K는 난처하게 웃으며 여자를 본다. 여자는 빨간 입술을 오물거리며 다시 카운터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녹색 때 수건을 들고 나온다.

 “여기요.”

 여자는 K에게 그것을 건넨다.

 “얼마에요?”

 여자는 머뭇하며 희미하게 웃는다.

 “아, 그냥 써요.”

 “아니, 그래도.”

 K가 어물쩍거리며 있자 여자는 K발치에 놓여있는 비닐 봉투를 집으려 팔을 뻗는다. K는 얼른 여자보다 먼저 바닥에 내려놓은 비닐 봉투를 들어서 열린 문안으로 들여놓는다. 

 “여기 오른쪽이에요. 여탕.”

 K는 허리를 펴고 여자를 보며 말한다.

 “고마워요.”

 K가 탈의실 안으로 들어가자 물 냄새가 더욱 진하다. K는 입술이 빨간 여자에게서 받은 분홍 티켓을 음료수 파는 여자에게 준다. 그리고서 돌아서는 K를 음료수 파는 여자가 부른다.

 “에구, 이거 가지고 가야지.”

 K가 돌아보자 음료수 파는 여자가 옷장 열쇠를 들고 K를 보고 있다.

K는 얼른 열쇠를 받는다. 열쇠에 달린 번호는 94. K는 가슴에 수건으로 감싼 샴푸와 칫솔 때 수건을 안고서 옷장 번호를 찾는다. 아, 저기 있다 , K.

 K는 94번 옷장 앞에 선다. 열쇠로 옷장을 열고서 옷장 속에 가슴에 안고 있던 것을 내려놓는다. 한시름 덜면서 K는 옷을 벗는다. 코트를 벗으니 몸이 한결 가볍다. K는 천천히 블라우스의 단추를 푸르고 바지의 지퍼를 내린다. 음료수 파는 여자가 물걸레를 밀면서 K가 있는 곳으로 온다. K, 음료수 파는 여자가 너를 쳐다 봐. K는 약간 민망한 듯이 얼굴을 숙이고 벗은 옷을 옷장 안에 넣는다. 그리고는 목욕 용품을 꺼내고 옷장을 열쇠로 잠근다. 열쇠를 팔에 채우고 음료수 파는 여자를 지나서 목욕탕 안으로 들어가는 K.

 안개처럼 피어오른 수중기가 K의 얼굴과 겨드랑이, 가슴과 샅 사이로 달라붙는다. 발그스레해진 K의 얼굴이 뿌연 목욕탕 안을 둘러본다. 한쪽에서는 한 여자가 검고 긴 머리를 감고 있다. 여자의 엎드린 등 위로 푸른곰팡이 같은 멍이 넓게 퍼져있다.

K는 여자의 등에서 시선을 떼고 목욕탕 구석에 쌓여있는 대야와 의자 쪽으로 간다. 그것을 하나씩 들고 K는 머리를 감고 있는 여자 뒤로 가 자리를 잡는다. K는 샤워기를 틀어 의자와 대야에 물을 묻히고 앉아 자신의 몸에도 샤워기를 갖다 댄다. 뜨끈한 물이 샤워기에서 뿜어져 나온다. K는 몸이 녹녹해지는 것을 느끼며 잠시 그렇게 물을 맞고 있다가 물을 끈다. 그리고는 엉거주춤 일어나 때 수건에 비누를 묻혀 의자를 닦고 대야를 닦는다. 그리고 자신의 몸도 닦은 후 물을 틀어 비누기를 씻어낸다.

 K는 의자에 앉아 앞에 붙어 있는 거울을 본다. 거울에는 습기가 가득 묻어 있어서 K의 얼굴이 얼룩덜룩 하게 보인다. K는 거울을 물기 있는 손바닥으로 습기를 걷어낸다. 거울이 약간 흐무러지게 K의 모습을 담는다. 거울로 비치는 K뒤에 여자는 감은 머리를 틀어 올리고 있다. 그러자 여자의 가지런한 목선이 드러난다. 여자 등 위로 떠 있는 푸른 자국이 여자의 뼈 움직임을 따라 올록볼록 거린다.

 K는 의자에서 일어선다. 뒤꿈치를 들고 목욕탕 가운데에 있는 온탕으로 걸어간다. 온탕 가운데에서 물이 보글보글 올라오고 있다. K는 탕 안에 발을 밀어 넣는다. 피부가 따끔거린다. K는 잠시 다리만 물속에 넣은 채로 모서리에 앉아 있다가 단번에 쑥 미끄러져 들어간다. 숨이 답답하고 얼굴로 열이 확 오른다. K는 눈을 감는다.

 

 L의 믿음직한 손이었다. 그 손이 K의 어깨를 잡고 세차게 흔들었다.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거야?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K는 L의 샐쭉해진 입매를 보다가 자신이 잡고 있는 아이를 보았다. L은 K의 시선을 따라잡으며 아이를 본다.

 “얘는 누구야? 어디서 데려 온 거야?”

 K는 야구경기장을 빠져나가는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L을 마주보고 서 있다 .

 “아이가 울고 있었어.”

 “뭐? 크게 말해 봐.”

 “아이가 울고 있었다구!”

 L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K의 파란 야구 모자를 보다가 아이의 눈물자국이 까만 얼굴을 보았다. 잠시 후 좀 가라앉은 목소리로 L은 묻는다.

 “그런데?”

 “그런데, 라니.”

 K는 마른 침을 삼키며 놀란 표정으로 L을 본다.

 “아이가 울고 있어서 달래주었어. 엄마를 잃었대. 어떻게 그냥 지나쳐.”

 “누가 그냥 지나치랬어? 빨리 와야지, 기다리는 사람은 신경도 안 쓰이냐구.”

 “자기는 야구를 보고 있었잖아. 아이는 엄마를 잃었구. 자기는 나를 찾을 수 있지만 아이는 그러지 못해!”

 사람들은 이제 L과 K와 K손에 잡힌 아이를 흘끔거리며 지나친다. K는 사람들에 치이는 아이의 어깨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감싼다. L은 그런  K를 보더니 다시 목소리가 커진다.

 “얘가 자기 엄마를 찾는지 못 찾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여태까지 같은 곳에서 기다렸는데 나리의 엄마는 오지 않았어!”

 “나리? 나리가 얘 이름이니?”

 L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K를 건너다본다.

 “나리 엄마가 나리보고 여기서 계속 기다리라고 했대. 근데 오지 않았어.”

 K는 마지막 말을 할 때 목소리를 낮추면서 울먹이는 아이를 내려다본다.

 “미안해. 날 찾게 해서 미안해. 그치만 어쩔 수 없잖아. 지금은 아이가 피곤해 하니까 집으로 데려가자. 우선 그렇게 해줘. 응?”

 K는 L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아이를 꼭 안는다. L은 야구 모자에 가려진 K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알았어. 따라 와.”

 K는 침착한 L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이를 데리고 L의 뒤를 따른다.

 

 K는 온몸이 화끈거리는 것을 탕 안에서 느끼고 눈을 뜬다. 습기에 푹 젖은 K의 두 눈이 몽롱하다. K의 맞은편에는 등이 파란 여자가 앉아있다. 틀어 올린 여자의 머리 아래로 드러나는 목선이 어깨와 잘 어울린다.  K의 시선을 느꼈는지 탕 속에 앉아 있던 여자가 K를 쳐다본다. K는 여자의 눈을 피해서 김이 오르는 탕을 들여다보며 손가락으로 쇄골을 문질러본다. 때가 불어 밀린다. K는 탕 속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다가 등이 파란 여자를 돌아본다. 입술을 살짝 깨무는 K.

 “저, 등 좀 밀어줄래요?”

 온 몸이 벌겋게 익었다. 아직도 탕에서 나올 때의 어지럼증이 다 가시지 않았다.

 “어머, 때가 많네요. 호호.”

 여자의 말에 K가 흠흠, 웃는다. 

여자는 K의 어깨를 한 손으로 잡고서 때 수건을 낀 손으로 구석구석 야무지게 등을 민다. K등에 닿는 여자의 손길이 시원스럽다. K는 무릎을 쪼그리고 목을 숙인채로 여자의 손길에 몸을 맡긴다. 여자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리는 K의 몸. 여자가 K등에 물을 끼얹는다.

 “다 밀었다. 됐어요. 시원하죠?”

 K는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이젠 내 등 좀 밀어줘요.”

 여자가 손에 끼고 있던 때 수건을 K에게 건네며 말한다.

 여자의 등은 등뼈가 고르게 드러난다. 가녀린 어깨로 드러난 뼈의 움직임이 K는 간지럽다고 느낀다. K는 여자의 등에 손을 얹으려다가 파랗게 번진 멍을 가만히 본다. 그 낌새를 여자가 느꼈던 걸까.

 “내 등에 있는 거, 뭔지 궁금하죠?”

 K는 목욕탕 안을 울리는 여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등을 밀기 시작한다. K의 차분한 손이 여자의 뒷목을 지나 어깨 죽지로 간다. 여자는 말을 잇는다.

 “엄마 말로는, 내가 뒤집기 할 때니까, 한 삼 사 개월 때쯤 이었겠다. 그때가 여름이었나 봐요. 애를 마루에다가 놓고 엄마는 마당에서 말린 고추를 다듬고 있었데요. 근데 대낮부터 아버지가 술에 취해서 들어오신 거야. 원래 술을 잘 못하시는 양반인데. 엄마는 낮술에 취해서 들어온 아버지를 보고는 얼른 방에 들어가라고 했나 봐요. 아버지가 비틀거리면서 마루로 올라왔겠죠. 근데 마루에서는 내가 막 뒤집으면서 놀고 있었구요.”

 K는 여자의 말을 들으며 여자의 미끈한 등 위에 퍼진 멍으로 손을 옮긴다. 그 위를 지나는 K의 손이 살짝 떨린다.

 “아버지는 거기에 갓난애가 있는지도 모르고 안방으로 막 걸어가다가, 날 밟았나 봐요. 호호. 그때 진 멍이 아직까지 그렇게 있는 거예요. 엄마는 내가 그때 엎어져있던 게 천만다행이라고 해요. 호호.”  

 K는 잠시 손을 멈춘다. 그리고는 여자 등위로 파랗게 핀 멍을 본다.

 “다 밀었어요?”

 여자의 물음이 K위로 툭, 떨어진다 .

 “아, 아직요. 잠깐만요.”

 K는 여자의 옆구리를 밀면서 말한다. 여자는 간지러운지 호호 웃으며 몸을 살짝 뒤챈다. 여자의 등에서 밀리는 말간 때가 K를 보며 까르르까르르 웃는 것 같다.

 K는 마지막으로 여자의 등에 물을 끼얹는다. 여자는 굽혔던 등을 핀다. 그러자 퍼져 있던 멍이 여자의 등 근육을 따라 오므라든다. K는 그것을 보며 중얼거린다.

 “등에 있는 멍이, 꼭 나팔꽃 같아요.”

 여자는 K를 돌아보며 웃는다. 그 말을, 여자가 들었을까, K?  

 탈의실에서 머리를 말리고 있는 K곁으로 여자가 다가와 K에게 우유를 쥐어준다. 

 “되게 시원했어요. 호호.”

 여자는 눈을 찡긋하면서 K어깨 위에 손을 얹는다.

 “나 먼저 갈게요. 이 동네 살면 또 마주치겠지 뭐. 그때 보면 아는 척 해요.”

 K는 거울로 여자를 건너보며 웃는다 . 여자의 긴 머리가 탈의실 안에 여운을 남기며 파락, 하고 빠져나간다.

 K는 여자가 주고 간 우유를 뜯어 빨대를 꽂으며 탈의실을 나선다. 구두를 신다가 샴푸가 K품에서 떨어진다. K는 샴푸를 주우며 탈의실 문을 연다. 알싸한 냉기가 풋풋해진 K에게 닿아 톡 터진다. 

 K는 카운터 유리를 두드린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중년여자가 고개를 돌리며 돋보기안경 너머로 유리 밖에 있는 K를 본다. 입술이 빨간 여자가 아니라 K는 당황한다. 여짓여짓 말을 떼는 K.

 “저기, 여기에, 짐을 맡겨놨는데요 .”

 K는 유리에 난 반원형 구멍으로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그러는 동시에 K는 입술이 빨간 여자의 안 그래도 들려요, 소리가 생각난다. K의 물기 있는 머리카락이 몇 가닥 따라 내려와 K얼굴을 건드린다. 중년 여자는 K의 말을 듣고는 아, 하며 들어오라고 손짓을 한다.

 K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중년 여자는 두리두리한 얼굴로 K를 올려다본다.

 “교대시간이 지났거던. 안 그래도 새댁이 가면서 말하고 갔어. 저거지? 가지고 가요.”

 중년 여자는 구석에 놓은 K의 비닐 봉투를 가리킨다. 오도카니 쭈그리고 있는 비닐봉투. K를 보며 울상을 짓는다. K는 쭈그리고 앉아서 봉투 안에다 가슴에 안고 있던 물건을 넣는다 .  

 “고맙습니다.”

 K는 비닐 봉투를 들면서 카운터 문을 나서다 말고 여자를 돌아보며 말한다.

 “고맙긴. 또 와요.”

 중년여자는 텔레비전을 보는 채로 K의 말을 받는다. 중년여자의 파마기 풀린 뒷머리를 나비 핀이 하나로 묶고 있다. 듬성듬성 알이 빠진 나비 핀은 K를 마주본다. K는 몸을 돌려 카운터 문을 열고 나온다. 

 차고 시린 바람이 목욕탕에서 나오는 K에게 덤빈다. K는 모자를 뒤집어쓰며 마저 남은 우유를 쪽쪽 빨아 먹고는 우유 곽을 비닐봉투 안에 넣는다.

 K는 이제 막 지는 겨울 오후의 좁은 골목으로 들어선다. K는 좁은 골목의 어긋난 블록을 찬찬히 밟으며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다. K의 구두 굽이 언 땅을 톡톡 울린다. 그 소리에 귀 기울이며 걷는 K. 자신이 돌아왔음을, K는 골목에게 알리고 싶다.

 가던 K가 내딛던 발길을 멈추고 골목 안에서 우뚝 선다.

 “무슨, 소리가, 들려.”

 뭐라고, K?

 K는 골목의 옆으로 늘어선 담장으로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린 채 앞을 본다. 희미하게 남아있는 오후 빛 속에서 세발자전거가 보인다. 꼬마는 열심히 패달을 밟으며 세발자전거를 끌고 온다. 세발자전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꼬마는 따라 부르고 있다. 노래가 끊기자 꼬마는 패달을 밟으며 자전거 핸들 위에 붙어있는 빨간 버튼을 누른다. 그러자 아까와는 다른 노래가 나온다. 꼬마는 세발자전거에 달린 자그마한 스피커에서 졸졸 새어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K옆을 지나간다. K는 혀 짧은 꼬마의 노래 소리를 작게 따라 불러본다.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오너라. 호랑나비, 흰나비, 춤을 추며 오너라.”

 K, 조금만 더 크게 해 봐.

 K는 잠시 꼬마의 세발자전거가 가는 쪽을 돌아본다. 눈으로 세발자전거의 그림자를 따라가는 K.

 “왜, 우리는, 나비를 부를까.”

 K는 멈췄던 발길을 내딛는다. 조금씩 흐트러지는 K의 뒷모습.

 글쎄, K.

 초록 쪽문의 높은 턱을 넘어서 K는 자신의 현관문 앞에 선다. K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뒤지다가 문을 열어놓고 간 것을 기억해낸다.

 방안에 남아있던 자잘한 햇살이 오른쪽 벽에 달라 붙어있다. K는 들고 있던 비닐 봉투를 방바닥에 내려놓는다. 그리고는 뒤로 팔을 뻗어서 현관문을 닫고는 구두를 벗는다. 구두를 벗고 올라서는 방바닥에 아침에 K가 쌓아놓고 간 옷더미가 듬뿍하다. K는 그것을 넘어 방 한가운데로 가 스러지듯 앉는다. 온 몸이 푹 퍼진 듯 노곤하고 힘이 없다. K는 자리에서 누워 몸을 동글게 말고는 두 팔을 포개어 머리를 벤다. 때 수건으로 몸을 너무 세게 밀었는지 가슴께와 허벅지 안쪽이 쓰리다. K의 눈이 가물거린다.

 “저기요.”

 현관문 바깥에서 무슨 소리가 나, K. K는 가물거리던 눈에 힘을 준다. 그러다 다시 힘없이 풀어지는 K의 눈.

 “저기, 계세요.”

 말소리와 함께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K는 몸을 일으켜 세워 허리를 돌려 현관문을 본다. 불투명한 유리 너머로 주황색의 무언가가 비친다. K가 가만히 앉아있자 다시 현관문을 두드린다.

 “저기, 옆집인데요. 안에 계세요?”

 K는 피곤한 표정으로 일어서서 현관문 앞으로 다가간다. 벗어놓은 구두를 밟고서 현관문을 열어 얼굴을 내민다.

 “저기, 어?”

 K의 얼굴을 보고 놀라는 사람은, 입술이 빨간 여자다. K의 알딸딸하던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아까, 목욕탕에서 봤던, 언니 맞죠?”

 K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입술이 빨간 여자는 까르륵 웃는다.

 “어머, 정말 반가워요. 웬일이야 진짜!”

 K가 재미있다는 듯 웃는 여자의 빨간 입술을 보며 미소 짓는다.

 “저기, 이거 드리려구요.”

 여자는 조그만 바구니에 담긴 노란 귤을 K앞으로 내민다.

 “사람이 새로 들어온 것 같아서 인사나 하려구 왔거든요.”

 K는 여자가 내미는 귤 바구니를 받으며 여자의 둥근 배를 쳐다본다. 

 “몇 개월 됐어요?”

 “아, 팔 개월째 접어들어요.”

 여자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한다.  

 “잘 먹을게요.”

 K는 여자의 배에서 눈을 떼며 말한다.

 “네. 그러세요. 앞으로 자주 봬요, 언니.”

 여자는 빨간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한 손으로 허리를 받치며 오른쪽 현관으로 간다. K는 여자의 주황빛 임부복 아래로 불룩한 배를 본다. K가 갖고 싶던 배. K가 기다리던 배. 그러나 L은 원하지 않던 배.

 K는 현관문을 닫고는 문 앞에 기대어 선다. 여자가 주고 귤 바구니의 싱싱한 향이 K잎가로 새록새록 퍼진다. 소도록하게 쌓인 노란 귤이 여자의 둥근 배와 겹쳐 보인다.

 K는 앉은뱅이책상 앞으로 가서 앉는다. 귤 바구니를 책상에다 올려놓고는 노랗고 탱탱한 귤 하나를 집어서 껍질을 깐다. 여자의 임부복 색깔 같은 속살이 드러난다. K는 알맹이의 삼분의 일 정도를 떼어서 입안에 넣는다. 달달 새콤한 귤 즙이 K입속에 배어나온다. 여자의 입 속맛도 이럴까? K는 무심코 여자의 빨간 입술을 생각한다.

 

 어둑어둑한 방 안으로 가로등 불빛이 흘러든다. 밤이 오는 소리. 그것은 아마 낮 동안의 감정들이 보내는 신호일 테다. 여기저기로 떨어진 감정의 부스러기는 빛 아래에서 반짝였다가 어둠이 내리면 바짝 곤두서서 K위로 기어오른다.

 K는 여러 갈래로 갈라진 귤껍질을 바닥에 놓고 책상위에 엎드린다. 책상과 바닥에는 여러 개의 귤껍질이 널려있다. 귤 향이 방안에서 소소히 떠돈다.

 “꽃을 잃은 나비는, 어디로 날아갈까.”

 K는 책상에 얼굴을 대고 서랍에서 꺼낸 엽서를 들여다보며 중얼거린다.

 

 아이의 잠든 모습을 지켜보던 K뒤로 L이 와 섰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나도 잘 모르겠어.”

 “애 깨면 파출소에 데려다 줘.”

 K는 L을 돌아다본다.

 “뭐?”

 “애 엄마가 찾을 거 아니냐구. 당연히 찾아줘야지.”

 “기다렸는데 오지 않았다니까!”

 K는 쏘아붙이고는 고개를 홱 돌린다. L은 K뒷모습에 대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래서? 너 지금, 우리가 키우자고 말하려는 거니?”

 K의 등은 꿈적하지 않는다.

 “네가 아주 미쳤구나.”

 “차라리, 미쳐버리고 싶어.”

 K의 경직된 어깨가 차츰 흔들리기 시작한다. L은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손을 빼서 K어깨위로 올린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응?”

 L은 무릎을 굽히고 K뒤에 앉아 부드러운 손길로 K의 등을 쓰다듬는다. 그 손길에 K마음이 조금 누그러진다.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애타게 찾고 있을 거야. 잘 생각 해 봐.”

 “난, 아이가, 갖고, 흑, 싶어, 흐흑.”

 K는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다. L의 가늘게 떨리는 손이 K어깨를 움켜쥔다.

 “아이를 갖고 싶다고 저 애를 우리가 키울 수는 없는 거야. 그건 네가 더 잘 알잖아. 왜 이래, 바보같이.”

 “내가 키우려는 게 아냐. 난, 흑, 나를, 잠시 흐흑, 빌려주는 거야.”

 K의 어깨를 잡고 있던 L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자꾸 왜 이렇게 이상한 소리만 하는 거니. 아이는 언제라도 가질 수 있어.”

 “그 언제가, 언제냐구. 흑.”
L은 K의 등 뒤에서 깊은 숨을 내뱉는다.

 “우리가 아이를 가질 준비가 된 때.”

 K는 젖은 손바닥을 얼굴에서 떼고 L을 돌아본다.

 “난 준비가 됐어.”

 내리깔리는 L의 눈길.

 “난, 아냐.”

 L은 눈을 들어 K를 본다.

 “난 아니라구. 도대체 뭐가 준비됐다는 건데? 우린,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이 있잖아.”

 K는 눈을 새치름하게 가누며 L의 흔들리는 입술을 본다.

 “그런 걸 꼭 이뤄야,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거니?”  

 “응. 적어도 난 그래.”

 K의 벌게진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주룩 흐른다.

 “그래? 흑, 그럼, 그게 뭔데?”

 L은 K의 흐르는 눈물을 눅눅한 손가락으로 밀어내며 K의 눈을 들여다본다.

 “마음.”

 빨갛게 열이 오른 입술을 깨무는 K .

 “너에 대한, 나의 사랑.”

 

 K는 앉은뱅이책상에서 물러나 방 한가운데로 와 눕는다. K위를 덮는 가로등 불빛이 하늘하늘 하다. K는 들고 있던 엽서를 방바닥에 내려놓고는 옆으로 돌아눕는다. 오른쪽 벽을 마주하고 있는 K. 어디선가 나직한 여자의 목소리가 가로등 불 아래 희미하게 드러난 K에게로 울먹이며 온다.

 (자꾸만 왜 그래. 왜 이렇게 내 속을 쥐어뜯어 놓느냐구.)

 입술이 빨간 여자의 목소리 같아, K. K는 누운 채로 오른쪽 벽으로 가서 붙는다. 벽과 나란히 누운 K. 벽 아래 수더분하게 쌓인 어둠이 K를 감는다. 전화통화를 하고 있는 걸까.  입술이 빨간 여자의 목소리 보다 조금 더 조그맣고 앙칼진 다른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지금도 너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네가 미친 것 같구나. 이해 할 수가 없어. 엄마한테, 이해해달라고 부탁한 적 없어. 미친 년. 다 자기 잘 되라고 하는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결국 꼴좋게 됐구나. 전화번호 어디서 알아냈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병원에 가라. 전화번호 어디서 알아냈어! 지금 그게 중요하니? 애비 없는 자식을 낳아서 지금 뭘 어쩌겠다고 그러는 거야. 엉? 엄마한테 도와달라고 안 해. 내가 알아서 한다구, 제발. 흐흐흑)

 눈을 감는 K. 어디선가 함성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K는 팔을 이마위에 걸치고는 숨을 폭 내쉰다.

 “꽃잎도 바르게, 풀잎도 바르게, 그렇게 옳게만 핀 꽃이 세상에 어딨니.”

 K, 다시 말해 봐. 조금 더 크게.

 K는 몸을 일으켜 등을 벽에 기대고 앉는다. 등에 닿는 벽면이 L의 손바닥 같다고, K는 생각한다. 이 벽을 넘어서 K, 입술이 빨간 여자에게 가고 싶다. 가서 여자의 등을 토닥거리며 울지 말라고 위로하고 싶다. 이 골목에 사는, 그들의 방으로 가서 K, 잠들고 싶다. K가 마음 에 품어놓은 사람들, 그들의 방에서. K의 문, 열어놓을 테니 벽을 넘어 이리 오라고. 와서 같이 있자고.

 여기저기서 터지는 함성 소리에 K의 마음이 툭, 터진다. 여자의 흐흑 거리는 울음소리가 K의 터진 마음으로 비집고 들어온다. 방안의 가로등 불빛이 흐릿하게 번지며 K의 입술로 톡 떨어지는 것. 웅얼대는 L의 소리. (갈라서자. 우리 이대로는 힘들어.) 웅얼대는 K의 소리. (정말 그럴까.) 다시 웅얼대는 L의 소리. (오늘 저녁은 나가서 사 먹을까? 너는 뭐가 좋아?) 다시 웅얼대는 K의 소리. (글쎄.) 또 웅얼대는 L의 소리. (지금 입은 옷 잘 어울린다. 예쁜데.) 또  웅얼대는 K의 소리. (정말?)

 계속해서 도는 소리. 당신과 나 사이에 소리. 자꾸만 그리운 과거로 가는 소리. 그래서 지난 소리. 때문에 나를 아프게 하는, 소리.

 

 희붐하게 떠오른 방 안으로 가로등 불빛이 가냘파진다. 바닥에 축 늘어져있던 K는 몸을 일으킨다. 허전거리는 K의 다리. K는 휘청거리며 현관문 앞으로 간다. 구겨진 구두를 신고 K는 현관문의 차가운 플라스틱 손잡이를 잡는다. 문을 여는 K. 파르스름한 새벽빛이 현관문 앞 시멘트 담벼락에 내려와 앉는다.

 K는 초록쪽문을 나선다. 높은 턱을 밟고 골목 바닥으로 내려선다. 싸늘한 냉기가 K의 얇은 블라우스 속으로 스민다. 마치 저녁 때 같아. 그치,  K?

 흐드러지게 피어오른 새벽안개를 좁은 골목은 양쪽통로로 가득 품고 있다.  K는 양 옆을 번갈아 본다. 어느 쪽으로, K? K는 초록쪽문의 왼쪽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다. 그곳으로 가면 L이 있는 방에 닿을 수 있는지. 아직 가보지 않은 골목 깊숙한 곳으로 K, 빨려 들어가듯 간다. K, 지나버린 당신들을 만나고 싶어서.

 골목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끝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K, 너무 멀리 가진 마. 

                                            

 

  

                                  


                               

     

      


                               

     

      

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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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축제

 축제 전야-알 수 없는 이야기  밥상 앞에서 시퍼렇게 멍든 눈으로 엄마는 중얼댔다. 숟가락으로 밥을 푹푹 찌르고만 있는 나 들으라고 한 소린가 했더니 그건 또 아닌가 보았다.  나는 밥그릇에 물을 말며 엄마를 치어다봤다. 엄마의 파마기 풀린 앞머리가 부스스하다. 엄마는 앞머리를 손바닥으로 쓸어 올리더니 멍든 한 쪽 눈을 내 쪽으로 들이민다.  “그래서 꼬우냐? 기지배. 말하는 뽄새 하고는.”  엄마가 멀뚱멀뚱 내 뻗은 손을 보았다. 나는 괜히 엄마 눈앞에다 대고 손바닥을 슬슬 흔들어 본다.  “치.”  “추워, 이년아. 문 좀 닫고 다녀.”  “엄마 나 간다.”  나는 방문턱에 걸터앉아 운동화 끈을 묶으면서 중얼거렸다. 운동화를 방 안에다 넣어놓아야 할까보다. 신을 때 신발이 차면 나가고 싶지 않다. 특히 요즘처럼 해가 금방 지는 계절이라면 더.   “으, 정말.”  불 꺼진 방안을 등지고 선 엄마가 어둡다.  엄마의 목소리는 조용조용 하다. 엄마는 언젠가부터 소리를 크게 내는 법이 없어졌다. 내 목소리만 짜증에 억눌린 채 어둠 속에서 격해져 있다.  나는 손목을 올려 시계를 보았다. 그러나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시간에 촉박해 지는 건 싫다. 그렇다고 시간이 약속 때 보다 남아돌아 서성이는 것도 싫다. 그래서 난 혼자가 편하다. 누군가와 만나기 위해서는 한 장소 같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억지로 껴 맞추는 인연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은 없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아르바이트에 가야 한다.  “보이기나 해? 진짜, 불 좀 켜고 찾아.”  “너는 나 없으면 어떻게 살래? 물건 하나도 제대로 못 찾고.”  몸을 돌려 현관문을 열었다.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가 시멘트 바닥에 부딪치며 내 얼굴로 톡톡 튀었다. 알싸하고 비릿한 비 냄새가 진동한다.  “또 뭐가.”  “저만치서 걸어가 이 기지배야. 내가 언젠 화냈냐? 참 일찍도 물어본다. 둔해 빠져가지고는.”      “삐쳤냐?”  우산 위로 쏟아지는 빗소리가 요란했다. 신고 있던 운동화가 젖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 정말 왜 그래.”  “싸가지 없는 년. 물어보지도 않냐?”  “무슨 병원?”  “뭐야?”  “갱년기래, 엄마. 어쩐지 통 기운이 안 나고 축축 늘어지고 생리까지 몇 달 걸러서 가봤더니.”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면 내가 일하는 곳이 나온다. 엄마는 나와 같이 종점에서 내린 다음 지하철을 갈아타야 한다고 했다. 내가 일자리를 갖고 처음으로 엄마와 같이 탄 버스였다. 나는 우산을 쓰고 한껏 차려입은 채 걸어가는 엄마 뒷모습을 보면서 엄마는 어디서 일하는 걸까, 생각해 보았다. 엄마는 자신이 어디서 일하는지 내게 말해준적이 없고 나도 꼬치꼬치 캐물은 적이 없다. 뭐든 내게 말

  • Na
  • 2006-12-22
빨래터

  또독 또독.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는 소리는 아이들을 충분히 재울 수 있는 자장가이리라. 그 소리가 끊기고 나면 사방은 순간 고요하다. 땅 바로 위까지 어둠이 내려 묵직한 공기가 집 주위를 감싸고돌면 기다렸다는 듯 풀벌레 소리가 잔잔히 퍼지고 아이들의 순진한 숨소리가 나무 바닥으로 된 마루에까지 고르게 전해진다. 그리고 문이 열리면서 함께 쏟아지는 엄마냄새. 여자의 미지근한 커피 잔 에서는 더 이상 김이 오르지 않는다. 여자는 지금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남자를 의심하고 싶다. 넌 그가 아니라고 어서 가면을 벗으라고 밀쳐내고 싶다. 여태껏 들어 본적 없는 사무적인 그의 말투. 헤어지자. 여자는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다. 그의 얼굴을 보고 나면 그가 정말 그라는 것도 헤어지자는 말도 모두 진짜가 되어 버릴 테니까. 결혼할 여자가 생겼어. 너도 아는 여자야. 아는 여자? 여자는 그 말에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본다 . 남자의 얼굴. 만지고 싶어. 그가 짜증을 내도 소리를 쳐도 괜찮아. 여자는 입을 앙 다물고 스커트 자락을 움켜쥔다. 정민 씨. 여자는 숨이 탁 막힌다. 거짓말. 여자는 물 컵을 잡는다. 물을 마시고 싶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내달에 결혼해. 청첩장 보낼게. 여자는 잡고 있던 물 컵을 든다. 착. 물 컵의 물이 그의 얼굴로 쏟아졌다. 무슨 짓 이야. 조용한 , 화가 억눌린 남자의 음성. 이런 면이 있는 줄은 몰랐네. 남자는 손수건을 꺼내 천천히 물을 닦는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차 값은 내가 낼게. 여자는 남자의 가는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창 밖으로 남자의 차가 가는 것을 내다보고는 자기도 자리에서 일어난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쳐다보는 것만 같다. 바보, 바보, 바보. 그래요. 나 바보에요. 모든 게 꿈만 같아. 여자는 갑자기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머릿속이 멍멍하다. 오늘 내가 그와 만나긴 만난 걸까? 여자는 사람과 차들이 뿜어내는 뜨거운 열기 속에 우뚝 멈춰 섰다. 몸속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쿵쿵  거리며 무너지는 기분. 그동안 어렵사리 꼭꼭 매워 왔던 실밥이 결국엔 투둑 하고 터진 듯 하다. 외롭다. 주위의 모든 것들이 여자와는 무관하다는 새삼스런 사실. 여자는 발이 끄는 대로 이리저리 몸을 옮긴다. 신호등 앞에도 서보았다가 시장 안으로 들어가 과일을 고르기도 하고 아무버스나 골라 타기도 했다. 여기가 어딘가 . 한참을 돌아다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여자는 이름모를 곳에 서있다. 여자는 발바닥이 따끔거리며 얼얼함을 느낀다. 많이 걸어서 일까? 뜨거운 발바닥. 엄마는 항상 발에서 열이 난다고 했다. 엄마의 몸에서 열이 나는 부분은 발바닥 뿐 이었다. 추운 겨울 밤. 여자는 엄마 곁에 누워 자신의 찬 발을 엄마 발에 비벼대곤 했는데. 온몸으로 퍼져 나갔던 따스함. 발이 뜨거워 몸이 더운 거라며 겨울에도 이불자락 아래로 발만 빼꼼히 내놓았던 엄마. 여자는 갑자기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생각을 한다. 저 앞에 공중전화가 보인다 . 여자는 공중전화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 Na
  • 2005-08-17
거짓말

 “친하게 지내자.” 그 애는 틈만 나면 뭔가를 지우는 듯 했다. 수업시간에 해놓은 필기까지도 전부. 그 애가 뭔가를 열심히 지 울 때마다 뭘 저러 지우나라기 보다는 뭘 저렇게 써놓았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저렇게 지울 거면서 그 많은걸 뭣 하러 써놓았을까? “괜찮니?”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면서 내 발목과 함께 묶였던 그 애 발목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까 묶은 끈 때문에 약간 발갛게 도드라졌을 뿐 말짱했다. 무릎이 약간 쓸린 정도. 그 애 발목을 보고 있던 나는 그 애 소리에 놀라 재빨리 내 발목으로 눈을 돌렸다. 방금 전보다 눈에 띄게 부어있었다. 그걸 보고 있으니 통증이 심해지는 것 같아 운동장으로 얼굴을 들었다. 사납게 내리쬐는 오후의 태양열, 온통 샛노란 색으로 보이는 운동장에 구토가 치밀었다. 나는 머리를 뒤로 젖혔다. 햇빛을 맞받으며 등나무가 가득 퍼져 있었다. 그렇게 눈을 감고 한동안 있으려니 종이 울렸다. 선생님은 호루라기를 불어 아이들을 집합시켰고 곧 해산시켰다. 모두들 그 자리에서 뿔뿔히 흩어졌지만 결국은 같은 교실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운동장은 순식간에 모래먼지로 가득 찼다 이내 가라앉았다. 복작거렸던 운동장은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둥글고 휑한. 그 애는 그때까지 가지 않고 있었다. 내가 일어서려 하자 따라 일어서면서 내 팔을 잡았다. 그 애의 땋은 머리가 내 얼굴을 스치자 샴푸 향과 먼지 냄새가 뒤섞여 났다. 다행히 그날은 마지막 수업이 체육이었다. 자리에 앉아 가방을 싸고 있는데 그 애가 몸을 뒤로 돌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 애를 보았다. “그래.” 그 애는 땀을 연신 닦아내며 나를 부축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한쪽팔만 맡겼던 것이 점점 그 애 쪽으로 몸의 중력이 기울어졌다. 그 애 품이 부담스러웠지만 그것을 뿌리치기엔 발목이 너무 아팠다. 집의 절반을 다 와갔지만 누구하나 말하는 이는 없었다. 나는 누군가와 함께 걷는다는 게 오랜만이었던 탓도 있었고 내 몸의 절반을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고 있어서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결국 그 분위기를 이기지 못한 쪽은 나였다. “아, 그냥 그래.” 예상치 못했던 그 애 대답에 내 고개는 그 애 쪽으로 픽 돌아갔다. 그리고 의외로 더 많은 말이 그 애 입에서 조근 조근 새어 나왔다. 그 애는 한 템포 쉬며 흣흣 웃었다 . 그리고 곧 말을 이었다. 그 애가 난처한 듯이 웃으며 나를 보았다. “요즘 빠삐코가 그렇게 커졌네.” 가게 앞 평상에 나란히 앉아 아이스크림을 쭉쭉 빨아 먹었다. 난 순수한 답례 차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준 거였지만 그 애의 만족스러운 얼굴을 보니 아주 조금은 우정의 증표 같은 걸로도 느껴졌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우린  집으로 가기 위해 일어섰다. 단 것을 먹어 그런지 갈증이 몰려왔다. “잘 가.” “자, 1번부터 나와.”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아예 눈을 꽉 감고 크게, 내 식대로 불렀다. 가장 힘든 순간을 이겨내는 나만의 방법. 어차피 힘들 거라면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 Na
  • 2005-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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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 일년만인가...;;

    • 2006-09-12 13: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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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그에그~ 앤) 으헤헤 아이구 쑥쓰럽게~ 도휘) 기억해주시는군요 ㅠ 감동 오랜만이지요 정말

    • 2006-09-11 19:5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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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얏호~ 영선이 소설 드디어 올라왔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앗!!!!!!!!!!!!!!!!!!!!!!!!!!!!!!!!

    • 2006-09-10 19:18:09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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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소설란에서 오랜만에 만나뵙니다.

    • 2006-09-10 15:44:50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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