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어둠에 가려도, 홍안 빛나도다

  • 작성자 당근매니아
  • 작성일 2007-01-19
  • 조회수 917

연작 「냉소자」 제 3막 「어둠에 가려도, 홍안 빛나도다」
sequence 「derider」 act three 「Even Behind the Dark, Crimson Eye is Shining」

 

 

  도시의 밤은, 밝지만 어둡다.
  네온사인이 전기를 집어삼키어 자신의 몸을 불사르기에 도시는 밝고, 그러하기에 또한 어둡다. 그러나 그 도시의 이름이 베인vain이라면, 밝음은 단 한 줌도 없다. 아무리 오랫동안 그 칙칙한 밤거리를 쏘다녀도 거기엔 베일 정도로 날카로운 칠흑만이 살결에 스칠 뿐이다.
  도시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크며, 가장 지저분하고 가장 역겨운 매춘굴은 '독수리의 송곳니'였다. 매춘굴이자, 투견장이자, 도박장이자, 마약굴인 '독수리의 송곳니'는 도시에서 가장 많은 매출을 자랑하는 위대한 쓰레기통이었다. 크다기보다는 도리어 거대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실내는 몇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쪽에서는 피를 보고 잔뜩 흥분한 개가 피거품을 문 채 푸드덕거렸고, 다른 한쪽에서는 울긋불긋한 룰렛이 울긋불긋한 옷을 입은 딜러의 손에서 굴렀다. 공은 0에서 멈췄고, 울긋불긋한 딜러는 한껏 팔을 뻗어 테이블 위의 울긋불긋한 칩을 싹 쓸어갔다. 사기라며 울부짖고 난동 부리는 사람들은 경비원의 억센 손에 잡혀 밖으로 내던져졌다. 조금 더 반항하면 즐거운 룰렛 대신 러시안 룰렛을 해야만 하기에 사람들은 금세 조용해졌다.
  룰렛과 포커에서 눈을 돌리자 구역질나는 인간군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저기 팔을 휘적대는 건 분명 환각제를, 축 늘어진 건 진정제를, 바들바들 떨며 눈이 돌아가는 이건 각성제를 양껏 처먹은 쓰레기들이다. 회색 벽에는 허연 아편 가루가 들러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그 바로 옆에는 붉은 빛이 가득했다. 치부만 어설프게 가린 여자들은 시뻘건 정육점 불빛 아래서 한껏 몸을 흐느적댔다. 약에 취한 머저리들은 천천히 흐느적대는 여자들의 출렁이는 젖가슴에 지폐를 꽂아 넣었고, 곧이어 으슥한 다락방으로 기어들어 그 추잡한 모습을 감췄다.
  '독수리의 송곳니', 베인의 회색 파라다이스는 오늘도 그렇게 돈을 긁어모으고 있었다. 여느 날처럼 머저리들은 흥청망청 돈을 뿌리고, 평화로운 파라다이스는 유지된다. 돈과 쾌락의 교환. 윈 윈 논제로 섬. 그것이 이 도시의 평화이자, 파라다이스의 안녕이었다.
  그러나 안정은 작은 소동으로 흐트러졌다. 입구 쪽에서 둔중한 폭발음이 들리고, 이어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비명 따위야 늘 있는 것이었기에, 머저리들도 매춘부도 딜러도 하던 일을 태연히 계속했다. 사소한 폭발이 불러오는 공포 따위는 쾌락에 미치지 못한다. 도베르만과 불독은 서로의 목덜미를 노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곳곳에 부동자세로 서있던 검은 슈트의 남자들 사이에서는 약간의 동요가 일었다. 그들이 왼쪽 귀에 꽂은 이어폰이 청아한 목소리로 비상사태를 노래하고 있었다. 그들은 침을 꿀꺽 한 번 삼킨 뒤 검지 끝에 있는 버튼을 누를지 말지 고민했다. 버튼을 누르고, 엔트리에 포함되어 전투에 참가한다면 오늘 일당은 평소의 다섯 배가 된다. 그렇지만 죽으면 말짱 꽝인 시스템. 그들의 마스터는 yes, no만을 원했다. 남자들에게 적에 관한 정보는 일절 전달되지 않았다.
  흥청거리는 음악이 몇 소절 흐른 뒤 선착순이 끝났다. 버튼을 누른 남자들은 바닥에서 흐느적거리는 머저리들 사이를 조심스럽게 딛고 입구로 달렸다. 누르지 않은 자들은 약간 후회했고, 누른 자들은 조금 많이 후회했다.
  그러나 조금 많이 후회했던 자들은 입구에 다다른 뒤 찢어지는 입을 막느라 애를 써야했다.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침입자는 줄행랑을 쳤다. 리더 격인 한 명이 약지 두 번째 마디에 달린 버튼을 누르고 말했다. 밤색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이 인상적인, 카스텔로라는 이름의 남자는 여느 어중이떠중이와는 다른, 숙련된 전사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도망쳤습니다.
  이어폰으로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말했다.
  추격하여 살해하라.
  남자들 사이에서 작은 실망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후회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겁쟁이 한 명 정도 처리하는 건 겁을 낼 거리가 못되었다. 리더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신호를 보냈고, 남자들은 능숙하게 팀을 나눠 훈련받은 대로 산개했다. 추격대의 수는 45. 전부 베인에서 나고 자란 그들에게 수색 추격 따위는 앞마당 산보나 다름없었다. 거미줄처럼 퍼진 골목사이로 검은 슈트들이 달렸다.
  난동을 부렸던 녀석은 금세 꼬리를 잡혔다. 골목을 비틀거리며 달려가는 남자를 팀 에코가 발견했다. 사내는 생각보다 멀리 도망치지 못한 듯 했다. 에코의 리더는 다른 팀들에게 좌표를 전송했다. 자신이 최초 발견자임을 확실히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애써 흥분을 감췄다. 처음 발견한 자에게는 또다시 일당의 다섯 배, 죽인 자에게는 열배의 돈이 추가로 지급되었다. 침착하게 추격해 확실히 죽인다면, 거의 한달 벌이를 하루에 할 수도 있는 기회였다. 그는 쾌재를 부르며 사내가 도망간 골목의 모퉁이를 쫓았다. 그리고 그가 그 모퉁이를 도는 순간──
  그의 목 위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저격이었다. 팀 에코가 따라붙는 그 짧은 시간에 남자는 이미 건물의 4층까지 올라가 있었다. 머리가 날아간 팀장의 몸이 피를 흩뿌리면서 쓰러지는 것에 놀라 주춤한 사이, 다른 두 명의 머리도 사라졌다. 총성은 정확히 세 번 울었다.
  남자는 조금의 어긋남도, 망설임도 없이 순식간에 팀 에코의 다섯 중 셋의 머리를 깔끔하게 날려버렸다. 정확, 정밀, 냉정. 기계 같은 냉혹함과, 완벽함이었다. 끼릭하며 총구가 방향을 돌리고 다시 탄환은 괴성을 지르며 쇄도했다. 남은 둘은 필사적으로 피했지만 총알은 골목 뒤로 뛰어들던 자의 오른쪽 다리를 앗아갔다. 무릎 관절 아래가 완전히 날아갔다. 잔뜩 억누른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건물 위의 남자는 총에서 얼굴을 땠다. 대구경이라 하지만 두꺼운 시멘트벽을 관통할 정도의 물건은 아니었다. 그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탄창을 갈아 끼우고, 자신도 벽 뒤로 몸을 숨겼다.
  벽 둘을 사이에 두고 정적이 흘렀다. 짓누르는 듯한 침묵이 허름한 건물을 감쌌다. 낮부터 짙게 깔렸던 스모그가 그나마 남아있던 손톱달을 가렸다. 공기가 좋지 않은 베인의 밤하늘에는 별이 없다. 높게 솟은 폐허들 사이로 박멸하는 네온사인만이 언뜻 보여, 붉은 반디를 연상케 했다. 지금 그들이 대치하고 있는 곳─도시의 동쪽─은 집 없는 빈민들이 애용하는 잠자리였다. 필시 허물어져가는 건물 곳곳에는 누군가가 숨을 죽인 채 오들오들 떨고 있으리라. 영원히 계속될 듯한 공포에 짓눌려 떨고 있으리라.
  그리고 한 발의 신호탄이 영원할 것만 같던 정적을 깨고 시커먼 밤하늘을 갈랐다. 신호탄은 노란 불씨를 꼬리에 달고, 별이 없는 하늘을 혜성처럼 날았다. 불씨가 채 사그라지기도 전에 요란한 총성이 침묵을 완전히 박살냈다. 어디랄 것도 없이 수십의 총구가 일제히 불길을 토해냈다. 검은 슈트를 입은 남자들은 사냥감이 숨어있는 건물을 포위하듯 에워싼 채, 소총을 갈겼다. 화약이 격발하는 폭발음과 시멘트벽이 깎여나가는 거슬리는 소리가 검푸른 풍경 사이에서 새어나왔다. 총알을 아끼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는지, 사격은 탄창을 갈아가며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오래된 건물의 외벽이 벌집 모양이 되도록 쏴재낀 후에야 탄의 비는 멈췄다. 총소리에 놀라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가 총알 밥이 된 거지들이 몇 있었지만 별 문제는 없었다. 베인의 경찰이란 '독수리의 송곳니'의 개와 동의어였다.
  저격 팀의 레디사인을 전해 받은 카스텔로는 이미 준비를 마친 팀 에드워드에게 돌입을 명령했다. 그들을 고용한 자는 꼼꼼한, 혹은 깐깐한 성격인지라 보너스를 위해서는 명령을 착실히 수행했다는 증거가 필요했다. 증거는 대부분 타겟의 머리로 제시되기 마련이었다.
  돌입 팀의 리더를 맡긴 에드워드는 카스텔로가 높이 평가하는 자 중 하나였고, 카스텔로는 그가 금세 남자의 목을 베어오리라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분대가 건물에 들어간 뒤 몇 분이 지나도록 돌입부대는 남자를 찾아내지 못했다. 불안해진 카스텔로가 무전기를 손에서 때지 않고 에드워드를 재촉했지만 그의 답은 똑같았다.
  타겟 로스트.
  그럴 리가 없었다. 건물은 줄곧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고, 지반이 약한 이 도시에 지하통로 따위를 만든 건물은 없었다. 분명 적은 그 허름한 건물 어딘가에 있다. 어딘가에 숨어 그들의 머리를 겨누고 있다.
  무전기의 지직거리는 소리 뒤로 긴장한 팀원들의 탁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정적을 깨는 격발음이 들려온 건 1층에서 6층까지 전부 수색한 돌입 팀이 다시 아래로 내려오며 탐색하려던 순간이었다.
  메마른 총소리는 차가운 시멘트벽에 튕기면서 얼음장 같은 것이 되었다. 침입자는 아직 살아있었다. 돌입 팀도 반격을 시작했는지 카빈의 단속적인 총성이 들렸다. 카스텔로가 무전기에 대고 계속 교신을 시도하는 가운데 건물 밖에서 대기하던 남자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경험이 많은 자들도 간간히 있었으나, 대부분은 동네 양아치나 다름없는 자들이었다. 칼로 사람을 찌르거나, 총으로 살해하는 일은 다반사였지만 그들이 해온 건 언제나 이기는 싸움이었다. 그런 그들이었기에 마리 셋을 순식간에 날려버린 상대는─그게 단 한 명이라 할지라도─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저격수들도 각자 맡은 포인트를 주시하며 숨을 삼켰다.
  카스텔로는 점점 더 초조해져갔다. 싸움이 너무 길어지고 있었다. 상대가 어떤 녀석인지는 모르겠지만, 15대 1의 싸움이었다. 게다가 경험 많은 부하가 넷이나 포함되어 있지 않던가. 에드워드는 응답하지 않았고 카빈 소리는 점점 줄어갔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창문이 크고 많은 옛날식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저격 팀은 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응답만 계속했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것은 카빈을 든 채 헐떡대는 돌입팀의 모습 뿐이었다. 카스텔로의 등에 식은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에드워드로부터 무전이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에드워드의 숨찬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공포가 녹아 있었다. 보고는 끔찍했다.
  팀 캐논, 팀 가이너 전멸. 팀 에드워드 잔존병력 둘. 적은 홍안의…….
  무전은 거기서 끝났다. 둔탁한 격발음이 지직거리는 무전기에서 흘러나왔다. 대구경 권총인 듯 했다. 드르륵 하는 카빈의 연사음이 이어 들렸지만 그것 또한 다시 울린 둔음에 묻혔다. 카스텔로는 그 소리의 의미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이다.
  15명의 돌입 팀은 전멸했다.
  홍안의, 라는 단어. 그런 별명을 가진 자는 몇 되지 않았다.
  옆에서 무전 내용을 들은 남자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이제 그들은 하나같이 버튼을 누른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저 건물 안에 있는 것이 그 자라면 스물다섯 남짓한 이 병력으로는 택도 없었다. 카스텔로는 본부에 지원 요청을 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돈이나 자존심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이건 그의 인생 최대의 고비였다. 이미 인생의 목표를 상실해 버린 그라고 하더라도, 죽고 싶지는 않았다.
  5, 6분 뒤면 지원 전력이 도착할 것이다. 건물을 에워싼 남자들이 바라는 건 단 하나였다. 그때까지 건물 안의 자가 움직이지 않기를. 스나이퍼 건을 잡은 저격수들의 손이 바들거렸다. 그들은 스코프에서 눈을 땔 줄 몰랐다. 다시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고요했다.
  그러나 남자들의 바람만큼 적은 자비롭지 않았다.
  예고도 없이 옥상에서 태양을 연상시키는 백색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엄청난 밝기였다. 어디서 그 정도의 빛이 뿜어져 나온 건지 남자들이 고민할 여유는 없었다.
  '그 자'가 옥상 위에 있었다.
  검은 레인코트를 입고, 한 손에 권총, 한 손에는 바렛을 든 채 그가 거기 서있었다. 흐트러진 긴 금발은 진득한 붉은 선혈에 물들었고, 진홍빛 핏물이 입가를 따라 흘렀다. 그의 혀가 입술을 핥으며 입가의 피를 한 모금 가득 긁어모아 갔지만 그걸 제대로 본 사람은 없었다.
  갑자기 엄청난 빛에 노출된 남자들은 옥상에 그가 있다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저격수들은 급히 스코프에서 눈을 땠다. 달도 가린 안개가 만든 짙디짙은 어둠. 그 검은 장막을 꿰뚫은 급작스러운 빛은 감당하기 어려운 눈부심으로 화했다. 그 틈이 '그'에게는 사냥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 없는 공이었다. 그는 '가볍게' 바렛을 들고, 방아쇠를 당겼다.
  절도 있는 속사. 그는 마치 춤추는 듯 돌며 망설임 없이 격철을 놀렸다. 묵직한 소음과 함께 뜨거운 탄피가 총신에서 퉁겨 나왔다. 붉은 점액을 머금은 채 허공에 흩날리는 금빛 머리칼. 너풀거리는 코트자락. 빛을 가르며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은빛 총신. 그건 차라리 하나의 무도舞蹈였다. 예藝였다.
  폭발하듯이 터져 나온 빛은 곧 그 수명을 다하고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그 잠시의 눈부심이 지나갔을 때 사방을 둘러싼 저격수들 중 목숨이 붙어있는 자는 없었다. 반격의 기회조차 잡지 못한 채 그들은 차가운 총신을 안고 쓰러졌다. 순식간에 열의 목숨이 졌다. 그제야 남자들은 자신들의 적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가 건물 아래로 던져버린 바렛이 바닥에 부딪혀 기괴한 소음을 만들었다. 그는 홀스터에서 다시 한 자루의 권총을 꺼내들었다. 옥상 가장자리에 선 그는 권총을 든 양손을 늘어뜨리고는 숨을 들이마셨다. 아릿한 피냄새가 코끝을 울렸다. 때마침 바람이 불며 그믐달은 모습을 드러냈다. 달을 등에 진 채 피내음을 음미하는 그것은 악귀였다.
  카스텔로는 그의 실루엣을 보며 전율했다.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 실루엣은 분명 그가 일생동안 싸운 자들 중 가장 강한 자의 것이었다. 그는 악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다니엘, 다니엘 콘스탄틴. 홍안의 식혈귀. 저격에 능하며 잠행의 전문가. 피만을 마시며 연명하는 그가 원하는 것은 [삭제]의 완전한 붕괴. 특이사항은, '맹인'이라는 것.
  그리고
  반가워요. 내 이름은 에리나 스나이더. 빌어 처먹을 후레자식들을 처단하러온 귀여운 정의의 사도랍니다. 이 빌어 처먹을 후레자식 여러분!
  높고 낭랑한 소녀의 목소리. 그랬다. 이것이 눈먼 그가 저격을 하고, 적의 위치를 파악하고,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이유였다. 그의 어깨 위에는 작은 실루엣이 걸터앉아 있었다. 예닐곱 살 정도 되었을까. 검은 고딕드레스를 입은 은빛 생머리의 소녀는 맹랑하기 짝이 없는 자기소개를 하고는 천진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녀는 다니엘의 하나뿐인 동료이며, [삭제] 때문에 잃은 그의 눈을 대신하는 존재였다.
  남자들은 이 예상치 못한 강대하고, 절대적인 병기 앞에서 동상처럼 굳어졌다. 오한이 올라왔다. 소녀는 미소 지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굳어버린 남자들은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한 채 멍청한 얼굴로 그들의 적을 바라볼 뿐이었다. 소녀의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소악마 같은 웃음. 그리고 그녀는 호통을 쳤다. 우렁찬 사자후는 그게 과연 그 작은 몸에서 나온 것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싸워 이 머저리들아! 병신처럼 빌빌대지 말고!
  넋을 잃고 실루엣을 바라보던 남자들의 동공이 소녀의 고함에 반응해 콱 조여졌다. 수십의 검지가 반사적으로 수축해 방아쇠를 당겼다. 불꽃이 튀었다. 서늘하게 식었던 총신이 미친 듯 총탄을 토하며 다시 달궈졌다.
  다시 전투가 시작되었다!
  다니엘이 택한 길은 건물 옆에 붙어있는 비상용 철제 계단이었다. 그는 수십 개의 계단의 한 번에 날 듯 건너뛰었다. 수백의 총탄이 그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주저함이 오히려 그와 소녀의 목숨을 앗아갈 것이란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에리나는 다니엘의 어깨에 앉아 떨어지지 않도록 그의 머리를 꼭 안았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그녀의 눈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이동경로, 적의 위치, 움직임. 그 모든 것의 파악과 전달이 그녀의 몫이었다. 자신의 눈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그녀는 지체 없이 다니엘의 귓가에 속삭였고, 다니엘은 그 속삭임에 의지해 싸웠다. 지금 소녀의 얼굴은 그 누구보다도 진지한 전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이내믹한 표정변화였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둘은 베인의 지저분한 거리에 도달했다. 풍귀風鬼의 질주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가장 앞에서 카빈을 겨누던 둘의 머리가 사이좋게 날아갔다. 그 뒤에서 뇌수를 뒤집어쓰고 부들거리던 녀석의 심장을 두 발의 탄환이 뚫고 지나갔다. 다니엘을 향해 탄환이 날아들었다. 다니엘은 기듯이 달려들어, 급히 탄창을 갈던 남자의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남자는 그대로 고기 방패가 되었다. 남자의 검은 슈트는 곧 벌집이 되었다. 슈트가 붉게 물들었다. 다니엘은 이미 축 늘어진 고깃덩어리를 던져 버렸다. 다시 한 명의 목덜미에 뜨거운 쇳덩이가 박혔다. 남자는 피를 토했다. 권총의 탄창이 바닥났다. 탄창을 갈 여유는 없었다. 다니엘은 망설이지 않고 두 자루의 총을 버렸다. 그는 재빨리 코트 안으로 손을 뻗어 새로운 무기를 꺼내들었다. 은빛 리볼버와 역시 은빛의 단검이 달빛을 반사하며 반짝였다. 다니엘은 정면에서 반자동 소총을 갈기는 수염이 인상적인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옆에서 거치적거리는 녀석은 리볼버로 처리했다. 카스텔로의 총탄이 다니엘의 볼을 스쳤다 .질주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카스텔로의 품으로 뛰어들며 오른손에 쥔 나이프를 휘둘렀다. 경동맥이 잘린 카스텔로는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억울했다. 자신이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가는 현실이 너무나도 억울해 분통이 터졌다. 그는 버튼을 누르는 게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그의 앞에서 기다 죽었던 비굴한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아버지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댄 자의 얼굴도 생각났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한 지원 요청을 기억해냈다. 자신만 죽는다는 억울함은 금세 사라졌다. 수염에 가린 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그는 웃었다. 고개가 돌아가고 피의 분수는 서서히 잦아들었다.
  모두가 악귀의 만찬에 올라 결국 난도질 당하리라.
  무한히 영에 가까운 순간, 그렇게 저주를 퍼부어대던 그는 마지막으로 생각했고, 그는 옳았다.
  식혈귀는 멈추지 않고 사냥을 계속했다. 소녀의 말은 거의 알아듣기 힘든 수준까지 가속되었다. enemy3-1시방향-거리15m-높이0m-엄폐물없음 따위의 정보가 쉴 새 없이 흘렀다. 믿기지 않을 정도의 속도였다. 속삭임이 야수를 움직였다. 바닥은 금세 끈적이는 핏물로 가득해졌다. 지원이 도착한 건, 팀 사인 마지막 한 명의 머리에 막 바람구멍이 난 순간이었다.

 

  둘이 이 도시에 도착한 건 이틀 전의 일이었다. 베인은 그들이 들른 열일곱 번째 도시였다. 열셋은 단순한 과정이었고, 넷은 목적이었다. 란스틴, 케이니, 빅라이언, 메콘. 여행은 예정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그들이 가진 공통의 목표는 아직 멀었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사실 둘은 에리나가 태어나기 전부터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전생이나 환생 따위의 시답잖은 소리가 아니다. 에리나의 부모는 둘 다 다니엘의 친구이자 전우였다. 사관학교 시절부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그들은 같은 부대에 배치되었고, 같이 싸웠다. 그들은 [삭제]의 병사로서 싸웠다.
  정보부 소속이었던 스나이더가 중앙의 비밀에 접하고, [삭제]의 추악함을 직시하게 된 것은 그들이 [삭제]를 위해 싸운 지 6년이 지난 후였다. 스나이더 부부는 다니엘에게 그 일을 알려왔고, 다니엘은 스나이더들과 뜻을 같이 했다. 에리나는 가끔 다니엘이 그때 자신의 부모들을 말렸다면, 하는 상상을 하곤 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부질없는 짓이었다. if는 과거에 적용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 선택으로 인해 스나이더 부부가 짧은 생을 마감했더라도.
  그들이 조직한 지하조직의 누군가가 그 존재를 상부에 밀고했다. 부부는 세 살 난 딸을 지인의 손에 맡겼고, 다니엘은 맡길 것이 없었다. 길지 않은 레지스탕스 생활이 시작되었다.
  갑작스런 밀고로 시작된 레지스탕스 생활은 괴로웠다. 어떤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고, [삭제]의 입김은 일개 게릴라 부대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체가 싸웠던 쿠바의 독재 정부는 비교도 안 되게 강대한 적과, 체보다 더 적은 인원으로 싸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전 세계에 손을 뻗치고 있는 [삭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밀항선을 타고 어느 오지의 밀림지대로 들어갔다 .그건 석 달 남짓한 도망 중 가장 잘못된 선택이었다. 밀항 자체가 이미 발각되어 있었다.
  망그로브 가득한 늪지에서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었고, 딱딱한 땅이 있는 밀림까지 전선을 밀리기만 했다. 레지스탕스는 혹독한 훈련을 받은 자들 뿐─대부분 [삭제]의 고급 장교─이었으나 절대적인 화력의 차이는 메우지 못했다. 그들은 철저히, 처참하게 패배했다.
  149시간을 끈 전투에서 다니엘이 눈을 잃은 건 전투 시작 2시간만의 일이었다. 그는 부상당한 동료에게 응급 치료를 해주기 위해 앰플의 라벨을 읽고 있었다. 라벨은 연기와 피에 절어 제대로 읽을 수 없었고, 그는 앰플 라벨에 눈을 들이댈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참호 바로 앞에서 수류탄이 터졌고, 앰플은 수백의 탄이 되어 그의 눈을 찢어발겼다.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줄곧 그의 목덜미를 끌고 달린 스나이더의 덕이었다.

 

  식혈귀인가.
  긴 흑발을 늘어뜨린 여인은 안락의자에 몸을 누읜 채 부하가 보고한 내용을 조용히 읊조렸다. 오리라는 예상은 했지만 꽤나 이른 도착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 회색 파라다이스를 지배하는 그녀는 물고 있던 시거를 깊이 들이마신 뒤, 천천히 뿌연, 그리고 독한 연기를 뿜었다. 그녀는 곧 시거를 하얀 자기로 된 재떨이에 던져 넣고 천천히 날씬한 몸을 일으켰다. 착 달라붙는 검은 가죽옷과 새하얀 모피코트가 암표범 같은 그녀의 나긋나긋한 몸매를 강조했다. 검은 생머리가 찰랑이며 새카만 폭포를 이루었다.
  그녀는 호화롭게 장식된 그녀의 방에서 나와 시끄러운 '독수리의 송곳니'의 로비로 걸어 나왔다. 시중을 드는 부하는 그녀에게 열 쌍 남짓한 장갑이 올려져 있는 쟁반을 내밀었고, 그녀는 칠흑처럼 검게 염색된 소가죽 장갑을 꼈다. 그녀의 왕국을 위협하는 [삭제]의 배반자를 처치해야했다.

 

  결국은 그렇게 될 것이었다. 탈진해서 쓰러진 그의 앞에서 스나이더 부부는 스러졌다. 언제나 웃는 상이었던 스나이더의 굳은 얼굴이 땅바닥에 처박혔다. 병사들은 무너져 내리는 스나이더의 몸뚱이에 주저 없이 총탄을 박았다. 흉부에 셋, 두부에 둘, 오른쪽 팔에 하나, 복부에 하나. 스나이더는 썩은 통나무처럼 쓰러졌다.
  피범벅이 된 부부의 얼굴에 공통으로 떠올라있는 건 딸에 대한 걱정이었지만─ 다니엘은 그 얼굴을 보지 못했다. 병사들은 엄폐물 뒤에 몸을 숨기며, 능숙한 몸놀림으로 그의 다른 동료를 쫓았다.
  친구의 식어가는 체중을 느끼며, 옆으로 뛰어가는 잔혹한 병사들의 발소리를 들으며,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그는 소리죽여 울었다.

 

  골목 한 쪽 켠에 쌓인 상자 사이로 남자들의 시체가 언뜻 보였다. 널빤지를 못질해 만든 엉성한 나무 상자는 부서진 틈으로 완두콩을 토했다. 피와 콩이 엉겨 붙은 것이 보였다. 어둠은 형체만을 남긴 채 색을 앗아갔고, 그건 마치 낫토처럼 보였다.
  어느 일식집에서 본 그 끔찍한 음식을 떠올리며 몸서리치던 에리나는, 다니엘의 숨이 가쁘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그럴 만도 했다. 그는 오늘 백도 넘는 인간의 숨통을 끊었다. 그 마지막이 저 상자 뒤에 있는 고깃덩어리들이었다. 그들은 상자 뒤에 숨어있다 적의 등을 급습할 생각이었다. 꽤나 괜찮은 생각이었다. 에리나의 눈은 그녀를 노린 스나이퍼에 고정되어 있었으니까. 그녀는 뛰어난, 아니 천재적인 스카우터였지만 모든 것이 완벽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 역시 실수를 했고 그 몇 안되는 실수 중 이번 것이 좀 위험했을 뿐이었다.
  그들은 감시자의 눈을 피했지만, 결국 야수의 후각을 피하지 못했다. 다니엘은 구두 끝으로 바닥에 떨어진 Ak를 차올렸고, 누구도 그 사실을 인지하기 전에 트리거에 손을 올려 풀 오토 사격했다. 그는 얼굴을 돌리지 않았다. 눈이 먼 그에게는 귀와, 감만으로 이미 충분했다.

 

  지옥이었다. 그곳은 틀림없는 지옥이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훈련소 교관인 테드의 비명소리가 마지막으로 들려왔을 때, 그는 아군이 모두 살해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적은 드물었고, 병사들은 헬기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그들은 따로 시체를 처리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뒤는 짐승들이 처리해 줄 것이다.
  헬기가 떠나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는 소리 내서 울 수 있었다. 조각이 난 눈에서 피와 눈물과 살점이 같이 흘렀다. 참을 수 없는 오열이 터져 나오고 어깨가 들썩거렸다. 바닥을 구를 힘도, 땅을 칠 힘도 없었다. 여전히 죽은 친구의 몸뚱이를 가슴 위에 올린 채 그는 쉬지 않고 울었다. 슬픔은 복수에의 의지로 바뀌어 갔다. [삭제]에 대한 분노가 그의 영혼을 채워 나갔다.
  파괴의 욕구, 살해의 욕망, 복수에의 갈망.
  그를 위해서는 살아야 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살아남아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살점을 물어뜯을 기력은 없었다. 망설임 또한 없었다. 흙범벅이 된 친구의 상처에 입을 대고, 그는 오랜 전우의 피를 마셨다.
  그리하여 그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다시는 피가 아닌 것을 입에 대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에리나는 스나이퍼의 식어가는 주검 앞에서 이대로 매춘굴을 습격할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들의 진짜 목적은 그 거대한 쓰레기통 안에 있었고, 그 성취를 위해서는 그, 혹은 그녀를 만날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매력적인 눈을 살짝 찡그리며 고민했다. 고민은 오롯이 그녀의 몫이었다. 다니엘은 그녀의 결정에 일체 반발 없이 따르는 대신, 어떤 의견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 남자의 정신은 사고하지 않았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즈음, 다니엘의 근육이 일순 수축하는 것을 에리나는 느꼈다. 적이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에리나는 재빨리 품속에서 카드를 꺼내 힘껏 집어던졌다. 그녀의 작은 얼굴을 덮고도 남을 정도 크기의 카드에는 사이케델릭한 문양이 빽빽하게 그려져 있었고, 그 위에는 기묘하게 엉킨 글씨체로 star라는 단어가 쓰여 있었다.
  그녀는 다급하게 외마디 외침을 내뱉었다. 그건 극도로 함축적이고, 극히 이해하기 어려운 영창이었다. 그녀가 내던진 카드는 외침에 반응해 순간 백금의 거인으로 변했다. 그리고 곧바로 구형의 은막이 되어 에리나와 다니엘을 감쌌다.
  지각부터 발현까지는 고작 몇 십 밀리 초가 소모되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몇 밀리 초의 차이가 그들의 생명을 지켰다.
  놀랍도록 투명한 은막에 수십 수백에 달하는 검은 그림자가 쏟아졌다. 검은 형상에는 부릅뜬 눈 같은 것이 박혀있는것 같았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우박 같은 돌격은 몇 초 동안이나 계속 되었다. 백금의 막은 검은 빗줄기와 부딪히며 까드득 하는 끔찍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에리나가 다시 한 장의 카드를 꺼내들고 식은땀을 흘릴 때 즈음 소리는 멎고, 거짓말 같은 정적이 흘렀다.
  에리나는 그녀가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경멸과 가장 강한 적의를 담아 '적'을 노려보았다. 다니엘의 몸이 준동하며 전투에 대비하는 것이 느껴졌다.
  타로의 영적능력을 물리현실화한 건가. 변칙적인 거지만 꽤나 세련된 방어였어, 꼬마아가씨. 카발라의 응용이라면 꽤나 흥미가 있어.
  한 손에 하얀 파라핀 양초를 든 채 가죽옷의 여자는 말했다. 육감적인 몸매가 코트 사이로 살짝살짝 스쳐보였다.
  아마 방금 쓴 카드는 '스타'일라나. 벌써 메이저 알카나를 써버리면 앞으로 힘들어질 텐데 말이지.
  별로 설명하고 싶은 마음 없어, 창녀. 닥치고 목이나 내놓는 게 어때. 최대한 굴욕적이지 않은 죽음을 선사하지. 너 같은 암퇘지한테는 과분한 거야.
  어머나, 꽤나 입이 거친 아가씨네. 뭐 그런 말투 싫어하지 않아. 그런 말투를 쓰는 꼬마도 싫어하지 않지.
  그녀는 한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구두 굽소리가 또각하고 피내음이 진동하는 골목을 울렸다.
  그 더러운 입을 이 그림자의 마녀가 갈갈히 찢어줄 테니까.
  촛불은 훅하는 입김에 밀려 꺼졌다. 달빛만이 일렁이며 음습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림자는 기름처럼 뭉치더니 이윽고 거대한 벽이 되어 그림자의 마녀 뒤에 버티듯 섰다. 파충류의 피부 같은 표면이 찢어지며 수천 개의 눈을 드러냈다.
  육만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 그림자를 제물 삼아 일어나는 어둠의 거인.
  그 우악스러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에리나는 손에 쥐고 있던 카드를 한 장 던지며 영창했다. 여전히 기묘한 그 목소리에 반응해, 은둔자[hermit]는 사지를 뻗어 보랏빛 넝쿨이 되어 그림자가 사라진 거리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검은 립스틱을 바른 마녀의 입가가 말려 올라갔다. 짐승의 멀어버린 눈이 붉은 안광을 흩뿌렸다.
  파괴가 춤추며 광기를 노래할 시간이었다!


 

 

 

 

 

 

 

원래 모 사이트의 창작 게시판 이벤트 용으로 썼던 글입니다.

물론 주르륵 미끄러졌지만.

6개월 전에 쓴 글인데 다시 보니 상당히 난감하군요.

당근매니아
당근매니아

추천 콘텐츠

근친설近親說

  어느 겨울, 문득 나는 방랑벽이 동해 길을 나서 특별한 목적 없이 길을 걷다, 겨울바람을 느끼며 한참을 그리 걸으니 무릎이 저려, 가장 먼저 눈에 띈 카페에 들어갔다. 잠시 자리에 앉아 쉬고 있으려니 웨이트리스가 와서 주문을 받는데, 처자가 입은 옷이 메이드복이기에 비로소 나는 내가 메이드 카페에 들어왔음을 알았다. 오렌지 쥬스를 시키고 보니 내 앞 테이블에 어떤 남자가 앉아 있는데,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식식 거리며 화를 내고 있어 주변의 사람들이 그 불같은 형상을 두려워하였다. 나는 쥬스를 기다리는 겸 하여 그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 사람은 미처 분을 삭이지 못하고 내게 말하였다.  "내가 알바를 뛰어 돈을 모은 지 세 달, 코미케 안내서를 보고 루트 연구하기를 한 달이며 개장 행렬에 끼어들 방법을 고심한지 한 달, 또한 개막 전 밤샘 줄에 참여한 것이 또다시 12시간이오. 내 그리도 많은 시간을 투자했건만, 러쉬를 이겨내 부스 앞에 서고 보니 내 앞에 선 자가 페이트 침대 커버를 남김없이 싹 쓸어가 나는 지난 다섯 달을 허투로 보낸 셈인데다 이제는 한정 프리미엄을 주고 그 약삭빠른 자에게 침대 커버를 사게 생겼으니, 어찌 화가 나지 않겠소."  그 말을 듣고 내가 물었다.  "내가 아는 페이트라 하면 몇 가지가 있으나, 그 중 코미케와 연관될 만한 페이트라면 지금 두 가지 페이트가 생각이 나네. 그러하다면 그대가 말하는 페이트는 타입문의 페이트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기동포격소녀 나노하의 그 페이트를 말하는 것인가."  그는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 그대는 웹도 들어가 보지 않는 것이오. 후자의 사재기가 한창 문제가 되었던 것을 정녕 모른다 할 것이오. 나는 그 광경을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분노할 따름이외다."  그 자를 다시 훑어보니 눈에는 미소녀계 오타쿠들이 가진다는 기이한 탐욕이 비추었고, 손과 가방에는 포스터, 게임타이틀, 동인지가 가득 들렸는데, 그저 로리 캐릭터들만이 큰 눈을 빛내고 있었다. 필시 아키하바라 구석의 동인샵을 들렀다 오는 길에 분통이 나 카페를 들린 것이리라 생각하며 나는 재차 물었다.  "그대의 이야기와 품새를 보아하니 그대는 분명 로리콘인 듯하네. 2D는 종국에 허무한 것이고 로리타 취향은 자칫 잘 못하면 숭악한 범죄로 번질 수가 있는 것인데, 그대는 어찌 그리 사소하고 기기묘묘한 것에 연연하여 이 카페의 훈훈한 분위기를 망치는가."  그러자 그 사람이 화를 내며 말하였다.  "나는 2D의 절대적인 미를 사랑하는 것이지, 현실에서 그를 행할 정도로 우둔하지 않소. 그대는 어찌 나를 업수이 여겨 2D가 하찮다는 말을 하시오. 그대의 말은 나를 모욕함과 동시에 수많은 게임라이터들과 일러스트레이터들을 동시에 조롱하는 것이니 게이머의 한 사람 되어 어찌 그대의 이러한 우롱을 그저 넘어갈 수 있으리오."  그러며 모카 커피가 담겨 있던 컵을 힘주어 쥐는데, 도자기 컵에 금이 후

  • 당근매니아
  • 2007-01-26
베네치아의 기억

  이태리의 아름다운 수상 도시. 베네치아의 뒷골목에서 그 일은 일어났다.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소녀는 알지 못했다. 소녀의 눈으로는 남자의 움직임을 쫓을 수 없었다.   그는 바람에 흐트러진 재킷을 매만지더니 방금 쓰러진 남자 옆에 서있던 또 다른 소매치기를 응시했다. 왼손은 아까 같이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오른손은 모자가 바닷바람에 날릴 새라 챙을 잡은 채로.  소녀의 가족이 묵기로 한 별장은 리도 섬에 있었다. 새하얀 백사장이 아름다운 해변이었다. 세계적인 관광지 한복판에 위치한 그런 해변을 개인 소유로 하고 있는 사람은 세계를 통틀어서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일주일 만에 소녀는 그 아름다운 백사장에서의 모래장난과 수영에 질려 버렸다. 리도 섬의 또 다른 명물인 카지노는 나이가 어려 들어갈 수 없었다. 심심해진 소녀는 아버지에게 자신을 베네치아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지만 안전을 이유로 거절당했다. 소녀의 가문을 노리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하지만 그 정도에서 포기할 소녀가 아니었다. 부탁을 단칼에 거절당한 후 소녀는 별장을 탈출할 방법만을 찾았고 결국 몇 시간 전에 별장을 탈출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명에 따라 자신을 별장 밖으로 내보내 주지 않으려 하는 집사를 교묘한 거짓말로 따돌리고 리도 섬과 베네치아 사이를 왕복하는 수상 버스를 잡아탔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아버지와 함께 섬 주변을 돌아다니거나 별장으로 돌아올 때는 항상 개인용 요트를 사용했었기 때문에 수상 버스의 가격은 잘 몰랐다. 소녀는 그냥 주머니 속에 있던 꼬깃한 100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내고 배에 올라탔다. 버스 기사는 이상한 꼬마가 다 있다는 듯이 쳐다보았지만 별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세상물정 모르는 아가씨구먼' 하고 넘어갔을 뿐이었다.   다행히도 소녀가 탄 수상 버스는 베네치아 행이었다. 베네치아의 푸른 바다는 지중해의 따가운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었고 갈매기들은 본격적으로 시끄럽게 울어대며 먹이를 찾기 시작했다. 배 양쪽에 나 있는 창문을 통해 느껴지는 바람은 시원했고 배 앞전에 파도가 부딪히며 부서지는 소리는 경쾌했다. 소녀가 배의 창문을 통해 잠시 주변 경치를 즐기는 사이에 버스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베네치아에 도착한 소녀가 도시를 둘러보기 위해 선택한 수단은 곤돌라였다. 이전에 어디선가 베네치아에서는 곤돌라를 타보아야 한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소녀는 산 마르꼬 광장 옆 선착장에서 대기하던 곤돌라를 하나 잡아탔다. 곤돌라의 뱃사공은 인상 좋은 할아버지였다. 주름 많은 늙은 뱃사공은 관광객들을 상대하며 평생을 먹고 살아온 사람답게 친절했다. 소녀가 귀여운 손녀딸처럼 느껴져서 그런지도 모른다. 소녀가 베네치아를 둘러보고 싶다고 말하자 뱃사공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도시를 한 바퀴 빙 돌았다. 뱃사공은 도시 곳곳에 숨겨진 중요한 건물들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해주고 그 유래와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이 언제인지

  • 당근매니아
  • 2006-04-08
어느 늙은 용병 이야기

  딸깍.  나는 주머니 속에 처박혀 있던 지포를 꺼내 그 뚜껑을 열었다. 여기저기 흠집투성이인 지포는 이미 20년을 넘게 함께 지낸 녀석이다. 20년 전과 달라진 것이라면 이 녀석이 불을 붙이는 것이 바뀌었다는 것 정도.   라이터 옆구리, 길게 긁힌 자국에 오른손 검지를 가져다 댔다. 그리고 손톱으로 살짝 그 자국을 긁는다. 언제부턴가 불을 붙이기 전마다 하게 된 버릇이다. 라이터 옆이 긁힌 것이 13년 전 리비아의 반정부 게릴라 소탕전에서였을 테니 아마 그 때 즈음해서 가지게 된 버릇일 것이다. 매끈한 표면에 난 거칠한 부조리함을 즐긴다. 라이터를 오른손에 쥐고 긁다 보면 어느 순간 니코틴이 고파지는 때가 있다. 마치 갈증과도 같은 그 감각. 그 순간에 들이쉬는 타르의 끈적끈적한 쾌감을 위해 느긋하게 기다린다.  도시 한복판에 마련된 공원은 공원이라기보다 공터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바닥에 심어놓았던 잔디는 이제와선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고 곳곳에는 담뱃재와 휑하니 맨살을 드러난 땅 뿐이다. 매연이 가득하고 주변은 허름한 빌딩뿐인 이런 곳에 사람들이 휴식을 목적으로 올 리 만무하다.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이 작은 공간은 쓰레기나 버리러 가끔 들르는 공간이 되어 있었다.   오른손에 들려있는 지포를 손톱 끝으로 긁다가 왼손에 눈길이 갔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진 담배는 오늘도 완전한 한 개비가 아니다. 누군가가 피우고 가다 내 앞에 던지고 지나가는 반쪽짜리 꽁초들. 담배 살 돈이라고는 없는 빈털터리인 내가 니코틴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다. 그 끝에 비록 남의 타액이 묻어있다지만 내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불쾌한 경험이 한두 번이어야 꺼림칙한 것도 있는 법이다.  잠시 붉게 타올랐지만 지금은 하얀 재로 덮여있는 꽁초 끝을 내려다보다가 무언가가 생각났다. 손에 든 담배를 살짝 뒤집어 담배 옆구리에 써있는 상표를 읽었다. 혹시나 해서 확인한 담배는 역시나 고급이었다. 입가에 살짝 쓴웃음을 머금었다. 피우고 버리는 담배의 상표조차 그가 가진 돈과 연관이 되는 세상. 아까 이 꽁초를 버리고 간 사람은 검은 양복을 쫙 빼입은 중년 남자였다. 금으로 된 넥타이핀을 한 채 최신형 휴대전화를 들고 있던 남자. 통화 내용으로 봐서는 어느 회사의 중역인 듯 했다. 길이라도 잘못 든 거겠지.  어쩌면 오늘은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지저분한 빈민가의 길가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온통 가난한 인간들뿐이기에 부드러운 맛의 이런 고급 담배는 입에 대보기조차 힘들다. 그저 가난할수록 한 개비 한 개비가 독한 담배를 찾고 부유할수록 부드러운 것을 찾는다. 전자가 더 해로움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건강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자들은 그저 니코틴을 바랄 뿐이다. 이 시대에 한 인간이 손에 넣은 돈의 양은 그의 수명과 직결된다.  문득 니코틴이 고파졌다. 손에 들고만 있던 꽁초를 들어 입에 물고 손톱 장난을 그만 두었다. 지포를 오른손에 바로 잡고 톱니에 엄지를

  • 당근매니아
  • 2006-03-25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1500
  • 익명

    웬지 헬싱의 아카드가 생각난다는...

    • 2007-01-20 21:05:49
    익명
    0 /1500
    • 0 /1500
  • 익명

    어라라라라라라라라라

    • 2007-01-19 16:07:00
    익명
    0 /1500
    • 0 /1500
  • 익명

    베인은 그들이 들른 열일곱 번째 도시였다. 열넷은 단순한 과정이었고, 넷은 목적이었다. 수정이 필요한 대목

    • 2007-01-19 14:08:19
    익명
    0 /1500
    • 0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