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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를 위하여

  • 작성자 느루
  • 작성일 2007-02-17
  • 조회수 491

 

#1.

 고물 선풍기는 탈탈탈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도 잘도 돌아갔다. 느려졌다, 빨라졌다하는 기묘한 회전이 일으킨 바람이 어깨를 턱턱 잡았다. 더워. 드러누운 바닥. 등과 바닥은 이미 혼연일체가 된 건지 땀으로 끈끈한 우정을 쌓고 있었다. 밤에 가끔 찾아오는 정전은 두렵지 않았지만, 이 비상식적인 더위에 다가오는 전기의 끊어짐은 웬만한 공포영화보다 더 무서웠다. 아니, 뭐 여기는 정전이 되어도 딱히 변할게 없는 건가. 웬만한 집이라면 하나씩은 모셔놨을 에어콘님도 보이지 않았다. 여름이 얼굴을 부비면 부비는 대로, 열대야가 푹푹 우리를 삶으면 삶는 대로. 현대 문명의 이기라고 불릴만한 건, 고장 나기 일보 직전인 스릴만점의 선풍기와 안과 밖의 온도가 똑같은 멋진 냉장고. 전화도 없고, 더욱이 컴퓨터도 없다. 도대체 이 구식기인은 어떻게 사는 걸까. 털털털- 터럭타락드드드. 이젠 본격적으로 라이브를 시작한, 어쩌면 생애 마지막 무대가 될지도 모르는, 선풍기의 진동을 들으며 눈썹까지 흘러온 땀을 훔쳤다.

 달칵달칵. 열쇠가 잘 들어가지 않는지 조금 더 덜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끼이이익. 소름이 돋을 만큼 날카로운 긁힘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절로 미소가 터졌다. 바닥에서 떨어질 줄 모른 채 현관을 향해 고개만 슬쩍 돌리고 친구를 향해 인사했다.

 “어서 와.”

 나를 발견하고는, 놀랐다는 듯 축 처진 순한 눈을 크게 뜬다. 커다란 덩치에 안 어울리게 말까지 더듬거리며 황급히 신발을 벗고 거실에 뻗은 내게로 오려다가 넘어진다. 와당탕. 반쯤 벗은 신발이 녀석의 발에서 툭 떨어진다. 쯧쯧. 혀를 차며 나처럼 바닥에 달라붙은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괜찮아? 정유현?”

 내 목소리에 움찔한다. 그 큰 몸집이 몸을 떠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알 수 있어. 넌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한심함과 동시에 솟아오르는 벅찬 무언가에 질끈 입술을 씹었다. 약간의 시간을 두고 몸을 일으킨 유현은 내가 자신의 집에 있다는 게 당혹스러운지 입을 뻐끔뻐끔했다. 또 저 짓이다. 병신새끼. 한참을 금붕어처럼 입만 벙긋벙긋하다가 그제야 목소리가 나온다.

 “무, 무, 무슨 일, 이야?”

 무단침입이다. 과연? 열쇠가 어디 있는 지는 뻔히 알고 있어. 녀석처럼 단순한 놈은 쉽게 찾기 힘드니까. 열쇠로 문을 따고 멋대로 집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녀석이 나에게 화를 내도 별로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 겁먹어서 벌벌 떠는 유현이가 멍청이인거다. 답답한 녀석. 못마땅한 마음을 감추지도 않고 말했다.

 “뭐야? 그 반응은? 일 년 만에 만난 친구가 반갑지도 않은 가봐?”

 다시 한번 움찔.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모르겠는지, 보는 사람이 정신 사납게 안절부절하던 유현은 고개를 붕붕 내저었다. 정신지체아. 학교에서도, 학교에서 쫓겨 난 지금까지도, 어디서나 유현에게 달라붙은 꼬리표였다. 비정상. 불량품. 네 인생은, 그래, 버림받은 거야. 속으로 실컷 비웃으면서, 나는 유현을 불렀다.

 “유현아, 이리 와. 화 안내. 이리 와봐.”

 화를 내지 않는다는 내 말에도 머뭇머뭇하던 유현은 내가 눈썹을 치켜뜨자 바짝 얼어서 곁에 다가왔다. 더 키 컸구나. 뭔가 불공평한데. 나는 그때 이후로 조금도 크지 못했는데, 너는 혼자 이렇게 커버렸구나. 그리고 그 녀석도 전혀 크지 못했어. 넌 너무 고지식해. 누군가가 내게 그렇게 말했다. 기분 나빴던가? 누가 말했었지? 기억이 나질 않아. 하지만 웃었던 것 같은데.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 약간은 씁쓸하게 그러나 기쁘게. 있는 힘껏 팔을 뻗자 겨우 유현의 어깨가 손끝에 닿았다.

 “더 가까이 와.”

 내가 짜증을 내자 유현은 더욱 몸을 숙이며 ‘이렇게?’라고 반문하듯 나를 내려다봤다. 아, 이제 닿는다. 유현의 머리칼을 마구 흐트러뜨리며 쓰다듬었다. 넌 정말 강아지 같아. 예전에 우리 할머니 집에, 똥개 한 마리가 있었어. 얼마나 싸돌아다니길 좋아하는 지 개장수한테 잡혀갈 뻔한 걸 구해낸 게 한 두 번이 아니라고 할머니가 말할 정도로 엄청 성가신 똥개였거든. 어디서 굴렀는지 지저분한 몰골인 주제에 나만 보면 꼬리까지 살래살래치며 덤벼들어서 엄청 싫어했었어. 더럽잖아. 그런데 여름방학에 내려갔더니 그 골칫덩어리가 안 보이지 뭐야? 알고 보니까, 할머니를 우리 집에서 모시면 더 이상 그 개를 기를 수 없으니까 개장수한테 팔아버렸더라고. 내가 가까이 오지 말라고 아무리 걷어차도 헥헥 거리며 다시 내 발치에 앉은 채, 놀아 줄 거라고 기대감에 반짝이던 그 눈동자. 나, 개 냄새도, 푸석푸석한 털도 모두 싫어했지만 그 눈동자만은 꽤 좋아했던 것 같아.

 ...있지, 편히 죽었을까? 어디서 들었는데 개를 잡을 때 고기를 연하게 하려고 몽둥이로 무지막지하게 팬다고 하더라고. 진짜일까? 진짜겠지? 그 똥개가 얻어맞아서 죽는 건 별로 신경 안 쓰이는데, 어쩐지 그 검은 눈동자가 아픔에 물드는 건 상상이 가지 않아. 막 아파했을까? 깽깽거리고, 살기 위해서 바둥바둥 거렸을까? 내가 발로 차서 저만큼 나가 떨어져도, 금세 달려와 내 주위를 낑낑거리며 맴돌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축축한 눈동자로. 그 눈동자가 계속 생각나. 너를 보고 있으면.

 아무것도 모르지. 그게 훨씬 좋은 걸까, 유현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가 목에 팔을 두르자 갑작스런 무게에 유현의 몸이 더 크게 굽혀졌다. 깜짝 놀랐는지 바보처럼 입술이 헤 벌어져. 가만히 입술을 가져가 보자. 꺼칠꺼칠한 유현의 입술. 물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메말라 터진 입술. 됐어. 알았어. 매달리던 두 손을 풀자 털썩 내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상황파악이 안 되는 지, 멍청하게 계속 나를 내려다보는 유현이에게 등을 보인 채, 쏘아붙였다.

 “구경거리 났어? 나 배고파. 저녁 해줘. 점심부터 계속 기다렸단 말이야.”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 가스 벨브를 돌리는 유현의 뒷모습을 힐끔 쳐다보았다. 이 멍청아. 난 불청객이라고. 불청객의 요구에 일일이 응해주면 어쩌자는 거야? 좁은 창문 너머로 하루가 죽어가고 있었다. 붉어지는 도시. 회색으로 가득 찬 도시가 뒤늦게 달구어지고 있었다. 응, 지금쯤이면 엄마는 저녁을 하고 있겠지. 8시면 아빠가 올 시간이고, 내가 학원에서 돌아올 시간이니까. 아니, 어쩌면 내가 독서실에 들렀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라. 나 모범생이니까. 좋은 아들-이었으니까. 하지만 12시가 넘으면 찾지 않을까. 아냐. 독서실은 끝나면 새벽 2시인걸. 그러면 내일은 되어야 내가 없어졌단 걸 알아내겠구나. 바닥 한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휴대폰이 웅웅거렸다. 그 소리에 놀란 유현이 후라이팬에 식용유를 돌리다 말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별거 아니라고 손을 흔들어보였다. 일어나 앉기가 너무너무 귀찮아서 구석까지 데굴데굴 몸을 굴렸다.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끼면서 휴대폰을 들어 액정을 보았다. <수학학원>. 아, 끈질겨. 짜증날 만큼 끈질기다고. 거칠게 전화를 받자 학원 선생님의 목소리가 끈덕지게 귀를 파고들었다.

 “지원이냐? 왜 오늘 학원에 안 왔어? 5시에도 전화를 했었는데 왜 안 받았냐?”

 “아아, 쌤. 한번만 봐주세요.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감기에 걸려서 콧물 줄줄에 열까지. 정말 미치겠다니까요.”

 아프다는 내 말에 학원 선생님의 재촉전화가 누그러졌다.

 “그러냐? 거, 몸 관리 좀 잘 하지. 빨리 나아라. 다음 달에 수학경시대회 나가는 건 알고 있지? 다음 주에는 건강한 모습으로 보자.”

 “네, 오늘 못 가서 죄송합니다. 그럼 다음주에.”

 딸각. 전화 종료 시간이 표시되면서 통화가 끊겼다. 다음주는 개 뿔. 아마 내일 아침이면 우리 집에서 학원에 건 전화 때문에 발칵 뒤집히려나. 설마 경찰에 실종신고하고, 뭐 이런 건 아니겠지? 내 통화를 듣고 있던 유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가, 감기, 걸렸어?”

 ...너 바보냐. 아참, 진짜 바보 맞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자 땀에 눌러 붙은 옷자락이 불쾌했다. 덜거덕거리는 고물 선풍기 앞에 앉아 대꾸했다.

 “아-니.”

 유현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가 원상태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지, 입을 열었다가 닫고를 몇 번 반복하다가 간신히 말을 꺼냈다.

 “거짓, 말은, 나빠!”

 “왜?”

 진한 웃음을 띠우고 되묻자 유현은 말은 해야 하는 데, 온전한 문장이 생각나지 않는지 버벅거리며 힘겹게 내게 거짓말이 나쁜 이유를 설명하려 했다. 얼굴은 울상인 채.

 “사, 사람 속이는 건, 그, 그런 거, 나쁘다. 거짓말, 은, 속이는 거, 니까!”

 바보. 얼간이. 난 왠지 기뻐져서 진심으로 활짝 웃어버렸다.

 “어째서? 내 거짓말로 누군가 죽어? 다쳐? 상처 입어? 손해를 봐? 알고도 속아주는 거고, 속아주는 걸 알면서도 속이는 거야. 거짓말이 왜 나빠? 서로 얼굴 붉히지 않고 좋잖아? 적당한 거짓말, 적절한 거짓말은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거짓말이 나쁘다면, 이 세상이 나쁜 거야. 이 사회가 나쁜 거야.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게 나쁜 거 아닐까? 그럼, 말해봐. 나는 나쁜 친구야?”

 내 친구들이라면. 그러니까 각자의 일에 바빠 도저히 상대를 신경써줄 여력은 없지만, 그래도 경쟁할 이들은 필요한 내 친구들이라면 잘난척하며 무섭게 반박할 허점투성이의 말이야. 유현아. 진심으로 상대를 이해할 마음 따위는 없어. 그냥 아무도 없으면 쓸쓸하니까, 자랑할 게 없으니까, 혼자 소외되어 버리니까 마주 서 격려하고, 뒤돌아서서 서로를 욕하는 이게. 내 친구들이야. 유현아. 다들 자기를 사랑하느라 너무 바쁘거든. 자기에 도취되느라 너무 힘겹거든. 집에 놀러온 친구라는 놈은 내가 푸는 문제집 이름들을 목록으로 만들어 적어 가. 정말 멋지지? 내가 가진 우정? 시험만 끝나면 서로 성적을 감추고, 들춰내고 자기 등수와 비교하느라 바쁘지. 그래도 다들 잘 살더라. 시험을 끝내고 함께 어울려 위세당당하게 시내로, 노래방으로, 극장으로 쏘다니지. 그런데 왜 나는 못 견뎌내는 걸까? 유현이는 멈칫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 냐. 지원, 인. 착해.”

 “내가? 사실을 말해줄까? 난 하나도 착하지 않아.”

 엄마가 얼마나 울지 알아. 내가 이렇게 가출해버리면. 아빠가 얼마나 화를 낼지 알아. 내가 이렇게 사라져버리면. 담임선생님이 얼마나 곤혹스러워 할지 알아. 믿었던 도끼한테 발등 찍힌 기분이려나? 아, 뭐. 친구들은 별로 걱정 안 돼. 내가 좋은 가십거리를 제공해주었으니 그에 따른 보상금은 받고 싶은데. 나는 나 때문에 누군가가 울어도, 화를 내도, 믿음을 잃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걸. 난 말이야, 나를 받아들이는 데도 너무 버거워. 이기주의자. 자기중심적. 죄책감조차 들지 않아. 그냥 다 귀찮아졌어. 녀석이 보고 싶었어. 네가 보고 싶었어. 누구의 아들도 아니고, 몇 반 반장도 아니고, 수많은 수강생들 중 한명이 아닌. 그냥 ‘나’이고만 싶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비웃을 누군가를 알아. 반사회주의자라고 비난하려나? 뭐, 아무렴 어때. 열심히 지껄이라고 그래. 짖어대라고 해. 나조차 이해할 수 없는 이 광기를 설명하려 드는 인간들이 있다면 모두 죽여 버리고 싶어. 유현인, 주먹을 꽉 쥐고는 녀석으로서는 아주 드물게, 단호하게 말했다.

 “착, 해!”

 어이가 없었다. 이대로 계속해서 ‘내가 착하다, 착하지 않다’라는 논쟁을 벌여봤자 소용없을 테니까. 우선은 배에 찰싹 달라붙은 굶주림부터 달래기로 마음먹고 퉁명스레 말했다.

 “아아, 그래. 나 무지무지 착한 놈이니까 빨리 저녁 줘. 굶어 죽을 것 같아.”

 “으-응!”

 어설픈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등을 보여주는 유현. 변했구나.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었던 걸까. 우유부단한 녀석. 혼자서는 아무것도 정하지 못하고 벌벌 떨던 유현이 자기 의견을 저렇게 주장하게 될 줄이야 그때 생각이나 했을까. 정말 병신이라니까. 무의식적으로 리모콘을 찾던 나는 이 집에 TV 따위는 없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남 말 할 처지는 아니군. 손이 허전해서 결국 핸드폰을 집어 들자, 어느새 문자가 와 있었다.

 <지원아ㅠ 영어쌤 숙제가 어디까지더라?ㅜㅜㅜ - 류민혁>

 피식. 알게 뭐야. 난 너희들의 일상에서 빠져나온 걸? 혼자 살아서 그런지 익숙한 솜씨로 요리를 마친 유현이 벙긋벙긋 입을 뻐끔거리자 나는 내 핸드폰을 유현의 손에 들려주었다. 유현은 의아한 지, 손에 잡힌 핸드폰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다시 또 안절부절. 정말 너란 녀석은. 웃으며 말해주었다.

 “핸드폰 부수기 놀이 안 할래?”

 부순다는 말에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시선을 맞추지 않는다. 유현의 어깨를 토닥이며 겁먹지 말라고 입을 열었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핸드폰은 엄청 튼튼하데. 내 친구가 핸드폰 위로 자동차가 지나가는 걸 봤는데, 그래도 안 부서지더라고 하더라. 그러니까 핸드폰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건 그만큼 네가 강하다는 게 아닐까? 난 힘센 유현이가 좋으니까, 네가 얼마나 센 지보고 싶어.”

 ‘강하다’, ‘힘이 세다’라는 말에 혹한 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자신의 요리를 맛보게 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큰지 칠이 벗겨진 식탁에 차려진 음식들을 가리키고 난 뒤 핸드폰을 가리켰다.

 “아, 알았어. 우선 저녁부터 먹고 해 보자.”

 그게 그렇게 기쁜 지, 씨익 웃고 마는 유현의 얼굴에 나까지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잘 먹겠습니다. 목소리와 목소리가 작은 집을 가득 울렸다.


#2.

 <적월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잠깐 물을 가지러 간 새에, 누군가가 채팅방에 들어왔다는 알림이 떴다. 자리에 채 앉지도 앉고 빠른 속도로 자판을 쳐 내려갔다.

 <삐딱빼딱 : 여어, 오랜만~>

 말을 걸기 무섭게 상대에게서 문장이 날아왔다.

 <적월 : 오오, 그래, 삐딱. 우리가 오랫동안 보지 않기는 했지. 벌써 14시간이나 지났어!>

 그거야 어제도 채팅을 했으니까 그렇지.

 <삐딱빼딱 : 저런. 좀 더 오래 보지 않았으면 했는데.>

 <적월 : 날 사랑한다는 말을 격하게 하는 구나. 그보다 카인형은?>

 <삐딱빼딱 : 카인형은- 알바 뛴다고 오늘 좀 늦는다고 했지.>

 <적월 : 에엑?! ㅠㅁㅜ 이럴 순 없어! 왜 나도 못 들은 카인형 소식을 네가 아는 거야?!>

 <삐딱빼딱 : 카인형은 너보다 날 더 사랑하거든.>

 <적월 : KINKINKINKIN!!!!>

 <삐딱빼딱 : ...죽고 싶은 거구나? 이제 아주 이 세상을 하직하겠다는 거지?>

 <적월님께서 적월 -> 삐딱이 죽어라! 로 대화명을 바꾸셨습니다.>

 순간 저절로 마우스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진정하자. 저 바보의 도발에 넘어가는 건, 그거야말로 진정한 바보 같은 짓이야. 내 이성은 내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내 손은 저절로 핸드폰으로 가서 단축번호7을 꾹 누르고 있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Toxic’이 흐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녀석이 전화를 받았다.

 “이 자식-뚝. 띠띠띠띠띠띠.”

 ...어쭈? 전화를 끊어? 응? 이젠 아주 막 가겠다는 거냐? 네 녀석이 정녕 살고 싶지 않은 거구나! 한바탕 쏟아줄려고 했던 내 말들이 허공에서 흩어져 버리자 이를 악 물었다. 적월 이 인간을 그냥! 분노하느라 잠깐 화면을 보지 못했을 때, 또 새로운 인물이 채팅방으로 들어왔다.

 <유리시아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삐딱빼딱 : 안녕>

 <삐딱이 죽어라! : 어서와, 유리~>

 <유리시아 : 안녕ㅇㅅㅇ 그런데 ↑ 얜 누구?;;>

 <삐딱빼딱 : 무시해. 알 가치도 없어>

 <삐딱이 죽어라! : 뭐어어어?!>

 <유리시아 : 아, 알 것 같아. 알아. 적월 맞지?>

 <삐딱이 죽어라! : 유리유리리리리- 딱 알아 맞추는구나! 내 매력이 그 정도인가!>

 <삐딱빼딱 : 틀렸어. 네 바보스러움이 그 정도란 말이다!>

 <유리시아 : ㅋㅋ그거야 너희들은 만나기만 하면 티격태격이니까, 왜 꼭 그거 닮았어!>

 <삐딱이 죽어라! : 맨인블랙?>

 <유리시아 : 아니아니, 맹구와 땡칠이!>

 <삐딱빼딱 : 나까지 도매급으로 넘기지 마!!!>

 <삐딱이 죽어라! : 내가 할 소리야, 그거!!!!!!!!!!!!!!!!!!!!!!!!!!!!!!!!!!!!!!!>

 <삐딱빼딱 : 넌 좀 가만있어!>

 <유리시아 : ㅎㅎ사이좋기만 하구나. 둘이.>

 <삐딱이 죽어라! : 미쳤?!>

 <삐딱빼딱 : ...살기 싫어 졌어>

 <유리시아 : 아, 그런데 이번 정모 때 올 거 야?>

 <삐딱빼딱 : 가고 싶긴 하지만 서울이고 하니. 지방 사람들은 힘들다고. 기차비가 얼만데.>

 <삐딱이 죽어라! : 난 카인형보러 갈 거지롱롱롱. 돈 따위 내 사랑에 문제가 되지 않아!>

 <유리시아 : 적월은 볼 수 있겠네- 적월도 지방 살지 않아?>

 <삐딱이 죽어라! : 응, 광주태생. 싱싱한 고교생이라고!>

 <삐딱빼딱 : 으악, 싫다. 너 이사 가라. 같은 광주인이라는 게 부끄러워지고 있어!>

 <유리시아 : 뭐야, 둘이 같은 데 살잖아? 삐딱이도 고등학생이라니까- 둘이 나이 똑같은 걸로 알고 있는데? 어느 학교?>

 <삐딱빼딱 : 슬프게도 같은 나이긴 하지만. ◯◯고등학교.>

 <삐딱이 죽어라! : !!! 싫어!!!>

 <삐딱빼딱 : 약 먹었냐? 헛소리 좀 그만하세요.>

 <삐딱이 죽어라! : 나도 ◯◯고등학교 다닌단 말이야!!>

 <유리시아 : 세상에나. 이런 인연도 다 있네. 그럼 둘이 친구일 수도 있단 말이잖아? ㅎㅎ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서로가 서로인줄 몰랐다면 엄청 재밌겠다!>

 <삐딱빼딱 : 즐거워하지 마!>

 <삐딱이 죽어라! : 전학 갈래!>

 가버려, 이왕이면 지구 밖까지 꺼져버려! 라는 진심어린 메시지를 날려주려는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톡. 톡. 마우스를 두 번 클릭하자 열려있던 카페 창과 채팅방이 사라져버렸다. 들어오란 소리도 하지 않았는데, 문이 열리며 엄마가 사과를 깎아 들고 들어왔다.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물어온다.

 “뭐하고 있었니?”

 “공부가 안 돼서, 잠깐 음악 좀 듣고 있었어요.”

 그으래? 엄마는 무엇을 찾고 싶은 건 지 두리번두리번 거리다가 컴퓨터 화면에 띄워진 창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어떤 흔적이 나오지 않을까, 찾아내겠다는 듯이 뚫어져라 바라본다. 거북할 정도로 방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던 엄마는 어색하게 웃으며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엄마는 우리 지원이 믿으니까, 열심히 해.”

 난 감동받은 것처럼 눈망울을 크게 하고 베싯 웃었다. 쑥스럽다는 듯, 기대에 보답하겠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엄마가 나가자, 언제 미소가 지어졌냐는 듯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믿으니까? 와아, 정말 엄청 믿어주시는 데. 그 신뢰가 부담스러워서 아무것도 못하겠는 걸? 탐색하듯 바라보던 그 시선. 생각했다. 저렇게 속이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할 바에야 차라리 솔직하게 얘기하는 게 백배는 더 나을 거라고. 대 놓고 말씀하세요. 날 못 믿겠다고. 엄마의 아들도 믿지 못하게 열심히 행동하고 있으니까.

 몰랐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겠죠, 엄마. 학교에 갔다가 돌아오면 묘하게 바뀌는 내 물건들의 위치들. 내방에서조차도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다는 거. 굉장히 답답하다는 거 알 리가 없죠.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것도 알아요. 날 믿지 못하는 것도 알아요. 왜 다 아는 사실을 저렇게 기를 쓰고 감추려고 하는 지, 이해가 가지 않아. 다시 카페를 클릭하고 채팅방으로 들어갔다.

 <삐딱빼딱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카인 : 안녕, 삐딱군.>

 <유리시아 : 갑자기 나가서 놀랬어! 렉?>

 <적월 : 왔느냐>

 카인형도 들어왔구나. 어느새 대화명을 원상태로 돌린 적월의 행동에 피식 웃으며, 엄마가 내가 이 카페에 가입한 걸 알면 뒤로 넘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카페 가입 조건이 뭔지 알면 끝장날 걸? 멍청하게 들킬 생각은 없어. 바보처럼 떠들고 다닐 생각도 없어. 카페 사람들의 커밍아웃 경험담은 충분히 들었으니까. 하지만 완벽하게 나를 누르는 건 무리야. 이렇게라도 나를 긍정하지 않으면 펑 터져버리고 말 거야. 나는 남자밖에 좋아할 수 없는 게이니까.

 <삐딱빼딱 : 잠깐 튕겼지 뭐야. 카인형, 안녕>

 <유리시아 : 나아안- 너무너무 아쉬워ㅠ 삐딱이도 정모 와! 카인이가 한 턱 쏜대!>

 <카인 : 2차는 유리가 내겠지?>

 <적월 : 에엑?! 어째서 삐딱이한테 관심집중? 애정이 필요한 어린 양은 나란 말입니다!!>

 <삐딱빼딱 : 평소의 인간성이 들어나는 때지.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해.>

 <유리시아 : ...랄까. 실망이야, 삐딱!>

 <카인 : 풉>

 <적월 : 크흑. 미안하다ㅜㅜㅜ 네가 이지경이 되기 전에 언덕 위의 하얀 병원으로 보냈어야 했는데!!>

 <삐딱빼딱 : 넌 이미 거기 단골이면서, 뭘 새삼스럽게^^>

 무한 느낌표에 도전하며 화면위에서 폭주하는 적월을 말리는 건지 부추기는 건지 알 수 없는 유리의 응원을 보면서, 이들과 현실에서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하는 건 어떤 느낌일까 잠깐 상상해봤다. 숨기지 않아도 돼. 감추지 않아도 돼.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들어내 보여도, 침을 뱉고 뒤돌아설 사람은 아무도 없어. 거짓과 거짓을 껴입고 더위에 허덕거리지 않아도 돼. 아, 그런 것이야 말로 살아 있는 거구나. 들킬까봐 벌벌 떨지 않아도 돼. 등을 돌리고 멀어질 까봐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지독한 경계심에서, 자기보호에서 벗어나도 좋아. 나만 색깔이 다르니까, 매번 그들과 같은 색을 칠하는 그런 일은 하지 않아도 돼. 내가 ‘나’로 있을 수 있어. 그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하지만 일요일이야. 정모 날짜는. 그리고 우리 집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지. 지독한 감기에 걸려 고열로 정신을 놓았다 잡았다 할 때도,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질 거라며 예배에 끌려갔었지. 그런 우리 집에서, 서울을 가기 위해 일요일 예배에 빠진다라? 절대 무리. 이 네 글자가 머릿속에 콱콱 박혔다. 종교의 선택 같은 게 내게 주어진다면, 기독교 따위 믿지 않겠어. 내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신을 왜 내가 믿어라 강요받는 거지? 나를 죄악이라고 부르짖는 종교를 내가 왜! 으득으드득. 이가 갈렸다. 유리시아는 내가 이렇게 말할 때 마다, 진정하라고 했다. 유리도 천주교를 믿고 있었지만 난 종종 유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신에 대해 건방지기 짝이 없는 나와 달리 유리는 충실한 교인이었다. 자신의 사랑이 성서에 금지된 것이라는 사실에 충격 받은 유리는 고해성사를 했다고 했다. 그 빌어먹을 고해성사. 회개하라, 당신에게 악귀가 들렸나니! 하나님의 은총으로 악귀를 물리치기를!

 아하하하하하하하! 악귀가 들렸나니! 그 말을 건네 준 신부는 그 후 유리를 만날 때 마다 유리의 손을 꼭 붙잡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너무나 진지한 얼굴로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는 신부님을, 유리는 울적한 마음으로 피하기 시작했다고 말했었다. 이상하지? 그 분은 나를 위해 그렇게 열심히 기도해 주시는데, 기쁘지 않더라구. 오히려 더 슬퍼져서 그냥 울고 싶더라. 왜 하나님은 나를 남자를 사랑하게 만들어서, 신부님과 나를 이토록 난처하게 만드나- 그런 생각마저 들더라니까. 원망스럽지. 안 그래야지라고 생각은 하지만, 정말 모든 게 생각대로 될 거라면 힘든 일이 아무것도 없을 거야. 나는 유리와 내가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데,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소리죽여 울었다.

 그래, 이것이 우리의 사랑이다. 이성간의 사랑, 부모자식간의 사랑, 형제간의 사랑, 사제간의 사랑. 모두 형태는 다르지만 결국은 사랑인 것처럼- 우리의 사랑도 형태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 하나도 다를 게 없는 사랑이건만. 악귀가 들린 것이라 한다. 착한 유리. 여린 유리. 바보 유리. 여전히 자신은 남자를 사랑하면서 괴로워한다. 그런 신 따위 무시해버리면 그만인데. 믿지 않고 걷어차 버리면 끝인데. 피 흘리며 사랑한다. 아아, 바보 유리.


#3.

 새벽 등교라고 해도 아쉽지 않을, 채 해가 떠오르지도 않은 밤의 냉기를 마시며 주머니에 손을 더욱 깊게 꽂아 넣었다. 학교와 집까지의 거리가 멀어 일찍 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버스를 타려고 해도,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하아. 숨을 쉬자, 하얀 김이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래도 일찍 등교하면 고릴라의 명찰 검사는 피할 수 있으니까. 버스 정류장에 서서, 간혹 스쳐지나가는 자동차들의 질주를 바라본다. 이 새벽에 도로를 달리는 저 차들은 집으로 가는 걸까, 집에서 나오는 걸까. 어디를 향해 저렇게 바쁘게 쫓아가는 걸까. 어디를 가려는 걸까. 아니면 돌아오려는 걸까? 멍하니 상념에 젖어 있는데, 뭔가가 내 뺨을 주욱 잡아당겼다.

 “뭐야?!”

 놀라서 그 손을 뿌리치고 뒤돌아보니 내가 쳐낸 손이 아픈 지, 호호 불어대며 오도방정을 떨어대는 옆 반 부반장이 보였다. 남색의 잠바를 걸친 옆 반 부반장-이준영-은 뭘 그렇게 놀래냐며 투덜거렸다. 거리낌 없이 답해주었다.

 “평범하게 인사해, 평범하게!”

 “네에네에. 오늘도 일찍 가네, 학교. 너처럼 성실한 녀석도 드물 거다.”

 성실? 내가 성실하던가? 의외로 내가 보호색을 잘 입고 있다는 것에 놀라며 반문했다.

 “넌 웬일이야? 매번 아슬아슬하게 등교하던 놈이?”

 그러자 보기 괴로울 만큼 눈을 반짝이며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거야 우리 자기를 보기 위해서지! 우리 자기가 요 일주일은 주번활동 때문에 일찍 등교해야 된다잖아! 난 하루라도 우리 자기를 보지 않으면 삶에 보람이 없어져! 그러니까-”

 턱. 비가 올까봐 챙겼던 우산을 준영의 목에 들이대고 싱긋 웃어주었다.

 “어, 그래. 거기서 입 닥치고. 더 지껄이는 순간 내 손은 내 통제에서 벗어날 지도 몰라요.”

 “치, 친구야.”

 “응? 친구? 뭘 모르는군. 네가 커플이 된 순간부터 우리의 우정은 박살난 거야. 커플지옥 솔로천국! 함께 이 진리를 퍼뜨리자 다짐하던 네가 배신을 땡기고 K여고의 너의 님을 사귄 순간부터! 너는 솔로들의 적인 된 거다!”

 “그, 그런!”

 “변명은 듣지 않겠다. 우리 솔로부대에서 이미 너의 이름은 지워졌어!”

 실실 쪼개며 준영은 우는 흉내를 냈다. 결국은 나를 웃게 만들고는, 의기양양하게 다가오는 버스와 자신의 휴대폰에 온 문자를 번갈아 살폈다. 기다리던 님의 문자를 받았는지 버스가 채 멈추기도 전에 바짝 다가서는 바람에 버스 운전사의 호된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준영은 이미 뒷자리에 앉아 있는 여고생 곁으로 걸어갔고, 나는 아직은 텅텅 빈 좌석들 중 창문이 열린 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버스가 달리면서 바람이, 차가운 바람이, 사정없이 머리카락을 날리고 얼굴에 부딪혔다. 내 열을 식혀줘. 어쩌면 내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이 더위를 가라앉혀 줘. 껴입고 있는 거짓들이 날 숨 막히게 해. 내 열을 식혀줘.

 버스는 유치원 앞에 멈췄다. 유치원에서부터 학교까지 아득한 이 등산로를 걸어가야 함을 알기에 걸음마다 힘이 들어갔다. 묵묵히 걷는 것. 조용히 침묵한 채 나 이외의 것들에 귀를 기울이며 걸어가는 것. 난 그런 것들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잠이 덜 깬 몽롱한 상태임에도, 새벽등교를 포기할 수 없는 건지도 몰랐다. 사람이 너무 많으면 요란하다. 정작 아름다운 소리들은 다 묻혀 버리고 쓸모없는 소음들만 들려온다. 한적한 새벽은, 사람이 별로 없다. 그래서 좋아하고 있다. 이 정적을. 새벽을. 고요함에 흠뻑 젖는 이 기분을.

 학교 계단을 올라가. 복도를 울리는 건 나 혼자의 발소리. 걸음을 멈추면 성큼 다가오는 시원한 침묵. 잠에 빠진 학교를 홀로 깨우면서 가는 거야. 교실 열쇠를 숨겨 두는 신발장 옆에서 열쇠를 꺼내 들고 자물쇠를 연다. 자물쇠와 열쇠는 칠판 옆에 걸어 놓으면 모든 것이 끝났어. 그런 일상을 예상하고 교실 문을 열자, 벌써 누군가가 와 있었다. 이제 막 깨어난 햇살을 온 몸으로 받으며 자기 자리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키는 우리 반에서 두 번째로 크다. 그래서 그런지 그림자가 길다. 창가에서 복도 쪽 까지 길게 드리워질 만큼. 우리 반 왕따.

 깨울 생각은 없었는데 내 책상 위에 가방을 내려놓는 소리에 깼는지 화들짝 눈을 뜬다. 그리고 두려움에 빠져 두리번두리번 거리다가 나를 발견하고 안심한 표정을 짓는다.

 “아, 아, 안, 녕.”

 정유현. 속이 확 뒤집히는 그 느릿느릿함에 무어라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더 겁을 먹어 교실 구석에 가 버릴 게 뻔했기에 같이 인사했다.

 “어, 좋은 아침. 교실 열쇠 어디 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 이제껏 내가 문을 열어서 반 애들도 잘 모를 텐데.”

 “차, 창문, 타 넘, 고, 들, 어 왔, 어.”

 저번 주 주번 누구야? 제대로 창문도 안 잠그고 갔구만. 보나마나 주말이다, 신나라 하면서 제대로 점검도 안 하고 날아갔겠지. 오면 한 마디 해주리라 생각하면서 오늘 시간표대로 서랍을 정리했다. 가방에서 필통을 꺼내고 영어단어집을 꺼낼 때 까지 계속해서 따라오는 시선에 결국 몸을 돌려 창가 맨 끝 자리에 앉아 있는 유현에게 물었다.

 “나한테 할말이라도?”

 눈과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움찔. 한숨이 절로 나올 만큼 답답해졌다. 이럴 때면 반장이라는 명함마저도 부담스러워 진다. 지원이 네가 반장이니까, 유현이한테 좀 잘해줘라. 잘해주고 싶어도 의사소통이 명확해야 무엇을 싫어하는 지, 좋아하는 지라도 알지 저렇게 말을 걸 때 마다 부들부들 떨면 꼭 괴롭히고 있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다. 급한 성격을 참지 못하고 짜증이 서서히 치미는 가운데, 반 아이들이 하나 둘 문을 열고 교실을 채우기 시작했다.

 “반장, 안녕-”

 “하이, 지원.”

 내게로 오는 인사에 적당히 인사로 답하며 초봄의 쌀쌀맞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덥다’고 생각해버렸다. 더워, 더워. 더워 죽을 것 만 같아. 왜 다들 춥다고 그래? 난 지금 더워 미칠 것만 같단 말이야. ‘내’가 속삭였다. 벗어. 그렇게 겹겹이 입고 있으니 더울 수밖에. 그 거짓들 모두 집어 던져. 그러자 나는 더욱 착실하게 새로운 거짓을 덧입었다. 나는 추운 거다. 덥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나는 추워하고 있는 거다. 그렇다고 해두자.


#4.

 모든 일의 발단은 적월의 문자 때문이었다. 4교시를 끝내고 아이들이 빛 보다 빠른 속도로 배식을 받기 위해 뛰쳐나갈 때, 괜히 음식에 눈 먼 중생들의 아귀다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펴는데 문자가 왔다.

 <삐딱! - 적월>

 <왜?>

 문자를 보내기 무섭게 새로운 문자가 도착했다.

 <오늘 만나지 않을래? - 적월>

 어엉? 꼭 한 두 번 만난 적이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만나자라고 권하는 적월의 행패에 할 말이 없어졌다. 서로가 같은 학교라는 것을 알게 된 건 어제였지만, 당신 행동이 너무 빨라! 물론 한 번 직접 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같은 고등학교를 다닌다는 건 너무 큰 위험부담이라고 생각했다. 적월과 만난다는 건 이토록 철저하게 내가 이반인 걸 숨기고 사는데, 한꺼풀을 벗어야 한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거절하기에는 너무 여건이 좋지 않았다. 같은 고등학교, 같은 학년, 같은 카페인, 서로의 핸드폰 번호도 알고 있다. 게다가 절묘하게도, 오늘은 단축수업을 한다. 시간이 빈 다는 말이다. 긁적긁적. 어쩔까 고민하면서 자판에 차마 손도 못 올리고 손가락만 까딱까딱하는 데 복도에서 누군가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넘어지면서 무언가를 쳐버렸는지, 요란한 깡통소리가 뒤따랐다. 그리고-

 “정유현, 너 죽을래?!”

 “아, 아, 아, 니야, 시, 실, 수-”

 퍼억. 얻어맞는 타격음과 함께 또다시 복도가 소리로 진동했다. 이것들이 정말 뭐 하는 거야! 자리에서 확 일어나 복도로 달려갔다. 꽤 세게 얻어맞았는지 몸을 한껏 웅크리고 사물함에 바짝 붙어 유현은 서럽게 울고 있었다. 씩씩거리면서 유현에게 발길질을 하려는 녀석은 친구들에게 붙들려 거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어디서 싸움 났냐? 옆 반에서 상황을 살피러 애들이 나오는 걸 보고 골치가 아팠다.

 반찬통 하나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먹음직스런 야채튀김이 모두 튀어 나와 복도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인상을 찡그리며 유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일어서. 자, 얼른.”

 유현은 오히려 내가 손을 내밀자 더욱 고개를 숙여버렸다. 일어설 의사가 전혀 없어 보이는 유현은 내버려 두고 배식당번들에게 물었다.

 “야채 튀김 담당 누구? 오, 너냐. 그럼 수고롭지만 가서 야채 튀김 다시 받아 와줘.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니. 그리고 호중아, 무슨 일이냐?”

  화가 가라앉지 않는 지 시뻘개진 얼굴로 숨만 내쉴 뿐, 녀석이 아무 말도 않자 호중을 말리던 부반장이 입을 열었다.

 “호중이 식판에 유현이가 침을 흘려서-”

 “침을 흘린 게 아냐! 뱉었다고! 그런 걸 나보고 먹으란 말이야?!”

 생각만 해도 속에서 열불이 터지는 지 바락바락 악을 쓰는 호중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히 울렸다. 그 목소리에 유현은 덜덜 떨었다. 아, 진짜.

 “유현아, 실수였지?”

 내가 묻자 황급히 고개를 끄덕인다. 호중은 당장이라도 덤벼들 기세였지만, 그전에 내가 힘겹게 유현을 일으켜 세웠다. 내 얼굴이 유현의 어깨 밖에 닿지 않았다. 유현의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은 세수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했다. 아이고, 머리야. 지끈거리는 뒷골을 억지로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배식 계속 받도록 해. 호중이 너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줘라. 나쁜 마음은 없었을 거야.”

 유현의 축축해진 손을 붙잡아 이끌고 화장실로 향하려니 내 등 뒤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아아, 이래서야 하나도 수습된 게 없잖아. 누군가에게 잘해주려면, 누군가는 소홀하게 된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걸. 도통 세수할 생각이 없는 것 같은 유현을 내 손에 물을 묻혀 얼굴을 씻어 주면서 생각 외로 순순히 내가 해주는 대로 가만히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신기해졌다. 나보다 더 큰 키, 좋은 덩치. 눈치를 보는 듯한 행동만 빼면 평범한 인상인데. 정신 지체아라는 건가. 찰팍찰팍.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닦고 있는 데, 유현이 입을 벙긋거렸다. 뭐?

 “저, 저, 저, 기, 옷, 다, 저, 젖었.”

 이 정신머리 좀 보게. 당연히 유현은 서 있으니까 얼굴에 흐른 물방울들이 아래로 떨어질 건데, 그걸  까먹고 계속 세수만 시켰으니 옷이 젖을 수밖에. 아무 생각 없이 내 체육복 빌려줄 테니까 옷 마를 때 까지 입고 있으라고 하려던 나는 거울에 비친 유현과 내 체구 차이를 보았다. 내 체육복은 유현에게 들어가지도 않을 것이었다. 에고, 어디 보자. 그럼 유현이랑 체격이 비슷하면서도 유현에게 빌려주는 걸 싫어하지 않을 녀석이 있던가. 떠오르는 얼굴들에 엑스표를 치던 나는 한 인물에서 동그라미표를 그릴 수 있었다. 옆 반 부반장! 체육복 빌려서 반으로 돌아갈 테니까 먼저 반에 가 있으라고, 돌아가기 싫은 표정의 유현이를 억지로 들여보낸 다음, 옆 반으로 들어갔다.

 준영은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한 무리의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무어라 열심히 얘기하고 있었으니까. 멀리서 말을 거는 것보다 가까이 갔을 때 부르려고 그 쪽을 향해 가는 데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 자식 졸라 재수 없어. 변태 아냐? 호모잖아- 우에엑. 역겨워. 내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들킨 걸까. 내 이야긴가. 준영이 먼저 나를 발견했는지 손을 들어 반겼다.

 “지원아! 웬 일로 우리 반까지 행차?”

 “체육복 좀 빌릴 수 있을 까?”

 애들한테서 벗어나 내게로 오면서 준영이 의문을 제기했다.

 “내 체육복은 너한테 너무 클 텐데?”

 “우리 반, 유현이 옷이 젖어서 마를 때 까지 좀 입고 있게 하려고.”

 아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물함에 있는 체육복을 꺼내러 나가는 준영을 따라 나갔다. 그 짧은 사이에 식은땀이 손바닥을 적셨다. 제일 아래에 위치한 자신의 사물함을 여느라 거의 앉다 시피 한 준영의 등을 내려다보면서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정작 입 안은 갈증이 나서 타는 것만 같은데.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고 있었어?”

 사물함 정리가 제대로 안 되어 있는 지, 교과서와 문제집의 더미 사이에서 눌려 있던 체육복을 꺼내던 준영이 ‘좀 그런데.’하면서 피식 웃었다. 마침내 체육복을 무사히 꺼냈는지, 읏차 하면서 일어서는 준영에게서 체육복을 건네받자, 누가 들을세라 바짝 다가와 귓속말로 속삭였다.

 “7반 새끼가 우리 반 애한테 고백했지 뭐야. 알다시피 우리 학교 남고잖아? 나 원, 같은 게 달린 남자가 뭐가 좋다고 고백씩이나 하는 지. 고백 받은 녀석이 길길이 날뛰고 있어. 애들 모아서 밟아야 속이 풀리겠다고. 이크, 이거 너 같은 모범생한테 이야기했다가 선생한테 꼰지르는 거 아냐? 하지만 너도 이해하지? 사내새끼가 좋아한다고 고백하면 얼마나 기분이 개 같을지. 대충 눈 감아줘.”

 장난스럽게 윙크하는 준영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당연히 이해하지. 정말 기분 더럽겠는데.”

 “그렇지? 야, 나 같았으면 죽이고 싶었을 텐데 그래도 이 녀석 용케 참고 있잖아. 아아, 너도 만만치 않게 힘들겠구나. 그 정신지체아- 힘내라.”

 고마워. 자기 반으로 돌아가는 준영의 뒷모습을 보면서, 쥐고 있던 체육복이 조금 구겨졌다. 수업 시작종이 치지 않았으면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못이 박힌 채 서있을 뻔 했다. 왜, 그 7반 애가 불쌍해? 말릴 걸 그랬다고 후회하고 있어? 너무 심하게 하지는 말라고 말이라도 할 걸 하고?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7반 애와 마찬가지로 나 또한 게이라고 준영에게 말 하려고? 덥다. 바짝바짝 메마른 입 안을 퍼석한 혀로 쓸어내리며 수업하러 온 선생님이 복도에 서 있는 나를 의아하게 바라볼 때 까지, 온 몸을 점령한 미열에 들떠 숨이 막혔다.


#5.

 <왜?! 왜??! 왜 안 만나겠다는 건데?! - 적월>

 역시나. 차라리 그 문자를 못 본 척 할 걸 그랬나. 못 만나겠다고 문자를 보내자 예상했던 대로 적월은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 계속해서 만나지 못하는 이유를 캐물었다. 그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어서 그냥이라고 보냈더니 2분이 멀다 하고 문자를 날려 대고 있었다. 드물게 섞여 있던 인신공격 문자도 부쩍 늘어났다.

 <왜?! 뚱돼지라서? 괜찮아! 나 이해할 수 있어! - 적월>

 부터 시작하더니 이제는

 <네가 찌질이에다가 아직까지도 엄마 젖을 빠는 유딩이라도, 심지어 미소녀 피규어 오타쿠라도 이 형님은 받아들일 수 있다니까?! - 적월>

 까지 발전했다. 적월 말대로 그냥 만나는 것 뿐 만이라면 친구끼리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니까 나처럼 오히려 정색하는 게 더 이상할 수도 있었지만 내키지가 않았다. 만약 적월이 그 7반 아이라면, 준영이네 반 아이들이 7반 아이와 함께 있는 내 모습을 본다면 뭐라고 떠들어 댈까? 무섭다. 두렵다. 싫다. 그렇다고 적월에게 ‘너 몇 반이냐? 7반이라면 안 만날래.’하는 것도 우습기 짝이 없었다. 겁쟁이 류지원. 몰래 자신을 드러내는 것 밖에 할 줄 모르는 겁쟁이. 더 이상 적월과 실랑이를 벌일 기운이 없어서 휴대폰을 주머니에다 밀어 넣었다.

 한창 선생님의 수업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는데 허벅지에서 우웅우웅거리는 진동에 기겁했다.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나보다 더 놀란 선생님이 얼결에 내게 물었다.

 “무슨 일이니?”

 아직 시집도 안 간 여선생님 앞에서 무슨 추태냐 싶었지만 핸드폰의 진동은 멎기는커녕 계속해서 울렸다.

 “화장실이 급해서요!”

 내가 말한 문장에 내가 뒤로 넘어갈 뻔 했다. 여선생님은 곱게 화장한 얼굴을 살풋 붉혔고, 아이들은 배를 잡고 이 때다! 하면서 웃어댔다.

 “빨리 갖다 오렴.”

 나 또한 얼굴이 달아올라서 엉거주춤 교실 밖으로 나왔다. 이토록 창피한 상황에 처하게 한 원인제공자를 살펴보려고 핸드폰을 꺼내자 아니나 다를까. 적월의 전화였다. 이 자식은 수업도 안 듣는데? 어이가 없었지만 기왕 나온 거, 전화나 받자 싶어 화장실에 들어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전화상으로 수 십 번은 넘게 들은 적월의 목소리에 짜증을 냈다.

 “돌았어? 왜 수업시간에 전화질이야!”

 “그럼 문자를 받던가. 문자는 죄다 씹은 주제에 네가 그 말 할 처지가 되냐?”

 “아오, 안 만난다고 했잖아!”

 전화 너머에서도 열을 받았는지 적월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야, 인간아! 이유라도 제대로 설명하라고!”

 나도 제대로 모르겠는데 어떻게 설명해주랴?! 눈앞에 적월이 있다면 멱살을 붙잡고 짤짤 흔들고 싶은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목소리를 낮췄다. 교장 선생님이 순찰을 도는 지, 복도를 따박따박 울리는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설명해줘도 넌 못 알아들을걸. 넌 아메바잖아.”

 “호오? 날 지금 단세포 생물 취급한다 이거지?”

 “진실을 받아들-”

 화장실 문이 끼익 열리며 근엄한 목소리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학생, 화장실에서 뭐 하는 겁니까. 몇 학년 몇 반이죠?”

 맙소사. X 됐다. 감히 수업시간을 제끼고 화장실에서 열렬히 통화 중이던 장면을 교장 선생님에게 들켜버리자 담임선생님의 얼굴과 엄마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저, 그게-”

 간신히 뒤돌아서 화장실 문 쪽을 바라보자- 나와 똑같은 교복을 입은 녀석이 핸드폰을 들고 서 있었다.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는 듯, 이를 꽉 깨물고 푸풉 잇새사이로 삐져나오는 웃음을 흘리는- 적월?! 얼이 빠진 내가 멍청하게 녀석을 바라보고 서 있자 화장실 문을 닫고 들어오면서 눈물까지 짜며 웃었다.

 “아, 내 배, 배 아파. 푸큭. 표정 작살이다아- 푸후후.”

 이 인간이!! 조금 진정 됐는지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치며 자랑스럽게 떠벌리기 시작했다.

 “어떠냐? 이 몸의 멋진 계획이? 네가 수업시간에 전화를 받을 만한 장소는 화장실 밖에 없겠지. 게다가 같은 학년이니, 3층의 화장실은 모두 5개! 5개만 둘러보면 너를 얼마든지 찾아 낼 수 있다는 거지. 어서 감탄하라고.”

 “내가 전화 안 받고 끊었으면?”

 “문제없어! 전화 받을 때 까지 건다!”

 누가 이 멍멍이 아드님 좀 데려가 버려. 핸드폰을 닫고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낯익은 얼굴. 매점에서 자주 봤던가. 아니, 좀 더 다른 곳에서 본 거 같은데. 어디서 본 얼굴일까. 정말 어디선가 내가 본 얼굴이기는 할까. 스스로에 대한 불신과 속으로 한번 보고 싶었던 사람을 만났음에도 기뻐할 수 없는 미적지근한 감정이 마구 엉켜 풀기 어렵게 되어버렸다. 순순히 반가워 할 수 없는 내가 싫다. 그냥 즐거워 할 수 있는 적월이 부럽고도 밉다. 어두운 마음. 밤보다 더욱 짙은 새카만 응어리. 나를 경멸해. 날카로운 얼음을 삼킨 것처럼 목이 따가웠다. 차갑다. 아프다. 하지만 나는 웃을 수 있어.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적월을 보자, 녀석이 멋쩍게 피식 웃는다.

 “내가 아무리 잘생겼다 하더라도 그렇게 빤히 바라보시면 부끄러워요- 내 외모를 시기하는 너의 기분은 백분 이해하겠지만-”

 “그 입 다물라. 어떻게 그 병은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냐?”

 불치병이걸랑. 쾌활하게 웃으며 등을 구부린다. 둥그스름한 곡선이 부드럽게 튕겨 곧게 펴진다. 나, 13반. 삐딱이 넌 몇 반이냐? 그 순간, 안도감이 혈관을 타고 온 몸으로 퍼진다. 7반이 아냐. 그리고 동시에 물음표가 뜨겁게 혀에 박힌다. 당장이라도 뱉지 않으면 혀가 녹아 없어질 것처럼.

 “1반이야. 그런데- 커밍아웃했어?”

 “에엑, 했다간 학주랑 매일매일 일대일 대면하게? 친한 녀석들만 알아. 그리고 우리 같은 이반들이랑. 맞아, 7반에도 한 명 있는데, 이수민이라고 알아? 모르면 소개시켜 줄까?”

 온 몸이 거부의 비명을 내지른다. 뇌가 신호를 보내기도 전에 멋대로 입이 움직였다.

 “아니. 됐어.”

 너무나 단호한 거절에 놀란 듯, 적월의 눈이 조금 커졌다. 나는 묻지도 않은 이유를 변명처럼 필사적으로 주워 쏟았다.

 “내가 이 쪽 성향인거, 아무도 몰라. 우리 부모님도 모르거든. 물론 그 이수민이란 아이랑 알면 좋지만, 아, 뭐, 그래서 좀, 그렇잖아?”

 이해가 안 가는 지 적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가 좀 그렇다는 거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적월의 생각을 가로막은 건 수업마침을 알리는 소리였다. 더 이상 적월과 같이 있기에 버거워서, 그 소리가 내겐 너무나 감미롭게 들렸다. 바쁜 일도 없으면서, 종이 치자마자 화장실 문을 벌컥 열고 작별인사를 남긴다.

 “만나서 즐거웠어.”

 다시 또 보자 같은 형식적인 인사도 덧붙일 수 없었다. 인터넷상으로만 만나도 충분해! 현실에서는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아! 내가 힘들게 쌓아놓은 공간에 아무렇게나 들어오지 마! 이 공간이 언제 무너질지 내가 걱정하게, 두려워하게 하지 마! 도망치듯 빠져나가는 내 등 뒤로 적월의 목소리가 따라왔다.

 “정모 같이 가자! 카인형이랑 유리도 너 보고 싶어 하더라!”

 몇몇 아이들은 벌써 교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대답을 남기는 대신, 교실 문을 드르륵 닫아버렸다. 드르륵. 드르륵. 드르륵. 쾅! 문이 부딪히는 소리에 깜짝 놀란 아이들의 눈동자가 모두 나에게로 향했지만, 그저 내 자리에 앉아 다음 시간에 수업할 교과서를 뒤적였다. 드르륵, 드르륵, 드르륵, 쾅! 문소리가 시끄럽게 귓가에서 울려댔다. 쾅! 쾅! 쾅!!


#6.

 퍽! 5층에서 떨어진 핸드폰은 용케도 풀밭 위로 떨어졌다. 부서지지 않기 위한 무생물의 삶에 대한 집념일까, 아니면 던진 이가 핸드폰을 부수고 싶지 않기 때문일까? 시시하게 핸드폰이 잡초들 위로 떨어진 원인을 분석하는 내게 어눌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쉬, 쉽지, 않아.”

 저, 저거, 자, 잘 안, 부, 서지, 는 데. 유현은 짧게 자른 머리를 힘없이 긁적이며 내가 화났을까봐 안색을 살폈다. 작은 창문에 남자 둘이 붙어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게 뭐하는 짓이래? 내가 웃자, 덩달아 히히 웃는 유현에게 고개를 돌려 정색하며 말했다.

 “내려가자. 핸드폰 주워야지. 이번엔 내가 망가뜨릴래.”

 유현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언제까지 내가 이 놀이를 계속할지 무서운 모양이었다. 망가뜨리고 파괴하는 건 유현의 성격에 안 맞으니까. 그래도 내가 하자니까 군말 없이 연립주택의 작은 집에서 나와 열쇠를 채운다. 지저분한 골목, 좁은 거리. 여름밤의 열기에 더욱 지독하게 풍겨오는 쓰레기 냄새까지. 나는 이 곳이 너무나 좋아. 높낮이가 제각각인 계단을 일렬로 내려갔다. 낮 동안 받아 둔 태양의 뜨거운 숨을, 아스팔트와 건물들은 거리낌 없이 뱉어내고 있었다.

 한 걸음 성큼 걸으면 끝날 작은 화단에, 핸드폰이 이질적으로 두드러졌다. 햇빛을 받지 못해 누렇게 뜬 이파리. 물도 제대로 주지 않았는지 말라붙은 줄기. 죽어감에도 끈질기게 땅을 움켜쥐고 살아가려는 흔해 빠진 잡초들 사이에 떨어진 손아귀에 쏙 들어올 반듯한 은빛 물체. 유현은 깨지기 쉬운 것을 줍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집어서 내게 건네주었다. 눈에 불을 켜고 내달리는 자동차들이 연달아 지나갔다. 아무도 여기에 멈출 이는 없는 지, 거들떠도 보지 않고 미친 듯이 밤의 끝으로 간다. 매연으로 더럽혀진 보잘것없는 풀들을 위할 일은 없으니까.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가치 있는 것들만을 애타게 찾으며 달리면 되는 거다. 자신이 무엇을 밟고 있는 지 볼 생각도 하지 않고.

 오른 손에 잡힌 핸드폰을 꽉 쥐자, 손목의 혈관이 도드라졌다. 유현을 보며 명랑하게 소리쳤다.

 “자, 봐! 이렇게 해도 안 부서지나 보자고!”

 그리고 달려오는 자동차에 핸드폰을 힘껏 던져버렸다. 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경적이 온 몸을 갈가리 찢을 것처럼 날카롭게 달려들었다. 퍼억!! 엄청난 타격음과 함께 핸드폰 파편이 튀었다. 핸드폰 폭탄을 맞은 불운의 자동차는 급브레이크를 밟았는지 끼이이익 거리며 인도를 넘어서며 저만큼 떨어진 곳에서 저절로 멈췄다. 꽤 먼 거리였지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거리였기에 운전자가 급하게 차문을 열고 욕지거리를 하며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핸드폰의 죽음을 목격한 후, 놀라서 뻣뻣하게 굳어 있는 유현을 툭툭 치며 말했다.

 “튀자, 차주인 온다.”

 그리고 유현이 뛰거나 말거나, 혼자 달리기 시작했다. 성난 음성으로 고래고래 알아들을 수 없는 욕설을 지껄이며 남자가 뛰어왔다. 유현은 그제야 머뭇머뭇하다가 사과를 소리치며 나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죄, 죄, 죄송, 해, 요오오오오!!”

 “지금 사과할 때냐? 빨리 달려! 빨리!”

 40대 중반처럼 보이는 배불뚝이 아저씨는 뱃살을 출렁거리며 있는 힘껏 우리를 추격했다. 잡히면 경찰서행이라는 생각에도,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 지, 땀으로 반팔티가 젖어가는 데도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헉헉. 차오르는 숨을 피를 뱉듯 툭툭 뱉어내며 다리 근육을 팽팽하게 당겼다. 사람이 걷는 길이다. 그래서 인도다. 그리고 나는 오늘, 이 길을 온 힘을 다해서 달리고 있다! 나는 미친 듯이 괴성을 지르며 달렸다. 즐거워 미칠 것만 같다! 돌아버릴 것만 같다! 나는 미쳤다!!

 다리, 다리가, 팔과 팔이 축축 늘어질 때야 아저씨를 따돌리고 어느 연립주택 계단에 주저앉을 수 있었다. 땀으로 흠뻑 젖어 퀴퀴한 냄새를 풍기며 돌계단에 엉덩이를 대고 있으니, 곧 유현이 내 옆에 와 털썩 앉았다. 서로에게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여유롭지 않아서, 질식 직전의 사람처럼 숨쉬기에 매달렸다. 겨우겨우 들썩이던 어깨가 진정되자 김빠진 웃음이 흘러나왔다.

 “킥, 큭. 아까 그 아저씨 얼굴 봤어? 우리 잡아먹겠더라. 차 수리하려면 돈 좀 깨지겠는데, 쫌 미안하네. 우리 아빠도 차에 목숨 걸었거든. 저번에 실수로, 차에서 내리다가 차문이 긁혔는데 거의 날 죽이려 들더라니까? 하하, 프하하.”

 또 다시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배를 움켜쥐고 바들바들 떠는 내게 ‘아까 한 짓은 나쁜 일이라고’ 말할 기운도 없는 지 유현은 입을 다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히, 하, 하늘에, 별 보, 인, 다.”

 도시 한 복판에서 무슨 별이야? 덩달아 고개를 치켜들고 열대야의 천장을 보자, 유난히 밝은 점 하나가 떠 있었다. 저거 인공위성일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 한 번 멋지다.”

 탄식처럼 길게 떨어지는 나의 말에 유현이 히죽히죽 웃었다. 허름한 주택가. 땀 냄새. 무더위. 진짜 별인지 가짜별인지 판단할 길이 없는 빛나는 것. 멍청이 둘이 올려다 본 끝내주는 여름 밤, 하늘.

 

 

* * *

 

 사실, 완결 낸 게 아니에요.

 

 쓰는 내내, 미안했어요. 무언가를 제대로 표현하기 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요.

 

 설연휴가 끝나면 바로 개학인지라, 글을 쓸 시간도 없을 것 같아서.

 

 평이라도 받으려고 올려봅니다.

 

 매번 평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초록불선생님.

 

 다음에는 완결을 내서 올리겠습니다.

 

 좋은 연휴 되세요.

느루
느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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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느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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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느루
  • 2007-05-06
새가 날아가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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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느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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