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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지 않는 잡초

  • 작성자 허공1
  • 작성일 2007-02-25
  • 조회수 461

 

<썩지 않는 잡초>

 

“네, 네, 그럼요. 잘 있어요. 네, 전 항상 잘 지내잖아요. 걱정 마세요. 교회요? 요즘 바빠서요. 네에, 네, 오늘은 나갈게요, 죄송해요. 현석 씨랑은 잘 지내고 있어요. 네, 몸 건강하세요.”

 

겨우 엄마와의 통화를 끝마쳤다. 현석에 대해 안부를 묻는 목소리가 자꾸만 되풀이되어 들렸다. 나는 교회 대신 약속장소로 발걸음을 두었다. 엄마가 알면 또 한바탕 잔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정도의 잔소리는 감수할 각오를 하고 있었다.

식당에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는 미선은 한가롭게 앉아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그녀는 같은 출판사 동료였다. 현석에게서 미선이 그를 짝사랑 했었다는 소리를 듣기 전부터 나는 미선의 그런 낌새를 눈치 채고 있었다. 그녀는 평소에도 공공연히 나에게 짜증을 내고는 했었다. 나와 현석의 결혼 이야기가 출판사 내에서 나돌자 그녀는 나를 찾아왔었다. 표독을 부릴 줄로만 알았던 그녀가 내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울다가 간 이후로 나는 항상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에도 나는 어렴풋이, 결혼은 하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면 미선 씨에게 주어야지. 나는 현석이 물건이라도 되는 양 그렇게 생각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미선의 앞에 앉았다.

 

“왜 만나자고 했어요?”

 

그녀는 짜증스러움을 굳이 감추려고도 하지 않고 나를 몰아세웠다.

 

“청첩장이라도 주시려고요? 출판사도 그만 두신 걸 보니 결혼 준비로 바쁘신가보죠?”

“아니에요. 이사 가서요. 현석 씨랑 헤어지기로 했어요.”

 

나는 방금 전 그녀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제 한번 잘 해보세요.’하고 덧붙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런 비아냥거리는 말투를 쓰기에는 당장 마음이 편치 못했다. 미선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사실인지를 확인하는 눈치였다. 나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해져서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미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식당을 나섰다. 지금쯤 미선은 분명 현석에게 확인 전화 따위를 걸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핸드폰 배터리를 빼 놓았다. 내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너는 변덕이 심해.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 엄마가 나를 힐책하는 소리가 바로 곁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엄마는 교회에 성실하게 나가지 않는 나를 항상 그런 식으로 탓하고는 했다. 어렸을 적, 아버지와 이혼한 엄마가 당장 생계가 막막해졌을 때 교회에서 이것저것 생필품을 얻어다 쓴 이후로 엄마는 열렬한 신도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엄마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목을 잡아 빼고 설교하듯이 ‘너는 하나님의 이치를 알아야 해. 얼마나 자비로우시니. 또 교회가 얼마나 좋은 곳이냐. 약자에게 너그러운 그런 곳이 또 있을 줄 아니? 우리가 교회에 도움을 많이 받았잖니. 은혜를 잊지 말아야지.’하는 말을 입버릇처럼 할 때에는 괜한 거부감이 확 치밀었다. 약자를 위한 곳, 하고 나는 한번 읊조려보았다. 물론 엄마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나는 정말 엄마의 주장대로, ‘아무런 이유도 없이 변덕만 심한’사람인 것이다.

언제인가 불안증을 엄마에게 호소했을 때도, 엄마는 그것을 교회와 결부시켜 생각하는 끔찍스런 세심함을 보여주었다. ‘네가 교회만 꼬박꼬박 다녀봐라, 그깟 불안증은 확 없어질게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교회엘 가서 그 투박한 나무 의자에 가만히 앉아서는 높은 천장 위에까지 퍼져나가는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있노라면 그 불안증은 더욱 심해지곤 하는 것이었다. 그 불안증이라는 것을 굳이 설명하자면, 험악하게 생긴 얼굴의 사내가 금방이라도 나에게 달려들어 목덜미에 칼을 들이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것은 내가 생각해봐도 우스꽝스러운 상상이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그런 상상을 쉽사리 말하지 못했다. 우스꽝스러울뿐더러, 상대를 잘못 짚어 말했다가는 당장 정신병원에 처넣어 질 위험성이 다분한 생각이었다. 그 불안증이 정확히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찾아왔는지 나는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한 자리에 오랫동안 앉아 있을 수 없게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어서, 나는 나에게 수없이 쏟아지는 산만하다는 소리를 감수해야만 했다. 내 성격을 결정짓는 변덕스러움과 산만함은 그 불안증으로 인해 자연스레 따라온 것이었는데, 나는 변명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것들을 내 성격을 형용하는 단어로써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 단어들이 이제는 현석과 헤어지는 데에 있어 정당방위로 작용하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예의 그 불안증이 확 치밀어 정신이 아찔해졌다.

 

 


현석과 헤어지기로 마음을 먹은 것에 무슨 이유를 달아야 할지 아직도 막막하다. 현석의 전화는 일부러 받지 않는다. 우선 이사를 한 다음에 그에게 헤어지자고 통보를 할 셈이었다. 불같은 성격인 그는 내가 ‘헤어지자’고 말할라 치면 우선 만나고 보자며 무턱대고 집으로 찾아올 것이고, 나는 그런 상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곤란해진다. 그를 보지 않으며 천천히 생각하고 싶었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현석과의 일을 미선에게 먼저 말해 버린 것이었다. 나는 어쩌면, 무턱대고 찾아올 그가 부담스럽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미선의 연락을 받은 현석이 내가 저지할 수 없게끔 무턱대고 나를 찾아내 주었으면 하는 희망을 가졌던 것 같다.

여기저기 크고 작은 꾸러미가 널려있어서 집은 꼭 피난민수용소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마땅히 짐이랄 것도 없기 때문에 포장이사를 마다하고 일일이 수고를 하고 있는 터였다.

손에 닿는 물건 하나하나에 현석과의 추억이 배어있었다. 보온병을 상자에 챙겨 넣는데 핑 눈물이 돌았다. 맨 처음 만났을 때, 나에게 종이컵을 내밀던 그.

 

-요즘 날씨가 춥죠?

 

그가 호의적이게 웃었다.

 

-네, 고마워요.

-진희 씨라고 했죠? 제 친척 동생이랑 닮았네요. 무척 예쁜 앤데.

 

쑥스럽게 웃으며 대화를 이어나가는 그에게 호감이 가서 나는 대답했었다.

 

-현석, 이름이 좋네요. 제가 알던 목사님이랑 닮으셨어요.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정말로 그랬다. 현석은 내가 어렸을 적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과 닮아 있었다. 목사님과 닮았다는 말에 현석은 기분 좋은 듯 웃어보였다.

같은 출판사에서 만난 그는 싹싹하고 성실했다. 매일 보온병에 커피를 싸들고 와서 나에게 한잔씩 주고는 했었다. ‘목사님을 닮은’ 그는 정말로 친절했다.

청혼을 하던 그의 목소리가 연거푸 들려온다.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집 앞까지 나를 바래다주겠다고 나선 현석에게서 평소와는 다른 것을 느꼈던 내 육감은 과연 소름끼치도록 정확했다. 집까지 얼마 남지 않은 골목에서 그는 갑자기 나를 멈춰 세웠다. 그의 얼굴이 가깝게 다가옴과 동시에, 그의 손은 답답한 무게감으로 내 어깨를 짓눌렀다. 나는 내 몸이 비라도 한바탕 맞은 것처럼 바들바들 떨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예감이었는지, 본능적인 거부감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현석에게 거부감 같은 것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그의 입술이 닿아오는 것을 느낀 순간에 나는 얼른 그를 뿌리쳤다.

그는 이제 당황스러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예전에도 몇 번 내 쪽에서 그를 뿌리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 그는 무안함을 감추기 위해, 목이 마른다거나 배가 고프다거나 하는 다른 화제로 유연하게 넘어가는 능력을 보였지만 그날만큼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대뜸 그가 청혼을 해 온 것이었다.

 

-나랑 결혼해 줘.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더듬거리며 생각할 시간을 요구했다.

 

-내가 싫으니?

 

그는 처량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게 아냐.

 

그 말 만큼은 정말로 진심이었다. 현석은 감탄이 나올 정도의 인내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말 믿을게’ 하고 그는 웃어보였다. 그 이후로 현석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소와 같이 연락을 해 왔지만, 나는 일부러 현석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확실히 대답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작용하고 있었다.

현석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를 정말로 사랑한다. 그도 내가 사랑하는 것만큼 나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 현석은 나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키스 이외의 것을 나에게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현석의 손이 나를 붙들 때면 설명할 수 없는 불안함이 치밀어 오르는 것이었다. 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현석을 밀쳐버리고는 했다. 이런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본다면, 나는 정말로 빼도 박도 할 수 없는 변덕쟁이인 것이다.

식기 정리를 끝내고 책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책을 정리하다가 책장 깊숙한 곳에 있는 일기장을 발견했을 때 나는 반가워서 탄성을 질렀다. 살짝만 만져도 먼지가 묻어나는 공책에는 ‘일기’와 ‘가화 초등학교 5학년 박세지’가 서투른 글씨로 공책의 앞쪽에 또박또박 적혀있었다. 나는 갑작스레 맞닥뜨리게 된 초등학교 때의 일기를 놀라움에 젖어 펼쳐보았다. 온갖 사소한 일들이 진지하게 적혀있었다. 날짜를 채우기 위해 간단한 문구로 끝맺어진 일기들도 있었다. 선생님의 사인이 없는 것으로 보아 검사를 맡기 위해 쓰던 일기는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짐 꾸리기도 잊어버리고 일기 읽기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몇 장 넘기고 나니 갑자기 한 장을 가득 메운 빽빽한 글씨가 나를 덮쳐왔다. 절반쯤 읽은 후였는데, 그 앞선 절반의 일기에서는 발견 할 수조차 없었던 분량이었다. 나는 불안하게 떨려오는 글씨를 바라보면서, 막연한 긴장감에 가슴 두근거렸다. 마른침을 삼키고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금껏 꿈에서나 있었던 일 정도로 몽롱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일을 초등학교 5학년 때의 내가 심각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4/10

오늘은 부모님이 여행을 가서 혼자서 교회에 갔다. 부모님이 교회에 빠지는 날에도 나는 어김없이 교회를 다니는데 엄마는 그런 나를 많이 대견해하신다. 교회 바깥으로는 넓은 공터가 있다. 오늘은 예배 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나는 공터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오늘따라 텅 빈 공터를 바라보면서 나는 무료하게 앉아 주위의 잡초를 뜯었다. 뚝, 뚝, 잡초가 내 손에서 힘없이 나가떨어졌다.

갑자기 누군가가 내 손목을 잡아끄는 것을 느끼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목사님이 웃으면서 내 앞에 서 있었다. 조만간 시골의 작은 교회로 내려간다는 목사님이었다. 세지 오늘 엄마 아빠랑 안 왔니? 목사님이 물었다. 나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오늘은 저 혼자 왔어요. 그렇구나, 착하네. 목사님이 내 손목을 잡더니, 나를 끌고 공터의 구석 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나는 목사님이 나를 데리고 어디를 가시는지 영 알 수 없었다. 내가 나쁜 짓을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터 구석까지 나를 끌고 온 목사님은 자기의 얼굴을 내 얼굴에 바짝 가깝게 하더니 나를 세게 붙잡았다. 목사님의 손에 붙잡힌 어깨가 불에 덴 듯 아파왔다. 손목을 잡혔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목사님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더니, 목사님의 혀가 재빠르게 내 입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끔찍스런 기분을 느꼈다. 목사님의 혀가 사납게 내 입을 휘저었다. 입천장이 벗겨질 것만 같았다. 목사님의 두 손이 내 온 몸을 잡아 뜯듯이 쥐어 잡았다. 나는 죽을 것만 같았다. 그 긴 시간이 지나고, 목사님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나는 얼이 빠져서 목사님을 바라보았다. 꿈인 것만 같았다.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잡초가 되어서 꺾여나간 듯한 느낌이었다. 목사님이 아니라 목사님과 닮은 아저씨일 것이다. 하나님! 하나님이 왜 나를 지켜주시지 않았을까. 나는 뒤늦게 하나님을 찾았다. 나는 교회에 들어가지 않고 공터에 앉아서 울었다.


4/15

오늘은 학교에서 성교육을 했다. 남자와 여자가 접촉하게 되면 아기가 생기게 돼요. 선생님이 설명했다. 나는 순간, 목사님을 닮았던 그 아저씨를 떠올렸다. 아기가 생겼을 수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의 혀가 휘젓고 간 입이 쓰라려왔다. 정말로 아기가 생겼을 수도 있다.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정말 아기가 생겼으면 큰일인 것이다. 정말로 큰일이다.

여고생이 화장실에서 아기를 낳았다는 뉴스를 보고 나는 더 불안해졌다. 여고생은 아기를 낳은 후에 목을 매어 자살했다는 것이었다. 엄마가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요즘 애들이란. 엄마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 아저씨가 눈물나도록 미워졌다. 차라리 나를 납치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아기를 만들게 하다니! 납치보다도 훨씬 더 끔찍한 일이다. 아기를 가진 것은 정말이 된 것이다.


나는 그 심각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문장을 채 다 읽기도 전에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기라니!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어렸을 적에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아무도 정확히 알려주는 사람이 없으니 키스만 해도 아기가 생기는 줄로 알 수밖에 없다. 그래도 그때부터 성교육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그나마 교육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성교육이라고는 없었던 예전까지만 해도, 아이들은 모두 ‘엄마와 아빠가 손을 잡고, 별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면 아기가 생긴다.’고 알고 있는 것이 정상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면 결코 어린 나이는 아니지만, 남자와 여자의 교합을 이해하기에 적합한 나이도 아닌 것이다. 한 장을 넘겼다.


5/25

한동안 교회에 가기가 무서워서 가지 않았다가, 오늘에서야 엄마와 같이 교회엘 갔다. 엄마는 왜 갑자기 어리광이 늘었냐고 나를 타박했다. 나는 그 아저씨가 멀리서 나를 바라보는 것을 보았다. 아저씨는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나는 하얗게 질려서 잡고 있던 엄마의 손을 끌었지만 엄마가 반응했을 때 아저씨는 이미 가고 없었다. 아저씨가 금방이라도 억센 손으로 내 손목을 잡고, 그 구석으로 끌고 갈 것만 같았다. 아기를 또 가지는 것은 안 된다.


어린 나는 그 목사님을 ‘목사님을 닮은 아저씨’라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목사님은 이미 시골로 내려갔을 날짜였다. 환각을 본 걸까. 더 이상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는 쓰여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목사님이 언제 시골로 내려갔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더욱이 너무 오래 전의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정말로 그 사람이 목사님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문득 현석에 대한 일을 다시 생각해냈다. 내가 그를 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알게 된 지금이라면, 그에게 사과하고 청혼을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어렸을 적 상상에서 온 단순한 노이로제라면 그에게 솔직히 말하는 방법도 있었다. 나는 우선 일기를 끝까지 읽어보기로 했다. 어렴풋이 그때의 일이 떠오르고 있었다.


6/2

배가 불러오는 것 같다. 조금만 먹어도 배가 크게 부풀어 오르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예전보다 배가 더 나왔다. 그건 확실하다. 정말로 아기를 가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아줌마들이 그러는 것처럼 남산 만하게 나오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면 아기가 들어가 있을 만도 하다. 가족들은 전혀 알아차리질 못하고 있다. tv프로그램에서 아기를 낳는 장면을 본 이후로, 나는 화장실에 갈 적마다 두려움에 몸을 떤다. 대변을 볼 때에 특히 그렇다. 힘을 주고 있으면, 변 대신 아기가 나올 것 같다. 변기를 내려다보기가 무섭다. 변기 물 위로 아기가 떠 있을 것만 같다. 나는 매일 그런 상상을 한다. 나는 매일 눈을 질끈 감고 물을 내리기도 하고, 치미는 궁금증에 살짝 변기를 내려다보기도 하지만 어느 때나 아기는 없다. 아기는 아직 나오지 않는다.

 

6/23

학교 성교육 시간에 나는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다. 아기는 적어도 열 달은 되어야 태어난다는 것이다. 나는 괜한 걱정을 하고 있던 것이었다. 우선은 한시름 놓았지만, 나는 내 다이어리에 있는 다음 해 달력에 열 달 후 날짜를 표시해두었다. 열 달까지는 아직 많이 남았다.


7/1

“플라스틱은 썩지 않는 점이 문제에요. 썩는데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린답니다. 오랫동안 남아서 환경에 문제를 끼치게 되죠.” 수업시간까지 끊임없이 따라오는 아기에 대한 걱정 때문에 선생님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던 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누군가가 선생님에게 질문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학교 뒤뜰에 뽑아 놓은 잡초들이 며칠째 계속 있던데, 그것도 플라스틱처럼 안 썩어서 그런가요?” 선생님도 반 아이들도 일제히 웃기 시작했다. 뒤뜰 청소 담당인 아이가 귀까지 빨갛게 물든 얼굴을 푹 숙였다. 선생님은 ‘잡초가 얼마나 빨리 썩을까’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내가 뽑았던 수많은 잡초들은 그 잡초들이 썩어 없어지는 만큼이나 빠르게 내 머릿속에서 지워져있었다. 나는 순간, 교회 공터에서 맞닥뜨렸던 아저씨의 일을 떠올렸다. 그때의 나는 내 꼴이 잡초인 것만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잡초에 대한 기억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고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평생 썩지 않을.


7/10

학교 친구들이 아기를 가졌느냐고 물어 올까봐 겁이 난다. 당장이라도 엄마가 아기를 가졌느냐고 물어올 것 같다. 나는 아직 누구에게도 아저씨의 일을 말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껏 아기를 가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기를 가졌을 때의 느낌이 어떤 건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아기에 관한 책자를 보거나 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지금까지도 내가 아기를 가지지 않은 것이라고만 믿고 싶다. 내가 아기를 가진 것에 대해 확실하게 해두고 싶지 않다. 자꾸만 속이 거북하고, 아, 아기를 가진 것은 확실하다. 나는 너무도 무서워서 학교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엉엉 울었다. 서럽게 울었다. 나도 뉴스에 나온 여고생처럼, 학교 화장실에서 아기를 낳게 될까. 너무 무섭다. 나도 아기를 낳은 다음에는 목을 매달고 죽어야 할까. 아기를 낳을 때의 기분은 어떨까. 나는 요 며칠간 그런 생각 때문에 화장실에 들어가 앉아 많이 울었다. 일기를 누군가 볼 것만 같아 쓰기가 무섭다. 그래서 한동안 통 쓰지 않았다. 이제 아기를 낳을 때까지 일기는 쓰지 않을 것이다.


정말로 일기는 끊겨 있었다. 다음 페이지에는 훨씬 시간이 지난 후에나 썼을 법한 문장이 하나 있었다. 표시해두었다던 그 한 달 후였다.


2/10

키스를 하는 것만으로는 아기가 생기지 않지만, 나는 절대 낳을 수 없는 아기를 몸속에 가지고 있다.


얼마 남지 않은 뒷장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나는 허전한 기분에 일기장을 한 장 한 장 다시 넘겨보았다. 어렴풋이 기억은 하고 있었지만, 거지반 잊고 있었던 일이었다. 어렸을 때의 그 끔찍스런 기억이 아직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나는 담담했다. 성폭행을 당한 것도 아닌데. 나는 내 지난 기억에 대해서 숫제 억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저 상상력이 지나친 어린 나이에 하곤 하는 상상의 하나일 뿐이었다. 현석의 손이 내 어깨에 닿았을 때의 그 꺼림칙한 기분이, 내가 사랑하는 그의 애정 표현이, 어렸을 적 낯모르는 아저씨에게서 느꼈던 불안과 같음을 알았을 때에는 공연히 짜증이 치밀었다.

분명히 다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읽지 않은 부분이 나왔다. 두 장이 겹쳐 있었던 모양이었다. 날짜조차 없는 그 페이지에는 짧은 일기가 한 편 적혀 있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다. 엄마는 시장엘 갔다. 벨이 울린다. 불안하다. 그 아저씨일 것만 같다. 문 앞에서 웃고 있겠지. 문을 부수고 들어올지도 모른다. 그리고서는 그 억센 손으로 날 거머쥐겠지. 나는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다.


불규칙적으로 쓰인 글씨에서 불안함이 가득 배어나왔다. 그때 자지러지듯 벨이 울렸다. 집에 찾아올 사람이라고는 그밖에 없었다. 현석임에 분명했지만, 나는 현관 앞까지 걸어가서 누구세요, 하고 확인할 수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현관 앞에는 아저씨가 서 있을 것만 같다. 문을 열면, 기분 나쁜 웃음을 얼굴에 그리고 서서는 그 억센 손으로 당장이라도 내 어깨를 으스러지게 잡을 것 같다. “집에 없니? 세지야? 집에 없어?” 현석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몸을 잔뜩 움츠렸다. 그를 사랑하지만, 나갈 수 없다. 나는 내일 이사를 갈 것이고, 전화번호를 바꿀 것이고, 직장을 옮길 것이고, ……결혼을 하지 않을 것이다. 눈물이 났다.

바깥이 조용해졌다. 현석은 돌아간 모양이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핸드폰 배터리를 다시 끼웠다. 현석의 음성 메시지가 남아있었다. 핸드폰을 통해 현석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세지야, 미안해, 내가 미안해. 네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미선이한테 네가 이사 간다는 소릴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날 피하려고 그러는 거니?”

 

메시지 속의 현석은 잠시 말이 없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듯한 그의 침묵에 나는 다급하게 대답하고 싶었다. 아니,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내가 뭔가 잘못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할게. 사과하면 괜찮은 거지? 천천히 생각해도 괜찮아. 결혼이 부담스러우면 조금 더 시간을 줄게.”

 

넋두리에 가까운 현석의 애원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메시지가 끊기는 대로 현석과도 영영 끊길 것만 같다. 나는 그 순간 애처로울 정도로 나에게 애원하고 드는 내 진심을 알아채었다. 나는 현석을 미선에게 주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그와 결혼하고 싶다. 나는 그를 놓고 싶지 않다. 나는 그를…… 눈물이 고이기 무섭게 툭툭 떨어졌다. 나는 전화 건너편에 정말로 현석이 있기라도 한 양 급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나도 미안해요.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왜 이러죠. 현석 씨를 사랑해요. 정말 사랑해요. 그런데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왜……”

 

 

 


잠깐이야기.

‘이번 이야기글 게시판에 글 5개 이하면 세부평’ 이라는 꿈바라기님의 말에, 저까지 다섯인 줄 알고 매우 기대했는데 알고보니 저까지 여섯이네요(..)

 

이제 개학하고 나면 글을 쓸 시간이 전연 없을 것을 생각해서, 남은 2월 달만큼은 꼬박꼬박 써내고 싶었는데 마음대로 안 되었네요. 여름방학 때나 다시 시간이 날까 모르겠습니다. 감사했습니다.

허공1
허공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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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습니까?”  “작가님 동생은 서에서 우연히 뵈었습니다. 전 사실 부당한 이유로 여기에 왔다고 말을 했죠. 그러니까 김 작가 동생이 절 유심히 보더군요. 경찰서야 뭐 워낙에 자기는 무죄라고 악을 써 대는 사람들이 많지만, 전 아무래도 조금 달랐겠지요. 제가 동생 분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고도 남습니다.”                       정은 말을 멈추고 절실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절 믿어 주시겠습니까?”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누군가 믿어주기만 하면 됩니다. 제가 정당하다는 걸 말입니다.”  그의 얼굴에서는 부끄러운 빛을 일절 찾을 수 없었다. 나는 그 순간, 내가 정말로 정의 자서전을 맡아 써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는, 이를테면 생각의 전환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좋은 작품의 첫 번째 요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한창 베스트셀러를 쓰며 이름을 날리고 있는 그의 친구들이 매번 그에게 설교하던 말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설교가 정의 당당함과 정확히 일치함을 깨달았을 때 나는 나에게 찾아 온 기회가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생각을 전환하라. 내 눈에 비친 정은 진정 생각을 전환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나쁜 놈이라고 매도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친일에 대한 긍정적 시각이라니 그보다 더한 참신성은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생각하며, 됐습니다, 됐습니다, 한 번 써 보죠. 쾌재를 부르며 그의 자서전 대필에 응했다. 정(丁)의 정의(正義)를 기술하는 것이 내게 맡겨진 일이었고, 나는 그것에 초입부터 구미가 돌았다.  내가 그의 유년시절 부분을 완성했을 즈음 정은 나를 한 번 더 찾아왔다. 나는 정의 방문을 내심 바라고 있었고, 그가 방문하지 않는다면 나라도 한 번 그를 방문해 볼 작정이었다. 그의 자서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정의(正義)에 대해 그가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그런 것이야 임의로 써도 될 일이었지만, 그를 떠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다. 이를테면, 자서전을 대필 한다는 것 자체가 그가 외치려 하는 정의란 것에 합당하지 않은 방법이었다. 나는 정에게 지금까지 쓴 것들을 추려 보여주면서 그에게 은근히 그런 것들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부끄러워 할 것 없다. 다들 살려고 아옹다옹하는 게 세상이다. 너희 할아버지 덕으로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잘 살지 않니?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나는 동아리에 가입했다. 그 곳에서 내가 만난 후배를 나는

  • 허공1
  • 2008-12-14
성장 토끼

  .   “오오오오~ 그럼 진도 나간 건?”  “최대는 한, 100일 갔었고, 최소는 하루?”   사랑해, 하고 아이들이 다 듣는 앞에서 당당하게 말하던 남자애가 K는 그렇게 싫지만도 않았었다. 분필 가루가 채 다 닦이지 않아 희뿌연 칠판에 아이들이 자신과 남자애의 이름을 써 놓고 시시덕거리는 모습을 윽박지르면서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던 것이 떠올랐다. K는 꽤 많은 시간을 그 관계에 할애했고, 그렇게 해서 즐거웠으며, 남자애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 한 뒤로 퍽 많은 시간 몸살 앓듯 슬픔에 겨웠었다.    “네가 예뻐 보이는 줄 아니?”  K는 말문이 탁 막혀서 J를 바라보았다. J는 막무가내였다.  “초콜릿 사러 가는데 같이 가자고!”     K는 웅크리고 있는 토끼를 바라보았다. J가 준 것이었다. 토끼는 목에 작은 금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토끼는 예민하니까 잘 돌봐줘야 해. 너, 토끼가 뭘 먹는 줄 알아? 그냥 아무 풀이나 뜯어 먹이면 되는 거 아냐? K가 묻자 J는 버럭 성을 냈다. 그럴 줄 알았어! 너 확실히 알아 둬. 얘는 아직 어린 애야. K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나이를 많이 먹은 토끼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주 어린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K의 눈에 작은 동물은 다 그렇게 보였지만, 토끼는 유별나게 크다가 만 것 같은 모양새였다. K는 토끼라는 동물에게서 과도기의 동물들이 보여주는 일종의 변덕스런 기미를 느꼈다. 토끼는 과도기에서 멈춰 성장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J가 일러 준 그 까다로운 토끼 사육법에 대한 일장 연설 때문이기도 했다.   토끼가 말이야, J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말한다. 토끼는 예민해서 자기 새끼도 죽인대. 야, 그게 뭐야, 끔찍하게. 정말 그렇대. 문득 J의 눈동자가 문득 토끼의 그것과 같이 축축하게 젖어든다. 앞으로 그 토끼에 대해 나한테 한 마디도 하지 마. 알았지? 토끼가 죽었어도 나한테 말하지 마, 응? 난 너한테 토끼를 준 걸 잊을 테니까. K는 J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J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너 지금 뭐하니?”  .   “정말로?”  “아니, 아직. 그래도, 나 믿어. 예전에 걔가 그랬거든. 걔네 부모님도 학교 다니면서 걔를 낳았다고. 할머니 손에서 자랐대. 부모님이랑 같이 있어 본 기억이 거의 없다는 거야. 그러는데 걔 눈에 눈물이 핑 도는 거 아니겠어? 내가 그걸 확실히 봤다니까. 진짜로 봤어. 금방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더라니까. 그런 애가 모르는 척을 하겠니. 내가 말하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그럼. 요즘에는 얌전해.”   토끼의 내력을 털어놓은 뒤로 J는 전화를 끊지 않고 수화기를 든 채 조용하다. 전화를 내려놓으려 하는데 J의 목소리가 발목을 붙든다.   “왜 그

  • 허공1
  • 2007-08-26
결혼사진

 .   “오오오오~ 그럼 진도 나간 건?”  “최대는 한, 100일 갔었고, 최소는 하루?”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애써 기억해내려 노력하지만 않는다면 지난 일들을 잊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J의 일이 터진 지금 K는 담담할 수 없었고, 애써 담담해지려고 하면 예전처럼 잊혀지기는커녕 그 지난 기억이라는 것이 불쑥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사랑해, 하고 아이들이 다 듣는 앞에서 당당하게 말하던 남자애가 K는 그렇게 싫지만도 않았었다. 아이들이 분필 가루가 채 다 닦이지 않고 희뿌연 칠판에 자신과 남자애의 이름을 써 놓고 시시덕거리는 모습을 윽박지르면서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던 것이 떠올랐다.  K는 수많은 책과 영화에서 애초에 사랑이라는 것은 한 때 지나가고 마는 감정이라는 것이라며 구구히 떠드는 것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터였다. 그러니 자신에게 찾아왔던 그 감정도 사랑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리라. 분명 K는 꽤 많은 시간을 그 관계에 할애했고, 그렇게 해서 즐거웠으며, 남자애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 한 뒤로 퍽 많은 시간 몸살 앓듯 슬픔에 겨웠었다. 그러나 사랑이었다 생각하려고 해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와중에 들려온 J의 소식은 K의 생각에 쐐기를 박아 넣은 격이었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K는 입을 다물었다. J는 K의 질문에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조심스럽게 손거울의 각도를 조절하며 얼굴을 꼼꼼히 살피었다. K는 얼빠진 얼굴로 J를 바라보았다. J는 파우더로 얼굴을 몇 번 더 두드리더니 뚜껑을 소리 나게 탁 닫았다. J는 어느새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K를 마주 바라보았다. 엇나간 눈 화장이 어설퍼 보였다. K는 겨우 입을 열었다.  “네가 잘 몰라서 그래. 남자애들은 이런 거 좋아해.”    “이거 좀 비싸지 않나?”  J는 말끝을 흐려놓는다. K는 그 다음 말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K는 아직도 어떤 것이 진정한 사랑인지를 정의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것만 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알량한 지식을 J 앞에서 쏟아놓음으로써 J를 상처주고 싶지 않았다. 혹여 K 자신이 모르는 다른 사랑법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었다. 값비싼 초콜릿과 짙은 화장이 다리가 될 수 있는, 그런 사랑.  J는 초조하게 D를 기다렸다. D는 언제부터인가 J와의 약속 시간에 몇 분씩 늦게 나오기 시작했다. 매번 약속 시간 10분 앞서 미리 나와 있던 D였다. 몇 분은 몇 십 분이 되었으며 몇 십 분은 한두 시간이 되었다. 아침에 약속을 잡아 땅거미가 내려앉을 때까지 D가 오지 않은 적도 있었다. J가 기다리다 지쳐 눈물을 쏟은 적이 손가락으로 셈을 해야 할 정도로 잦아졌다.   어쩌면 D는 다시 자신에게 관심이 생긴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고, 지금껏 소홀했던 것에 갑작스레 사과를 할런지도 모를

  • 허공1
  • 2007-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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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읽었습니다. 현석이 “집에 없니? 세지야? 집에 없어?” 라고 하는 부분에서 목사와 겹쳐서 섬뜩했어요. 일기의 문장이 좋은 게 흠이라니!

    • 2007-04-30 00:4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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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이 완성 되었습니다.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http://blog.munjang.or.kr/document/39871

    • 2007-02-27 22:4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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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돌이/ 일기에 대해서는 끝까지 걸렸습니다. 퇴고와 실력이 동시에 부족했네요. 평 감사합니다! +우행시 이야기에 슬퍼졌습니다. 도서관에 예약해놓고 한달째 기다리는 중인데 소식이 없네요(..)

    • 2007-02-27 22: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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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이야기가 청혼한 남자를 회피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저는 아쉽다고 봅니다... 이야기 처음과 마지막까지 심정의 변화는 없었고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이 제겐 정말 아쉽다랄까요. 사실 그냥 '나는 지난 날의 아픈 기억때문에 아직까지 괴롭다'나 '한 사람의 악행이 한 사람을 평생 고통스럽게 한다.' 이런거 말고는 다른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여자의 고통이 감수성 깊은(???)저를 우울하게 만들 정도로 잘 느껴졌습니다. 허공 화이팅 ^ㅡ^

    • 2007-02-27 19: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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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 일단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초등학생 5학년의 일기치곤 문단의 구성이라든지, 문장력, 어휘력이 상당수준입니다. 내 개인적인 의견으론, 일기는 보통 초등학생들처럼 단순하게 쓴 후, 주인공이 일기를 읽고는 회상하며 그때의 고통을 성인의 생각으로 묘사하는 게 어떨까 합니다.

    • 2007-02-27 18:58:23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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