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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이들의 미술관

  • 작성자 時去名
  • 작성일 2007-06-22
  • 조회수 453

  햇살이 창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서면 산뜻한 기운이 공기를 어루만지고 창 밖으로는 꽃잎이 막 겨울에서 벗어나 수줍은 미소를 지어 봄의 향취를 더한다...... 이런 낭만적인 곳을 이 세상에서 누가 가기를 마다할 까만은 이곳에 있는 것은 나와 책상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짓으로 둘러싸인 합법적인 사기’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원래 이런 곳은 아니지만 이틀 전부터 이 모양 이 꼴이다. 나야 뭐 사람이 없으니 편해서 좋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의 존재이유가 한국은행이라는 곳에서 만든 그 웬수 같은 종이(혹은 금속)을 취하기 위해서라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다.
  대체 왜 사람들이 오지를 않는 지 알 수가 없다. 물론 간간히 오기는 하지만, 전보다는 현저히 줄었다. 그나마 내가 아는 거라곤 이틀 전에 여기에 있던 한 사람이 어디를 좀 갔다는 것 밖에는 없다. 설마 그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다. 솔직히 평소에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그 사람에 비해 내가 나쁠 것도 없다. 하지만 텅텅 비어있는 이곳을 보고 있자니 있는 걸지도.
  이렇게 내가 낭만적인 곳에서 비낭만적으로 있게 된 사연은 2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날은 가을색으로 물든 나뭇잎이 나뭇가지에 만연하여 눈에도 발에도 밟히는 10월이었다. 막 이사를 끝낸 나는 짐정리는 내일로 미루고 일단 배를 채우기 위해 밖으로 나와 식당을 찾아 여유롭게 해매고 있었다. 그 때는 그렇게 급하게 배가 고프지가 않아, 처음 보는 낯선 풍경에서 느껴지는 낭만에 한껏 취해 본래의 목적이었던 식당을 찾는 것 마저 잊어버린 상태였다. 내가 한발 한발 천천히 움직일 때마다 나뭇잎은 나의 발에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데 어찌 식당에 가겠는 가.
  그렇게 이곳저곳을 누비던 나는 한 건물 옆을 지나다 무의식적으로 멈춰 섰다. 그 때의 감정이나 멈춰선 이유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단 하나다. 뭔가에 홀렸다. 그 건물에서 풍겨오는 분위기에 홀린 건지 아니면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한 아리따운 여자에게 홀린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중요한 건 내가 그곳 문을 열고 성큼 들어갔다는 것이다. 나는 은근히 낯을 가리는 편이라 처음 보는 가게에 들어설 때는 신중하게 들어가는 편이다. 무슨 가게인지는 당연히 숙지하고 뭐라고 말하고 뭘 살 것인지도 생각하며 들어간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 생각 없이 뭐하는 곳인지도 심지어는 들어가도 되는 지도 신경 쓰지 않고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맨 처음 내 눈앞에 놓인 것은 요상하게 생긴 물건이었다. 내 허리까지 정도 높이의 물건이었는데, 까만 돌을 속이 빈 반구형으로 파놓았으며 중간에 구멍이 뚫려 있었고 맨 위에는 동전을 넣는 것 같은 곳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500 x 4’라는 문구가 보였다. 그래서 나는 주머니에서 1000원짜리 지폐를 두장 꺼내서 옆에 있는 동전교환기에 넣고 동전으로 바꾸어서 집어넣었다. 그러자 500원짜리 동전 4개는 그 반구 위를 빙글빙글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이 구르더니 중간의 구멍으로 퐁 빠졌다. 그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두 번째 문이 열렸다.
  내가 그곳에서 본 것들은 내가 당혹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곳에는 이름모를 그림들과 조각 등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처음 보는 것들뿐이었다. 가만히 있기도 뭐해서 옆에 있는 그림을 보고 있는 데 그 여자가 다가오며 말했다.
  “작은이들의 미술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에?”
  그 여자는 아주 활짝 웃으며 손을 번쩍 들고 큰소리로 말했다. 순간 나는 또 다시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여러모로 안정감을 느끼기 힘든 곳이었다. 하지만 그 여자가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자세히 볼 수는 있었다. 그녀는 진한 갈색 머리에 빛나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그 눈과 그 몸짓 하나하나가 ‘난 너무나 순수해요. 혹은 순진해요. 호호호!’라고 아우성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멍하게 쳐다만 보고 아무 말도 안하면 이쪽에서 무안하다고요.”
  “아, 이런 실수를 했군요. 하하.”
  말을 그렇게 하면서 아직도 내 눈은 반쯤은 풀린 상태였다. 여러 가지 예술품들과 이것도 역시 유명치 않은 작곡가 것일 같은 노래 그리고 그녀가 만들어내는 포근한 자장가에 취하지 않을 사람이 있다면 분명 인간이 아닐 것이다. 아무리 감정이 메마르고 잔인한 인간이라도 이 곳에서만은 빈 독에 물이 담기듯이 감정이 충만해질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던 나의 풀린 눈에 정신이 확 들게 하는 커다란 소리가 갑자기 귀청을 때렸다.
  “관람객 여러분은 다음 장소로 이동하지요!”
  그녀가 어느새 메가폰을 들고 크게 소리치며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관람객이라고는 나 밖에 없는 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이름이 작은이들의 미술관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다른 미술관에 비해서는 작고 아담했다.(손님들 수마저 아담했다.) 평소 미술관이라면 학교 방학숙제로 딱 한번 그것도 학교랑 미술관이랑 짜고 하는 거라고 궁시렁 대면서 가본 적밖에 없었지만 이곳이라면 천번, 만번이라도 가라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돈과 시간만 충분하다면 말이다.) 그녀는 몇 개의 그림들을 지나 한 그림 앞에 서서 다시 메가폰을 잡았다. 그 그림은 단순한 정물화였다. 앞서 지나친 몇 개의 그림보다도 더욱 볼품없고 인상적이지 못한 그림이었다. 나는 평소에 정물화나 초상화에 대해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림에 아무런 감정이나 생각이 담겨있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과연 그녀가 무슨 설명을 할지 궁금했다.
  “이 그림은 보시다시피 사과와 물병 그리고 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사과 밑을 자세히 보시면 살짝 초록색으로 칠해져 있는 것이 보이는 데 이건 뭔가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실수라는 것을 화가를 심문하여 겨우겨우 알아내었습니다. 가끔씩 이걸 음영의 표시나 뭔가 뜻이 담겨있는 줄 착각하시는 데 잘못된 거랍니다.”
  “하하하, 설명이 특이한데요.”
  “역시 이곳에는 처음이시군요. 한 번이라도 와본 사람은 당신처럼 홀린 듯이 들어오지도 입장료 내는 곳에서 고민하지도 들어와서 마치 이곳이 미술관인줄 몰랐다는 듯이 멈춰 서지도 않는 다구요.”
  “하하, 상당히 가차 없는 예상인데요? 이거 모두 들켜버렸군요.”
  “아! 그리고 저를 보고 멍하게 눈동자를 반쯤 풀지도 않아요.”
  “그건 나름 정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말이죠......” 
  “자~ 관람객 여러분 다음은 저쪽 조각상으로 이동하지요!”
  “어? 저기 궁금하지도 않아요!”
  “늦게 오시는 관람객은 챙기지 않습니다!”
  이 여자 설명하는 방법도 방법이지만 성격은 더욱 특이하다. 보통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반자동으로 물어보지만 이 여자는 강적이었다. 일말의 미련도 없이 다시 메가폰을 잡고 저만치 걸어가고 있다니.
  그 뒤 나는 하루 종일 그림에 얽힌 이야기나 그녀가 그림을 보고 느낀 감정이나 지어낸 이야기 혹은 이 조각상을 사올 때 흥정을 한 이야기 등을 들었다. 이 새로운 설명 방법은 정말로 재미있었다. 보통 예술 작품을 감상 할 때는 예술가와 나 사이에 작품이 있지만 이 방법은 내가 예술가와 동등한 입장에서 즐기게 해주었다. 개인적으로 이런 게 났다고 생각한다. 괜히 예술사 좀 공부하고 와서 야수파니 사실주의니 말하는 건 꼭 ‘아는 사람만 즐겨라.’라던가 ‘공부 좀 해라, 그래야 조금이라도 그림이 보이는 거야!’라고 압박을 가하는 것만 같았다.
  모든 예술품들을 모두 보자 그녀는 나에게 커피 한잔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자신은 탁자에 손을 모아 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무신론자인데다가 평소에 기독교 등을 별로 싫어하는 편이지만 오늘 만은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것보다도 이 커피를 다 마신 뒤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가 더욱 고민되었다. 이대로 나가기에는 너무나 아쉬웠다. 하지만 이미 모두 다 감상했고 내일도 올 수 있으니 이만 가기로 하였다. 그런데 내가 커피를 마시는 동안 그녀의 행동이 뭔가 이상했다. 졸고 있는 것 같이 푹 숙인 머리와 손이 흔들거리는 것이었다. 나는 이상함을 감지하고 그녀를 자세히 보았다. 그러자 진실이 내 눈에 보였다. 그녀는 이미 꿈나라 티켓을 들고 입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대로 가기에는 신경이 쓰여 그녀의 손을 밑으로 내리고 옆에 매고 있던 나의 가방을 배게 대신 받쳐주었다.
  다음날 나는 이삿짐을 정리하기가 무섭게 또 다시 그곳으로 같다. 절대로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의 고질병인 건망증이 한 번 더 그곳으로 갈 수 있는 빌미를 마련해 주었다. 가방을 그냥 그대로 놓고 온 것이다. 그러나 어제보다 더욱 기쁜 마음으로 미술관에 들어선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관람객용 의자에 앉아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나는 아직 천원짜리 지폐 3장이 만원짜리 지폐 1장보다 많다고 믿는 순진한 아이의 그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의 예술품(?) 감상은 거기에서 중단 되었다. 내 뒤로 또 다른 관람객 여러 명이 들어온 것이다. 아마도 가족 전체가 모두 나들이를 나온 것 같았다. 3대가 모두 모여 있는 모습을 보면 절로 흐뭇해 질 것 같지만 지금은 전혀 달갑지 않았다.
  예전부터 내가 별것도 아닌 것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정도일 줄은 나도 미처 몰랐다. 지금 내가 전혀 저 가족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은 단지 자고 있는 그녀가 깨어나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왠지 모르게 그녀를 깨우면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시간보다도 빨리 해결책을 생각해내었다. 바로 내가 가이드를 하는 것이다. 어차피 전문 지식도 필요 없고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작화병과 정상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사나이니까 말이다.
  나는 얼른 손님들에게 뛰어가서 메가폰을 들고 ‘작은이들의 미술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그녀가 나에게 처음으로 하였던 말을 외치고 가이드를 시작했다. 그녀에게 들을 말들을 활용하기보다는 내가 그림을 보고 지어낸 짧은 이야기라던가 느낀 감정들을 관람객에게 설명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역시 사과와 물병과 컵의 어려움은 모든 예술품들을 능가했다. 느낀 감정도 미미할뿐더러 그녀가 해준 이야기가 아니라 모두 오리지널 나의 이야기를 하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잠시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로 시간을 벌었었다. 하지만 결국 재료와 상품 그리고 소비라는 왠지 예술과는 맞지는 않는 것 같은 경제에 대해 말하고 말았지만 오히려 관람객은 만족한 표정이라 얼떨떨하기도 했다.
  그렇게 관람객을 돌려보낼 때까지 그녀는 깨어나지 않았다. 아주 쿨쿨 자고 있었다. 저러다 코고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로. 어떻게 메가폰으로 내가 일부로 악을 쓰며 ‘안녕히 가세요!’라고 말할 때도 미동조차 하지 않고 그녀는 잠을 자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그녀를 그렇게 피곤하게 하는 지 궁금하기도 하였다. 그 때 갑자기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 메가폰 들고 아까부터 소리치던 분 이리로 잠깐 와보십시오.”
  거기에는 인상이 아주 험악하게 생기신 백발이 무성한 노인이 서계셨다. 거기다 아까부터 다 보고 있었다고 간접적으로 말하시며 나를 부르시는 게 전혀 좋은 일로 부르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쭈뼛쭈뼛 노인께 갔다. 노인은 놀랍게도 이 ‘작은이들의 미술관’의 관장이셨고 그녀의 할아버지이셨는데 덤으로 그녀의 이름까지도 알게 되었다. 한시애라고 하는데 그녀에게 정말로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되었다. 혹 이 이름은 지으신 그녀의 부모님은 미리 그녀가 어른이 된 모습을 보고서 지은 것은 아닌지 의심일 갈 정도로 잘 맞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정보에 대한 기쁨도 잠시 관장님의 엄청난 호통이 나의 고막을 찢을 듯이 흔들었다.
  “자네! 누가 이 미술관의 가이드를 멋대로 대신하라고 했나! 하여튼 간에 요즘 젊은 놈들은 우리 손녀 빼고는 모두들 기본이 안돼 있어요! 기본이! 그리고 몰래 우리 미술관의 가이드를 사칭했으면 죄의식이라도 있어야지 유리창이 깨지라고 악을 써대!"
  "그게... 그러니까 제가 나쁜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
  "뭐? 이것봐라 벌어진 입이라고 못하는 말이 없네? 잘못을 저질렀으면 당장 무릅꿃고 빌지는 못할망정 왠 잡설이 그렇게 많아?"
  "으...음"
  내가 한창 관장님의 쉴세없는 호통에 간신히 기절하지 않고 있을 때 나의 유일한 희망이자 구세주인 한시애씨가 막 기지개를 피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구세주가 작금의 사태를 보며 내뱉은 말은
  "헤~ 혼나고 있네요?"
이었다. 그런데 더욱 화가 나고 어처구니없는 것은 나의 대답이었다.
  “아, 그러네요.”
  관장님은 우리 둘의 대화를 보시더니 아예 할말을 잃으신 듯 했다. 그리고 이 때를 놓칠 내가 아니었다. 나는 잽싸게 태이블 위에 있던 내 가방을 들고는 밖으로 도망쳤다.
  “그럼, 내일 봬요!”
  “예~”
  “거...거기 안서!”
  겨우 겨우 공포의 호통 속을 빠져나온 나는 의외로 즐거운 기분이었다. 더 이상 그곳은 나에게 혼란도 뭣도 아닌 즐거운 곳이 되었다. 겨우 2번 밖에 오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난 ‘일년 동안 매일가면 입장료가 얼마나 드나?’부터 계산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 샤워를 하기위해 나의 뛰어난 독창력과 반사 신경 그리고 동물적 감각으로 온수를 맞추고 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저기... 강지환씨 핸드폰이 맞나요?”
  “예, 맞는 데 누구세요?”  “아, 저는 작은이들의 미술관의 가이드예요.”
  “한시애씨?”
  “어? 제 이름을 어떻게?”
  “할아버님께 들었어요. 그런데 시애씨야 말로 어떻게 전화를?”
  “가방 속에 명함이 있던 걸요?”
  “가방이라면 제가 가져왔는데요?”
  “그게 제 가방하고 강지환씨 가방하고 비슷하게 생겼더라고요. 그래서 잘 못 가져가신 것 같아서 전화 드렸어요.”
  “예?”
  나는 얼른 내가 가져온 가방을 쳐다보았다. 아까는 정신없이 도망쳐 제대로 살펴보지 못 했지만 지금 보니 확실히 이건 내 가방이 아니었다. 베이지색이고 어깨 가방까지는 맞는 데 내껀 주머니가 주렁주렁 달린 가방인데 이건 심플한 가방이었다.
  “지금 확인해보니 확실히 잘 못 가져왔네요. 하하. 그럼, 내일 가지러 가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일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오늘 일이요? 아~ 괜찮습니다. 제가 주제넘게 행동한거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것보다 할아버님께서 굉장히 활발하기고 건강하신 분이더군요.”
  “저희 할아버지께서 엄격하신 분이시라 규칙 같은 것에 민감하시거든요. 그리고 제가 어렸을 때부터 제 주위에 있는 남자는 무조건 싫어하셨지요. 저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이겠지만요. 원래 제가 낮잠이 많은 편이라 어느 새 잠들어버렸어요. 원래라면 제가 감사드려야 했을 일인데 죄송해요.”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부럽군요. 저도 그런 분이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저기 내일 시간 좀 되세요?”
  “주말이라 되기는 한데. 왜요?”
  “사실 내일 미술관 정기휴일이라 말이죠. 가방도 드리고 오늘 일에 대한 사과와 감사의 의미로 제가 잘아 는 곳에 혹시 괜찮으시면......”
  “예? 그러실 필요 없는 데. 하지만 식사정도는 제가 대접하고 싶은 데 괞찮을 까요?
  “그럼 오시는 건가요?”
  “예, 일단은. 그보다 식사는 제가...”
  “내일 미술관 앞에서 아침 10시 쯤에 와주세요, 그럼.”
  “여...여보세요?”
  “뚜...뚜뚜..뚜...뚜...”
  역시 특이한 여자이다. 보통은 그 정도로 대접까지는 무리지 않나? 잠깐, 그보다 이거 혹시 데.이.트? 흠... 정말로 그렇다면 뛸 듯이 아니 날듯이 기뻐해야하지만 워낙에 특이해서 말이지. 아니 그보다 목적지를 정확히 말하지 않은 점부터가 수상해. 에이, 모르겠다.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말했지. 확신을 가지고 시작하는 사람은 회의로 끝나고 기꺼이 의심하면서 시작하는 삶은 확신을 가지고 끝낸다고 말이야.’
  대학시절, 철학과를 재학 중이던 녀석이 나에게 해준 말이다. 내가 한가지일을 하기 전에 필요이상의 많은 생각을 하는 것을 알았던 모양이다. 확실히 지금이 그렇지. 내가 지금 할일은 다시 목욕물을 온도를 맞추는 거야.
  다음 날, 난 아침 8시 30분에 일어나는 초 여유를 보여주었다. 뭘 입고 나갈지 고민도 안하고 손에 집히는 것 중 그나마 나은 걸로 걸쳐 입고 밥은 참치 한 캔을 밥에 비벼서 후딱 먹고 머리 감고, 세수하고 나니 이미 타임 오버. 9시 5분이었다.
  내가 한번도 쉬지 않고 전력 질주하면 미술관까지는 30분정도가 걸린다. 그래서 결국 평소에는 100원, 200원에도 목숨 걸던 내가 택시를 타고 말았다. 택시를 타긴 탔지만 머피의 법칙이란 게 하필이면 오늘 강림하여 가는 족족 신호에 걸리고 말았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이 얄미워질 지경이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내려서 뛸까하고 100번도 넘게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기본요금이 너무나도 아까워 결국 9시 30분에 도착하고 말았다. 그런데 나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리따운 한시애가 아닌 종이쪽지 한 장이었다.
  ‘할아버지께서 갑자기 쓰러지셔서 오늘은 안 되겠네요. 가방은 나중에 찾으러 오세요.’
  나는 실망감보다도 걱정이 먼저 들었다. 생각해보니 할아버지께서 쓰러지신 이유가 나한테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나는 가져온 한시애의 가방에서 전화번호를 찾으려고 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모두 예술품에 대한 생각이나 이야기 그리고 찾아갈 화가라던게 적힌 노트들뿐이었다. 그 때 내 눈에 미술관의 전화번호가 보였다. 그리고 제발 한시애가 그것을 해놓았기를 바라며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딱 듣기에도 힘겨워 보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 한시애는 내 예상대로 이곳 전화와 자신의 핸드폰을 연결해 놓은 듯 했다. 그런데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여자 위로해 본적이 있어야지 말이야.
  “강지환입니다. 할아버지께서는 괞찮으신가요?”
  “아, 죄송해요. 갑자기 이런 일이 생겨서.”
  “아니에요. 당연히 할아버지께 가셔야죠. 그런데 어제까지도 건강하시던 분이 어떻게?”
  “흑흑...”
  한시애는 더 이상 말을 있지 못했다. 이렇게 남자의 보호본능을 자극해대는 데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시애씨, 거기 어디병원입니까?”
  “에? 오시게요?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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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만필씨를 만나러 왔는 데요.”
  “601호실입니다.”
  “감사합니다.”
    여기는 ??병원 601호실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한시애씨 할아버지께서 입원해계시는 병실의 문 앞이다. 분명 이 손잡이만 열면 들어갈 수 있을 테지만 어째서인지 사내한명이 문 앞에서 서성이며 들어가기를 망설여하고 있었다. 자신의 빈 오른손을 쳐다보기도 하고 계속 주머니를 뒤져보기도 하는 등 이해 못할 행동을 반복하면서 말이다.
  ‘대체 너는 무슨 배짱으로 병문안에 빈손에 빈 지갑으로 온 거냔 말이다!’
  보통 사람이 살면서 뭔가를 할 때 생각을 많이 하고 해야 하는 것과 생각 없이 일단 부딪쳐야 하는 것 두 가지가 있다. 시험지의 답안지를 작성할 때 잘 생각이 안난다고 무작정 찍지 말고 골똘히 생각해보고 풀어야한다.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한테 고백할 때는 절대 생각을 많이 해서는 안 된다. 일단 부딪쳐야하는 것들은 이런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역시 나는 일단 부딪쳐야하는 것이다. 병실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나는 ‘잠깐’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뭔가 빠트린 것은 없는 지 점검하였다. 하지만 점검이든 뭐든 결국 시간을 끌려고 하는 핑계일 뿐이다. 거기다가 과일이나 꽃도 안사오고 거기다가 실수로 돈을 택시비 정도 밖에 안 가지고 왔다는 쓸만한 건수를 잡았기에 나는 계속 서성이고 있는 것이다. 나 스스로도 답답했지만 선뜻 문을 열기가 무서웠다. 하지만 온다고 말해놓고 안 가는 것도 이상한데. 나는 결국 갈색의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하였다. 그런데
  “툭.”
  “응?”
  뭔가 심각하게 불안한 효과음과 함께 내 손에는 갈색의 무엇인가가 ‘들려’있었다.
  ‘하하, 이거 절대 문손잡이 아니지? 그치? 나도 참. 긴장한 나머지 헛것이 다보이네. 손잡이를 돌린다고 빠질 리가 없잖아. 하하하’
  “그럼... 이건 뭐지?”
  다리에 힘이 풀리고 의식은 희미해져가는 내 몸뚱이는 여기 내버려두고 영혼만 빠져나와 쥐구멍에서 이불이라고 덮고 웅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덜컥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어? 진짜 오셨네요. 그런데... 그건?”
  나는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심호흡 한번하고 손잡이를 돌렸는데 생생한 효과음과 함께 빠져 제 손에 들리게 된 겁니다.’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휙 던져버리고 병실로 들어섰다.
  “하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절~대로 아무것도 아니니까 잊어버리세요. 그보다 관장님께서는 어떠신가요?”
  “그건 골빈 20대 젊은 놈이 걱정할 게 아닐 세......”
  “에?”
  “라고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래요.”
  거 되게 유머감각 있으신 노인일 세. 곧 죽어도 나한테는 20세기 골빈 젊은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여과 없이’ 말하겠네. 누구는 자기 걱정해서(어느 정도는 걱정했으니까) 병문안까지(선물도 없이 빈털터리로) 왔는데 너무도 뜨겁게 맞아주셔서 타버릴 것만 같다.
  “농담이에요.”
  “......허허, 이젠 저도 지쳤습니다.”
  나는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한시애는 일일이 변하는 나의 표정에 흥미가 생겨 기분이 약간은 낳아진 듯싶었다. 하지만 재차 병세에 대한 말을 물어보자 금방 안색이 안 좋아졌다. 그리고 한시애는 병실을 나서며 말했다.
  “잠깐 나갈까요?”
  병원에 안에 있는 뜰을 걸으며 한시애가 말했다.
  “의사선생님께서 MRI검사에서 일단 뇌종양으로 판명이 났다고 하셨는데. 저는 너무 놀라서 울음이 나오는 걸 참다가 지환씨 전화가 와서 받으니까 결국 울어버렸어요. 그 때는 정말 입만 열면 울 것 같은 기분이었거든요.”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전화한 것 같네요.”
  “아니에요. 그리고 아직 악성인지 양성인지는 모르니까 조직검사를 받아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시간이 일, 이주 걸린다는 데 역시 그 때까지 미술관을 닫아야 갰네요. 아무래도 계속 할아버지간호를 해야 제가 안심이 될 것 같거든요.”
  “저... 그럼. 제가 그동안 미술관가이드를 하고 있으면 어떨...까요?”
  “예? 하...하지만 그건 너무...”
  아, 역시 내가 좀 성급했나보나. 아무리 봐도 이건 과잉친절이니. 이러다가 이상한 사람 취급받는 거 아니야? 한술 더 떠서 나보고 변태라고 생각한다던가... 으으으
  “하지만 저도 지환씨에게 부탁하려다가 무리인 것 같아서 그만 두었거든요.”
  “전 괜찮습니다. 다만 오히려 제가 주제넘은 짓 같아서 걱정했었습니다.”
  “주제넘은 짓 같은 면 하지를 말아!”
  간신히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던 병실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두말할 것도 없이 관장님이셨다. 이분은 뭐 뇌종양이든 뭐든 간에 목소리하나는 역시 열정적(?)이시다. 하지만 깨어나셨으니 다행이다.(어떤 의미로는 방해꾼의 부활일지도)
  “할아버지!”
   “시애야, 내가 어떻게 된 거니?”
  “할아버지께서 갑자기 쓰러지셔서 여기 실려오셨는데. 저...저는 다시는 할아버지께서 안 깨어나시는 줄 알고. 흑흑”
  “미안하다. 하지만 이제 다시는 안 쓰러질 테니 걱정 말거라.”
   관장님께서는 오른손으로는 시애씨를 토닥이시고 왼손을 들어 검지로 나를 가리키셨다. 그리고
  “저 녀석만 없다면 애초에 쓰러질 일도 없었어. 그러니까 저런 놈은 이 할애비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가까이 하지 말거라.”
  “에? 하지만 지환씨도 좋은 사람이에요. 전에도 대신 가이드를 해주셨고 이렇게 병원에 달려오시고 또 할아버지 검사가 끝날 동안 미술관도 대신 맡아주신다고 하고.”
  “시애야, 넌 너무 순진해. 순수한건 좋지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역시 이 할애비 없이는 안 되겠구나. 잘 들어라. 일단 남자는 이 할애비 빼고는 모두가 늑대라고 생각해야 한단다. 혹시라도 1억분의 1의 확률로 늑대가 아닌 남자가 있더라도 나머지 9999만9999마리의 늑대를 피하게 되는 것이니 역시 늑대라고 생각하거라. 다시 말해 저 녀석은 그냥 인간성이 좋아서가 아니라 단순히 네가 여자고 예뻐서 호의를 베푸는 것이란 말이다.”
  관장님, 손녀딸을 무슨 비구니라도 만드실 생각이신 겁니까. 거기다가 은근슬쩍 자기는 9999만9999마리의 늑대에서 1억분의 1의 카테고리로 이동시키기까지 하시다니. 그건 그렇고 저러다가 정말로 시애씨가 세뇌당하는 건 아닌지. 걱정을 안 하려야 안할 수가 없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 있어봤자 반박할 수 있을 리는 만무하고 좋은 말 듣기는 더욱 희박하니 그냥 빠지는 게 중간이라도 가는 방법이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관장님께서도 몸조리 잘하십시오.”
  “안녕히 가세요.”
  “저 녀석 목소리를 들으니 다시 머리가 아파지네.”
끈질긴 관장님을 뒤로하며 병실을 나온 뒤 나는 바로 병원을 나가지 않고 병원 2층의 한 진료실을 찾았다.
  “어? 네가 여기는 웬일이냐?”  “웬일이긴, 병원 들린 김에 잘난 친구 얼굴 좀 보려고 왔다.”
  “왜? 겉은 멀정한데. 무슨 병이라도 걸렸냐?”
  “아니, 아는 사람의 할아버지가 쓰러지셔서. 병문안 왔었어.”
  “그랬냐? 야~ 그런데 이거 얼마만이야? 너도 꽤 변했다.”
  “얼마만이긴 겨우 한 달 만인데. 내가 아직도 고등학생인줄 아냐? 한 달 만에 괄목상대할 만큼 변하게?”
  “치, 아무리 그래도 친구 농담도 못 받아 주냐?”
  “응.”
  빠직!
  어디선가 이성의 끈이 얼마나 질긴지 시험당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이 녀석은 내 고등학교 동창인 녀석인데 원래부터가 공부하나는 잘하던 놈이라 의사든 변호사든 ‘사’자는 꼭 붙을 것 같은 놈이었다. 내가 이 녀석에게 온건 관장님 담당의사 이름에 이 녀석 이름 석자가 적혀 있기에 자세히 좀 물어보려고 들린 것이다.
  “이번에 한만필이라는 어떤 할아버지께서 뇌종양으로 쓰러지셔서 온 적 있지?”
  “그럴걸? 근데 왜?”
  “아까 내가 말한 할아버지가 그분이시거든. 어떤 상태이신지 자세히 좀 말해줄래?”
  “잠깐만. 어디보자... 한만필이라 한만필... 여깄다.”
  “어디줘봐.”
  나는 얼른 그녀석이 들고 있던 서류를 뺏어들었다. 그런데 그곳은 처음 보는 꼬부랑말들뿐이었다. 원래부터가 따뜻한 물이라던가 가위 같은 것도 괜히 어려운 영어를 쓴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건 뭐 영어반 한글반이라 도저히 해석 불가능의 경지였다. 나의 굳어있는 표정을 본 녀석은 슬며시 내 손에서 서류를 다시 회수하였다. 그리고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최대한 아니꼬운 말투로 설명했다.
  “최~대한 쉽게 설명할 테니까 잘 따라와라. 에헴! 이 환자는 처음에 실신한 상태로 응급실로 왔는데 검사결과 뇌종양으로 나왔어. 여기서는 MRI를 써서 검사했는데 아차, 넌 이런 거 모르지? 그럼 이건 스킵하고 이제 조직검사를 해서 이게 악성인지 양성인지... 쉽게 말해서 나쁜 놈인지 아니면 별 영향을 끼치지 않는 놈인지 살짝 때다가 검사하는 거야. 어때 이해됬어?”  “다 들은 내용이거든요? 그리고 나도 MRI라던가 조직검사라던가 악성이라던가 다 안다고 이 놈아.”
  “그래, 그래 알았어. 그런데 이 할아버지에게 관심을 가지는 걸 보니 너 역시......”
  “역시 뭐?”
  “그... 이름이 뭐더라? 아! 맞아. 한시애!”
  “시애씨가 뭘?”
  “호~ 벌써 시애씨~까지 간 건가? 후후, 그건 그렇고 너 할 거면 빨리해야 한다.”
  “하긴 뭘 한다고......”
  “그렇게 방심하다가 다른 녀석한테 선수당하는 수가 있단다. 특히 이 병원에서는 노리는 사람들이 많아. 응급실에 실려 왔을 때만 해도 그 아프다고 소리치던 응급실이 2/1정도로 조용해지고 밥 먹고 사람만 고치던 놈들이 연달아 실수를 하지를 않나 아주 난리였다고 여기까지 다 퍼졌다니까? 특히 2/1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안녕히 계십시오.”
  “어? 야야~!”
  잊고 있었다. 이 녀석 예전에 우리사이에서 ‘연애박사’로 통하던 놈이었다. 특별히 어디가 잘생긴 것도 아닌데 맨날 여자가 꼬이는 증오(?)의 대상이기도 하였고. 그것보다 내가 하긴 뭘 한다고. 나는 딱히 그런 맘으로......
  ‘다시 말해 저 녀석은 그냥 인간성이 좋아서가 아니라 단순히 네가 여자고 이뻐서 호의를 베푸는 것이란 말이다.’
  저 ‘9999만9999마리의 늑대’에 안 들어가기에 위해서라도 한다. 하면 될거 아니야. 이렇게 생각한 난 발걸음도 힘차게 미.술.관으로 향했다.
  ‘역시 지금은 마음의 준비가.’
 라고 생각한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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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띠리리링 띠리링
  “으~ 뭐지?”
  띠리링 띠리리링
  “으힉! 여보세요!”
  방금 전까지도 미술관 가이드석에 엎드리고 공자님과 면담 중이던(침까지 튀기면서 열성적으로) 나는 갑작스런 전화에 깜짝놀라 일어났다. 전화를 건 것은 그 ‘연애박사’녀석이었는 데 전화를 받자마자 나는 미술관을 잠글 생각도 못하고 밖으로 튀어나갔다. 황급히 택시를 잡고 차안에 타자 오만가지 생각들이 스쳐갔다. 내가 왜 그곳으로 가고 있는 지, 전화로 하면 안 되는 지 등이 심각하게 내 머릿속에서 고려되고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나는 이젠 익숙해진 건물에서‘601호’실을 열었다.
  “어? 지환씨 미술관은요?”  다행이 관장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신 것 같았다. 행동하기 직전, 그때야말로 그야말로 사람의 용기가 가장 절실해지는 순간일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정말 왼쪽에는 악마가 오른쪽에는 천사가 있어 나에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나의 악마는 당장 모든 것을 남에게 맡겨버리고 도망치라고 시키고 있는 데 반해 천사는 단지 용기를 내라고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하얀 날개를 잡았다. 아니, 나는 내가 잡은 쪽이 하얀 날개라고 믿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저... 시애씨, 잠깐 할 얘기가 있습니다.”
  “에? 그럼 그냥 여기서 하세요. 중요한 이야기인가요?”
  “잠깐이면 됩니다. 잠깐 나와 주세요.”
  나는 앞장서서 병원복도를 걸어가며 빌었다. 제발 이 복도가 무한공간이어서 영원히 걸어가야하는 곳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도 복도는 짧았다.
  “할 얘기가 뭔가요?”
  “관장님 담당의사가 제 친구입니다. 그런데 그 녀석이 방금 전화로 그러기를 ...성이랍니다.”
  “예? 무슨 성이요?”
  “조직검사결과가 악성...이랍니다. 수술을 해도 성공은 장담 못하고 역시 연세가 있으신지라 수술 자체가 힘들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이 상태로 쭉 가다가는 길어봤자 6개월 안이라고......”
  “...어째서죠?”
  “시애씨 저도 정말 유감인 일입니다. 하지만 이제 할아버님께서 수술을 하실 수 있게 돌봐드리고 씩씩한 모습을 보여드려야지 않겠습니까?”
  “어째서 인거죠?
  나는 그제야 시애씨가 할아버지의 병세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
  “그럼 시애씨 대체 뭐가...”
  “어째서 당신이 저보다도 먼저 알아서 나에게 가르쳐주는 거죠? 당신은 왜 안 좋은 일마다 역어있는 거죠? 왜 당신은 그렇게 저희한테 붙어있는 거냐고요! 정말로 제가 여자고 이뻐서 그런 건가요? 그렇다면 잘 못 보셨네요. 저는 누구와도 사귀지도 결혼하지도 않을 거에요! 흑흑! 이번에 할아버지께서 쓰러진 것도 전부 당신 탓이야! 당신이 할아버지를 죽였어! 죽인 거라고! 흑흑!”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시애씨의 반응에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예부터 사람들이 왜 그렇게 투명인간이 되고 싶어 했는가의 이유를 이런 곳에서 스르르 사라지고 싶은 마음 때문은 아니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그녀가 받은 충격과 슬픔은 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고 거친 것이겠지만 그것을 버텨내기 위해 나에게 화살을 돌릴 줄은 정말 몰랐다. 하지만 나의 얼굴은 나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초조하고 답답하지만 얼굴은 담담하다 못해 무감정에 가까웠다. 아니, 오히려 나의 감정을 표정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그럼, 시애씨. 힘내시기를. 저는 이만”
  나의 담담한 반응에 그녀는 분명 절망과 더욱더 큰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한 발 늦은...
  “으아아아아아!”
  고통이 그녀를 덮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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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에 바보는 두 형태가 있다. 머리의 처리능력이 상대적으로 낮은 형태와 머리의 처리구조가 답이 안나오는 형태. 그 중 나는 후자일 것이다. 혼자서 호감을 품고, 혼자서 호의를 베풀고, 혼자서 점수를 따내고, 이젠 혼자서 사랑하다니. 모든 것이 허망하게만 느껴진다. 내가 걸치고 있는 이 옷조차도 거추장스럽다. 이번엔 정말로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 나의 이 바보적인 구조의 시발점인 이곳에서.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한 가지 소원이 있었다. 그것은 죽기 직전 그 심정을 한 문장으로 써서 남기는 것이다. 어렸을 때는 정말로 낭만적인 소원이라 생각했는데. 이건 이미 낭만적이지 못해졌다. 이런 죽음은 절대 당당한 죽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한 문장’을 남길 것이다.
  나는 천천히 펜을 들어 메모장 한 장을 들어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글씨를 써내려갔다. 어렸을 때부터 악필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이 건 사람들이 잘 알아볼까 걱정이다. 그래서 나는 더욱 명확한 글씨를 쓰기위해 노력했다.   아니 어쩌면 단순히 시간을 끌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메모를 마치자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검은 날개를 잡아갔다. 검은 날개 속에 숨겨진 날카로운 손톱이 나를 찌르려했다. 그런데 그 순간 문이 열리고 누군가 미술관으로 들어왔다. 그 사람은 내가 익히 잘 아는 남자였다.
   “후우~ 집이 이게 뭔 꼴이니? 벽에다가 그림 몇 개 걸어놓고 클래식만 틀어놓으면 그게 미술관이 되는 줄 아니?“
  “하하, 아버지. 이게 어딜 봐서 그림 몇 점입니까? 그리고 저기 보면 조각상도 있잖아요.”
  아버지는 쓴웃음 지으시며 돈 넣는 기계로 다가가셨다. 그리고 그 기계를 가리키며 말하셨다.
  “넌 이게 뭐로 보이냐?”
  “돈 넣는 기계요.”
  “이건 말이다. 정상적인 세계에서는 변기라고 부르는 물건이야.”
  “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게 어딜 봐서......”
  뭔가 이상하다. 저건 분명 돈 넣는 기계인데. 갑자기 변기라니. 그런데 부정할 수가 없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변기라니 분명 논리에 맞지 않다. 변기는 화장실에 있지 미술관에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 대해 부정 할 수가 없었다. 이유도 모른 체.
  “네 자신을 속이지 말란 말이다. 비극 속에서 네가 안주할 곳은 어디에도 없어! 그럼, 너 미술관 2층으로는 올라가 본적은 있겠지?”
  “아니요. 아직 올라가 볼일이 없어서.”
  “왜지? 가이드를 하려면 2층에서도 했어야지. 왜 그곳은 하지 않았을 까? 혹시 하지 못했던 것 아니냐?”
  “아버지? 혹시 술 드셨어요. 갑자기 오셔서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세요. 자, 이렇게 올라가...”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계단은 분명 보이는 데 다가갈 수가 없다. 뭔가에 부딪친 것 같이 계단을 2M나 남겨두고 전진할 수 가 없었다. 사이에 벽이라도 있는 듯이...
  “계단은 무슨. 여기는 너의 집이고 집안에는 계단 따위는 없어! 좋아, 그렇게까지 인정하지 않고 그 안에 있고 싶다면 한번 네가 살고 있는 집으로 가보 거라.”
나는 아무 말도 없이 멍한 눈빛으로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듯이 한 걸음 한걸음 ‘나의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도착은 했다. 분명히 했다. 그러나 너무나도 빨리 도착했다. 평소라면 30분도 넘게 걸리던 거리가 1분도 채 안돼서 나는 ‘나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어느 새 아버지께서 먼저 들어와 계셨다.
  “계단은 봤냐?”
  “계단?”
  “그래, 계단. 네 집은 설정 상으로는 3층일 텐데 어째서 계단은 없을 까?”
  점점 ‘나의 집’이 사라져 갔다. 뿌연 안개가 겉이 듯이. 조금 씩 조금 씩 선명해져가는 이 곳은 ‘나의 집’이 아니었다. 단지 자그마한 ‘방’이었다. 그리고 문 밖에는 ‘미술관’이 있었다......
  “자, 이제 마지막 진실이다. 이 것까지 도망친다면 나는 더 이상 널 그곳에서 꺼내올 수 가없단 말이다. 나도...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아. 차라리 해피엔딩을 선택했으면 좋았을 것을.”
  아버지는 품에서 책 한권을 꺼내어 나에게 던지셨다. 나는 그 책의 표지를 보는 순간 ‘삐-’하는 소리와 함께 사고가 정지하는 것만 같았다. 아무런 생각도 아무런 느낌도 없이 정지버튼을 눌러버린 듯한 착각이 지나고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모든 일이 처리되었다.
  “으아악! 이거 뭐야! 뭐냐고! 이딴 건 뭐냐고!“
  나는 이성을 잃고 책을 북북 찍어 사방에 던져버렸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하지만 인지되는 것은 어느 때보다도 희미했다. 주위를 아무리 보아도 이곳은 방금까지의 내 집이 아니었다. 뒤를 돌아보아도 정말로 그림 몇 점과 클래식이 나오는 거실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도 미술관은 없었다.
  “이건... 대체? 뭐야? 내가 이런 곳에 있는 거지?”
  ‘아버지’라는 남자에게 달려들어 옷을 잡고 흔들었다.   

  “당신 뭐야! 당신 뭐냐고!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새로운 최면 실험이라도 하는 거야? 뭐라고 말좀 해봐!”
  남자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걸 본 나는 잠시 멈춰 섰고 그는 뒤로 돌았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한 가지 질문을 하지. 넌 네가 지금보고 있는 세상을 믿을 수 있나? 이 세상이 정말로 진짜라는 것을 믿을 수 있냐는 말이다. 혹시 말이야. 네가 지금 보고 있는 모든 것이 가짜이지 않을 까? 넌 빵을 먹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네 손을 네가 씹어 먹고 있는 것이라면 넌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까? 아니, 그 전에 어떤 것을 ‘진실’이라고 규정해야 하는 것일까?”
  “으아아아아아아아!”
  나는 천천히 쓰러지고 나의 손아귀에서 검은 날개는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정은성, 이 바보 같은 놈아.”

 

진실이 거짓보다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이상할 것도 없다. 거짓은 반드시 앞뒤가 맞게 만들어지는 법이니까.
-마크 트웨인. 미국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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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 전 내 아들은 참혹한 비극 속의 주인공만큼이나 불행한 일들에게 순식간에 휩싸였다. 제일 처음의 불행은 내 아내가 세상을 뜬 것이었다. 아내는 중학교 때 나쁜 길로 빠져 방황하던 은성이를 헌신적으로 보살펴 결국에는 모두가 기를 쓰고 들어가려는 대학 중 하나인 Y대로 기어코 보낸 은성이를 두 번이나 태어나게 해준 사람이었다. 그 만큼 은성이의 충격은 컸다. 그러나 나에게도 역시 큰 충격이었으므로 은성이를 챙길 만큼 여유롭지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은성이가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가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또 다시 방황하는 것은 아닌 가 걱정했었다. 하지만 결국 2년 뒤 수석졸업을 하고 대기업의 신입사원으로 당당히 들어가자 나는 그것이 기우였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년도 채우지 못하고 그 녀석은 스스로 사표를 내고 회사를 나왔다. 그리고 다시 대학원에 들어간 것이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도저히 참을 수 가 없어 결국 자취집으로 노발대발하며 찾아갔지만 그 녀석은 술에 절어있었다. 애인한테 차였다는 것이었다. 안 들어봐도 무슨 말을 들으면서 차였는지 알 수 있었다. 분명 명문대를 수석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한 은성이는 먹음직스런 먹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사표를 내고 대학원에 들어간 순간 먹이가 부패해버리고만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그 녀석은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다 그만 픽하고 쓰러져버리고 말았다.
  “극심한 스트레스에다가 의지할 곳도 없어 생기는 불안감까지 겹쳐 얼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심각해질 수 있음니다.”
  의사는 이렇게 말했지만 그 녀석은 깨어난 지 1주일이 지날 때까지는 별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녀석은 이미 나사 하나하나가 풀려가고 있었다. 매일 매일 그 녀석은 비극적인 엔딩의 책만을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그 주인공이 된 걸로 착각한 1인극이 시작되었다. 의사는 이에 대해 일깨워주지 않으면 영원히 소설 속에 속박 당할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고 나는 그 녀석의 1인극이 시작될 때마다 무슨 소설인지 알아내어 그 녀석의 환상을 깨트렸다. 그러나 한 번, 한 번 그 녀석의 환상이 깨질 때마다 나와 그 녀석 모두 정신이 붕괴될 것만 같았다. 나는 환상을 깨트리는 게 너무나도 괴로워. 그 녀석은 더 이상 안주할 곳이 사라져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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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칙~ 칙
  한 남자가 베란다에 서서 담배에 불을 붙인다. 불은 담배의 첫 마디를 태우다 연기가 되어 사라진다. 그리고 회색연기는 그 남자의 얼굴에 부딪쳐 갔다. 마치 눈물을 가리기라도 하는 듯이. 집안으로 들어온 그는 울부짖다 못해 지쳐 쓰러진 사내의 옆에 표지만 남아 걸레가 되버린 책을 주워들었다. 제목은
‘작은이들의 미술관’

 “언제까지 넌 내게 악역만을 시킬 거니. 은성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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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너무도 충격을 받았다. 설마 시애씨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변명을 할까? 대체 뭐에 대해 변명을 한다는 말인가? 이제 미술관에도 가지 말아야 하나? 나는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결국은 다시 미술관으로 돌아왔다.
  “흑흑...흑흑흑”
  언제나 시애씨가 엎드려 낮잠을 즐기던 가이드석에 엎드리자 그 동안 참고 있던 슬픔이 물꼬가 터진 둑처럼 막을 틈도 없이 밀려들어왔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스멀스멀 포기의 기운이 고개를 들으려 하였다.
‘그래, 포기해. 그런 말도 들었겠다. 이 상태로 포기하고 다시는 안 만나면 깔끔하게 끝나는 거라고. 솔직히 너 혼자서 호감가지고 너 혼자서 사랑한 거잖아? 포기해봤자 결국은 본전이야.’
 또 하나의 나는 약해져 있는 나를 슬며시 유혹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로 포기하려는 순간 정체모를 따스함이 나의 온몸에 느껴졌다. ‘하늘에서 천사님이라도 내려왔나?’라는 얼토당토 않는 생각을 하며 나는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거기엔 정말로 천사님이 계셨다.
  “지환씨... 울지 마세요.”
  “천사...님?”
  “에?”
  “아...아무것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얼른 나갈게요. 문 잠그러 왔다가 눈에 먼지가 들어와서요.”
  이건 뭔가 주객이 전도 당한 것 같지만 내가 생각해도 이건 변명이라고 하기에도 창피하다.
  “저... 지환씨... 제가 너무 혼란스러워서 그만. 미안해요, 미안해요. 흑흑... 미안해요.. ”
  이건 뭔가 주객이 전도 당한 것 같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방금까지는 내가 그녀의 모성본능을 자극했었지만 이제는 그녀가 나의 보호본능을 너무나도 자극하자 입장이 바뀌었다. 분명히 방금 전까지는 내가 울고 있었는데. 뭔가 억울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안심이 되었다.
  “괜찮아요. 시애씨. 제가 너무 나선 겁니다. 불쾌할만해요.”
  “미안해요. 내가 잘못한 것에요. 미안해요.”
  나는 ‘미안해요.’라는 말 밖에 못하는 그녀를 살며시 안아주며 나의 하얀색 날개를 잡았다.
  1년 뒤, 관장님께서는 다행이도 수술은 성공적으로 마치셨지만 후유증으로 결국 은퇴하시고 미술관은 시애씨가 물려받았다. 그리고 제2의 가이드는 바로 내가 되었다.
  지금은 제 2이의 ‘작은이들의 미술관’을 지으려고 시애씨는 지방에 가있었고 내가 미술관을 대신 보고있었다. 그래서인지 사람수가 적다. 칫. 지금 오랜만에 오신 손님 한분을 가이드하는 중이다. 그런데.
  “에... 이 사과와 물병과 컵은 그러니까.... 그게...뭐랄까...그냥 스킵하죠?”
  역시 정물화는 어렵다.

 

-작은이들의 미술관 Vol.2 happy ending

 

 

끝내는 말
얼마 전에 출판사하고 제 2판 인쇄에 대해 상의하다가 우연히 편집장을 통해 정은성씨의 안타까운 사연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 분은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을 겪으셔서 결국 이상한 병에 걸리셨는데 비극적인 결말의 소설의 주인공이 됐다고 착각하고 1인극을 하는 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 소설의 주인공이 되시는 바람에 자살하실 뻔 하셨지만 은성씨의 아버지께서 직전에 막으셔서 겨우 죽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 이 소설의 제 2판은 Vol.2로 행복한 결말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부디 은성씨께서 이 책을 보시고 병을 이겨내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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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는 XX정신병원 301호실 병실에서 한 환자가 자신의 앞으로 온 소포를 뜯어본다. 그 속에는 제목은 그에게 익숙하지만 표지가 달라진 책 한권이 들어있었다. 빠른 속도로 책을 넘겨보던 그는 끝 부분에 가자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마치 페이지의 글자 하나하나를 음미하듯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책을 덮자 뒷부분에 숨겨져 있던 제 2의 제목인 ‘미술관 로맨스’가 드러났다. 책을 가만히 내려놓고 그는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살짝 그의 입 꼬리가 올라가며 뜨거운 눈물이 그의 눈동자에서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작은이들의 미술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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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선

풍선   "신상품 맛좋아 껌에서 드리는 풍선을 받아가세요!"  볼 근육에 쥐가 날 것 같았지만 그래도 나는 활짝 웃는 얼굴로 추 대신 껌을 매달은 헬륨 풍선을 몰려든 조무래기들에게 나누어 준다. 한껏 볼륨을 올려둔 앰프에서 나오는 쿵작쿵작 시끄러운 음악과 풍선 주세요 라고 고래고래 악을 쓰는 꼬마들의 목소리가 내 고막을 터트려 버릴 것만 같다. 오늘은 주인집 아줌마와 한바탕 하고 나온 터라 더 귀가 아픈 것 같다.   펌프로 긴 풍선을 채우자 꼬마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뽀각뽀각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소리가 났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과감하게 풍선을 이리저리 꼬았다. 어떤 녀석은 귀를 틀어막고 어떤 녀석은 눈을 빛내며 연방 감탄사를 연발했다. 공원을 걸어가던 사람들도 모인다. 하지만, 나는 이 광경을 수백도 더 봤다. 주목을 받아 기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순식간에 강아지 하나가 완성되었다. 꼬마들이 서로 저에게 주라고 난리다. 어떤 녀석은 내가 신은 커다란 신발을 밟기도 했다. 결국, 맨 앞에 있던 삐쩍 마른 녀석이 내 손에서 뺏어갔다. 나는 그 무례함에 순간 화가 났다.  '다른 사람들은 꼬박꼬박 월세 잘만 내는데 어째서 자네만 그렇게 밀리는가? 자꾸 이러면 방을 뺄 수 밖에 없어!'  오늘 집에서 나오는 길에 주인아줌마에게 혼난 것이 또 생각나 화를 내지는 못했다. 예전 동호회에서 잠깐 배운 이런 잔기술로 하는 아르바이트로는 월세를 꼬박꼬박 내는 것은 무리다. 덕분에 나는 거의 매달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주인아줌마의 재촉을 받아야 했다. 그런 날은 온종일 똥이라도 밟은 기분이었다.  꼬마들이 발로 차고 흔들어 대는 통에 누렇게 말라죽어 가는 나무 밑 벤치에 앉아 잠깐 휴식을 취한다. 낡은 벤치는 딱딱해서 불편했지만, 다리가 너무 아파 앉을 수밖에 없다. 거울을 보며 피에로 화장을 고친다. 빨간색으로 웃는 입을 그린다. 두껍게 두껍게 화장을 한다.  음악도 꺼놓았는데 뒤늦게 소문을 들었는지 한 꼬마애가 다가와서 나에게 풍선을 달라고 손을 내민다.   "신상품은 이미지가 생명일세. 절대로 고객을 홀대하지 말게. 그랬다간 바로 이거야."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던 회사직원 떠오른다. 나는 부글부글 끓는 화를 풍선에 불어넣고 새지 않도록 꽁꽁 묶는다. 잊지 않고 껌을 매단다. 꼬마는 풍선을 받아들고 고맙다는 말도 없이 홱 돌아가버렸다.  나는 빨간색 풍선으로 다시 강아지를 만들어 본다. 완성된 강아지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근심도 화도 웃음도 없다. 나도 차라리 표정이 없으면 좋겠다. 나는 무심히 강아지를 땅에 떨어트리고 발로 밟았다. 텅. 별로 크지도 않은 허무한 소리다. 그런데 갑자기 옆에서 우애 앵 하고 우는 소리가 들렸다. 유치원생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애가 큰 소리로 울고 있었다. 아마 풍선을 밟아 터트리는 모습을 보고 놀란 것 같았다. 나는 덜컥 겁이나 최대한 활짝 웃어 보이며 아이를 달랬다. 풍선을 쥐여줘도 소용이 없

  • 時去名
  • 2010-10-12
바이러스

바이러스   뭔 놈의 테레비가 이렇게 재미없는 것만 나오냐. 청년실업이니 이태백이니 이런 얘기만 해쌌네. 청춘은 노느라 바쁘다구. 일할 시간이 없는 건 당연한 것 아니야? 나처럼 말이야. 채널 돌리느라 꺼멓게 때 낀 발가락만 아프네. 이럴 줄 알았으면 리모컨을 벽에 던지지 말 걸 그랬어. 동생 녀석이 적당히 까불어야지. 오, 이 영화 재미있어 보인다. 사람들이 막 피 뿜으면서 죽어가네. 그나저나 배고파 죽겠는데 이 아줌마는 왜 이렇게 안 와.     "엄마! 라면 아직도 멀었어?"   "지금 간다 가. 이 썩을 놈아."   자기가 늦어놓고서 괜히 성질이야. 잠시 뒤에 뽀글머리의 엄마가 쟁반에 라면을 받쳐 들고 주춤주춤 들어왔어. 바닥에 널려 있는 옷가지나 다른 물건에 발이 걸릴까 봐 무서운가 보지. 겁도 많아. 자그만 구식 TV 앞에 누워 있는 내 앞에 라면을 내려놓고는 엄마는 잔소리해댔어. 방 좀 치우고 살아라, 돼지우리만도 못하다, 이젠 방문 앞까지 어지르느냐 등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라도 난 것 같아. 시끄럽긴 해도 20년도 넘게 들어온 것이니까 익숙해. 그냥 들은 척도 안하고 영화를 계속 보고 있으니까 엄마는 제풀에 지쳐서 나가버렸어.   영화에서 사람들이 죽는 건 아무래도 바이러스인 모양이야. 주인공으로 보이는 미남 대학생 녀석이 주절주절 잘난척하고 있어. 바이러스는 반(半)생물이라 숙주에 들어가야만 생물이 된다는 둥 어려운 얘기만 하고 있어. 나도 대학생 때는 잘나갔지. 고등학교 때 공부 조금만 더 했으면 저런 명문대에서 이름을 날렸을 거야. 저 삐쩍 마르고 가슴 큰 미녀는 완전히 주인공에게 넘어간 것 같아. 뭐 나도 저런 여자친구 많았어. 하나도 안 부러워.   밖에서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나네. 아버지가 퇴근했나보군. 그러고 보니 어제 오락실 가느라 돈 다 떨어졌는데. 용돈이나 달라고 해볼까. 거실로 나와서 어슬렁어슬렁 아버지에게 다가갔어. 아버지는 나를 보더니 갑자기 한숨을 푹 쉬더라. 뭐야, 맥 빠지게.     "용돈 떨어졌느냐? 이 빌어먹을 놈아."   완전 귀신이네. 욕먹는 건 익숙하니까 아무렇지도 않아. 아버지가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듯 만 원짜리 몇 장을 휙 던지고는 손을 홰홰 저었어. 나는 얼른 주워들고 다시 방으로 들어왔어. 제길, 라면이 그새 다 불었네. 영화 보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어.   이젠 박사하고 셋이서 우주복 같은 걸 입고 쑥덕거리고 있어. 바이러스는 잘못된 숙주에 들어갔기 때문에 병을 일으키는 것이라나. 그래서 셋이서 올바른 숙주를 찾으러 갈 거라는군. 영감탱이 눈치도 없게 커플 사이에 끼어들기는. 저래선 베드신 보기 힘들겠네. 이거 18세 미만 관람 불가물인데. 쳇, 이래서 늙으면 빨리 죽으라고들 하는 거야. 쓸모없는 녀석은 빨리 사라져 주는 게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것도 모르나.   담배가 떨어졌네. 아버지한테 받은 돈으로 동생보고 좀

  • 時去名
  • 2010-08-25
구원

구원   마당에 쌓인 낙엽을 쓸고 있어야 할 아침부터 마을 사람들이 학교강당에 모여 있다. 강단 위에는 목사가 서서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사람들은 졸린 눈을 비비며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이따금 목사를 올려다보며 빨리 시작하라고 성화인 사람도 있었다. 강당 안이 어느 정도 차자 목사는 마이크를 잡았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비대한 그의 배가 출렁거렸다.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을 들으려고 이렇게 모여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무슨 소리여, 우덜들은 수건하고 스댕냄비 같은 거 준다 길래 온 거여. 목사의 말에 여기저기서 반문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강당에 굴러다니던 담요를 깔고 앉아 있었다. 아마 저번 홍수 때 썼던 물건일 것이다. 갑작스럽게 둑이 터져 많은 집이 속수무책으로 잠겼다. 그래서 얼마 전까지 바로 이곳에서 집을 잃은 사람들이 생활했었다.   목사는 당황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느님을 믿어야만 합니다. 왜 그러냐. 그것은 그래야지만 우리는 구원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맨 앞에 앉아 있던 곱슬머리 아저씨가 물었다. 구원이 뭐여? 집 새로 지워주고 먹을 거 주는 거여? 그때까지 목사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딴짓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목사를 쳐다보았다. 아직도 집에 흙가루가 날리고 성한 가전제품 하나 없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귀가 쫑긋해질 만했다.   목사는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그처럼 터질 듯이 통통한 얼굴도 찡그릴 수 있다는데 약간 놀랐다. 구원이란 것은 그런 시시한 것들이 아닙니다. 그런 속세의 것들은 하느님의 왕국에 가려고 할 때 방해만 되는 것들입니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간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 그 아저씨가 벌떡 일어나 역정을 냈다. 뭐여, 천국에 간다고? 시방 우덜들 다 죽이겠다는 거여? 그리고 집이 시시혀? 그걸 말이라고 혀! 목사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재산을 잃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평생 하느님의 종으로 살았기 때문에 저는 구원을 이미 약속받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뒤로도 목사의 설교는 계속됐다. 하느님을 절대 의심하지 말고 무조건 순종하고 욕심을 버리라는 내용이었다. 홍수 때 어쩌다 운이 교회가 멀쩡했던 것도 계속 들먹였다.   사람들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나 역시 목사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이번 홍수피해 때 깨달았다. 그 어디에도 구원은 없다는 것을. 키우던 돼지가 깡그리 다 쓸려나간 사람, 추수해야 하는 시기에 쑥대밭이 된 논 옆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들 곁에는 신은 없었다. 자원봉사자들이나 군인들도 잠깐이었다. 전 국민이 모았다던 기부금도 어째 보이질 않았다. 모두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구원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사는 이제 천국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신 나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사람들은 목사와

  • 時去名
  • 2010-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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