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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 작성자 이바
  • 작성일 2007-11-13
  • 조회수 106

 

 

 

 

  내 소설의 등장인물은 비빔밥을 먹기 위해 국경을 넘어 전주에 도착했다. 그는 세계 곳곳의 전통음식들을 먹으러 돌아다니는 것을 삶의 낙으로 삼는, 돈과 시간이 남아도는 미국인이었다. 패리스 힐튼의 광팬이기도 한 그는, 얼마 전 방한한 그녀가 “비빔밥의 맛을 잊을 수가 없어요” 라고 한 것을 잊을 수가 없었다. 힐튼의 그 말을 전해들은 그날 이후부터 한국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한 그의 이름은, 다름 아닌 밥(Bob)이었다.


  밥은 택시에 올라탔다. 운전기사는 외국인 손님의 등장에 당황한 눈치였다. 기사는 자신의 영어 실력을 총동원해 물었다.

  웨, 웨얼 알 유 고잉?

  밥 역시 자신의 한국어 실력을 최대한 발휘해 대답했다.

  비, 비빔빱.

  아, 비빔밥 먹으러 한국에 오셨어요? 기사가 되물었다. 물론 한국어로. 밥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쌩크 유.


  밥은 택시비를 지불하고 차에서 내렸다. 겉보기에 누추하고 허름한 건물 앞에서였다. 택시 안에서, 기사는 이런저런 말들을 밥에게 늘어놓았었다. 전주비빔밥이 세계 최고다, 서울에 있는 전주비빔밥은 사실 서울비빔밥이다, 비빔밥은 정력에도 좋단다 등. 물론 한국어로. 지금 가고 있는 식당이 자신의 누이들이 일하고 있는 곳이란 말은 하지 않았다. 어쨌든 택시는 목적지에 도착했고, 밥은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내밀며 기사에게 말했다.

  쌩크 유.


  내 소설의 등장인물 밥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듯 문이 삐걱댔다. 과연, 전통과 역사가 깊은 집답게 겉과 속이 같았다. 즉 실내는 누추하고 허름했다. 밥은 제일 구석진 자리에 가서 앉았다. 파리채를 들고 TV를 보던 아주머니는 밥을 보고는 벌떡 일어나더니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녀는 눈이 동그래진 채 물었다. 뭐 먹을 거냐고. 그렇잖아도 한국말에 익숙하지 않은 밥에게 전라도 사투리는 외계어나 다름없었다. 어쨌든 밥은 대답했다.

  비빔빱 플리즈.


  밥의 앞으로 상이 차려졌다. 역시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할 것 같은 수저와, 밑반찬들. 여전히 동그란 눈을 한 채로 반찬그릇을 나르던 아주머니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알아 듣지 못한 밥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갸우뚱하자, 아주머니도 덩달아 웃음을 터뜨렸다. 웃으며 다시 물었다. 어디서 왔냐고. 끝내 알아듣지 못한 밥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오케이, 오케이.

  아주머니는 주방에 들어가서, 비빔밥에 들어갈 계란후라이를 부치던 자신의 여동생에게 물었다. 오케이란 나라가 있었느냐고. 여동생은 후라이를 뒤집으며 대답했다. 아니, 언니는 그런 것도 모르느냐고.

  그러는 사이 계란이 익었다.

 

  밥의 얼굴 위로 미소가 번졌다. 계란후라이의 노른자만큼이나 환하고 밝은 미소였다. 밥은 숟가락을 든 채 아주머니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주머니는 밥에게 다가와 숟가락을 뺏어들더니 밥을 비비는 시늉을 해보였다. 밥은 고개를 끄덕이며, 쌩크 유, 밥을 비비기 시작했다. 워낙 세계 이곳저곳을 돌아다녀 본 밥이었기에 숟가락질은 능숙해보였다. 비비는 와중에 나물과 밥풀을 좀 흘리긴 했지만, 어쨌든. 고추장과 계란과 나물과 밥이 모두 섞이자, 밥은 밥을 그만 비볐다. 대접에서 올라오는, 자신의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를 음미했다. 침이 고였다. 밥은 한 숟갈을 크게 퍼 한입에 집어넣었다. 비로소 전주의 비빔밥이 미국인의 입에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이상, 비빔밥을 먹기 위해 국경을 넘어 전주에 간 등장인물이, 비빔밥을 먹게 된 이야기였다.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쓴 뒤 난 펜을 내려놓았다. 어깨가 뻐근하고 눈이 피로했다.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다. 난 의자에서 일어났다. 우두둑, 기지개를 한번 켜고 방문을 열며 말했다.

  “엄마, 밥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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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수 AKA 푸마크웨랑가 AKA 탈

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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