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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꽃

  • 작성자 칸셀르
  • 작성일 2007-12-23
  • 조회수 641

 

진달래 꽃


- 우연은 인연을 만나 운명으로 변했답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 김소월 , 진달래꽃




“아앗! 안돼!”

또 다시 나는 허무하게 죽어버렸다. 지금 나는 마침 소일거리도 없었던 참에 동네의 구석에 있는 후미진 오락실에서 오락을 즐기고 있었다. 다 큰 처녀가 동네 오락실에서 무엇을 하고 있냐, 하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지만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나이 20세에 대학도 떨어져 4년이나 빨리 백조로 전직해 놀고 있으니까.

나는 아쉬워하며 청자켓의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주머니에서 차가운 금속이 만져졌다. 핸드백, 명품 핸드백과 명품 지갑 같은 고상함은 잊어 버린지 오래다. 백조는 고상하고 아름답지만 배고픈 백조는 배부른 오리만 못하거든. 나는 조그마한 100원짜리 동전에도 고마워하며 그것을 서바이벌 총싸움 게임기에 집어넣었다.

“에잇! 왜 이리 안 되는거야?”

게임이 잘 안 풀리는 것에 화를 내며 나는 신경질적으로 총을 잡았다.

“그렇게 하니까 당연히 안 되는거죠. 이리 줘보세요.”

내 옆에서 남자의 목소리지만은 그다지 굵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깜짝 놀랐고, 또 이런 곳에서 나 혼자 게임하고 있었다는 게 무슨 치부를 들킨 것만 같아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 남자, 나하고 같은 또래인 것 같은 그 청년이 내게서 총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상당히 멋있게 쏘는 것이었다.

“이런거는 아가씨처럼 많이 쏜다고 되는게 아니라구요. 천천히 쏘더라도 한 발 한 발을 맞춰야 해요.”

그 청년은 말을 하면서도 총을 척척 잘 쏘고 있었다. 그렇게 선전하던 청년도 계속은 무리였는지 결국에는 죽고 말았다.

“아!”

나는 조그맣게 비명을 질렀다. 너무 화면에만 몰입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총을 내려놓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약 178Cm 즈음 되어 보이는 키였다. 그다지 크진 않지만 그의 단발머리 덕분에 돋보이는 귀여운 외모에 그 키는 정말 잘 맞는, 금상첨화랄까.

“에고고, 죽어버렸네요. 숙녀분이 하시던 것이었는데 어떻게 하죠? 흐음.. 괜찮으시다면 저하고 같이 게임하지 않으시겠어요?”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멋쩍은 듯 웃으며 내게 물었다.

“네? 아, 네..”

이렇게 해서 그 청년과 나는 같이 게임을 하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게임을 잘 못했지만 그가 많이 도와주었다. 그렇게 약 10분쯤 재미있게 게임을 즐길 수 있었다.

“아, 여보세요? 에엑? 벌써? 나 지금 오락실에서 게임하고 있었어! 지금 빨리 갈께!”

“아하하, 이를 어쩌죠? 12시에 강의가 시작인데 재미있게 게임하다보니 늦은 것 같네요.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할게요.”

그는 다급히 전화를 받고는 어설피 웃더니 내게 말했다. 12시라는 말에 나는 무심코 시계를 들어 시간을 보았다. 지금 시간은 11시 40분이었다.

“저기.. 지금 11시 40분인데 많이 늦으신 거 아닌가요?”

“네, 늦었네요. 전 이만 가볼게요.”

그는 이 말을 뒤로하고 올 때 만큼이나 갑작스럽고, 또 당황스럽게 오락실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나는 그가 가고나서 더 이상 게임에 흥미를 잃어버려 그만 오락실에서 나와 집으로 향했다.

나는 그 뒤로도 거의 하루에 두 세 번씩 오락실에 갔다. 혹시나 그 청년이 다시 오지 않을까 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 청년은 일주일 채 오지 않았다.

일요일인 오늘,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는 화장을 옅게 칠하고 오락실에 갔다. 여자의 직감이랄까? 오늘은 왠지 그 청년이 오락실에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한 껏 기대에 들떠 오락실의 문을 열었으나 내 기대와는 달리 오락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감도 큰 것일까? 나는 주체할 수 없는 실망감을 뒤로하고 문 밖을 나왔다. 그런데 저 멀리서 그 청년이 오락실로 걸어오는 것이었다. 나는 쏜살같이 오락실로 들어가 서바이벌 총싸움 게임기에 100원을 넣고 게임을 시작했다. 게임을 시작하고 얼마 뒤 그 청년이 오락실에 들어왔다.

“어? 역시 계셨네요! 저기, 우리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어디 가서 차나 마시지 않으실래요?”

나는 차를 마시자는 그의 명백한 데이트 신청에 깜짝 놀라 게임하는 것도 잊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빤히 바라보자 그는 멋쩍은지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에이, 거절하시는 건가요? 나름대로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말씀드린 것이었는데.”

“아뇨, 아뇨! 좋아요! 차 마시러 가요!”

나는 손사래를 치며 말하다가 그만 총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 총의 끝 부분에는 분실을 막기 위해 고무줄이 달려 있었는데 그 고무줄 때문에 총이 다시 내게로 날아오고 있었다.

“꺄악!”

총에 맞을 줄 알았던 내 예상과는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꼬옥 감았던 눈을 조금씩 떴다. 내 앞에는 그 청년이 서 있었고, 그 청년이 총을 잡아준 것이었다.

“조심하셔야죠. 어디 다친 데는 없으세요?”

“아.. 네, 고마워요.”

“하하, 별 말씀을. 이 근처에 제가 좋아하는 찻집이 있는데 거기로 가실래요?”

“네, 좋아요.”

그는 능숙하게 내 허리를 잡아 이끌었다. 지금까지 연애 경험이 전혀 없던지라 숙맥이었던 나는 거부반응이 일어났지만 몸에 힘이 풀려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레이디.”

나는 그의 손길에 이끌려 내가 걸은건지 그가 업고 온 건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이 찻집에 들어갔다. 그 청년이 고른 자리는 매우 경치가 좋은 자리였다. 도심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자리가 그 청년이 잡은 자리였다. 여기는 찻집 이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차보다는 커피가 주 종류였다. 사실 이름도 까페이지만 내 앞에 앉아 메뉴판을 뒤적이고 있는 저 청년만이 찻집이라 부른다.

“음.. 저는 이것으로 주세요.”

“저도 똑같은 것으로 주세요.”

주문을 한 뒤로 약간 어색함이 흘렀다. 그러고보니 우리 둘은 아직 통성명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것을 말하기에는 내 용기가 부족했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 아직 통성명도 하지 않았었네요!”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이 청년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아, 네..”

저 청년이 싫증을 내면 어쩌나 고민이 되었지만 나는 이런 것이 처음이라 어쩔 방법이 없었다.

“그럼 일단 제 소개부터 할게요. 제 이름은 오현석이구요, K대학교 법학과 07학번이에요.”

그는 말을 끝내고 멋쩍게 웃었다. 아마 저 웃음은 그의 천성인 듯 싶었다. 저 웃음은 그의 귀여운 외모를 한 껏 더 살려주고 있었다. 어느새 그에게 푹 빠진 것 같은 나의 모습이 왠지 우스웠다.

“아.. 제 이름은 정말 이상한데..”

나는 그에게 내 이름을 말하기가 무서웠다. 왠지 모르게 비웃을 것만 같은 내 이름이기 때문이다.

“에이.. 그럼 이름을 안 말해 주실 건가요, 설마?”

“...”

“절대 웃거나 하지 않을테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절대 웃거나 하지 않는다는 현석의 말이었지만 나는 그래도 믿음이 가지 않았다.

“정말 비웃지 않으실거죠?”

“네! 이름가지고 장난칠 나이는 훨씬 지났죠. 후훗.”

“제 이름은.. 진달래에요.”

나는 내 이름을 말하고는 눈을 꼬옥 감았다. 왠지 모르게 현석은 내 이름을 듣고 웃고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에?”

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가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감촉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정말 이름이 좋으시네요! 그런데 왜 이름을 말하기 싫어 하셨어요?”

현석이 내 손을 잡고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뭐가 이름이 좋나요.. 봄 한철 피고 마는 꽃 이름인걸요..”

“네에? 에이 설마요, 진달래 꽃은 확실히 봄 한철에만 피지만 그 다음 해에도 다시 살아나는 불사화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불사화... 죽지 않는 꽃이라는 그의 말에 나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제 소개를 다시 하도록 할게요. 제 이름은 진달래이구요, D여대 디자인학과 07학번이에요.”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짓말을 해 버렸다. 대한민국에서도 알아주는 학교인 S대, K대, Y대. 그 중 K대인 것도 모자라 법학과라니. 나는 내가 지원했지만 떨어졌던 과를 급한 김에 말했다.

그 후로도 그와 나는 많은 이야기를 찻집에서 나누고 헤어졌다. 마지막에 서로의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헤어지기 전에 그가 갑작스럽게 말했다.

“저기, 저는 달래씨와 정식으로 사귀고 싶습니다.”

갑자기 그가 큰 소리로 말했기 때문인지 찻집 내의 모든 이목이 우리에게 집중되었다.

“현석씨, 그렇게 크게 말하면 사람들이..”

“더 크게 말씀드릴까요? 저는 달래씨 처음 보았을 때부터 첫눈에 반해버렸습니다! 저랑 사귀어 주세요!”

더욱 더 큰 소리로 현석이 외치자 나는 안절부절할 수밖에 없었다. 찻집의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이 곳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휘파람을 부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가씨! 남자가 저렇게까지 말하면 들어줘야해요!”

“휘이익!”

“사겨라! 사겨라!”

나는 찻집의 이런 분위기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물론 그 청년에게 고백을 받은 것은 정말 좋았지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방법을 못 찾고 있었다.

“달래씨, 지금 결정을 못 내리시겠다면 이렇게 하죠. 내일은 공휴일이니까 달래씨도 휴강이죠? 그럼 내일 오후 4시까지 이 찻집으로 나오신다면 수락하시는 것이고, 나오지 않으신다면 거절하시는 것으로 생각할게요. 아셨죠?”

이렇게 말한 뒤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집에 와서도 도대체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내가 그런 남자에게서 고백을 받다니! 들떠있는 기분을 추스르느라 한참을 잠 못 이루고 애꿎은 베게만 고생시켰다.

나는 오늘따라 자꾸 잠을 설쳤다. 꿈에 현석이 나타나서는 나를 거절하는 악몽이었다. 내가 4시에 찻집으로 갔지만 그 곳에 현석은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는 어디선가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싫다는 그의 목소리. 나 같은 것을 어딜 봐서 좋아하겠냐는 그의 목소리... 나는 비몽사몽간에 침대에서 일어나 샤워를 했다.

약속시간이 점점 가까워 오는 것을 보며 나는 화장대에 앉아 화장을 했다. 화장을 하는 동안 나는 정말로 들떠 있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만나서 고백 받았으니 기분이 안 좋을리 없었다. 나는 수 십가지의 옷을 꺼내 놓고 이것저것 입어보며 즐거워했다. 대학에 떨어진 후로 사는게 사는 것 같지가 않았었는데 지금은 정말로 하나 하나가 너무 즐거웠다.

나는 사춘기의 소녀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을 추스르며 4시가 약간 되기 전에 찻집에 도착했다. 하지만 찻집의 문을 열려는 순간 꿈이 떠올렸다. 내가 오늘 꾸었던 불길한 꿈이 뇌리에 스쳤다. 갑자기 문을 열면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나를 엄습했다. 하지만 열지 않아도 후회할 것 같았기에 나는 문을 열었다.

“아...”

찻집은 시끌벅적했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 내에서 현석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시금, 다시금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나는 눈 앞이 흐려지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가슴이 아팠다. 하긴 내 주제에..

문을 열고 나가려 하는 순간이었다. 내가 문을 열려고 손잡이에 손을 갖다 대려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고, 찻집에 들어서는 것은 현석이었다.

“아하하, 많이 기다리셨어요? 오는 길에 이 꽃이 너무 예뻐서요. 달래씨 드리려고 샀는데.. 늦었다면 죄송합니다.”

현석은 그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내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꽃다발은 너무 예뻤다. 빨강의 장미꽃과 분홍의 이름 모를 꽃이 안개꽃과 어우러져 장관이었다. 꽃을 보고 있자니 아까 간신히 참았던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왜, 왜 그러세요?”

순진무구한 저 인상에 저런 천진난만한 물음이라니, 그를 보자니 즐거워지는 내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꽃, 꽃가루가 눈에 들어갔나봐요.”

이번에도 나는 얕은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했다. 왠지 모르게 그와 함께 있으면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게 된다.

“아, 그래요? 제가 봐드릴게요.”

그는 내 얼굴을 잡더니 갑자기 그의 얼굴을 들이 밀었다.

“에엑? 왜, 왜 그래요?!”

나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그에게 물었다. 가까이서 본 그의 얼굴은 잡티 하나 없이 고운, 한마디로 멋있었다.

“헤에, 눈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거 같아요. 아! 그것보다, 달래씨가 여기에 오신 것은 저랑 사귀어 주신다는거죠?”

“네? 네에..”

그걸 어떻게 직접적으로 말한담, 나는 우물거리며 생각했다.

“아! 그럼 우리 첫 데이트로 영화관에 가는게 어때요? 저한테 마침 영화예매권이 두장이 있거든요.”

“네에, 좋아요.”

마침 다른 생각을 하던 중인 나는 무슨 말인지도 채 모르고 멋대로 답했다.

“혹시 영화 싫어하세요? 영화가 싫으시다면 다른 곳에 갈까요?”

“네? 아, 아니에요! 좋, 좋아해요, 영화!”

“다행이네요. 흐음, 지금이 4시 10분인데.. 영화 상영 시작은..?”

그는 주머니에서 영화 예매표를 꺼내며 중얼거렸다.

“4시 30분이네. 응? 4시 30분? 늦었잖아! 달래씨! 뛰어요!”

그는 내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그의 손은 참 따뜻했다. 그의 손에 비해 내 손은 참 차가웠다. 그래서 내 손을 만져본 친구들은 모두 놀래곤 하였다. 왜 그렇게 손이 차갑냐고. 하지만 낸들 이유를 어찌 알까.

“잠깐만요. 너무 힘들어요...”

나는 가뜩이나 안 좋은 운동신경에 하이힐을 신어 제대로 뛸 수가 없었다.

“아, 잠시만요. 이제 조금만 더 가면 택시를 탈 수 있어요.”

그와 나, 우리는 조금 더 달려서 큰 길가로 나왔다. 거기에서 마침 대기중이던 택시를 타고는 드디어 나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한시름 놓으며 현석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하하하..?”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자 웃으며 아래를 쳐다보았다.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아직도 손을 꼬옥 붙잡고 있었다.

“아! 죄송해요. 너무 급해서 그만..”

“괜찮아요.”

사실 그의 손길이 너무나 좋았긴 했지만 그걸 말할 수는 없었다.

그 뒤로 우리는 택시를 타고 조용히 영화관까지 갔다. 그리고는 한참 재미있다는 트랜스 포머를 보았다. 물론 간신히 4시 30분까지 영화관에 들어올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급한 나머지 팝콘을 사 올만한 여유도 우리에게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팝콘이 없다는 것을 대단히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그와 무언가를 같이 한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행복했다.

트랜스포머의 상영시간은 약 2시간동안이나 되었다. 현석은 영화가 무척 재미있는 듯 영화에 완전히 빠져 있었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물론 영화가 재미 없다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옆에 놔둔 후 영화에 심취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지 말이다. 물론 그런 사람도 있기는 있나본데 말이다. 바로 내 옆에.

“우리, 뭐 먹죠?”

영화관을 나온 후 현석이 내게 물었다.

“네에, 그런데 뭘 먹어야 하나..?”

주위를 둘러보니 이 근처에는 맥도날드, 롯데리아같은 패스트푸드점 밖에 없었다. 그 흔한 김밥천국이니, 충무김밥이니 하는 김밥 체인 전문점도 이 근처에는 없는 것 같았다.

“우리 햄버거 먹죠!”

“네에..?”

햄버거는 살 찌는데.. 하지만 그는 내 말을 긍정의 뜻으로 알았는지 맥도날드로 들어갔다. 마침 이른 저녁무렵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현석은 빅맥 세트와 불고기 버거 세트를 사서 내가 앉아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원래는 빅맥 세트를 두개 시키려던 그였으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너무 클 것 같아서 다른 것으로 바꿨다. 그러고 보니 햄버거도 참 오랜만이다.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는 살찐다는 이유로 패스트푸드를 멀리 했으니, 거의 4년만인가..

“푸훗.”

소스를 입에 묻혀가며 맛있게 햄버거를 먹는 현석의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에? 왜 그러세요?”

놀라는 모습까지 너무 귀여운 것 같다.

“아, 아니에요. 현석씨, 여기에 뭐가 묻었네요.”

나는 내 입술 밑을 손가락으로 집으며 말해주었다. 그랬더니 현석씨는 내가 가르쳐 준 곳의 반대쪽을 닦기 시작했다.

“이제 괜찮나요?”

“풉, 그 반대쪽이에요.”

이 일 뒤로 얼어있었던 우리는 보다 재미있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응? 달래씨, 잠시만요.”

식사를 다 마치고 일어서려는 내게 현석이 다가왔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 하는 나를 바라본 뒤 그는 살짝 미소지으며 내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닦아주는 것이었다.

“달래씨도 여기에 묻어 있었네요.”

그리고는 현석은 앞서 걸어갔다. 멍하니 그의 뒷 모습을 나는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마 내 얼굴은 무척이나 빨갛게 익어 버렸을 것이 분명했다. 아마도 나는 저 남자를 깊이.. 사랑하는 것 같다.

“달래씨? 안오고 뭐하세요?”

“아, 지금 가요.”

우리가 패스트푸드점에서 나왔을 때는 어느새 해가 저물고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우리는 서로 손을 잡고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달래씨는 우리가 만난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세요?”

과연 우리가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일까.. 내가 지겨움을 달래기 위해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고 있다가 현석을 만나게 된 것이 과연 우연일까.

“글쎄요. 현석씨는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아마도 우연이겠죠..? 하지만 그 가벼운 우연이 인연을 만나서 둘이 합쳐져서는 운명이 되었다고 저는 생각해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 된거죠.”

“운명이요..?”

“네, 우연은 인연을 만나 운명으로 변했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만날 수밖에 없던 운명이 아닐까요.”

나는 그 말에 감동받지 않을 수 없었다. 우연은 인연으로 만나 운명으로 변했다는 그의 말….

“와아, 정말 멋진 말이네요.”

나는 진심을 담아 그에게 말했다.

“뭘요, 쑥스럽게요.”

“저기, 여기가 저희 집이에요.”

어느새 현석과 나는 벌써 집에 다다라 있었다. 나는 이제 현석과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지금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했다.

“아… 여기가 달래씨 집이군요.”

“네에. 저는 이만 들어가 볼게요.”

하지만 소망은 소망일 뿐… 그것은 전혀 이루어 질 수 없는 소망일 뿐이다.

“네, 안녕히 가세요.”

그의 인사를 뒤로 한 채, 나는 집으로 들어갔다.


“띠리링.”

전화벨이 울리기에 나는 백에서 핸드폰을 찾아 액정을 보았다. 액정에서는 현석의 전화번호가 떠 있었다.

“여보세요?”

“아, 달래씨, 잘 들어가셨는지 모르겠네요. 걱정이 되어서 전화해 보았어요.”

“아하핫, 현석씨도 참. 집으로 들어간 것까지 확인하고선 잘 들어갔냐고 전화하다니요.”

“하하, 그런가요? 다른 핑계를 준비해야 했었나…?”

“후훗, 그러게요.”

우리는 할 말이 떨어져서 서로 말을 하지 않고 잠시간의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나는 서로 전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아하하, 저는 버스가 오네요. 이만 전화를 끊어야겠어요. 저기 달래씨 ?”

“아 네!”

“내일 혹시 시간 되시나요? 저하고 같이 피크닉이나 가실래요?”

“네 ! 좋아요.”

“그럼 내일 뵙도록 해요.”


우리는 계속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강의를 듣지 않는 시간에는 꼭 둘이 붙어 있었다. 만난 지 벌써 9일이 지났고, 내일은 열흘째 되는 날로 현석과 놀이공원에 가서 데이트를 하기로 약속이 잡혀 있었다. 나는 벌써부터 현석과 에버랜드에서 데이트를 한다는 생각에 들떠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후아암, 지금 잠을 자 둬야 내일 데이트 시간에 맞춰 나갈 수 있을텐데.”

나는 들뜬 기분을 가라앉히며 잠을 청했다.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어젯밤에 알람 소리를 아침 7시로 맞춰 놓았으니 지금 시각은 7시일 것이다.

‘하암, 얼른 씻고 나가야지.’

약속 시간은 9시이니 지금부터 밥 먹고 씻고 화장하고 나가면 시간은 아마 충분할 것이다.


즐거운 시간들. 그와 나와 함께한 아름다운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놀이동산에 도착한 후, 그와 나는 참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청룡열차, 후룸라이드, 범버카 등등…. 그리고 그와 함께 공원의 벤치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은 가는 길에 사갔던 김밥으로 대신했다. 공원에서 먹는 김밥은 간만에 소풍 나온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고, 그와 함께 있어서 그런지 훨씬 더 꿀맛이었다. 현석과 나는 놀이동산에서 해가 질 때까지 함께 웃으며 놀았고, 아쉬움을 달래며 놀이동산을 빠져 나왔다.


어느새 그와 함께했던 하루는 거의 다 지나갔고, 벌써 집 앞에까지 오게 되었다. 현석과 나는 서로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다.

“오늘 재미있으셨나요?”

정적을 깨며, 싱긋 웃으며 묻는 현석.

“아! 네, 정말 재미있었어요. 현석씨는 어떠셨나요?”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재미있었다. 내 생애에 이만큼 즐거웠던 적이 한번도 없었으리라 생각될 만큼… 모든 고민과 스트레스를 잊고서는 정말 즐겁게 놀았던 것이다.

“후훗, 재미있으셨다니 다행이네요.”

“현석씨도 재미있으셨다니 다행이에요.”

그도 재미있었다니 정말 다행이다. 이런 연애가 처음인 나와 함께 하느라 매우 따분했을 걸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

“….”

우리는 다시 조용히 걸었다. 어두운 밤길 아래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었다. 어두운 밤길을 가로등이 쓸쓸히 비추고 있었지만, 가로등의 불빛으로만 어둠을 몰아내기엔 턱 없이 부족했다.

“달래씨….”

“네, 네?”

조용히 상념에 잠기어 길을 걷던 나를 갑자기 부르자, 나는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

가만히 나를 쳐다보며 말을 하지 않는 현석.

“왜 그러시나요?”

“…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진지한 목소리로 묻는 현석.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네에?”

나는 생각지 못한 그의 질문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를 좋아한다. 아니, 이것이 바로 사랑일지도 모른다. 시도 때도 없이 그가 생각나고… 그가 없으면 살아가지 못할 것 같으니까….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냐구요….”

가로등 아래에 멈춰선 채로 그는 내게 재차 물었다. 그나마 환한 가로등 아래에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맑은 눈은 내 눈을 곧바로 직시하고 있었다.

“….”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감성으로는 수 십번 외치고 또 외쳤지만, 내 이성은 그것을 저지하고 있었다.

현석의 얼굴이 내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으읍?!”

현석의 입술이 천천히 내 입술로 덥쳐온다. 따뜻한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내리 눌렀다. 갑작스러운 그의 키스에 나는 몸둘 바를 모르고 있었다. 내 생애의 첫 키스… 그것은 갑작스럽게 내게 찾아온 것이다. 그것은 달콤함과 씁쓸함을 함께 가진 채… 덜 자란 풀 잎사귀와 흡사한 향을 지닌 채 내게 찾아왔다.

그와 입술을 맞추는 동안, 나는 시선을 하늘로 옮겼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흔히 키스할 때 눈을 감는다고 하던가…? 나는 눈을 감지 못하였고, 시선을 하늘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어두운 밤하늘은 별빛이 찬란했다. 나를 위해 기뻐하듯이, 내 사랑을… 위해.

‘우연은 인연을 만나 운명으로 변했답니다.’

갑작스럽게 현석의 말이 떠올랐다. 우연은 인연을 만나 운명으로 변했습니다. 운명…. 그와의 거부할 수 없는 운명….

현석의 입술이 천천히 내 입술에게서 떨어져갔다. 그의 눈동자는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잘 모르는 듯,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아, 미, 미안해요….”

그는 고개를 떨구고는 내게 사과했다. 왜 사과하는 것일까….

‘아뇨, 괜찮아요. 왜 미안하나요? 저는… 좋았는걸요.’

얼굴이 발개진 것을 느끼며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도저히 그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원래 키스란 이렇게 사람을 무안하게 하는 것일까? 지금의 상황은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현석과 나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다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저 모퉁이만 돌면 내 집이 나온다…. 어느새 집에 다다르니 내가 방금 전에 했던 키스가 떠올라 다시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 잘 가요, 달래씨.”

그는 나와 천천히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나는 그의 눈길을 애써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현석씨도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달래씨도 추운데 어서 들어가세요. 전 달래씨 들어가시는거 보고 갈래요.”

그는 현관에 버티어 선 채 고집스럽게 말했다.

“아… 저도 그냥 현석씨 가시는거 보고 들어갈래요.”

서로 먼저 가라고 버티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니 왠지 웃음이 나오는 것 같았다. 살짝 얼굴에 미소를 짓고 현석을 바라보니 그도 얼굴에 웃음기가 만연했다.

“하핫, 저기 그러면 제가 먼저 갈게요.”

“네에. 안녕히 가세요. 오늘 정말 즐거웠고 감사했어요.”

현석은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가면서 손을 흔들었다.

“뭘요, 오히려 제가 더 고맙죠. 어서 들어가세요, 밤공기가 쌀쌀해요.”

“현석씨 가시는 거 보고 들어갈래요.”

들어가라는 현석의 말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그를 바라보며 현관에 서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밤공기는 아주 추웠다.

“달래씨 들어가시려면 제가 빨리 가야겠네요. 좋은 꿈꾸세요.”

그는 말을 마친 뒤, 버스 정류장 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뛰어가던 그는 마지막으로 뒤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고, 나도 손을 흔들어 화답해 주었다. 그의 모습이 저 멀리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나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 들어간 나는 곧장 옷을 벗고 화장실로 향했다. 현석과 같이 있을 때는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행복하다. 하지만 그와 헤어지고 나서는 허무감에 겨워 어쩔 줄 모르게 되는 것이다.

-문자왔어, 문자왔어.

방 안에서 핸드폰 문자 메시지 소리가 들렸다. 나는 옷을 벗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장실에서 뛰쳐나와 핸드폰을 찾았다. 그리고 문자 메시지 내용을 확인하였다.

-달래씨, 오늘 참 즐거웠어요. 다음에도 또 놀러가는 거 어때요?

역시나 현석의 문자 메시지였다. 어느새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던 허무감과 실망감이 말끔히 해소되는 것을 느끼며 그의 문자 메시지에 답장을 했다.

-저도 정말 즐거웠어요. 현석씨와 함께라면 어디든지 좋아요.

-그럼, 이번 주말에 어때요? 같이 영화나 보러 가죠.

영화를 보러 가자는 그의 말에 뛸 듯이 기뻐하는 나.

-물론요! 그럼 그 때 만나기로 해요!

-네! 후훗.

이번 주말에 영화관 앞의 까페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난 뒤, 나는 또 다시 떨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핸드폰을 잡고서 한참이나 서 있어야 했다.


시간은 참으로 빠르게 지나간다.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을 때는 더욱 더 빨리. 빠르게 달려와서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주체하지 못할 빠른 속도로 달려와 있는 자신을 볼 수 있다.

어느새 시간은 흘러 현석과 만나기로 한 날이 되었다. 특별히 할 일이 없는 백조인 나는 집에서 따분하게 그와 만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려야만 했다. 그렇게 기다리다 기다리다, 어느 순간에 그와 만나기로 한 주말이 왔고, 아침에 현석의 메시지를 받은 나는 정말로 기뻤다.


준비를 다 마친 나는 약속시간이 가까워지자 약속장소인 S 까페로 향했다. 영화관 앞에 자리잡고 있는 S 까페는 무척 장사가 잘 되는 곳이었다. 물론 커피가 맛있기도 했지만.

이런 저런 상념을 하다 보니 이미 까페에 도착해 있었다. 시계를 보니 시간은 약 2시 50분. 약속시간보다 약 10분 일찍 온 것이었다. 마땅히 할 일이 없던 나는 화장을 고치기 위해 화장실에 갔다.

“…래, 오늘도 만나기로 했다니까?”

화장실에 가던 나는 어디에선가 귀에 익숙한 소리가 들리는 것을 듣고 귀를 쫑긋하며 소리가 난 곳을 찾기 시작했다.

“응, 하하, 정말 재미있다니까.”

그 목소리는 바로 현석의 목소리였다. 나보다도 빨리 약속장소로 나와있던 그는 화장실에서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서 그에게 달려가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그가 있는 화장실이 남자화장실인 터라 화장실 밖에서 그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어. 진짜 숙맥인가봐. 킥킥, 지난번에 키스하는데 정말 웃겨서 죽는 줄 알았다.”

나는 순간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누구 얘기를 하는 걸까…?

“응, 뭐 재미없어지면 차버려야지. 오래 갖고 놀 만한 년도 아닌걸.”

나는 숨이 막혔다. 그가 하는 말이 누굴 향한 말인지 구분했기 때문이었다.

“킥킥, 그래. 아, 뭐 D 여대 디자인학과? 웃기는 소리. 내가 알아봤는데, 그 학과 명단에 진달래라는 이름은 없더라고. 킥킥, 보나마나 대학 재수생이겠지.”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눈에서 뿌연 안개가 차올랐다. 그 안개는 주체할 수 없이 커져, 밖으로 쏟아져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매정하게 현석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응. 상판은 봐줄 만 하니까 더 가지고 놀다가 버려야겠다. 야, 약속시간 다 되었어. 이만 끊을게.”

나는 흔들리는 다리를 간신히 부여잡고 일어섰다. 현석은 전화통화를 끝낸 뒤, 화장실에서 나올 채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일어서서 흔들리는 발걸음으로 S 까페를 나왔다. 이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 제발 꿈이길 바라면서….

S 까페를 나오니, 영화관 앞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수많은 커플들. 그들은 서로를 깊게 사랑할 것이다. 서로의 가장 안 좋은 모습까지, 서로의 모든 것을 사랑할 것이다. 나는 복받쳐 오르는 서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내가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그는 나를 이용하려고만 했던 것이다. 그냥, 갖고 놀고 버려지는 장난감이었던 것이다.

“전화왔어, 전화왔어-”

전화벨소리가 울렸다. 무심코 핸드폰을 들어 액정을 바라보았다. 액정에는 크게 내사랑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전화를 받지 않고, 벨소리를 숨기기 위해 전화의 스피커 부분을 세게 짓눌렀다.

갈 곳 없이 그냥 가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현석은 내가 사라지자 걱정이 되었는지, 전화도 여러번 했고 문자도 내게 남겼다.

-달래씨, 무슨 일 있나요? 통화가 안되네요….

-오늘 못 나오시나봐요… 걱정되는데 만약 이 문자 보시면 연락주세요.

나는 그 문자를 보자 더욱 더 화가 났다. 가식적인 인간… 나를… 자신의 인형보다도 더 못하게 여겼으면서….

슬프다. 아름다운, 투명한 구슬을 뿌리며 길을 걸어가는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 이 모든 것이 믿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새 나는 한강대교에 다다라 있었다. 한강대교에 서서 푸른 강을 바라보았다. 크고 넓은 강. 그 넓은 강 안에는 내 모든 것이 담겨도 괜찮을 성 싶었다. 내 첫사랑… 비록 그는 거짓이었겠지만… 나에게는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했던 모든 추억까지… 이 모든 것이 담겨도 이 강은 변함없을 것 같았다.

강물은… 푸르렀다.



시간은 언제나 사람을 구원해준다. 물론 시간 때문에 피해를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겠지만, 기본적으로 시간의 역할은 사람들을 구원해주는 역할이다. 인간의 모든 아픔을 시간이 감싸주기 때문이다. 바로 시간만이 인간의 아픔을 감싸줄 수 있다.

더욱이, 사람은 진화한다. 큰 아픔을 겪으면 그 아픔이 무뎌지도록 진화한다. 냉랭한 자연에 대항할 수 있도록 강해지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시간의 역할이다.


“….”

창 밖을 내다보며 나는 사색에 잠겼다. 나는 현석에게 고백을 받았던…, 비록 허울뿐이었던 고백이었지만… 어쨌든 그 고백을 받았던 찻집에 자리잡고 앉아 있었다. 이 자리도 현석과 함께 했던 그 자리였다. 이 자리는 이 주변의 도심이 한 눈에 훤히 보이는 곳이었기에 더욱 좋았다. 물론 많이 쓰라리긴 했지만.

다시 눈앞에 안개가 흐렸다. 뿌옇게 흐린 안개는 쉽사리 걷힐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가까스로 시선을 다시 창가로 옮긴 나는 더욱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

창가의 밖에는 믿을 수 없게도 현석이 있었다. 그의 옆에는… 어떤 여자가 그의 손을 잡고선 자리하고 있었다.

“….”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 그런 상황. 그러한 상황은 안 그래도 절망하던 내게 더욱 더 큰 좌절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나는 떨리는 몸을 겨우 가누고는 천천히 찻집을 빠져나왔다. 그와 마주치는 것이 두려웠다. 더욱 더 슬퍼질까봐…. 더욱 더 좌절할까봐…. 나는 이렇게 힘든데, 그는 전혀 그렇지 않은 듯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기가 두려웠다.

결국 나는 그렇게 한번 더 그를 피해 도망쳤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날 떠나 행복한지, 이젠 그대 아닌지,

그대 바라보며 살아온 내가

그녀 뒤에 가렸는지

사랑 그 아픔이 너무 커, 숨을 쉴 수가 없어

그대 행복하길 빌어줄게요.

내 영혼으로 빌어줄게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내가 떠나 바람이 되어 그대를 맴돌아도

그댄 그녈 사랑하겠지.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어디선가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길 건너편의 화장품가게에서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마야의 진달래 꽃…. 그녀의 역동적인 노래는 내 고막을 잔인하게 후벼 파는 듯 했다.

“아…, 현석씨….”

다시는 부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그 이름을 다시금 말해버렸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에게 다시 사랑받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것이다.

‘밸도 없이….’

밸도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만큼 현석을 사랑한다. 죽을 만큼….


“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찻집을 나와 무작정 현석을 피해 달아나던 나는 찻집 근처의 아이스크림 전문점 BR에 들어갔다.

“…….”

아이스크림 전문점에는 얼핏 보기에도 많아 보이는 아이스크림들이 있었고, 또 아이스크림 케잌도 아주 많았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손님?”

내가 케잌을 보고 아무 말이 없자.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한 소녀는 다시금 내게 물어왔다.

“… 이거 하나 주시…겠어요?”

나는 손가락으로 예뻐 보이는 한 케잌을 지목했다.

“네, 손님. 6호 초코 아이스크림 케잌을 주문하셨습니다. 포장해 드릴동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아르바이트생은 영업용 미소로 내게 웃어준 뒤, 케잌을 포장하기 시작했다.

“저기… 잠시만요. 혹시 메모지가 하나 있나요…?”

“네? 아, 잠시만요. 여기있습니다, 손님.”

아르바이트생이 건네준 메모지를 받아든 나는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이쁘게, 또박 또박 쓰고 싶었지만 눈앞이 흐려 잘 보이지 않는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꽃 모양의 메모지에 눈물자국이 번졌다.


-우연은 인연을 만나 운명으로 변했다죠…. 그 운명을 저는 사랑할거에요. 아마 죽을때까지 못 잊을지도 모르죠…. 정말로 사랑했어요. 우연도… 인연도… 운명도…. 운명으로 변하기 전인 우연도…, 인연도… 아마 모두 사랑할거에요. 변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분명 사랑했을거에요.


“케잌이 얼마죠?”

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1만 6천원입니다.”

“여, 여기요. 죄, 죄송하지만 이 케잌을 이 메모지와 함께 저 옆의 찻집으로 배달해주시면 안되겠나요?”

나는 돈을 치르면서 다급히 말했다.

“네, 네? 그건 좀 곤란합니다만… 손님….”

“제, 제발… 부탁…드려요.”

나는 다시 눈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억제할 수 없었다.

“아, 네! 네! 배, 배달해드릴게요! 울지 마세요, 손님…!”

그녀는 내가 눈물을 보이자 깜짝 놀라면서 배달을 해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아… 고, 고마워요. 이 케잌은 저 찻집에 가시면 어떤 여자와 창가 옆에 앉아있을 한 남자에게 주시면 될 거에요….”

그 말을 마친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서 땅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그 아르바이트생은 다른 아르바이트생과 상의하더니, 케잌을 들고 찻집에 배달하기 위해 문을 열고 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천천히, 힘겹게 일어선 뒤 아이스크림 전문점을 나섰다.

요즘들어 눈에서 눈물샘이 계속 샘솟는지, 지금도 눈에는 안개가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아마 쉽사리 없어지지 않을 성 싶었다. 나는 누가 볼세라 황급히 눈을 훔쳤다.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나는 나직히 읊조렸다.

칸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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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칸셀르
  • 2008-09-20
義士

  ‘가’  딸의 이름과 아들의 이름을 나지막히 부른 뒤, 나는 정신을 잃었다. 어디선가 가린이의 목소리가 들려온 듯 했지만 나는 다시 나락으로 떨어졌다. 3개의 키. 내가 그렇게나 갈망하던 3개의키를 오늘부로 얻게 되었다. 드디어 서울대 의학과를 전공한 뒤, 인턴과정을 마치고 이 강남에서 가장 좋다는 대학병원의 위암 클리닉에 내 진료실을 얻게 되었다. 학창시절부터 끝 없이 갈망 해오던 것을 이제야 얻게 된 것이다. “아, 박석영 과장님. 정말 이렇게 힘을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다, 나는 17살에 서울대의 의예과에 최연소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입학했다. 그리고 23살, 또 최연소 졸업생이라는 명함을 새기며 서울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1년 인턴과정을 거친 뒤 이렇게 대학병원의 위암 클리닉 개인 진료실을 얻은 것이다. “하하, 좋아. 나는 지훈군의 그런 마음자세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지만 너무 사양하는 것도 폐라네. 자네는 우리 병원에도 최연소라는, 아마 앞으로 계속 지워지지 않을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나?” “아차차. 내 정신좀 봐. 우리 병원의 자랑거리인 자네를 보니 말이 많아졌네그려. 자네를 만나러 온 이유는 이것 때문이네.” 나는 의문을 표시하며 그 서류철을 받았다. “나는 이만 가보겠네.” ‘라’ 나중에 다 갚아야 할텐데….갑자기 가슴이 또 다시 아파오기 시작했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는데 입원실 문이 열리며 딸 가린이가 들어왔다. 내가 괜찮다고 하자 정말 좋아하는 가린이의 모습을 보자 아픈 기색을 못보일 것 같았다. 내가 아픈 기색을 보이지 않자 가린이는 나보고 안정을 취하라고 하며 CT촬영 등 정밀검사 결과는 오후에 나온다고 말했다. 나는 아픈 기색을 간신히 억누르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나는 고 1 수학을 예습하다 문득 시간을 보았다. 6시 30분 이었다. 7시에 진료실로 나오라고 했으니 아직 시간은 충분해 보였다. 간호사 언니들이 말하기를 어머니의 담당의사는 정말 대단하신 분이라고 했다. 그인지 그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남자인 것 같았다. 그 의사는 서울대를 최연소로 입학하여 최연소로 졸업했다고 했다. 그리고 1년 동안 인턴과정을 거친 뒤, 역시 이 병원이 개원된지 최초, 최연소로 들어왔다고 했다. 그 의사를 생각하다 곤히 주무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니 참으로 안쓰러웠다. 6~7년 전 아버지와 이혼한 뒤 혼자만의 힘으로 우리들을 키워주신 어머니. 인형 눈 붙이기, 파출부등 고되고 힘든 일을 하시는 어머니의 거친 손을 보니 눈물이 솟았다. 정말 어머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헤헷, 엄마. 이제 의사선생님한테 가야죠.” “세윤이는 여기서 공부하고 있어.” “너는 여기에서 짐들을 지키고 있어야지. 여기에 짐들이 많잖아.” “그럼, 금방 올게. 엄마, 가요.” ‘바’ “박 선생님, 유세영님 오셨습니다. 들여보낼게요.” 후우, 쉽게 생각하자…“안녕하세요.” 나는 시계를 슬쩍 보며 말했다. 시계바늘은 6시 55분을 가르키고 있었다. “네, 링겔 잘 맞고 계시죠?

  • 칸셀르
  • 2007-04-22
주마등

  쏴아아아.  ‘그들에게는 모두 자신을 반겨 주는 가정이 있겠지.’  수아는 갑자기 버스에서 내려 저 다리 밑의 한강으로 뛰어내리고 싶어졌다. 저 세찬 물살은 자신의 고통스러운 추억까지도 모두 휩쓸어갈 것 같았다. 모두 다 떠내려가면 죽으리라…. 그냥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싶었다. 자신을 낳아주었지만 가장 미운 어머니, 새 아버지, 태어남으로 인해 가족의 모든 관심을 얻게 된 윤호라는 이복동생. 그 아기가 태어나자 나는 소외되어 버렸다. 나의 집에서, 나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아무런 영향도 없는…. 그냥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존재감은 없지만…. 윤호를 생각하자 갑자기 마음 깊은 곳에서 살의이 일어났다. 아무 죄도 없지만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려 했다. 하지만 수아는 떠올릴 수가 없었다. 눈이 뿌옇게 흐려져서, 머리가 백짓장처럼 하얘져서 더 이상 생각할 수가 없었다. 비는 더욱 더 많이 내리면서 창문을 때렸다. 더, 더 많이 내렸으면 하고 수아는 바랐다.  묘한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어떤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와 정적을 방해했다. 그리곤, 버스가 커브를 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달랐다. 그에 이어 운전사의 비명소리와 여고생의 비명소리가 뒤를 이었다.  “이봐! 문 열어, 빨리 문 열라ㅡ!”  버스는 물에 잠겼다. 버스가 떨어지는 충격은 확실히 컸다. 사람들은 전부 앞으로 나가떨어졌다. 수아는 별다른 충격을 입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버스 승객들은 다른 것 같았다. 수아가 둘러보니, 거의 다 기절한 것 같았다. 아비규환이었다. 찌그러진 버스의 몸체에 찔려 피가 쏟아지는 사람, 머리를 세게 박아 머리에서 피가 나오는 사람….  내가 14살이던, 2년 전의 일이다. 그 때는 아버지도 살아계셨었다. 우리 가족은 평범한 가정이었다. 나는 학교에 갔다가 돌아오는 중이었다. 친구들과 천천히 집에 오는 도중, 한 친구가 말하였다.  “너희 어머니 맞지? 너희 아버지랑 데이트 나오셨나봐.”  친구들의 의아한 눈빛이 뒤로 있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의 어머니를 뒤쫓아 갔다. 낯선 남자와 어머니는 쇼핑몰로 들어가 음식을 사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본 나는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끼며 비틀비틀 쇼핑몰에서 나왔다. 나오면서 나는 생각했다. 그 남자는 분명 어머니의 친한 친척일 것이라고. 내가 본 적은 없지만 외국에서 살다 왔거나 하는 친한 친척일 것이라고…….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으로 나에게 말씀하셨다.  몇 시간이 흐른 뒤 어머니가 오시자 나는 모르는 척 물어보았다.  “아니, 시장 보고 왔어. 오늘 저녁메뉴는 스테이크란다.”  “아, 네. 저 공부할게요.”  “여보, 밥 먹어요. 수아도 밥 먹으렴.”  어머니께서 웃으시며 물어보셨다. 저 미소 짓는 얼굴.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 칸셀르
  • 2006-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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