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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두 시, 맑스 읽는 소녀

  • 작성자 라이어
  • 작성일 2008-06-22
  • 조회수 417

 지이이잉. 휴대폰 진동 소리가 귀를 울린다. 지예는 눈을 번쩍 떴다. 자신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고 있던 중이였다. 지예는 진동이 멎은 휴대폰의 폴더를 연다. 연수로부터 문자가 한 통 와있다. 새벽두시난지금생존해있음넌? 지예는 액정 속의 검은 글씨들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곧 폴더를 닫는다. 탁ㅡ 경쾌하게 울리는 휴대폰 마찰음이 새벽 두시 지예의 조그마한 방을 가득 메웠다.


 지예는 지금 자신의 삶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 국영수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 것들을 열심히 공부해서 전교 일등으로 안전하게 일등급을 받는 것은 지예 자신의 삶이 한 층 더 윤택해지는 데 결정적 요소가 된다. 지예는 한심한 다른 학생들처럼 왜 공부를 해야 하는가와 같은 근원적 질문에 휩싸이지 않으며 대한민국 교육 시스템에 대한 근거 없는 비방을 하지 않는다. 시간이 아깝기 때문이다. 어차피 제도권을 벗어날 수 없는 이상 그 제도권에 충실히 빠르고 정확하게 적응하여 제도권의 최상위로 올라가야 한다. 지예가 성인이 되어 고등학생 때의 우수한 성적을 바탕으로 제도권을 장악하게 되면, 지예는 그 제도권을 견고하게 다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제도권 안의 삶은 너무도 명료하고 실제적인 것이므로 지예는 그 안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그 안정감을 온전히 소유하기 위해 지예는 새벽 두시, 로그 방정식을 암기하고 현재완료와 미래완료의 차이점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잠에 취한 머리가 멍하다. 지예는 화장실에 가서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한다. 온 몸에 으스스한 냉기가 감돈다. 오늘 계획한 공부를 다 끝내려면 적어도 새벽 세시까지는 견뎌야만 한다. 지예는 다시 방으로 향하며 양 팔을 위로 바짝 올려 스트레칭을 한다. 그래도 온 몸의 찌푸둥한 기운이 사라지지 않는다. 지예는 책상에 앉았다. 풀다만 수열 문제가 눈에 들어온다. 제법 만만한 문제다. 지예는 문제를 풀기 시작한다. 그러나 또 다시 머리가 멍해지고 만다. 문제 위에는 조그맣게 난이도 중이라고 적혀 있다. 모의고사에서든 내신에서든 수학은 언제나 일등급을 받는 지예다. 이따위 문제는 가볍게 풀 수 있다. 지예는 샤프를 쥔 오른손에 힘을 준다.

 

 그 때 다시 휴대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지예는 조금 짜증이 난다. 휴대폰 폴더를 신경질적으로 연다. 또 연수다. 야답문없넹벌써자는거임?ㅋㅋ 지예는 피식 웃었다. 답문을 할까 말까 하다 하지 않기로 한다. 답문을 하면 연수는 지예가 깨어 있다는 것을 알고, 흐려지는 정신 따라 흐려지던 마음을 다시 다잡고 공부하기 시작 할 것이다. 지예는 연수의 문자 속 ㅋㅋ이라는 자음 속에 담긴 안도감을 놓치지 않았다. 친한 친구마저 적으로 돌릴 정도로 팍팍한 지예는 아니지만 적어도 중간고사에서 기말고사에서 모의고사에서는 제로섬 게임을 할 수 밖에 없다. 곧 기말고사다. 지예는 다시 샤프를 쥔 오른손에 힘을 준다. 갑자기 머리가 맑아졌다. 밤을 샐 때 잠은 20분이 고비다. 한참 잠이 오는 20분을 잘 참냐 안 참냐가 그 날 밤을 좌지우지 하는 것이다. 지예는 20분을 잘 견뎌냈다. 지예는 자신이 마냥 뿌듯하다. 다시 수학 문제를 본다. 미적분도 쉬워하는 내가 이딴 수열 때문에 끙끙대? 지예는 정신없이 샤프를 놀리기 시작한다. 지예는 마침내 답을 발견했다. ③번에 빨간펜으로 거칠게 동그라미를 친다.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수학 문제집을 치우고 경제 참고서를 꺼내들 무렵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가 문틈으로 얼굴을 반쯤 내밀고 서있다. 지예는 괜히 미간을 찡그리며 투정을 부려본다. 엄마 나 잠 와서 죽을 거 같아. 엄마는 안 됐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그 뿐이다. 그래도 뭐 어쩌겠니? 남들도 다 그런데. 엄마는 싱긋 웃어 보이곤 다시 문을 닫는다. 밤 늦게 먹으면 다 살로 간다고 음료수 한 잔 주지 않는 엄마다. 그래도뭐어쩌겠니남들도다그런데. 엄마가 나가자 지예는 책상에 얌전히 놓여진 경제 참고서를 편다. 어제 공부한 부분을 대충 훑고, 오늘 공부해야 할 분량을 짐작해본다. 꽤 많다. 그렇지만 경제는 금방금방 끝난다. 지예는 필통에서 분홍색 파랑색 주황색 형광펜과 검은색 볼펜 그리고 샤프 펜슬과 지우개를 꺼냈다.

 

 지예는 미국의 경제 공황 이후 발생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차이점에 대해 공부한다. 사회주의는 분홍색 형광펜으로 표시하고 자본주의는 주황색 형광펜으로 표시한다. 그리고 펜으로 밑줄을 긋기 시작한다. 사회주의의 창시자 칼 마르크스는 사회 갈등 론에 입각하여 지배 계층의 부당한 착취에 대해ㅡ 지예는 밑줄을 긋다 말고 다시 앞으로 돌아가 마르크스 라는 고유 명사에 동그라미를 몇 개 더 친다. 지예는 마르크스와 맑스의 차이점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예는 맑스를 좋아하지만 마르크스는 싫어한다. 지예의 이모는 술만 먹으면 자신이 대학교에 다닐 때 마르크스 걸이였다는 둥 하는 얘기를 주절주절 놓는다. 그렇다. 마르크스는 삶에 찌든 채로 그다지 매혹적이지 않은 미래를 향해 이유도 모르고 그러나 여전히 비칠비칠 걸어가는 어른들이 자신의 과거를 미화할 때 종종 등장하는 인물인 것이다. 그러나 맑스는 다르다. 발음하기도 어려운 맑스. 지예는 논술 선생님과 대화할 때 종종 맑스를 읽었다는 표현을 쓴다. 그 때 논술 선생님의 반짝이는 눈빛이란. 지예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맑스를 알고 맑스를 읽으며 맑스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지예는 오른손으로 머리를 툭 친다. 잡생각에 빠진 것이다. 마르크스든 맑스든 나중에 생각하면 된다. 굳이 새벽 두 시에 그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지예는 다시 참고서를 읽기 시작한다. 참고서는 이제 자본주의의 장단점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사상가는 아담 스미스이며 그는 정육점 주인이든 구두장이든 사회 구성원이 개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손의 인도를 통해 사회 전체의 이익을 도모한다고 했다. 지예는 아담 스미스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아담 스미스 추종자들은 맑스 추종자들과는 달리 현대적으로 보인다. 그들은 매혹적이다. 저녁 식사에 와인 한 잔 쯤 곁들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담 스미스를 읽지 않을까 하고 지예는 생각한다. 그리고 지예는 소리내서 말해본다. 나는아담스미스를읽어. 무엇무엇을 읽어ㅡ라는 평범한 문장의 무엇무엇에 당대 사상가들의 이름을 집어넣으면 그 문장은 곧 말하는 이의 지성을 재는 척도가 된다. 지예는 신경질적으로 다시 머리를 툭 친다. 자꾸 생각이 딴 쪽으로 새고 있다. 다른 과목들도 마찬가지지만 무엇보다 사탐이야 말로 요령보다는 한 번 할 때 집중하고 열심히 해서 두 번 반복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지예는 펜 뚜껑 끝을 앞니로 살짝 깨문다. 마음이 자꾸 초조해진다. 지예는 시계를 본다. 아직 두시 삼십분이다. 시간은 많다. 지예는 참고서를 접고 문제집을 꺼낸다. '1등급을 위한 바이블'이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붙어 있는 경제 문제집이다.

 

 지예는 문제를 풀기 시작한다. 사탐정도는 국영수의 곁다리다. 국영수의 반짝반짝 빛나는 탁월한 일등급들 아래에서 단단하게 밑받침이 되어 주어야 한다. 지예는 모의고사 일회 분량의 문제를 풀고, 채점을 시작한다. 동그라미의 향연이다. 지예의 손길이 빨라지나 싶더니 갑자기 멈춘다. 틀린 문제가 하나 있다. 지예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지예는 답지를 꺼낸다. 휴. 지예는 조그맣게 한숨을 쉰다. 오지선다형 문제에서 두 개의 답을 요구 했는데 지예는 하나만 체크 한 것이다. 몰라서 틀린 것보다는 낫지만, 수능에서도 이런 실수를 하면 어쩔거야. 지예는 스스로를 자책한다. 그리고 19번 문제에 조그맣게 틀렸다는 표시를 한다. 그리고 지예는 19번 문제 위에 써놓았다. 문제확실히잘읽을것. 50점 만점에 지예는 48점을 받았다.

 

 계획했던 공부를 모두 끝냈다. 지예는 빨간색 펜으로 스케줄러에 적혀 있는 공부 일정에 모두 동그라미 표시를 한다. 만족스럽다. 지예는 스케줄러에 내일해야 할 공부를 적기 시작한다. 수학 모의고사 일회분 문제 풀이, ebs 영어 듣기 2회, 내신 복습, 근현대사 문제집 3단원 오답 풀이, 언어 파트별로 지문 두 개씩. 지예는 스케줄러를 덮는다. 그리고 책상 위에 너저분하게 널려져 있던 필기도구와 참고서, 연습장들을 차곡차곡 정리하기 시작했다. 지우개 가루를 쓸어 모으고, 책들은 얌전히 가방에 넣는다. 그 중에서 내일 아침 스쿨버스 안에서 봐야할 경제 문제집의 미니 핵심 노트는 책상 위에 미리 챙겨 놓았다. 그리고 스탠드를 끈다.

 

 지이이잉. 또 다시 휴대폰이 진동 한다. 지예는 베개 옆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이번엔 연수가 아니다. 작년에 같은 반이였던 친구 은별이다. 엄마한테열두시에깨워라고햇는데이제깨웟서.아놔ㅡㅡ짱나죽겟다.오늘밤새야대ㅠㅠ 지예는 휴대폰 액정 오른쪽 상단 끄트머리에 찍힌 시간을 본다. 2:54a.mㅡ 지예는 하품을 한다. 그리고 빠른 손놀림으로 은별에게 답문을 하기 시작한다. 야나는자다가지금니문자봤거덩! 지예는 오전 6시 10분으로 예약 문자 설정을 해놓았다. 그리고 문자를 두 통이나 연속으로 무시 당한 연수에게도 같은 문자를 한다.

 

 지예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쓴다. 이제야 온전한 밤이다. 지예는 조금 뒤척이더니 곧 시체처럼 숨죽인 채 잠이 들었다.

라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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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이어
  • 2008-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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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이어
  • 2008-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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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이어
  • 2008-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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